중저음 보컬이 매력적인 장현.
70년대 초반 '신중현 사단'의 위력은 대단했다. 펄시스터즈와 김추자 등의 사이키델릭 록 , 박인수의 소울 스타일,그리고 장현의 보사노사 풍까지 다양한 장르를 구사했다.
특히 장현은 이국적인 보사노바 리듬과 귀에 잘들어오는 멜로디가 특징이었는데 '미련'은 신중현의 수많은 작품들중에서도 대표작으로 손꼽을 만큼 멜로디가 매우 좋은 곡이다.
호텔나이트에서 무명의 가수 생활을 하던 장현은 신중현이 대구의 방송국에 출연차 갔다가 눈에 띄어 신중현사단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장현은 스타덤에 오른 뒤 종적을 감춰 신중현에게 깊은 배신감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신중현이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나의 이력서' 를 보면 잘 알수있다.
박인수가 떠났다. 한 번도 뒤를 돌아 볼 생각을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 때 머리에 떠오른 사람이 장현이었다. 그는 대구 수성관광호텔에서 간부로 일한다며 언제 한 번 놀러 오라고 했었다. 1970년 그를 찾아 대구로 내려갔다. 반갑게 맞아 준 그는 대통령이 오면 쓴다는 제일 큰 방을 거저 내줬다. 머리 식히며 곡도 쓸 겸 한 일주일 푹 쉬라는 말과 함께.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서울에 오면 취입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노래를 주었다. ‘기다려주오’였다. 이후 ‘나는 너를’, ‘미련’ 등 석장의 음반을 아무런 대가 없이 내주었다. 그 무렵 장현은 내 사무실에 와 살다시피 했다. 그의 히트 곡은 ‘석양’과 ‘미련’이다. 두 곡 모두 장현이 처음 불러 히트 시킨 것으로 알기 쉬우나 원래는 임아영이 한 해 전에 먼저 불렀던 곡이다. 그러나 빛을 보지 못 해 두 곡을 히트시킬 가수를 찾고 있던 내게 때마침 장현이 온 것이다. 장현은 나를 끈기 있게 따라다녔다. 그리곤 석장의 판을 내고 난 어느날 말없이 떠났다. 음악적 깊이가 별로 없던 그가 한 순간에 ‘스타’로 뜬 후 연락을 끊어버리자 배신감 때문에 가수를 상대하기가 싫었다. 장현을 떠올리면 아직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수성관광호텔에 머물 때 그가 “숙박비 같은 것들은 내가 내긴 내는데, 선생님은 사인만 꼬박꼬박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의 말 뜻은 그가 말 없이 떠난 뒤 밝혀졌다. 법원에서 난데 없이 날아 든 출두 명령서가 그 답이었다. 가 보니 내가 그 호텔에서 무단취식했다는 것이다. 기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몰려와 사진을 찍고 난리였다. 톡톡히 창피를 당한 셈이다. 담당 판사는 웃으며 “연말까지 내라”고 명했지만,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75년 ‘대마초 사건’이 터지기 직전, 나의 마음은 이래저래 황량할 수 밖에 없었다. 나라는 존재의 고독감은 대마초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대마초 사건 이후 성질이 날카로워진 나는 가끔 아끼던 기타를 무대에서 부숴버리거나 벽에 대고 깨뜨렸다.
79년 12월 6일 대마초 사건에 연루된 연예인들의 해금이 풀렸다. 출소 이후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나는 종로 5가 록 클럽 ‘소울 트레인’ 사장의 부탁으로 79년 새로 결성한 그룹 ‘뮤직 파워’와 함께 공연하고 있었다.
그 곳은 내 최초의 록 공연장이 된 셈인데, 어느날 광적으로 연주하다 흥에 겨워 객석 한 가운데로 기타를 던지고 말았다. 다행히 다친 손님은 없었으나 한 손님이 그 기타를 주워 가려고 했다.
사회자가 얼른 내려가 그 손님에게서 기타를 뺏다시피 가져왔다. 이후 무대에서 열기가 오르면 나는 계속 기타를 객석으로 던졌고, 항상 누군가가 대기하다 갖고 왔다.
그 해프닝이 알게 모르게 관례화됐던 당시 4개월간이 나에겐 음악적으로 절정기였던 것 같다. 지미 헨드릭스, 후 등 전위적 로커들의 음악과 연주 행태가 나의 몸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 당시 폭발했던 것 같다. 그것은 억압과 위선과의 결별이었다. 지금도 그 같은 생각에는 별로 변화 없다.
되돌아 보면 활동금지의 쇼크는 너무 컸다. 허망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지만 “이렇게 끝나나”하는 오기도 없지 않았다. 나는 새 시대의 변화한 음악성으로 다시 길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뮤직 파워’를 결성했고, 록과 디스코의 결합을 시도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짓이었다. 멍청해야 할 수 있는 댄스 뮤직인 디스코에 록의 정신을 담겠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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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장현의 '마른잎'은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그가 첫째 판 ‘기다려 주오’를 내고 난 뒤었다. 박인수와 장현은 정반대의 인물로 불화가 심 했다.
천재적 소울 가수 박인수가 장현을 무시했으리라. 장현은 신중현의 세세
한 주문을 그대로 따랐다.
그렇게 나온 장현판 ‘미련’은 결과적으로는 대히트였다. 그 해 라디오 상
을 휩쓰는 등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장현은 성취욕이 강했던 사람이다. 그의 히트곡으로 알려져 있는 ‘나는 너를’은 원래 1970년 서유석에게 주었던 것인데, 장현이 탐을 내 6개월 뒤 부르게 했던 곡이다.
그 음반도 대히트.장현은 곧 바로 신중현과 연락을 끊었다. 부잣집 딸과
결혼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장현은 1975년 대마초 흡연으로 구속된다. 신중현을 비롯해 이장희 윤형주 이종용 이수미 김추자 등 18명이 구속됐는데 이들은 낮밤이 뒤바뀐 바쁜 스케줄,무대 공포증 등으로 대마초에 빠졌다고 후회한다.
이후 1979년 박정희대통령이 시해되고 나흘 뒤인 10월 30일 대마초 가
수들이 풀릴 때까지, 거의 4년 동안 입을 닫고 살았다.이들이 노래활동을
중단한 시절 가요계의 스타는 대학생이었다.
강변 가요제,해변 가요제,대학 가요제 등을 통해 등장한 대학생 가수들
은 신선한 목소리와 리듬으로 기성 가수들을 내몰고 상대적 주류로 등장하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