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관동,충남의 정자와 누정 Ⅵ-죽서루,경회루,해암정,공북루,방화수류정
경회루와 죽서루의 가치
삼척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라면 죽서루를 들 수 있다.
죽서루는 '관동 제1루'라소 불리울 정도로 주변경관이 아름답다. 조선 중기의 화가인 겸재 정선의 그림이나 고려시대 이후 수많은 시인들의 작품에는 그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으로, 태종 12년(1412)에 기존에 있던 연못을 확장해 만든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이나 사신들과 함께 큰 연회를 열던 곳으로 우리나라의 국난을 겪어온 산 증인으로 불리우고 있다.
# 죽서루
죽서루
관동팔경 가운데 유일하게 강가에 자리잡은 '죽서루'는 어느 시기에 누구에 의해 지어졌는지 알 수 없다.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金克己)의 죽서루 시(詩)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1190년 이전부터 이미 죽서루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누각은 조선 태종3년(1403) 삼척부사 김효손이 옛 터에다 새로 지은 이후 10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죽서루는 객사(동헌)의 부속건물로서 접대와 휴식을 주목적으로 하는 '향연을 위한 누각'으로 기단과 초석없이 두리기둥 밑면을 그렝이질하여 자연암반 위에 직접 세운 것이다.
누각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꽃으로 수놓은 연등천장이며, 우물마루가 끝나는 사면에는 계자난간을 세우고, 기둥 사이는 벽체나 창호없이 모두 개방했다.
또 처마는 겹치마,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7칸,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지만 본래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좌우 각 1칸이 놓인 공포의 모습이 다르고, 또 내부 천장에 있어서 측면 밖으로 나와있던 도리의 뻘목들이 그대로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죽서루라는 이름은 누각 동쪽에 대나무 숲이 있었고 그 속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어 죽장사 서편에 있는 누각이라 하여 죽서루라 이름지었다는 설과 죽죽선녀의 유희소가 있는 그 서편의 누각이라 하여 죽서루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누각 앞에 았는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편액은 숙종41년 삼척부사 이성조의 글씨이고, 누각 안의 '제일계정(第一溪亭)'은 부사 허목의 글씨다.
김대화 삼척 문화원장 인터뷰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죽서루의 건립연대에 대해 김대화 삼척문화원장은 "죽서루는 삼척시내에 흐르는 오십천(五十川) 물줄기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절벽에 자리 잡고 있는 죽서루는 언제 누가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원종 때 동안거사 이승휴가 죽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고 전하고 있어 그 이전에 지어진 것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죽서루의 역사에 대해 김 원장은 "조선 태종 때 삼척부사를 지낸 김효손(金孝孫)이 다시 지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그것만 해도 610년 전으로 당시 리모델링한 것"이라며 "이후에 여러 번 손을 보았으니 원형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고 전했다.
그는 "보물 제213호로 지정된 것이 1963년 초이니까 50년이 넘었다"며 "죽서루에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비롯해 수많은 명사들의 시가 걸려 있는데, '關東第一樓(관동제일루)'라는 큰 액자는 숙종 때의 부사 이성조(李聖肇)가 걸어놓았다고 한다는 설과 조선 헌종 때 이규헌이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라고 써놓았다고 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죽서루의 특징에 대해 김원장은 "죽서루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단(基壇)이나 초석(礎石) 없이 두리기둥 밑면을 자연암반 위에 그대로 올려놓았다는 점"이라며 "누각의 바닥은 우물마루로 짜놓았고, 천장은 연등천장(椽燈天障)이며, 우물마루바닥 바깥쪽으로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설치했고, 기둥과 기둥 사이는 창호나 벽체 없이 모두 비어있다"고 강조했다.
죽서루의 구조에 대해 "'루(樓)'라는 것은 사방이 막힘이 없고 마루를 다락과 같이 높여 지은 건축물을 일컫는 말이며, 죽서루의 죽서(竹西)는 누각의 동쪽에 죽장사라는 절과 죽죽선녀라는 명기(名妓)가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죽서루의 가치에 대해 김원장은 말을 아끼지 않는다.
"죽서루가 관동팔경 중에서 유일하게 바다가 아닌 강을 옆에 끼고 있으면서 제1루로 불리는 것은 오십천의 유유히 흐르는 맑은 물과 깎아지른 절벽 위에 걸터앉은 듯한 모습이 자연과 잘 어우져서 그런 것 아닌가 생각된다"며 "현재 죽서루 일대를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발굴조사가 진행중에 있고 이미 객사터 등 유적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그동안 삼척의 대표적 문화재이자 관광명소로 시민과 관광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오던 죽서루가 역사문화공원으로 재탄생될 것으로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 경복궁 경회루
경회루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으로 알려져 있다.
1층에는 돌기둥을 세우고 2층은 마루를 깔았다. 2층의 마루바닥은 가운데는 높고 주변은 낮은 3단 구조로, 중앙에 위치한 가장 높은 1단은 3칸, 한 뼘 아래의 2단은 12칸, 가장 낮은 바깥쪽의 3단은 20칸으로 되어있다.
이같은 구조는 주역(周易)의 원리에 기초한 것으로 중앙의 3칸은 천지인(天地人)을, 12칸은 1년 12달을, 바깥의 20칸에 세워진 24개 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한다.
경회루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아있던 것을 1867년 고종 때 재건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청동으로 만든 두 마리의 용을 연못에 넣어 물과 불을 다스리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같은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경회루의 돌기둥과 석상에는 6.25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자국이 선명하지만 다른 부분은 모두 건재하다.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돼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고쳐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이때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는 왕비의 침전 뒤편에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에는 48개의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경회루는 침전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 12년(1412)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다.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고쳐 지었는데 돌기둥에 용과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 인공섬에 만세산을 조성하고, 그 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됐다.
한편 경회루 북쪽에 있는 하향정 정자에 대해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가 철거를 요구하고 나서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은 지난 5일 "이승만 대통령이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경복궁 하향정에서 낚시하는 사진을 발견했다"며 "이승만 대통령이 경복궁에서 낚시를 위해 하향정을 건축했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된만큼 조만간 하향정 철거를 요청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향정은 경회루의 북쪽에 있는 정자로 광복 후 이승만(1875~1965) 초대 대통령이 경회루에서 낚시를 즐기기 위해 지은 건물이란 소문이 돌았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조선궁궐과 상관없는 하향정의 존치는 문화재보호법 제3조에 규정한 문화재 원형보존과 복원이란 대원칙을 무시한 행정행위라는 취지로 지난 5월 문화재위원회에 하향정 철거를 요구하기도 했으나 거절당했었다.
# 해암정
해암정
강원도 추암촛대바위 입구에 자리잡은 해암정은 삼척 심씨의 시조 심동로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제자를 가르치며 생활할 때 지은 정자로 알려져 있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처음 짓고 조선 중종 25년(1539)에 심언광이 다시 지었다.
당시 심동로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 하였는데, 고려말의 혼란한 상태를 바로잡으려 노력하다가 권력을 잡고 있는 간신배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향으로 내려갔다.
왕은 그를 말렸으나 노인이 동쪽으로 간다는 뜻의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내려줘 동로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ㅤㅂㅡㅇ 옆면이 여덟 팔 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송시열이 덕원으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 들러 남긴, '초합운심경전사(草合雲深逕轉斜)'라는 글이 유명하다.
/김병학기자
태고정과 공북루 방화수류정- 부서지고 그을리고…세월의 흔적 아름다움으로 고스란히
하늘이 점점 높아지는 풍요의 계절 가을이다. 마음의 여유를 찾아 낭만적인 여행을 떠나거나, 대한민국 곳곳에 자리한 역사적 흔적을 찾아 마음의 양식을 채워가는 답사를 떠나기 좋은 시절이다.
하지만, 계획단계부터 일정이나 자금에 빠듯해 하며 실행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오랫동안 마음을 모았던 일이라 부담을 안고서라도 길을 잡아 떠나기도 한다. 그런 저런 일들이 부담을 주기도 하지만, 길 떠나는 마음은 가볍고 벅차다.
우리나라 어느 곳이나 아름답지 않는 곳은 없지만, 문화유산과 함께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하고 아름답다. 대한민국 중심에 위치한 경기도, 그곳에서도 남부지역의 중심도시인수원에 오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을 만날 수 있다.
염상덕 수원문화원장으로부터 수원화성과 방화수류정에 대한 설명을 들어본다.
염상덕 수원문화원장 인터뷰- "화성, 조선후기 정치·경제·사회적 변화 집약한 문화유산"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은 어떻게 찾아가나?
- 수원역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팔달문이나 북문으로 오는 방법과 고속도로를 타고 와서 화성행궁이나 화성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둘러보는 방법이 있다. 교통편이 좋아서 하루만의 짧은 여유라 해도 편안하게 구경할 수 있는 조건이다.
△수원화성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 수원화성은 조선후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집약한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수원화성에 도착하면 처음에 마주하는 곳이 대체로 화성행궁이다. 팔달산을 든든한 뒷배경으로 하고 웅장하게 자리잡은 화성행궁과 넓은 행궁광장을 마주하게 된다. 팔달산은 작은 산이지만, 정상에 올라가면 맑은 날에는 주변 10킬로 내외의 오산, 화성, 용인까지도 관망할 수 있는 곳이다.
화성의 자리잡음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 점유에 있다. 주변을 에둘러 보아도 막히는 곳이 없이 탁트인 시원한 공간이 군사적인 방어와 대도회지로의 성장이 가능하게 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원화성의 구조는?
- 화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구조다. 조선의 당당한 군왕인 정조가 도착해서 제일먼저 맞이하게 되는 장안문의 든든한 위용, 서쪽으로 단아하고 아름다운 보물 화서문과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군사적 시설인 서북공심돈이 자리하고 있다.
팔달산으로 오르면 굳건한 서장대가 위치한다. 마치 정조대왕의 심지인듯 작지만 단단하고 높은 기상을 자랑한다. 팔달산에서 팔달문으로 성벽이 이어진다. 팔달문은 최근 복원수리를 마쳐 화려함을 더했다.
동쪽으로 얕은 산자락을 따라 외적의 침임을 알리는 봉돈이 있고, 창룡문이 위치한다. 수원사람들은 "북문은 부서지고, 동문은 도망가고, 서문은 서있고, 남문은 남아 있다" 한다.
일제시대도 견딘 수원화성의 사대문이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무너진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한바퀴를 돌고 나면 동쪽과 북쪽의 중간쯤에 광교산 자락에서 흘러내려오는 수원천과 잇닿아 있는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을 만나게 된다.
△방화수류정의 구조는?
-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은 수원화성 건축물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단아한 화홍문과 화려한 방화수류정(보물 1709호)은 화성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방화수류정은 동북각루라고도 불리며, 전시용(戰時用)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해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조성된 건물이다. 수원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詩)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으며, 편액은 조윤형(曺允亨1725~1799)의 글씨이다.
평면은 'ㄱ'자형을 기본으로 북측과 동측은 '凸'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하여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꾸몄으며, 조선 헌종 14년(1848)에 중수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되었다.
△방화수류정은 어떠한 역할을 해 왔는가?
- 주변감시와 지휘라는 군사적 목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시대 정자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고, 다른 정자에서 보이지 않는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의 특이성 등을 토대로 18세기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방화수류정 밖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일명 용연이라고 부르는데, 가을 달빛이 풍성한 때방화수류정에서 이어지는 성벽과 각건대와 동장대(연무대)로 이어지는 선은 고고하기까지 하다.
누각에 올라서 시한수 읊조릴 수 있다면 신선이 따로 없을 것이다. 사계절 어느 때라도 좋다. 봄에는 꽃들이 넘치고, 여름에는 신록이, 가을에는 달빛이, 겨울에는 하얀 눈이 자리를 채워 액자를 만든다.
△화성이 가지는 의미와 역할은?
- 수원에서는 여러 가지 실험들이 진행중이다. 화성 축성 200주년에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화성의 아름다움과 정조의 애민사상과 아버지를 그리는 애뜻한 효 정신은 기리고도 넘친다. 하지만, 다음은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에 대한 답을 달고 실천중이다. 보는 것을 넘어 즐기는 문화유산으로 거듭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간 많은 문화유산이 조상의 빛나는 얼을 기리고, 자긍심을 충족하는 소중한 자산으로 마음을 채웠다. 하지만, 10년, 20년, 한세대를 지나면서 문화유산이 우리 자신으로 우리의 삶으로 거듭나기 위한 새로운 시도가 필요했다.
수원화 성은 박제된 성이 아니라, 그 안에 누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물론 근대도시로 성장하면서 몇 차례의 도시확장과 개발이 있었지만, 여전히 화성을 하나의 경계로 인식하면서 그 안에서 살아간다. 화성에 사는 사람들은 화성의 역사를 체득하면서 만들어가는 사라들이다.
이번에 수원시에서는 '생태도시' 차없는 도시를 만들면서 화성행궁 주변의 신풍동, 장안동 일대에 변화를 꿈꿨다. '차없는 거리'라는 아주 단순한 프래카드 안에는 많은 함의를 담고 있다. 차없이 걸어가면 사람들이 화성을 보겠지하는 단순한 생각을 기반으로 해서, 문화유산과 그곳에 축적된 사람들의 궤적을 직접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화성은 보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 되었다.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면서 화성이 만들어 놓은 수원사람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방화수류정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박제된 역사에서 벗어나, 화성을 묵묵히 지켜온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삶이 일궈온 역사를 자부심으로 되돌려주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곳 일대는 수원의 역사를 품고 있다. 경부선이 개통된 1905년부터 학생들이 이곳으로 수학여행을 왔다.
기차라는 신문화가 실어온 새로운 풍속이다. 그리고 1930~40년대는 화홍문 밖으로 수원의 근대 체육시설인 시민공설운동장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한국전쟁 때는 넓은 공터에 피난민들이 들어와 삶을 이어가기도 한 곳이다. 이후 화성복원과정에서 아름다운 명소로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으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수원 화성에 사람들이 걷기 시작하고, 천변에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도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아직은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이 더 빛나고 눈에 띄이겠지만, 이것을 만들어 가고 지켜가는 이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 곧 오리라 믿는다.
하늘이 높고 푸르른 이 때에, 수원화성에 들러 가을을 만끽하고 수원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한번 취해 보면 좋겠다.
# 공산성 공북루
공주 공북루
공북루는 공주 공산성의 북문으로 선존 36년(1603)에 망북루터에 지은 것으로 높은 기둥을 세워 위에는 누마루를 깔고 아래는 통로로 사용하는 2층 다락집 형태로 고창의 공북루와 비슷한 형태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각 칸의 간격은 일정하며 중앙 어칸에는 출입을 위한 문이 달려있던 흔적이 있다.
공북루는 최근 배불림 현상 등이 발생해 공북루를 비롯해 금강방향 금서루 누각부터 공산정, 만하루 구간의 복구공사를 진행중에 있다.
공주시는 공산성 금서루 주변 성벽에 낙석방지책을 설치하고 출입 통로에 강구조물 설치, 성상로 우수 유입 방지를 위한 강화 다짐 실시 등 안전시설을 설치했다.
# 수원성 방화수류정
수원 방화수류정
성에는 문루말고 다른 누각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수원성이다.
각루는 주위의 경관을 즐기며 휴식할 수 있도록 성안의 높고 경치좋은 곳에 세우기도 한다. 수원성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은 특이한 건축형태와 함께 주변의 경관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석축과 전돌로 쌓은 아래 성벽에 총구를 뚫은 성곽의 망루이지만 아래의 용연과 더불어 주변환경을 즐기려는 의도에서 선조의 여유있는 삶을 느낄 수 있다.
조선 정조 18년(1794)에 세운 것으로 건물이 아름답고 조각이 섬세하여 근세 한국 건축 예술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김병학기자
'☆우리의 역사☆ >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북의 정자와 누정 Ⅳ-탄금정,제월대,경호루,지산정 (0) | 2017.12.26 |
---|---|
영남의 정자와 누정Ⅴ-약천정,청계정,경정,월송정,망양정, (0) | 2017.12.26 |
영남 안동의 정자와 누정 Ⅶ-겸암정사,명옥대,낙암정,시북정 (0) | 2017.12.26 |
영호남의 정자와 누정 Ⅷ-광한루,채미정,오연정 (0) | 2017.12.26 |
영호남의 정자와 누정Ⅸ-촉석루,수선루,영모정, 태고정 (0) | 2017.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