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감상방☆/♡옛노래모음♡

[알뜰한 당신-황금심]

문수봉(李楨汕) 2008. 11. 16. 14:36



황금심 - 알뜰한 당신 

 (조명암 작사, 전수린 작곡,  황금심 노래. 빅터레코드, 1937년)


                         


    알뜰한 당신 / 황금심


    울고 왔다 울고 가는 설운 사정을
    당신이 몰라주면 누가 알아 주나요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무슨 까닭에 모르는 척 하십니까요

    만나면 사정하자 먹은 마음을
    울어서 당신앞에 하소연할까요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무슨 까닭에 모르는 척 하십니까요

 


 

황금심과 ‘알뜰한 당신’



 

                                 글 :  김용만

 


1.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듯한 황금심의 목소리


  황금심(黃琴心, 1921-2001)이 ‘알뜰한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청아한 소리”라고들 가요평론가들이 말했다고 한다. 

 

타고난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소녀 시절부터 노래를 좋아하여 서울 청진동 집에서 축음기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노래를 자주 불렀는데, 지나다니던 음반회사 직원이 울타리너머로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반하여 당장에 가수로 나갈 것을 권할 만큼 그녀는 빼어난 목소리를 지녔던 것이다.

 

 본명이 황금동(黃琴童)인 황금심은 1922년 12월에 경남 동래에서 태어났으나 서울로 이사와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1934년 덕수보통학교 5학년 때, 지나다니면서 울타리 너머로 그녀의 노래 소리를 들어왔던 음반 가게 점원이 그녀에게  오케레코드  전속가수 선발  콩쿨 대회에 나갈 것을 권하여 지원했는데, 지원한 20명중에서 황금동 혼자만이 뽑혔다.  그녀 나이 14세였을 때였다.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은 그녀의 이름을 황금동에서 황금자로 바꾸고, 노래를 취입하기 위한 음악공부를 시키면서 취입 준비를 시켰다. 드디어  1936년 오케레코드사에서 '왜 못 오시나요'와 '지는 석양 어이 하리오'란 음반을 황금자란 이름으로 처음 취입했다.

 

그러나 이 첫 취입곡이 미처 빛을 보기도 전에 황금동은 그 이듬해 작사가 이부풍(본명 박노홍)의 권고와 안내에 따라 빅터레코드사로 가서 빅터의 전속이 되었다.

 

 

오케레코드는 당시에 이난영, 장세정 이화자, 이은파 등  최고 여성 가수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었기에 황금심의 데뷔를 서둘 필요가 당장은 없었다. 그래서 약간의  여유를 부리다가 장래가 촉망되는 신인 황금심을 빅터에 빼앗겼던 것이다.

 

빅터레코드에서는 황금동에게 알뜰한 당신'(조명암 작사, 전수린 작곡)과 '한양은 천리원정'(조명암 작사, 이면상 작곡)을 취입하도록 하고, 예명도 이부풍이 지어준 황금심으로 바꾸도록 했다.  이 음반은 나오자말자 크게 히트함으로써 황금심은 바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황금심의 음반 자켓 (출처, 영남일보,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이 노래가 히트함으로써 황금심은 이난영, 신카나리아, 장세정 등과 함께 우리 가요사에서 여성 트로트 가수 1세대 그룹의 유망한 가수로 등장하게 되지만, 가수가 되는 것을 단호하게 반대했던 아버지 때문에 처음에는 많은 진통을 겪기도 했다.

 

 ‘알뜰한 당신’이 히트하자, 전도유망한 황금동을 처음에 발굴하였던 오케레코드사가 황금동을 이중계약으로 법원에 고소를 하는 사태가 생기기도 하였다. 

 

결국 가족들의 노력으로 황금심이 빅터레코드에 머무는 조건으로 어렵게나마 타협되었다. 그 사건을 겪은 황금심은 그 후 타 레코드의 전속 요청이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빅터레코드 소속으로 활동하는 것을 고수했다.

 

 ‘알뜰한 당신’이 나오자말자 이렇게 히트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황금심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와  매끄럽게 처리된  전수린의 멜로디라 할 수 있겠지만, 애정 표현에서 항상 수동적이었던  당시의 여성이 남자에 대해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한 노래 말이 화제를 모은 것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노래가 나오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여성취향 노래의 노래 말이  ‘목포의 눈물’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로 깊은 상처를 받고, 그 상처로 인한 상실감을 풀길이 없어 아무 대책도 없이 그저 눈물을 삼키면서 보내드리거나 기다려야만 하는 안타까운 모습만 보이던” 수동적이거나 피동적인 것이었는데,  ‘알뜰한 당신’은 그 피동적이나 수동적인 것에서 벗어나  여성 자신이 안타까운 자기의 의지를 상대방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간에 적극적으로 내놓고 말할 수 있게 한 노래 말이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어서, 여성들의 공감을 얻어 널리 유행할 수 있었다.

 

여성들이 평소 마음속으로 지니고 있던 생각과 뜻을 이 노래가 적절한 어구와 애절한 곡조로 대변해 주었던 것이다.

 

 황금심의 목소리는 꾀꼬리처럼 곱다고 하여 '꾀꼬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어 다녔다.  그녀는 ‘알뜰한 당신’과 같은 트로트를 청아한 미성으로 구성지게 노래했을 뿐 아니라,  ‘외로운 가로등’(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과 같은 블루스풍의 노래도 잘 소화해 불렀으며,  ‘울산 큰 애기(고마부 작사, 이면상 작곡)’와 같은 신(新)민요도 간드러지게 잘 부르는 등 어느 분야의 노래도 상황에 맞게 잘 불렀다.

 

특히 민요조의 구성진 창법은 한때 민요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할 만큼 유창하였으며, 민요에 젖어온 민족정서를 업고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1941년 황금심은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의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하여 최초의 부부가수가 되지만, 열 살이나 나이 차가 나는 고복수와 결혼하기까지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많은 시련을 겪기도 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한 결혼이라 그랬는지 이들 부부는 잉꼬부부로서 스캔들 없이 가장 원만하고 모범적인 부부생활을 하였으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어 잘 길렀다.

 

 일제 강점기에 그녀가 남긴 히트 곡으로는  ‘알뜰한 당신’ ‘울산 큰애기’ ‘외로운 가로등’과 같은 대표적 히트곡 외에도 ‘마음의 항구’ ‘알려 주세요’ ‘청치마 홍치마’ ‘꿈꾸는 시절’ ‘여창에 기대어’ ‘만포선 천리 길’ ‘날 다려 가소’ ‘한 많은 추풍령’ ‘추억의 탱고’ 등 많은 노래가 있다.

 

이들 노래의 대부분은 전수린이 작곡한 것이었다. 특히 이부풍(박노홍)의 노래 말에 전수린이 곡을 붙이고 황금심이 노래한 것이 많아 이들 셋은 빅터 레코드의 황금트리오가 되었다.

 

 고복수, 이난영의 음반 표지

(출처, 주간한국 추억의 LP여행)

 

 

황금심은 음반 취입도 많이 했지만, 악극공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데, 초기에는  김용환이 조직한 빅타레코드 소속의 반도악극좌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고복수와 결혼한 후에는 '고복수와 그 악단'과 전옥(전덕례)이 조직한 ‘남해위문대‘와 함께 조선 전역을 물론, 일본, ·만주, 연해주, 사할린 등으로 위문공연을 다니며 나라 잃은 동포들의 애환을 달래 주었다. 

 

  광복 후에는 전옥이 이끄는 백조가극단(남해위문대의 후신)에 참가하여 전국을 누비며 공연활동을 했다.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1부에 전옥이 나오는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가 공연됐고, 2부에는 버라이어티쇼로 고복수, ·황금심 같은 유명 가수들의 무대로 구성되었다.

 

고복수, 황금심 부부가 공연하는 ‘춘향전’이나 ‘풍년 송‘을 테마로 하는 악극은 단골 메뉴였고, 인기가 있었다.

 

 6. 25 사변 때 미쳐 피난가지 못한 고복수는 인민군에 편입되어 북으로 올라가던 중에 국군 낙하산 부대에 의해 간신히 구출되었다. 그 후, 육군 정훈공작대에 자원해 들어가 군 위문 연예대원으로 활동했다. 1.4후퇴 때 이들 부부는 피난지인 대구에서 '해피'라는 이름의 다방을 하면서 쇼 공연을 기획하기도 했다.

 

 1952년 취입한 제주도를 소재로 한 노래 ‘삼다도 소식’(유호 작사, 박춘석 작곡)이 히트하여 다시 인기를 이어갔다. 이후 1957년 '처녀총각‘ ’뽕따러 가세', 1958년 '한양낭군' 1959년 '장희빈' 등 꾸준히 히트곡을 내놓았다. 1962년의 '성화가 났네', 1963년 '햇빛 없는 그림자'도 빼놓을 수 없는 히트곡이다.

 

 ‘50년대와 ’60년대에는 이전에 유행했던 수많은 노래를 리바이벌 형식으로 재취입했는데,  자신이 불렀던 인기곡 뿐 아니라, 이난영, 장세정, 백난아 등 다른 가수들이 불렀던 노래들도 많이 취입하였다. 최초의 창작가요 ‘강남달’(낙화유수)을 비롯한 왕년에 인기를 끌었던 흘러온 옛 노래들은 중년의 성숙되고 세련되어진 황금심의 목소리에 의하여 다시 꽃피워졌던 것이다.

 

 그녀는 일생 동안 4,000여 곡을 발표할 정도로 활발한 가수 생활을 하였고,  1960년에는  아시아 영화제의 초대가수로서 공연한 적도 있었다.

 

 1958년 남편 고복수가 은퇴한 후,  새롭게 시작한  택시 사업에서 실패하고, 1960년 전 재산을 투입하여 제작한 영화 ‘타향살이’의 흥행부진으로 도산 지경에 이르게 되자,  그녀는 무대공연, 레코드 취입 등으로 일곱 식구의 생활을 담당하는 억척 여성이 되기도 했다.

 

 1972년 남편과 사별한 후 생활방편으로 수유리에서 민속주점 ‘타향살이’를 운영하기도 했다.

 ‘93년엔 '삼다도소식'으로 한국가요창작인 공로대상을 수상했다.  1996년부터는 파킨슨병을 앓다가 2001년 7월 30일 별세하여 용인 카톨릭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2. ‘알뜰한 당신’의 작사자 조명암


 당시 여성의 심정을 세심하게 그려낸 ‘알뜰한 당신’의 노래 말을 지은 이가 대부분의 노래책에 이부풍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조명암(趙鳴岩, 1913-1993)이 원 작사자이다.

 

조명암이 월북작가이기 때문에 그가 작사한 곡은 금지곡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민족의 애창곡이 된 이 노래를 살리기 위해, 월북작가가 작사한 대부분의  노래가 그랬듯이 이 노래의 작사자도 다른 작사가의  이름으로 바꿔 놓았던 것이다.

 

작사자로 기록된 이부풍은 당시 빅터레코드의 문예부장이었기에 실상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가 작사한 것으로 아무 의심 없이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명암은 시인, 작사가, 극작가로 활약한 문인으로서,  본명은 조영출(趙靈出)이고 예명으로서는 조명암 이외에 이가실(李嘉實), 김다인(金茶人), 김운탄(金雲灘) 등을 썼다.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서울로 이사 왔으나, 얼마 안가서 아버지가 사망함으로써 생활이  어려워 만해 한용운이 있던 고성 건봉사에 맡겨져 승려생활 하게 되었다. 건봉사 부설 봉명학교를 다니다가, 한용운의 추천으로 보성고보에 입학하여 1934년 졸업했다.

 

 1932년부터 문필활동을 하다가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동방의 태양을 쏘라’와 가사 ’서울 노래‘가 뽑힌 후 본격적인 작사가 활동을 시작했다. 1935년부터 봉명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36년에는 와세다 대학 불문과에 진학하게 된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에도 대중가요의 가사를 작사하여 학비에 보태었다.

 

1940년대부터는 악극단의 악극대본을 쓰는 극작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광복 전에 그가 쓴 희곡은 ’홍장미의 꿈‘(1940), ’아편전쟁‘(1942), ’영 넘어 팔십리’(1943)  ‘맹미녀’ ‘우충렬’(1945) 등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영화 ‘그대와 나’의 주제가를 작사한 것을 비롯하여 대표적인 친일가요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처’ ‘혈서지원’  ‘2천5백만의 감격’ 등 모두 9편의 군국가요를 작사하였으며, ‘승리에의 길’(1944)이라는 친일 연극의 각본도 썼다. 이로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광복 후에는 조선프로레탈리아예술동맹에 가입했고, 조선문학가동맹 시부 위원을 맡아 좌익 계열에 가담했으며. 연극분야에서도 이서향, 함세덕 등과 교류하며 ‘독립군’, ‘논개’  ‘위대한 사랑’(1947) 등의 희곡을 썼다.

 

 1948년 월북한 후 북조선 예술계에서 중용되었고, 한국 전쟁 중에는 종군작가로 활동하며 조선인민군을 위한 ‘조국보위의 노래’를 작사했다.

 

 북조선에서 고위직인 교육문화성 예술국장 및 부상, 민족예술극장 총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수많은 시, 노래가사,  희곡을 발표했다.(이영미 외,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도서출판소도, 2006, 최창호,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사, 일월서각, 2000 참고)

 

조명암

 

조명암은 1930년대부터 광복 직후까지 가장 많은 노래 말을 지은 작사가 중의 한분이다. 그가 작사한 노래 말은 당시의 사회 상황과 대중의 심리를 잘 담고 있었기에 그가 작사한 많은 노래가 인기곡이 되었다.

 

영남대 이동순 교수가 조명암 가요시의 특성을 역사적 현실 반영, 탁월한 생활정서 묘사, 전통양식과 풍자의 활용 등으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조명암의 노래 말은 시대 상황과 사회 현실, 민족정서, 그리고 식민통치 하의 대중의 심정을 적절하게 그려냄으로써, 수준 높으면서도 대중에게 어필되는 노래 말을 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제 강점기에 500여 편이 훨씬 넘는 노래 가사를 작사했고, 박영호와 함께 가장 많은 히트곡을 낸 대표적인 작사가 중의 한 분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는 것이다.

 

 ‘꼬집힌 풋사랑’남인수), 청노새 탄식‘(남인수)  ’바다의 교향시’(김정구) 어머님전 상백(이화자) ‘다방의 푸른 꿈’(이난영)  ‘코스모스 탄식’(박향림) ‘울며 헤진 부산항’(남인수) ‘화류춘몽’(이화자) ‘꿈꾸는 백마강’(이인권) ‘역마차(장세정) ‘선창’(고운봉) ‘진주라 천리길’(이규남) ‘낙화유수’(남인수) ‘남매’(남인수) ‘목포는 항구다’(이난영) ‘고향설’(백년설) ‘서귀포 칠십리’(남인수) ‘아내의 노래’(김백희) ‘울어라 은방울’(장세정) ‘고향초’(장세정) 등과 같이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는 대표적인 많은 대중가요들이 그가 작사한 것이란 것만 봐도  작사가로서의 그의 능력이 어떠했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정부가 단행한 납월재북문학인들에 대한 해금조치를 단행하지만, 조명암은 해금자 명단에서 제외되어 있다가  2003년에 가서야 풀리게 됨으로써 그가 지은 노래말은 원형을 찾아 복원되고 있다. 그 동안 월북가족이라는 굴레에 메여 숨어 지내듯이 하던 본처와 외동딸은 연좌에서 벗어났지만, 조명암이 작사한 수많은 노래의 인세수입마저도 50년에 걸린 소멸시효 때문에 세월 속에 날려버린 셈이 되었다.



3. ‘알뜰한 당신’을 작곡한 전수린 (全壽麟 1907∼1984)

 

전수린


 1907년 12월 15일 개성(開城)에서 출생했다. 출생. 송

도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바이올린 연주법을 배우면서 음악에 눈뜨기 시작하였고 악전(樂典)을 배웠다.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하기 위하여 호수돈여학교 교장 리콜스 부인으로부터 바이올린 개인지도를 받기도 했다. 

 

 열아홉 살 때 상경하여 연악회(硏樂會)를 주도하고 있던 홍난파가 주관하는 파락한(破樂限)의 멤버로서, 바이올린 연주 활동을 하면서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 지도를 받았다. 

 

 1928년 순회공연 극단인 동방예술단에 입단하는 것을 시작으로 취성좌 등 악단에 관계하면서 배경음악을 연주하는 악사와 작곡가로 활동하였다.

 

1928년, ‘황성(荒城)의 적(跡)’을 작곡하여 우리 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단조 트로트의 시대를 연 첫 곡이 되게 했다. ‘황성의 적’으로 배우 이애리수를 유명가수로 만든 그는  ‘나는 열일곱살이예요’로 열일곱살의 소녀가수 박단마가 스타덤에 오르게 했으며,  ‘알뜰한 당신’으로 16세의 소녀 황금심을 하나의 데뷔곡으로 황금의 신인이 되게 했다.

 

이후 전수린은 작사가 이부풍(박노홍)과 가수 황금심과 함께  빅터레코드의 히트곡들을 내는 황금의 트리오가 된다.

 

  ‘42년 창씨개명(創氏改名)한 자신의 이름을 딴 ’타마카와(玉川)위문대‘를 조직하여 만주와 일본의 북해도 탄광지대에 가서 한국 노무자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는 트로트는 물론, 신민요, 재즈송에 이르기까지 작곡 영역을 넓혀, 1930년대 초,중반을 리더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트로트곡인 ’알뜰한 당신‘(황금심), 얄궂은 운명(이인권), 무정(손금용), 재즈나 블루스 색채가 강한 ‘나는 열일곱살이예요(박단마), ’외로운 가로등‘(황금심), 신민요적 색채가 있는 ’삼천리 강산 에라 좋구나‘(이애리수) 등 다양한 영역에 걸친 인기곡을 계속 발표하였다.

 

 1926년경에 작곡하여 막간가수에 의해 불리어지다가 1932년에 가서야 취입된 ’고요한 장안(長安)‘(이애리수)은 ’아다나사케(仇情 또는 怨情)‘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도 크게 유행하였다.

 

이 노래는 일본의 코가마사오가 1931년 최초의 엔카로 발표한 ’술은 눈물인가 탄식이런가((酒は淚か溜息か)‘가 이 노래를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었던 곡이다.

 

일본 엔카의 원조라고 하는 이 노래가 ’고요한 장안‘의 표절곡이라면 엔카보다 우리가 트로트류의 대중가요를 먼저 출발시켰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왜색가요 시비도 자연히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코가마사오는  8세 때부터 인천에서 자라 인천창영소학교와 서울의 선린상업학교를 거쳐 명치대학을 다닌 경력이 이야기해 주듯이, 그의 많은 음악적 기초와 소양은 한국에서 쌓여진 것이 많을 수 밖에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일본엔카를 대표하는 코가마사오의 엔카에 한국의 음악이 스며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코가마사오는 전수린과 일찍부터 돈독한 교유관계룰 가지고 있었고,  코가마사오가 ’술은 눈물일까 탄식일까‘를 내놓아 엔카가 출발될 즈음인 ’30년대 초기에, 우리 나라에는 벌써 전수린을 비롯하여 김교성, 김준영, 문호월, 김용환, 손목인 등 쟁쟁한 작곡가들이 있었기에, 우리 가요가 엔카의 영향으로 출발한 것이라고 볼 수 없고, 처음부터 엔카는 엔카대로 우리 가요는 우리 가요대로 독자적으로 출발하여 상호보완 관계를 가지면서 발전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전수린은 7남매를 거느린 가장으로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생활하다가 ‘46년경에 서울 충무로 4가에서 중고 악기를 파는 악기점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폐점하고 연주생활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63년에 이서구 작 방송드라마의 주제가 ’강화도령‘을 작곡하여 좋은 반응을 얻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도 했다.

 

 1970년 한국가요반세기동지회 초대회장을 지냈고, 1984년 12월 28일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음악감상방☆ > ♡옛노래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처녀총각 - 남백송]  (0) 2009.02.19
[불나비 사랑 / 김상국]  (0) 2008.11.16
[흘러간 옛노래 60곡 모음]  (0) 2008.11.11
[선창-고운봉]  (0) 2008.11.11
[꿈에본 내고향 - 한복남]   (0) 2008.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