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감상방☆/♡국내음악방♡

[산이 더 좋아 外 - 서수남 하청일]

문수봉(李楨汕) 2009. 2. 16. 17:28
산이 더 좋아 外 - 서수남 하청일
하청일/서수남 걸작집 (유니버샬 레코드 1971)
서수남 하청일
Track B No.1 - 산이 더 좋아 外
 
하청일/서수남 걸작집
똘또리와 장다리의 대화
SIDE1
1.인생은 칠면조 서수남 작사/작곡
2.그러시면 안돼요 서수남 작사/외국곡
3.구두쇠 인생  서수남 작사/외국곡
4.샐러리맨 푸념 서수남 작사/외국곡
(비틀즈의 노래 "오브라디 오브라다"번안곡)
5.뚝쇠의 사랑 서수남 작사/외국곡
6.레몬트리 서수남 작사/외국곡
SIDE2
1.팔도유람  서수남 작사/외국곡
2.산이 더 좋아 서수남 작사/외국곡
(Trizm Yodel - GrandPa Johns 의 원곡)
3.둥글둥글 서수남 작사/외국곡
Johnny Preston의 " Running Bear"(60년도 1월 no1히트곡)의 번안곡
4.벙글벙글 웃어주세요 서수남 작사/외국곡
(The Singing Nun의 "Dominique"의 번안곡
5. 키타와 하모니카 서수남 작사/외국곡
6.술친구(꼬로록 꼬로록) 서수남 작사/외국곡
이 앨범은 명곡 요들인 '산이 더 좋아'가 수록된 첫 앨범입니다. 김홍철님이 취입한 해방 이후 최초의 한국요들인 '아름다운 베르네산골'과 비교하면 1년이 늦습니다. 레코딩은 늦었지만 연혁을 보면 이미 62년 하청일 등과 함께 결성한 한국 최초의 컨트리팀인 아리랑 브라더스 시절부터 '산이 더 좋아'가 불리워졌던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베르네산골(70년/동아방송) 및 아름다운 스위스 아가씨(72년/그랜드레코드), 목동의노래(72년/그랜드레코드) 등도  60년대 중후반부터 방송을 통해서 불리워졌기 때문에 그렇다면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요들곡은 '산이 더 좋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레코딩 된 것으로 따지면 '아름다운 베르네 산골'에 이어서 두번째 요들곡이라는 타이틀이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물론 웨스턴 스타일로만 따지자면 해방 후 첫 웨스턴 스타일 한국요들곡이 되겠습니다. 예전에는 레코딩 이전에 미리 방송을 통해서 불리워지는 경우가 무척 많았다고 합니다.
서수남(徐守男) 직업 : 현 가수, 현 개그작가
1943년 2월 25일 서울 출생
1955 - 발산국민학교 졸업
1958 - 이리동중학교 졸업
1961 - 서울공업고등학교졸업(화공과)
1961 - 한양대학교(자연대 화학과)입학
1968 - 한양대학교(자연대 화학과)졸업
 
음악경력 
1962 - MBC 문화방송주최 서울시 콩쿨대회 금상입상
1962 - (노래 : Oh lonesome me)
1962 - 동아방송주최 대학생 중창대회
1963 - 아리랑 부러더스(남성4중창)결성
1962 - 데뷔앨범 "우리애인미스얌체, 동물농장" 등 발표
1964 - 미8군쑈 웨스턴쥬빌리쑈 입단(가수)
1968 - 미8군쑈 그랜드올오프리쑈(조영길, 장미리 등)
1968 - 혼성듀엣 서수남+현혜정 결성
1962 - "정말로 너무해"등 발표
1969 - MBC TV "웃으면 복이 와요" 서수남+하청일 데뷔
1962 - "동물농장, 팔도유람, 산이 더 좋아, 과수원길, 즐거운 여름,
1962 - 한 번만 만나줘요, 흰 눈이 오네, 친구가 그립구나" 등 발표
1988 - 서수남 음악원 설립(강남구 청담동)
1990 - 솔로앨범 "세상 사는 이야기, 인생길"등 발표
1995 - 솔로앨범 "돌고 도는 세상, 노래자랑" 등 발표
2000 - 서수남 노래 35주년 기념앨범 발표
1962 - "내 사랑 당신께, 아내에게" 등 발표
2002 - 서수남 노래 베스트 앨범, 신곡 "신명가"등 발표
2006-  서수남, 오! 멋진세상등 신곡 12곡 발표
서수남님의 메일...
서수남님은 한국대중가요의 거장으로 컨트리 음악을 바탕으로 하여 많은 포크송 동요 명곡을 낸 분입니다. 이 분과의 인터뷰는 2004년 9월경 여의도 KBS방송국앞에서 처음 이루어졌고 그 후 이런저런 사정으로 계속 미뤄지다가 이메일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서수남님의 이메일 답변입니다.
안녕하세요 서수남입니다. 많은 자료를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은것 같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음악을 해오면서 한번도 자료정리를 해온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더듬으며 많은 질문에 도움이 되려합니다.
나는 고2때 키타를 처음 손에 대면서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갈때에는 이미 미국팝음악과 컨트리음악에 매료되어 공부는 뒷전이었죠. 저의 음악의시작은 거의 독학으로 가르처주는 사람없이 황무지를 혼자 헤처갔습니다. 미8군에 들어가 본격적인 컨트리음악밴드를 결성했습니다. 미8군이라 함은  주한미군부대내에 있는 클럽에서 우리나라에 주둔해있는 미군 병사들을위해 마련된 무대입니다.  거의 미국의 시골과 똑같다고 보면됩니다. 쇼는 MC도원어로 노래도 모두 원어로 불렀습니다.
저는 미국의 인기곡들은 거의 다 불렀었지만 그중 가장 인기있었던 곡은 "Mule skinner blues"   Hank williams 의 long gone lonesome blues였습니다. 그런데  long gone lonesome blues 곡이 요들이 들어가는 노래였습니다. 그곡을 본따서 만든곡이 " 사나이"라는 곡이었습니다, 아주흡사하게 제가 만든곡입니다, 모방이라고 볼수도있죠. 그러나 레코딩은 안했죠.
60년대 후반까지 미8군무대에서 활동하다가 70년도부터 일반무대와 방송활동을 서수남.하청일 콤비로 시작한것입니다. 그때 첫 첫앨범으로 발표된곡중에  "산이더좋아" 가 들어있습니다. 가사는 제가 썼구요... 원곡은  컨트리송 싱어인 Grandpa Johnes가 부른 ",Trizem Yodel" 이란곡입니다.
70년대 당시 통키타 붐이 일어났던 시절이라  싱얼롱이 대단히 유행했던 때입니다. 키타들고 합창하고 손뼉치고  그때 많이 애창했던 유행곡중에 하나입니다. 
그 시절에 본격적인 요들을 들고나온 가수가 바로 김홍철입니다. 김홍철은 스위스 정통 요들러로서 실력있는 가수였습니다. 김홍철씨는 나중에 컨트리음악도 일부 했습니다. 밴조도 연주했구요. 제가 김홍철씨로 부터 배운곡이 "스위스아가씨" 베르네산골" 같은곡이었습니다. 저는 요들을 정식으로 배운적은없구요  가성을 쓰다보니 요들이 되었습니다.
그 후 김홍철씨와 같이 KBS 열린음악회에 여러차레 같이 출연하여 컨트리음악 또는 요들송 등을 불렀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후배입니다. 저는 지금도 컨트리음악 매니아 입니다. 저의 음악은 모두가 컨트리음악이 바닥에 깔려있습니다. 서수남/하청일이 부른곡들은 거의 대부분 미국컨트리 음악 곡에 제가 가사를 붙여서 만든 곡들 입니다. 서수남하청일콤비는 20년 동안 활동하다가  1988년 서수남음악원을 설립하면서 "서수남주부노래교실"을 개설하며  solo 활동을 하게되었습니다.
그 때 발표된곡중에 "세상사는이야기" 자작곡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입니다. 그 때 녹음을 할때 옛날에 작곡했던 "사나이"를 다시부른 것 입니다. "사나이' 는 92년도에 나온곡이 된셈이죠. 이렇게 요들과의 인연을  몇자적었습니다. 아무쪼록 좋은 활동 기대합니다.
..............................
과거 너무나 많은 활동을 하셨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앨범을 내고 있는 서수남님의 음악세계를 이래저래 평가하기에는 저의 경력과 능력이 너무 부족하여 여기에서 마치고저 합니다. 좀 더 자세히 연구해 보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새로운 과제가 생기게 되어서 너무 많은 공부가 필요할 것 같네요. 서수남님은 앞으로 사업준비 때문에 TV에서 보기는 좀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아쉬운 분들은 서수남님의 싸이월드를 통해서 만나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추억의 LP여행] 아리랑 브라더스(上)
최초의 컨츄리 포크그룹 우디 거슬리, 피트 시거 등으로 비롯된 미국의 모던 포크는 두 갈래로 나눠진다. 레너드 코헨, 밥 딜런 같은 저항적인 프로테스트 포크와 킹스턴 트리오, 브라더스 포, 피터 폴&메리 같은 달콤한 상업 포크가 그것이다.
그들의 주옥 같은 레퍼토리는 1960년대 초 주한 미군들을 통해 이 땅에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대중들은 1961년 미8군 가수 한명숙이 소개한 웨스턴 스타일의 노래를 접하기는 했지만 당시의 주류는 여전히 트로트 음악이었다.
1964년 최초의 록 그룹 <에드훠>의 등장에 이어 한국의 <브라더스 포>를 꿈꾸며 또 다른 뉴웨이브 음악을 시도했던 컨츄리 포크 그룹 <아리랑 브라더스>가 탄생했다. 최초로 한국어 포크송을 발표했던 이 그룹은 랩의 초기 형태인 만요식의 재밌고 경쾌한 리듬을 이 땅에 들여온 숨겨진 선구자들이다.
견고했던 트로트 아성은 록과 포크 가락의 협공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새로운 음악으로 세상을 뒤집고 싶었다. 그러나 외국 음악을 접해본 일부 학생들과 지식층을 제외한 일반 대중은 낯설었다. 이들이 뿌린 씨앗은 4년이 지나서야 만개했다.
대학가에는 포크그룹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최초의 남성 포크 듀오 트윈 폴리오의 등장은 포크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방에서 통기타 소리가 진동했다. 그러나 모든 포크곡들은 번안곡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진정한 한국 모던 포크는 1968년 말 한대수의 창작곡이 발표되면서 비로서 뿌리를 내렸다.
<아리랑 브라더스>의 음악리더 서수남은 1943년 서울 동대문에서 부친 서사문과 모친 박순금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때부터 충남 서천, 군산 등에서 훈장을 했던 한학자 집안이었다.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어렵게 자식들을 키운 어머니와 함께 6ㆍ25 전쟁 때 전북 익산으로 피난을 갔다.
군산 발산초등학교와 이리동중학교 때는 동요를 잘 불렀던 우등생이었다. 서울 종로 6가로 이사를 오며 공학박사 아들을 갈망하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서울공고로 진학했다. 집 근처 종로2가 세기음악학원에 호기심으로 들어가 3개월간 기타 교습을 받으면서 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기타 줄을 튕기자 노래하는 재미가 솔솔했다. 이때부터 날마다 AFKN에서 흘러나오는 엘비스 프레슬리, 닐 세다카, 폴 앵카 브라더스 포의 노래에 중독되며 기타를 끼고 살았다. 곧 100여 곡의 팝송을 줄줄 외웠다.
고 3이 되자 수험 준비는 뒷전이고 아예 응원단장으로 나섰다. 1961년 한양대 화학과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음악생활이 시작되었다. 데뷔무대는 <국풍81>의 원조격인 1962년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된 MBC주최 <5ㆍ16 군사혁명 1주년기념 콩쿨대회>. 스탠드를 가득 메운 수 만명의 관중들 앞에서 떨리는 가슴으로 ‘Oh Lonesome Me’등 외국 팝송을 불렀다. 대상은 쟈니 브라더스에 돌아가고 차석인 1등상을 수상했다.
이때 중앙대생 하청일은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서수남을 눈여겨보았다. 자신이 소속된 대한합창단원인 박창학, 서울음대생 최용삼과 함께 4인조 남성보컬그룹 결성을 제의했다. 이들은 워커힐쇼단의 멜로톤 쿼텟을 꿈꾸며 팀을 결성, 피나는 노래연습을 했다. 칠성사이다 사장 아들이었던 최용삼의 집은 아지트였다. 그러나 최용삼과 박창학은 이내 팀을 탈퇴, 성악을 전공하던 석우장과 천정팔로 교체가 되었다.
하청일의 음악 친구였던 녹음보조기사 이강은 절묘한 화음을 구사하는 친구들을 대도레코드 녹음기사인 친형 이청에게 소개했다. 아카펠라 뿐만 아니라 통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멋들어진 화음을 구사하는 새로운 음악에 이청은 정신이 혼미했다. 음반사를 창립하려는 꿈을 키우고 있던 그는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뉴웨이브 음반을 만들 결심을 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포크음반탄생에 실질적 주역이었다. 낮에는 녹음기사로 일하고 밤에는 멤버들을 마장동 스튜디오로 불러 도둑질 하듯 한 달간 녹음작업을 강행했다. 서수남은 인기 절정의 외국팝송들을 번안, 편곡, 통기타 연주를 도맡으며 멜로디 작업에 혼신의 힘을 들였다. 하청일은 바리톤, 천장팔은 베이스와 스니어 드럼, 석우장은 콘트라베이스와 테너 파트를 맡았다. 팀명은 이청의 제안에 따라 한국정서를 담은 <아리랑 브라더스>로 정했다.
지금도 LP음반을 제작하는 유니버셜 레코드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원로 녹음기사 이청. 그는 1964년 LA SCALA 레코드사를 창립하며 역사적인 <아리랑 부라더즈-라스카라.LSL001,64년> 음반 500장을 세상속으로 밀어 넣었다. 가요사에 영원히 기록될 한국 최초의 컨츄리 포크앨범의 탄생이었다.
[추억의 LP여행] 아리랑 브라더스(下)
척박한 가요계 풍토에 뿌린 포크씨앗
아리랑 브라더스의 독집 앨범은 홍보용으로 200장이 제작되어 1964년 4월 언론과 가요 관계자들에게 배포되었다. 타이틀곡 <우리 애인 미스 얌체>등 총 14곡의 번안곡은 라디오 전파를 타고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AFKN을 즐겨 듣던 학생층은 귀에 익은 외국 포크리듬이 우리말로 흘러나오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타이틀곡 보다 재밌고 경쾌한 <동물농장><웃어주세요(도미니크)>는 단숨에 인기를 모았다.
‘묘한 노래가 나왔다’는 입 소문이 퍼져 나가자 최대도매상인 청계천4가의 흥음사, 서울소리사, 낙원동의 영락레코드등에서 음반을 요청했다.
‘대박이 터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대를 너무 앞서간 음악이라 준히트급에 머물러 제작비만 건졌다’고 당시를 기억하는 제작자 이청. 3개월 만에 타이틀곡을 <동물농장>으로 변경해 재킷을 수정, 부랴부랴 300여장의 재판을 추가로 발매했다.
KBS 라디오가 단독 프로그램으로 소개를 하고 MBC 라디오에서도 이들의 곡은 하루에 수 차례 흘러 나왔다. 제법 이름이 알려지자 1964년 9월, 뮤지컬 형식으로 인기 높았던 시민회관의 16회 <프린스 쇼>에 등장, ‘스피디한 진행과 흥겨운 무대매너는 쇼의 유일한 볼거리였다’는 언론의 호평을 이끌어 냈다.
1년 정도 활동을 했던 아리랑 브라더스 멤버들은 인기그룹을 꿈꾸며 워커힐 쇼 오디션을 받았다. 쇼 매니저는 통기타를 치며 맛깔 난 화음을 구사하는 이들의 노래에 반했지만 기형적으로 키가 큰 서수남이 영 못마땅했다.
음악리더 서수남을 제외한 3명에게 ‘키 큰 친구만 뺀다면 출연시키겠다’는 비밀제의를 했다. 화려한 워키힐 쇼무대 진출이라는 달콤한 꿈속에 빠져있던 서수남은 자신 몰래 노래연습을 하고 있는 멤버들을 보고 절망했다.
어린시절부터 외모 컴플렉스를 지니고 있던 서수남의 첫 음악적 시련이었다. 배신감에 팀을 탈퇴하고 미8군 쇼 <웨스턴 쥬빌리>를 담당했던 공영 엔터프라이즈를 찾아갔다. 3달 동안 미8군무대 진출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잔 심부름 등 온갖 허드렛일을 자청했다.
바이올리스트 김동석은 무대 뒷켠에서 열심히 노래연습을 하는 서수남의 음악성을 인정하며 오디션을 주선해준 은인이었다.
<사랑하는 마음(Before this day end)>으로 참가한 오디션 결과는 A등급 합격이었다.
1965년 미8군 무대에 진출한 서수남은 코미디를 곁들인 재미난 공연으로 미군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월 100만원이 넘는 엄청난 수입은 2년간 안정된 생활을 보장했고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생활이 안정되자 스케일 큰 음악을 하고픈 갈증이 타올랐다.
마침내 1967년 미국 내쉬빌 음악을 표방한 5인조 <그랜드 올 오프리>쇼 컨트리 밴드를 결성하며 컨트리 음악세상을 꿈꿨다. 그러나 또 하나의 거대한 시련이 다가왔다.
방송국 출연 때 ‘가수가 되고 싶으니 노래를 가르쳐달라’며 최근 작고한 원로가수 현인의 딸이자 KBS성우 현혜정이 접근했다. 예쁜 목소리에 반해 정성을 다해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그룹의 솔로 보컬로는 실력이 모자라자 별도로 <서수남과 현혜정>이란 혼성듀엣을 결성하며 음악적 줄타기를 했다.
멤버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미안함을 느낀 서수남은 그룹을 스스로 탈퇴하며 그룹 <샤우터스>에서 활동하던 하청일을 대신 가담시켰다. 서수남 현혜정은 음반을 발표하며 미8군 무대와 오비스 캐빈을 주무대로 활동했다.
하지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한 이들의 결혼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서수남은 ‘현혜정은 일본에 가기 위해 나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홧김에 목숨같은 포크, 컨트리 음반과 자료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을 만큼 악몽 같은 세월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죽고 싶은 고통은 음악만이 구세주였다. 1969년 MBC TV <웃으면 복이와요>에 음악배필 하청일과 재결합하며 남성듀엣으로 재기, <팔도유람>등 코믹송과 동요 등으로 폭넓은 계층의 사랑을 받았다.
서수남은 방송 MC 등을 거쳐 현재 대학강의와 <주부가요교실>을 병행하며 바쁘게 살고 있다. ‘희극적인 노래들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스트레스 해소였다. 컨트리 포크를 최초로 시도했지만 역량이 부족해 만개 시키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숨기지 않는다.
하청일은 운영하던 야구용품 제조업체가 부도난 후 미국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석우장은 미국 LA에서 성악가로 활약하고 있다. 천장팔은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이 땅에 처음으로 포크와 컨트리 가락을 도입한 음악적 실험으로 대중가요를 한단계 발전시킨 <아리랑 브라더스>. 웬만한 가요 전문가들 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의 값진 음악실험은 뒤늦게 나마 포크의 선구자라는 정당한 평가가 내려져야 할 것이다. 

'☆음악감상방☆ > ♡국내음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SG워너비/ 내사랑*]  (0) 2009.03.01
[2월 최신가요 연속듣기]  (0) 2009.02.16
[소리새 노래모음]  (0) 2009.02.15
[웃자웃자 / 이광기]  (0) 2009.02.13
[꽃길 따라 부르는 봄노래 모음]  (0) 2009.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