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도처에서 우리는 토끼와 거북이가 단독으로, 혹은 함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승주 선암사 원통전에는 방아 찧는 두 마리 토끼 가 있고, 김제 금산사 보제루에는 누운 자세로 건물 부재를 받치고 있는 한 쌍의 토끼가 있다.
남원 선원사 칠성각, 상주 남장사 극락보전, 양산 통도사 명부전에도 토끼와 거북이 형상을 그린 그림이 있으며, 여천 흥국사 대웅전 축대 위에는 돌을 깎아 만든 토끼와 거북이 상이 있다. 그리고 울진 불영사 대웅보전 석축 아래에는 덩치가 큰 두 마리의 거북이 상이 있다.
선암사, 금산사의 것은 토끼만 나타나 있는 경우이고 선원사, 남장사, 통도사, 흥국사의 것은 토끼와 거북이가 함께 등장한 경우며, 불영사의 것은 거북이만 나타나 있는 사례다. 선암사 원통전 출입문 궁창에 장식된 토끼상은 조각 솜씨가 뛰어나거나 아름답지는 않지만 지닌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단순한 토끼 문양이 아니라 토끼로써 달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를 서울 창덕궁 대조전 뒷뜰의 굴뚝에서 찾을 수 있는데, 토끼로써 달을 표현하는 상징적 수법은 전통시대 장식 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이는 전설이나 민담을 통해 형성된 달에 대한 일반적 관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불교에서 보리심을 심월(心月)이라 하거나 만월에 비유하는 것은 밝고 깨끗하며, 광명을 천지에 두루 비추어도 분별됨이 없는 것이 보름달과 같기 때문이다. 관음보살의 화현(化現) 중에 달과 관련된 이름을 가진 보살로는 만월보살, 수월보살, 월광보살 등이 있는데, 보살에 달과 관련된 이름을 붙인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보름달의 기하학적 속성은 원이다. 둥근 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점의 연속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원은 영원성과 상통한다. 또한 원은 크기의 대소를 불문하고 자체로써 완전성을 확보하고 있기에 불교의 원만(圓滿).원통(圓通).원공(圓空) 등의 개념과 통한다. 관음보살을 원통교주라고 하는 것은 관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融通)을 갖추고 중생 고뇌를 소멸시켜 주기 때문이다.
관음보살의 원만.원통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이상적 상징형은 무어라 해도 보름달이다. 실제로 동래 범어사 관음전 벽면에는 커다란 보름달이 그려져 있다. 선암사 원통전 출입문의 토끼는 그냥 토끼가 아니라 보름달이다. 그것은 원통전의 주인인 원통교주가 보문시현(普門示現)을 통해 나타난 또 하나의 관음보살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들에게 친숙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혹은 〈별주부전〉은 인도의 불전설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불전설화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본생담을 말하는 것으로, 원왕본생(猿王本生), 악본생(鰐本生), 원본생(猿本生)의 세 가지가 있다. 이야기는 옛날 인도에서 교훈적인 우화로 전해 오다 불교 경전에 수용되면서 종교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설화에 등장하는 동물은 원숭이와 악어인데, 물에 사는 악어 아내가 원숭이 간을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본생담에 삽입된 고대 인도설화가 불교전파와 함께 중국에 들어와 한문으로 번역될 때 악어와 원숭이가 거북이와 원숭이, 또는 용과 원숭이로 변했다. 그러나 설화가 지니는 불교적 의미는 같은 것이어서 설화 속의 원숭이는 부처님의 전신(前身)이며, 악어는 악인(惡人)인 제바달다(提婆達多, 부처님과 같은 시대의 이단자)로, 악어가 원숭이 간을 탐내는 것처럼 제바달다가 부처님을 해치려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 각색된 본생담이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주인공이 다시 토끼와 거북이로 변했다. 이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이 〈삼국사기〉 열전(列傳) 김유신전에 삽입된 ‘귀토설화(龜兎說話)’인데, 내용을 보면 이야기 주인공의 변화를 알 수 있다.
‘귀토설화’의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통도사 명부전 내벽에 보인다. 토끼가 거북이 등에 올라타고 용궁을 향해 가는 장면을 그렸는데, 일행 앞에서 또 다른 거북이가 길을 안내하는 모습이 보이고, 날아갈 듯한 기와지붕 옆에 써놓은 ‘수궁(水宮)’이라는 글자가 토끼 일행의 목적지가 용궁임을 알려 준다. 남장사 극락전의 그림은 토끼와 거북이 일행이 육지를 막 떠나는 장면을 그렸다. 일행을 떠나보내는 또 한 마리의 토끼 모습이 이채롭다. 여천 흥국사 대웅전 축대에도 토끼, 거북이 조각이 있으며, 남원 선원사 칠성각에도 거북이와 토끼를 조각한 목조 장식물이 있다. 이와 달리 거북이 혼자 등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해남 미황사 대웅전 앞쪽 주춧돌, 선암사 불조전 천장, 울진 불영사 대웅전 석축 밑, 창녕 불곡사 일주문 위, 정읍 내장사 대웅전 현판 양쪽 등 여러 곳에서 그와 같은 예를 찾을 수 있다.
‘귀토설화’에서 육지를 떠난 토끼와 거북이가 향해 가는 목적지는 용궁(龍宮)이다. 용궁은 용왕의 신령스러운 능력으로 만든 곳으로서 불교에서는 대해(大海) 밑에 있는 또 하나의 불국정토로 관념화 되는 곳이기 하다. 불자들은 현세에 불법이 유행하지 않게 될 때에는 용왕이 용궁에서 경전을 수호한다고 믿고 있다. 용궁과 관련해 〈불설해용왕경(佛說海龍王經)〉 ‘청불품(請佛品)’에 이렇게 적혀 있다. “해용왕이 영취산에 나아가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신심이 환희하여 용궁에 오셔서 공양을 받으시도록 청하니 부처님이 허락했다. 용왕은 곧바로 대해에 들어가 조화를 부려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을 짓고 무량보주로 갖가지 장식을 하니 장엄이 비길 데가 없었다. 해변으로부터 바다 밑에 이르기까지 통로에 삼도보계(三道寶階)를 만드니 도리천으로부터 염부제에 내려올 적과 같았고, 부처님이 모든 비구.보살들과 함께 보배 계단을 밟고 용궁에 들어가 용왕을 위하여 대설법을 베풀었다.”
용수(龍樹)보살 전설에도 용궁이 등장한다. 대승불교를 일으킨 인도의 용수보살이 설산(히말라야 산)에서 어떤 늙은 비구의 인도로 용궁에 들어가 많은 경전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용수보살은 한없이 많은 〈화엄경〉 범본(梵本) 가운데서 하본(下本) 화엄경을 지상으로 가져왔고, 그 때 가져온 〈화엄경〉이 오늘날의 〈화엄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불자들에게 용궁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주었으며, 〈화엄경〉의 소장처가 용궁이 있는 바다와 관련이 있다는 관념도 심어 주었다. 이와 연결해 볼 때, 선암사 대웅전 처마의 착고판(부연과 부연 사이를 판자로 막은 부분)마다 묵서 ‘해(海)’자를 쓰고, 대웅전 옆 요사채의 판벽에 ‘해(海)’자와 ‘수(水)’자를 투각한 것은 대웅전 일대를 대해의 불국정토, 즉 용궁으로 상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추측되며, 양산 통도사에서 경전을 보관하는 전각 이름을 해장보각(海藏寶閣)이라 한 것도 불경의 보관처가 해저 용궁이라고 보는 관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회전식 불경 보관대인 윤장대로 유명한 용문사가 있는 곳이 용궁리(龍宮里)라는 것도 우연의 일치로 보아 넘기엔 시사하는 바가 너무 크다.
불자들의 관념 속에는 사바세계에서 피안(彼岸)의 정토로 건너 갈 때 타고 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는 상상의 배가 있다. 관념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이 반야용선도이며,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법당 앞 기둥과 추녀 밑의 용두이다. 서방 극락정토로 가는 탈 것이 반야용선이라면 동방 해중 용궁으로 가는 탈 것은 거북이가 될 수 있다. 울진 불영사 대웅보전 축대 밑에 돌로 만든 커다란 거북이상이 있는데, 계단 양쪽에 각 한 마리씩 두 마리가 마치 대웅보전을 등에 지고 어디론가를 향해 가는 듯이 보인다. 여천 흥국사 대웅전 축대 위의 거북이는 옆에 있는 토끼와 함께 대웅전 건물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위치와 자세로 볼 때 이 거북이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법당의 불자들을 인도하여 용궁이라는 이상세계로 가는 ‘반야귀선(般若龜船)’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한다.
거북이의 자세와 관련해 비석의 귀부(龜趺)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귀부는 경주 신라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처럼 완전한 거북이 형태로 된 것이 있는가 하면, 여주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의 귀부처럼 용머리에 거북이 몸의 형태로 된 것도 있다. 이들 귀부를 유심히 보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자세를 취한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 청원 봉선홍경사비갈 귀부의 경우, 고개를 한 쪽으로 크게 돌린 자세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틀림이 없다. 쌍봉사철감선사탑비 귀부 역시 앞발을 휘저으며 물 속을 헤엄쳐 나아가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귀부가 향해 가는 곳은 아마도 이상세계일 것이며, 그것은 동방 해중의 불국정토와 같은 곳이리라.
사찰 장식 미술 속의 토끼와 거북이는 가깝게는 ‘귀토설화’의 주인공이지만 설화의 원천을 따진다면 부처님의 본생담과 관련있는 동물이다. 바로 이점이 토끼와 거북이가 사찰 장식 미술의 소재로 수용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사찰 장식 미술의 소재로 수용된 토끼와 거북이는 때로 각기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 상징물로 존재하기도 한다. 토끼는 달의 상징형으로, 거북이는 극락정토를 지상의 공간에 구현하는 상징형으로, 불자들을 대해의 용궁으로 인도하는 탈 것의 상징으로 거북이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道窓스님***合掌 道窓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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