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니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었다.(1:1)
창조 이전에는 오직 신만이 존재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말씀(the Word)을 통하여 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그분과 말씀(성령, Shabd, Nam 또는 이름, 거룩한 음류)사이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창조자와 창조의 힘은 똑같은 것이지요. “말씀”은 쓸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입으로 설해진 말들을 책으로 기록되어 있는 글이 진정한 신의 말씀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것들은 신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쇄되어 있는 글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역사를 추적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온 우주를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코란에서 아디그란트(Adi Granth)에서, 도덕경에서, 흰두교 경전에서, 그밖의 책들에서 읽는 말씀들은 그 역사를 추적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쓸 수도, 말할 수도, 들을 수도, 볼 수도 있지만 진정한 신의 말씀은 이 물리적인 눈이나 귀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으며, 말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일컬으신 말씀은 소리와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인쇄된 글에는 빛과 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말씀의 빛에 대해 암시하신 것을 읽습니다. 그러나 빛과 소리에 대해 알고 싶어도 알려 줄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진정한 빛(성령)과 소리(신의 말씀소리)를 알기 위해서는 신으로부터 하늘에 속하도록 선택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 눈이 하나가 되면 너의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을 외눈으로 돌이킬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빛을 경험하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가 그 말씀소리, 은총을 누릴 수 있다는 것도 암시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신의 말씀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내면의 신의 음성과 눈부신 빛을 묘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물은 소멸할 것이지만 창조의 힘(말씀, Shabd, 음류)은 사라지지 않지요. 그것은 신 자신이요 그분 자신의 투영인 것입니다. 그분은 온 세상 구석구석에 자신을 투영하십니다. 우주는 성령, 성스러운 음류, Nam, 그리고 다른 많은 이름들로 알려진 그 창조의 힘으로 유지됩니다. 만일 신께서 그 힘을 거두어 들이신다면 모든 것은 소멸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 지체높은 바리새인 중에는 “유대의 지도자요” “이스라엘의 스승”이라 하는 니고데모라는 이가 가르침을 묻기 위해 예수님께 왔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신으로부터 오신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었지요. 그러나 니고데모는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께 적의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예수님께 간다는 것을 공공연히 밝히고 싶지 않았으므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가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건데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3:3)
니고데모가 말하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습니까? ” (3:4)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건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3:5)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3:6)
내가 너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3:7)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
로 가는지 알지 못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다.(3:8)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신의 왕국을 보고 싶다면 “거듭나야 한다고” 설명하십니다. 당연히 영적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거듭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만을 생각할 뿐이지요.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스승”이었지만 거듭난 스승으로부터 힘을 전수받은 스승이 아니기 때문에 신의 성령과 신의 말씀소리를 듣지 못하는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성경과 계율에 얽매인 틀에 박힌 종교인이며 스승이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니고데모는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은 자궁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해를 돕도록 하시기 위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신비주의자(스승, 거듭난자)들은 신이 실재자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을 알며, 또한 나의 내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내면에도 존재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스승을 만나 입문을 하여 성령을 보고 말씀소리를 들으며 스승의 가르침을 실행하라는 말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윤회하는 자들을 말함)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수행을 하는 것은 곧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만이 모든 고통을 인내하며 끝까지 가르침대로 따른다는 말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들려야 한다.
(3:14)
그를 믿는 자는 마땅히 죽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3:15)
그리스도께서는 이곳에서, 우리가 더 이상 감각에 지배되지 않고 성령에 의해 지배될 수 있도록 의식이 상승(각성)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음과 감각(성경에서는 뱀으로 묘사 되었습니다)의 노예로 있는 한 우리는 이 세상의 수렁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샤브드(Shabd), 말씀을 만나자 마자 우리를 묶고 있던 구속은 풀어집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의는 외눈에 자신의 집을 만들고 그곳에서 상승하여 마침내 우리는 우리를 아버지께 데려다 줄 말씀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지 않을 것이며 또다시 생사에 직면할 필요가 없이 하늘의 아버지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또 다른 가르침은 여러분이 아버지께서 왔으며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말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한 성인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는 그가 아버지에게서 우리의 수준으로 왔다는 것을, 우리의 수준에 있으면서 그는 또한 아버지의 수준에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의 인도를 따르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의 삶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스승을 믿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를 믿는다는 것은 신의 은총으로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하면 너희가 죽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죽어가고 있으며 우리가 이 몸을 떠나면 다른 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만나면 또 다른 삶과 죽음이 우리를 마주보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다시 말해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옮겨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스승을 믿고 그의 가르침대로 살아 간다면 우리는 입문을 통해 새로운 탄생, 영적인 탄생을 하여 또다시 삶과 죽음을 직면할 필요가 없는 곳으로 가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독생자(his only bego_
tten son)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3:16)
신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들에게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데려올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고 예수님께서는 설명하십니다.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이러한 특권은 없습니다. 그 사랑하는 아들들이란 누구일까요? 그들은 스승께의 입문을 통해 자신들의 내면에서 빛을 경험하고 사람의 몸으로 있는 동안 아버지의 수준으로 돌아간, 자기들에게 정해진 영혼들을 아버지께 다시 데려오도록 스승을 통해 신에게 지시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들이요. 우리는 그들을 통해 아버지께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께서 독생자(His only begotten Son)를 주셨다는 것을 읽고서 종종 당황합니다. 그러나 1장 18절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것은 단어의 위치가 바뀌었을 수 있으므로 "그분의 아들만(only His begotten Son)"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만일 “only”란 단어가 “His 앞에 온다면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이라고 되어있는 성경의 다른 모든 부분들과 일치하며 또한 세상의 다른 모든 스승들의 가르침과도 일치하게 되지요.
아버지에게 오직 한 아들만이 있다는 것은 이치적으로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세례 요한 또한 그분의 아들이었습니다. 요한은 신으로부터 우리 수준으로 내려 왔으며 언제든 아버지께 갈 수 있었으므로 완전한 신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와 그밖의 다른 많은 진정한 스승들도 또한 아버지의 아들들이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모두 살아있는 동안에만, 육신으로 있는 동안에만 우리를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람의 몸으로 있는 동안 만났던 사람들만, 자신들을 믿고 자신들의 가르침대로 살며 자신들을 통해 새로운 탄생(입문)을 했던 사람들만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그러한 사람들만 진정한 스승으로부터 영적 인도를 받을 수 있었고 그들 또한 빛의 자녀들, 아버지의 자식들이 되어 아버지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었지요.
처음에 말했듯이 그리스도께서 직접 성경을 쓰지 않으셨다는 것은 유감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쓰신 것도 아니고 그분이 가르침을 주실 때 기록된 것도 아닙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오랜 뒤에 쓰여졌으며 서로 다른 언어로 여러 차례 번역되었으므로 자연히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마치 법률서적처럼 단어 하나하나를 따져가며 해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무엇에 예배하는지
를 안다. (4:22)
‘사람들(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세상 사람을 말함)은 자기들이 아버지를 예배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를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분을 예배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그들은 아버지에 대한 자기 자신들의 지적인 개념을 가지고 그 안에서만 행복해 한다. 그러나 네가 아버지를 어떻게 예배하는지 알 때가 왔다’ 그러면 그 예배는 무엇일까요?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를
예배할 때가 올 것이니 지금이 그때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자
신을 예배하는 이들을 찾고 계신다. (4:23)
‘진실한 예배자들은 언제나 아버지를 성령으로 예배한다. 아버지를 성령으로 예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을 전혀 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아버지에 대한 너희 자신의 생각 안에서 살고있을 뿐이며 이러한 생각은 너희를 미망의 어둠 속으로 인도할 뿐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자신을 예배하는 이들을 찾고 계신다.” ‘너희의 아버지는 성령으로 예배받기를 원하신다. 아버지를 성령으로 예배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 너희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네가 나에게 왔으니 내 이제 어떻게 아버지를 성령으로 예배하는지 말해주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을 예배하는 이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 (4:24)
우리는 왜 성령을 예배해야 합니까?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신은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또는 말씀과 아버지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그분은 말씀, 창조의 힘과 아버지는 똑같은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내면에서 말씀, Nam을 만나고 있다면 우리는 신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성령을 예배하는 것이 신을 예배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예배함에는 어떤 의례 의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찾기 위해 금욕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주의가 외눈에 있고, 아버지를 외부의 사원이나 교회에서, 책에서, 성스러운 연못에서, 산에서, 또는 예루살렘에서 찾으려고 하는 한 여러분은 아버지를 전혀 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곳에서 아버지를 예배하기 위해 찾으러 다닌다면 허송세월만 보낼 뿐이며 결코 죽음을 맞을 때까지 아버지를 찾을 수 없을 것이고 아버지 한테 예배한번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여 결국은 다시 죽음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을 외눈으로 돌이켜 내면의 신의 음성과 하나가 될 수 있을 때 여러분은 비로소 아버지를 찾게 되고 아버지께 진정한 예배를 받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는 자신을 어떻게 예배하는지에 대한 당신 자신의 성스러운 법칙이 있으며 그것은 성령으로, 진리로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제자들은 예수님께 음식을 드실 것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4:32)
우리는 왜 음식을 먹습니까? 몸을 지탱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음식을 먹음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지탱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진정한 목적은 아버지를 예배하여 그분과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며 성인들의 길 위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에게는 우리가 먹고 사는 이 세상의 음식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음식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양식”은 말씀, Shabd, Nam입니다. 그것이 그분을 지탱하며 그분에게 생명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완성
하는 것이다. (4:34)
나는 아버지에 의해 분명한 목적으로 이 세상에 보내졌으며 그 목적은 그분의 일을 끝내는 것이다. 나의 일은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나는 내 뜻으로나 부모의 뜻으로 또는 업의 뜻으로 너희에게 오지 않았다. 나는 내 아버지의 뜻에 의해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해 왔으며 그분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내게는 내 자신의 뜻이란 없으며 나는 마음과 미망의 세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마음의 뜻대로 살고 있으며 그것은 전혀 “사는 것”이 아니다.
내 말에 놀라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모두 그의 음성
을 들을 때가 올 것이니 (5:28)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는 천벌의 부활
로 나올 것이다. (5:29)
우리는 이 몸을 무덤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몸을 무덤이라고 하셨는데 왜냐하면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언제나 미간의 아래에서 감각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비록 육신으로는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사실 무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곧 ‘나는 그들을 위해 왔다. 그들이 더 이상 무덤 속에서 살지 않을 때가 왔다. 내 도움으로 그들은 의식을 외눈으로 돌이켜 그 내면의 성령, 신의 말씀을 들을 것이다. 의식이 외눈으로 되돌아와 내면의 말씀을 만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의 죽은 것이 아니다. 그때 그들의 몸은 살아있는 신의 성전이 될 것이며 그들은 신께서 자신의 내면에 계시고 자기들은 그분께 다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몸 안의 말씀, Shabd, Nam을 만나는 사람들은 죽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업, 죄의 희생자가 되어 거듭거듭 죽음과 만나야만 할 것입니다. 때문에 그분께서는 ‘걱정하지 말라. 내 가르침대로 살면 너희는 저절로 이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다. 너희는 미간 아래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
하여 하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니 사람
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인(印)치신 자이다. (6:27)
보통 우리는 세속적인 야망을 채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왜 이 세상의 것들을 모으기를 바라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설명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은다 해도, 아무리 권력을 갖는다 해도 마침내 그것들은 남겨두고 떠나야 할 것들이다. 결국에는 버려야 할 그런 것들을 왜 모으느냐? 왜 너희들은 신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에 만족하지 않느냐? 왜 너희들은 나에게서 더 많은 세상의 것들을 구하고 있느냐?’
진정한 스승들로부터 세상의 것을 구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구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육신에 있는 동안에도 너희의 재산이요 아버지께 돌아갈 때도 너희의 재산인 그러한 재산, 곧 이곳 육체 안에 있는 동안에 너희에게 평화를 주며 너희를 세상에서 가장 부자로 만들어주는, 너희를 왕 중의 왕으로 만들어 주는(아버지와 하나로 만들어 주는)영적 보물을 얻기 위해 성인에게 가도록 하라. “그것을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아들만이 너희에게 줄 수 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너희가 세상 사람들에게서 얻을 수 있다. 왕은 너희에게 재산과 명예를 줄 수 있지만 세상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완전한 스승에게 가야 한다.’ 그렇다면 그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Shabd, Nam, 말씀, 성령, 신의 음성입니다.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왜? 완전한 스승에게만 가야 할까요?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인(印)치신 자이다.” 다시말해, 아버지께서는 그 영적 보물을 전해 주는 권한을 당신의 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이지만 왕이나 대통령이 명령을 내릴 때에 그 명령이 실려 있는 문서에는 왕이나 대통령 자신의 도장을 찍곤 했습니다. 인(도장)이 찍히지 않은 문서는 아무런 효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말씀도, 이 세상에는 진화한 영혼들이 많이 있지만 영적인 보물은 오직 아버지께서 인치신 영혼, 아버지로부터 임명받은 사람의 아들에게서만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했다고 해서 누구나 입문을 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한 이들이 많을지는 모르지만 오직 임명받은(“인쳐진”) 스승만이 우리를 아버지께로 다시 데려갈 수가 있지요.
인쳐진 스승이 아닌 스승으로부터 입문을 받았다면 낮은 차원의 세계에 올라 갈 수는 있지만 금번 생을 마지막으로 죽음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이 세상에 돌아와 “인쳐진(완전한 스승)” 스승을 만나기 위해 애타도록 스승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만큼 완전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이 이 세상을 영원히 벗어나는 최고의 첫째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35)
물론 이것은 상징적이며 깊은 신비주의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생명의 빵”이란 말씀, Nam, 또는 Shabd를 뜻하며 이것이 스승의 진정한 모습이지요. 여러분의 육체에 그 어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다 해도 그것은 다시 배고프고 목말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의 그 무엇을 주신다 해도 우리는 영원히 행복하지도 않으며 만족해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더 많은 재산이나 권력에 굶주리고 갈증을 느끼게 되지요. 그러나 만일 우리가 스승을 만나고 그가 우리를 받아들여 말씀과 연결시켜 준다면 분명히 우리에게는 아무런 세속적 욕망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다시는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며 우리에겐 아버지께 돌아가고자 하는 오직 하나의 열망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세속적인 은혜를 위해 스승께 다가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기적을 바라지 않게 될 것인데 우리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헌신을 통해 우리 내면을 채워 줄 그 “빵”만을 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너희들의 갈증을 풀어 줄 수가 없다, 지금은 내가 너희들의 갈증을 풀어 줄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들 곁에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곧 과거의 스승은 스승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 땅에 내려와 살아있는 동안에 입문을 시킨 제자들에게는 그 스승이 “영생의 빵”이오 “감로수”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양식을 주고 마실 물을 주어 영적인 배고픔과 갈증을 풀어 주겠지마는 지금 너희들(예수의 제자를 말함)은 이미 죽어간 과거의 스승이었던 모세가 너희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가 없다고 말씀 하신다. 너희들의 배고픔을 달래주기위해 빵을 주고 갈증을 해소시켜줄 감로수를 줄 수 있는 자는 너희들 옆에 있는 현재의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의 뜻은 지금 시대에서는 내가 곧 아버지로부터 “인쳐진”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뜻이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항상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나의 옆에 있어 주면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스승을 구해야 만이 그 스승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예를 들어가며 말씀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스승을 그리워 하며 내 옆에 나타나서 나를 구원해 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는 애처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 말씀대로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아버지께로 돌아 간지가 수 천년이 되어 가는데 어찌 살아있는 모습으로 지금의 내 옆에 올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신다면 벌써 몇 수십 차례 이 세상을 다녀 가셨을지도 모르지만 그 모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찌 진정한 예수님의 모습을 알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한번 다녀갔던 사람은 어느 누구도 과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동일한 환경으로 돌아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리석게 과거의 그 모습으로 나타나리라는 것을 상상하면서 환상 속에서 그 모습을 그리고 또 그릴 뿐입니다.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
버지께서 오게 해주지 않으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했다." (6:65)
많은 구도자들이 신비주의자들에게 오지만 그들 모두가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그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누가 정해진 사람인지, 누가 자신을 따를 사람인지, 또한 누가 자신을 팔고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것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는 내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원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실 것이다. 내 아버지에 의해 나에게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만 저절로 내게 올 것이며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니 그들은 내 아버지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직 그들만이 내 가르침을 이해하고 내 가르침대로 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살릴 사람들은 오직 그들뿐이다. 아버지께서 보내지 않으시면 누구도 나에게 올 수 없으며 오직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들만이 살아 있는 스승의 필요성을 이해할 것이다. 그들은 내 가르침대로 살 것이요 나는 모든 사람이 아닌 그들만을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보내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8:23)
‘너희들은 이 세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속한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아래에서” 온 것이다. 이 집착은 너희들이 죄를 짓도록 이끌 것이요 다시 그 죄는 너희로 하여금 훨씬 더 세상에 집착하도록 만들어 몸을 바꿔가며 거듭거듭 세상으로 다시 데리고 나올 것이니(윤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 우리의 집착이 가는 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언제나 사람으로 돌아온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 그러나 “나는 위에서 왔다” 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에게 집착해 있으며 내 마음은 그 곳에 있고 그러므로 내 집착은 나를 내 아버지께 데려갈 것이다.’
만일 우리의 집착이 아버지와 함께 있다면 우리는 아버지께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집착해 있다면 생을 거듭해서 우리는 세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성취되지 않았거나 승화되지 못한 강한 욕망은 당연히 우리의 미래의 운명을 형성하는 더 큰 욕망을 성취할 수 있게 하며 그렇게 하는 동안 우리는 훨씬 더 큰 집착을 창조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돌아가기를 갈망한다면 우리는 마침내 그분께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속하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에게 집착해 있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따르고 나를 집착한다면 너희들은 내가 가는 곳, 곧 아버지께 돌아갈 것이다. 만일 나를 따르지 않고 내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계속해서 몸을 바꿔가며 세상의 일부로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8:24)
나를 믿지 않으면, 나를 따르지 않으면 너희들은 “죄 속에서 죽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스승을 믿는다면 너희들은 말씀, Shabd를 만나게 될 것이요 그리하여 그 소리를 들음으로 하여 모든 업을 청소하고 마침내 나와 함께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를 믿어야 한다.
....진실로 진실로 말하건데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
이다. (8:34)
종은 집에서 살 수 없지만 아들은 영원히 집에서 산다.
(8:35)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
0 유로와질 것이다. (8:36)
이 세상에는 두 가지 형태의 사람들이 있으니 완전한 스승에게 헌신을 통하여 신께 헌신하는 사람들과, 마음과 감각에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신께 헌신하는 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스승에게 헌신하며 그가 가르쳐준 영적 수행을 행함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로와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마음과 감각에게 지배되어 세속적인 가치를 탐닉하며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행위를 하게 하고 다시 이것이 죄와 업을 쌓게 하여 이들은 하늘의 아버지께 돌아가지 못하고 맙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죄는 우리의 주인이 되고 영혼은 이 주인의 종이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심은 것을 거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정해진 시간 동안만 육체 안에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죄의 종으로서의 영혼은 이곳 인간의 몸에 영원히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과적으로 영혼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이 창조한 모든 욕망이 성취될 수 있거나 승화될 수 있는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어떤 몸에서 태어나건 죄를 짓는 똑같은 과정은 계속되고 그리하여 영혼은 죄의 종으로서 훨씬 더 얽매이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자유롭다. 나에게는 죄가 없으므로 또한 너희들을 나처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 그러면 너희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와질 것이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너희들은 마음과 미망의 세계를 초월할 수 없다.’ 그렇다면 스승은 어떻게 제자들을 도와줄까요? 그는 우리를 제자로 입문시켜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줍니다. 그는 우리에게 영혼의 흐름을 미간으로 돌이키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이를 통해 우리는 성령, 신의 음성을 듣고 내면의 빛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 성령과 빛의 도움으로 우리는 이번 생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과거생에서 쌓았던 모든 죄를 씻어낼 수 있습니다. 모든 죄를 씻어낼 때 영혼은 자유로와지며 그러면 그 무엇도 영혼을 세상으로 다시 끌고 올 수 없게 되지요.
그리하여 마음이 뿌린 업의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하고 마음은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자유로와지고 순수해질 때만 영혼은 그 그곳에서 벗어나 아버지께 돌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편, “아들”은 죄의 영역, 인과응보의 영역을 초월해서 아버지와 하나가 된 사람입니다. 인과응보의 영역을 우리는 업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업의 세계를 넘어서 아버지와 하나가 된 사람은 당연히 생사로부터 구원되어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지요.
“아들은 영원히 산다”는 말은 자기 내면의 아버지를 깨달아 아버지와 하나가 된 진화된 영혼을 가리킵니다. 집주인은 원할 때마다 언제나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지만 종은 주인의 허락없이 집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주인은 우리의 업이지만 신의 아들은 그 자신이 주인인 것입니다.
완전한 스승에게 입문하여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우리 내면에서 그의 빛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집, 우리 몸이 주인이 됩니다. 완전한 스승은 업의 구속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내면에서 그를 만나 그와 하나가 되면 우리는 업의 노예이기를, 죄의 노예이기를 그치고 우리 자신의 집에서 주인이 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어 생사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집에서, 이 우리의 몸에서 주인이 되고 싶다면 우리는 진정한 스승인 아버지의 아들에게 가야만 하며 그러면 그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열망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며 우리 내면에서 그의 빛의 모습을 보는 단계까지 나아가면 그는 서서히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줌으로써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육신의 주인이 되어 업의 명령에 따라 이 몸 저 몸으로 옮겨다닐 필요가 없게 되지요.
너희는 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가? 바로 내 말씀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8:43)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왜 그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느냐? 너희들이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또한 그분의 창조물도 사랑할 것이니 창조자께서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계시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누군가를 해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 안에 계신 창조자를 해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진리이다. 내가 너희들을 말씀과 연결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들은 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내면의 말씀, Shabd를 들을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단순한 진리조차도 너희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너희들이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살생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 악마께서 났으니 너희 아버지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그 안에 진
리가 없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 살지 않았다. 거짓을 말할 때
마다 그는 스스로 말하니 이는 그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
버지이기 때문이다. (8:44)
‘너희들은 나에게 속하지 않기 때문에 내 가르침을 알지 못한다.(이 말은 예수님께서 신전에서 제를 지내고 각 종파의 스승 노릇을 하고있는 제사장들에게 하는 말) 너희들은 Kal, 악, 부정적인 힘을 예배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 나를 믿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태초 이래로 생과 생을 거듭(윤회)해서 언제나 너희들을 잘못 인도해오고 있다. 그는 언제나 너희들을 기만하고 있으므로 진리의 살인자이다. 너희들은 신을 예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악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지하고 정직하게 헌신하며 정말로 진정한 신을 예배하고 싶어한다면 그를 입문시켜야 하는 의무는 신께서 직접 지실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살아있는 스승에게 인도되어 그로부터 입문을 받고 깨달음의 길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Kal(부정적인 힘, 사탄)은 내가 너희들에게 길을 보여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Kal은 한 영혼도 자신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 영혼을 창조할 수도 파괴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신의 아들에게 입문하지 않은 영혼을 한 육체에서 끌어다가 다른 육체에 넣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공정합니다. 그는 마음이 행한 행위에 따라 각각의 영혼에서 상을 주거나 벌을 줍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각각의 운명과 육체의 수명을 결정하며 또한 각 영혼이 언제 어떤 몸으로 이 세상에 다시 와야만 하는지도 결정합니다. 삶과 죽음의 모든 순환 과정이 그(Kal)의 지배 안에 있으며 그의 유일한 목적은 모든 영혼들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막는 것인데 이는 일정한 수의 영혼들만이 그에게 정해져 새로운 영혼들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한 영혼이 완전한 스승에게 입문하게 되면 스승은 그 영혼의 운명을 떠맡아 그가 아버지께 다시 돌아갈 때까지 계속해서 인도합니다. 이것은 때로 한 생이 걸릴 수도 있으며 2생, 3생이 걸릴 수도 있지만 4생을 넘지는 않습니다. 만일 제자의 영혼이 또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면 스승은 그가 사람의 몸으로 그리고 영적 진화를 쉽게 할 수 있는 그러한 환경에 제자를 태어나게 해줍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것은 이 세상으로 그를 다시 데려올 만큼의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영적 세계로 올라가 계속해서 내면의 길을 갈 수 있으며 이 물질 세상으로는 다시 올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Kal 이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쉬지 않고 투쟁하는 까닭인데 그(Kal)는 사람들을 마
음과 감각의 영역 안에 붙들어 두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Kal)를 거짓말장이라고 하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을 해방시켜줄 가르침보다 그를 더 믿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그분께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8:47)
오직 신께 속하는 그리고 그분께 돌아가고 있는 영혼들만이 신의 말씀, 신의 음성을 듣는다. 그러나 너희들은 내면의 말씀, Shabd와 연결되지 않았으므로 신께 속하지 않고 세상에 속한다. 너희들은 세상의 음성을 듣고 세상의 사랑에 빠져 있으므로 언제나 이 세상에 남게 될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건데 내 말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
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8:51)
이것은 아주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어떤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을까요? 이 말씀은 볼 수 있는 눈을 뜨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소리를 듣는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가게되어 이세상에서 나고 죽고 하는 생사의 윤회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눈과 귀를 열지 못하는 사람은 태어나고 죽고 하는 윤회의 모습을 보게 되니 이러한 것을 보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성령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선하게 덕을 쌓으며 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믿고 착하게 살면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 가리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겠는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 해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셨습니다.(마태7:21-23) 영원한 죽음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좁은 문, 즉 생명의 문인 성령(빛)을 보며 말씀소리(Shabd, Nam, 음류)를 들을 수 있는 길로 들어가야 하고 가르침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하는 의문이 가지 않는지요? 하나님이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귀신을 ?아내고 권능을 행하며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해 잘못했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문 즉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서 성령을 보고 신의 말씀소리를 들으면서 자비와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내면의 깊은 속으로는 들어가지도 않으면서 겉으로만 주여, 주여 하며 형식에 치우니까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니 떠나가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우리는 죄인이다”라고 말씀 하셨으며 간음한 여인을 심판할 때 “어느 누구든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부터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어느 누구도 돌을 던지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살면서 고의적이든 고의적이 아니든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도 죽이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는 많은 생명을 죽이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죄짓는 행위를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이 죄가 우리를 죄속에 구속시켜 죄속에 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고의적이 아니더라도 죄를 짓는 죄인이 되는데 어떻게 하면 죄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을까요? 정녕 죄를 소멸시키는 방법은 없을까요? 만약에 이 죄값을 없애는 방법이 없다면 어느 누구인들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 것은 바로 하나님만이 전지전능하신 힘으로 면죄부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돌아 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내려 주시기 위해 예수그리스도 같이 위대한 큰 스승을 이따금씩 이 땅에 내려 보내 구원해 오도록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 명령을 받고 내려온 큰 스승은 신의 명령에 따라 살다가 신의 명령을 받고 돌아갑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없애기 위해 큰 스승을 찾아 그분의 제자만 될 수 있다면 수 많은 과거의 죄속에서 육으로 태어났던 시절의 죄까지도 없애 주니 이 세상의 모든 영화를 버리고서라도 그분을 따르고 존경하며 사랑하는 것이지요. 고대로부터 현대까지도 그 방법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 불원천리 헤매었고 스승은 그 사람을 시험한 후 제자를 삼았습니다. 제자가 그 어려운 시험을 마다하지 않고 참고 이겨내는 것은 그 스승이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분을 말미암지 않고서는 혼자 발버둥을 처봐야 혼자의 힘으로는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승으로부터 눈과 귀를 열어줄 때 까지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참아 냈던 것이지요.
이와 같이 큰 스승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 힘은 곧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분을 말미암지 않고는 신에게 돌아갈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인쳐진”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큰 스승이 아닌 작은 스승도 빛을 보고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 스승처럼 세세생생 죄속에서 육으로 태어나며 지은 업(카르마)을 소멸시켜 줄 힘이 없고 높은 곳으로 안내할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 제자는 힘이 있는 더 큰 스승을 만나기 위해 또 찾아 다니게 되지요. 복이 많은 사람은 처음부터 큰 스승을 만나 한번에 이 세상을 벗어나게 되니 바로 이러한 사람을 일컬어 신으로부터 하늘에 속하도록 선택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숫자는 얼마 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이가 적다” 하셨지요. 그만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서는 큰 스승 만나기가 어렵고, 큰 스승을 만나도 이 세상에 집착하여 벗어나기가 싫고, 매일 같이 살생을 하지 않으며 수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하나님에게로 갈려고 마음 먹었다가도 중도에 그만 두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만큼 그 길이 험하고 협착하며 고난의 길이지요. 이러한 길을 피해서 많은 사람들은 평탄하고 넓고 큰 길을 택하여 갑니다. 그길은 가기도 좋고 편하고 수월하지만 결국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멸망으로 이르는 길로 가고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수행자들은 큰 스승으로부터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지은 전생의 업을 말끔히 소멸받고도 매일 같이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은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입문하는 날부터 이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까지 수행을 합니다. 왜냐하면 제자의 과거생의 업은 스승이 없애 주었지만 본인이 태어난 이후부터 죽는 순간까지의 짓는 업은 본인 스스로가 없애야 하기 때문이지요. 스승은 업(카르마)을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전수하여 주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소리를 듣도록 내면의 귀를 열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소리를 듣는 것이 카르마(업)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수행을 하면서도 항상 죄짓는 행위를 최소화 하도록 하기 위하여 채식을 하며, 알콜이나 마약같이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들을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소리를 듣지 못하는 수행은 하루 24시간을 한다 해도 결국은 죽음을 보는 세상을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영혼을 정화하지 못하고 엉뚱한 것에 예배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시니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수행을 하는 것은 제자들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깨달음을 얻은 스승조차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은 매일같이 수행을 하였던 것입니다. 스승도 역시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죄를 짓기 때문이고 지은 죄값을 그날 그날 없애기 위함이었지요. 자신이 지은 죄값을 없애는 방법을 수행할 때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방인)에게는 비밀을 지키토록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아주 귀하고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이방인이 보지 못하게 하기위해 산속에서 그것도 주로 밤에, 아니면 인적이 없는 동굴 속에서 또는 지하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거나 방에서 문을 잠그고 수행을 하면서 지은 업을 소멸시켜 영혼을 정화 시켰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것에 대하여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를 할 때에 네 골방 속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내면에 계신 하나님을 말함)기도하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죄를 없애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에 이방인(내면의 귀를 열어 주지 않은 일반적인 사람들을 말함)과 같이 하지 말라(천국의 비밀을 지키라는 명령)”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잘 이해 해야 합니다. 그저 읽는데 그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속에 포함하고 있는 가르침의 진실을 찾아 내고 이해를 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읽으면서도 목적없이 읽고, 읽어도 무슨 뜻일까? 알고자 하지도 않고 우리가 지켜야 할 어려운 말씀은 아예 읽지 않고 보지 않는 것이 편하니까 못 본체하고 지나 간다면 아무리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나도 육을 벗어나기는 힘들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다시 보지 않기 위해(윤회를 영원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신에게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해줄 것을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올 때 혼자 왔다고 갈 때도 혼자 가시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는 혼자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갈 때에는 혼자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이세상에 속한 사람들(신의 말씀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저승사자가 안내하여 가고, 하늘에 속한 사람들(신의 말씀소리를 들은 사람)은 자신의 스승이 안내자가 되어 각각의 목적지로 갑니다. 여기에서 비교되는 것은 보통사람들은 저승사자도 무섭고 저승에 가는 길도 두려움으로 가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 스승으로 모시던 그분의 화신이 제자를 안내하니 두려울 바가 없어지고 또한 스승을 믿음은 물론이고 살아있을 때 매일같이 그리던 곳으로 가게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없을 수 밖에 없겠지요.
스승의 화신이 제자를 이끌고 가는 이유는 제자 혼자서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스승이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일반 사람들이 가는 여러 세계를 거쳐가야 하고 많은 어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최종 단계에 이르면 출입문인 비밀통로 문으로 통과해야 하는데 제자 혼자서는 그 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비밀통로 문을 알고 있는 스승이 동반하는 가장 큰 이유인 것입니다. 그 스승은 이 세상에 올 때에 이미 그 비밀통로 문을 통해서 왔고 제자들이 죽으면 그 길을 통하여 수없이 안내하였기에 가는 길을 훤히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윤회의 세계(죽음을 다시보는 세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다면 굳은 결심을 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고 스승을 찾고 문을 열어야 합니다. 인도의 명상가요 철학가였던 오쇼라즈니쉬 스승이 말했듯이 대중의 대열에서 이탈할만한 힘이 센 한 마리의 양이 되지 않고서는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신이 길 잃은 양 한 마리(대열에서 이탈한 당신)를 찾아 나서기 시작하여 끝내는 그 양을 찾아낼 것이며 당신을 보살펴 주고 안내하여줄 목자(스승)앞으로 당신을 인도하여 줄 것이고 그 목자는 당신에게 빛과 소리를 당신에게 알려주어 다시는 길을 잃지 않고 도둑과 강도로부터 보호를 해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의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평소의 단단한 에고를 부셔 트리고 두려움을 과감히 떨쳐 버려야 합니다. 내가 본래 그리스도요, 부처요, 보살이라는 것을 깨닫고 잊었던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신(성령)과 함께 하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이 세상의 물질이나 영화(명예심, 권력욕심, 애욕 등)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느 성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은 내 생명보다도 더 값진 것이다. 이 목숨을 다 바친다 해도 그 은총에 보답할 수 없으나 이 세상의 영화는 물거품 같이 허망된 것이니 천만번을 버려도 아까울 것이 없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평범한 것 같아 누구나 이해를 할 것 같지만 그 진실한 뜻은 수행과 관련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는 신에게 기도를 해서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해줄 스승을 보내줄 것을 기도하라는 뜻이고,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는 스승을 찾고자 하는 자는 스승을 찾게되고,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는 스승을 찾아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그 스승이 너를 제자로 삼고 지금까지 굳게 닫혀있던 외눈(지혜의 눈, 제3의 눈...)을 열어 주고, 신의말씀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면의 닫혀진 귀를 열어준다는 아주 의미 있고 귀한 말씀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종파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이요 그 길의 시발점인 뿌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종교 종파를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빛과 말씀소리(성령)를 전해줄 수 있는 스승을 찾고 그 스승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깨달음을 얻은 큰 스승은 나라나, 종족이나, 종교나, 종파를 가리지 않으며 지식인이거나 지식인이 아니거나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대가 신에게로 돌아가기를 진실로 원하면 스승은 그대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 들일 것입니다. 깨달은 큰 스승은 신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지어 살아있는 동안 만큼은 신과 하나가 되신 분(신의 대리인)이며 그분을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분이 살아있는 동안은 그분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 우리는 그 강한 빛을 가지신 분이 이 세상에 있다면 그분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분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그분은 신께서 보내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여쭈었다. "스승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
은 자기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 죄입니까? (9:1-2)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눈먼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름다운 대답을 주십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진 것도 그 부모가 죄를 진 것도 아니다.
다만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다.(9:3)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간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찾다가 너희 죄 속에서 죽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계속해서 Shabd, Nam을 애착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너희들의 죄와 함께 죽을 것이다. 너희들의 죄는 주인이 되고 너희들은 그 죄의 노예가 될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여기서도 똑같은 것을, 곧 죄가 어떻게 사람과 함께 태어나는지, 어떻게 죄가 주인이 되고 사람이 그것의 노예가 되는지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이번 생에서 그 부모가 죄를 진 것도 아니고 그 아이가 죄를 진 것도 아니다.’어린 아이가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이번 생에 죄를 지었을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만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 사실은 자연의 법칙, 업의 법칙, 영혼이 세상으로부터 창조자께 다시 돌아갈 때까지 그를 다스리는 법칙을 입증해 줍니다. 그 부모가 죄를 진 것도, 그 아이가 죄를 진 것도 아니며 이는 그들 모두가 과거생에 지은 죄였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는 눈먼 자식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아이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뿌린 대로 거둔다(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이다 : 갈라디아 6-7)는 우주의 법칙, 업의 법칙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어떤 씨앗을 심어서 지금 자신들이 심은 것에 대한 과보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백치나 정신이상으로 태어났다면 그 아이가 이번 생에 무엇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태어났을까요? 그 아이는 과거생에 무엇인가를 행했기 때문에 자신과 부모가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운명을 가지고 오는 것이며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그 운명과 직면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생들을 거쳐 오면서 매 생마다 업(Karma)을 지어 쌓고 또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업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요? 그 부모와 아이는 어떻게 해야 자신들의 죄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해가 있는 동안 나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다. (9:4)
‘나는 너희들이 이번 생에 가지고 온 모든 업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에서 불행하여 그분께 돌아가기를 열망하는 영혼들을 도와주라고 나를 보내셨다.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정해 놓으셨다. 그들을 입문시켜 아버지께 다시 인도하는 것이 내 일이요 나는 “해가 있는 동안”에만, 곧 내 몸 안에 있을 때에만 내 일을 할 수 있다.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다.” 내가 이 몸을 떠나면 어둠이 너희들을 덮칠 것이다. 그때 나는 너희들을 길로 인도할 수가 없다.’ 그분은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다. (9:5)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는 살아있는 스승에게 가야만 한다는 것을 명백히 암시하시는데 그분은 분명히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구도자가 스승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구도자와 스승이 둘 다 사람의 몸으로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구도자가 입문하게 되면 스승은 여전히 육신으로 있는 제자는 세상을 떠났다든지 또는 제자는 아직 육신으로 있는데 스승은 이 세상을 떠났다든지, 또는 그들 둘 다 육체를 떠났다든지 하는 것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을 입문시킨 스승은 제자에게 있어 결코 죽지 않으며 이것은 제자가 이 세상에 있거나 또는 다른 세상에 있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스승이 육신으로 있거나 또는 육신을 떠났거나에 관계없이 제자의 영적 진보는 계속되지요.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본 적이 없으면서 지금 그분을 따른다고 내세우는 사람들은 진실로 잘못되었음이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을 통해 명백히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영원히 세상의 빛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그분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 세상에는 빛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동안에는 나는 너희들에게 빛을 보여 줄 수 있지만 내가 이 몸을 떠나면 누구에게도 빛을 보여 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세상의 빛인 살아있는 스승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이 정하신 특정한 영혼들을 위해 정해진 때에 각각의 스승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각각의 스승들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세상의 빛인 것입니다. 만일 이 시대의 우리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신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떠한 살아있는 스승이나 그리스도도 이 세상에 와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니 우리는 직접 아버지를 만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직접 만날 수 없으며 오직 살아있는 스승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으니 이것은 절대자 자신이 정해 놓은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 함이다.(9:39)
이는 모순인 듯이 보입니다. 어떻게 눈이 성해서 볼 수 있는 우리를 소경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그 뒤에는 아름다운 신비주의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들을 창조자의 심판에 준비시키려고 왔다.’ 신의 심판을 받을 자격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께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그분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될까요? 그것은 영혼이 죄로부터 자유로와 질 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물으십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준비시키겠는가?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고.” 신께서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곳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어둠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보지 못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분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왔다.’
우리 내면의 창조자를 보지 못하면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 내면의 아버지를 볼 수 있는 그 눈을 뜰 수 있을 때 우리의 눈은 세상에서도 그분을 볼 수 있도록 열립니다. 그러면 이 세상 어디를 본다해도 우리는 오직 아버지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창조자께서 세상 어디에나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 함이다.” ‘너희들은 세상만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갖고 있으며 내가 온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소경이 되도록, 너희들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때 너희들은 너희들의 내면과 세상 어디에서도 창조자를 보게 될 것이다.’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에서도 내면에서도 창조자를 볼 수 없습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언제나 아름다운 벨벳 상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목걸이를 빼내면 상자는 쓸모가 없어집니다.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값어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상자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누구도 그 상자를 바라보려 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그냥 아무데나 놔둘 겁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여러분은 그 상자를 금고 안에 넣어두고 열쇠를 아무에게나 맡기려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내면의 신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의 가치를 알게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 창조자를 품고있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겸허해지고 그들을 존경하게 되며 그들에게 애정을 갖고 친절해지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은 우리에게 아주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 안에 있는 창조자를 보지 못한다면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자께서 우리 모두의 내면에 계시다는 것을 단지 이론으로써가 아닌 실질적인 경험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건데 양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요. (10:1)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그 문안으로 들어가 우리의 진정한 집까지 가는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이 있는 우리의 집으로 가는 문은 제3의 눈이며 그곳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진정한 목자인 살아있는 스승에게서만 얻을 수 있고 바로 그 열쇠로만 열 수가 있습니다. 양치기에게는 양우리 열쇠가 있으므로 그는 그것으로 문을 열지만 도둑이나 강도에게는 열쇠가 없으므로 그들은 담을 넘어서 양들을 훔치려고 하지요.
스승은 우리를 사랑하는 목자이며 우리 몸에서의 미간 또는 제3의 눈은 우리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인 것입니다. 스승이 자신의 빛의 모습(화신)으로 제자들을 맞아서 그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것은 바로 이문을 통해서입니다. “도둑과 강도”란 부정적 힘의 하수인, 거짓 선지자들, 그리고 교리와 의식, 다른 외적인 수행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설함으로써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제자들을 내면의 소리와 연결시켜주어 그들을 아버지께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진정한 인도자, 진정한 양치기인 진정한 스승뿐입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목자이다. (10:2)
진정한 목자인 스승은 Shabd의 모습으로 언제나 우리의 집 문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분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은 문을 두드리는 것이며 그러면 그 목자는 우리를 받아들여 아버지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을 두드리는 것”은 영적 수행으로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꾸준히 노력해서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될 때 그 목자는 문을 열고 두 팔로 우리를 맞아들일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기에 신께 되돌아가기 위한 우리의 욕구가 강하다 할지라도 그는 들어가고 싶어하는 그 이상으로 우리들이 들어오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문지기는 그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10:3)
양치기가 양들을 부르면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만 가지 다른 사람에게는 가지 않습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스승은 자신의 양으로 정해진 제자들을 알아보며 각각의 스승에게 정해진 모든 양들은 저절로 자신들의 스승에게 가 그를 믿게 됩니다. 그러면 스승은 우리를 이 세상의 감옥으로부터 영원한 자유와 평화가 있는 하늘의 집으로 인도합니다. 그는
결코 뒤에서 우리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는 앞에 있으면서 길을 가고 있는 우리를 언제나 인도하고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스승이 안에서 문을 열어 주면 입문자는 자기 스승의 빛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이미 스승을 육체의 모습으로 보았기 때문에 속지 않고 그를 알아볼 수 있지요. “그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불러”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스승이 구도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Shabd, Nam(말씀, 음류)로 입문시킨다는 것을 뜻하며 스승은 이를 통해 그들을 아버지께로 다시 데려가는 것입니다.
자기 양들을 불러낸 다음 앞서 가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
에 그를 따른다. (10:4)
이것은 다시 우리가 내면에서 경험할 것을 가리킵니다. 영원한 구원으로 가는 문인 제3의 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스승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그의 음성, 음류, 들을 수 있는 생명의 흐름을 듣게 됩니다. 또한 이 소리는 우리를 인도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아버지께 다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리를 따를 때 내적인 진보를 이루게되며 결국 그것과 하나가 되어 그것에 의해 우리 자신의 고향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자석처럼 끊임없이 우리를 내면으로, 고향으로 끌어당기고 있지요.
우리는 외부에서 육체를 보았기 때문에 스승의 빛의 모습을 보면 바로 알아봅니다. 스승을 본 적이 없다면 우리가 올바를 목자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모든 묘사는 추측일 뿐입니다. 그분이 내면에서 나타났다 해도 그것이 그리스도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다른 존재인지를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영혼은 자기 스승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를 알아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므로 양들은 그를 따르지 않고 도리
어 도망한다. (10:5)
진지하게 노력을 하는 사람들과 자신들의 스승에게 헌신하며 그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스승의 빛의 모습을 알아봅니다. 물론 부정적인 힘인 Kal과 그의 하수인들(성경에서는 사탄과 그의 마귀들)은 스승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기까지 하면서 온갖 속임수와 유혹으로 제자를 빗나가게 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스승에게 입문할 때 스승은 제자에게 그가 내면에서 보는 모습이 자신의 스승인지 아니면 단지 속임수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기 때문에 진정한 헌신자는 결코 잘못 인도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제자에게 중요한 것은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를 갖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스승을 알아보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순간적으로 길을 잘못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제자는 낯선 자의 모습이나 음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므로 길을 잘못들 수 없습니다.
당연히 그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비유로 말하기 때문에 이해하게 되어 있는 자들만이 이해할 것이요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자들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말하건데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10:7)
‘나에게 입문한 제자들을 위해 나는 문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미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양들은 그 문으로 들어와 스승에게 영접받는다. 너희들은 영적 수행에 의해 영혼의 흐름을 미간으로 돌이켜야 하며 나는 그곳에서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겠다.’
문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집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그 집의 문입니다. 그것은 미간에 있는 “문(외눈, 제3의 눈, 지혜의 눈, 부처의 눈)”이며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이 지점까지 끌어 올림으로써 그 문을 두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문은 안에서부터 우리에게 열릴 것이고 우리는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을 찾게 됩니다. 그 길을 알아서 따라갈 때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내면의 아버지를 찾아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두드리지 않으면 그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며 문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목적지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도둑이요 강도니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10:8)
그리스도의 말씀은 자신보다 먼저 왔던 모든 스승들과 선지자들이 도둑이요 강도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이 뜻하시는 것은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스승이 아닌 다른 누구를 내면에서 본다면 그가 살아있을 때에 아무리 위대한 성인이나 선지자였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본 것은 도둑이요 강도라고 확신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들은 진정한 성인을 가장한 속임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포함한 과거의 어떤 스승이나 성인, 선지자도 여러분 자신의 스승의 모습이 동반하지 않는다면 결코 여러분 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여러분 자신의 스승이 아닌 다른 누구를 내면에서 본다면 그가 아무리 밝고, 순수하고, 거룩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여러분을 유혹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부정적 힘의 속임수, 함정일 뿐입니다. 그러한 거짓 스승들이 여러분의 신뢰를 얻기 위해 실제로 나타나는 예언들과 좋은 충고를 얼마 동안 여러분에게 준다해도 속지 않게 깨어있도록 하십시오.
한 무리의 양들이 다른 무리의 양치기를 따르지 않고 자기들을 훔쳐가려는 도둑을 따라 가지도 않듯이 진정한 제자는 그러한 모습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습니다. 과거의 스승들은 이 세상에서의 그들의 일이 끝나고 아버지에게 다시 돌아가 그분과 하나 되었으므로 여러분 자신의 스승의 빛의 모습(화신)이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여러분 앞에 빛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그리고 여러분은 입문 당시에 받은 방법을 써서 언제나 이런 모습들을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스승은 입문 당시에 제자들에게 가르칠 때 너희 스승인 나의 모습이 아닌 어떠한 모습의 성인이나 성자, 선지자들이 나타나더라도 그들에게 절하지 말것이며, 그들을 따라가지 않도록 가르치고 그들이 나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더라도 스승의 특색있는 부분과 음성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스승이 제자들을 도둑이나 강도에게 도둑맞지 않기 위함이며 제자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지요.
나는 문이니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구원받을 것이요,
마음대로 드나들며, 초원을 찾을 것이다. (10:9)
‘나에게 입문한 제자들을 나는 문에서 기다리고 있다. 즉 나는 제자들의 미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의식을 미간으로 돌이킬 때 그들은 문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구원을 얻을 것이요.” ‘내 제자가 내면의 문에서 나를 만나면 그는 생사윤회로부터 구원될 것이다.’ “마음대로 드나들며, 초원을 찾을 것이다.” 양들은 언제나 행복하게 푸른 초원에서 풀을 뜯어 먹기 때문에 그분은 “초원”이란 말을 하신 것입니다. 당연히 제자의 “양식”은 스승의 빛의 모습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들이 내면에서 나의 빛의 모습을 보기만 하면 그때는 너희 마음대로 내면의 스승과 하나가 될 수도 있고 다시 육체로 돌아올 수도 있다. 너희들은 원할 때마다 미간 아래로 갈 수도 있으며 원할 때마다 나의 수준에 있으면서 내면에서 나를 찾을 수도 있다. 그때는 너희들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 너희들은 전혀 들어올 수 없다. 너희들은 언제나 밖에만 있으니 이는 너희들의 의식이 언제나 미간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도둑이 오는 것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함이요 내가
온 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다. (10:10)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Kal과 그의 하수인들, 또는 사탄과 그의 마귀들, 또는 무어라 부르든간에 그들은 오직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온다고 설명하십니다. 그들에게 속아서 여러분의 영적 재산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영적으로 얻은 것은 결코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길을 잘못 들게되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불필요한 고통과 슬픔을 초래해 영적 진보를 크게 지연시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목자의 옷을 입고 오는, 곧 여러분 자신의 스승이 아닌 그리스도나 어떤 위대한 영혼의 모습으로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이러한 도둑과 강도들에게 주의를 기울여서는 안됩니다.
때때로 Kal은 여러분 자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여러분이 아버지께 도달하여 이제는 신이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믿도록 하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여러분 자신의 스승만이 여러분을 그분께 데려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뿐인 것입니다.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다”가 뜻하는 것은 여러분이 일단 내면에서 그 소리, 신의 멜로디, Shabd를 듣게 되면 그것은 계속해서 더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그것에 주의를 더 많이 기울일수록 그것은 더욱 증가할 것입니다. 그것은 더욱 더 풍성해질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니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건다.
(10:11)
언제나 자기 양들을 돌보는 선한 양치기처럼 스승은 우리가 티없이 순수해져 아버지와 다시 하나가 될 때까지 우리의 업을 닦도록 도와주며 우리 영혼의 모든 죄를 씻어내도록 살펴주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알고 있으며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덮고 있는 업 또는 먼지층에 따라서 우리의 진화를 조절해 줍니다.
우선 마음은 우주심이며 두 번째 영적 세계인 자신의 근원으로, 고향으로 영혼과 함께 여행할 수 있도록 닦여져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개인의 마음은 우주심 안으로 흡수되어 행복해집니다. 오직 그때에만 영혼은 자유롭게 더 높은 영적 세계로 올라가 마침내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인 우리의 스승은 언제나 우리를 돕고 우리를 돌봐줍니다. 그는 언제나 각 개인의 영혼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는 제자들의 짐을 그들이 질 수 있을 만큼 가볍게 해주기 위해 그들의 대부분의 업(전생의 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제자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기도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10:11). 우리는 우리가 어려운 운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스승이 없었을 경우의 운명과 비교해 보면 아주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해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업의 짐을 덜어줌으로써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친다. 그러면 이리는 양을
물어가고 양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10:12)
그는 삯꾼이기 때문에 양들을 돌보지 않고 달아난다.(10:13)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10:14)
‘나는 착한 양치기이므로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나는 내 양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만일 그들 중 누가 길을 잃으면 내가 그들을 다시 우리로 데리고 올 것이다. 그러나 삯꾼, 사기꾼들은 양들의 안녕에는 관심이 없으므로 신경을 써서 그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어떤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그들은 양들을 보호하지 않고 버려둔 채 도망갈 뿐이다.’ 스승은 설령 어떤 제자들이 한동안 길을 잃고 방황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양들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정해진 모든 영혼을 아버지께서 책임지워 주셨으므로 그는 그들 모두를 직접 아버지께 다시 데리고 갑니다. 그러나 스승의 무리에 속하지 않는 양들은 사기꾼에게 넘어가 쉽게 길을 잃습니다.
여러분은 양치기들이 양들에게 풀을 뜯어 먹게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넓은 초원에 오천 마리의 양들이 모여서 풀을 뜯고 있는데 그들은 세 군데의 우리와 세 사람의 양치기에게 속한다고 합시다. 한 양치기가 휘파람을 불면 그에게 속한 양들만 그에게로 갈 것이며 다른 양들은 그의 휘파람 소리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예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
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10:15)
‘왜 제자들이 나의 빛의 모습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모르므로 오직 나를 통해서만 그분께 돌아갈 수가 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나는 나에게 정해진 영혼들을 구하기 위하여 그 무엇도 기꺼이 희생한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께서는 한 영혼도 잃어 버리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정해진 영혼들을 그분께 데리고 가야 한다. 이것이 나의 일이다. 이를 위해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칠 준비도 되어 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으니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
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을 것이다. (10:16)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나는 또한 나의 윗 스승들의 제자들, 즉 아직 이 세상에 있어 내가 육신으로 만날 수 있는 입문자들도 책임을 진다. 나는 그들도 또한 우리 안으로 데리고 와 나를 알고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한다. 나는 그들 또한 내 보호아래 두고 도와주며 한 우리, 한 목자에게 있게 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앞 스승과 그의 후계자 사이에는 진실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스승은 그 앞의 스승과 하나인데 이것은 마치 후계자의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과 하나인 것처럼 앞 스승의 제자들 또한 자신들의 스승과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스승들도 하나이고 제자들도 하나이며 모두는 한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버리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나는 다시 목숨을 얻는다. (10:17)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내가 내 제자들을 위해 그 무엇도 주저하지 않고 희생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분은, 스승은 목숨을 버리도록 억지로 강요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우리가 생각하지 않도록 설명해 주십니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버릴 힘도, 그것을 다시 얻을
힘도 있다. 이 계명을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10:18)
‘나는 전혀 업(karma)에 묶여 있지 않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내가 이 세상에 오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이 몸을 취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 자신들의 과거의 행위의 과보로 세상에 온다. 마음과 감각의 노예인 사람들은 부정적 힘인 Kal의 지배 안에 묶여 있기 때문에 그들이 원할 때 자유롭게 오고 갈 수가 없다. 내 짐은 가볍기 때문에 나는 내 제자들의 업의 일부를 짐으로써 그들이 업을 갚도록 도와줄 수 있다.
나는 내가 “원할” 때마다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으며 원할 때마다 이 세상에 다시 올 수 있다. 나는 오직 내 아버지께서 원하셨기 때문에 온 것이요 내 아버지께서 다시 부르실 때만 떠날 것이다.’ “나는 목숨을 버린다” 가 뜻하는 것은 나는 오직 내가 바랄 때마다 몸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다시 얻는다” 함은 나는 또한 바랄 때마다 돌아올 수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계명을, 이 특권을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라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요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10:28)
‘나를 따르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그들은 무엇을 얻을 것인가?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결코 다시는 이 세상에 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마다 죽음은 우리 앞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우린 또 몸을 떠나야 합니다.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요.” ‘온 세상이 무상하지만 내 제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 무상한 세상에서 탈출할 것이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누구도 나에게서 내 제자들을 빼앗아 갈 수가 없다. 씨앗은 뿌려졌다. 설령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 그 씨앗은 다시 싹틀 것이다. 그들은 다시 길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다. 그들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만유보다 크시니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10:29)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다. (10:30)
‘왜 그 누구도 나에게 정해진 영혼들을 나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가? 내 아버지께서는 왕 중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Kal도 내 아버지보다 위대하지 않으니 그도 내 아버지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께서는 이 온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강력하시며 나는 그분과 하나가 되었다. 그분이 나에게 모든 힘을 주셨으니 누가 나에게서 나에게 정해진 영혼들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사람들은 그분이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절대로 믿지 않았으므로 그분께 돌을 던지고자 했습니다.
너희에게 빛이 있는 동안 빛을 믿어라. 그러면 빛의 아들이
될 것이다. (12:36)
‘내가 너희들 곁에 있으면서 너희들에게 빛을 보여줄 수 있는 동안 그 빛을 믿어라. 나를 통해서 그 빛을 경험하라.’ 그리스도 자신이 빛이었으니 그분은 육신으로 화한 말씀이요 말씀 안에는 빛과 신의 멜로디(말씀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듯이 스승도 자신의 제자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그 빛의 수준으로 와서 내 아이들이 되어라.’ 내면의 그 빛을 보고 그것과 하나가 되기만 하면 여러분은 빛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내면에서도 또한 인도자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스승이 육체를 떠난다 해도 내면의 인도자는 언제나 그곳에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빛으로 왔으니 나를 믿는 자로 하여금 어둠
속에서 살지 않게 하려 함이다. (12:46)
이 세상은 어둠과 미망으로 가득 차있다. 나는 너희들에게 앎의 빛, 진리의 빛을 주기 위해 왔다. 나를 믿고 내 가르침을 따르라. 그러면 너희들은 이 세상에 거듭해서 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이 어둠에서 해방될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올 수 없다. (14:6)
스승의 진정한 모습은 육체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실제로는 말씀이 우리의 스승인 것입니다. 살아있는 성인의 육체가 우리의 스승인 것은 그 말씀이 그 육신 안에 거쳐를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육신으로 화한 말씀”입니다. 제자는 몸이 아니며 스승도 몸이 아닙니다. 영혼이 제자요 말씀이 스승인 것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말씀, Shabd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길이니,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며 말씀이 진리이니,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 우주를 창조했습니다. 우리가 볼 수있는 것은 소멸하지만 그 창조의 힘, 말씀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명이니,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이지요.
이 길은 태초부터 항상 그대로였으며 영원히 똑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앞 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내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아버지에게서 왔다. 그 가르침은 인간이 창조된 이래 언제나 똑같았으며 너희들은 이 진리를 살아있는 스승인 나를 통해서만, 나에게 입문하여 내 가르침대로 그 길을 따름으로써만 알 수가 있다.’ 누구도 아버지께 직접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살아있는 완전한 스승에 의해 받아들여져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하면 단계를 밟아 여러분은 궁극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면 그분이 너희에게 다른 위로자를 보내
시어 너희와 함께 영원히 계실 것 (14:16)
그 진리의 성령조차 세상은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는 그를 알
지 못하고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알고
있으니 그가 너희와 함께 너희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4:17)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께 너희들에게 성령 또는 말씀의 은총을 부어 주시기를 청하겠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너희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신과 말씀은 같은 것이며 아버지께서 영원히 죽지 않으시는 것처럼 Shabd, 말씀도 또한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만날 때 너희들은 아버지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진리의 성령 Shabd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그 성령은 육안으로 볼 수 없으며 세상 있다. 그것은 너희들 안에 거주하며 언제나 그곳에서 너희들을 인도할 것이다.’사람들은 감각의 노예이기 대문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입문할 때 성령과 연결되었으므로 그것을 알고 성령은 왜 위로자로 알려졌을까요? 왜냐하면 내면의 성령과 함께 할 때 우리는 평화를 얻으며 행복과 은총과 위안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우리 내면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의 성령과 함께 할 때 우리는 내면으로부터 만족과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 위로자를 통해 언제나 너희들과 만나고 있다. 나는 언제나 너희들을 한없이 풍족한 그 위로자에게, 그 내면의 소리에게 보낼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끊임없이 그 성령을 들어야 한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지만 너희는 나를 볼
것이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 것이기 때문이다.
(14:19)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내가 이 몸을 떠나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지만 너희들은 여전히 나를 볼 것이니 왜냐하면 나는 너희들을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나를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너희들의 내면에서이다. 나는 언제나 빛의 모습으로 너희들과 함께 있을 것이므로 너희들에게 있어 나는 죽지 않는다.’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영원히 산다. 나는 죽을 수가 없다. 너희들이 내면에서 나를 보면 너희들도 또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스승은 결코 제자를 떠나지 않으며 죽지도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스승의 몸이 더 이상 우리 곁에 있지 않을지라도 제자가 길에서 충분히 진보하면 그는 스승 곁으로 갈 수 있게 됩니다.
내면의 스승은 계속해서 제자를 위로 끌어당기고 있으므로 영혼이 순수해질수록 내면의 스승을, 말씀을 만나는 것은 더욱 빨라 집니다. 이 세상의 집착과 쾌락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는 그 끌어당김을 눈치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스승의 가르침대로 영적 수행을 행하면 우리는 점차 우리의 죄를 씻고 순수해져 그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 빛의 모습까지 우리를 끌어당겨 우리가 그 안에 살고 그가 우리 안에 있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의 은총 즉 Shabd, 말씀인 것입니다.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
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
각나게 할 것이다. (14:26)
‘내가 떠난 뒤 너희들이 길을 잃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라. 너희들이 사랑과 헌신으로 영적 수행을 행하면 나의 진정한 모습인 위로자가 언제나 너희들을 나의 사랑 안에서 지켜줄 것이며 너희들이 이 물질 세상에 있는 동안 계속해서 진리의 길 위에 있게 해줄 것이다. 너희들의 마음가짐이 진실하다면 너희들은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내면에서 나의 빛의 모습과 하나가 된 후에는 아무런 의심이나 의문도 없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을 끌어 내리는 성향을 가진 마음과 감각의 영역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그 찬란한 빛과 감미로운 소리, 나의 빛의 모습과 하나가 될 것이며 그것들이 너희들을 줄곧 인도하고 보호해 줄 것이다. 그때 너희들은 내가 지금 육신으로 있는 동안 하고 있는 말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Shabd, 음류는 성령이라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제3장에서 그리스도는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니.” 이 소리는 귀에는 들리지 않으므로 영이라 불립니다. 문과 창문을 닫아도 영은 들어올 수 있으며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언제 들어오는지 모릅니다. Shabd는 내면의 미간에서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냅니다. 때문에 그것도 영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이란 말은 보통 죽은 사람의 영혼이나 살아있는 사람에게 붙어 다니는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을 가리키므로 Shabd는 성령이라고 부르지요. 그것은 분명히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닌 소리 또는 신의 말씀이며 그것은 아버지에게서 와 우리를 아버지께 데려가기 때문에 성스러운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가리켜 성령이라 일컬으신 것입니다.
지금부터 나는 너희들과 많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니 이 세
상의 임금이 올 것이기 때문이요 그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14:30)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을 포함한 온 세상은 Kal 또는 사탄(이 세상의 임금, 부정적인 힘)에 속하므로 내 몸은 죽을 때 그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는 이 몸을 가지러 올 것이며 나는 그것을 그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
의 진정한 자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몸을 버리자마자 나는 바로 그의 영역을 떠날 것이다. 나는 곧 육신을 떠날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과 함께 할 시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내 안에 살라. 나도 너희 안에 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있
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
에 있지 않으면 그러할 것이다. (15:4)
말씀을 통해 너희들은 내 안에 살며 나도 너희들 안에 산다. 마치 줄기없는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내 빛의 모습과 하나 되지 않으면 너희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내 안에 살 때 너희들의 노력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너희의 열매가 항상
썩지 않게 하려 함이니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주실 것이다. (15:16)
너희들이 나를 너희들의 스승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너희들을 택한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불러 내게로 이끈 것이다. 그것이 너희들의 운명이었다. 그 것은 내 아버지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너희들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영적 진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 역시 내 아버지께서 명하신 것이다. 그분은 너희들을 택하시어 나를 통해 너희들을 당신에게로 부르셨다. 아버지께서 내가 청하는 것을 무엇이나 해주시는 것처럼 또한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도 그분은 무엇이든 주실 것이다.
너희가 세상에 속했다면 세상은 자기의 것을 사랑했을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내가 택했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15:19)
너희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너희들을 선택하여 나의 앞에 서게 하는 순간부터 하늘에 속하게 되었다. 너희들은 아버지의 은총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되었고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이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볼 수 있는 눈을 뜨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 있는 사람들은 모두다 이 세상으로부터 하늘로 데려가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할
것이니 그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듣는 것을 말할 것이요 너
희에게 장래의 일들을 보여줄 것이다. (16:13)
‘나의 진정한 모습은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너희들 내면의 그 말씀, 그 진리의 성령이다.’ “진리의 성령이......너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할 것이니” 이는 ‘말씀이 너희들을 진리이신 아버지께 인도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는 이곳에서 너희들에게 많은 것을 설명해 주었지만 너희들이 내면에서 나에게 올 때 나는 너희들에게 너희들이 전혀 꿈도 꾸어보지 못한 것들을,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보여 주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나를 영광스럽게 할 것이니 그는 내것을 받아서 너희에
게 보여줄 것이다. (16:14)
아버지께서는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니 내가 말씀으로 너희들을 깨끗이 하여 아버지께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받아야 할 모든 가르침과 인도를 나는 말씀을 통해서 너희들에게 줄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다만 육체적으로만 너희들을 떠나려는 것이요 언제나 너희들의 내면에 있으면서 너희들을 인도할 것이다. 나는 결코 너희들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 다시 또 조금 있
으면 너희가 나를 볼 것이니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6:16)
내가 육체를 떠나면 너희들은 육안으로 나를 보지 못할 것이지만 잠시 후에는 다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너희들이 나를 육안으로 볼 수 있다거나 내가 육체로 다시 돌아올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영적인 눈이 열려 내면에서 나의 빛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이 육체를 떠나면 너희들은 나를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들은 영적 수행에 더 많은 시간을 바쳐 내가 아버지와 하나된 것처럼 너희들도 나와 아버지와 하나 되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건데 너희는 울며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는 근심하겠지만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16:20)
내가 육체로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있지 못하면 너희들은 슬퍼하겠지만 바로 그 갈망이 너희들의 내면에서 나를 찾게 만들 것이다. 그렇지만 나를 박해한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문제거리라고 여긴 사람을 제거했다고 기뻐하고 좋아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착과 충족시키지 못한 욕망 그리고 세상을 향한 탐닉은 말할 것도 없이 성직자로서의 지식과 기능, 교리, 의례 의식들에 너무나 빠져서 자신들의 눈을 열어주며 자신들을 세상에 묶고 잇는 그 모든 사슬들로부터 풀어 주려는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한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을 도와 주려고 하는 바로 그 사람을 박해하고 중상하는 반면에 자기들을 더 강한 사슬로 이 세상에 꽁꽁 묶는 사람들에게는 아첨하고 칭송하며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영적인 눈을 뜨고 진리를 알았다. 너희는 내가 이 물질 세상을 떠나는 것을 슬퍼할 것이며 바로 그 슬픔과 갈망은 너희들이 내면에서 나를 만나 내가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을 때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들은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이며 그리하여 나와 아버지 안에서 영원한 평화와 행복의 상태를 얻게 될 것이다.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제게 주신 사람들에게 저는 당신의 이
름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것이었는데 당신이 제게
주셨으며 그들은 당신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17:6)
당신이 제게 정해 주신 영혼들 안에 저는 당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일으켜 놓았습니다. 그들은 태초에, 창조 이전에는 당신 것이었는데 이 세상에서 길을 잃었으므로 다시 당신께 인도하라고 당신이 제게 주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당신의 말씀, Shabd, Nam을 만나 당신께 돌아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제가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이 제게 주신 그들을 위해 기도함이니 그들은 당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17:9)
저는 오직 당신이 제게 보살피라고 정해 주신 영혼들(제자들을 말함)만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은 이미 당신에게 속한 것이며 저는 그들을 다시 당신에게 인도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저는 세상과 세상 사람들(제자가 아닌 사람들을 말함)에게는 관심이 없으므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저는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이 저를 이곳에 보내시어 하라고 하신 것만을 해왔으며 그것은 이 특정한 영혼들(하나님이 정해주신)을 당신에게 다시 인도하는 것입니다.
제 모든 것은 당신 것이며 당신 것은 제것이오니 그리하여
제가 그들로 해서 영광을 받았습니다. (17:10)
당신과 저는 하나이므로 제 모든 것은 사실 당신 것이요 당신의 모든 것은 제것입니다. 본래 이 영혼들은 당신 것이었고 당신과 함께 있었으며 이제 그들은 당신께 돌아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제가 그들을 말씀과 연결시켜주어 영생의 길로 인도했으므로 당신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헌신 때문에 저 또한 그들로 해서 영광을 받았습니다.
이제 저는 세상에 더 있지 않으나 이들은 세상에 있고 저는
당신께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
이 제게 주신 이들을 보호하시어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 (17:11)
저는 이 세상을 떠나 당신께 돌아갈 것이지만 제가 당신께 돌아가는 길로 인도한 저의 제자들은 여전히 이곳에 남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그들에게 당신의 은총을 부어주시어 그들이 계속해서 영생의 길을 가게 해주시고 그리하여 당신과 제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당신 안에 들어와 당신과 하나 되게 하여 주십시오.
세상에서 그들과 함게 있는 동안 저는 당신의 이름으로 그들
을 지켰으니 당신이 제게 주신 이들을 지켜 그들 중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고......... (17:12)
세상에서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저는 그들을 말씀과 연결시켜 주었고 그들에게 필요로 한 안내를 해주었으며 그들을 당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 안에 있게 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제게 주신 사람들 중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저의 육체적 인도를 받지 못할 것이니 부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들이 당신에게 돌아가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언제나 인도의 손길을 주시고 축복해 주십시오.
저는 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
했습니다. 이는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세
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7:14)
제가 그들을 말씀과 연결시켜 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미워하니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나 이 세상의 쾌락과 소유물들에 흥미를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또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니 지금 그들은 당신께 돌아가는 길 위에 있는 까닭입니다.
세상은 당연히 그들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의로우신 아버지시여,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지만 저는
당신을 알았고 이들도 당신이 저를 보내신 것을 알았습니다.
(17:25)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을 예배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예배하고 있는지 진정으로 알지 못합니다. 사실 그들은 부정적 힘에 속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들을 더더욱 유혹해 이 세상에 자꾸만 얽혀들게 합니다. 부정적 힘은 사람들을 기만하여 그들이 아버지를 예배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고 그리하여 그들이 살아있는 스승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며 한 분이신 진정한 신을 깨닫지 못하고 예배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알았고 제가 입문시킨 사람들(제자들을 말함)도 당신을 사랑하고 예배하며 당신이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을 깨달아 살아있는 스승을 만날 때까지 우리는 결코 아버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지도 못한 것을 어떻게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육신으로, 살아있는 스승의 모습으로 우리 수준으로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저의 제자들은 저를 알았으니 그들은 제가 육신으로 화한 말씀이라는 것을, 제가 당신에 의해 자기들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이 저와 하나가 되었고 제가 당신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저를 예배함으로써 그들은 지금 당신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 요한복음의 해설은 인도의 마하라지 차란 싱(1990년 6월 1일 세상을 떠났음)스승께서 생존해 계실 때 강의하셨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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