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영의세계☆/♡☞대순진리회♡

천리교

문수봉(李楨汕) 2018. 1. 9. 23:37

여기에 천리교에 대한 글이 없어 노중평씨가 작성한 글을 옮깁니다

 

 

대한민국에 정리되지 않은 무교가 있다면 일본에는 잘 정리된 천리교가 있다.

두 종교는 근본이 무당종교이다. 그런데 일본은 무당종교가 종교로서 홀로서기에 성공하였고 대한민국은 무당종교가 민족종교나 국민종교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우리 무당이 종교를 공유화 하지 못하고 일신의 영달이나 재물을 긁어모으는 데 쓰기 위하여 사유화 하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고 본다.

일본의 토속종교는 어떠한 종교든 교세를 확장하는 데에 주력한다. 종교로 존립하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무당종교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종교적 사명을 어떻게 펼쳐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고, 몸주를 위한 자기희생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말하자면 몸주를 속이고 밥벌이의 수단으로 쓰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일제 때 보천교가 나와서 민족을 단합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살려내지 못하고 조계종에 본부 건물을 내주고 스스로 사라지고 말았다.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에 들어와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일본종교로 대표적인 종교를 들라면 천리교와 창가학회가 있는데, 이들 종교가 이 나라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그 교세도 확장이 되어 가고 있는 추세이다.                                                                                                  

선과 일본 사이에 1876년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이듬해인 1877년에 부산에 상륙한 종교가 정토진종이었고, 부산에 본원사의 별원을 두면서 일본 토착종교의 한국선교 역사가 시작되었다.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였어도 정토진종은 이 땅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서 시작된 일본토착종교의 역사가 100년이 넘었다고 볼 수 있다.


천리교가 세상에 나오게 되는 기록에 보면 그 역사가 대단히 일천하다. 창교일이 1938년 10월 26일이다. 창교일 3일 전에 일본 나라현 미시마조에서 나카야마 미키(中山美伎 당시 40세)가 아들 병을 고치려고 자기가 직접 굿을 하면서 3일 동안 접신이 된 것이 천리교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키는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신어神語를 받아들였다.

  우리나라에서 무당이라면 이렇게 신어(공수)를 받는 일은 매일 다반사로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키처럼 위대한 종교지도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를 보는 눈이 좁고, 종교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려는 사명감이 너무 저급하기 때문이다.

미키에게 신어를 내린 신은 자신을 ‘하늘의 장군’, ‘참신’, ‘다이신궁’이라고 하였다. 하늘의 장군이라면 천장군天將軍이고, ‘참신’은 진신眞神이니 몸주라는 뜻일 것이다. ‘다이신궁은 대신궁大神宮이라 대신궁은 대신大神이 계신 하늘 궁이다. 그러므로 천궁이다. 따라서 미키가 받은 “몸주는 대신할머니가 계신 천궁에서 온 장군신”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장군신이라면 서낭신일 것이다. 천리교는 매년 10월 26일을 ‘어버이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날’로 기린다. 미키를 교조로 모시는데, 그의 생일이 4월 18일이라 이날은 교조탄생대제로 모신다고 한다. 20만 명의 무당이 활동하는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미키같은 고조를 둔 일본국민이 부럽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땅에 천리교가 처음 들어온 역사를 보면, 한말인 1901년에 천리교의 일본인 포교사 사와무라(澤村)가 마산에 사는 김선장에게 교리를 전파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1917년 서울역 앞 동자동東子洞에 천리교 포교관리소를 세우면서 포교활동이 활발해졌다.

동자동은 동자를 모신 신당이 있었기 때문에 동자동으로 불린 곳이다. 동자동에 모신 동자신이 미키가 전파한 장군신을 모셔 들여 합사合祀가 되면서 천리교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동자동의 동자신은 숭례문과 종각의 수호신이기도 한 신인데, 동자신에 미키가 받은 장군신이 합사가 되면서 이러한 일련의 종교 침략과정이 평탄하게 진행이 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일제강점기에 모든 종교들, 특히 기독교가 심한 탄압을 받아 교회가 해산되는데도 천리교는 아무런 장애 없이 광복 후에도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런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천리교에는 지옥이 없다. 이는 우리의 무교에 지옥이 없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창조주創造主와 지배주支配主가 있다고 보는데, 이들 두 주인을 하나로 합쳐서 ‘천리왕天理王’으로 부르거나 ‘부모신父母神’으로 부른다. 천리왕은 우리의 삼신칠성으로 볼 수 있고, 부모신은 우리의 할머니나 할아버지로 볼 수 있다. 그러니 우리나라 사람이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천리교에는 인간을 협박하는 수단으로 써먹는 죄나 벌이 없다. 창조주가 실현하려는 것은 인간이 질병이 없이 재난을 당하지 않고 즐겁게 사는 이상사회라고 한다. 천리왕을 인간이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살펴주시는 기복의 신으로 인식하고 받들어 모신다.

  천리교는 생사관도 두루뭉수리 하지 않고 명쾌하다. ‘천국과 지옥은 내가 살아있는 세상에 있고, 인간이 죽어서 혼이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없어지지도 않고, 죽어서 바로 태어난다고 한다. 이를 과학으로 말하면 쿼크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일본의 천리교는 메이지유신 때 심한 탄압을 받았다고 한다. 수백 명에 불과했던 교세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계속 불어나 1908년에는 신도교파로 공인을 받을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교세가 해외로 진출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정부로부터 교리를 변경하라는 탄압을 받았으나 나라가 패전 하는 바람에 탄압을 면할 수 있었 다. 이후에는 교세가 급속히 팽창하여 대교단大敎團으로 발전하였다. 현재 일본의 천리교회 수는 1만 7천 개소이고, 신도 수는 235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일본에서 무교가 생겨나서 성공한 예로 볼 수 있다.

  교조 미카의 출생지에 천리고 본부가 있다. 종교도시를 이루고 있어 덴리시(天理市)로 불린다. 덴리시에는 덴리대학이 있고, 그 외에 여러 학교와 도서관이 있다.  

  우리나라는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대한천리교본부가 있다. 한국의 천리교는 현재 전국에 500개의 교회, 700개의 포교소布敎所, 신도수 37만 명을 헤아린다.

1965년 8월 내무부가 천리교를 ‘민심을 현혹하고 민족주의의 주체성을 어지럽히는 유사종교단체’로 규정하여 창가학회와 더불어 활동에 제한을 가했으나, 1970년대 들어 사회봉사활동을 하며 사회적 신뢰를 쌓고, 1975년에는 한국종교인협의회에 가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천리교단 측은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