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귀의했다는 소문이 나돌던 통일교 문선명 총재의 7남 문형진씨. 그가 문 총재 자녀로는 유일하게 목회자로 나섰다. 종교 창시자 2세로 태어나면서 부터 남달랐던 그의 삶과 그의 특별한 철학이 담긴 자녀 교육 이야기를 들어본다.
통일교 문선명 총재의 7남이자 막내아들인 문형진씨(29)는 최근 서울 청파교회의 당회장(목사)으로 취임했다. 11명의 자녀 중 목회자로 나선 아들은 그가 유일하다.
문형진 목사는 취임 이전부터 세간의 많은 관심을 받은 인물이다. 삭발과 승복 차림으로 학교에 다니면서 세계적인 종교지도자 달라이 라마, 작고한 전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과의 인연으로 불교로 개종한 것처럼 비춰졌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도교나 유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목사로 취임했다는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서울 용산에 자리한 청파교회 사택에서 문형진 목사 부부를 만났다. 통일교 창시자 2세, 한 교회의 목사는 인터뷰 대상자로서는 다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무거운 마음은 사라졌다. 계량 한복을 입고 있는 그는 소년과 같은 해맑은 얼굴이었다. 익숙한 솜씨로 녹차를 우려내는 그를 보며 종교라는 심오한 세계에 대한 복잡함을 접어두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양복은 너무 불편해요. 그래도 머리는 기르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삭발을 해서인지 겨우 기른 머리가 불편한 듯 보였다. “그래도 이런 겨울에는 머리카락이 있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하니 “겨울에는 털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냥 다니면 얼어 죽는다”고 했다. 곁에 있던 아내 이연아씨는 웃으며 “삭발한 사람을 보면 아직도 너무 부러워한다”며 거들었다.
합동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목적은 같아 이들 부부는 10년 전 통일교식 합동 결혼으로 맺어졌다. 그의 아내는 문 목사를 알고 있었지만, 그는 결혼식 때 아내를 처음 보았다.
“통일교는 결혼 전 이성교제를 금하고 있습니다. 결혼식 때 아내를 처음 만나 이야기했는데, 이야기를 마치고 내려오자 어머니가 ‘아내가 마음에 드니?’라고 물었어요. ‘좋은 느낌’이라고 대답했죠.”
일반인들이 통일교를 바라볼 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제도는 바로 이 ‘합동 결혼’일 것이다. 그의 아내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이에 대한 질문을 받아왔다.
“미국에 있을 때 상담 때문에 아이 학교를 찾아갔어요. 아이 선생님은 제가 통일교인 것을 알고는 진짜 결혼 전에 남편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았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랬는데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요. 제가 대답했어요. ‘결혼에는 여러 요소가 있는 것 같다. 사랑해서 결혼하기도 하지만 우리 전통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같이 살 수 있다’고요. 우리는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겠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거든요.”
스무 살이면 결혼하기에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닐까. 특히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그 부담이 컸을 듯하다. “모르는 게 약이었다 싶어요. 어렸을 때 결혼했으니 힘든 점이 있었죠. 대학을 다니며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졸업까지 10년이나 걸렸어요. 아이한테 미안하죠. 어린 엄마였으니까요. 제가 성숙했으면 더 잘 가르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반면에 좋은 점도 있었다. “가장 좋은 건 곁에서 남편이 변해가는 걸 봤다는 거예요. 스무 살 때 만났으니 그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고 남편이 변해가는 과정을 봤기 때문에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우린 함께 자랐고, 가장 중요한 과정을 함께 보냈어요. 30대에 만났으면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겠죠.”
문 목사는 대가족의 막내로 자라며 누나들의 사랑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아내에 대한 기대가 컸다고 한다. “결혼을 하면서 이젠 마음의 어려움이 있으면 아내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죠. 오래전 제게 힘든 일이 있었어요. 아내에게 의지하려고 했죠. 그런데 아내는 나를 위로하지 않고 방을 나가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이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다른 방에 들어가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아내는 저를 배려한 건데 오해했던 거죠. 그래서 제가 나중에 ‘내가 마음이 아플 때는 많이 안아줘요. 저는 그런 위로가 필요해요’라고 말했죠.”
지금 이들 부부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위로받고, 위로하고 있다. 그는 부부 사이에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다.
문 목사의 특별한 자녀 교육법 이들 부부는 4남 1녀, 모두 5명의 아이를 기르고 있다. 이도 부족해서 딸아이가 외로워 보인다고 딸 하나를 더 낳을까 생각 중이란다. 문 목사에게는 다섯 명의 자녀를 기르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었다.
“큰아이가 열 살, 정확히 두 살 터울로 막내는 두 살이에요. 아이는 부모와 일대일 시간을 보낼 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해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아이와 부모가 일대일일 때는 대부분 야단을 칠 때거든요. 그래서 부모에 대한 아이의 생각이 부정적이게 돼요. 그래서 저는 일주일에 하루씩을 각자 아이의 날로 만들었어요. 큰아이의 날에는 큰아이하고만 놀죠.”
아이와 일대일로 만나면 보통 무엇을 하는지 물으니, 먼저 아이가 원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원하는 것을 먹으러 가거나 원하는 곳으로 놀러 간다고. 또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아이에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점을 이야기해요. ‘과자 사먹으라고 돈을 줬는데 거스름돈을 가져왔으니 엄마는 기쁘다’ 이렇게 구체적으로요. 그리고 형제들끼리 서로 좋은 점을 이야기하게 하죠. 형은 이런 점이 좋아, 이런 식으로요. 아이들에게 좋은 점을 발견하게 하는 거예요. 장점을 보게 되면 그게 확대가 되죠. 그러면 항상 감사하는 아이가 되겠죠.”
아이들을 체벌할 때도 특별한 원칙이 있었다. 중요한 건 ‘사랑의 매’는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매를 들 때 부모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이 소리 지르고 떠들 때가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그만해’라고 말하는데, ‘조용하라’고 하면서 부모가 소리를 지르게 되거든요.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경고를 줍니다. 세 번 경고를 받으면 화장실에 들어가야 해요. 화장실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하는 거죠. 아이들에게 훨씬 도움이 됩니다.”
아내 역시 매가 아이들 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다고 한다. “어느 모임에 갔는데 스물두 살의 어떤 여성이 자신은 한 번도 부모님에게 맞지 않고 자랐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군요. 그 순간 많이 느꼈어요. 저도 예전에는 아이들을 때렸거든요. 그러다 2년 전부터는 체벌하지 않아요. 매를 들면 아이들은 엄마를 무서워하고 절대적인 권위자로 인식하지, 말은 잘 안 듣더군요. 세 번의 경고를 하면 안 되는 걸 알게 되면서도 부모를 무서워하는 것이 덜하더라고요.”
형님의 죽음 후 깨달은 세계 문선명 총재의 자녀들은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미국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스트 가든이라는 넓은 저택 안에 갇혀 살아야 했고, 어딜 가나 경호원과 동행해야 했다.
“당시 저희들을 납치할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혼자서 집 밖을 나가지 못했어요. 친구네 집에 갈 때도 경호원과 함께 가야 했죠. 결혼해서 집을 나가기 전까지 그렇게 살았어요. 집 안에서는 형제들과 어울려 보통 아이들처럼 놀았죠. 롤로블레이드와 스케이트보드를 많이 탔어요.” 창시자 2세로서 정체성 혼란을 겪었던 시기가 있었는지 물었다.
“정체성이요? 그런 것은 없었어요. 운동을 통해 제 자신을 개발했던 것 같아요.” 그는 문총재가 ‘러비’라고 부를 만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지만,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형 문영진씨다.
“중학교 때는 공부를 너무 못했어요. 고등학교 때는 이소룡에 빠져 무술에 심취했죠. 막내여서 부모님께 야단 한 번 맞지 않고 자랐어요. 그런데 그런 저를 영진 형이 1년 동안 훈련시켰어요. 형은 학점이 올 A일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죠. 형은 저에게 책 읽는 법부터 구체적으로 공부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어요. 저에게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하셨죠. 그 전까지 저는 ‘바보 멍청이다’, ‘아버지의 가장 나쁜 유전자를 받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형만이 저에게 ‘나는 널 믿는다’며 격려했어요.”
이렇게 소중한 형은 8년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문 목사는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삶과 죽음에 의문을 품고 불교에 심취하게 됐다.
“제게는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신부님이 계세요. 그분에게 시간이 있을 때마다 찾아가 눈물을 흘리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형님은 동양사상을 공부하고 계셨어요. 형님 책 중에는 노자, 선불교 관련 서적이 많았어요. 그 책들을 읽기 시작했죠. 지금도 스님들과 친하게 지내고 명상과 참선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문 목사는 가톨릭계 페이필드 대학을 다니면서 신부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하버드대 대학원에 다닐 때는 한국에서 유학 온 일미 스님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유학 온 다양한 종교계 인사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원에서 세계종교학을 공부하면서 세계 각국의 성지를 순례했는가 하면,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직접 친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초종교적인 활동은 오히려 그가 통일교인으로서 정체성을 갖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는 앞으로 이러한 활동을 통해 세계 평화를 모색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얼마 전 두 아이와 함께 태안반도에 다녀왔어요. 아이들이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교육이었죠. 앞으로도 봉사가 필요한 일이 생길 때는 교회가 집중해서 도와야 할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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