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가슴[특집/연재] Pilgrimage For Art
안치환이라는 가수를 알고 있다. 그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들 몇몇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라는 가수가 이 땅 위에서 노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맙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 여전히 자신의 노래를 부르며 자기만의 길을 고집하고 있는 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그를 먼발치에서나마 처음 봤을 때 나는 막 대학이라는 사회에 발을 내딛은 새내기 신입생이었다......
최창근 2002/04/16
-------------------------------------------------------------------------------------------------------
안치환 1+2집 1994
Track No. 13 -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작사:박혜정 작곡:김상헌)
누워 쉬는 서해의 섬들 사이로 해가 질 때 눈앞이 아득해오는 밤 해지는 풍경으로 상처받지 않으리 별빛에 눈이 부셔 기댈 곳 찾아 서성이다, 서성이다 떠나는 나의 그림자 언제나 떠날 때가 아름다웠지 오늘도 비는 내리고 거리의 우산들처럼 말없이 돌아가지만 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 박혜정 시, 안치환 곡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안치환이라는 가수를 알고 있다. 그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들 몇몇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라는 가수가 이 땅 위에서 노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맙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 여전히 자신의 노래를 부르며 자기만의 길을 고집하고 있는 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그를 먼발치에서나마 처음 봤을 때 나는 막 대학이라는 사회에 발을 내딛은 새내기 신입생이었다. 신입생이긴 했지만 재수, 삼수라는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 나온 뒤였기에 몸과 마음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넋 놓고 지내던 겉늙은 학생이었다. 무엇 하나 내 맘대로 될 것 같지 않던 그 무기력한 시절, 방송국 선배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한 여자대학교의 강당에서 그는 노래를 하고 있었다. 단순히 운동권 학생들의 과격한 노래로만 생각했던 <철의 노동자>와 <잠들지 않는 남도> 같은 민중가요가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도 울렁거리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당달봉사가 새롭게 눈을 뜬 기분이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의 팬이 된 사실을 지금까지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PD가 되어 음악프로를 직접 제작하게 됐을 때는 학전소극장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던 그를 무작정 찾아가 인터뷰하기도 했었다. 공연 중간의 휴식시간을 틈 타 잠시 무대 뒤로 나온 그는 아내에게 안겨 칭얼거리고 있던 아기와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고 아름다웠다. 그 거짓 없는 평화로운 웃음엔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저항 가수로서가 아닌 자신의 가정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한 평범한 아버지의 얼굴이 선연하게 녹아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안치환 3집 1993
Track No. 02 - 자유
연세대에서 열렸던 이한열 열사 추모제 때는 부스스한 머리에 충혈 된 눈을 하고 <마른 잎 다시 살아나>와 <자유>를 불렀었다. 그때 그는 울고 있었던 것 같다. 겉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노래하고 있었지만 그의 음성은 평소 같지 않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한열은 대학 시절 그의 친구였다. 언젠가는 광화문 야외무대에서 열린 새 천년을 맞이하는 축하 음악회에서 도무지 자신의 음악적 성향과는 어울릴 것 같지도 않은 후배가수들 틈에 끼여 <소금인형>과 <당당하게>를 그야말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창했었다. 마치 그렇게 혼신을 다하는 것만이 그 자리에 선 가수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간직한 것처럼. 나는 그를 지켜보면서 하루하루를 별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설국>을 쓴 일본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처럼 태어난 그 자체가 미안했던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지 못하는 내가 미안했다. 가수라는 공인이기 전에 그는 나를 늘 반성하게 만들고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내 기억 속에서 언제나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정직하고 성실한 그렇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시대가 아무리 숨가쁘게 변한다고 해도 늘 제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 줄 것만 같은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늙지 않는 늘 푸른 소나무처럼 깨어있는 노래하는 청년.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어느 별에서>나 <귀뚜라미> 그리고 안치환이라는 가수를 대중들 사이에 분명하게 각인시킨 <내가 만일> 같은 곡들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고 싶지는 않다. 그 노래들은 모두 훌륭하고 뛰어난 곡들이지만 그의 음악정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작품들은 오히려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나 <저 창살에 햇살이> 같은 노래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안치환은 그러한 곡들 속에서 빛난다. 그리고 가수로서의 생명력이 돋보인다.
안치환 4집 1995
Track No. 02 . 수풀을 헤치며
노래를 찾는 사람들 시절의 그와 늘 겹쳐지는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와 <광야에서>, <그날이 오면>이나 꽃다지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그리고 저 엄혹했던 80년대의 빛나는 문화유산들인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와 <새>, 안혜경이 작곡한 신경림의 <햇살(민주)>, 민요 가수 정세현의 노래로 알려진 양성우의 <꽃상여 타고>, 이봉신과 문승현 콤비의 <영산강>, 작사자와 작곡가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서지지 않으리>와 <이 세계 절반은 나>와 <친구에게> 그리고 최성각이 따로 그의 짧은 소설에서 그 내력을 소상하게 밝혀 한때 지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가슴 절절한 파르티잔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부용산>을 청바지에 통기타를 매고 나와 아무 거리낌없이 부를 때 그는 진짜 안치환이 된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팬들은 별다른 장식 없이 맨몸으로 부딪치는 그 자유롭고 당당한 모습에 항상 매료당하는 것이다.
그는 또 여러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여 자신의 노래로 만들기도 했다. 80년대 초 신춘문예로 등단해 감수성이 뛰어난 시인 안재찬으로 주목받다가 지금은 구도자로서 여행가의 삶을 새로 살고 있는 류시화나 90년대 생태시로서의 여성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던 나희덕 그리고 70년대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지금은 수많은 애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정호승 같은 시인들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신동엽이나 김남주, 황지우의 시들도 그의 손을 거쳐서 다시 세상에 나왔다.
특히 그는 김남주의 많은 시들을 노래로 만들고 생전에 시를 낭독했던 시인의 육성을 그대로 자신의 앨범에 재현해내기도 했다. 김영현이 <남해로 가는 길>에서 절친한 동료였던 지리산의 시인 고정희와의 추억을 되살렸던 것처럼 김남주의 인간적인 삶 역시 문단 후배였던 소설가 이남희에 의해 형상화되기도 했었다. 대학방송 시절 내가 평소에 그 삶을 좋아했던 한 후배는 안치환의 노래 중에서 유독 1집에 실렸던 <그곳으로>를 즐겨 틀었었고 나는 같은 음반에 실린 시인 하종오의 시에 민족음악연구회 출신의 작곡가 이건용이 곡을 붙이고 전경옥이 노래했던 <그렇지요?>와 <상한 영혼을 위하여>를 남몰래 사랑했지만 그의 노래로서가 아니라 그 전에 송숙환이 어디선가 애절하고 사무치는 음성으로 불러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던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에 더 마음이 가 닿곤 했었다.
송숙환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 10주년 기념음반에서 정호승의 시에 곡을 붙인 '사랑할 수 없는 것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지 못할 것 용서하기 위하여 아름다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래'인 그 서정적인 발라드 <맹인부부가수>를 애틋하게 불러주고 있다. 그의 노래는 가장 감성적인 것이 또한 최상의 이성적인 부분일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가령, 송숙환 외에도 정중동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문대현과 문승현이라는 걸출한 작곡가와 김창남과 이영미라는 뛰어난 이론가를 배출한 메아리 출신의 서늘하면서도 귀기 어린 가수 윤선애의 노래극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에 삽입됐던 <저 평등의 땅에>와 미래를 예언하는 담지자의 그것처럼 투박하면서도 섬뜩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던 김세진, 이재호 열사를 추모하는 곡 <벗이여 해방이 온다>, 같은 노래패 출신인 조경옥의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나 환경과 여성의 문제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안혜경의 <나의 이야기>와 <침묵의 봄>, 한 돌의 <갈 수 없는 고향>으로 이미 그 바닥에선 유명했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 멤버인 박미선의 너무나 담담해서 오히려 서글픈 목소리에 얹혀 소개됐던 김소월의 시 <기도>, 김은희의 <동지를 위하여>와 <진달래>, 낮고 여리고 섬세한 것이 힘이 세다는 것을 증명한 노래마을 출신 주경숙의 <우리들의 사랑법> 그리고 김호철이 곡을 붙인 박노해의 시 <민들레처럼>를 멋지게 소화했던 노래공장의 일원 장희경, 두 대의 피아노를 통한 기가 막힌 연탄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클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던 민족음악연구회 출신의 연주자 이민주, '살아남은 자에게 혁명을'이라는 모토를 내걸었던 젊은 록 그룹 메이데이와 러시아의 중앙기관지에서 그 이름을 빌려온 이스크라와 <열사와 전사에게>, <청계천 8가>로 일약 민중음악계의 새 희망으로 주목받던 천지인의 눈부신 잔해들은 비록 그 형체는 확인할 길 없지만 인간의 삶이 어디까지 더러워지고 어디까지 비속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나를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들어 가는지 문득 문득 깨달을 때마다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내 가슴속을 파고든다.
안치환 5집 1997
Track No.11 - 한다
지금도 가끔씩 입 속으로 흥얼거려 보는 영원히 잊지 못할 노래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러한 노래들 속에서 공정하지 못한 사회를 바로 보는 안목과 올바른 정신의 키를 조정해왔고 그러면서 부쩍 부쩍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노래들이, 나를 민중의 당파성을 설파하던 당시의 대학언론에 몸담게 했고 나의 체질과는 영 맞지 않는 강압적인 조직의 틀 안에서 중도적인 내 사상의 선명함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생리적으로 소심하고 겁 많던 나를 대학언론인의 자부심을 갖게 하여 집회나 파업의 현장으로 내몬 것은 그 수많은 세미나에서 밥먹듯이 얘기되던 서양의 어렵고 난해한 이론적 틀이나 집회 현장에서 들려오던 무시무시한 구호나 과격한 함성이 아니었고 오로지 그렇게 내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와 우유부단하기만 한 나 자신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던 섬광과도 같은 한 줄의 노래였다.
아! 그 무수한 노래들. 그 노래들을 담은 조악하기 그지없던 그 시절의 불법 노래 테이프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꽃처럼 선연하고 아름답게 피어났던 못다 핀 꿈들은 산산이 흩어져버렸나. 노래마을의 생일노래인 <그대의 날>, 축혼의 노래인 <먼길 가는 두 사람을 위하여>,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노래였던 <사랑노래>와 굴렁쇠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인상적이던 <해야해야 잠꾸러기 해야>, <감자꽃>과 나약하기만 한 나를 강하게, 강하게 중무장시키던 <민중의 노래>와 <깃발가>와 <단결투쟁가>와 <해방을 향한 진군>과 <총파업가>와 <전노협 진군가>와 <참교육의 함성으로>와 <동지>와 <광주 출정가>와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과 <이 작은 물방울 모이고 모여>와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와 <누가 나에게 이 길을>과 <동지여 굳세게>와 <백두산>과 <의연한 산하>와 <사월 그 가슴으로>와 <전화카드 한 장>과 <편지 3>과 <일어서는 사월>과 <오월의 노래>, <유월의 노래>, <연대의 노래>를 비롯한 그 밤하늘의 이름 없는 별처럼 반짝거리던 노래, 노래들.
그리고 그 노래들을 담아냈던 노동자 노래단 예울림, 소리새벽, 우리소리 연구회, 희망새, 조국과 청춘 같은 노래패와 몸짓패들. 그들을 통해 탄생한 박치음, 윤민석, 이성지, 조민하, 유인혁, 김성민 같은 민중음악 진영의 젊은 작곡가들. 안치환은 그들 속에 있지만 그들 속에 없기도 하다. 안치환 이전에 안치환은 없었고 안치환 이후에도 안치환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바위섬>과 <직녀에게>를 부른 김원중이 있었고 이종구 작곡으로 신동엽과 김지하를 주로 노래했던 이정지나 김지하나 신경림 외에 문부식과 양성우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했던 임준철이 있었다. <비단구두>와 <오래된 우물>을 피아노로 연주했던 임인건은 김민기의 곡 <작은 연못>과 조동진의 <언제나 그 자리에>를 새롭게 리메이크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성격은 다르지만 김영동은 우리의 음악인 국악의 현대화에 기여하면서 한국적인 서정의 세계를 사회적으로 해석해내는 작업을 일관되게 해오고 있다. 그러나 그들과 안치환은 또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듯 하다.
안치환 6집 [believe] 1999
Track No.07 - 어머니 전상서
오월이면 비가 오기를 바랬다. 촉촉한 봄비가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주기를 기원했다. 오월은 봄의 한가운데,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목이 타는 계절, 팍팍한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줄 할머니 손길 같은 봄비가 필요했다. 비의 냄새, 비의 촉감, 비를 그리워하는 간절함이 여자의 맨 살결을 쓰다듬을 때처럼 솟구쳐 오른다. 생명수 한 모금보다 더 짙은 애증의 굵은 마디들을 오월에 내리는 비는 툭툭 건드리고 지나간다. 단비보다 지독한 욕망, 비릿한 빗물에 섞여 내려가는 성긴 머리카락들. 그 속에 내가 보인다. 나의 얼굴을 한 타인의 모습이 어린다. 그러하기에 오월의 비는 쓰리다. 핏물 같은, 비가 뼛속까지 깊숙하게 파고든다.
거리에서 그녀를 보았다. 소녀는 울고 있었다.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었다. 그녀의 언니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아니, 집을 나간 그의 동생을 기다린다고 했다. 언제 돌아올 지 기약이 없다고 했다.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기다릴 거라 했다. 그가 돌아오는 날까지 기다릴 거라 했다. 나는 그 소녀가 무서웠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그녀가 무서웠다. 이제 그만 잊어야지. 그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느냐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래, 잊을 수 없는 건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기억은 그러므로 가장 최후에 남은 죽은 자를 불러오는 의식이다. 죽은 자를 불러 산 자를 각성시키는 방식이다. 살아있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이들을 흔들어 깨우는 절차이다.
안치환 6.5집 [remember] 2000
Track No. 05 - 물 따라 나도 가면서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의 노랫말은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 없는 자 살아감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없는 자 부끄러운 삶일 뿐 아니라 죄지을 뿐이다."는 말을 남기고 1986년 5월 한강에서 투신자살한 당시 대학생이었던 박혜정이라는 국문과 학생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첼로의 무거운 저음으로 시작되는 서주(序奏)가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아프게 하는 이 곡에 얽힌 사연들을 구태여 말할 필요가 있을까. 대학로에서 연극 연출을 하는 한 선배는 어느 날인가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이 노래 얘기를 꺼냈다가 우연히 그 자리에 합석했던 박혜정의 친언니를 만난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녀의 친언니는 동생의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지 못하도록 만류했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상처가 깊었던 탓일까.
산다는 건 죽음을 응시하는 한 순간이라서 모든 인간에겐 반드시 죽음이 찾아들기 마련이며 하여 생명이란 주어진 순간부터 되돌려줘야 하는 것이라고 해도 상처는 떠난 사람이나 남아있는 이에게나 똑같이 가혹한 것이리라.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피곤해서 견딜 수 없거나 그저 잠든 것처럼 살아있음을 후회하면서 세월을 낭비해버릴 뿐이기에 인생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을 끊임없이 꿈을 꾸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혹은 산다는 것 자체를 느낌이 없는 일로 치부한다 해도 오래 오래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과거는, 그 과거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눈앞을 어른거리는 역사의 흔적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치유하고 극복해야 하는가. 상처가 아물지 않고 오히려 생채기 난 부위가 점점 더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환자들에게 그 누가 쉽게 희망의 쾌유를 기원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것이 자신 없다. 단지 그 아픔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 이 시대의 모든 이들이 조금씩 나누어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뿐. 그리고 당신과 나는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늘 함께 같이 가는 것이라는 따뜻한 한 마디의 위로의 말을 건네줄 수 있을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