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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총 벽화 이야기[고구려사의 명장면⑤]

문수봉(李楨汕) 2017. 12. 12. 16:12

무용총 벽화 이야기[고구려사의 장면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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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의 명장면』Ⅰ[고구려사의미,시조,천도,영역,안악3호분] http://blog.naver.com/ohyh45/221046641367

『고구려사의 명장면』Ⅱ[고구려발전을 이끈 국왕들]  http://blog.naver.com/ohyh45/221046649180
『고구려사의 명장면』Ⅲ[광개토대왕비 이야기]          http://blog.naver.com/ohyh45/221046649562
『고구려사의 명장면』Ⅳ[덕흥리 고분 이야기]            http://blog.naver.com/ohyh45/221089659011

『고구려사의 명장면』Ⅴ[무용총 벽화 이야기]            http://blog.naver.com/ohyh45/221133394152

『고구려사의 명장면』Ⅵ[각저총 벽화 이야기]            http://blog.naver.com/ohyh45/221158234714


 


31. 무용총 벽화 가무배송도


평양 일대에 위치한 덕흥리 벽화고분을 5회에 걸쳐 살펴보았는데, 벽화 이야기가 나온 김에 평양지역이 아닌 고구려의 오랜 수도였던 국내성에 위치한 벽화고분도 살펴보는 게 균형이 맞을 듯하다. 왜냐하면 평양지역의 벽화고분과 국내 지역의 벽화고분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수도로서 400년 이상을 지낸 곳이기에 국내 지역에도 적지 않은 벽화고분이 발견되었다. 그중에서 대략 덕흥리고분과 시기상 가까운 고분 가운대에는 아무래도 우리 눈에 익숙한 무용총(춤무덤)과 각저총(씨름무덤)의 벽화가 적합하리라 생각한다. 이들 무덤 벽화의 명장면을 좀 더 상세하게 관찰하는 법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먼저 무용총 벽화부터 살펴보자. 두방무덤인 무용총은 널방 벽면의 가무배송도, 수렵도, 묘주접객도가 유명하며, 그외 천장에 있는 하늘세계를 꾸미는 다양한 벽화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무용총이란 이름은 벽화 중에 무용그림이 있기에 붙여진 것이다. 그런데 무용총의 벽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은 수렵도이다.

생동감 있는 필치와 세련된 화면 구성이 고구려인의 기상을 잘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고분벽화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다. 그래서 혹자들은 씩씩한 기상을 보여주는 수렵도로 무덤 이름을 삼지 않고, 일제 시기에 의도적으로 유약한 이미지의 춤그림으로 이름하였다고 비판하면서, 수렵총으로 무덤 이름을 바꾸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수렵도가 대표적인 그림이기는 하지만, 사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그림이 수렵 장면이라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지난 회까지 살펴본 덕흥리고분 천장에도 활기찬 수렵 장면이 그려져 있다. 춤그림도 다른 벽화고분에 없지는 않지만, 무용총의 춤그림과 같이 다수 인물이 등장하고 그 표현도 매우 세련된 그림은 없다. 그런 점에서 춤그림 역시 수렵도에 못지않은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고구려 벽화 중에 고구려인의 기백이 담기지 않은 그림이 어디 있겠나.

그러하니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고구려의 춤을 보고 이렇게 노래했다.

금꽃 장식 절풍모에(金花折風帽)
흰빛 옷이 천천히 빙글돌다가(白馬小遲回)
넒은 소매 나부끼며 너울너울 춤을 추니(翩翩舞廣袖)
해동에서 날아온 새와 같구나(似鳥海東來)

이 시만 보아도 살포시 한 발 두 발 내딛다가 너른 소매자락 휘몰아치는 춤사위가 마치 멀리서 힘차게 날아온 새와 같은 듯 기상이 넘치는 하나의 장면이 그려지지 않는가?

이제 무용총 벽화를 통해 고구려인의 춤을 좀 더 실감 나게 감상해보자. 그림을 꼼꼼하게 봐 주시기 바란다. 가무배송도는 널방 왼벽에 그려져 있다. 앞에는 검은 말을 탄 인물이 뒤에 시종 한 명을 거느리고 서있고, 그 앞으로 상단에는 5인의 무용대가, 그 아래에는 7인의 합창대가 그려져 있다.

무용대 위에는 한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지금은 박락되어 다리 부분만 겨우 보일 뿐이다. 그리고 악사 앞쪽으로, 즉 말탄 인물의 머리 윗부분쯤에 또 한 사람 무용수가 악사를 마주 보며 무용대와 똑같은 춤사위를 펼치고 있다.



▲ 무용총 가무배송도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주인공인 왼쪽에 말 탄 인물을 가운데에 배치하고 그 오른편으로 무용대와 합창대를 상하 두줄로 나누어 배치함으로서 왼쪽 인물을 위한 춤과 노래가 펼쳐지는 장면임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말 탄 인물이 널방 안벽에 있는 접객도의 주인과 동일한 복장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 무덤의 주인공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멀리 떠나는 주인공을 환송하는 것인지, 무사히 잘 다녀온 주인공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장면인지는 금방 알기 어렵다. 다만 이런 생활풍속도가 현세의 생활을 재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내세의 복된 생활을 소망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내세로 떠나는 주인공을 떠나보내는 의미도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환송의 장면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좀 더 그림을 상세하게 살펴보자. 그 앞에서 5명의 무용수가 줄지어 같은 춤사위로 춤을 추고 있는데, 맨 앞의 남성 인물은 긴 새깃을 꽂은 절풍을 쓰고 있다. 그 위치나 혼자만 절풍모를 쓰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다른 무용수들을 이끄는 모습이다. 이 절풍모를 쓴 인물의 춤은 앞서 이백의 '고려무' 시를 그대로 연상시키는 동작이다.

악사 앞의 남자 무용수가 춤을 지휘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수긍하기 어렵다. 아무래도 절풍모를 쓴 인물이 춤을 이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 단독 무용수는 그 앞 악사와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것으로 아래 무용대와는 구분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그림은 두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진다. 즉 1인 악사의 반주에 맞추어 1인 무용수가 춤추는 무대가 있고, 5인의 무용대와 7인의 합창대가 함께 펼치는 무대가 있는 셈이다. 즉 주인공의 환송을 위해 2인의 작은 무대와 12인이 꾸미는 큰무대, 이렇게 2회가 열린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아래 무용대를 살펴보자. 5명의 무용수는 두 그룹으로 나뉜다. 앞의 세 사람은 비스듬한 선을 이루고 있고, 뒤의 두 사람은 수평선상에 나란히 선 모습이다. 또 옷의 색깔도 주의 깊게 배치되어 있다. 앞의 세 사람 중 긴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두 인물이 서로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으며, 맨 앞의 절풍모를 쓴 인물이 입고 있는 윗도리와 바지는 이 두 가지 색상으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맨 뒤의 두 사람은 이 두 가지 색상으로 윗도리와 바지 색깔을 서로 엇갈리게 표현하고 있다.

색상만이 아니다. 옷차림을 보면 5인 중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을 두 번째, 세 번째에 배치하고 나머지는 저고리와 바지 차림으로 변화를 주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섯 사람이 열을 짓고 있는 평면적 배치에 다채로운 율동감을 부여함으로써 마치 춤을 추는 분위기를 극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맨앞의 인물에만 화려하게 나부끼는 새깃을 꽂은 절풍을 씌움으로써 보는 이의 시선을 그 인물로 모아가다가 결국 말을 탄 인물에까지 미치게 한다.

무용대 아래에는 7인의 합창대가 자리 잡고 있는데, 화사한 옷차림과 율동감 넘치는 무용대와는 달리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다소 경직된 자세로 열을 짓고 있다. 무덤 주인공이 탄 검은 말의 색깔과 합창대의 옷 색깔이 서로 조응함으로써 자연스레 합창대와 주인공을 연결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밝은 분위기의 무용대를 아래에서 든든하게 떠받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합창대의 맨 앞사람과 무용대의 두 번째 인물이 위아래 수직선으로 일치시키고, 합창대의 마지막 인물과 무용대의 마지막 인물 역시 수직선으로 이어짐으로써 전체적으로 사각형 구도를 이루게 되어 시각적으로 안정감 있는 구성이 된다. 그런데 무용대의 맨 앞쪽 절풍모를 쓴 인물은 합창단의 받침이 없어 마치 공중에 붕 뜬 모습을 하게 된다. 그렇게 아래 공간이 비어 있는 구성이 이 인물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낳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절로 시선을 무덤 주인공으로 유도하게 된다.

언뜻 지나치기 쉬운 부분이지만, 이 가무배송도를 꼼꼼하게 들여다 보면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그림이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그려진 회화적으로 매우 뛰어난 그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에도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먼저 노래 부르는 합창대를 살펴보면 앞에서 세 번째 인물은 다른 사람과 달리 뒤돌아보면서 뒷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는 모습이다. 왜 그렇게 그렸는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다소 경직된 합창대의 분위기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 점을 화가가 의도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무용도에서도 다소 어색한 모습이 있다. 두팔을 완전히 뒤로 나란히 젖힌 모습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마치 두팔이 겨드랑이에서 돋아난 것처럼 표현되었다. 그림과 같은 자세를 취해보시라.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춤사위의 모습은 집안 지역 장천1호분 앞방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에 무용총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딘지 그 모습이 이상하다. 실제 춤사위가 이런 형태인지, 아니면 회화적 표현에 아직 서투른 면이 남아 있어서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한 것인지 알기 어렵다.

일전에 한 무용전문가가 이 춤사위의 복원을 시도한 적이 있는데, 두팔을 뒤로 젖힌 모습이 아니라 두팔을 나란히 옆으로 같은 쪽으로 쭉 뻗은 춤사위로 재현하였다. 보통 우리나라 전통무에서 볼 수 있는 춤사위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그런 모습이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때부터 필자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왜 무용도를 그린 고구려 화가는 그런 춤사위를 이 그림처럼 어색하게 그렸을까? 결코 그리기 어려운 형상은 아니기 때문에 단지 표현 능력의 서투름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앞에서 필자가 설명한 바와 같이 주도면밀한 회화적인 구성으로 볼 때에 더욱 그러했다. 다른 설득력 있는 그린 이의 의도를 읽어내야 했다. 이에 대해 필자가 얻은 설명 방식은 다음 회에서 밝히도록 하겠다.

지금까지 가무배송도 그림을 놓고 나름 구석구석 세밀하게 살펴본 이유는 통상 우리가 고구려 고분벽화를 볼 때 의례 고구려인의 기백이니, 혹은 고구려인의 생활상이니 하는 부분에만 주목하기 때문이다. 사실 고구려인이 무덤 주인공을 위해 무덤 안에 벽화를 그릴 때에는 어떤 소재를 선택할 것인가?

그 소재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 하는 식으로 많은 생각과 공력을 기울여 제작하였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그런 총체적인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림 속에 담긴 고구려인들의 다양한 의도와 관념, 나아가 미의식 등을 최대한 세밀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고구려 역사에 대한 애정을 갖추기 위한 최소한의 그리고 올바른 태도라 믿는다.   

[출처] :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고구려사의 명장면> / 매경 프리미엄



32. 무용총 벽화 수렵도


수렵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많이 등장하는 제재 중의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수렵도하면 누구나 얼른 떠올리는 그림이 무용총의 수렵도일 만큼 워낙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수렵도는 무용총 널방 서쪽벽에 자리 잡아 동쪽벽의 무용도와 마주 보고 있다.

먼저 그림 전체를 살펴보자. 모두 5인의 말을 탄 무사가 등장하며 호랑이, 사슴 등 5마리동물이 사냥 대상이다. 앞뒤로 네 다리를 쭉 뻗어 힘차게 달리고 있는 말 위에는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머리에 새 깃을 꽂은 무사들이 놀라서 달아나는 호랑이와 사슴들을 뒤쫓고 있다. 사람과 짐승의 움직임이 역동적으로 그려지고 효과적으로 구성되어 힘차고 속도감이 넘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 무용총 수렵도 (복원)

기마무사와 동물들에 대한 뛰어난 묘사와 표현력에 비하면 산과 나무는 마치 도안화된 모습이다. 산은 굵고 가는 선으로 마치 물결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렸으며, 여러 겹으로 겹쳐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치 산맥이 꾸불꾸불 흘러가는 듯한 형상이다.
산맥은 위아래 2그룹을 이루는데 아래쪽, 즉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산은 흰색이며, 그다음은 붉은색, 가장 멀리 있는 산들은 노란색으로 채색하였다. 원근에 따라 색을 다르게 하는 방식인데, 색원근법이라고 하기는 어려워도 색상을 달리하여 산과 산을 서로 다른 층위로 분명하게 구분함으로써 다소나마 공간감을 살리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오른쪽 하단의 산맥 모습은 좌우 대칭적인 구도이지만 흰색과 붉은색으로 구분되어 산이 겹쳐 보이게 의도했다. 그 위쪽, 즉 멀리 있는 작은 산과 그 뒤의 큰 산도 겹쳐 보이도록 표현하여 공간의 깊이를 살리고 있다. 또 이들 산맥은 윗부분의 사슴 사냥 장면과 아랫부분의 호랑이 사냥 장면을 분리하는 경계선으로 기능하고 있다.
아래쪽 산의 기능도 맨 아래쪽의 사슴 사냥하는 장면과 그 윗부분을 구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맨 아래쪽에 2인 무사의 사냥하는 모습이 하나의 열을 이루고, 맨 위의 사슴 사냥하는 장면까지 차례로 모두 4개의 수평 열을 이루면서 다중적인 공간감을 형성한다.

또 무사가 타고 있는 말이나 사냥감인 짐승들 대부분이 오른쪽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고 있음에도 주목해보자. 이는 오른쪽 방향으로 역동적인 흐름을 만들어 수렵도에 박진감을 넘치게 한다. 게다가 아래 1열과 2열의 기마무사는 삼각형을 구성하며 거의 동일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구도에 안정감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중 가장 크게 묘사된 2열의 기마무사를 부각시키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맨 위쪽 4열에는 두 마리 사슴이 왼쪽으로 달리고 있어 그 아래 4열까지 오른쪽 방향으로의 흐름을 다소 역류시키고 있지만, 그 오른편 기마무사의 말이 오른쪽으로 달리면서 그 아래의 흐름과 조응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 흐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고 맨 위쪽 4열의 사슴들과 이를 겨냥하고 있는 무사와 활의 방향이 반대 방향을 취함으로써 화면의 단조로움을 깨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나름 조화로운 구성 중에 다소 이질적으로 눈에 띄는 인물이 보인다. 2열 가장 왼쪽에 있는 기마인물이다. 이 말은 네 발을 앞뒤로 한껏 뻗으면서 내달리는 다른 말과는 달리 뒷발을 마치 도움닫기 하듯이 잔뜩 웅크리고 있으며, 무사 역시 활시위를 당기지 않고 그냥 들고 있으며, 어떤 짐승도 쫓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매우 동적으로 움직이는 다른 기마무사와는 달리 매우 정적이다. 이 무사는 지금 사냥을 포기하고 있는 것일까?

화면 구성상에서 볼 때 다른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즉 이 정적인 기마무사는 다른 4인의 기마무사가 힘차게 오른쪽으로 내달리기 직전의 모습이다. 즉 여기서 힘을 응축시켰다가 일시에 폭발시켜 오른쪽으로 강렬한 속도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수렵도가 활기차고 박진감 넘치면서도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데에는 위에서 살펴본 다양한 화면 구성의 결과이다. 그런 점에서 수렵도는 무용총에 있는 벽화 가운데서 회화적인 구성과 그 효과가 가장 뚜렷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수렵도에도 다소 의아한 부분이 있다. 제일 위쪽에서 말이 달리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뒤로 틀어 활을 쏘는 기마무사의 모습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이런 자세는 이란 땅 북부에 있던 파르티아 왕국에서 유래하여 파르티안 사법이라고 부른다.
이 파르티안 사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기마무사는 왼손잡이로 표현되었다. 정말 왼손잡이였을까? 그런데 덕흥리고분 천장 수렵도를 보면 왼쪽 방향을 향해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무사가 왼손잡이로 그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화면상 왼쪽 방향으로 활을 쏘는 자세가 되는 두 사람 모두 왼손잡이로 그렸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 덕흥리고분 수렵도 (복원)

사실 이들을 오른손잡이로 그리게 되면 무사의 정면이 아니라 뒷모습을 그려야 한다. 아마도 이를 피하기 위해서 부득이 왼손잡이로 그려서 인물의 앞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이 대목에서 전 회에서 다룬 무용대 춤사위의 의아한 표현이 떠오른다.
무용전문가의 재현처럼 옆으로 두 팔을 나란히 뻗은 모습으로 그리면 무용수들의 앞모습을 가리게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색한 표현으로 두 팔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이런 필자의 추정이 어느 정도 타당할지는 앞으로 좀 더 검증을 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필자의 추정이 타당하다면 그런 인물을 묘사 방식에 담겨 있는 관념들도 함께 읽어내야 한다.

그런데 몽골에 유학하고 온 한 학자에게서 무용총의 그림과 비슷한 춤사위가 몽골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아직 필자가 이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런 춤이 몽골에 있다면 고구려가 유목민족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유목문화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무용총 그림과 같은 춤사위를 추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열어놓아야 한다.
고구려는 다양한 계통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자기화했던 국가였다. 오히려 우리의 시각이 고구려인들만큼 넓고 다양하지 못해 벽화 속 다양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구려 역사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의 하나는 넓은 영토가 아니라 넓은 시야라는 점을 새삼 깨닫는다. 
[출처] :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고구려사의 명장면> / 매경 프리미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