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불국사 창건 당시의 이름이 ‘화엄불국사’ 또는 ‘화엄법류사(華嚴法流寺)’였다. 이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불국사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 제불이 상주하는 불국정토를 이 땅에 구현하려 했던 신라인의 정신세계가 이룩한 절이다. 불국정토의 한 영역인 대웅전 앞마당에 동서로 다보탑과 석가탑이 단아하면서도 근엄한 모습으로 우뚝 서있는데, 석가탑은 흔히 보는 석탑처럼 생겼으나 단순한 사리 봉안처가 아니며, 다보탑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추었으나 석조 공예미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탑이 아니다. 이 두 탑은 영산회상에서의 “석가여래 상주설법(釋迦如來常住說法)”과 “다보여래 상주증명(多寶如來常住證明)”의 장면을 환상적 수법으로 상징화 한 탑인 것이다.
일연스님이 저술한 〈신라국동토함산화엄종불국사사적(新羅國東吐含山華嚴宗佛國寺事蹟)〉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경덕왕 즉위 10년 신묘, 현지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했다. 차례로 다보와 무영의 두 탑을 만들었으니, 무영탑은 석가여래께서 상주설법하시는 보배로운 장소임을 보이기 위함이며, 다보탑은 다보여래께서 상주 증명하시는 찰당(刹幢)임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중략) 이것은 완연히 옛적 말회(末會)시 영산(靈山) 종담(終談)의 묘법의궤와 같으며, 또한 서방 무량수국(無量壽國)의 분서(分序)인 구품도량과 유사하다.”
이로써 불국사 무영탑과 다보탑이 석가여래와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탑이라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무영탑, 즉 석가탑은 놀랍게도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대웅전 앞마당은 축대를 높이 쌓아 올려 평탄하게 만든 곳이므로 원래부터 그 자리에 바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기 어렵다. 어디에서부턴가 옮겨왔을 것으로 생각되는 바위의 표면을 ‘그랭이질(바위의 표면 형태에 따라 다듬어 접합 부위를 빈틈없이 맞춤)’하여 평면으로 지대석을 앉힌 위에 기단부와 탑신을 세웠다. 이런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것은 석가여래가 영산에서 설법할 때 주로 바위 위에 앉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 석가탑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정사각형의 탑 둘레에 여덟 개의 연꽃문양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연화좌는 석가여래가 영축산에서 설법할 때 한량없는 부처들이 8방에서 찾아와 석존 주위에 둘러앉았다는 법화경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의 앙화 네 모서리에 있는 주악비천상과 네 변의 공양비천상도 석가탑의 상징성과 관련해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다보탑은 계단 아래쪽에 현재 돌기둥만 남아 있지만 원래 난간이 있었다. 계단 위쪽 상대(上臺) 갑석(甲石) 위의 네 귀와 중앙에 각각 하나씩, 다섯 개의 기둥 사이에 얼마간의 공간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바깥쪽에 돌사자가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일층 옥개석에 해당하는 얇은 석판 위에 두 줄로 된 난간이 설치되어 있고, 또 그 위에도 8각형의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그리고 버선 모양을 한 여덟 개의 기둥 위에 8각의 석판이 올려져 있다.
지금부터 두 탑과 관련된 경전 내용을 살펴보자. 〈묘법연화경〉 견보탑품(見寶塔品)에,
“착하고 착하시도다 석가모니 세존이시여. 평등한 큰 지혜로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를 옹호하시는 묘법연화경을 많은 중생들을 위해 설하심이 이러하시도다. 석가세존께서 하시는 말씀은 다 진실이로다.”
그 때 사부의 대중은 큰 보배 탑이 머물러 있는 곳을 보았고, 탑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듣고 모두 법의 기쁨을 얻었다. 청중들은 일찍이 없었던 터라 이상하게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공경하며 합장하고 한쪽에 물러나 머물렀다. 그 때 보살마하살이 있었으니 이름은 대요설이었다. 일체 세간의 하늘 인간 아수라들이 마음에 의심하는 것을 알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이 보탑(寶塔)이 땅에서 솟아 나와 있으며, 또 그 가운데서 이런 음성이 나오나이까?”
이 때 석가여래는 대요설보살에게 말했다.
“이 보탑 가운데는 여래의 전신이 계시니 저 먼 과거 동방으로 한량없는 천만 억의 아승지 세계를 지나서 나라가 있었느니라. 나라 이름은 보정(寶淨)이요, 그 곳에 부처님이 계시었으니 이름이 다보이니라. 그 부처님께서 보살도를 행할 때 큰 서원을 세우기를 ‘만일 내가 부처를 이루어 멸도한 후에 시방 국토에서 법화경을 말하는 곳이 있으면 이 경을 듣기 위하여 나의 탑묘가 그 앞에 솟아나서 그것을 증명하고 거룩하다고 찬탄하리라’고 하였느니라.”
다보여래는 동방보정세계(東方寶淨世界)의 교주이다. 다보여래는 석가모니 이전의 과거불로서, 영원히 살아 있는 본체로서의 부처인 법신불이다. 보살로 있을 때에 내가 성불하여 멸도한 뒤에 시방 세계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는 나의 보탑이 솟아 나와 그 설법을 증명하리라 하고 서원 했던 것이다. 과연 석가여래가 영산(靈山)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 땅속에서 다보여래의 탑이 솟아났고, 그 탑 가운데서 소리가 나와 석가여래의 설법이 참이라고 증명하였던 것이다.
다보탑의 모양에 대해서 〈묘법연화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때 부처님 앞에는 칠보의 탑이 있었는데, 그 높이가 5백유순이며 사방 길이가 2백5십유순이었다. 땅에서 솟아나서 공중에 머물고 있으며 가지가지의 보물로 장엄하였으니 5천의 난간과 천만이나 되는 방과 수없는 당번(幢幡)으로 장하게 꾸미었으며, 보배 영락을 드리우고 탑 위에는 만억의 보배 방울을 달았으며, 사면에서는 다마라발전단의 향기가 세계에 두루 차고 그 여러 번개(幡蓋)는 금.은.유리.자거.마뇌.진주.매괴 등의 일곱 가지 보배로 이루어져 그 높이는 사천왕의 궁궐까지 이르렀다.”
경에서 다보탑은 “5천의 난간과 천만이나 되는 방과 수없는 당번(幢幡)으로 장엄하게 꾸몄으며…”라고 하였는데, 이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다보탑의 구조를 살펴보자. 현재 계단의 아래쪽에는 유구(遺構)로 보이는 돌기둥만 남아 있지만 네 방향에 조성되어 있는 계단에는 원래 난간이 있었다. 그리고 일층 옥개석에 해당하는 얇은 석판 위에 두 줄로 된 난간이 있고, 또 그 위에도 8각형의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현재 남아있는 난간은 세 군데에 불과하지만 이것은 경전에서 말한 5천의 난간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석가탑 주위에는 여덟 송이의 연꽃을 조각한 탑구(塔區)가 있다. 학자에 따라서 이것을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 또는 8보살의 정좌라고도 하고, 또는 석탑에 직접 조각하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지면에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묘법연화경〉의 견보탑품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상기해 볼 때 다른 해석도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석가여래가 불법을 설할 때 시방의 모든 부처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때의 상황을 경은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 때 동방의 석가모니불의 분신인 백 천 만억 나유타의 항하 모래 수 같은 국토에 있던 여러 부처님들이 각각 설법을 들으려고 모였는데, 이와 같이 차례차례로 8방에 앉으시니, 그 때 모든 방위의 4백 만억 나유타 국토는 여러 부처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생각해보면 석가탑 주변 8방에 장식된 여덟 개 연꽃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하여 8방에 앉은 여러 부처님의 연화좌(蓮華座)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동서에서 마주 대하고 있는 불국사 대웅전 앞뜰은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상주하고 있는 영산도량(靈山道場)이 된다. 영산정토에서의 법회는 엄숙하여 그 모임이 아직까지도 흩어지지 않고 석가여래의 설법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국사 대웅전 앞뜰은 지금도 석가여래의 설법과 다보여래의 증명이 계속되고 있는 영산법회의 장소가 되어 있는 셈이다. 실로 이 두 탑은 〈묘법연화경〉의 내용과 결합됨으로써, 말하자면 그 자체가 가진 상징성을 드러냄으로써 종교적 의미가 현실로 연장될 수 있는 탑인 것이다.
문화재보호법상의 석가탑의 공식 명칭은 ‘불국사삼층석탑’이다. 이 명칭은 단순히 소재지와 탑의 외형 구조를 기준으로 해서 지어진 이름일 따름이다. 이 이름에서 우리는 신화는 잃어버리고 현실의 모든 것을 표면적으로만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속성을 엿볼 수 있다.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있는 이 삼층석탑의 종교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불국사삼층석탑’이 아니라 ‘불국사석가탑’으로 이름 짓고 또한 그렇게 불러야 옳을 것이다. 출처;불교신문
*道窓스님***合掌 道窓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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