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고적도보』로 보는 삼국시대 고분(古墳) [신라,백제,가야]
경주 황남동 검총 뒷면 및 (전) 미추왕릉 원경
황남동 검총 정면
경주 황남동 검총 굴착 서측면
경주 황남동 검총 굴착 서측면 및 북측면
경주 황남동 검총 굴착 북측면 및 동측면
경주 건천읍 금척리 고분([慶州 金尺里 古墳)군
경주에서 서악리를 지나 대구로 나가는 경주 서측 출구의 국도변 좌우에 분포해 있는 대형분들이 금척리 고분군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111-2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이 고분군은 경주 중심부의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 황오동, 인왕동, 교동 일대에 넓게 분포하는 고분군을 제외하면 경주 주변 외곽에서는 고신라시대의 대형봉토분들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고분군이다. 일제침략기의 조사에서는 모두 52기의 봉토분이 확인되었으나 현재는 32기 정도만 확인되고 있다.
고분들이 분포한 곳은 북서의 아화에서 경주 분지의 서쪽 입구에까지 연결되는 건천(乾川)에 의해 형성된 서북에서 동남으로 이어지는 작은 분지 형태의 평야 가운데 약간 남동으로 치우친 지점에 해당된다.
남아 있는 봉토분들은 대부분 원형의 단독분으로 보이나 몇 기의 표형분(瓢形墳)도 확인된다. 또 많은 고분의 봉토 윗부분에서 함몰된 형상을 찾을 수 있어 대부분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봉토는 직경 25m 이상의 크기를 가진 것들도 있어 신라의 지방 고총들과 유사한 크기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봉토분들 가운데 1952년에 3기(30호분∼32호분)의 고분이 발굴된 바 있고, 1981년에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의해 상수도 부설공사 중 확인된 고분군 보호구역의 남쪽 한계선 외측의 8기가 조사되었다. 속전에 의하면 “이 고분들 가운데 하나에는 박혁거세(朴赫居世)의 금자(金尺)가 묻혀 있어 이곳이 금척리라고 명명되었다” 하는 것으로 보아 고신라시대 초기부터 이곳에 고분군이 조영되기 시작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조사된 고분들은 돌무지덧널무덤이 주류를 이루며 그밖에 덧널무덤(木槨墓), 독널무덤(甕棺墓), 돌덧널무덤(石槨墓) 등도 혼재하였다. 그러나 봉토가 남아 있는 대형분은 모두 돌무지덧널무덤이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곡옥장식목걸이(曲玉附頸飾), 은제허리띠(銀製銙帶) 등이 있는데, 이러한 조합상은 신라 지방 고총들에서 출토되는 양상과 유사하다.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고분군이 조성된 중심 연대는 5세기∼6세기중반으로 추정된다.
고분군의 남측에는 모량(牟梁)이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어, 금척리 고분군을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 귀족들의 무덤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 모량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24대 진흥왕의 왕비인 지소부인(知召夫人) 또는 식도부인 박씨(息道夫人 朴氏)의 출신지로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신라의 중앙정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던 집단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고분의 크기, 묘제, 입지 등이 합치된다는 것이다. 비록 규모에 있어서는 경주 평지의 최대형 분들보다 작으나 대형인 점, 고분들이 위치한 곳이 평지이고 발굴조사된 고분들의 경우 경주 중심부의 평지에 조성된 것과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인 점, 그리고 출토유물의 양식에 있어서도 별 차등성이 인정되지 않는 점 등이 그것이다.
또 근래에 조사된 부근의 사라리 유적(舍羅里 遺蹟)에서 기원 후 1세기 무렵의 대형 널무덤이 조사되었고, 여기에서는 많은 철기와 청동제품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신라 성장에 일익을 담당했던 집단의 소재지였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고분군 일대 129,643㎡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4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척리 고분 [慶州 金尺里 古墳] (고고학사전, 2001. 12., 국립문화재연구소)
(전) 김수로왕릉
경주읍 남고분군
경주 보문동 금환총(복구후)
능산리 고분군 소재지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전경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상총 우측면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상총 선도 및 현실 정부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상총 현실 입구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상총 발견 보관 장식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상총 현실 입구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상총 현실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상총 현실 천정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상총 현실 오벽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하총 우측면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하총 우측면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하총 선도 입구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하총 현실 입구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서하총 현실 (선도에서 본)
서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서하총 현실 입구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서하총 현실 오벽
능산리 할석총 현실 오벽
능산리 노출 절석 석곽
능산리 노출 절석 석곽
능산리 횡광
능산리 횡광 오벽 및 천정
능산리 (전) 백제 왕릉 중 하총 발견 정
울주 동천리[蔚州 東川里] 와종
마을 이름을 따서 양동유적이라고도 한다. 1984년 부산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이 발굴하였다. 이 유적에서는 민무늬[無文]토기시대 집터[住居址] 5동, 덧널무덤 9기,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23기, 소형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 1기, 독무덤[甕棺墳] 1기,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 1기, 널무덤[土壙墓] 1기, 고려시대 유구 1기 등이 발견되었다.
민무늬토기시대 집터는 직사각형이며 집터 내부에 조그만 구덩을 파서 화덕자리[爐址]로 사용했다. 그 밖에 집터 벽면을 따라서 도랑[排水溝]을 팠다. 유물로는 구멍무늬[孔文]토기, 붉은간토기[紅陶], 민무늬토기바닥[底部], 잡이[把手]부 등이 출토되었다. 그 연대는 전기 민무늬토기와 늦은 시기의 잡이부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민무늬토기 전기의 늦은 시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유적의 중심묘제인 덧널무덤은 유적의 중심부인 구릉의 정상에 분포하고 있다. 이 양상은 구릉의 정상부에 가장 이른 것이 축조되고, 차차 아래로 내려오면서 무덤이 만들어지는 경남지역 삼국시대 고분의 특징이다. 덧널무덤은 무덤구덩이[墓壙]와 무덤덧널[墓槨]이 세장하고 양곽이 나란히 배치된 경주 구정동형과 비슷한 형태와,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낙동강 하류 유역의 김해 예안리형과 비슷한 묘제의 두 형식이 함께 존재한다. 연대는 4세기로 추정된다.
덧널무덤 이후에 등장하는 돌무지덧널무덤은 여러널식[多槨式]과 외널식[單槨式]으로 나뉘는데, 전자의 경우는 소형이며 후자는 대형이다. 그 연대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대에 걸친 것으로 생각된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일반적으로 경주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해 있는데, 동천리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되어서 돌무지덧널무덤이 울주 지역까지도 쓰여졌음을 보여준다. 돌무지덧널무덤에서는 토기 ·철제 무기류 등이 발견되었다. 이 토기들은 경주와 낙동강 하류의 중간지대의 토기 편년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앞트기식돌방무덤은 6세기 말~7세기 전반에 걸치는 것으로, 동일 지역에서 돌무지덧널무덤과 앞트기식돌방무덤이 공존한다는 것은 신라 지역에서 돌무지덧널무덤이 6세기 중엽 이후 급격히 쇠퇴하는 양상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울주 동천리 유적은 경주 지역에 중점적으로 분포하는 돌무지덧널무덤이 확인되어서 돌무지덧널무덤의 타지역 이동과정과 그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그곳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이 지역 삼국시대 토기 편년에 좋은 자료가 된다.
(전) 미추왕릉
함안 백사리 고분군
경주 보문동 부부총(복구후)
경주 보문동 부부총 부묘 현실
경주 보문동 부부총 부묘 단면
경주 보문동 부부총 부묘 부장 도기 출토 상태
안변 상세포동(上細浦洞 ) 고분군 - 함남 안변 위약면
안변 상세포동(上細浦洞 ) 고분군 일부- 함남 안변 위약면
안변 상세포동(上細浦洞 )개배총(蓋杯塚 )-함남 안변 위약면
안변 상세포동(上細浦洞 )개배총(蓋杯塚 )현실 내 광경-함남 안변 위약면
안변 상세포동 고분군 개배총 실측도
안변 상세포동 부부총 정면
안변 상세포동 부부총 현실 내부 광경
안변 상세포동 부부총 현실 내부 광경
안변 상세포동 서총
안변 상세포동 서총 현실
안변 상세포동 고분군(安邊上細浦洞古墳群)
안변 상세포동 고분군 분포도-삼국시대의 고분군. 구릉지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부부총, 개배총, 서총 등 3기가 조사되었다. 이들은 1910년대에 조사된 고분들이다
함경남도(현재 북한의 강원도) 안변군 신고산면 상세포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고분군. 구릉지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이 중 부부총(夫婦塚)ㆍ개배총(蓋杯塚)ㆍ서총(西塚) 등 3기가 1910년대에 조사되었다. 부부총은 3면을 자연석으로 쌓아 장방형의 석실을 구축한 묘실이다. 길이 3.61m, 너비 1.52m, 높이 1.52m로 서북쪽은 절반만 돌로 쌓고, 그 위는 입구로 구성하였다.
묘실인 석실 내는 동남벽과 서남벽에 잇대어 높이 약 1m 정도의 관대(棺臺)를 자연석으로 석축하였다. 관대에는 부부를 안장하고 있어 유해의 인골 일부가 발견되었다. 관대는 동북쪽과 서북쪽으로는 공간으로 되어 있고, 동북쪽 공간에서는 토기 2개가 부장되어 있었다.
개배총도 앞의 부부총과 같이 거의 같은 규모에 같은 형태로 축조된 석실고분이다. 석실 내부에 역시 관대를 구축하였다. 뚜껑접시[蓋盃]의 토기가 출토되어 ‘개배총’이라고 한 것 같다.
서총은 고분군이 분포된 구릉지대에서 가장 서쪽으로 위치해 있어 ‘서총’이라고 하였다. 묘실은 길이 3.66m, 너비 1.79m, 높이 1.82m의 장방형으로 축조된 석실이다.
관대시설은 없고 묘상(墓床)은 땅바닥 그대로이다. 출토유물은 토기류가 약간 출토되었는데, 특히 두드림무늬[打捺文]가 새겨진 환저단경호(丸底短頸壺) 2개가 주목된다.
이들 부부총ㆍ개배총ㆍ서총 등은 석실분의 형식으로 관대까지 특설되어 있어 축조연대는 뒤로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고분의 구조와 양식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대체로 약간의 토기류가 부장, 출토되고 있을 뿐이다. 이들 토기류의 양식은 신라토기의 양식에 가까우며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 상세포동고분을 옥저시대 것으로 보기도 하나, 이는 잘못이다. 이들 고분문화는 고구려문화양식과 신라문화양식이 합류된 성격으로 보아 그 연대는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변상세포동고분군 [安邊上細浦洞古墳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경주 서악리 석침총 부근 고분군
경주 서악리 석침총 서면
경주 서악리 석침총 현실
선덕왕릉
고령 주산성과 지산동 고분군
고령 주산 남방 고분군
고령 주산동 남산 복고분석곽
수정봉 및 옥봉 고분 산재 광경
진주 수정봉 (晋州 水精峰)제 3호 고분 -경남 지주시 옥봉남동
진주 수정봉 (晋州 水精峰)제 2호 고분 원경-경남 지주시 옥봉남동
진주 수정봉 (晋州 水精峰)제 2호 고분 근경-경남 지주시 옥봉남동
진주 수정봉 (晋州 水精峰)제 2호 고분 현실 내 광경-경남 지주시 옥봉남동
진주 수정봉 (晋州 水精峰)제 3호 고분 현실 내 광경-경남 지주시 옥봉남동
진주 옥봉 제 7호고분
진수 수정봉.옥봉 고분군
경상남도(慶尙南道) 진주시(晋州市) 옥봉남동(玉峰南洞)에 소재한 고분군이다. 진주시내를 가로질러 곡류하는 남강 북안에 2개의 소구릉이 합쳐져 하나의 독립구릉을 이룬 능선 정상부를 따라 7기의 봉토분이 나란히 분포하는데 이를 수정봉·옥봉 고분군이라고 부른다.
이 고분군은 이미 1910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으나 정식보고서는 나오지 않고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고분에 대한 간단한 실측도와 함께 유적·유물의 사진 및 소략한 설명이 실려 있을 뿐이다.
수정봉ㆍ옥봉고분 7호횡혈식 석실구조 및 출토유물
구릉 정상부를 따라 분포하는 7-8기의 고분 중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수정봉(2개의 구릉 중 북서쪽 구릉) 2호분과 3호분, 옥봉 7호분 등 3개의 봉토분이 1910년 발굴 당시에 조사되었고 유물도 많이 수습되었다. 발굴조사자의 간단한 기록과 실측도면에 의하면 수정봉 2·3호분은 중앙에 널길(羨道)이 나 있는 굴식돌방(橫穴式石室)이다.
이 두 고분의 매장시설은 깬돌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축조된 중앙널길식(中央羨道式)으로 규모상으로도 서로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수정봉 3호분의 경우 널방(玄室)은 길이, 너비가 5.3×1.8m정도의 장방형(長方形) 평면에 높이는 2.3m 가량 된다.
긴 벽을 위로 갈수록 안으로 경사지게 쌓아 널방 상부의 폭을 좁힌 후 판석을 가로질러 천장을 한 터널형에 가깝다. 널길(羨道)의 전체 길이는 알 수 없지만 널방 남벽 가운데에 폭 1.0m 정도로 축조되었다. 이에 비해 옥봉 7호분의 경우 실측도와 사진, 혹은 서술내용 등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서 그 구조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세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여러 점의 토기류, 발걸이(鐙子) 및 사행상철기(蛇行狀鐵器) 등의 마구류, 널못(棺釘)과 널고리, 기타 농공구와 무기를 포함한 철기류 등이 있다. 토기류는 ‘대가야식(大伽耶式)’이라고 할 만큼 고령지역의 토기와 닮아 있지만, 일부 토기에는 백제지역의 영향도 보일 만큼 특이한 면을 보이며, 그 중 그릇받침은 장식성이 강한 특징적인 유물이다.
토기양식의 특징으로 보는 한 이들 3기의 고분은 6세기 전반에서 중엽에 걸치는 시기로 연대가 추정된다. 사행상철기는 최근 가야지역에서 출토 예가 늘어나는 편으로, 말꼬리부분을 장식하는 일종의 마구류에 해당되고, 출토 철기류 중에는 ‘U’자형 삽날이 포함되어 있다.
용기류 중에 특이한 것은 보주형(寶珠形) 손잡이가 달린 금동제뚜껑바리인데 탁잔형 토기와 함께 백제적인 요소로 주목되고 있다. 수정봉·옥봉 고분군의 양상에는 터널형의 굴식돌방의 구조 자체와 함께 백제적인 요소들이 비교적 많이 보인다.
이 고분들에 보이는 백제적인 요소는 그 연대가 가야 멸망기인 6세기 전중엽에 해당됨을 고려해 볼 때, 당시 이 지역으로 백제의 세력이 진출해 왔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지 않는가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정봉·옥봉 고분 [晋州 水精峰·玉峰 古墳] (고고학사전, 2001. 12., 국립문화재연구소)
익산 왕묘리 쌍릉 북총(대왕묘)
익산 왕묘리 쌍릉 남총(소왕묘)
충숙왕(忠肅王) 재위 16년(1329) 여름 3월에 발생한 금마군(金馬郡) 호강왕(虎康王) 무덤 도굴이 대규모로 이뤄졌고, 이 호강왕릉이 실은 백제 무왕의 부부능으로 통하는 지금의 익산 쌍릉이다.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는쌍릉 두 고분은 백제의 왕족 공동묘지로 간주되는 능산리 석실분의 그것들과 같은 양식임을 확인했다. 이런 무덤을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라 한다. 팔봉면(八峯面) 석왕리(石旺里)와 신왕리(新旺里)에 있다. 구릉 상에 남북으로 마주보거니와 북쪽 것을 대왕묘라 하고, 남쪽 것을 소왕묘라 부른다.
대왕묘는 봉분이 직경 30m에 높이 6m로 추정되고 내부 석실은 전체 길이 498㎝에 현실(무덤방)은 길이 380㎝에 너비 178㎝, 높이 227㎝이며, 관을 올려놓은 단인 관대(棺臺)는 길이 271㎝에 너비 85.5㎝다. 소왕묘는 이보다 조금 작다. 직경 24m, 높이 3.5m인 봉문 안에 전체 길이 390㎝인 석실을 마련했다. 현실은 길이 320㎝에 너비 130㎝, 높이 170㎝다. 그 내부에도 관대가 있었을 텐데 그에 대한 언급은 여전히 없다
오노리도장동산남총
오노리도장동산남총 선도 입구 폐쇄
오노리도장동산남총 현실 오벽
경주 오릉
보문리 완총
보문리 완총 석곽 횡단면 부장 토기
보문리 완총 석곽 횡단면
진평왕릉
창녕읍 부근 고분군
체마리 대총 우측면
체마리 대총 현실오벽
풍호동 북고분 노촐 석곽 - 함남 함흥시
풍호동 북고분 노촐 석곽 - 함남 함흥시
경주 (전) 탈해왕릉
경주 황남동 남총 서면
경주 황남동 남총 남면
황남동 서남 표총 서면
전 김수로왕후 허씨 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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