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의 불전 장식화 가운데 특별히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호랑이그림이다. 민간에서 많이 그려지는 호랑이그림이 사찰 장식 그림으로 활용되는 것도 흥미롭거니와 표현 방법과 내용이 민화와 다르지 않다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일반 민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까치와 호랑이를 그린 것, 호랑이 한 마리만 그린 그림,담배 피우는 호랑이를 그린 것,산신의 시자(侍者)로 앉아 있는호랑이를 그린 그림 등 내용도 다양하다.
어떤 사찰에는 부처님이 전생에 보살이었을 때 굶주려 죽게 된 호랑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몸을 보시했다는 본생담 내용이나 희방사 오누이탑 전설 등 호랑이에 얽힌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도 있다. 건물 장식용 호랑이 그림 중에서 볼만한 것은 양산 통도사 해장보각의 까치호랑이그림이다. 민화 까치호랑이그림의 전형(典型)을 그대로 따르는 이 그림은 까치가 소나무 가지에 앉아 호랑이에게 무언가 지저귀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보통의 까치호랑이그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소나무 가지에 앉은 까치가 호랑이 얼굴보다 낮은 위치에 그려져 있다는 것과 까치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 있지 않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가로로 길게 생긴 공포(包) 벽에 그려야 했기 때문에 생겨난 불가피한 현상으로 보인다.
한문으로 호작도(虎鵲圖)라 불리는 까치호랑이그림은 민간에서 세화(歲畵, 새해맞이 그림)로 인기가 높았던 그림의 하나로 까치, 호랑이, 그리고 소나무를 기본 요소로 하고 있다. 때로 바위, 불로초, 난초 등이 곁들여 그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그림의 상징적 의미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까치가 한 마리일 경우도 있고 두 마리일 때도 있는데, 이것은 한쌍주의를 고집하고 있는 화조화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 민화 화조화에서 볼 수 있는 한 쌍의 새는 음양의 조화나 남녀 화합을 상징한다. 그러나 호작도의 까치는 그런 것과 상관이 없이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하는 전통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기쁨의 상징형으로 존재한다.
호작도의 화의(畵意)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몇 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서낭신의 사자(使者)인 까치가 호랑이에게 신탁(神託)을 전하는 내용이라는 주장도 있고, 약자의 상징인 까치가 강자의 상징인 호랑이를 조롱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런데 민화 소재의 경우, 발음의 유사성과 관련하여 특정한 의미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예컨대 징그러운 박쥐가 행복의 상징이 된 것은 편복(, 박쥐의 한자 말)의 ‘복()’이 ‘복(福)’과 발음이 같기 때문이고, 원숭이가 관계(官界) 등용을 상징하게 된 것은 ‘후()’가 제후(諸侯)의 ‘후(侯)’의 발음과 같기 때문이다.
호작도의 호랑이는 ‘보(報)’를 의미한다. 호작도의 전신(前身)이 까치표범그림인데, 표범은 ‘표(豹)’와 ‘보(報)’의 중국식 발음이 서로 같다는 이유로 ‘보답한다’는 의미를 얻은 것이다. 결국 까치호랑이그림은 세시를 맞이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을 호랑이와 까치를 매개체로 표현한 그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만면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호랑이 그림이 수원 팔달사 용화전 외벽에 있다. 이 벽화를 보는 사람은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과 ‘까마득해 종잡을 수 없는 옛날’을 생각해 낼 것이다. 팔달사 스님 말로는 약 100여년 전에 그려졌다고 하는데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은 편이다. ‘호랑이 담배피우는 그림’이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토끼가 호랑이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호랑이는 나름대로 위엄을 갖춘 자세를 취한 듯하나 얼굴 표정에 배어나는 어수룩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고, 담뱃불을 붙여주는 토끼는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밝고 요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혹자는 이 그림을 힘 있는 지배계급과 힘없는 피지배계급사이에 일어나는 갈등관계를 풍자한 그림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옛날 민화 화가들과 일반 서민들의 정서를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단결일 뿐이다.
정통회화이거나 민화이거나 간에 한국 전통회화사에서 그림을 사회 풍자의 도구로 활용한 예는 없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풍속화조차도 강자와 약자 간의 갈등이나 투쟁 같은 것을 풍자해서 그린 경우가 없었다. 우리의 옛 서민들은 서구의 사실주의 회화처럼 그림을 사회개혁이나 계몽 수단으로 활용할 줄도 몰랐고, 그런 일을 해낼 만큼 영악하거나 투쟁적이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던 아름다운 옛 이야기의 한 장면을 그려 집 안팎을 장식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절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그림을 말할 때 산신도를 빼놓을 수 없다. 산신도는 산신각에 단독으로 봉안되거나 칠성도, 독성도와 함께 삼성각(三聖閣)에 모셔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산신도는 선풍도골(仙風道骨) 풍의 노인이 호랑이를 옆에 거느리고 소나무 아래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호랑이의 표정에서 동물 왕으로서의 권위나 용맹성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산신은 원래 불교의 신중이 아닌 우리나라 고유의 토착신이며, 당초의 산신 신앙은 호랑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예(濊)조에 우리나라 풍습에 관해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한다. 산천에는 각기 부계(部界)가 있어서 함부로 서로 간섭할 수 없었다”는 내용과 함께 “호랑이에게 제사 드려서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고 적혀있다.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원래 우리나라 산신신앙의 대상이 신격(神格)을 가진 호랑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산신도를 보면 호랑이가 ‘산신님’의 시종(侍從)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이런 현상은 자연신인 호랑이의 신격(神格)을 ‘산신님’으로 인격화하고, 주된 신앙의 대상을 ‘산신님’으로 삼게 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자연신인 호랑이, 호랑이의 신격이 의인화 된 산신, 그리고 우주목으로서의 소나무, 이 세 가지 기본 요소들로 구성된 산신도는 한국 전래의 산신신앙 체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호랑이를 단독으로 그린 그림은 까치호랑이그림이나 설화도에 비해 흔한 편이다. 양산 통도사 응진전.명부전, 부산 범어사 대웅전, 파주 보광사 대웅전, 울진 불영사 대웅보전의 호랑이그림을 비롯해서 많은 사찰 전각의 벽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배경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으나 까치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호작도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호랑이가 정면을 응시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은 벽사(邪)와 수호(守護)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최근에 새로 지은 절에서 대나무를 배경으로 한 호랑이 그림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벽사 기능을 가진 그림에 속한다.
파주 보광사 대웅전 후면 외벽의 호랑이 그림은 판벽에 그려져 있는데, 배경은 완전히 사라져버렸으나 흰 바탕에 검은 얼룩무늬 호랑이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다. 소나무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서있는 자세는 범어사의 것과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보광사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영조 임금이 그의 모후인 숙빈 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건한 것으로, 대응보전은 만세루, 관음전과 함께 그 시기에 지어졌다. 왕실의 원찰답게 건물 장식에 길상문양과 민화적인 요소가 풍부한데, 이 호랑이그림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이다. 건물 뒤편 벽에 그려져 있어서 일부러 찾아가 보지 않으면 그림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이런 후미진 곳에 호랑이그림을 그려 놓은 것은 당초의 목적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벽사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불전 장식 호랑이그림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세화(歲畵)의 성격을 가진 것이 있고, 민담이나 전설 속의 환상을 표현한 것이 있다. 또한 호랑이의 용맹성을 빌리는 벽사용 그림이 있고, 신앙의 대상이 된 호랑이그림이 있다. 이들 호랑이그림들은 불교적이라기보다는 서민적인 욕망과 정서를 담고 있으며, 표현 형식 또한 민화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주로 민간인들에 의해 요구되고 향유되던 호랑이그림이 이처럼 불전 장식용 그림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불교의 너그러운 포용력과 자신감 덕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道窓스님***合掌 道窓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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