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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와 문선명목사]

문수봉(李楨汕) 2008. 8. 10. 05:08

통일교 문선명 목사의 역사(일제하 독립운동과 감옥살이)

1. 한민족과 문선명 목사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가 막을 내린 이 날은 한민족에게 실로 뜻깊은 날이었다. 역사적 전환기를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한민족은 구미 열강을 중심한 식민지 쟁탈전의 제물이 되어 40년 동안 모진 고난의 노정을 걸어야만 했다. 아날 한민족은 세계 식민지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하면서 타의에 의해 광복을 맞게 됐다.

결국 한민족은 수 천년 동안 계속돼온 봉건주의 제도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몰려오는 외세에 나라를 내맡긴 꼴이 됐지만, 하나님은 결코 이 민족을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광복의 섭리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 민족이 걸어온 고난의 40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역사적 전환기는 끝과 시작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점에서 8월 15일은 40년 고난의 노정이 지나고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는 시점이다. 그래서 이 날은 이 민족이 치러야할 빚, 이른바 탕감의 기간이 끝나고 새로운 섭리적 역사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크다.

하나님의 섭리사적 차원에서 1905년부터 40년간은 한민족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기 위한 기대를 쌓은 기간(*이스라엘 민족의 애급고역 400년에 해당)이라면, 1945년부터 40년간은 하나님이 직접 이 민족을 붙들고 섭리(*모세를 중심한 가나안 복귀를 위한 광야 노정 시대)를 진전시키고 역사하신 기간이라 할 수 있다.


광복과 더불어 한민족이 겪은 또 하나의 큰 변혁은 삼팔선을 중심으로 민족이 양분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강대국의 신탁통치라는 이름 아래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민족의 총체적 비국은 시작됐다. 종교계만 하더라도 남쪽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으나, 북쪽은 신앙이 수난과 함께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대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 민족을 버려두지 않으신 하나님은 남북 분단 그 자체를 세계 문제 해결의 한 방안으로 승화시키고 인류 구원의 대사업을 펼치셨다. 그 구원섭리는 주먹구구식이 아닌 분명한 프로그램에 의해 이루어진다. 더구나 하나님의 섭리역사에는 중심인물을 세우시고 그를 통해 인간 역사를 이끌어 나오셨다.

지난 40년간 하나님의 섭리라는 큰 프로젝트를 진행시켜 나온 사람들이 많지만 통일교 창시자 문선명 목사만큼 그 족적이 넓고 깊고 높은 이는 없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 4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부침하는 중요 사건이 많았지만 그 가운데 문 목사의 등장이야말로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산모가 해산의 고통으로 아우성 치듯이 이 민족 또한 한 인물의 탄생을 앞두고 진통을 겪었다. 1919년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여 3·1운동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 문목사는 태어났다.

문 목사의 등장은 민족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물론 그 동안 이 민족을 놓고 해 나온 일을 놓고 볼 때 특히 관심을 끈다.

문 목사는 16세에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후 1945년까지 개인적인 수련과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해왔다고 말한다. 특히 이 기간 공식적 보음 전파에 앞서 교리인 ‘원리’의 체계를 세우는 등 소명의식을 다졌다고 보면 된다.

문 목사가 공식노정을 출발한 이후 통일교를 세우고 세계적 선교노정을 걷는 과정은 그야말로 수난의 연속이었다. 우리 민족이 일제에 의해 수난을 받는 이상으로 문 목사는 ‘사건’의 연속이라 할만큼 넘어야할 산이 많았다.


2. 조국 찾기 나선 문 목사

문 목사의 뜻적인 준비시기인 25세까지의 전 기간이 일본 식민지시대였다. 이 기간 문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은 항일운동을 이유로 경기도 경찰부에 수감된 사건이다.

문 목사가 일본에 건너간 이 시기는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이 극에 달한 시기요, 식민-피식민의 대립 관계가 첨예화한 시기이다. 그래서 한국을 떠날 때 의지도 대단했다. 하나님에게는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나라를 찾아 세우겠다”고 기도했다. 또 문 목사는 하나님께서 ‘한국을 지켜 주시기를’ 간곡히 기원하며 한국을 떠났다고 회고한다.

“(일본을 가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내가 일본에 가서 배워올 것이 뭐냐. 이 나라를 해방하고 자주적 독립국가를 갖춰 우리 2세들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을 닦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용산역을 떠나 한강다리를 지나면서 난간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것이 생각납니다.”

곧바로 와세다대학 부속 와세다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 학업을 계속하면서도 “주체적인 민족성을 이 땅 위에 세우고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문 목사는 항일운동, 특히 지하운동에 나섰다.

“나는 일본에 가서 지하운동을 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동지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여 김구 선생과 같이 운동하기 위해 관부연락선을 타고 다녔고, 부산에서부터 신의주까지 다니면서 항일운동을 했습니다. 선생님도 생명을 걸고 그런 일을 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말씀선집 39권 63쪽)

문 목사의 이러한 항일-독립운동에는 늘 위험이 수반됐고 행동 반경에 제약이 뒤따랐다. ‘사상범’으로 몰려 유치장에 끌려가기도 했다.

“선생님은 공산주의자들이 원수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에 앞서 일본이 우리들의 원수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별의별 일을 다 했던 것입니다. 나라를 살리기 이해 이렇게 싸워 나온 것입니다.”(말씀선집 36권 353쪽)

문 목사는 항일운동으로 “그때 공산당과 함께 3년간 핍박을 당했다”며 “잡히면 사상범으로 감옥에 끌려갔다”고 술회했다. 문 목사는 요주의 인물로 지목 받게 되면서 “꽁무니에는 언제나 형사들이 따라 다녔고” “한국에 나오게 되면 그들이 한국에 미리 전화를 해서 아무개가 지금 한국 어디에 간다고 연락을 했으며” “정거장 개찰구를 나오면 원치 않는 사람들이 나와서 맞이했다”고 회고했다.

“선생님은 학생이었지만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선생님을 잘 모릅니다. 한국이 일본 정권 아래 있을 때 선생님은 몇 번이나 유치장에 끌려들어 갔습니다. 그곳 도쿄에 와 있을 때는 한 달에 한 번은 경찰에 불려 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마지에 이를 무렵 일본은 국가 전체를 전시 비상체계로 개편했다. 이러한 와중에 문 목사가 다니던 학교 역시 반년 앞당겨 졸업을 시켰다. 따라서 문 목사는 1943년 9월 30일 졸업하고 10월 중순 귀국했다.


3. 일본 경찰의 체포

본격적인 대륙 침략의 계기로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킨 일본은 다시 중일전쟁(1937년)을 거쳐 마침내 태평양전쟁(1941년)으로 확대시켜 군국주의 파쇼 체제로 몰고 나갔다.

식민지 체제의 강화는 먼저 군사력· 경찰력 강화의 증강에서 시작됐다. 여기에다 전시 체제를 강조하면서 징병령을 선포, 젊은이들을 전선에 끌어내고, 항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사상범’으로 몰아 ‘조선총독부 재판소령 전시특례’(1944년 2월) ‘조선전시형사특별령’ 등의 이름 아래 강제 투옥했다. 또한 ‘학도지원병’제도(1943년)가 강행되어 약 4천 5백 명의 전문학교, 대학교 학생들이 전쟁터로 끌려갔다.

그 무렵 인문계 학교 출신들과는 달리 공과 계통 학생들은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후방 근무를 할 수 있게 됐다. 문 목사는 취직을 하되, 그 당시 만주 땅이면서 소련과 몽고의 접경지대인 하일라르로 가도록 알선 받았다. 문 목사는 그곳에서 중국어는 물론 러시아어 몽고어까지 배울 심산이었다. 이는 후일에 대비한 포석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서울에 돌아와 40일 가량 지나면서 그곳 형편이 불안하다는 것을 알고 유명한 토목회사인 가지마구미(鹿島組)의 전기기사로 취직했다.

1944년 11월 문 목사는 일경에게 체포됐다. 일본 유학 당시 항일운동을 한 사실이 뒤늦게 탄로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문 목사는 그 당시 악명 높기로 유명한 경기도 경찰부(경기도 일원과 서울 4개 경찰서 관할)에 잡혀가기에 이르렀다.


4. 혹독한 고문과 묵비권 행사

문 목사는 수감 후 일본 경찰로부터 말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열두 시간 가까이 고문을 받고 피를 토한 적이 있고 15분 동안 사람을 미치게 하는, 평생 잊지 못할 고문도 받았습니다. 기적적으로 살아 나왔습니다. 맞으면서 뒤로 벌렁벌렁 나자빠지고, 죽은 피가 주루룩 쏟아지도록 매를 맞으면서도 ‘쳐봐라! 그 몽둥이가 부러지나 내 뼈가 부러지나’하며 견뎌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큰 시련이었습니다.”

고문의 초점은 일본에서의 지하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내막과 그 관련자들을 실토하라는 것. 그러나 문 목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문 목사는 “한번은 열네 시간 동안 취조와 구타를 당해 기어서 20m도 가지 못할 만큼 되고 몇 번씩 죽었다 깨어나는 과정이 되었어도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말씀선집 33권 116쪽)고 말했다.

당시 문목사는 매질과 물 먹이기, 군화발로 배 밟기, 두 다리 무릎 안쪽에 각목 넣고 밟기, 열 손가락 피 내기 등 갖가지 고문을 받았다. 당시 대표적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물 먹이는 고문이다. 이는 추운 날 콘크리트 바닥에 눕혀놓고 무한정 냉수를 끼얹거나 그것을 먹게 해서 졸도· 실신하면 밀쳐 내놓았다가 몇 번이든지 되풀이하면서 자백을 촉구하는 것이다.

둘째는 비행기 태우기. 이는 두 팔을 등 뒤로 꺾어 돌려 가지고 두 손을 한데 묶어서 공중에 매달고 구타를 하면서 자백을 강요하는 고문이다.

셋째는 두 다리의 무릎 안쪽 양 오금에 야구 방망이 같은 목봉을 가로 끼우고 꿇어앉힌 다음 무릎 위를 밟고 차고 때리는 고문이다.

넷째는 열 손가락마다 전극을 끼우고 전압을 흐르게 하여 고통을 주는 고문으로 온몸이 감전되면서 사지육신이 뒤틀리게 된다.

“선생님은 스물 네 살 때부터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고문을 당하다가 코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지고, 몸이 부서지는 자리에서도 철석같은 신념을 가지고 그 나라를 상대로 해서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던 사나이입니다. ‘아무리 몽둥이로 쳐봐라. 내 몸이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몽둥이가 부러질 것이다. 손가락을 끊어 봐라. 어떤 독한 고문을 해도 굴복하지 않는다’고 하며 버틴 사나이입니다.”(말씀선집 25권 150쪽)

이러한 상황에서도 문 목사는 굴하지 않고 꿋꿋한 자세를 견지했다.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 동료들이 더 잡혀 들어가지 않았다. 문 목사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신의 어려움을 면케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1945년 문 목사는 출감한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직장에 복귀했고 이른 봄 잠시 평북 정주의 고향을 다녀왔다. 그러면서 8·15 해방이 될 것을 미리 알고 내적인 준비를 하면서 후일 공적인 활동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섭리사의 무거운 짐을 지고』, PP.17-25)

*는파리의 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