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대한제국♡

역대 대통령 일대기-이승만대통령의 생애(생애초기와 교육활동)

문수봉(李楨汕) 2017. 12. 4. 14:42

이승만(李承晩 Syng-man Rhee) 

 
대한민국 제 1, 2, 3 대 대통령 이승만
대한민국 제 1, 2, 3 대 대통령 이승만
대한민국 대한민국제1·2·3대 대통령
임기1948년 7월 24일 ~ 1960년 4월 26일
부통령이시영 (1948 ~ 1951)
김성수 (1951 ~ 1952)
함태영 (1952 ~ 1956)
장면 (1956 ~ 1960)
이기붕 (1960)
총리이범석 (1948 ~ 1950)
장면 (1950 ~ 1952)
장택상 (1952)
백두진 (1952 ~ 1954)
변영태 (1954)
전임: -
후임: 윤보선(제4대)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1대 대통령
임기1919년 9월 11일 ~ 1925년 3월 21일(탄핵 후 면직)
국무총리이승만
이동녕
이동휘
이동녕(대리)
신규식
노백린
김구(대리)
이동녕
박은식
전임: -
후임: 박은식(제2대)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19,20대 주석
임기1947년 3월 3일 ~ 1948년 7월 22일
전임: 김구(제18대)

국적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출생일1875년 3월 26일(1875-03-26)
출생지대한제국 조선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
사망일1965년 7월 19일 (90세) 한국 시간 19시 35분
사망지미국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
거주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거주하였음
정당대한독립촉성국민회, 자유당
학력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별명호 우남, 다른 이름 승룡, 일수(一秀), 혹 이박사(별칭)
종교개신교(감리교)
배우자박씨(이혼), 프란체스카 도너
자녀아들 이봉수, 양자 이강석, 이인수
부모이경선, 김해김씨
서명Syngman Rhee Signature.svg

이승만(李承晩, 리승만, 영어: Syng-man Rhee 승만 리[*], 1875년 4월 18일 (음력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황해도 평산 출생)은 조선·대한제국의 근대화 운동가이자, 대한민국독립운동가·교육가·언론인·종교인·정치인이며 대한민국제1·2·3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의 국회의장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무총리, 대통령, 주석이었다. 처음 이름은 승룡(承龍), 다른 이름은 일수(一秀), 우남(雩南), 본관은 전주이다. 황해남도 평산군 출신이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협성회 회보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고 대한제국 말기 밀사로 도미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파면되었다.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등 활동했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1945년 12월부터는 김구·조소앙·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정부수립 방법으로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장, 대한민국초대·2·3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사사오입 개헌 이후 1960년 4대 정·부통령 선거에 연임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 원조의 유상 원조로의 전환과 액수 감소의 영향으로 경기 침체와 실업자 증가에 따라 사회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임기 중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일어난 4·19 혁명 직후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 하야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생애

초기 생애와 교육활동

 

출생과 가계 (1875 ~ 1877)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조선의 왕족이며 몰락한 양반 가문인 이경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초명은 승룡(承龍), 는 우남(雩南)이다.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2년),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년 ~ 1896년)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둘째 아들이 죽자 아버지 경선(敬善)은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대감 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역귀가 머문다는 사당 앞에서 큰 칼을 휘둘렀다 한다. 그가 석달 동안 몸져 눕자 사람들은 그것이 그런 지각 없는 행동 때문이라 했다.

그는 양녕대군(조선 태종의 장남)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 이흔(李訢)의 15대손으로, 왕족이었지만 계승권에서 밀려나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이승만은 조선왕조 자체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한다. 그는 장평도정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후손이었다.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장평도정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3대조인 수주정(樹州正) 이윤인(李允仁)에서 끝이 났고, 이윤인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1대조 이원약(李元約)이 병자호란 때에 무공을 세워 전풍군(全豊君)에 추증되었고, 그 후광을 입은 몇몇 자손들이 무관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이승만의 6대조 할아버지 이징하(李徵夏)가 음직(陰職)으로 현령(縣令)을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길이 끊기고 어렵게 살아갔다. 그럼에도 그가 조선의 왕실과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그가 왕정복고를 꿈꿨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유·소년기 (1877 ~ 1894)

이승만의 증조부 이황(李璜)의 대에 한성부에서 황해도로 이주했다가 다시 아버지 이경선의 대에 다시 한성으로 이주하여 그 역시 부모를 따라 이동했다. 1877년 그의 가족은 황해도에서 한성으로 이사하여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 다녔고,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그의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는 한때 부자였지만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모는 어렵게 얻은 아들에 대한 공부열이 대단하였다. 1879년 퇴직 대신(大臣)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 이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으며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 도동서당은 한성부 용산에 있었다. 1887년 13세 때에 아명인 승룡에서 승만(承晩)으로 이름을 고쳤다.

유년시절의 이승만은 집중력이 뛰어났다. 그는 혼자서 몇 시간이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나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이나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며 서당 정원에 꽃 심기에 몰두하여 '꽃귀신이 씌였다'는 반갑지 않은 말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

청년기

배재학당 재학 (1895 ~ 1897)

1895년 4월 2일에는 아펜젤러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초기에는 '기독교라는 사교집단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 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졌다. 그러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곧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11월 29일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춘생문 사건)을 세웠다가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하였다. 그뒤 배재학당에 다시 복귀하였다.

 

서재필
(이승만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고,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했다.)
 

 

이상재
(이상재는 이승만의 정치적, 재정적 후견인이 되었다.)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서양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그 후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민중운동시기 즉 1898년 만민공동회 당시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의 으뜸가는 청년이었으며 활발한 연설가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을 만나 자주 교류했는데, 그 중 서재필은 그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에서 양홍묵 등과 함께 청년단체인 협성회를 조직하고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기도 하였다. 협성회에서 이후 이승만은 서기, 회장 등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협성회는 나날이 발전했다. 동시에 이승만이 왕정을 타도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협성회의 창립회원이자 동지의 한사람인 이승구이완용의 아들이었다. 이승구의 아버지 이완용은, '자식이 이승만 패거리와 뭉쳐 다니는 것을 걱정'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유학을 보내 버렸다. 협성회는 계속 발전하였고, 학업과 협성회 활동을 병행면서도 이승만은 1897년 7월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이어 이승만이 영어 연설이 시작되었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독립을 역설하는 패기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언론·계몽운동 (1897 ~ 1904)

1898년 1월 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이자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이때 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신문에 싣기도 했다. 3월 10일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 집회를 개최하자 이승만은 연사로 참가,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고,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에게 항의의사를 전달하는 총대(總代)위원으로 선발되었다. 4월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매일신문》을 창간하고 사장 겸 저술인의 직책을 맡았다. 8월 10일에는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 편집담당과 논설담당을 겸하였다. 11월 5일 익명의 투서 사건이 발생,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했다는 혐의를 받고 독립협회이상재, 남궁억 등 간부급 17인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학생과 대중을 동원, 이들을 이끌고 경무청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여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11월 26일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남궁억 등 50여명을 중추원 의관(議官, 종9품)으로 임명할 때 함께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영의정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23일 고종이 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그는 미국인 의사 해리 셔먼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그는 협회의 전단지를 베포하다가 전단지 내용 중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문제가 되어 요시찰 대상이 되던 중,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1899년 1월 17일미국공사로 근무했던 알렌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월 30일 독립협회의 동지였던 한글학자 주시경을 만나 그로부터 몰래 건네받은 육혈포를 쏘며 동지 2인과 함께 감옥을 탈출했으나, 서상대만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승만은 중간에 붙잡혀 들어왔다 7월 11일 평리원 재판소에 회부, 당시 재판장으로 지냈던 홍종우에게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한성감옥서에 재수감되었다. 이때 탈옥 동지였던 최정식은 처형당하였다.본래 성격이 성급하기로 유명했던 이승만은 오랜 감옥생활로 성격이 더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그는 옥중 생활에서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틈틈이 했으며, 이때부터 이승만은 영어공부에 재미를 느끼면서 심심풀이로 혼자서 한영사전 등 정리하기도 했었다. 그는 한성감옥 생활하면서 동료 죄수들은 물론, 간수들한테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많은 개화인사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옥중 생활 중 그는 민중계몽의식 가치관을 나타내는 저서 '독립정신'을 1904년 6월에 저술했다.한편 이승만은 옥중에서 어른 죄수와 어린이 죄수를 나뉘어서 글을 가르치고, 기독교 포교 활동을 했다.

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이뤄졌고, 크게 근대 역사관과 정치관으로 이뤄진 앞부분과 당시 시대상황을 해석한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당시 독립정신은 대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출간이 되지는 않아 필사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돌려봤다고 한다. 이후 이승만이 도미한 1910년이 되어서야 LA에서 첫 출판본이 나올 수 있었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해외 사례를 언급하는 부분 상당수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대통령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이 실제로 원한 제도는 대통령제였지만, 집필 당시 사형수였다는 신분상의 이유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척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다.

옥중 계몽운동과 석방
 

 

민영환
(그는 이승만을 석방하여 미국에 밀사로 보냈다.)
 

 

한성감옥에서의 이승만.(맨 왼쪽)

옥중에서 영한사전을 집필했고, 1900년 8월, 한성감옥에서 청·일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 서적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는 뒤에 다시 1917년미국 하와이에서 《청일전기》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다.

1904년 7월 8일 이승만은 특별 사면령을 받고 석방되었다. 민영환, 한규설 등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한 결과, 러일 전쟁이 발생하면서 그는 8월 9일 특사로 감옥을 나올수 있었다.[3] 민영환한규설을 만난 뒤 1904년 10월 15일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했으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하였다. 이때 그는 고종 황제를 만나보라는 민영환의 요청을 거절했고, 고종이 보낸 궁녀 역시 만나주지 않았다.

1904년 11월 4일에는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민영환의 의뢰로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일본 고베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 갔다. 그 해 12월 31일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외교 활동 (1904 ~ 1905)

 

 

1905년 8월.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만나기 위해 예복을 갖춘 이승만 박사.

1904년 8월 민영환, 한규설 등의 건의로, 예정이 없던 특사조치로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그의 밀서를 소지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한다.[9]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여 밀지(密紙)를 써서 궁녀를 비밀리에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왜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밀지를 들고 온 궁녀를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

1905년 1월 15일 미국 신문 "워싱턴 포스트" 지와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하였다.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교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2월 20일 이승만은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적이 있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찾아가, 그의 주선으로 존 헤이 미국 국무장관과 30분간 면담하였다. 헤이 장관을 설득,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되었다.4월 23일 워싱턴 D.C의 커베넌트 장로교회류이스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05년 8월 윌리엄 태프트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와 미 의원 워즈워스를 대동하고 아시아 수행길에 하와이호놀룰루를 경유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태프트와 접촉, 그의 추천장을 받아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났다. 어렵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는 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9월 10일 대한제국 황실 시종무관장 민영환으로부터 격려 편지와 함께 300달러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두 달 후에 민영환을사조약에 대한 울분을 못 이겨 자결함으로써 순국한다.

1905년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 황제를 예방하게 되는데 한국미국이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나 앨리스 루스벨트는 융숭한 대접만 받고 되돌아갔다. 테오도어 루즈벨트는 끝내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미 태프트를 보내 일본총리 가쓰라와 밀약, 뒤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을 알게 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 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도미 유학 (1906 ~ 1910)

 

 

1909년의 이승만
이후 이승만은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哲學)을 공부하였다. 1907년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M.A) 학위를, 그리고 1910년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11] 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1908년 덴버의 감리교회에서 열린 애국동지회에 참석하였다. 그뒤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오클랜드기차역에서 저격,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전명운, 장인환의거에 변호하기 위해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예수교인으로 살인자들의 통역을 원치 않는다'며 법정 통역을 거절했다. 당시 이승만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인들의 여론반응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법정통역을 거부했던것이다.

두명의 한국인이 루스벨트대통령의 친구인 스티븐스를 사살하였다. 이 살해사건은 일본의 선전기관들이 한국사람들은 흉도이며, 최악의 악당이라고 묘사하는데 대대적으로 이용되었다.
-이승만 자서전 초고문서 내용中.-

이듬해 1909년, 안중근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하였을때도 이승만의 반응은 미국여론을 살펴보면서 미국 여론의 악화를 걱정했었다.

안중근이 일본의 거물정치가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이렇게되자, 미국 각종 언론 신문에는 '한국인들은 잔인한 살인마이며 무지몽매하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자주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한국인인 나와 이야기하는것을 두려워했었고, 교수들은 나를 무서워해서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 자서전 초고문서 내용中.-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Syng-Man Rhee, 또는 승만 리). 당시 박사(博士)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8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1908년 8월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沿海州)대표로 회의에 참석하였다.

귀국과 재망명

귀국과 선교 활동 (1910 ~ 1913)
 

 

1910년의 이승만

1910년 3월 국민회에 가입했다.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이어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는데감리교파 선교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또한 당시 들어온 신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라서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12년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미국 네브라스카에서 이승만은 옥중 동지인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건너갔다. 1913년 2월 3일 이승만은 박용만과 함께 하와이에 정착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둘 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 이승만은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였고 그해 8월 미국 하와이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학교인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어 한인기독학원(KIC)의 원장도 겸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어한문을 새로 가르치고, 뒤에 학교 이름도 '한인기독학원'에서 '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으로 재단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

하와이 정착과 국민회 분열 (1914~1918)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감리교 부속의 한인중앙학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교육 활동과 실력운동 양성에 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감리교에서 설립한 한인기숙학교를 '한인중앙학원'이라 고치고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미국인 감리교 감리사가 이승만의 민족교육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승만은 반발하고 학원장직을 사임, 새로운 학원을 세웠다. 그는 태극기를 걸어놓고 민족교육에 열중했다. 이승만은 한인기독교회를 창설하고 교회 안에서 어린이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하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양 잡지'를 창간해 '청일전기' 등의 홍보물을 간행하는 등 언론 출판활동을 전개했다. 이들 학생과 후원자들은 뒷날 이승만 계열 또는 후원자가 되어 하나의 파벌을 이루었고, 뒷날 대한인 동지회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이무렵 1914년 박용만국민군단을 창설했고 군사력을 양성코자 했으나 이승만은 무장투쟁에 반기를 들었고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중시했으므로 두 사람은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1915년 6월 17일 스타불레틴 신문에 기고하여 자신은 어떠한 반일적인 내용도 가르치지 않으며 보편적인 인류애를 가르치고자 한다고 했다. 그는 지역 일본인 신문들이 자신이 반일감정을 조장한다는 오해를 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와이 한인들은 국민회에 의무금을 납부하였고 국민회는 당시 최대 인력과 자금력을 가진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승만은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 내역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고 국민회측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은 오래 지속되었고 테러, 폭동이 일어났다.하와이 법원에는 이승만과 관련된 소송이 10여건 벌어졌다. 당시 로베르타 장이 수집한 재미한인 교포들의 인터뷰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반수 이상은 이승만이 한인사회에서 위험한 인물이라고 기억했으며 이승만의 조직원에 의한 암살 시도 증언도 있다.

감리교교단과 수시로 마찰을 빚어오던 중 1915년 6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한인중앙학원'을 미국 감리교 선교부 통제하로부터 독립시켰다.

감리교단, 박용만과의 갈등

1917년 이승만은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과거 옥중에서 쓴 저서 '독립졍신'(제2판)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그해 10월 29일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약소 민족대표자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3]

1918년 7월 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수립된 '신립교회' 예배당 헌당에 참여하였고, 9월 '한인여자성경학원' 을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 으로 바꾸었다. 12월 1일 정한경, 민찬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파리 평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되었다. 12월 23일 '신립교회'의 이름을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로 바꾸었다. 이승만은 교회를 분열시켰으며 헤이즐 정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인들은 이승만의 교회 아니면 감리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1918년 박용만은 일본군 선박 출운호를 폭파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하와이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신한민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국민군단을 비난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국민군단은 해체되고 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났다. 이승만이 국민회를 장악하자 대립은 일단락되었다. 이승만은 반대자가 많았지만 지지자들에게서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918년 11월 독일이 일단 항복함으로써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다음해 1월 18일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서재필 역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평화회의에 이승만 박사, 민찬호 목사, 정한경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국무부의 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