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 Ⅴ [21~2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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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 Ⅴ [21~25회]--목차
21. 16세기 중국인이 왜구(倭寇)로 나선 사정 - 국가가 바닷길 통제하자 ‘해적업자’ 창궐
22.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원정 항해 그 후 -포르투갈 함대, 인도양서 잔혹한 ‘해적질’
23. 마테오 리치 필두로 가톨릭 선교사들 활약 - 야만의 유럽, 중국서 문명으로 각인되다
24.만리장성 90% 쌓으면서 북방 유목민 경계했지만 - 정작 명나라는 ‘슈퍼화폐 은(銀)’ 통제 못해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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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 Ⅰ [ 1~ 5회] https://blog.naver.com/ohyh45/221770516362
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 Ⅱ [ 6~10회] https://blog.naver.com/ohyh45/222014173381
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 Ⅲ [11~15회] https://blog.naver.com/ohyh45/222175403983
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 Ⅳ [16~20회] https://blog.naver.com/ohyh45/222335937981
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 Ⅴ [21~25회] https://blog.naver.com/ohyh45/222538262678
21.16세기 중국인이 왜구(倭寇)로 나선 사정
- 국가가 바닷길 통제하자 ‘해적업자’ 창궐
정화 함대 원정으로 대외교섭 독점하고 민간 교역은 막아
무력 갖춘 법외 사업 급증, 정부도 국익에 도움되게 활용
▎왜구와의 해전을 그린 18세기 중국 그림. / 사진:위키피디아
근세 동아시아 3국의 대외정책을 ‘쇄국(鎖國)’과 ‘개항(開港)’으로 구분하는 담론이 오랫동안 펼쳐졌다. 이 담론은 19세기 중-후반 서방세력의 개방 압력이 닥쳤을 때 개방을 지지하는 일본인들이 꺼낸 것이다.
개방에 반대하는 입장에 부정적 느낌을 주는 ‘쇄국’이란 이름을 씌운 것인데, 이 말은 19세기 초에 일본에서 나타난 것이다.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그 전의 개방 억제 정책은 ‘해금(海禁)’이란 말로 표현되었다.
‘쇄국’이란 말은 대외관계의 맹목적 봉쇄를 떠올리게 하는데, 실제 해금정책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필요한 대로 대외관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발전시키기도 하되 ‘국가의 통제’ 안에서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자유무역 원리에 길든 현대인에게는 ‘국가의 통제’ 자체가 안 좋은 것으로 보이기 쉽지만, 국가라는 것이 원래 통제를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질서에 대한 위협 요소라면 국내의 것이든 국외의 것이든 억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국가의 당연한 책무다.
명나라는 중국의 왕조 중 해금정책을 가장 강력하게 시행한 왕조였다. 개국 초에 홍무제가 해금정책을 확고하게 세웠고, 왕조 끝까지 유지되었다.
목종(穆宗, 1566~1572) 때에 이르러 해금이 완화된 것을 ‘융경개관(隆慶開關)’이라 하여 개방정책으로의 선회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된 결과일 뿐 능동적인 전환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무제, 유교 이념인 농본국가 지키겠다는 의지
명나라 가정제 시기 ‘왜구’ 무역활동의 중심지 쌍서(雙嶼)항이 있던 주산(舟山)열도의 육횡도(六橫島).
영락제의 정화 함대 출동도 해금정책을 뒤집은 것이 아니었다. 함대 건설 착수와 동시에 민간의 해선(海船) 건조를 금지하며 기존의 해선도 원양항해가 불가능한 형태로 개조할 것을 명령했다. 정화 함대는 대외교섭을 국가가 독점한다는 의미에서 해금정책의 가장 적극적인 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 이후 해로를 통한 중국의 무역은 꾸준히 늘어났다. 당나라는 661년 이후 광주(廣州)를 비롯한 몇 개 항구에 해운을 관장하는 관서를 설치했고 송나라는 1107년에 이 관서들을 시박사(市舶司)라는 이름으로 정비해서 운영했다.
1220년대에 천주(泉州) 시박사 제거(提擧)를 지낸 조여괄(趙汝适)이 남긴 [제번지(諸蕃誌)]에 실려 있는 광범한 지리정보에서 시박사의 폭넓은 활동 범위를 알아볼 수 있다.
두 권으로 된 [제번지]의 상권에는 남중국해와 인도양은 물론 지중해 연안까지 여러 지역의 지리와 풍속이 적혀 있고 하권에는 그 지역의 물산과 자원이 기록되어 있다.
1370~1374년 시박사 철폐는 명나라 출범 후 첫 정책의 하나였고 해금정책의 출발점이었다. 종래의 시박사는 다른 행정기구와 어울리지 않는 하나의 특수기관으로 운영됐다. 철폐에 따라 그 기능을 예부(조공 관계), 호부(재정 관계)와 지방행정관서(질서 유지)로 넘긴 것은 행정조직의 이념적 원리를 분명히 하기 위한 정비였다.
당-송 시대에 많이 늘어나는 해외무역을 처리하기 위해 서둘러 만든 시박사는 [주례(周禮)]에 명기된 유가 원리가 반영되지 않은 것이었고 관련된 이권 때문에 물의가 잦았다.
홍무제는 유가 이념을 표방한 왕조를 세우면서 이념적 근거를 갖지 못한 시박사를 없앤 것이다. 이 조치에는 해외무역의 이득이 아무리 크더라도 농본(農本)국가의 틀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해외무역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명나라는 농본의 원리를 굳게 지켰다. 그러나 경제 발전에 따른 산업의 고도화는 국가정책으로 틀어막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주례]가 작성된 시대에 비해 제조업과 상업의 비중이 크게 자라나 있어서 농본국가의 틀을 지키기 어렵게 만드는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해외무역이 특히 두드러진 문제를 일으킨 것은 국가의 통제 밖에 있는 해외 상황의 변화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국인의 해외활동 증가는 해외 화교(華僑) 사회의 생성에 비쳐 나타난다. 중국 밖의 여러 지역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현상이기 때문에 중국 측 기록이 소략하고 각국의 집계를 모으기 어렵지만 근년의 연구로 윤곽이 밝혀지고 있다.
[바이두백과]의 ‘华侨’ 항목에는 해외 화교의 인구가 송나라 때 10만 명 선, 19세기 초 청나라 중기까지는 100만 명 선에 이르고 아편전쟁 후 중국인의 해외 이주가 급증해서 20세기 초까지 10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어 있다.
거대한 화교 사회는 20세기 초에는 민국혁명(民國革命)의 큰 지원세력이 되었고 그 100년 후에는 중국의 개혁·개방에 발판을 마련해 주기에 이른다.
정화 함대는 제1차 항해(1405~1407)의 귀로에 진조의(陳祖義)가 이끄는 팔렘방의 해적을 토벌했다. 진조의는 명나라가 들어선 후 온 가족이 남양으로 나가 해적질을 했다고 한다.
1만 명 무리를 끌고 100척의 함대로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주름잡으며 1만 척의 배를 약탈하고 50여 개 항구를 공략했다고 하는 마환(馬歡) 등의 기록은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상당히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영락제가 50만 량의 현상금을 내건 ‘역사상 최고의 현상수배범’이었다고 하는 주장까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진조의 토벌에 협조한 다른 중국인 집단의 존재다.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은 일찍부터 스리비자야(Srivijaya, 三佛齊) 왕국의 중심지였는데 11세기 이후 세력이 꺾여 자바 섬의 마자파힛(Majapahit) 왕국의 정복 대상이 되었다.
1397년 스리비자야 왕국 소멸 후 1000여 명 현지중국인들이 양도명(梁道明)을 왕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양도명은 1405년 영락제의 칙서를 받고 입조했다고 하는데, 정화 함대가 (나가는 길에) 칙서를 전한 모양이다.
정화 함대의 귀로에 양도명의 수하였던 시진경(施進卿)이 진조의가 꾸미고 있던 음모를 알려주었기 때문에 토벌할 수 있었다고 하며, 시진경은 그 공으로 선위사(宣慰使)의 직함을 받아 양도명 대신 현지의 왕 노릇을 했다고 한다.
상인 집단 간 주도권 다툼 과정 ‘해적’으로 몬 듯
▎1682년에 그려진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 모습. / 사진:위키피디아
진조의·양도명·시진경, 모두 남양 일대의 중국인 집단 지도자였다. 양도명·시진경 집단이 정화 함대의 신임을 얻으며 경쟁관계에 있던 진조의를 해적으로 몰아붙인 것으로 보인다. 진조의를 희대의 ‘해적왕’으로 그린 것은 양도명·시진경이 제공한 정보였을 것이다. 진조의 집단이 가진 선박이 10여 척에 불과했다고 하는 자료도 있다.
남양으로 진출한 중국인 집단에게 해적이 인기 있는 직종이었을까? 동남아시아로 나간 중국인은 대개 상업 아니면 농업에 종사했다. 중국 내에도 아열대 작물 재배 지역이 많아졌기 때문에 새로운 품종과 재배기술을 갖고 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후일 유럽인들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기술이 좋은 중국인 노동자를 선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포메란츠와 토픽, [The World that Trade Created 교역이 빚어낸 세계] 15쪽)
상업에 종사한 중국인들은 현지인보다 우월한 자본과 조직력, 그리고 중국 시장으로 통로도 가졌기 때문에 유리한 조건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스리비자야 체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자위를 위해서도 무장은 필요했고 활동 범위를 놓고 집단들 사이의 경쟁이 있었을 것이다. 양도명·시진경 집단과 진조의 집단 사이에도 그런 경쟁이 있었던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해적’의 이름도 붙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시진경의 출신이다. 양도명과 진조의는 광동(廣東) 출신이었는데, 시진경은 항주(杭州) 출신의 무슬림이었다. 진조의는 압송·처형되고 양도명은 조공을 바치러 남경으로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갔고, 팔렘방에 남은 시진경이 선위사로 임명받아 그 아들딸까지 그 지역의 ‘왕’ 노릇을 했다.
중국 출신으로 기술력과 조직력을 가진 위에 종교를 통해 현지인과의 유대관계를 겸비한 것이 그의 역할을 뒷받침한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의 해금정책 아래 해외무역의 대부분은 민간의 불법 사업이 되었고 해적의 창궐을 불러왔다. ‘불법’ 사업이라고는 하지만 원래는 관습적으로 용인되는 ‘법외(法外)’ 사업이었다.
부분적,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해적의 행태가 이목을 너무 많이 끌기 때문에 그 배경의 비교적 점잖은 무역 기능이 제대로 드러나 보이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무역 기능의 지속적 존재는 생활양식의 변화에서도 확인된다. 후추(胡椒)가 하나의 예다. 명나라 이전에는 후추가 대단한 사치품이었는데 명나라 말까지 그 값이 10분의 1 이하로 떨어져 서민의 부엌에서도 쓰이게 되었다.
정화 함대가 다량의 후추를 실어오면서 값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민간 상인들에 의해 후추의 대량 수입이 계속된 결과였다고 한다. (핀들레이와 오루어크 P[ower and Plenty 권력과 풍요] 134쪽)
대외무역을 조공무역 형태로 모으려 해금(海禁)정책
▎중국풍과 포르투갈풍이 결합된 말라카의 한 건물. 미술관 이름에 ‘정화(鄭和)’가 들어있다[위키피디아]
명나라의 해금정책은 모든 대외무역을 조공무역의 형태로 모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자유무역 원리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조공무역이 미개한 관행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조공무역과 같은 통제 무역이 적합한 상황도 있었다.
포메란츠와 토픽은 [교역이 빚어낸 세계] 8~9쪽에서 아스테카 제국의 장거리 교역과 지역 내 교역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진행된 사실을 지적한다.
지역 내 교역은 상인과 주민들이 저잣거리에서 행하는 것이었지만 장거리 교역은 귀족과 관리들이 궁정에서 행하는 것으로 조공무역과 비슷한 형태였다. 사치품을 주고받는 장거리 교역은 주민들의 일상적 활동과 별개로 행해진 것이다.
산업 발전과 사회 분화는 교역량 증가를 가져온다. 지역 간 분업의 진행에 따라 지배계층의 사치품만이 아니라 직물과 공산품 등 서민의 생필품까지 먼 거리를 이동할 필요가 늘어나고 교통수단의 발전에 따라 운송비용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당-송 시대에 국내 교역과 해외무역이 모두 많이 늘어났다. 송-원 시대에는 민간의 해외무역에 대한 통제가 엄격하지 않았고, 명나라가 들어설 때는 해외무역이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정화 함대의 원정은 국가의 무역 통제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였다. 통제할 대상이 얼마나 거대한 것이었는지 함대의 어마어마한 규모가 보여준다. 왕조 초기에는 재정이 넉넉하다. 종래의 기득권이 척결되고 새로운 기득권은 아직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무제와 당 태종의 적극적 대외정책도 초창기의 재정 여유 위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여유가 사라진다. 20여 년 함대를 운영해 본 뒤 거대한 함대를 유지하는 적극적 해금정책에서 물러서 항구를 지키는 소극적 해금정책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홍무제가 철폐했던 시박사도 영락제 때 ‘역(驛)’의 이름으로 다시 조직되어 조공단의 응접과 사무역의 통제 등 해금정책 집행기관의 역할을 계속했다.
국가의 기능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확장되었지만, 그 확장이 산술적인 확장이라면 같은 기간 대외교역을 포함한 교역의 확장은 기하급수적인 것이었다. 한나라와 당나라는 대외교역의 대부분을 조공무역의 틀에 담을 수 있었지만 송나라 이후는 어렵게 되었다.
영락제가 왕조 초기의 기세를 타고 조공무역의 틀을 키우려고 시도했으나 20여 년 만에 한계에 부딪혔다. 그 후의 해금정책은 ‘국가 통제’의 원칙을 겉으로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현실의 변화를 완만하게 받아들이는 길이었다.
표방하는 원칙과 수용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가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고, 문제가 겉으로 드러날 때 ‘해적(海賊)’의 형태로 나타났다. 정화 함대는 진조의의 해적을 소탕하고 이에 협조한 시진경을 선위사로 임명해 현지 세력으로 인정했다.
진조의 집단과 시진경 집단 사이에 성격 차이가 컸을 것 같지 않다. 둘 다 유랑해 온 중국인들이 같은 상황 속에서 조직을 만든 것이고 (영락제를 대신한) 정화 입장에서는 그 경쟁 상태를 방치하기보다 어느 한 쪽으로 몰아주는 것이 관리하기에 편리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 같다.
유럽 ‘프라이버티어링’은 국가 차원의 해적질
▎1548년부터 1562년까지 가정제의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엄숭(1480-1567).
그는 [명사(明史)] ‘간신(奸臣) 열전’에 명대 6대 간신의 으뜸으로 소개되어 있다. / 사진:바이두
유럽에서 이 무렵부터 19세기까지 성행한 ‘프라이버티어링(privateering)’을 떠올린다. (‘사략선(私掠船)’이라는 일본식 번역은 도저히 내키지 않는다) 대항해시대에서 제국주의 팽창기까지 유럽인의 해상활동에서 화려한 역할을 맡은 사업이었다.
영국만 하더라도 월터 롤리,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쟁쟁한 인물들이 이 사업으로 명성을 쌓았다. 적국 선박을 나포할 권한을 국가가 민간 사업자에게 부여하는 제도였는데, 실제 운용이 어지러웠다. 해적질(piracy)의 합법화 내지 국가 차원의 해적질로 볼 수 있는 사업이었다.
국가의 통제력은 해상에서 효과를 일으키기 어렵다. 해상에서는 통제할 대상이 쉽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프라이버티어링은 어차피 통제가 힘든 해상세력의 활동을 억지로 통제하려 드는 대신 국가가 오히려 도와주면서 국익에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한 제도였다.
시진경이 받은 명나라의 선위사 직함을 유럽의 프라이버티어들이 받은 나포 인허증(letter of marque)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약탈만 하는 단순한 해적은 그 세력 규모에 한계가 있을 것 같다. 모든 육상세력과 적대관계여서 세력이 커질수록 공격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큰 세력을 가진 해적은 육상세력과 복잡한 이해관계를 맺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정 국가의 지원과 보호를 받은 유럽의 프라이버티어가 단적인 예다.
명나라의 해금정책 아래 조공무역의 틀에 담길 수 없는 해외무역은 민간의 ‘법외’ 사업이 되었다. 이 사업의 종사자들은 약탈이 아닌 무역에서 이득을 찾는 ‘무역업자’였지만 국가의 법망 밖에서 활동하며 무력을 많이 활용한다는 점에서 ‘해적’으로 규정되었다. 이들을 단순한 해적과 구별해서 ‘해적업자’라 부르고 싶다.
해적업자들은 연해 지역의 토착세력과 긴밀한 협력관계 아래 활동했다. 이 업자들이 수입한 물품은 생필품이 아닌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그 유통을 위해 육상세력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역활동의 수익성이 높았기 때문에 국가권력을 자극하는 약탈 행위는 스스로 삼갔고 따라서 중앙정부도 그 퇴치에 큰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시대 해적의 대명사가 된 ‘왜구(倭寇)’의 성격 변화가 해적업의 발전상을 보여준다. 14세기 중엽에 나타난 초기 왜구는 약탈만 하는 단순 해적에 가까웠다. 당시 일본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일부 지방세력이 해적으로 나서면서 왜구가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초기 왜구의 주된 침공 지역은 일차적으로 한반도, 다음으로 산동성 등 북중국 해안지대였다. 그런데 15세기 들어 잦아들었던 왜구가 16세기에 급증하는데, 그 주 무대는 중국의 동남해안이었다. 이 후기 왜구의 구성에는 중국인이 다수를 점했다고 한다.
해적업자, 연안지역 토착세력과 손잡고 활동
▎1542년 몇 명의 포르투갈인이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와서 화총 등 신기한 물건들을 전해줬다. 이들을 데려온 것이 중국인 해적 왕직이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후기 왜구의 활동이 남쪽으로 옮겨가고 중국인의 역할이 커진 것은 그 활동 내용이 무역 관계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키피디아] ‘Wokou’ 기사 중 첸 마오헝의 [明代倭寇考略](1957)에서 인용된 중국 측 왜구 관련기사의 빈도표가 흥미롭다.
명나라 7대 경제(景帝)에서 11대 무종(武宗)까지 72년간(1450~1521) 6개 기사가 나타날 뿐인데 12대 세종(世宗) 때는 45년간(1522~1566) 601개 기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다음 13대 목종(穆宗)과 14대 신종(神宗)의 53년간(1567~1619) 나타나는 기사는 34개다.
한 황제의 재위 기간에 왜구 기사의 대부분이 집중된 까닭이 무엇일까? 바로 떠오르는 추측은 세종, 즉 가정제(嘉靖帝) 재위 기간의 왜구 관련 정책에 특이성이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실제로 다음 황제 목종이 즉위 직후 ‘융경개관’을 행하자 왜구 기사가 드물어진다.
레이 황의 [1587: A Year of No Significance 만력 15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해]에 신종 만력제(萬曆帝, 1572~1620)가 정무를 사보타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신종의 할아버지 가정제가 황제 사보타주의 원조였다.
가정제는 후사를 정하지 못한 채 갑자기 죽은 사촌 형 무종의 제위를 15세 때 물려받은 후 백부인 효종(孝宗)에게 입양 절차를 밟을 것을 거부하고 자기 생부의 추존(追尊)을 고집하면서 주류 관료집단을 등지기 시작했다.
몇몇 총신과 환관만을 신임하고, 1539년부터 25년간 조회(朝會)도 열지 않았다고 한다. 엄숭(嚴崇) 같은 희대의 간신의 발호는 물론이고, 1542년에는 학대를 못 이긴 비빈(妃嬪)들이 황제의 교살(絞殺)을 시도한 임인궁변(壬寅宮變)까지 일어났다.
명나라에 시원찮은 황제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가정제는 그중에서도 심한 편이었고 게다가 재위기간이 무척 길었다. 가정제의 정치 실패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왜구’ 문제였다.
가정제(이 황제를 ‘세종’이라고 부르기 싫은 마음을 독자들이 이해해 주기를!)시기 왜구에 관한 기록은 분량이 많지만 갈피를 잡기 어렵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편향된 내용이 많기 때문일 것 같다. 몇 개 인상적인 장면을 소개함으로써 분위기 파악에 만족하려 한다.
무협지 한 장면 같은 1555년 여름 ‘가정왜란(嘉靖倭亂)’
▎일본 이와미 은광 유적.
1526년 개발되어 1923년까지 생산을 계속했다. 1545년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이 개발되기 전까지 잠시 동안 세계 최대의 은광이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1555년 여름에 일어난 ‘가정왜란(嘉靖倭亂)’의 기록은 무협지의 장면처럼 느껴진다. 53인의 왜구가 80여 일 동안 절강(浙江)-안휘(安徽)-강소(江蘇) 3성을 휩쓸고 다니면서 4000여 명의 관병을 살상했다고 한다.
그 섬멸전에 참모로 참여한 정약증(鄭若曾)은 이런 말을 남겼다.
“8개 군(郡)에 걸쳐 3000리를 돌아다니며 싸우는데… 사람을 (비무장 민간인) 죽이지 않고 재물을 약탈하지 않고 부녀자를 범하지 않았다. 이렇게 깊이 쳐들어온 뜻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헤아릴 길이 없다.”
이 53인의 ‘특수부대’는 날아오는 화살을 맨손으로 잡아채는 무예의 고수들이어서 통상적인 병력과 전술로는 도저히 막아낼 길이 없었다고 한다. 이들이 제2의 황도 남경(南京)에 들이닥치자 1000여 명 수비대가 이틀 동안 성문을 걸어 잠그고 쩔쩔맸다고 한다. 결국 수천 명을 동원한 치밀한 작전으로 겨우 섬멸했다고 한다. ([바이두백과] ‘嘉靖倭乱’)
이 왜구의 정체가 무엇인지, 침공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일본 사츠마(薩摩)의 낭인(浪人) 출신 해적집단으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지만 석연치 않다. 정약증 등 당시 사람들은 대거 침공을 위한 정찰대로 보기도 했지만 그 역시 석연치 않다.
어쩌면 이런 중대한 문제를 석연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수수께끼로 남겨둔 것이 가정제 시기 대 왜구 정책의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브루클린의 차이나타운. 뉴욕은 서양에서 가장 많은 중국인이(90만명이상) 거주하는 도시다[위키피디아]
명말청초의 문학작품에 많이 등장한 해적으로 서해(徐海)와 그 아내 왕취교(王翠翹)가 있다. 일본 규슈(九州)에 근거를 두고 중국 동남해안에 큰 세력을 이룬 서해는 절강-남직예(南直隸, 즉 안휘) 총독 호종헌(胡宗憲, 1512~
1565)의 초무(招撫)에 응해 1556년 투항했으나 호종헌은 서해를 용납하는 척하면서 섬멸할 준비를 계속해서 그를 끝내 제거했다.
왕취교는 강남의 명기(名妓)였던 여인으로 서해 일당의 약탈 때 잡혀가 서해의 아내가 되었다. 호종헌이 서해를 초무하기 위해 연락할 때 서해의 수준 높은 서신을 보고 크게 놀랐는데 알고 보니 왕취교가 써준 것이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여인의 존재를 알게 된 호종헌이 왕취교에게 따로 예물을 보내며 서해의 설득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서해가 죽은 후 그 시신을 예를 갖춰 매장하게 해주고 자신이 여승이 되게 해달라는 요청을 호종헌이 모두 거부하고 부하 장수의 첩으로 주려고 하자 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하는 것이 수많은 희곡과 소설에 나타나는 왕취교의 모습이다.
당대 최강의 해적왕으로 명성을 떨친 왕직(汪直) 역시 호종헌의 초무에 응하다가 1559년에 처형당했다. 왕직은 1553년 관군의 토벌을 피해 일본에 가 있었는데 이듬해 총독에 부임한 호종헌이 그 가족을 옥에서 풀어주고 우대하면서 왕직에게 사람을 보내 초무했다.
왕직은 이를 믿고 무역의 허가를 청하러 절강으로 왔다가 순안사(巡按使) 왕본고(王本固, 1515~1585)에게 체포되고 얼마 후 처형되었다.
호종헌이 왕직을 꼭 죽이기 위해 속여서 불러온 것 같지는 않다. 호종헌은 당대의 세도가 엄숭의 1562년 실각 후 그 일당으로 몰려 자살에 이른 인물이다. 왕직의 무역업을 ‘양성화’시켜 주고 그로부터 이득을 얻고자 한 것 같은데, 고지식하기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왕본고가 나서는 바람에 왕직의 처형을 막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후반에 잠잠하던 왜구가 16세기 초~중엽 가정제 시기에 폭증한 이유가 무엇일까? 정치가 부실해서 암묵적으로 진행되어 온 해외무역의 틀이 흔들린 데 문제가 있었을 것을 우선 생각할 수 있지만, 배경조건의 큰 변화 또한 생각할 수 있다. 은(銀)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초에 아편이 부각되기 전까지 중국은 대외교역에서 ‘은 먹는 하마’였다. 해외의 중국 상품 수요에 비해 중국의 해외상품 수요가 훨씬 작았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은이 수백 년간 계속해서 중국으로 흘러들었다.
은의 중국 대량 유입이 시작된 것이 16세기였다. 1526년 개발된 이와미(石見) 은광이 일본의 구매력을 크게 늘려줌에 따라 동남아시아 방면에서 주로 펼쳐지고 있던 중국인의 해외 활동이 일본 방면으로 옮겨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 김기협 전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 - 21.16세기 중국인이 왜구(倭寇)로 나선 사정 - 국가가 바닷길 통제하자 ‘해적업자’ 창궐 / 월간중앙, 2021년 7월호 ,2021. 6. 17.
22.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원정 항해 그 후
-포르투갈 함대, 인도양서 잔혹한 ‘해적질’
퇴로 없던 원정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 단기간에 교역 거점 장악
16세기 중반부터 폭력 줄이고 현지 중계무역에 집중해 ‘해상제국’ 이뤄
▎바스코 다 가마 함대가 리스본을 출항하는 모습. / 사진:위키피디아
인도양에 유럽인의 선단이 처음 나타난 것은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포르투갈 함대였다. 1497년 7월 8일 리스본을 떠난 네 척의 배는 12월 16일 남아프리카의 동남해안, 10년 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도달한 지점을 지나 인도양에 들어섰다.
동아프리카 해안을 북상해 4월 14일 말린디(Malindi, 케냐의 항구도시)에 도착한 다 가마는 아랍인 항해사를 고용해서 인도의 칼리쿠트(Calicut, 지금의 Kozhikode)를 향해 인도양을 가로질렀다. 4월 24일 말린디를 떠나 5월 20일 칼리쿠트에 도착했으니 매우 순조로운 항해였다.
거기까지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가져온 상품도 예물도 현지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 푸대접을 받다가 분쟁을 일으키고 8월 29일에 서둘러 칼리쿠트를 떠났다.
바람이 맞지 않을 때 억지로 떠났기 때문에 20여 일에 건너간 항로를 100여 일 걸려 아프리카 해안까지 돌아오는 동안 선원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남은 사람 중에도 괴혈병 환자가 많았다. 그래서 한 척의 배를 버리고 두 척만으로 귀로에 나서서 1499년 7~8월에 포르투갈에 돌아왔다.
다 가마 자신은 이 항해를 실패로 생각한 것 같다. 그의 항해일지는 서아프리카에 도착한 후 1499년 4월 25일에 중단되는데, 그 직후 다 가마는 배 한 척을 먼저 귀국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산티아고 섬에서 병이 위중해진 동생을 돌보겠다며 마지막 배까지 부관에게 맡겨 귀국시켰다.
선장으로서나 함대 사령관으로서나 어울리지 않는 이 행동은 실패의 책임에 대비하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생각되는데, 막상 그가 몇 주일 후 다른 배에 편승해 리스본에 들어왔을 때는 열렬한 환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식으로 교역을 벌이지도 못하고 여기저기서 주워오다시피 한 약간의 화물이(후추 등) 대단히 값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170명 가운데 55명이 살아 돌아온 이 항해를 ‘성공’으로 여겼기에 인도에 원정대 파견하는 것이 포르투갈의 연례 사업이 되었을 것이다.
1500년 출항한 카브랄의 제2차 원정대는 칼리쿠트에 가서 협정을 맺고 상관(商館, factory)을 열었지만 곧 토착 상인들과 분쟁이 일어나 수십 명이 살해당했다. 카브랄은 이 사태를 현지 군주의 책임으로 돌려 항구의 배들을 약탈하고 수백 명을 살육하는 등 유럽 기독교인의 위엄을 떨치고 돌아왔다.
포르투갈인 폭력, 현지인들의 상상 초월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
다 가마와 카브랄 이래 인도양에서 포르투갈인의 폭력성은 현지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번스틴은 [A Splendid Exchange: How Trade Shaped the World 교역의 세계사]에서 이 상황을 이렇게 그렸다.
“유럽인 도착 이전에 아시아의 교역 세계가 ‘평화의 낙원’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인들이 관세를 지불하고, 현지 군주에게 예물을 바치고, 해적의 활동을 어느 정도 억제하기만 한다면 인도양은 ‘자유의 바다’라고 할 수 있었다.
어느 나라가 해상운송을 통째로 장악하려 든다는 것은 상인들에게나 군주들에게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1498년 어느 날 전투태세를 완비한 바스코 다 가마가 칼리쿠트 항구에 들어서면서 이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인도양에 유럽인이 나타났을 때 그 해상전투력이 현지인을 압도했다는 인상을 받는 것은 짧은 시간 내에 제해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1509년 2월 3일의 디우 해전(Battle of Diu)이 포르투갈의 인도양 제해권을 열어준 결정적 계기였다. 인도 서북부 구자라트의 디우 포구에서 벌어진 이 해전은 현지세력과 포르투갈인 사이의 전면전이었다.
오토만제국과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이 함대를 보내 구자라트 술탄과 연합함대를 만들었고, 베네치아도 많은 지원을 보냈다고 한다. 베네치아는 중동 지역을 거치는 기존 교역로를 지키기 위해 포르투갈의 해로 개척을 저지하는 입장이었다.
양측 모두 카라크(Carrack)가 주력선이었다. 카라벨(Caravel)에 이어 개발된 카라크는 장거리 항해에 적합하고 대포를 적재하기 좋은 구조여서 카라벨과 함께 대항해시대 초기의 주역이었는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지중해에서 계속되는 접촉과 충돌을 통해 대포도 카라크도 이슬람세계에 잘 보급되어 있었다. 디우 해전에 동원된 카라크는 현지세력이 10척, 포르투갈이 9척이었다.
그런데 이 전투가 포르투갈 측의 완승으로 끝난 까닭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함선과 대포의 우열보다 임전 자세의 차이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전투의 준비와 진행 과정을 보면 포르투갈인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든 점이 제일 눈에 띈다.
양측의 임전태세가 왜 이렇게 달랐을까? 포르투갈 측이 말 그대로 ‘죽기 아니면 살기’의 상황에 처해 있던 사실부터 생각해야겠다. 다 가마의 제1차 원정대의 170명 중 55명이 살아 돌아온 사실을 앞서 말했다. 카브랄의 제2차 원정대 역시 13척의 배 중 6척만이 돌아왔다.
이 시기 장거리 항해에 나선 유럽인 중 싸움에서 목숨을 잃는 숫자보다 폭풍이나 괴혈병의 희생자가 훨씬 더 많았다. 몸 사린다 해서 살아 돌아갈 희망이 크지 않고, 돌아가기만 하면 팔자를 고칠 소득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아프리카를 하나의 대륙으로 알고 있지만 유럽인에게는 북아프리카와 ‘사하라이남(Sub-Saharan Africa)’이 별개의 영역으로 인식되어 왔다. 모로코에서 이집트까지 지중해에 면한 지역과 홍해에 면한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 까지는 유럽인에게 어느 정도 알려진 곳이었다.
이슬람이 일찍부터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 남쪽으로 사막 너머에는 산업이 미개하고 정치조직이 느슨한 광대한 초원과 열대우림 지역이 펼쳐져 있었다. (아프리카대륙의 중·남부에 농업 문명 전파가 늦었던 까닭은 다이아몬드가[Guns, Germs, and Steel 총, 균, 쇠] 179~180쪽에서 설명했다.)
전투보다 폭풍이나 괴혈병 희생자 훨씬 많아
▎1502년에 포르투갈에서 그려진 해도(Cantino planisphere).
토르데시야스조약에 규정된 경계선이 표시되어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권은 포르투갈에 적대적인 지역이었지만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곳이었고 이용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진 곳이었다. 반면 사하라 이남 지역은 발붙이기 어려운 곳이었다. 15세기 중엽에 포르투갈인은 서아프리카 지역에 진출했다.
서아프리카는 ‘상아해안·황금해안·노예해안’ 등 이름이 붙은 것처럼 큰 경제적 가치를 가진 곳이었다. 오랫동안 사하라사막의 대상(隊商)을 통해 다량의 황금과 노예를 이슬람권에 공급해 온 이곳에 포르투갈이 해로를 뚫으면서 해상활동의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곳까지는 이슬람권의 인프라가 갖춰져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서아프리카 초원지대(sahel)를 넘어 열대우림부터는 이슬람도 아직 침투하지 못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링컨 페인은 [The Sea and Civilization 바다와 문명] 387쪽에 아프리카 남부 지역 진출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이슬람의 영향과 아랍어 사용자가 있는 지역을 넘어서면 항해의 어려움만이 아니라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정보 수집에 지장이 생겼다.
1498년에 포르투갈인들이 대륙 남단을 돌아 동아프리카의 아랍어 사용 지역에 도달할 때까지 이 문제가 계속되었다.
언어 소통이 안 되고 참고할 만한 현지인의 연안 항해 경험도 없는 지역에서 14세기 후반 내내 포르투갈인의 활동이 확장되기 어렵다가 인도양에 들어서자 확장이 빨라진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동아프리카 해안에는 이슬람 항구 도시들이 적도 이남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남아프리카를 돌아 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다 가마 함대는 모잠비크에서 이슬람권에 들어섰고, 그곳에서 무슬림을 가장하고 현지 군주에게 접근하다가 실패했다.
그러나 일단 이슬람권에 들어와서는 이용할 만한 틈새를 찾을 수 있었다. 케냐의 몸바사(Mombasa)에서는 쫓겨났지만 몸바사와 적대관계에 있던 인근의 말린디에서 인도양 횡단의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1487년 디아스의 항해 이래 포르투갈 원정대는 서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 사이를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는 대신 서남쪽으로 남대서양 깊이 들어갔다가 편서풍을 타고 동쪽으로 돌아오는 항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1500년 카브랄의 함대는 이 항로를 예정보다 서쪽으로 벗어나는 바람에 뜻밖에 브라질에 상륙하게 되었고, 후에 스페인이 독점하는 아메리카에서 브라질만을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차지하는 단초가 되었다.
남대서양을 크게 우회하는 이 항로는 해안선을 따라가는 항로보다 거리는 멀지만 당시의 범선 항해에 적합한 조건이어서 유럽인의 인도양 진출에 큰 열쇠가 되었다.
그러나 위험이 큰 항로였다. 다 가마 함대는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레온을 떠난 후 90여 일 만에 남아프리카 해안에 도착했는데, 이 기간이 괴혈병의 한계선이었다.
괴혈병은 30일 이상 비타민C 공급이 끊기면 증세가 나타날 수 있고 90일 이상이면 대다수 사람들에게 치명적이다. 그렇게 긴 기간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은 대항해시대의 선원들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감귤류 섭취가 도움된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알려졌지만 널리 확인되어 영국 해군에서 제도화된 것은 1795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300년간 약 200만 명의 선원이 괴혈병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화 함대가 선상에 채마밭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남대서양 항로는 풍랑도 예측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난파의 위험이 컸고, 일정이 조금만 길어지면 괴혈병의 위협이 많이 늘어났다. 인도양에 들어서기만 하면 그런 위험이 줄어들었다.
그 위험을 뚫고 인도양에 들어선 포르투갈 선원들이 어떤 상황에나 ‘죽기 아니면 살기’의 자세로 임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인도양 사정에 익숙해진 후 포르투갈인들이 본국과의 무역보다 현지의 중계무역에 더 힘을 쓰게 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인도양 진입 초기 포르투갈인의 폭력성을 대표한 인물이 바로 다 가마였다. 1502년 제4차 포르투갈 원정대를 이끌고 갔을 때 특히 엽기적인 소행이 많이 전해진다.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손발을 자르고 귀와 코를 도려내는 짓이 예사였다.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칼리쿠트 군주가 사절로 보낸 승려를 첩자라 하여 혀와 귀를 자르고 개의 귀를 꿰매 붙여 돌려보낸 일이다. 400여 명 순례자를 태운 배를 바다 한가운데서 나포해 참혹하게 약탈한 다음 사람들이 탄 채로 불태워버린 일도 있었다.
거슬리는 사람 손발 자르고 귀와 코 도려내
▎소형 범선 카라벨 복제품. / 사진:위키피디아
테러리즘은 전쟁에 늘 이용되어 온 전술·전략이다. 문제는, 인도양의 현지인들은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포르투갈인들이 일방적으로 전쟁을 벌이러 들어온 것이다. 디우 해전의 경위를 봐도 현지세력의 상황 인식이 허술했다. 이집트와 오토만이 함대를 보낸 것은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통한 기존 교역로가 위협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디우 항구의 장관은 두 길 보기를 했다. 이집트·오토만 함대에 협조하는 시늉만 하다가 포르투갈의 승전이 확실해지자 얼른 발을 빼고 잡아둔 포로를 바로 반환했다. 디우 입장에서는 포르투갈 배든 무슬림 배든 교역이 이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십자군의 레반트 지역 침공 때도 대다수 현지세력은 이슬람·기독교의 대립의식 없이 미시적 득실에 따라 움직임으로써 십자군에게 틈새를 만들어주었다. 당시의 무슬림에게는 ‘이교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십자군이 넓은 지역을 점령하면서 사회경제적 조건에 큰 압력을 일으키고 수십 년이 지나자 비로소 전면적 항전이 시작되었다. 16세기 초 인도양의 현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포르투갈 세력이 짧은 시간 내에 항로의 주요 거점들을 모두 점령할 수 있었던 데는 어느 항구에도 성곽 등 견고한 방어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고 일반 선박의 무장 수준이 낮은 이유도 있었다. 유럽인의 교역활동에는 무력이 자주 동원되었기 때문에 선박도 항구도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던 반면 인도양은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약간의 해적이 있었지만 선박을 납치해도 적정선의 몸값을 요구하는 정도로, 적극적인 토벌의 필요성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포르투갈, 인도총독부 세워 교역 항로 통제
▎대항해시대 초기 주력 범선 카라크 복제품. / 사진:위키피디아
인도양의 교역은 많은 이득을 창출하는 사업이었고, 상인과 무역업자들도, 항구를 관리하는 공권력도, 간간이 끼어드는 해적들도, 이 교역의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교란하는 일 없이 자기 몫을 누리며 지내고 있었다.
(차우두리는 [Trade and Civilisation in the Indian Ocean 인도양의 교역과 문명] 제5장에서 인도양 일대에 안정된 형태로 널리 자리 잡은 이 교역 패턴을 ‘거점 교역(emporium trade)’으로 설명했다.)
15세기 초에 명나라 함대가 큰 규모의 무력을 싣고 나타났지만 이 생태계를 교란하기보다는 참여해서 한 몫을 맡는데 그쳤다. 그런데 그 100년 후에 나타난 포르투갈 함대는 가장 큰 것이 정화 함대의 10분의 1이 안 되는 규모였음에도(인원 기준), 그 힘으로 모든 경쟁세력을 파괴하고 교역을 독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인도양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악질 해적의 출현이었다.
그러나 인도양의 교역로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려는 포르투갈의 의지는 관철되지 못했다. 핀들레이와 오루어크는[Power and Plenty 권력과 풍요]에서 여러 연구자의 분석을 종합, 16세기에 말라바르(인도 서해안) 지역산 후추 중 30%만이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그중에도 절반은 포르투갈 함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레반트 지역을 통해 수송되었다고 밝혔다. (157쪽) 인도양 향료 교역 무대에서 포르투갈의 몫은 20%에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수가타 보세도 [A Hundred Horizons 100개의 수평선]에서 포르투갈(과 그 뒤를 이은 유럽세력)이 인도양 교역체계를 바꾸기보다 그에 적응하여 편입된 것으로 보았다.
▎갈레온 복제품. 카라크의 뒤를 이어 19세기까지 주력 범선이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16~17세기 유럽인의 인도양 초기 진출이 그 지역의 경제적·사회적 통합성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무너트렸는가? 포르투갈인이 무장교역의 새로운 형태와 해상주권이라는 낯선 주장을 인도양 해역에 들여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 세기는 유럽인과 아시아인 사이의 ‘파트너십의 시대’ 또는 인도와 인도양에서의 ‘억제된 분쟁의 시대’로 해석된다. 이 시기 동남아시아 역사의 연구를 통해 경제적·사회적 쇠퇴라는 단순한 관점은 부정되었다.” (19쪽)
포르투갈인은 향료의 유럽 시장 공급만을 생각하며 인도양에 들어왔고, 처음에는 그 목적을 위해 무력에만 의존했다. 그러나 현지 사정에 익숙해지면서 그보다 위험이 적으면서 수익성이 높은 사업 영역에 눈뜨게 되었다.
폭풍과 괴혈병의 위협에 시달리며 왕복에 2년씩 걸리는 본국과의 교역보다 아시아 각 지역 사이의 중계무역이 더 수지맞는 사업이 된 것이다.
1540년대 이후 중국과 일본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된 것은 그 결과였고, 현지 여러 세력과 거래 관계를 맺으면서 무력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던 태도도 얼마간 바뀌게 되었다.
차우두리는 [인도양의 교역과 문명]에서 16세기 인도양의 포르투갈 활동을 하나의 ‘해상제국’으로 규정하면서 그 역사를 세 개의 단계로 구분했다. (65~67쪽) 1515년까지의 ‘개척기’에는 그 지역의 잠재적 경쟁자들이 허를 찔린 상태에서 중요한 항구 여러 곳을 삽시간에 점령할 수 있었다.
말라바르 해안의 고아(Goa)에 인도총독부(Estado da India)가 자리 잡은 후 1560년까지 ‘전성기’는 항로의 독점이라는 애초의 목표에 상당히 접근한 시기였다. 요새화된 일련의 요충지를 거점으로 정기적으로 항로를 시찰하는 포르투갈 함대에 정면으로 맞설 다른 해상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인도양을 항해하는 대부분 상선이 포르투갈인의 통제를 받았다.
인도총독부의 제1 과제는 유럽 시장을 향한 경쟁 노선인 중동 방면 교역의 봉쇄였다. 이 과제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유럽 시장에서 향료 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1560년 이후 ‘쇠퇴기’의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차우두리는 지적한다.
하나는 현지인의 도전 때문에 항로의 독점이 약화된 것이다. 말라카해협을 장악한 포르투갈 세력을 피해 순다해협(자바와 수마트라 사이)을 무슬림 상선이 많이 이용하게 되었고 그 거점이 된 수마트라 북단의 아체(Aceh) 술탄국이 강력한 함대를 갖추게 되었다.
무슬림 상선이 중동지역을 통해 지중해로 보내는 향료 때문에 유럽의 향료 가격이 떨어지고 포르투갈의 이익도 줄어들었다.
1513년부터 중국 연해 진출… 40년 간 해적 취급받아
▎바스코 다 가마의 이름을 붙인 다리,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 인근 타구스강을 가로지른다. 총 길이 17.2㎞. / 사진:위키피디아
차우두리가 지적하는 또 하나 포르투갈 세력 쇠퇴기의 변화는 포르투갈 선단의 현지 교역 참여 비율이 커진 것이다. 중심 상품인 향료만 하더라도 유럽의 소비는 세계시장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그리고 인도양의 해상교역에서 향료는 많은 상품 중 하나일 뿐이었다.
동아프리카·이집트·페르시아·인도·동남아시아, 나아가 중국과 일본까지 주변 여러 지역 사이의 교역이 항로의 장악력을 확보한 포르투갈에 갈수록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사업의 입체화라는 점에서 발전의 의미도 있는 변화였지만 참여자의 다변화라는 점에서 경쟁의 격화를 불러옴으로써 네덜란드와 영국 등 후발 주자들의 추격을 쉽게 해주는 조건이 되었다.
포르투갈인은 1513년부터 중국 연해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40년 동안 교역 상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해적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다가 1554년에 교역 허가를 받고, 3년 후에는 마카오 기지의 임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점에 포르투갈인의 중국 교역이 공식화된 데는 일본과의 교역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인은 1543년에 일본 교역을 시작했고, 1550년부터는 매년 한 차례 고아와 나가사키(長崎) 사이의 운항이 시작되고, 마카오에 기항하게 되었다.
고아와 나가사키 사이를 운항한 배는 카라크였는데, 처음에는 500톤급 배가 다니다가 점점 커져서 1000톤급이 다니게 되었다. 당시 일본인은 처음 보는 이 큰 배를 ‘구로후네(黑船)’라고 불렀는데, 포르투갈인은 ‘은(銀)의 배(nau da prata)’
라 불렀다. 일본에서 가져오는 가장 중요한 상품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주는 별명이다. 1526년 개발된 이와미(石見) 은광은 아메리카의 거대 은광이 가동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세계 최대의 은광이었고, 이 시기 일본의 은 생산은 전 세계 생산의 3분의 1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에서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5대 1이었는데 유럽에서는 12대 1이었다고 한다. (핀들레이와 오루어크, [권력과 풍요] 214~216쪽) 중국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외국상품은 많지 않았는데, 은 하나만은 거의 무한정의 수요가 있었던 것이다.
가정제 시기에(1522~1566) 왜구 활동이 늘어난 것도 일본의 은 생산 급증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 포르투갈인이 왜구 대신 중국의 은 공급을 맡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은에 대한 거대한 수요가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원인을 나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경제의 팽창에 따라 화폐 유동성의 수요가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경제학자들의 설명도 알 듯 말 듯 하다. 내가 이해하든 못하든 명·청 시대의 중국에 막대한 양의 은이 쏟아져 들어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중국의 우월한 생산력이 뒷받침하는 수출초과 현상이 은의 수입으로 채워지면서 이 기간 동안 유지된 것도 사실이다. (이 시기 은의 세계적 이동 상황은 핀들레이와 오루어크의 위 책 212~226쪽에 개관되어 있다.)
중국의 은 수요가 이끌어낸 또 하나의 현상이 아메리카와 동아시아를 연결한 ‘마닐라 갈레온(Manila Galleon)’이다. 초기 대항해시대의 주역이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494년 교황의 중재로 토르데시야스조약(Treaty of Tordesillas)을 맺어 대서양 상의 어느 자오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의 영역으로 했다.
이에 따라 아메리카는(브라질 제외) 스페인,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포르투갈의 몫이 되었는데, 스페인은 동쪽 끝의 향료제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마젤란의 항해(1519~1522) 이래 아메리카로부터 아시아에 진입하는 길을 찾아 태평양 항해를 시작했고 결국 필리핀을 차지하게 되었다.
1560년대에 태평양 항로가 안정되면서 멕시코와 필리핀 사이에 상선의 왕래가 잦아졌고, 아메리카의 은과 중국의 비단이 그 주된 교역품이었다.
초원제국은 무력으로, 해상제국은 교역 통해 자원 취득
▎남아프리카 공화국 희망봉에 있는 바스코 다 가마 기념 조형물. / 사진:위키피디아
흉노제국이 진·한 통일과 동시에 나타난 이유를 생각하다가 ‘그림자 제국’의 개념을 떠올리고 무척 흡족했었다. 자체 동력에 의해서 제국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중원의 통일에 따른 상황 변화에 적응하는 노력의 결과로 흉노제국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인데 흥기에서 쇠퇴까지 흉노제국사의 굴곡이 잘 설명되는 해석이다.
내 공부가 깊지 않은 영역에서는 ‘독창적’인 생각을 내놓기가 조심스럽지만, 이 개념은 설명력이 좋아서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리 독창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The Shadow Empires: imperial state formation along the Chinese-Nomad frontier 그림자 제국: 중국·유목세계 접경에서 제국체제의 형성’이란 제목의 토머스 바필드의 논문이 있다는 사실을 한 독자가 알려주었다. (수전 앨코크 등 엮음, [Empires 제국](2001) 소수) 그의 1989년 책 [위태로운 변경]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개념인데 그사이에 다듬어낸 모양이다.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이다. 내가 직접 연구하는 영역에서는 독창적 관점을 세울 필요가 있지만 다른 연구자들의 성과를 독자들에게 설명해드리는 작업에서 새로운 생각을 떠올린다면 헛것을 본 것이기 쉽다. 그래도 이번 작업에서는 학계에서 융화되어 있지 않은 여러 영역에 걸친 주제를 다루려니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꽤 있다.
논문을 읽어보니 발표 후 20년이 되도록 널리 파급되지 않은 (그리고 본인의 후속 연구도 보이지 않는) 까닭을 알 듯하다. ‘그림자 제국’의 특성을 너무 넓게 일반화하려 한 것 같다.
바필드는 ‘그림자 제국’의 범주에 ‘반사형 제국(mirror empires)’, ‘해상-교역 제국(maritime trade empires)’, ‘포식형 제국(vulture empires)’, ‘추억의 제국(empires of nostalgia)’의 네 개 유형을 포괄하려 했는데, 이 유형들 사이의 차이가 너무 커 보인다.
‘포식형 제국’과 ‘추억의 제국’은 지속성이 약하다. 제국의 해소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봐야 할 것 같다.
‘포식형 제국’의 사례로 요·금·청 등 만주세력이 세운 왕조들을 예시하는데, 그 왕조들은 이른 단계에서 ‘본격 제국(primary empires)’의 틀을 갖추었으므로 ‘그림자 제국’의 범주에 머무른 것은 짧은 과도기에 불과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흉노·돌궐 등이 포함되는 ‘반사형 제국’이 ‘그림자 제국’ 개념의 표준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비추어 ‘해상-교역 제국’에 관해 생각할 점이 많이 있다. 서양 고대의 페니키아와 아테네, 근세의 포르투갈 해상제국과 대영제국 등 ‘해상제국’의 이름이 그럴싸한 현상이 많이 있었다. 중세 동남아시아의 스리비자야도 이 범주에 들어갈 것 같다.
‘본격 제국’과 ‘그림자 제국’의 차이는 일차적으로 생산력의 자족성(autarchy) 여부에 있다.
(바필드는 본격 제국의 조건으로 (1) 다양성의 포용, (2) 교통수단, (3) 통신수단, (4) 폭력의 독점, (5) 통합의 이념을 꼽았지만, 생산력의 자족성이 더 근본적인 조건으로 생각된다.)
상업세력의 해상제국은 유목민의 초원제국과 마찬가지로 제국조직의 유지에 필요한 기초자원을 생산력을 가진 주변의 정착사회로부터 취득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상제국은 몇 가지 초원제국과 다른 조건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아메리카의 은, 해상교역 판도 바꿔
▎포르투갈의 ‘구로후네(흑선)’를 그린 17세기 일본 그림. / 사진:위키피디아
첫째, 자원 취득의 기본 수단이 초원제국에게는 무력인데 해상제국에게는 교역이다. 해상세력에게는 항구의 범위를 넘어 육지를 공략하고 점거하는 데 적합한 무력이 없으므로 교역의 이득을 제공해야 필요로 하는 자원을 취득할 수 있다. 해상세력의 무력은 해상의 경쟁세력을 상대로만 사용되는 것이다.
둘째, 초원제국이 한두 개 본격 제국에만 의지해 성립·유지되는 반면 교통로가 여러 방향으로 열려있는 해상제국은 여러 개 육상세력과의 거래관계를 나란히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육상세력에게 교역의 이득을 제공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지만, 경쟁의 문턱이 낮아서 해상제국이 오래 지속되기 어려운 조건도 된다.
16세기 인도양의 포르투갈 해상제국이 상당 기간 유지된 것은 본국의 국력이 압도적이어서가 아니라 현지의 교역 조건에 잘 적응한 결과였다. 무장 함대에 의한 공격적 항로개척은 현지의 잠재적 교역 수요를 불러일으킴으로써 교역의 이득을 크게 늘렸다.
그리고 1540년대부터는 일본과 아메리카에서 생산이 늘어난 은을 중국과 인도 등 생산력이 높은 지역에 유입시키는 사업에 앞장섬으로써 교역의 주도권을 지킬 수 있었다.
17세기 들어 인도양의 현지세력 아닌 네덜란드와 영국 등 다른 유럽세력이 이 해상세력의 경쟁자로 부각된 데는 아메리카 은의 유럽 공급이 많이 늘어난 이유도 있었을 것 같다.
[출처] : 김기협 전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 - 22.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원정 항해 그 후 -포르투갈 함대, 인도양서 잔혹한 ‘해적질’ / 월간중앙, 2021년 8월호 ,2021. 6. 17.
23.마테오 리치 필두로 가톨릭 선교사들 활약
- 야만의 유럽, 중국서 문명으로 각인되다
선교 초반부터 우수성 선전 주력, 지식인·관료들 저술·출판 지원
핵심 제도 역법에도 영향, 이슬람·인도이어 존중받는 반열에 올라
▎마테오 리치가 1602년에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 사진:바이두
문명권에 속한 사람들은 주변의 타자(他者)와의 대비를 통해 문명인으로서 자긍심을 누렸다. 중국에서 이 타자들을 부른 이름에는 융, 적, 만, 이(戎, 狄, 蠻, 夷) 등 여러 글자가 있었지만 이 글자들의 훈(訓)이 모두 “오랑캐”라는 사실은 ‘타자=오랑캐’의 관념이 일반적 현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춘추시대까지는 중원(中原) 지역에도 모자이크처럼 오랑캐가 여기저기 섞여 있었다. 거자오광은 [歷史中國的內與外 역사 속 중국의 안과 밖](2017)에서 춘추전국시대에 여러 오랑캐가 뒤섞여 있던 상황을 보여주는 여러 사료를 인용하면서
“그 시대의 ‘중국’이란 함곡관(函谷關) 동쪽으로 황하 중하류 유역일 뿐이었으며 서북의 ‘융적’도 남방의 ‘만이’도 포괄하지 않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5~10쪽)
‘중화문명’이라고 불릴 농경문명이 전국시대에 중원을 채운 뒤로 오랑캐는 외부의 존재가 되었다. 진-한(秦-漢) 제국이래 중국인의 의식을 가장 많이 사로잡은 오랑캐는 서방과 북방의 유목민이었다.
중국 동해안 일대의 동이가 제국에 흡수된 뒤 바다 건너 한반도의 동이는 농경을 비롯한 중국문명을 전수받아 중화제국에 종속하는 길로 들어섰고, 백월(百越) 등 남방의 오랑캐는 중화제국에 큰 위협을 가하는 일 없이 꾸준히 정복-흡수되었다.
‘초원 유목민’에서 ‘바다 오랑캐’로 중국 위협 세력 변화
▎유사(儒士) 복장으로 흔히 그려지는 마테오 리치 초상에 성모자상(聖母子像)과 함께 천문의기와 하프시코드가 곁들여져 있어서 그의 ‘매력의 포인트’를 보여준다. / 사진:위키피디아
다른 방면의 오랑캐와 달리 서북방 유목민이 오래도록 중화제국의 문젯거리가 된 까닭이 무엇일까? 몇 가지 조건을 생각할 수 있다.
(1) 동쪽과 남쪽으로는 중국의 농경문명이 확장되어 나갔기 때문에 중화제국에 편입되거나(남쪽) 안정된 조공관계
를 맺었다(동쪽). 농경문명의 확장이 불가능한 서쪽과 북쪽의 건조지대는 중화제국에 편입되기 어려웠고,
억지로 편입시켜도 불편이 많았고, 안정된 조공관계를 길게 끌고 갈 만한 농업국가가 들어서지도 못했다.
(2) 유목은 꽤 생산성이 높은 (농업보다는 못해도 수렵-채집보다는 우월한) 산업이었고 특이한 생활방식을 통해
강한 전투력과 상당한 조직력을 가진 사회를 키워냈다.
(3) 서방의 힌두-페르시아 문명권과 중국 사이의 교역이 자라남에 따라 그 사이의 공간에 대한 지배력이 유목민
의 입장을 강화시켜 주었다.
(1)과 (2)는 역사상 유목세력의 연구에서 많이 밝혀져 온 사실인데, (3)의 조건은 아직도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개연성은 분명하다. 페르시아와 중국 사이의 실크로드는 많은 각광을 받아 왔는데, 페르시아인과 중국인의 장거리교역보다는 중간 지역 주민들의 중계무역이 실크로드의 실체였다.
당(唐)나라 장안(長安)에 ‘파사인(波斯人)’이 많이 살았다고 하지만 페르시아 중심부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라 페르시아 주변의 유목민으로 보인다.
유목민을 포함한 중간 지역 주민들이 중계무역에 종사한 것은 그로부터 얻는 이득이 충분히 크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교역의 이득만이 아니라 양쪽 문명의 기술적 장점을 함께 섭취할 수 있다는 조건도 유목세력의 강화를 뒷받침해준 일이 많았다.
방대한 초원제국이 세워져 있을 때 동서간의 교섭이 활발했던 것은 중간세력 수취의 일원화에 따라 통과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몽골제국에서 그런 상황이 나타났으나 교역 규모가 커지는 만큼 그 이득을 향한 경쟁도 격화되었다.
4칸국 분열에도 경쟁 격화의 결과로 이해할 측면이 있는 것인데, 그에 따라 교통로의 효율성이 손상되면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 해로의 이용이 늘어나게 되었다.
명(明)나라 영락제(永樂帝)가 대함대를 건설한 것은 교역로의 비중이 육로에서 해로로 옮겨지는 추세에 맞춘 것이었다. 경제적 이득보다 제국의 안보가 더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교역의 이득이 큰 곳에 강한 중간세력이 일어난다는 것은 초원에서 거듭거듭 확인된 일이었다.
그러나 15세기 초영락제 당시에는 중국이 위협으로 느낄 만한 조짐이 해양 방면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함대 운항을 중단하고 소극적인 조공무역으로 돌아갔다.
영락제의 함대가 규모에 걸맞는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사라진 70여 년 후 그 함대가 정말 필요했음직한 상황이 포르투갈인의 인도양 진입으로 펼쳐졌다. 인도양에서 유럽인의 활동이 그 후 꾸준히 늘어나 중국의 해외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을 때, 중국인들은 그들을 새로운 유형의 오랑캐, ‘양이(洋夷-바다오랑캐)’로 인식하게 되었다.
진-한 제국 이래 1천수백 년 동안 중국의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초원의 유목민이었다. 그러나 바다오랑캐의 역할이 점점 커졌다.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淸)나라로 교체될 때까지 군사적 긴장은 북쪽에 쏠려 있었지만 중화제국의 경제적 기반을 바꾸는 변화는 남쪽 바다에서 꾸준히 일어났다.
바다오랑캐의 역할이 계속 커져서 수백 년 후에는 그 힘 앞에 중화제국이 무너지는 사태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유사(儒士) 복장 마테오 리치 초상 뒤 성모자상(聖母子像)
▎춘추시대 말기의 제후국들을 그린 이 지도에 흰 색은 오랑캐의 영역인데 실제로는 제후국들 사이에 빈틈이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 사진:바이두
“이탈리아(意大里亞)는 대서양 가운데 있으며 예부터 중국과 통교가 없었다. 만력(萬曆)간에 그 나라 사람 리마두(利瑪竇)가 경사(京師)에 이르러 [만국전도(萬國全圖)]를 지어 이르기를
‘천하에 대륙이 다섯 있으니, 첫 번째가 아세아주로 그 속에 무릇 백여 나라가 있고 거기서 첫째가는 것이 중국이요, 두 번째가 구라파주로 그 속에 무릇 칠십여 나라가 있고 그 첫째가는 것이 이탈리아요’
… 모든 구라파 제국은 다 같이 천주 야소(耶蘇)의 교(敎)를 받든다. 야소는 유대(如德亞)에서 태어났으니 그 나라는 아세아주 안에 있는데, 서쪽으로 구라파에 교를 행한 것이다. … 그 나라 사람으로 동쪽에 온 이들은 모두 총명하고 특출한 성취가 있는 선비들이며, 오로지 교를 행하는 데 뜻을 들 뿐, 녹리(祿利)를 구하지 않았다.
그들이 지은 책에는 중화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것이 많은 까닭으로 한 때 별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이를 우러렀으며, 사대부로 서광계, 이지조 같은 무리들이 앞장서 그 설(說)을 좋아하고 또 그 글을 윤색해 주었으므로 그 교가 힘차게 일어날 때 중국 땅에 그 이름이 크게 드러난 것이다.”
[명사(明史)] 권326 ‘이탈리아열전(意大里亞列傳)’의 이 내용에 담긴 정보는 마테오 리치(1552~1610) 등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몽골제국 시대에 유럽과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유럽이 표시된 세계지도도 만들어지게 되었지만 중국과 직접 조공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없는, 일-칸국 바깥의 야만 지역으로만 인식되었다.
16세기 중엽까지 포르투갈인의 활동이 늘어남에 따라 마카오 기지를 허용하면서도 그들이 가져오는 은(銀)의 가치를 인정했을 뿐, 그들의 문명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1583년 리치를 필두로 가톨릭 선교사들의 중국 내 활동이 시작되면서 유럽의 모습이 중국인들의 눈앞에 새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리치 등 선교사들은 중국 진입 초기부터 선교 사업의 성공을 위해 유럽의 문명 수준을 중국인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는 인식 아래 유럽의 자랑할 만한 면모를 소개하는데 주력했다.
그들의 중국어 저술을 1629년 이지조(李之藻, 1565~1630)가 모아 편찬한 [천학초함(天學初函)]에서 그 노력 방향을 알아볼 수 있다. 이편(理編)과 기편(器編)으로 구성되었는데, 이편은 기독교 교리를 소개한 것이고 기편은 종교 이외의 유럽 문화와 학술을 소개한 것이다.
이지조 같은 명나라 최고급 지식인-관료 중에 유럽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인식을 갖고 선교사들의 저술과 출판을 적극 지원한 사람들이 있어서 ‘서학(西學)’의 흐름을 일으켰다.
그중에 최고위 관직에서 활동한 서광계(徐光啓, 1562~1633)는 선교사들을 동원한 역법(曆法) 개정 사업을 벌여 [숭정역서(崇禎曆書)]를 편찬했고(1629~1634), 이것이 청나라에서 채용한 시헌력(時憲曆)의 토대가 되었다.
역법은 황제의 통제력이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에까지 미친다는 이념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중화제국의 가장 핵심적 제도의 하나다. 그런 중요한 제도에 유럽 수학과 천문학이 활용되었다는 것은 유럽문명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보장해주는 일이었다.
중화제국의 역사를 통해 외부 문명의 도움으로 역법의 발전을 본 일은 그 전에 두 차례 있었다. 남북조시대에 인도문명의 도움을 받은 일과 원(元)나라 때 이슬람문명의 도움을 받은 일이다. 이제 인도문명과 이슬람문명의 뒤를 이어 유럽문명이 중국에서 존중받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몽골세력이 유라시아대륙을 휩쓸던 13세기에 유럽은 중국문명권과 이슬람문명권에 비해 산업, 학술, 예술, 모든 면에서 형편없이 미개한 단계에 있었다.
그런데 16세기 말에는 여러 면에서 격차가 크게 줄어들고, 어떤 부문에서는 앞선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과학혁명이 시작된 그 사이의 기간에 ‘유럽문명’이 태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유럽문명의 탄생 과정을 해명한다는 것은 내게 벅찬 과제다. 17세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문명이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다른 문명권에 비해 짧은 기간에 형성되는 과정을 통해 이 문명이 어떤 특성을 보이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정도에 그쳐야 하겠다.
17세기 이후 유럽문명은 다른 문명권에 갈수록 큰 영향을 끼치면서 ‘근대문명’의 주역이 되었다. 이 근대문명 속에서 전개된 ‘근대역사학’은 유럽의 주도적 역할을 인류문명의 역사 전체에 투영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 사관이다. 이 관점의 한계를 밝히는 것이 “오랑캐의 역사” 작업 후반부의 중요한 목적이다.
학생 시절 읽은 윌리엄 맥닐의 [The Rise of the West 서양의 흥기](1963)를 다시 읽으면서 예전보다 읽기가 쉬워졌다는 느낌이 든다. 50년 전에는 재미있으면서도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너무 많아서 순순히 읽히지가 않았다. 그때는 유럽중심주의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내려다보게 되었기 때문에 읽기가 쉬워진 것 같다.
1960년대 유럽중심주의 사관 보여준 윌리엄 맥닐
▎19세기 말부터 유럽인이 생각한 ‘실크로드’는 중국과 유럽을 이어주는 교통로였다.
그러나 문명권 간의 ‘좁은 통로’로서 실크로드는 중국과 페르시아 지역 사이에 한정된다. 페르시아 지역부터 서쪽으로는 육상-해상의 여러 교통로가 얽혀 있어서 하나의 특정 교통로가 부각되지 않는다. / 사진:위키피디아
유럽중심주의 사관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책이다. 1963년, 서양의 동양에 대한 우위에 대한 의심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던 시절, 역사의 추동력도 서양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믿음이 세상을 휩쓸던 시절에 나온 책이다.
이 책의 1991년 개정판 앞머리에 “25년 후에 되돌아보는 [서양의 흥기]”라는 저자의 글이 붙어 있다. 이 글에서 맥닐은 책을 쓸 당시의 세계정세에 자신의 관점이 좌우된 면이 적지 않았음을 인정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오류를 스스로 지적했다. 그중 하나가 11~15세기 중국문명의 우월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서양의 흥기]를 구성한 기준에 비추어볼 때 1000년에서 1500년 사이 중국의 우월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특히 후회된다. 그렇게 했으면 책의 구조가 우아한 단순성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 단순한 구조로 과거를 구성하는 방식을 이어나가 1000~1500년은 중국의 동아시아가, 그리고 1500~
2000년은 유럽의 서양이 문명을 꽃피워 전면적 주도권을 가졌던 시대로 설정했다면 사실과도 부합하는 깔끔하고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내 식견의 부족 (그리고 유럽중심주의의 찌꺼기) 때문이었다.” (19쪽)
원래의 책에는 보이지 않던 ‘유럽중심주의’라는 말이 괄호 안에라도 나오게 된 것은 그 동안 그런 비판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90년 시점에서도 맥닐이 유럽중심주의를 정말 깊이 반성한 것 같지는 않다.
신자유주의 정당화 논설들, 21세기에는 불량식품
1963년에 나온 [서양의 흥기- 인류공동체의 역사]는 한 시대를 풍미한 세계관을 충실하게 담은 책이다.
시대가 바뀐 지금까지도 그 아류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역사서라기보다 신자유주의 노선의 선전물이라 할 것이다.
‘공정성’의 의미가 지금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데, 채점만 엄정하게 하면 공정성이 담보된다고 하는 주장에는 한계가 있다. 더 앞서는 문제가 출제 내용에 있다. 직원이나 학생을 뽑으면서 직원 노릇, 학생 노릇을 위한 본질적인 조건이 아닌, 특정 범위의 지원자에게 유리한 조건만 따진다면 공정한 선발이 될 수 없다.
역사의 평가에도 근본적인 문제는 가치관에 있다. 과거의 어느 사회나 국가가 걸었던 길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우선 그 시대 그 사회의 가치관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뒤에 그 가치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음미할 수 있다. 오늘날의 특정한 가치관을 통해서만 역사를 바라본다면 동어반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제목에서부터 맥닐은 인류의 역사 전체를 ‘서양의 흥기’ 과정으로 보았다. 18세기 이후 유럽의 주도권이 잠깐 지나가는 ‘경유지’가 아니라 아득한 옛날부터 인류 역사의 ‘목적지’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근대세계의 가치관이 언제 어디서나 유효했다는 가정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맥닐의 1991년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1500년 이후) 유럽에서 도시국가들의 주권을 빼앗은 몇몇 왕국과 새로 나타난 민족국가들은 상인과 은행가들에게 시장 활동의 확장을 위한 길을 제한 없이 풀어주었다.
반면 중국과 대부분 이슬람세계에서는 민간의 자본 축적을 싫어하는 정치체제가 자리 잡았다.
아시아의 통치자들은 한편으로 선한 정치의 이름 아래 몰수 성격의 세금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 소비자 보호의 이름 아래 자의적 가격통제를 통해 대규모 기업 활동의 발생을 가로막았다.”(28쪽)
민간의 기업 활동 확장과 자본 축적 확대가 인간사회에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믿음은 1991년까지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1000~1500년 기간의 중국을 이런 기준에서 과소평가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채점의 오류만을 인정한 것이다.
자본 축적의 지나친 확대가 체제를 불안하게 만드는 문제나 기업 활동의 지나친 확장이 자원과 환경에 일으키는 위험에 대한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본주의 가치관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가치관은 세계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환경론자 바츨라프 스밀은 인간에게 주어진 생활공간이 지구 하나뿐이라며 우주 개발에 나서자는 일론 머스크를 야유한다. 인간의 ‘세계’를 지구에 한정된 것으로 보느냐 여부에 따라 두 사람의 가치관은 확연히 다른 것이다.
16세기 유럽인은 머스크처럼 ‘무한한’ 확장 공간을 바라본 반면 같은 시기 중국인은 스밀처럼 ‘닫힌 천하’를 잘 관리하는 데 정치의 목적을 두었다. 유럽인이 잘하고 중국인이 잘못했다는 맥닐의 재단에 1963년에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1991년까지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2021년 지금 시점에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세계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맥닐의 1963년 관점을 오늘날의 일반적 관점을 기준으로 무조건 부정할 것은 아니다. 세상을 닫힌 것으로 보는 세계관도 열린 것으로 보는 세계관도 각자 나름의 타당성을 가진 것이다. 다만 1963년에는 사람들의 관점이 열린 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었고 그 사이에 균형이 꽤 되돌아온 것이다.
맥닐의 책은 한 시대 사람들의 일반적 관점을 충실히 담은 것으로서 참고의 가치가 있다. 유통기한이 지나 일반 독자들의 이용에 맞지 않게 된 재고식품과 같은 것이다. 그에 비해 21세기들어서까지 신자유주의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같은 논점을 계속 우려낸 논설들은 아예 불량식품이다.
니얼 퍼거슨의 [Civilization: The West and the Rest](2011)이 대표적인 예다. (이 책의 번역본 [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에 대한 서평을 2011년 8월 26일자 [프레시안]에 올린 일이 있다.)
유럽보다 총기 더 잘 만든 ‘남쪽 오랑캐’ 일본
▎나가시노 전투를 그린 병풍. 가운데 강가로 철포대(鐵砲隊)의 배치가 보인다. / 사진:
명나라에서 외부세력의 위협을 ‘북로남왜(北虜南倭)’라는 말로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가정제(1522~1566) 때의 일이다. 북쪽 오랑캐는 흉노 이전부터 중화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되어 온 존재다. 반면 남쪽 오랑캐는 기껏해야 성가신 존재일 뿐이었다. 역사시대를 통해 남쪽 오랑캐는 중화의 정복 대상이었고 어쩌다 일으키는 저항도 변경의 소요에 불과했다.
그런데 명나라 중엽에 이르러 북쪽 오랑캐와 나란히 지목될 만큼 부각된 남쪽 오랑캐는 바다 너머 있는 존재였다. 왜, 즉 일본이 대표선수로 나섰지만 그 배후에는 해상활동의 전반적 변화가 있었다.
명나라의 해외교역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는데 그것을 조공무역의 틀에 묶으려는 시도는 정화의 항해와 함께 끝났다. 강남 지역의 지방 세력이 참여하는 사(私)무역이 번성하면서 중국 내외의 세력구조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가 가장 먼저 첨예하게 나타난 곳이 일본이었다.
한국인으로서 중국사를 공부한 내게는 일본의 위상을 낮춰보는 습성이 있다. 한국에 비해 중국문명 도입에 불리한 입장에 있던 일본이 임진왜란(1592~1598) 같은 큰 사건을 일으킨 것은 유목세력이 종종 중국을 침공한 것과 같이 문명의 안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공부가 넓혀지는 데 따라 상황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 16세기 일본이 넓고 깊은 변화를 겪은 끝에 참으로 큰 힘을 키우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일본의 발전을 가로막아 온 최대의 약점, 다른 지역과의 교섭이 어렵다는 고립성의 문제가 13세기 이후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에 따라 완화되어 오지 않았는가?
중세 일본의 발전상에 관심이 늘어나면서도 깊이 살펴볼 겨를이 없던 차에 재미있는 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노엘 페린의 [Giving Up the Gun 총 버리기](1979). 총을 버린다는 것은 군인이든 무장 강도든 항복한다는 뜻이다.
하나의 사회, 하나의 국가가 총질에 한 번 맛을 들인 뒤에, 더 센 무기로 대치되는 것도 아닌데 총의 사용을 없앤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17~19세기 도쿠가와(德川)시대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본문 60쪽밖에 안 되는 짧은 책에서 페린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다.
▎철포대의 모습. 야간사격에서 총신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띠와 총신 사이에 끈을 매어 놓았다.
임진왜란에서 큰 위력을 발휘한 ‘조총(鳥銃)’이 어쩌다 서양에서 들어온 것 정도로 생각했던 데부터 문제가 있었다. 1543년 규슈(九州)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들어온 포르투갈인에게 처음 얻은 화승총(火繩銃, arquebus)이 ‘다네가시마’란 이름으로 불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적-전술적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이뤄 50년 후에는 유럽인보다 더 유용하게 총기를 구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페린은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와 다케다 가츠요리 사이의 나가시노(長篠) 전투를 페린은 예시한다. 3만8000명 오다 군 중 1만 명이 총을 갖고 있었고, 그중 정예 3000명을 다키 강 한쪽에 3열로 배치해 강을 건너오는 적군 기마대를 저격한 것이 결정적 승인이었다고 설명한다.)
도입한 지 50년 만에 유럽인보다 더 총기를 잘 쓰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제련 기술과 장인(匠人) 정신 두 가지가 지목된다. 이 두 가지가 당시 일본의 도검(刀劍) 제조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역사상 최고의 도검 명장(名匠) 중 하나로 꼽히는 한케이가 원래 총포 장인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소개한 것이 흥미롭다.(62~63쪽)
철판을 두드려 펴서 접기를 수십 차례 거듭해서 강인하고 예리한 칼날을 만드는 제련 기술이 총포 제작에도 활용되었다면 유럽보다 튼튼한 총신(銃身)을 만들 수 있었을 것 같다.
제련 기술이나 장인 정신의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배경조건이 필요하다. 다수의 장인들이 품질 향상에 전념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와 안정된 사회관계가 필요한 것이다.
이 조건의 변화에 관한 연구를 나는 세밀히 살피지 못했지만, 13세기 후반 몽골 침공을 계기로 급속한 발전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한다. 15세기 후반 센고쿠(戰國)시대에 접어든 것도 경제성장의 여파로 이해한다.
나가사키 체류 독일인 켐퍼 “평화로운 나라 일본”
1909년의 사진에 담긴 일본도 다듬는 모습. / 사진
중국의 전국시대와 일본의 센고쿠시대 사이에는 1천수백 년의 시차가 있지만 공통된 특징이 적지 않았다. 양쪽 다 경제성장에 따라 군대와 전쟁의 대형화가 가능하게 된 결과였고, 정치사상과 제반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전국시대를 통해 중화제국이 빚어져 나온 것처럼 센고쿠시대는 도쿠가와 막부(幕府)체제로 귀결되었다.
16세기 센고쿠시대의 일본은 또한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나타날 여러 현상의 특징을 앞서서 보여주기도 했다. 중국 입장에서 보면 ‘바다오랑캐’의 면모를 유럽세력보다 먼저 맛볼 수 있던 대상이었다. 16세기 ‘북로남왜’의 ‘남왜’는 해상세력을 대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독일인 의사이자 박물학자인 엥겔베르트 켐퍼(Engelbert Kaempfer, 1651~1716)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파견으로 1690년부터 2년간 나가사키에 체류했고, 그 사후에 출간된[일본사]는 일본의 개항 때까지 서양에서 일본에 관한 가장 중요한 참고서였다. 페린의 책에 [일본사]의 마지막 문단이 인용되어 있다.(77쪽)
“통일되어 있고 평화로운 이 나라, 신들을 공경하고, 법치에 순종하고, 윗사람들을 받들고, 이웃을 사랑하고 아끼도록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공손하고 친절하며 덕성을 지니고 누구보다 뛰어난 기술과 생산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 훌륭한 나라는 서로간의 통상과 교역을 통해 풍요를 누린다.
이 용감한 사람들은 모든 필수품이 풍성하게 주어진 속에서 평화와 안정의 모든 혜택을 누린다. 이러한 번영 속에서 그들은 종래의 방종한 생활태도를 돌아보든 아득한 과거를 살펴보든 그 나라가 어느 때보다 좋은 상황에 처해 있음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인이 보통 생각하는 일본과는 전혀 다른 나라 같다. 어찌 생각하면 한국인의 일본 인식이 임진왜란과 식민지 경험에 쏠려 있어서 호전적이고 침략적인 쪽으로 기울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
또 켐퍼에게는 자기 고향과 비교해서 일본의 평화로움이 두드러지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겠다. 켐퍼보다 약 백 년 전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받은 인상과 비교해 본다.
▎독일인 의사이자 박물학자인 엥겔베르트 켐퍼.
1730년에 그려진 켐퍼의 이 초상은 상상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 사진:
“병사든 군관이든, 문관이든 무관이든, 어느 누구도 시내에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되어 있다. 전쟁에 출동하는 길이나 훈련에 나가는 경우만 예외다. 그리고 적은 수의 고급관원들은 무장한 호위병을 거느릴 수 있다. 그들(중국인들)은 워낙 무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아무도 집에 무기를 두지 못한다.
여행 시 강도에 대항하기 위한 칼 정도밖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나 폭력이라면 고작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손톱으로 할퀴는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는 일은 들어볼 수 없다.
오히려 싸움을 피하고 물러서는 사람이 점잖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칭송을 받는다.” (M. Ricci, L Gallagher (tr.), [China in the Sixteen Century: The Journal of Mattew Riccl ](1953), 58~59쪽)
16세기 말의 중국이나 17세기 말의 일본을 면밀히 관찰한 유럽인에게 가장 놀라운 현상이 ‘질서’였던 모양이다. 질서 수준의 차이는 세계를 열린 것으로 보느냐 닫힌 것으로 보느냐 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3세기에 전국시대를 마감하면서 닫힌 ‘천하’가 표준적 세계관이 되었다. 천하의 중심부를 ‘중화제국’으로 운영하면서 주변의 오랑캐들이 ‘천하 질서’를 교란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 정치사상의 뼈대가 되었다.
일본 역시 센고쿠시대를 마감할 때 그 동안 섭취한 유가사상에 입각한 ‘소(小)천하’를 막부체제로 안정시킨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가 초기부터 총기 제작을 엄격히 통제해 결국 사라지도록 만든 것은 이 소천하 내의 질서를 위해서였다.
인간사회에 갈등은 없을 수 없는 것이니 칼질까지는 완전히 막지 못하더라도, 충동적으로, 또는 보이지 않게 타인을 상해하는 수단은 억제한 것이다.
가까이 있는 중국과 조선이 모두 닫힌 세계관을 갖고 이웃을 지나치게 넘보지 않는 경향이었기 때문에 이 소천하의 격절성은 꽤 오랫동안 지켜질 수 있었다. 200여 년이 지난 후 일본의 소천하는 중국의 대천하와 나란히 지구 반대편에서 찾아온 서양세력에 의해 깨어졌다.
[출처] : 김기협 전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 - 23.마테오 리치 필두로 가톨릭 선교사들 활약 - 야만의 유럽, 중국서 문명으로 각인되다 / 월간중앙, 2021년 9월호 ,2021. 8. 17.
24.만리장성 90% 쌓으면서 북방 유목민 경계했지만
- 정작 명나라는 ‘슈퍼화폐 은(銀)’ 통제 못해 멸망
천대 받는 동전 대신 화폐 역할 하면서 ‘부의 축적’기능도
국가 지배 벗어난 경제력 탄생, 민생 도탄 빠져 민란 발생
▎명(明) 장성. / 사진:위키피디아
[명 실록(明 實錄)]에도 [명사(明史)]에도 ‘오랑캐’ 이야기는 동남방의 바다 오랑캐보다 서북방의 유목민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다. 명나라 당시에도 청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중화제국의 대외관계에서 서북방을 중시한 결과다.
만리장성부터 그렇다. 진 시황(秦始皇)이 쌓은 것이라고 흔히 말하고, 그 전의 전국시대 장성(長城)에서 출발한 것이라고도 하며, 그 후 여러 시대에 쌓은 부분들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만리장성의 대부분은 명나라 때 쌓은 것이다. 그 전에 쌓은 구간의 길이가 상당하기는 하지만 명나라 때 쌓은 부분은 훨씬 더 웅대하고 정교하다. 널리 알려진 장성의 이미지는 명나라 장성의 모습이다. 장성 전체 토목공사량 중 명나라 때 투입된 것이 90%가 넘는다.
명나라의 위기는 바다보다 초원에서 온 것이 많았던 것처럼 보인다. 북경 일대에 유목민이 쳐들어온 일이 여러 번 있었고 원정에 나선 황제가 포로로 잡힌 일까지 있었다. 그리고 결국 왕조도 북쪽 오랑캐의 한 갈래인 만주족에게 넘어갔다. 반면 바다로부터의 위협은 성가신 해적 수준이었고 가장 큰 위협이었던 임진왜란도 명나라 본토에 미치지 않았다. 유목민이 심복지환(心腹之患)이라면 바다 오랑캐는 피부병 정도로 여겨졌다.
명, 바다 오랑캐는 피부병 정도로 생각
▎진(秦) 장성. / 사진:바이두
서북방의 대외관계에 치중한 중화제국의 관점은 역사 경험의 관성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중화제국의 성립 시점부터 가장 중대한 위협이던 유목세력은 몽골제국의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중화제국의 역사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중요한 작용을 해왔다. 원나라를 초원으로 몰아낸 명나라가 몽골세력의 반격을 가장 큰 위협으로 여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긴 시간이 지난 뒤 역사가의 눈에는 당시 사람들이 크고 중요하게 여긴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하게 보이는 것이 나타날 수 있다. 인식하는 시간의 층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페르낭 브로델은 [La Méditerranée etle Monde Méditerranéen à l’Epoque de Philippe II 펠리페 2세 시기의 지중해와 지중해세계](1949)에서 시간의 흐름을 세 개 층위로 구분했다. 바닥의 흐름은 자연의 시간. 인간이 거의 느낄 수 없이 유장하게 흘러간다. 다음 층위가 문명의 시간. 사회-경제-문화의 구조적 변화가 전개되는 시간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표면에 있는 사건의 시간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건의 시간을 넘어 문명의 시간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브로델은 역사가의 임무로 보고 ‘장기지속(la longue durée)’ 현상을 말한 것이다.
명나라 사람들이 유목세력의 동정에 주의를 집중한 것은 사건의 시간 속에서였다. 더 깊은 충 위에서 문명의 시간은 다른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싶다.
명나라에 대한 유목세력의 위협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일이 ‘토목지변(土木之變)’(1449)이다. 영종(英宗, 1435~1449, 1457~1464)이 오이라트(瓦剌)를 정벌하겠다고 친정(親征)에 나섰다가 토목보(土木堡)라는 요새에서 참혹한 패전 끝에 포로로 잡힌 사건이다.
중국 황제가 유목 세력에게 포로로 잡혔다! 한 고조(漢 高祖)가 흉노에게 포위당해 곤경을 겪은 ‘평성지곤(平城之困)’보다도 더 극적인 사태다. 그러나 토목지변은 황제를 비롯한 몇몇 사람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하나의 해프닝일 뿐이었다. 중화제국과 유목세력 사이 관계의 구조적 변화를 보여준 일이 아니었다.
중국 황제가 포로로 잡힌 ‘토목지변’
▎토목지변이 일어난 장소. / 사진:위키피디아
오이라트 지도자 에센(也先, 额森, Esen)은 명나라 원정군을 격파한 후 승세를 타고 침공하는 대신 포로로 잡은 황제의 몸값을 요구했다. 황제가 어리석었을 뿐이지, 명나라의 방어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 조정에서 포로로 잡힌 황제를 바로 포기하고 그 동생을 황제로 세워(代宗, 1449~1457) 임전 태세를 갖추자 에센은 물러갔다가 1년 후 영종을 큰 보상 없이 돌려보냈다.
에센이 명나라를 망가트릴 목적을 갖고 있었다면 영종을 돌려보낸 것은 탁월한 전략이었다. 귀환 후 실권 없는 상황(上皇)이 된 영종은 1457년 정변을 일으켜 황제위를 되찾고 8년 전 북경을 지킨 우겸(于謙, 1398~1457) 등 유능한 신하들을 자신에게 불충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에센 자신이 그보다 먼저 몰락해버렸다. 휘하 세력을 만족시킬 당장의 이득을 가져오지 못한 그의 지도력이 흔들리고 1455년에 반란으로 살해당한 것이다.
토머스 바필드는 [위태로운 변경]에서 토목보 사태의 어리석음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오이라트는 ‘외경 전략(outer frontier strategy)’을 통해 외교와 교역 등의 방법으로 안정된 수입원을 명나라에서 찾은 것인데 강경일변도의 대응으로 양쪽 체제가 함께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오이라트 세력은 붕괴했지만, 명나라는 그 후 백여 년간 유목세력을 통제할 효과적인 방법을 찾지 못했고, 어마어마한 장성 수축공사도 이 기간에 이뤄진 것이다.
당시 몽골의 양대 세력은 오이라트의 서부(西部)와 타타르(韃靼)의 동부(東部)였다. (19세기 서양에서 만주족을 ‘Tatar’라 부른 관행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타타르를 ‘Eastern Mongols’로 부르기도 한다) 명나라 초기에는 오이라트가 우세했으나 에센의 몰락 후 타타르가 득세해서 다얀 칸(達延汗, Dayan Khan, 1474~1517)과 알탄 칸(俺答 汗, Altan Khan, 1507~1582)의 영도 하에 장기간 명나라를 압박했다.
자그치드와사이먼스는 [Peace, War, and Trade along the Great Wall 장성을 둘러싼 평화와 전쟁과 교역](1989) 제3장 “변경 호시(互市)”에서 에센, 다얀 칸, 알탄 칸의 시기 명나라와 몽골 사이의 관계를 집중 조명했다. 이 시기 몽골의 주도세력들은 명나라와 전쟁보다 교역을 원하는 경향을 꾸준히 갖고 있었는데, 명나라가 이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피차 큰 피해를 겪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들의 관점이다.
저자들의 관점이 명확하게 뒷받침되는 대목들이 많이 있다. 알탄 칸 시기의 흐름이 특히 분명하다. 알탄 칸은 큰 세력을 막 이룬 1541년에 사절을 명나라 변경의 대동(大同)에 보내 조공관계를 청원했다. 명 조정은 이를 거부했고 이듬해 다시 대동에 온 사절을 보고도 없이 바로 처형한 관리들은 조정에서 상을 받았다. 이것이 선례가 되어 1546~47년 알탄 칸이 다시 사절을 보냈을 때 명나라 장수들은 경쟁적으로 사절을 잡아 죽였다. 역대 명신(名臣) 중에 이름을 남긴 옹만달(翁萬達, 1498~1552)은 무단히 사절을 죽인 장수들을 엄벌에 처하고 알탄 칸의 청원을 받아들일 것을 역설했지만, 그 자신이 견책을 받았다.
방어 능력을 갖추지도 않은 채 적대적인 정책만 취하던 명조정은 1550년 알탄 칸의 대거 침공 앞에서 아무 대책이 없었다. 대동 방면을 막고 있던 대장군 구란(仇鸞)은 알탄 칸에게 뇌물을 주며 다른 방면으로 진공하게 한 죄로 나중에 처형되었고, 병부상서 정여기(丁汝夔)는 적군이 북경 일대에 이르렀을 때 성문을 닫고 북경성만 방어하는 소극적 전략으로 피해를 키웠다는 죄로 처형당했다.
정여기는 희생양으로 몰린 감이 있다. 처형에 임해 “엄숭 때문에 망했다(嚴崇誤我)!”고 외쳤다는 말이 전해진다. 정여기의 소극적 전략은 당시의 권신 엄숭이 주도한 것이었는데 꼬리를 잘랐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의 대책 없는 상황은 여러 해에 걸친 무책임한 정책이 누적된 결과였지 몇몇 당사자의 책임으로 볼 수 없다.
‘경술지변(庚戌之變)’이라 불리는 1550년의 위기는 101년 전의 토목지변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구조적 위기가 아니라 황제의 무능을 둘러싼 조정의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449년의 위기는 황제가 잡혀가는 덕분에 조정의 정비를 위한 한 차례 기회를 가져왔지만 1550년에는 그렇지 못했다.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암군(暗君)의 하나인 가정제(嘉靖帝, 재위 1521~1567)는 황제 자리를 지켰고, 손꼽히는 간신의 하나인 엄숭도 십여 년간 더 권세를 누렸다.
원나라 이후 중국 정복 의지 없었던 유목세력
명나라 조정에서는 북방 유목세력을 늘 큰 위협으로 여겼다. 그러나 후세의 연구자들은 원나라가 물러간 후 몽골 세력에게는 중국 ‘정복’의 의지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여긴다. 아나톨리 카자노프가 [Nomads and the Outside World 유목민과 외부세계](1983, Eng. tr. by J. Crookenden) 202~212쪽에서 유목사회의 특성에 입각해 이 점을 밝혔고, 자그치드와 사이먼스도 [장성을 둘러싼 평화와 전쟁과 교역]에서 이 관점을 따랐다.
유목사회는 농경사회와 상호보완의 관계로 형성된 것이지만 그 사이에 자족성(autarchy)의 비대칭성이 있다. 농경사회는 거의 모든 필수품을 내부에서 생산하는데 유목사회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교역의 필요성이 유목사회 쪽에 더 강한 것인데, 농경사회에 통제력이 강한 체제가 세워질 때는 이 차이를 이용해서 ‘갑질’을 하려 든다. 유목세력의 불리한 조건이 어느 한도를 넘을 때 폭력을 쓰게 되지만 교역 등 물자 수요를 충족시키는 평화적 방법이 주어지면 폭력을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다.
유목세력이 중국의 농경사회를 전면적으로 지배하려던 일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이 관점을 뒷받침해 준다. 원나라가 유일한 예외였다. 이 예외가 성립한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얼마간의 실마리는 나타나 있다. 쿠빌라이를 중심으로 한 원나라 건국세력이 수십 년 정복 과정을 통해 유목세력의 특성을 벗어나 정착 문명의 틀에 서서히 접근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만이 아니라 이슬람 등 다른 문명과의 접촉이 늘어나 ‘융합 문명’의 길이 열린 것도 이 변화에 작용했을 것 같다.
1368년 명나라의 진격 앞에 아직도 상당한 방어력을 갖고 있던 원나라가 쉽게 대도(大都)를 내놓고 초원으로 물러난 것은 다른 왕조들에 비해 ‘제국’의 정체성에 아직 가변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재정이 엉망이 된 제국에 집착하기보다 백여 년 전의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하나의 선택지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중원을 포기한 뒤에는 반격의 길을 찾을 수 없었고, 중국에 대한 원왕조의 지배력은 그 후 20년 동안에 완전히 소멸되었다. 북원(北元)의 권위가 사라진 후 오이라트와 타타르의 성쇠는 전형적 유목세력의 양상으로 돌아갔다.
오이라트의 에센도, 타타르의 다얀 칸과 알탄 칸도, 중국의 영토에 대한 야욕을 보이지 않았다. 경제적 이득을 원했을 뿐이다. 알탄 칸이 1540년대에 여러 차례 보낸 사신을 명나라에서 죽인 후 1550년 북경 일대에 진공해 명 조정을 공포에 몰아넣었지만 호시(互市) 개설의 약속 등 약간의 양보를 얻자 쉽게 물러갔다. 그 결과 1551~2년에 대동과 선부(宣府)에서 호시가 열렸지만 명나라 측의 성의 부족으로 곧 중단되고 적대관계로 돌아갔다.
수십 년에 걸쳐 명나라를 괴롭히던 알탄 칸이 1570년 명나라와 화친을 맺는 과정이 [장성을 둘러싼 평화와 전쟁과 교역] 96~105쪽에 소상히 그려져 있다. 알탄 칸의 부인이 무척 사랑하는 손자가 개인적인 문제로 (약혼자를 다른 데로 시집보내는 데 불만을 품고) 명나라로 달아났을 때 명나라의 현명한 지방관이 그를 보호하며 조정에 주청하여 화친이 이뤄지게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고 나는 본다. 화친을 원하는 알탄 칸의 태도는 수십 년 간 일관된 것이었고, 명나라의 어리석은 황제가 사라진 덕분에 그 뜻이 이뤄졌을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가정제를 이어받은 목종(穆宗, 재위 1566~1572)은 이미 ‘융경개관(隆慶開關)’으로 남쪽에서도 합리적인 대외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명나라에게 북로(北虜)는 ‘심복지환’이 아니었다. 잘못 다루면 찰과상을 입을 수 있고 심해야 골절 정도에 그치는 외과적 문제였다. 정말 ‘심복지환’에 가까운 것은 경제체제의 혈액이라 할 수 있는 화폐 문제였고, 북로보다 남왜(南倭)가 이 문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기원전 118년부터 동전 중심 화폐체제 자리잡아
▎당나라의 개원통보. / 사진:바이두
▎한나라의 오수전. / 사진:바이두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동전 중심의 화폐체제가 자리 잡았다. 한 무제(漢 武帝)가 기원전 118년 발행한 오수전(五銖錢)은 7세기 초 수(隋)나라 때까지 통용되었고 당 고조(唐 高祖)가 621년 발행한 개원통보(開元通寶)는 더 오래 사용되었다.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 등 자체 화폐를 아직 가지지 않은 주변 지역에서 가져가 화폐로 쓰기도 했다.
중세 이전 다른 문명권에서 귀금속(금-은) 주화가 주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중국에서 동전이 널리 쓰인 것은 상인집단의 활동만이 아니라 서민의 일상생활까지 화폐경제로 조직된 사실을 보여준다. 화폐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한다. (1) 교환의 수단. (2) 가치측정의 기준. (3) 가치보존의 수단. 가장 본원적 기능인 (1)에서 동전은 금-은화보다 뛰어난 효용을 가진 것이었다. 다른 문명권에서 서민의 경제활동이 물물교환에 그치거나 곡식, 직물 등 대용 화폐를 이용하는 동안 중국 농민은 자급자족을 벗어나 환금작물 재배로 나아가고 있었다.
11세기까지 경제 팽창과 시장의 고도화에 따라 ‘동전 체제’의 효용성이 한계에 이르면서 재화를 대신하는 문서의 사용이 민간에 유행하자 송나라에서는 같은 성격의 문서를 교자(交子)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발행하기 시작했다. 요-금-원-명 여러 왕조에서 이를 따라 교초(交鈔), 회자(會子) 등 이름으로 시행했다. 세계 최초의 지폐였다. 처음에는 경화(硬貨)로 바꿀 수 있는 교환권의 성격으로 시작했다가 차츰 법정화폐(fiat: 내재적 가치를 갖지 않고 교환가치를 법적으로만 보장받는 화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리처드 폰 글란의 [Fountain of Fortune: Money and Monetary Policy in China, 1000~1700 중국의 화수분](1996)에는 근세 초기 중국 화폐제도의 굴곡이 그려져 있다. 동전 체제의 대안으로 지폐 체제가 시도되었으나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결국 ‘은(銀) 체제’로 낙착되는 과정이다.
폰 글란의 책에서 내가 얻은 부수입 하나는 경제사 방면을 이해하기 어려운 데 대한 오래된 콤플렉스를 벗어나게 된 것이다. 기존 연구에 대한 저자의 해설을 읽다 보니, 경제사 분야의 중요한 연구 중에는 특정한 경제발전 이론을 의식한 것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경제사는 20세기 이데올로기 투쟁의 최전선이었다. 과도한 이론화 경향은 유럽 중심주의와 함께 근대역사학의 한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역사학에도 어느 학문분야나 마찬가지로 이론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론과 실험-관찰이 나란히 진행되는 다른 분야와 달리 역사학에서는 현상의 파악이 어느 정도 확실해질 때까지 성급한 이론화를 삼갈 필요가 있다.
화폐론에서 통상 거론되는 세 가지 기능 외에 전통시대 중국의 중요한 화폐 기능 또 한 가지를 덧붙이는 데서 근대적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려는 폰 글란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4) 조세와 녹봉 등 국가의 출납 기능. 시장의 힘이 국가를 능가하게 되는 것은 근대적 현상이다. 근대 이전의 국가는 시장의 관리자일 뿐 아니라 참여자로서도 비중이 큰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에서 그리는 중국 화폐체제의 변화 과정은 시장 참여자로서 국가의 역할이 위축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가는” 모습이다.
16~18세기 중국은 ‘은 먹는 하마’
▎송나라 교자. / 사진:바이두
화폐의 기능 중 “교환의 수단”과 “가치 보존의 수단”에는 상치되는 측면이 있다. 민간에서 재산 축적을 위해 화폐를 쌓아놓기만 하면 교환 수단으로서 기능이 약화된다. 사유재산의 과도한 축적은 유교 정치이념에서 꺼리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인 토지를 ‘왕토(王土)’ 사상에 묶어놓은 것도 그 까닭이다. 재력(財力)은 인간사회에서 무력(武力) 못지않게 강한 힘을 가진 것이므로 그 통제에 질서의 중요한 원리가 있었다.
은(銀)은 민간의 사유재산권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인 매체였다. 중국의 부호들이 재산을 보유하는 전통적 형태는 토지와 전호(佃戶)였지만 그 과도한 보유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국가권력의 통제를 받았다. 서화, 골동품, 보패 등 고가품은 가치 보존의 수단은 되지만 보유자의 ‘권력’을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화폐의 기능을 갖춘 귀금속이 소유자의 권리와 권력을 제일 효과적으로 보장해주는 사유재산의 형태였다.
▎원나라 교초와 인판(印版). / 사진:위키피디아
전 세계의 은 생산량은 1500년까지 연간 50톤 수준이었다가 16세기 동안 600톤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폰 글란은 위책 133~141쪽에서 1550~1645년 기간 동안 중국에 유입된 은의 총량을 7천여 톤으로 추정했다. 핀들레이와오루어크도[Power and Plenty 권력과 풍요](2007) 212~216쪽에서 이 추정을 받아들였다. 그 이전에 중국인이 보유하고 있던 은의 총량은 확실한 추정을 보지 못했지만, 이 ‘은(銀) 세기’ 동안 들여온 분량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공급량이 엄청나게 크던 수백 년간 ‘수요-공급의 법칙’에 불구하고 은의 높은 가격이 중국에서 유지된 것은 참으로 특이한 현상이다.
명나라 후기 동전, 액면가 절반 밑으로 통용
▎18세기 스페인 은화. 은의 전 세계 확산에 매체가 되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16~18세기 수백 년 동안 중국을 “은 먹는 하마”로 만든 엄청난 수요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중국에서 은의 용도가 확장된 것을 생각해야겠다. 은은 문명 초기부터 귀금속으로 용도를 가졌고, 화폐로서 용도가 뒤이어 자라났다. 그런데 근세 초기의 중국에서 은은 역사상 드물게 큰 힘을 가진 “슈퍼화폐”가 되었다. 2차 대전 후 미국의 달러와도 차원이 다른 엄청난 그 힘은 아직까지 결합되어 있지 않던 여러 문명권을 휩쓸면서 국가권력에게 침해받지 않는 사유재산권의 강화를 뒷받침해주었다.
17세기 말 명나라에 온 마테오 리치에게는 사람들이 무기를 갖지 않고 다니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민간의 무기 소지 금지는 중화제국의 오랜 전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무기는 국가의 통제 밖에 있었다. 국가가 동전을 발행하며 녹봉과 납품대금을 은 한 량에 700잎(文)으로 지불해도 시중에서는 1500잎, 2000잎으로 거래되었다. 국가에서 돈을 받는 사람들만 손해였다. 그래서 관리들은 녹봉 외의 부수입을 얻기 위해 부정을 행해야 했고 납품업자들은 뇌물을 써 가며 올려치기를 해야 했다.
명나라 후기의 동전은 모두 시중에서 액면가의 절반 이하로 통용되었다. 어쩌다 마음먹고 품질 좋은 동전을 만들어도 동전을 천시하는 풍조에 휩쓸려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다가 구리의 재활용을 위해 가마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가치 보존의 기능은 은이 절대적이었고, 교환 수단의 기능도 은이 중심이 되었다. 중국의 은 수요가 거의 무제한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부의 축적’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었고 축적된 은은 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통해 국가권력의 통제를 벗어난 민간권력이 되었다.
중국의 왕조가 멸망할 때 왕조를 배반하고 침략자에게 협력하는 한간(漢奸: 매국노)에게 책임을 씌우는 경향이 있다. 명나라의 멸망을 놓고도 오삼계(吳三桂)를 비롯한 한간들에게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오삼계가 청군을 이끌고 북경을 점령한 것은 명나라가 민란으로 멸망한 뒤의 일이었다. 명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진정한 한간은 외부 침략자에게 충성을 옮긴 몇몇 사람이 아니라 국가보다 재물에 충성을 바친 수많은 재력가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은의 축적을 통한 경제력의 집중을 국가가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생이 도탄에 빠진 결과가 걷잡을 수 없는 민란이었다.
▎정지룡 초상. 일본에 거점을 두고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과 연계하면서 ‘해적’ 사업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명성이 후세에 아들 정성공만큼 떨치지 못한 것은 “명나라 충신”이라는 포장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청나라에 ‘투항’한 진의는 확인할 길이 없다. / 사진:바이두
페어뱅크와 골드먼의 [China: A New History 신중국사](1992/2006)는 최신 연구 성과를 적극 수용하기보다 기존 학설을 잘 정리한 ‘보수적’ 성격의 통사다. 명나라 쇠퇴의 원인을 논하는 데도 (신)유교의 이념적 경직성 때문에 발전의 길을 스스로 등졌다고 하는 해묵은 관점의 소개에 치중하지만, 다른 관점의 가능성을 말미에 붙이기도 한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은 20세기 말의 맥락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기술 발전과 경제 성장이 전 세계 인류의 생활 모든 측면에 헤아릴 수 없는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문명의 전면적 파괴를 늦출 만한 새로운 질서의 원리들이 아직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다. 시간이 지나면 명나라 시대의 중국이 폐쇄적 발전을 통해 얻은 어느 정도의 평화와 복지를 역사가들이 높이 평가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실패로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그 나름의 성공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139~140쪽)
30년 디플레이션 극복이 대청제국의 완성 계기
▎타이난(臺南)의 정성공 동상. 서양에 “Koxinga”란 이름으로 알려진 사실이 재미있다. 정씨 세력이 옹립한 융무제(隆武帝)에게 황실의 성을 하사받았다 하여 ”국성야(國姓爺)“를 자칭했는데 그것을 후젠(福建)지방 발음으로 적은 것이다. 청나라로부터 독립된 세력임을 주장하고 반청세력의 호응을 얻기 위해 명 왕조와의 관계를 과장해서 선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 사진:바이두
명-청 교체는 1644년 청군의 북경 점령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681년 3번(藩)의 난이 진압되고 1683년 타이완(臺灣)의 정(鄭)씨 세력이 평정됨으로써 청 왕조의 중국 통치가 궤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1644년 직후 청군에 앞장서서 중국 남부를 평정하고 그곳을 분봉(分封)받았던 오삼계 등 3번이 청 제국의 통합성에 걸림돌로 남아있던 것은 눈에 보이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정씨 세력의 중요성은 간과되기 쉬운데, 경제 측면에 대단히 의미가 큰 존재였다. 바다를 통한 대외관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폰 글란은 1660~1690년의 30년간 청나라의 디플레이션 현상에 주목한다. 물가의 극심한 하락으로 경제가 크게 위축된 상황이다. 그 결정적 원인으로 폰 글란은 중국의 은 수입 감소를 지적한다. 1640년대 이후 종전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중국의 화수분] 232쪽 표23) 3번의 난과 정씨 해양세력을 평정한 뒤 경제 혼란을 수습함으로써 청나라의 안정된 중국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씨 세력의 창업자 정지룡(鄭芝龍, 1604?~1661)은 복건성 천주(泉州) 출신으로 마카오를 거쳐 일본 히라도(平戶)에서 활동기반을 쌓았다. 처음에는 네덜란드인의 하청을 받아 일하다가 1627년까지 강력한 해적단을 키워 명나라 수군과 네덜란드 세력을 모두 물리치고 남중국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그는 기근 때 해안 주민에게 구휼사업을 벌이고 빈민의 타이완 이주를 도와주는 등 좋은 평판을 누리며 명나라에서 유격장군(遊擊將軍)의 직함을 받기도 했다. 명나라 후기의 ‘해적’ 사업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정지룡은 쇠약해진 명나라와 ‘공생’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가 들어설 때 명 황실 후손 하나를 옹립했다가 청군이 닥치자 큰 저항 없이 항복한 것은 청나라와도 공생 관계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장남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은 함께 투항하지 않고 핵심세력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정지룡을 후대하면서도 감시하에 두었다가 1660년대 들어 정성공이 3번과 결탁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굳히자 그를 처형했다(1661).
본토 안에서 큰 군대를 일으킨 3번에 비해 주변부에 있던 정씨 세력은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었지만, 중화제국 체제에 대한 위협은 더 심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3번의 난이 ‘사건의 시간’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면 정씨 세력의 성쇠는 ‘문명의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3번 평정에 따른 영토 통합보다 정씨 세력의 격파로 해양주권을 확보하고 화폐시장을 통합하여 30년 디플레이션을 극복한 것을 ‘대청제국’ 완성의 더 중요한 계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 김기협 전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 - 24.만리장성 90% 쌓으면서 북방 유목민 경계했지만 - 정작 명나라는 ‘슈퍼화폐 은(銀)’ 통제 못해 멸망 / 월간중앙, 2021년 10월호 ,2021. 9. 17.
[출처] 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 Ⅴ [21~25회]|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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