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사지(寺址)- 청암리사(금강사)지와 정릉사지
고구려 사찰 건립의 기록
1) 소수림왕 2년 (372), 전진의 왕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 보내 불교를 전함
17개 소수림왕 2년(372) 6월에 전진의 왕 부견이 사신과 순도 스님을 보내 불상과 경문을 전했다.
동왕 4년에 아도 스님이 왔고 , 동왕 5년(375) 2월에 최초의 절을 지어 순도를 머물게 하고, 이불란사를
세워 아도를 머물게 했다 . 소수림왕 5년 (375), 국내성에 이불란사, 성문사 창건
2) 고국원왕 말년(391)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 하는 영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3) 광개토왕 2년(392) 부왕의 영을 받들어 광개토왕이 평양에 아홉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평양에 구사九寺 창건 - 왕성도 아닌 평양에 한꺼번에 아홉개나 절을 지었다면 훨씬 더 많은 절들이 전국에
세워졌을 것이다.
4) 장수왕 15년 (427) 평양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평양에 많은 절간을 지었다.
그것은 393년에 평양에 9개의 절간을 지었다고 한 기록-<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2년을
통하여서도 잘 알 수 있다.
한 해에 9개의 절간을 지었다는 것은 그 때 고구려에서 얼마나 불교를 장려하였는가를 말해주는 동시에 또
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길 준비를 본격적으로 다그쳤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며 수도건설에서 절간건설이 중
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볼 수 있게 한다.
5) 문자왕 7년 (498) 7월, 평양 금강사 창건
6) 영류왕(滎留王)(618~642년 재위) 때에는 중대사(中臺寺), 진구사(珍丘寺), 유마사(維摩寺), 연구사
(燕口寺), 대승사(大乘寺), 대원사(大原寺), 금동사(金洞寺), 개천사(開天寺)등이 있었고
7) 보장왕(寶藏王)(642~668 재위)때에는 반용산 연복사(盤龍山 演福寺), 영탑사(靈塔寺), 육왕사(育王
寺) 등이 있었다고 하나 그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27대 영유왕 (618~642) 때 받아들이기 시작한 도교
의 득세로 불교의 위기가 시작된 것으로보인다. 당시 불교의 성격상, 도성 가까이 불사 건립 보장왕 2년
(643) 불사를 빼앗아 도관(도교의 사원)으로 삼게 했다는 기록을 보아 억불의 흔적을 보게 된다. 보장왕
9년 (650) 보덕이 억불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다.
단편적이기는 하나 평지에 가람을 조영하였으므로 당탑堂塔이 매우 장엄하였을 것으로 추측됨. 그러나 현
재는 유지가 거의 없어져 전체적인 가람의 구조를 자세히 알 수 없는 실정.
현재까지 알려진 사지
지금까지 발굴되었거나 그 터가 알려져 있는 사찰은 평양의 금강사지(金剛寺址), 정릉사지(定陵寺址), 광법사
지(光法寺址), 상오리 사지(上五里 寺址), 청호리 사지(淸湖里 寺址), 빙명사지(氷明寺址), 중여사지(重與寺址), 낙사리 사지, 암사리 사지, 평천리 사지, 대왕사지 등과 평원군의 원오리 사지(元五里 寺址), 봉산군의 토성리 사지(土珹里 寺址)등이 있다.
정릉사지와 금강사지가 잘 남아 있음. - 특히 4세기 후반에 들어온 불교의 영향은 우리나라 건축에 현저한 변화와 발달을 촉진시켰다. 삼국중에 제일 먼저 불교가 전래된 고구려는 왕권의 확립 과정에서 불교가 지주 역할을 하였다. 국도를 중심으로 많은 사찰을 조성하였으며 각개 건물도 뛰어난 기법에 의해 건립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의 유구가 현존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정연하였던 가람의 배치라든지 건물터에 남아 있는 기단석이나 초석들에 의해 지상에 건조되었던 건물들이 장대하고 화려하였음을 상상케 한다.
고구려 사찰터라고 생각되는 평양의 금강사터(청암리사지)는 가람 중앙에 정 8각형의 탑자리가 있고 동서남북으로 장방형의 건물터가 밝혀져 고구려가람의 한 예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문헌으로 알려진 6조시대의 남탑북금당 평면과는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이와 같은 가람배치는 백제를 경유, 일본에까지 건너가 나라에 있는 비조사터(596)에서 같은 유형의 가람배치 형식을 볼 수 있다.
1. 청암리사지 (금강사지 )
평남 평양시 청암리에 있는 고구려의 절터. 1938년과 1939년의 발굴조사에 의하여 절의 규모가 확인되었으며 현재는 고구려의 금강사지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가람의 배치는 크게 앞 뒤의 두 영역으로 나뉘어 지는데, 기본적으로 1탑 3금당 식으로 배치되었다.
앞의 영역은 남북 중심축으로 따라 문, 탑, 금당이 놓이고, 탑 좌우에 전당이 하나씩 더 있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고구려 사찰건축에서 주로 보이는 것으로 일본의 아스카사지(飛鳥寺址)도 이 배치와 같아 고구려 불교의 일본으로의 영향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금강사지 금강사지는 대동강 상류 석안의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리에 위치하고 있다.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리에 위치, 평양 동황성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1938-1939 발굴조사 (소천현부, 미전미대치 발굴) 처음에는 '청암동 폐사'로 알려져 있었음[4] 대지의 밭 가운데 배수구를 굴착하면서 와적승瓦積僧 유구 발견
| |
금강사터 주춧돌 |
1. 발견된 유구
1) 8각전지 (탑지) 노출
2) 중문지中門址 발견- 8각전지 기단으로부터 남으로 10.56m 지점 (고려척 35척)
3) 8각전지 동서에서 동,서 금당지 발견-거리는 중문지와 거의 동일
4) 북금당지 : 8각전지 북으로 14.5m 거리
5) 8각전지에서 동,서금당지로 연결되는 보도 (옥석 깔음) 유有
6) 1939년 2차 조사시時, 북금당지 북쪽에서 또하나의 큰 건물지 발견
7) 강당지와 불당 사이에 있는 넓은 공간은 회랑이 있었던 곳으로 보여지는데, 그 회랑도 탑과 세 당이 놓여 있는 윤곽으로 볼 때 정 4각형
에 가까운 형태였을 것 같다.
2. 발굴 결과
1) 중문지, 8각전지, 북금당지, 강당지가 남북자오선상에 놓여 있음
2) 8각전지 기단 조사결과 대지중앙부에 융기되어 있는 지상암반을 8각으로 깎아내고 그 위에 석재를 세워 만
들었음. 또 기단 남변과 서변의 중앙에는 계단 유구가 노출되었는데 동변과 북변에도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3) 금강사지 배치는 1탑3금당식.
3금당형식은 처음에 2금당 형식에서 출발했으리라는 설이 있다. 즉 : 2금당 형식은 중국 육조시대 궁궐 건
축에서 유행했던 동서당 제도를 표본으로 하였다는 논지이다. 처음에는 큰 건물의 동서쪽 끝을 내부에서 막
아서 실을 만들었던 것이 3세기에서부터 주전옆에 독립된 두개의 부속건물로 떨어지게 되었던 흐름으로 보
인다. 8각탑을 중심으로 남쪽에 문지, 북쪽에는 중금당, 동서에 같은 규모의 금당지가 있다.[4]
4) 각종 수키와와 막새 출토.
그중에는 장군총, 상오리사지, 평양성 등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것들이 있다. 금강사지의 막새문양(무늬)
은 장군총의 것보다 늦고 평양성의 것보다는 이른 것들이다. 금강사지의 막새는 연꽃잎이 6개, 장군총의
것은 8개이다. 상오리사지와 평양성의 막새들은 꽃잎과 잎사귀를 엇바꾸어 6개구간으로 나누고 안팎 꽃술
사이에 띠를 둘렀다.
5) 금강사지는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427년 이후의 시기로 추정된다. 문자왕 7년 (498) 창건? - 498년까
지 8각목탑 형식이 존재했음을 나타내 준다.
6) 금강사지도 중국자(한척)가 아닌 고구려자(고려척)으로 계측되었다고 보고 있다. 사지중심의 8각탑은 내
접 지름이 35자로, 특히 폭이 70자로 계측되었다. 탑의 평면 규모, 금당, 동전 등 개별 건물들의 평면 치수
로 탑기단폭의 절반, 즉 고구려자 35자의 일정한 배수로 이루어졌다 한다.
7) 금강사지는 탑중심 사지로 그것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중심 건축 구조물인 8각 기단을 고구려자 35자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에 외접하는 정8각형으로 만들고 그
위에 목조탑을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복원에 의하여 탑은 7층의목탑으로 전체 높이가 고구려자 175척,
즉 61.25m에 해당된다.
3. 청암리사지 (금강사 金剛寺)와 팔각대목탑
1) 청암사지(금강사지 金剛寺)
청암리사지(금강사) 추정 7층팔각 대목탑
고구려의 또다른 대사찰, 청암리사의 사찰명은 사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다. '청암리사'라는 이름은 단지 현재 이 사찰터가 평양의 청암리(청암동)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일명 청암리사는 평양의 대동강 북쪽 언덕, 대성구역 청암동(平壤市 大城区域 淸岩洞) 청암리토성 안에 있다. 예전에 소개한 첫번째 고구려 가람 정릉사보다 수십년 뒤에 지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 사찰이 문헌에 나오는 고구려 금강사라는 가장 정설로 꼽히는 가설이 있는데, 이는 북한 학자들이 추정하는 바로, 북한학계에서는 청암리사지를 금강사지로 부르기도 한다.
문화재건축전문가 황세옥씨에 따르면 이는 거의 북한의 공식적 명칭으로 이미 채희국이란 학자가 고구려의 가람들에 대한 최초의 논문인 1957년 발표한 "평양 부근에 있는 고구려 시기의 유적 -고구려 평양 천도 1530주년에 제하여"에 청암리사가 아닌 금강사로 나오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그후로도 계속, 1986년에 사회과학원 발행 논문에 "자료와 연구-고구려 금강사와 그 터자리구성에 대하여"라고 기입하고 있다.
금강사(金剛寺)는 고구려 문자왕 7년(498)에 건립한 5세기말의 고대사찰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2권)에 등장한다. "평양 대동강변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는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사에도 등장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꽤 의미있는 고대사찰이었다.
청암리사지에서 출토된 막새문양 기와편은 4세기중엽에서 5세기전반인 장군총 출토 기와보다 늦고, 고구려 평원왕때 (586년) 축조된 평양 장안성 출토 기와보다는 앞서고 있어, 청암리사지의 축조가 5세기전반에서 586년사이임을 현재까지의 발굴결과는 보여준다.
참고로 청암리사의 막새문양은 연꽃잎이 6개, 장군총의 것은 8개, 그리고 상오리사지와 평양성의 막새들은 꽃잎과 잎사귀를 엇바꾸어 6개구간으로 나누고 안팎 꽃술 사이에 띠를 둘렀다고 한다.
사진은 아마도 비슷한 양식일 임진강 호로고루 출토 5세기 고구려 6개 꽃잎-내림막새와당
범위가 꽤 크긴 하지만, 그렇다면 5세기말 (498년)에 지어진 금강사 설은 힘을 얻게 되지요. 또한 또다른 기록으로 고려 숙종 7년(1102) 9월에 왕이 평양의 금강사에 와서 옛 탑을 보고 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청암리 사지를 고려사에 등장하는 금강사로 추정하는 쪽이 더 힘을 얻고 있다.
또하나의 설은 금강사는 맞지만, 문자왕때 만들어진 것이 아닌, 고구려후기에 중건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금강사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이 사찰은 청암리토성의 중앙부에 위치한 광활한 평지에 있는데 중앙은 강안에 뻗혀 넓은 대지를 이루고 뒤로는 구릉을 끼고 남으로는 대동강을 바라보는 가장 좋은 지점이다. 지도에서 보다시피 유명한 안학궁과 대성산성과 평양성사이에 위치한 토성으로 대동강을 남쪽으로 끼고있는 낮은 구릉지대에 5km의 성벽이 존재하고 있다.
대동강이 한눈에 보이는 위치입니다. 산 능선을 따라 청암리토성이 보이고, 저 중심에 금강사가 있다. 토성안에는 많은 초석들이 발굴되고 있어, 또 하나의 왕궁이 있었을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이 설의 근거가 되는 또하나의 유물은 기와이다.
이 곳에서 발견되는 기와들은 대동강 남쪽 강가에 있는 낙랑의 옛터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늦은 시기의 것이지만, 평양성이나 안학궁지 등에서 발견되는 것들보다는 오래된 것들로, 따라서 낙랑군을 몰아낸 고구려가 427년 장수왕 때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는 곳이 바로 이 성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궁궐을 지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2) 청암리사(금강사)의 구조와 7층 팔각대목탑
청암리사지의 발굴은 아직까지 전모를 밝힐만큼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인 1938-9년에 목탑과 금당 주변에 대해서는 발굴이 되었으나 황룡사의 예처럼 본격적인 발굴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고, 탑, 금당과 탑지의 배치정도의 성과가 있었다.
북한학계나 언론이 워낙 폐쇄적이긴 하나 선전성으로라도 (흥왕사의 예처럼) 본격적인 문화재발굴은 알려지고는 하는데, 아직까지 청암리사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소식은 아는 한 그 후로 없다.
한국불교의 시작인 고구려의 초기사찰들은 보통 도시의 평지 한가운데 위치하면서 중심에 목탑을 세우고 좌우에 거대한 건물을 균형되게 좌우배치, 엄숙하고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황세옥, 북한의 불사건축). 또한, 중심에 팔각탑을 세우는 가람형태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수 없는 고유한 형태이다.
청암리사(금강사)의 구조 자체는 일단, 같은 고구려 사찰인 정릉사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8각의 평면을 가진 다층 목탑을 중심으로 세 금당이 둘러싼 1탑 3금당식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으로, 정릉사와 유사한 전형적인 고구려 사찰의 배치형식이다. 이러한 배치는 5세기전 중국에서도 찾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일본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데라(아스카사( 飛鳥寺 비조사))도 매우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스카사는 백제의 왕흥사가 그 모델로 알려져 있고, 백제의 초기사찰들이 고구려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더불어 주목할 것이 1967년 발굴된 도쿄의 고찰인 가타기하라데라(樫原寺)이다. 거기서 스에키, 하지키, 하니와 조각 등이 출토되었는데, 무엇보다 고구려식 팔각탑의 존재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2010년 한중일 공동문화재학회에서 발표된 일본학자의 설명이다).
이 가람의 한가운데에 고구려와 같은 8각탑을 세운 백제의 1탑 1금당식 가람배치를 그대로 따르고 있어, 그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이 탑의 기단은 백제에서 흔히 사용한 기법인 瓦積基壇(와적기단)으로 만들어서. 당대 왜(일본)의 건축에 대한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래는 가람배치도로 왼쪽이 청암리사, 오른쪽은 아스카사이다. 사진의 설명은 약간 잘못된 것으로 보이는데, 1탑3금당의 최초는 시기상 청암리사가 아닌 정릉사가 된다 (물론 정릉사의 목탑건립시기가 창건대가 아니므로 그런 경우 정릉사가 아닌 청암리사가 최초일것이다).
1탑 3금당식 가람배치는 중국 사기(史記)의 천관서(天官書)에 나타난 오성좌(五星座)의 구성을 그대로 적용하여 지상에 재현시킨 중국의 궁전의 배치와 유사한 원리를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38-39년의 일본측의 주장으로,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했듯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의 김상태교수에 따르면, 청암리사지의 추정 창건연대인 498년 이전의 중국자료를 찾아보아도 이러한 정형화된 고구려식의 1탑3금당형식의 모습은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관련링크).
청암리사(금강사)가 한국에서까지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누가 뭐래도 역시 61미터이상으로 추정되는 대목탑의 존재때문일 것이다. 이 거대한 목탑지의 모양은 상오리사등에서 발굴되는 전형적 고구려양식인 8각형으로, 한변의 길이가 10.2~10.4m이며, 폭은 24.7m이다.
비교대상으로 같은 고구려의 정릉사 팔각대목탑의 경우, 한변의 길이가 8. 4미터 (목탑지 자체의 변은 7.3미터, 기단과 홈까지 8.4), 너비가 20.4미터이다. 문화재건축 전문가 황세옥 (1999)에 따르면 "고구려자 35자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에 외접하는 정8각형으로 만들고 그 위에 목조탑을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복원에 의하여 탑은 7층의목탑으로 전체 높이가 고구려자 175척, 즉 61.25m에 해당된다"라고 추정한다.
비교대상으로 불궁사 석가탑 (일명 응현목탑)은 요나라 1056년에 건립, 12세기의 팔각목탑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최대의 목탑이다. 팔각이란 점과 기단부와 높이가 비슷해서 비교대상으로 매우 좋은 듯 하다. 1층직경이 30.27미터, 9층(외관 5층)의 높이가 67.31미터로 청암리사 팔각목탑의 추정높이와 비례가 맞는다.
또현존하는 최대의 목탑이자 팔각목탑- 중국 불궁사 용현목탑 ,
정릉사나 금강사의 대목탑이 아마 이런 분위기 였을것이다
또한, 청암리사 팔각목탑의 정확한 층수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고구려가 요동의 육왕탑을 7층 목탑으로 세웠다는 것과 평양성 서쪽 대보산大寶山아래 禪觀寺사리에 영탑사의 탑이 8면 7층 석탑이라는 기록 (팔면칠급석(八面七級石))이 있어 당시 팔각목탑의 형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평양성의 고구려 영탑사(靈塔寺)의 전설이 건탑(建塔) 기록으로 전해오고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현재 만주 요양(遼陽)지방으로 추정되는 곳에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이 있었으며, 그 옆에 탑이 있어 삼중토탑(三重土塔)이었던 것을 성왕이 신심발원(信心發願)으로 칠층 팔각목탑을 건립하였는데, 그 뒤 높이를 줄이려다 목탑이 무너져 버렸다라고 전해오고 있다.
기록자체에 대한 신빙성은 고고학적 자료를 검토해보아야 확실해지겠지만 "칠층목탑을 건립하다(起木塔七重)."라는 기록은 고구려의 목탑을 처음으로 기술한 것으로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추정에 근거해서 현재의 목탑모형이 7층으로 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픽으로 재현한 7층팔각목탑
이는 현재까지 발굴된 '팔각대목탑'중 가장 큰 규모중 하나로 파악되는데 정릉사 대목탑이 약 60-70미터로 추정되고 있어 거의 같은 급의 목탑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 목탑의 초석은 8면 중 동서남북 4면은 5칸이고, 그 사이 나머지 4면은 4칸입니다. 그리고 탑의 계단은 남쪽과 서쪽에서 발견되었다 (북쪽과 동쪽에도 계단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또한 기단 조사결과 중앙부에 융기되어 있는 지상암반을 8각으로 깎아내고 그 위에 석재를 세워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언급한 고려사 11권의 기록, 즉 "고려 숙종 7년(1102) 9월에 신축일에 왕이 금강사에 가서 중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옛탑의 유적을 구경하였으며 태자를 시켜 강가에 있는 제단과 통한교를 둘러보게 하였다."는 기록이 만약 '탑터'가 아닌 '목탑'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12세기까지 목탑이 존재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탑터라 할지라도 금강사자체는 존재했음은 확실하다.
이 기록에서 또하나 주목해야 할 것으로 '통한교'가 보입니다. 통한교는 두가지 기록이 있는데, 하나는 평양의 고구려 궁인 '구제궁'을 만들때, 이미 고구려가 건립한 통한교, 연우교, 청운교, 백운교의 사교가 있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역시 대동강 사교중 통한교와 연우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따라서, 저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만든 통한교라는 다리 역시 적어도 패망후 (668년) 약 434년후까지 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청암리사(금강사)에서 머지 않은 대동강터에 통한교가 있었음을 유추할수 있어, 추후 발굴에도 큰 단서를 던져준다.
목탑의 기단 밖으로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흐르도록 냇돌(川石)을 깔은 수구(水溝)가 있고, 수구의 폭은 0.7m이며 탑의 동서남북 네 방향에는 냇돌을 계속 깔아서 보도(步道)를 만들었습니다. 보도의 폭은 약 2m 정도이며, 예전에 정릉사를 살펴볼때 이미 다룬 점과 같이 목탑을 중심으로 네방향의 금당으로 이어지는 길이 모두 자갈포장이 되어 있었음을 볼수 있다.
금이러한 보도가 탑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나 있는 형태(정릉사지의 예)
금강사터 발굴당시 사진 (아마도 일제시대 )
북한측 자료에 따르면 각 건물들은 목탑을 중심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는 기하학적 비례로 배치되었는데, 탑터 동서의 전당터는 1대 2의 장방형 평면으로 되었고, 뒤 건축군 가운데의 강당터 평면은 황금비례로 되어 있다. 또한 북쪽 금당터 남쪽면을 밑기단으로 하는 정3각형을 거꾸로 세우면 그 정점을 탑터의 중심점과 일치하고, 흥미로운 것은 탑터 중심점에서 중문터까지의 거리를 반경으로 하는 원을 그리면 그 원은 동, 서 전당터의 안쪽면, 금당터 계단의 남쪽면에 닿는다.
즉, 사찰의 평면이 3, 4, 8각형과 원등의 도형의 비례에 맞추어서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기본 단위척을 응용해야하는데, 금강사지도 중국자(한척)가 아닌 고구려자(고려척)으로 계측되었다고 보고 있다 .
(1986년 조선고고연구에 따르면, 중심의 8각탑은 내접반경이 고구려척 35자로, 전체 폭이 70자로 계획되었고 탑을 중심으로 하는 동서축, 남북축 방향의 건물사이 간격도 35자의 일정한 배수로 계획되었으며, 동.서 금당의 건물 가로.세로 비례는 1:2이고, 금당의 비례는 3:5 즉 1:1.7에 가까운 비례로 되어 있다라고 전한다). 매우 정밀하게 계획된 구조입니다.
아래의 가람배치도에 보이듯, 대금당은 목탑의 정북쪽에 위치하며, 탑기단에서 약 14.65미터 떨어져 있다. 동쪽과 서쪽에도 정확하게 두개의 금당이 위치한다. 대금당의 기단크기는 정면 32.47미터, 측면 19.18미터로 항상 그 접근성으로 쉽게 비교하게 되는 한국의 현존하는 최대목조건물 경복궁 근정전의 그것과 하다. (30 X 21).
그리고 좌우의 금당지 역시 큰 규모로 각각 정면 24.8미터, 측면13.33미터이다. 또한 남쪽에는 문이 있는데 이 남문의 규모역시 약 12미터에 달한다. 남문의 좌우로는 '회랑'터가 발굴되고 있는데, 아직 절의 전모를 알길이 없어, 과연 회랑이 어디까지 연결되는지는 미지수이다.
배치도를 보면 목탑의 거대규모를 유추할수 있다. 상상해보면 가람의 방문객입장에서 정면에서 볼때 팔각대목탑이 웅장하게 서있고, 탑정면을 10.4+ (좌우 약 5.2)= 16미터정도 했을때, 탑의 좌우로 대금당의 좌우측면이 각각 8미터정도씩 보였을 것아다. 그리고 그 좌우로는 회랑으로 이어지는 동서 금당의 측면이 보였을것이다
중국 응현사 팔각 9층목탑(남문과 목탑, 그리고 회랑이 보이는 모습-이런식의 정면모습이었을 듯하다
청암리사지 1 탑 3금당식 가람배치도와 팔각목탑 실측도
청암리사지 1 탑 3금당식 가람배치도-금당지의 실측기록과 탑과의 비래가 잘못그려진듯하다
일제시대 이후 본격적인 발굴조사 보고서가 나오지 않아 답답한데, 1939년 2차조사때, 이미 북금당지의 더 윗쪽, 그러니까 더 북쪽에서도 거대한 건물지가 발견된 바 있다. 아마도 대강당지가 아닐까 하는데 직접 터를 볼수 없으니 답답하군요. 삼국시대 고대사찰들의 경우 보통 대강당이 가장 큰 규모인지라 실측자료가 더욱 궁금하다.
또한, 이 (추정)강당지와 아래 금당들 사이에는 넓은 공간이 있고 회랑이 있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이 회랑 역시 사각형으로 정밀하게 짜여져 있었다고 한다 (참조-김정기, '고구려 정릉사지 및 토성리사지 발굴보고서개요와 고찰', 발해,고구려 연구). 이를 볼때도 역시 북측의 발굴이 30년대말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음과, 원래의 금강사의 규모가 어느정도였는지는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다.
한국고건축 기단과 기와의 시초
이 청암리사(금강사)에서는 수많은 고구려 기와편 (각종 수키와와 막새등)이 출토되었고, 여러 유구가 발견되는데, 역시 이중에서도 우리나라의 문화재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기단'과 '기와'라고 하고 있다. 즉, 삼국시대부터 기단양식이 도입되는데, 금강사지의 이러한 4-5세기식 기단은 현재 남아있는 고건축 기단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중 하나이다.
또한, 기와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한국 고대기와중에서도 초기에 해당하는 '귀면기와'들이 나와서, 기와연구에 중요한 단초를 던져주고 있기도 하다. 귀면기와뿐 아니라 백제의 부여 부소산 남면 향교밭에서 출토된 소형의 막새기와에는 복판팔엽연화문을 장식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청암리사의 기와를 그대로 전승한 것이다.
청암리사지 출토 귀면와(5세기)와 같은시기 귀면와
-현재 남한의 유금와당박물관 소재- 붉은 빛은 고구려 후기 기와)
뿐만 아니라 필자가 주목하는 중요한 유물이 한 점 더 있다. 이 곳에서 금동제작은방울〔金銅製小鈴〕과 금동제악천소상(金銅製樂天小像) 등 많은 금동제제품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 중 '금동제약천소상'이란 것이 만약 불상이라면 한국최초의 불상목록에 그 이름을 추가하게 되고, 다른 것을 다룬 금동상이라 할지라도 역시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는 중요한 문화재가 된다.
북한측 온라인정보나 보고서로 사진을 구할길이 없어, 그 모습을 알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참고로 같은 5세기경의 금동불상은 한국의 最古불상인, 뚝섬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1963년 7월 16일에 뚝섬도로공사장에서 발견된 것으로,539년 고구려 수도 냑양 동사에서 제작된 인현의불로 밝혀져, 1963년 말 국보 제119호로 지정된 ‘연가칠년명금동불입상(延嘉七年銘金銅佛立像)’이다. 아직까지 중국것인지 고구려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점차 한국의 불상이라고 하는 설이 힘을 얻는 모습이다.
이 불상은 중국 불상 중에서도 5호 16국 시대나 북위 초기 인도 간다라 불좌상을 수용하면서 유행한 불상들과 관련이 있다는 점 때문에 중국의 불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그 반면 민머리에 높은 육계, 도툼한 눈두덩, 통견에 브이자형 옷 주름,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인 선정인(禪定印)상, 사각대좌 양쪽에 있는 사자 등으로 미뤄볼 때 고구려의 불상으로 보는 의견도 강하다.
무엇보다 당대 5호16국의 금동불상의 크기는 대부분 20센티안팍인데 반해 이 불상은 50센티로 큰 것이 다르다. 또한 속이 꽉 찬 통주식이라는 점도 우리 나라 불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다. 만약 청암리사지의 금동소상이 불상이라면 현존하는 본 불상보다 약 100년이 앞서는 가장 오래된 불상이 된다.
뚝섬에서 발견된 고구려 불상(5세기말)- 현존 최고의 불상
아직까지도 1938년과 39년의 일본학자의 발굴보고서를 기반으로 그 면모를 추정할 뿐인 청암리사 (금강사). 같은 고구려 대찰인 정릉사와 달리 복원계획은 커녕 목탑을 제외하면 아직 모형조차 없는 이 거찰의 전모를 알수 있는 날이 앞당겨지길 기원한다.
저녁 노을과 중국 불궁사 응현목탑- 이런 분위기였을 것이다
4. 고구려 정릉사지 (定陵寺址)- 북한 국보문화유물 재 173호
정릉사는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에 위치하며, 북한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시조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이른바 동명왕릉을 옮겨올 때 함께 지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절이다. 이 절터는 평양시 중심에서 동남쪽으로 22km되는 무진리 왕릉동에 있다.
정릉사터 뒤 언덕에는 수백 년 자란 소나무들이 우거졌는데 이 숲 속에 (전)동명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그 뒤 멀리로는 제령산과 마장산이 병풍처럼 둘러서고 앞에는 넓은 벌이 펼쳐져 있어 풍치가 수려하고 아늑하다.
정릉사지는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에 있는 동명왕릉에서 남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산기슭에 있다. 이 사지를 정릉사지라 부르게 된 것은 이 유적에서 '정릉(定陵)', '능사(陵寺)' 라 새긴 토기편이 발견되었기 대문이다. 1974년 정릉사지에 대한 대규모의 발굴이 진행되어 그 면모가 알려지게 되었다.
정릉사지는 5개 구역으로 나뉘어지는데 이곳에서 확인된 건물사(建物寺)만 18개소였고 회낭사(廻廊寺)는 10개소나 되었다. 사지(寺址)의 남북길이는 132.8m, 동서길이는 223m이 총 대지면적은 3만㎡나 된다. 정릉사지는 금강사지(金剛寺址) 나 상오리 사지(上五里 寺址)와는 달리 정확한 대칭구조에서 벗어난 가람배치를 보여준다.
발굴조사 결과 노출된 유구(遺構)를 보면 남북 중심축선상에 팔각탑(八角塔)이 있고 이 탑의 동서에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인 동ㆍ서금당사 (東ㆍ西金堂寺)가 위치하고가 위치하고 북쪽에는 북금당사(北金堂寺)가 있으며 이 북금당지 북쪽으로 정면 13칸, 측면 4칸인 강당사(講堂寺)가 있다.
동서에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1칸의 종누사(鐘樓寺)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경누사(經樓寺)가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이는 금강사지(金剛寺址) 등에서도 볼 수 있는 고구려의 전형적인 1락(落) 3금당식(金堂式) 가남배치(伽藍配置)이다.
1탑 3금당 배치 형식을 보인다
정릉사지 배치도
정릉사터(왼쪽이 동명왕릉 ) -옆의 숲과 길과 비교하면 규모를 짐작해 볼수 있다
정릉사는 고구려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규모가 현재까지 밝혀진 고구려 사찰 가운데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짜임새도 웅장하다 (주: 알려진 전체 규모가 3만 평방 m)
현재까지 알려진 고구려의 최대사찰 정릉사이다. 372 년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은 사신과 순도(順道) 스님을 통해 불상과 경문을 고구려에 보내왔다. 3년 뒤인 375년 2월에 우리 나라의 역사상 첫 절인 초문사(肖門寺)가 세워지고 순도 스님이 이 절을 맡았다. 또한 이불란사(伊弗蘭寺)를 함께 지었는데 이는 동진(東晉)에서 온 스님 아도(阿道)가 맡았다. 이것이 고구려 더 나아가 한반도에서 불교의 시작이다.
그런데 초문사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을 보면 초문사가 성문사(省門寺)로표기되어 있는데 고구려왕이 순도와 사신을 감격적으로 맞이한 성문(省門)을 절로 만들었다고 한다. 초(肖)자와 성(省)자는 획 하나 차이가 나니옮겨 적는 과정에 오류가 있었던 모양인데, 아무튼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서 고구려 최초의 절은 관청을 고쳐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 처음에는 사당으로 출발해 능사로 승격되고 아울러 왕실의 별전이 부속건물로 세워졌으며 나중에는 다시 사찰로 환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주춧돌의 배열상태가 매우 복잡하고 아주 넓다고 한다).
아도가 고구려에서 신라에 들어가 처음 지은 절도 당시의 검소한 풍속에 따라 모옥(茅屋), 즉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절과 궁궐은 기와집으로 짓는 것이 상례지만 초기에는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사찰로서 온전한 모습을 갖춘 때는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 위해 393년에 건립한 아홉개의 절(九寺)부터일 것이다. 평양에 있는 정릉사(定陵寺)는 아홉 개 절(고구려 평양 9사찰) 중의하나이가나 아니면 5세기 초에 세운 절로 추정된다.
북한의 학자들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의 능을 평양으로 옮겼고 그 능을 지키기 위해 이 절을 세운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능을 지키는 절이라는 의미의 ‘정릉(定陵)’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이 절터에서 출토되어 그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주: 정릉사는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에 위치하며, 이 절터는 평양시 중심에서 동남쪽으로 22km되는 무진리 왕릉동에 있다. 정릉사터 뒤 언덕에는 수백 년 자란 소나무들이 우거졌는데, 이 숲 속에 (전)동명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그 뒤 멀리로는 제령산과 마장산이 병풍처럼 둘러서고 앞에는 넓은 벌이 펼쳐져 있어 풍치가 수려하고 아늑하다고 한다).
알려진 전체 규모가 3만 평방미터에 이른다- 중문안쪽 남북 132.8m, 동서 223m (참조: 황룡사 남북282미터, 동서288미터), 즉 위의 그림에서 볼수 있듯, 앞뒤가 아닌 정면에서 가로로 좍 퍼진 모습이다)
북한측의 주장은 이렇다: 황룡사는 부지면적이 1만4,210m2로서 정릉사의 절반도 못된다 주장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황룡사는 담장안만 8만평방미터지요. 미륵사는 더 크고. 정릉사의 발굴여하에 따라 최대 비슷한 규모로 볼수도 있겠지만 북한측 주장은 잘못이다. 정릉사는 중문 안 부분만이 약 3만m2이고, 거기에 중문밖에 있는 남대문까지의 구역을 가산하면 3만 7,000여m2이다.
잘 살펴보면 가운데 구역에서 고구려 절의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중앙에 남북방향으로 문, 탑과 금당, 그리고 강당이 촘촘히 줄지어 있다. 탑은 부처님 사리를 모신 곳이고 금당(金堂)은 몸에서 황금빛이 나는금인(金人), 즉 부처님을 모신 건물을 가리킨다. 그런데 가운데 8각형 거대 목탑을 세 채의 금당이 북·동·서쪽 방향에서 둘러싸고 있다. 마치 금당들이탑을 호위하고 있는 모습인데 매우 인상적인 고구려 사찰의 기본배치이다.
이러한 배치를 학자들은 ‘1탑 3금당식’이라고 부른다. 1탑 3금당식 배치는 고구려 사찰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구조인 점을 염두에 둔다면, 고구려시대에는 불상신앙보다 탑신앙을 좀더 중시하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앙의 구역을 중심으로 몇 개의 건물군들이 좌우로 날개를 펴고 있고, 좌우의 구역에 있는 건물들은 후대에 세워진 것이다.
정릉사지도 백제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일본 아스카사의 1탑 3금당 구조와 같았다
남북 132.8m, 동서 223m, 면적 29,614.4㎡. 최근 왕릉동의 동명왕릉(東明王陵) 앞에서 드러난 절터로 5세기 초엽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확인된 건물터는 18개이고, 회랑(回廊)터는 10개이다.절터 안에 팔각탑터를 중심으로 18채의 집터가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회랑이 사방을 둘러쌌다. 중문, 탑, 금당, 강당 등은 남북중심축상에 놓였고, 그 밖의 건물들은 탑의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전체 절터는 회랑에 의하여 5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진다. 정릉사의 이와 같은 평면배치는 금강사와 같은 것으로 고구려의 1탑3금당식 절배치 형식을 보여 준다. 팔각탑터는 금강사의 탑터와 같이 팔각형의 나무탑을 세웠던 자리인데 그 돌기 단 너비는 20.4n이며, 8각형 한 변의 길이는 약 8.4m이다. (주: 황룡사 9층목탑의 한변 넓이가 29미터인데, 8각의 한변크기가 8미터가 넘는다면 거대한 규모의 목탑임을 알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대강 60-70미터의 거대한 높이로 추정된다 (미륵사 9층목탑과 비슷).하나의 탑을 중심으로 하여 세 금당을 배치한 이런 평면배치양식은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 평양일대에서 하나의 정형으로 인식되며, 고구려계 동족국가들과 바다 건너 일본의 절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중심구역의 맨 뒤 산 밑에 있는 집터는 동서 16m, 남북 11.8m로서 그리 크지 않지만 집 둘레에 두 줄로 기둥을 세워 회랑을 두르고 집과 회랑 사이 통로는 벽돌로 포장하였다. 주춧돌은 네모나게 혹은 둥글게 다듬어 썼고 암반에 주추를 돋친 것도 있다. 집안에는 외곬의 온돌을 놓았다. 집과 그 뒤 언덕 사이의 돌로 정교하게 쌓은 도랑에는 돌다리를 놓아 서쪽의 정원을 거쳐 왕릉과 통하게 되어 있다.
이밖에도 이 절터에는 각 구역에 돌 혹은 벽돌로 만든 여러 가지 시설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중심구역 서쪽의 2, 4 구역과 맨 동쪽의 5구역 집터들에 있는 외고래의 구들과 기와조각들로 쌓아 만든 굴뚝개자리들은 고구려의 독특한 온돌시설을 보여 주고 있다.
정릉사터에서 나온 각종 기와와 벽돌, 질그릇들은 고구려의 요업기술과 공예술이 발전되었던 사실과 당시 사람들의 생활풍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 가운데는 "정릉(定陵)", "능사(陵寺)"라는 글자를 새긴 그릇조각들이 있다. 이 유물들은 여기에 있던 절이 정릉사였음을 밝혀 준다.
고구려 건축가들과 백성들의 민족적 기상과 우수한 재능이 깃든 정릉사는 당시 건축기술 발전의 성과들을 보여줌으로써 고구려 건축유산 연구에서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같은 민족의 나라인 백제와 신라는 물론, 일본의 건축 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 사실을 밝혀 주는 자료이다.
이 밖에도 더 많은 건물터와 회랑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미 파괴되어 원래의 모습을 전혀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건물터 외에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구조물 3개가 드러났는데, 그 중 2개는 서구와 동구의 남쪽에 대칭되게 벽돌로 만든 원형의 구조물이고, 나머지 1개는 서구 북쪽 회랑 밖에 정방형으로 된 돌기초 시설물이다.
절터의 평면배치는 크게 5구역으로 되어 있다. 이 절터의 중심부를 이루는 것은 제1구역이다. 여기에는 8각 건물터를 비롯하여 9개의 건물터와 그것을 돌려막은 회랑과 회랑문이 있다. 그 중 8각 건물터는 이 절터의 중심에 놓여 있는 8각 탑터로서 탑 바닥의 단(壇) 한 변의 길이는 20.4m이다.
이 사찰은 8각탑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하고 회랑으로 둘러막은 고구려의 고유한 사찰 형식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불전 배치는 497년(문자왕 6)에 지은 고구려의 금강사(金剛寺)터에서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일본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아스카사(飛鳥寺)의 건물배치도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본이 고구려문화의 영향을 받은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절터에서는 기와와 질그릇 조각들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寺’, ‘陵寺’라고 새겨진 것도 몇 개 발견되었다. 이는 정릉사가 동명왕무덤을 위하여 지은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북한측의 실측결과
1구역 8각 목탑터- 8각 한변의길이가 8.4m 로 굉장한 규모이다
주춧돌은 네모나게 혹은 둥글게 다듬어 썼고 암반에 주춧돌 돋친 것도 있다
8각탑지는 2중기단을 가졌다. 탑지는 기초부분과 물받이(배수구) 시설 부분으로 구분된다. 기초부분은 2m 깊이로 돌기초를 하였고, 물받이 시설은 기초부분에서 0.8m 밖에 0.6m 너비로 돌을 처리하였다. 물받이 시설 부분의 안둘레에 절석切石을 세워서 배열하였다.
절석은 아랫기단의 보호시설이며, 기초부분은 윗기단, 즉 기본 기단 부분이다. 이 2단 기단과 기단 밑의 물받이 시설, 아랫기단 둘레의 절석 처리 등은 금강사지, 상오리사지, 토성리사지의 탑지와 금당지에서 보였다. 고구려에서 목탑지가 발견된 곳은 정릉사지 외에 금강사지, 상오리사지, 토성리 사지밖에 없다.
회랑사이의 벽돌 포장길 일부 흔적
8각탑의 남쪽 부분에 일정한 너비의 자갈 포장이 중문을 향하여 남아 있다. : 금강사지, 상오리 사지 등에서 탑의 동서남북 4면에 중문과 동금당, 서금당, 중금당과 연결되는 통로에 자갈 포장을 한 것과 같다
북한학계에서 1974년 대규모 발굴후 정릉사지에 대한 개요발표를 보면: 5구역으로 구분된다
1구역 : 8각건물지를 비롯한 10개 건물지와 회랑, 회랑안의 1개 회랑문 이 있는 중심구역.
남북으로 길고 다시 회강에 의해 4개구로 나눈다.
A구 : 중문, 탑지, 탑지 좌우에 건물지
B구 : A구에서 회랑건너 북쪽, 중앙에 건물지, 그 좌우에 남향 건물지.
C구 : B구에서 회랑건너 북쪽, 대규모건물지, 그 동쪽에 정방형 건물지
D구 : C구의 정방형 건물지 묵쪽, C구와의 사이에 회랑이 동서로 놓여 있다
2구역 : 제1구역 서쪽. 남쪽의 E구와 북쪽의 F구로 나눔.
3구역 : 제2구역 회랑건너 서쪽. 북쪽으로 치우쳐 건물지 일부 발견. 기타부분은 훼손 심해 아직 건물지 나
타나지 않음.
4구역 : 제1구역 동쪽. 1구역의 동회랑에 연접. 남쪽부분 심하게 훼손, 건물지 나타나지 않음. 4-5구역 사이
회랑지뿐. 원형의 전돌 시설물만이 개소에서 확인되었음.
5구역 : 남쪽 부분 훼손(회랑지 남쪽으로는 지형이 얕은 관계로 건물지들이 유실된듯). 북쪽에 건물지, 그 앞
남쪽에 동서방향 회랑지뿐.
특징 : 중심곽 기준 동서 각각 2구역씩 5구역 남향 (동서로 긴 대지), 건물지 14, 회랑지 14. 8,974평. 다른 고구려 사지들과 달리 탑 후방의 건물들과 탑구역을 분리시키는 회랑이 존재한다. 축에 대한 비대칭성이 유일하게 나타나며, 주간 크기도 부정확한데, 한번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서 그런 듯하다.)
북한학계의 발표중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을 발췌해보면, 정릉사 탑지 뒤에는 동서방향의 회랑지 2개소가 발견되었는데 동명왕릉의 사당으로 창건되었을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따라서 원래는 북쪽에 동서 두 회랑이 있는 구조였으마 동명왕의 원찰로 개건되면서 남쪽에 목탑이 추가로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릉사건축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 절터의 중심북쪽에 특별히 공을 들여 지었던 고급건물터가 있다는 것이다. 동서 16m, 남북 11.8m 되는 그리 크지 않은 집자리이지만 집의 둘레는 다 회랑으로 막혔으며 회랑과 건물 사이의길은 전부 벽돌로 포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이 절터에는 각 구역에 돌 혹은 벽돌로 만든 여러 가지 시설들이 있다. 그리고 집자리 안에는 외곬으로 된 온돌시설이 있었고, 그 가운데서도 중신구역 서쪽의 2,4 구역과 맨 동쪽의 5구역 집처들에 있는 괴고래의 구글과 기와조각들로 쌓아 만든 굴뚝재자리들은 고구려의 독특한 온돌시설을 보여준다 .
이 건물의 주추돌은 화강암을 4각형으로 잘 다듬어서 만든것인데 이것은 다른 건물의 주추돌이 원형인 것과 구별된다. 이 건물지에는 서쪽회랑과 북쪽회랑의 가운데에 도랑을 건너 왕릉으로 올라갈 수 있게 만든 것이 분명하다고 보고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이 건물지가 이러한 여러가지 점으로 보아 왕의 숙소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명왕릉이 룡산에 있으며 505년에 문자명왕은 룡산에 사냥을 갔다가 5일만에 돌아왔다고 한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19년, 권19 문자명왕 15년). 학계에서는 이 건물자리가 문자명왕등이 사용했던 처소로 보고 있다. 또한 주목할만한 결과로 승방지 서쪽에 자연석의 돌산 정원흔적이 있다는 점등이다.
정릉사 부분 복원 모형
사찰의 확실한 발굴결과를 토대로 가운데 금당부분만을 제작한 일부복원 모형이다.
정릉사는 고구려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동명왕릉을 함께 옮기고, 그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원찰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의 불교유적으로는 1939년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대성구역 청암리사지(현 금강사지)를 비롯하여, 이 곳 역포구역의 정릉사지, 상오리사지, 원오리사지, 토성리사지, 영명사지, 평천리사지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정릉사지는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한 것이다.
정릉사는 1973년~1975년 사이 김일성대학 등이 주관하여 동명왕릉을 비롯한 일대의 무덤과 유구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사지가 발견되어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절터가 정릉사지로 밝혀진 것은 발굴과정에서 “정릉(定陵)”, “능사(陵寺)”라는 문자가 새겨진 와편이 발견되면서 정릉사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
고구려 사원의 양식이 1탑 3금당식이라는 주장은 1990년 북한의 역사학자 장상렬의『고층나무탑을 기본으로 1탑3금당식 사원 건축형식의 역사적기원』이라는 논문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그는 그동안 발굴된 몇 개의 고구려 사지들을 예로 들며 5세기 전반기에 고구려 사원은 1탑3금당식으로 정형화되었다고 주장하고, 그 대표적 사원이 정릉사이며, 경주의 황룡사와 일본의 비조사(飛鳥寺) 등도 영향을 끼쳤다고 하였다.
복원된 정릉사 원경
복원된 정릉사 원경
복원된 정릉사
고구려의 고유한 절 건축 양식으로 복원된 정릉사는 총 3만여 평의 부지에 8각7층석탑(국보 문화유물 제184호)을 중심으로 중금당과 동금당, 서금당이 있고, 중문과 회랑이 그것을 둘러 싼 1탑 3금당식의 절이다. 매 건물의 짜임새와 두공, 단청은 고구려무덤벽화에 기초하여 고구려 양식을 그대로 살렸다.
중금당인 보광전은 정릉사 전각 가운데 가장 큰 15m의 증층으로 석가여래좌상을 본존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입상이 협시로 안치되었다. 또한 동금당인 용화전에는 미륵삼존상이, 서금당인 극락전에는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관세음보살상과 지장보살입상이 협시보살로 봉안되어 있다.
대사찰은 최근에 매우 일부만 복원되었다. 안타깝게도 사찰의 기본 골격을 잡아주는 8각7층목탑을 작은 석탑으로 대치했다. 규모도 작다. 임시방편으로 세워둔 탑같다. 고증을 거치고 최대한 추정복원을 통해 웅장한 8각 목탑을 세워야할 것 같다.
보광전
하지만, 복원된 보광전내부나 외부장식을 보면 당대의 문양을 그래도 많이 반영한듯 하다 (고려/조선식 단청은 안보인다). 직접 가보신분들의 수기를 보면 불상도 고구려양식으로 아스카풍을 많이 살렸다고 한다.
극락전 보광전 용화전의 3금당
보광전과 8각목탑 세워진 팔각7층석탑
보광전 내부
보광전 내부의 석가여래상 높이 4.2m
극릭잔
극락전 내부의 불상
용화전
용화전 내부의 불상
현재 일부 복원된 정릉사의 세 금당에는 부처들과 각각의 불세계를 주재하는 부처들에 해당한 탱화가 그려져 있다. 보광전은 겉은 2층이지만 안은 하나로 높이 틔운 건물이며 안쪽 기둥들이 그대로 2층 지붕을 떠받들고 있다. 가운데에 석가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좌우에 협시상들인 문수보살입상(왼쪽)과 보현보살입상(오른쪽)이 있다.
극락전에는 서쪽에 있는 극락세계를 주재한다는 아미타여래입상과 협시상들인 관음보살입상(왼쪽), 지장보살입상(오른쪽)이 있다. 용화전에는 가운데에 석가의 구제에서 빠진 사람들을 구한다는 이른바 제2의 석가인 미륵불이 서있다.
정릉사의 중심에 있는 8각7층석탑은 본래 같은 형태의 목탑이 있던 자리에 조성한 것인데, 그 돌기단의 넓이는 20.4m, 높이는 12,5m이고 8각형 1변의 길이는 약 1,4m정도이다. 이 석탑은 고구려 탑의 특징을 살려 웅장하고 간소하며, 건물들과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안정감이 있다.
정릉사는 현재의 가람 터 외에도 총 4개의 유구가 더 있는데, 중심구역 뒤쪽에 있는 절터는 동서 16m, 남북11,8m로 서쪽의 정원을 거쳐 왕릉으로 향하게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서쪽과 동쪽의 절터들에는 외고래 구들과 기와조각들로 쌓아 만든 굴뚝자리들은 고구려 시기의 독특한 온돌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릉사 뒤편 우물 (직경 1.2 m)
장방형의 넓적한 화강석으로 이를 꽉 맞춰 정8각형으로 세운 우물과 우물가에 넓게 깔아놓은 두툼한 고구려 전돌들은 고구려의 정서가 어떤 것인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우물 안엔 상기도 샘이 솟고 있다.
복원된 우물에서 나온 동물뼈
최근의 발굴결과를 보면 정릉사의 뒤쪽에서 최근에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고구려 우물이 발견되었다. 이 우물에서는 투구, 방패, 보습을 비롯한 5종의 철제품과 정릉사의 머리글자인 '정'자가 새겨진 자배기를 비롯한 질그릇들, 그리고 범, 사슴, 노루, 너구리를 비롯한 11종의 짐승뼈 등 모두 35종에 1,130점이나 되는 유물이 나왔다. 이 우물과 유물들은 정릉사의 성격을 밝히는데 도움을 줄 흥미로운 자료들이라고 한다.
고구려 사찰의 독특한 설계양식과 척도
정릉사 건축계획시 8각탑의 기준크기는 기단너비이다. 일반적으로 탑의 기단 너비가 탑신의 기준이 되면서 건축전체의 평면 및 입면구성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었다. 그 기준 크기에 따라서 정릉사지 제1구역의 평면은 동서의 너비가 약 4개 기준 크기가 되고(4 module), 남북 길이는 6개기준크기로 처리하였다.
즉, 정릉사지 평면은 4대6의 비례로 구획 분할하였다. 또한 남북 중심축의 건물 사이도 1개 기준크기의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탑과 중문, 탑과 중금당, 중금당과 강당의 사이를 모두 1개 기준크기로 처리하였다. 서금당은 1과 4분의 1 기준크기로 놓았다.
건물터의 각 부분 크기는 기준 크기의 10분의 1크기에 6,9,12,15등의 일정한 배수로 처리하였다. 기준 크기는 35cm정도 크기의 고구려자(고려척)에 기초하였다. 기준 크기인 탑의 기단 너비 17.6m는 50자이며, 개별 건물들의 평면에 나타난 10분의 1기준 크기는 5자이다.
정릉사 건축시에는 5자가 기본단위자이며, 그것을 다시 10배의 크기인 50자를 큰 단위자로 사용하였다. 정릉사지 남쪽 회랑의 두 끝지점에서 그것을 밑변으로 하는 정삼각형을 그리면 그 정점은 중금당의 동서 중심선에 닿으며 탑의 동서 중심선의 두 끝지점 정점은 강당의 중심점에 이른다. 이것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건축구성수법이다
현재 복원된 정릉사는 가장 핵심적인 공간, 탑을 중심으로 한 기본 골격만 세운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가람배치) 복원된 정릉사에서는 중앙의 8각층탑 목조건축으로 세우지 않고 석탑으로 대치하는 바람에 마스터 플랜의 기본축이 흔들려 버렸다.
상오리사지
▲ 상오리 사지 상오리 사지는 평양시 대동군 상오리에 위치하며 청암리 금강산지(金剛寺址)로 부터 남동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1938년 발굴조사에 의하여 한 변이 약 8.2m 되는 팔각건물(八角建物)의 기단(基壇)이 발견되었는데 기단 외연(外緣)은 직경 25m 내외의 냇돌을 써서 4열로 가지런히 깔았고 금강사지(金剛寺址)와 마찬가지로 암반을 쪼아 팔각형 기초(基礎)를 만든 후 흙을 다져 기단을 이루었음이 확인되었다.
기단 안쪽에는 깬돌이 깔린 방형이 구획이 있었으며 기단 바깥 90m 위치에서 낙수(落水) 자국을 발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