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리교 본부 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특질
이경원
대진대학교⋅교수
1. 머리말
2. 일본 천리교의 역사와 주요교리
3. 천리교 본부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의미
4. 천리교 성소(聖所)의 종교적 특질 :
중심의 상징
5. 맺음말
국문요약
천리교는 일본의 신종교로서 올해로 178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비록 그 역사
는 길지 않지만 성소의 가치를 극대화함으로써 오늘날 국제적인 종교로 성장하였다.
만일 종교연구를 할 때 종교적 공간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한다면 천리교는 아마
도 그 대표적인 종교로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천리교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상징은 아마도 세계의 중심을 강조하는데 있다 할
것이다. 감로대, 신전, 집터를 포함하여 천리교의 전체 공간은 곧 세계의 중심을 나
타내고 있으며, 그것을 일상 공간과 구분짓고 있다. 이 중심에 기초를 둔 모든 건축
물과 전체 도시는 세계 창조를 수행하고 또 그것을 모방하고 있다. 이러한 천리교의
성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의 상징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엘리아데의 이론
에 따르면 천리교에 나타난 중심의 상징은 다섯 가지 특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성소는 성현의 장소라는 점. 둘째, 성소는 인간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것이 아
닌 발견되어지고 특정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계시되는 것이라는 점. 셋째, 성소는 세
계창조의 지점이라는 점, 넷째, 성소는 중심의 상징으로서 그곳에 접근하는 것은 일
종의 입문의례이면서 영웅과도 같이 불사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 다섯째,
성소는 낙원에의 노스텔지아를 나타낸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상의 특징에 입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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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때 천리교는 그 건축물을 통해 중심의 상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주제어: 천리교, 성소, 중심의 상징, 성현
1. 머리말
하나의 종교를 이해하는데 있어 다양한 차원이 있을 수 있지만 특히
공간적 요소는 그 종교의 가시적인 실체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사람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마치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먼저 그
사람의 외모에 시선이 가듯이 종교적인 실체도 먼저 그 외관을 구성하는
건축과 같은 공간적 요소에 1차적인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이것은 그
종교의 형이상학적인 측면을 도외시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제일 먼저
감각적으로 접하는 부분이므로 종교경험을 산출하는 토대가 된다는 점에
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종교에서의 성소(聖所)는 이와 같은 공간이 일반
적인 공간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성현(聖顯)의 장소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
미를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종교는 성소를 발견하거나 구축하
는 것에 의해 자신의 종교를 성별(聖別)하고 또한 소속된 신자들로 하여
금 신성(神聖)의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기존의 종교연구에서, 특히 종교현상학의 연구성과는 다양한 전통종교
의 성소 혹은 성스러운 공간이 중심이 되어 하나의 종교가 발생하고 유
형화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1) 이와 같은 연구는 나아가서 모든 종교
가 지닌 보편적 특질로서의 종교적 상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유익한
이론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연구가 이런 공간적인 측면에만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인 만큼 그 다양한 측면의 연구 성과도 무시
할 수 없다. 다만 공간의 문제는 시간과 더불어 인간의 감성적 지각을
1) M.엘리아데, ?종교형태론?, 이은봉 옮김 (서울: 한길사, 199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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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는 기본 조건이 되므로 특히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
조하고자 한다. 일본 천리교 본부의 성소는 이러한 점에서 종교적 공간
연구의 주요한 사례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일본 천리교 본부의 성소는 하나의 종교가 얼마나 공간적인 것에 가치
를 부여하고 또 이를 신성시하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천리
교는 2015년 현재 입교(立敎) 178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
는 일본의 신종교이다. 하지만 기성의 전통종교에 비해 그 공간적 성소
의 가치를 극대화 하여 오늘날 하나의 종교 도시를 구축하고 있는 만큼
기성종교 못지않은 세계적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종교의 공간적 의미를
위주로 하여 종교연구를 수행한다면 아마 천리교는 풍부한 설명이 가능
한 곳이라는데 이견이 없으리라 본다.
기존에 천리교에 대한 연구는 국내에서 2000년대 이후에 활발하게 이
루어졌다.2) 한국과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의 종교로서 천리교는
일본계종교 18개 교단 중 한국에 가장 먼저 전래된 종교이며, 현재 두
번째로 신자수가 많은 교단이다.3) 아마도 역사나 규모면에서 상대적으로
탁월하고 민간의 활발한 문화교류 차원에서 연구자들 사이에 주목받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동안의 연구경향을 살펴보면 주로 교조, 교리, 의
례, 역사, 정치, 사회, 포교전략 등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에
서 천리교의 성소를 종교학적으로 다룬 연구는 전무하다. 유사한 연구가
있다면 제점숙의 ‘일본 천리교의 종교경관 형성에 관한 연구’가 있다.4)
여기서는 천리교 본부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천리시의 도시 경관을 연
구 대상으로 하였으며 그 형성과정의 교단 내⋅외적 요인을 결합하여 분
석한 바 있다. 일본 내의 연구 성과물로서는 이가리시(五十嵐太郞)가 쓴
‘신종교와 거대건축’의 내용이 있다.5) 여기서는 천리교의 건축양식이 건
2) 일반 학술지 논문은 대략 50여 편이 검색된다. 2000년 이전에 국내에서의 천리교 연구
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3) 이원범 편저, ?한국내 일본계 종교운동의 이해? (서울: 제이엔씨, 2007), p.221. (본 저
서에 실려있는 2005년 12월 교단별 교세현황에서는 총 18개 교단을 집계하였으며, 가
장 신자수가 많은 교단은 창가학회이고, 그 다음으로 천리교가 두 번째로서 신자수는
총 276,516명으로 되어 있다.)
4) 제점숙, 「일본 천리교의 종교경관 형성에 관한 연구」, ?종교문화연구? 1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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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학의 관점에서 어떤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가를 고찰하고 있다. 이상의
연구는 여전히 도시학적이고 건축학적인 테두리 내에서 천리교를 연구한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특히 종교학적인 관점 하에서 본부 성소의 구체
적 개별 공간이 지니는 종교 상징적 의미를 밝히는데 역점을 두고자 한
다. 이것은 천리교를 현상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요한 기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의 구성은 먼저 2장에서 천리교의 역사와 주요 교리를 개괄하
는데서 시작하여, 3장에서는 천리교 본부 성소의 개별적 건물구조와 그
에 담긴 종교적 의미를 고찰한다. 4장에서는 천리교 성소의 종교적 특질
을 ‘중심의 상징’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이어서 5장의 결론에
서는 이상의 논의를 종합정리하고 향후 연구 과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마
무리 짓기로 하겠다.
2. 일본 천리교의 역사와 주요교리
2.1. 역사
천리교의 역사적 출발은 교조인 나카야마 미끼(中山美伎,1798∼1887)의
강신체험에서 비롯된다. 교조의 생애를 중심으로 교단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주요한 원전자료로서는 ?고본(稿本) 천리교교조전(天理敎敎祖傳)?
이 대표적이다.6) 그 대체적인 내용은 교조 나카야마 미끼에게 나타난 으
뜸인 신의 계시와 신의 현신(顯身)으로 승인된 교조의 50년간의 종교활동
으로 구성된다.7) 나카야마 미끼가 정식으로 신을 받아들이고 이어서 월
일(月日)의 현신이 된 역사적 시기는 1838년 10월 26일이며, 교조 나이
5) 五十嵐太郞, ?新宗敎と巨大建築? (東京: 講談社, 2001).
6) 본서의 출판은 일본에서 1956년도에 출판되고, 한국어 번역본은 천리교 해외부에서
1974년에 초판이 발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7) 이 책의 차례는 제1장 월일의 현신에서부터 2생장, 3행적, 4근행장소, 5구제근행, 6터
전 결정, 7마디에서 싹이 튼다, 8어버이마음, 9노고, 10문을 열고서 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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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세에 해당한다. 천리교의 공식 문헌에 서술된 교조의 입장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월일의 현신임을 밝히고, 어버이신님의 의도를 인간에게 전해
주며, 몸소 행동으로 구제한줄기의 모본을 보여 준 인물로 이해하고 있
다.8) 즉 교조의 생애는 모본의 길이며, 교조는 곧 모본의 어버이라는 것
이다. 또한 1887년 음력 정월 26일 교조의 사망이후에도 다만 현신을 감
춘 것으로 지금도 변함없이 으뜸인 집터에 머무르며 세계 구제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교조존명(敎祖存命)의 리(理)’라고 부르고 있
다.9)
교조의 생애에서 주목되는 내용을 간추려보면, 먼저 교조 자신이 극빈
한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
는 등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어버이신의 의도
에 따른 것으로 기술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나카야마 미끼 자신의 인
격이 끊임없이 변화되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활동 속
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교조를 존경하며 따르게 되었고 또한 이렇게 이웃
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 오늘날 천리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임을 믿고
있다. 둘째로 교조는 생애 후반에 천리교의 중요한 교리서가 되는 ?친필
록(親筆錄)?10)과 ?신악가(神樂歌)?11)를 남기고, 수행방법으로서의 ‘근행
(勤行)’을 정하며, 중심터전을 세움으로써 오늘날 교단 체계의 초석을 놓
았다는 점이다. 셋째는 교조의 종교활동이 주로 신자들의 순산(順産)이나
치병(治病)을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사람들의 현실적인 고난을 즉각적으로
해결하였고 이로 인해 신도들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오
늘날의 천리교 신앙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로 작용하고 있다. 넷째로
교조는 종교활동 중에 총 18회에 걸친 조사와 구류를 당하면서까지 지속
8) ?용재핸드북? (천리시: 천리교 해외부, 2003), p.44.
9) 같은 책, 같은 쪽.
10) 이 책은 교조 72세(1869년)부터 85세(1882년)경까지 쓰여진 것으로 모두 1,711수이며, 1
호부터 제17호까지 총 17권으로 되어 있다.(1928년 일본어 초판 발행, 1978년 한글번역
판 초판발행, 2007년 현재 3판)
11) 이 책은 1866년부터 1875년 사이 10년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근행의 지가(地歌)로 가
르친 것으로 전부 5절 12장으로 되어 있다. 그 구성은 신악근행의 지가(노래)와 손춤의
지가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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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정부의 탄압과 감시를 받아왔으며, 여타 기성종교의 횡포와 방해
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념을 간직함으로써 후대 신앙인들의 모본이 되
었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오늘날 천리교의 역사가 있기까지 교조
의 시대에 보여준 나까야마 미끼의 생애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의 굴
곡을 가지고 있었고, 이어서 현대 종교로 발전하기까지 변함없는 토대로
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어서 천리교의 역사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몇 단계를 거쳐서 발전하
였다고 본다. 교조 사망이후 천리교는 20년 동안 이부리 이조(飯降伊藏,
1833∼1907)가 어버이신의 말씀을 교조를 대신하여 전한 본석(本席)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이부리 이조는 신의 말씀을 전하면서 수많은 수
훈을 남겼는데, 이것은 오늘날 ?지도말씀?이라는 방대한 책으로 출판되
어 천리교의 중요한 삼원전(三原典)의 하나로 읽혀지고 있다.12) 이 기간
중에 천리교는 본석 이부리 이조의 현신체험에 따라 교조의 부재에도 불
구하고 지속적으로 신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을 지속시켜
나갔던 것으로 본다.
이부리 이조 본석의 사망이후에는 공식적으로 교통(敎統)을 계승한 진
주(眞柱)에 의해 오늘날 교단의 대표와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다. 천리교
에서 ‘진주(眞柱)’란 “안을 다스릴 중심의 기둥”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의
중심의 기둥”이라는 원전기록에 입각하여 교단의 중심으로서 의식을 집
행하고 ‘수훈의 리’를 내려주며, 사정에 대한 허락과 동시에 제의(祭儀),
교의(敎義)의 재정(裁定)등 중요사항을 관장한다.13) 초대 진주는 나카야
마 신노스케(中山眞之亮, 재임기간: 1887∼1914)이며, 2대 진주 나카야마
쇼젠(中山正善, 재임기간: 1915∼1967), 3대 진주 나카야마 젠에(中山善衛,
재임기간: 1967∼2014), 4대 진주 나카야마 젠지(中山善司, 재임기간: 2014∼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14)
12) 오늘날 교회본부에서 편찬한 지도말씀은 총 4종류로 분류된다. ① 33권본(소화2년10월∼6
년6월), ② 8권본(소화11년1월∼12년4월), ③ 7권본(소화38년4월∼41년 1월), ④ 7권본
의 요약본(소화51년12월∼52년9월)이 그것이다. 한국어 번역본은 ?지도말씀발췌본Ⅰ?
로서 2009년 1월에 한권으로 출판되었다.
13) ?용재핸드북?, p.7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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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약사(天理敎略史)?에 따르면 교조 10년제(祭)부터 시작하여 100
년제에 이르기까지 약 10년의 주기로 교단의 발전을 지속적으로 추진하
여 왔음을 볼 수 있다.15) 1888년 4월 10일에 천리교교회본부 설치인가를
받은 것을 기점으로 하여 각 지방의 교회설립이 매년 폭발적으로 증가하
였으며, 교조 50년제를 거행하던 1936년 즈음에는 신자 800만으로 회자
되었다. 교조 100년제가 되는 1986년에 이르기까지 천리교는 본부신전
증축을 마무리하였으며 오늘날 천리교 본부신전의 외형을 구축하였다.
현재 천리교는 2014년까지 총 교회수 16,676개소, 교인자격 소유자
159,437명으로 집계되고 있다.16) 해외에는 34개국에 진출해있다.
2.2. 주요교리
천리교의 주요 교리를 담고 있는 문헌은 오늘날 ?천리교교전(天理敎敎
典)?이 있다. 이 책은 삼원전(三原典)에 해당하는 ?친필?, ?신악가?, ?지
도말씀?에 의거, 천리교 교회본부에서 편술한 것이다.17) 총 10장으로 구
성되어 있으며, 전편에는 교조님, 구제한줄기의 길, 으뜸인 리, 천리왕님,
모본 등의 내용을 다루고, 후편에는 인도, 대물 차물, 마음성인의 길, 용
재, 즐거운 삶의 내용 등을 서술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에는 교리적으로
볼 때 대체로 신관(神觀), 창교주의 역사, 인간관(人間觀), 구원론(救援論)
등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개략적인 내용을 정리해보면 오늘
날 천리대학 공식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천리교개설(天理敎槪說)?을 참고
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18)
14) 天理大學おやさと硏究所編, ?天理敎槪說? (천리시: 天理大學出版部, 1981) 참조.
15) ?天理敎略史? (천리시: 천리교해외포교전도부, 1990) 참조.
16) ?みちのとも? 立敎178年(2015년) 2月号, p.76 참조. (현재 교인자격은 본부규약에 따르
면 별석(別席)의 단계에서 아홉 번에 걸쳐 수훈의 리를 받고, 이를 거쳐 용재(用材)가
되고, 이어서 교인자격 강습회를 수료한 후에 검증시험에 합격한 자를 말한다. 이후에
별도의 교회장 자격시험을 거쳐 하나의 교회를 운영하는 교회장이 될 수 있다.)
17) 이 교전은 1949년 10월 26일 공간(公刊)되었다. 한국어 번역본은 1974년에 초판이 발
행되었으며, 2006년 현재 제 5판이 발행되었다.
18) 天理大學おやさと硏究所編, ?天理敎槪說? (천리시: 天理大學出版部, 1981), pp.168-19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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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교리로서 신관(神觀)의 문제이다. 천리교에서 신앙하고 있는 신
(神)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먼저 어버
이로서의 신(親神)이다. 이러한 신의 의미는 오늘날 천리교에 있어서 그
신앙의 대상을 어버이신 천리왕님(親神天理王命)이라 우러러 받들며 기원
하는 데서 그 개념을 알 수 있다. 즉 만물의 생명의 근원이며 일체 현상
의 근본이 되는 신이다.19) 이론적으로 볼 때 어버이 신이라고 하면 아버
지와 어머니 두 존재의 관념이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천리왕님은 부성(父性) 혹은 모성(母性) 아니면 부모(父母)이성
(二性)의 총칭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버이신은 부⋅
모 두 신의 결합도 아니요, 아버지나 어머니 어느 하나의 신을 의미하는
것도 아닌,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작용하는 존재의
특성이 인간에 임하여 나타난 유일한 신을 말하고 있다.20) 두 번째로 천
리교의 신은 ‘현현자(顯現者)’이다. 절대자로서의 신은 상대자로서의 인간
이 감히 파악할 수 없으며,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절대 자유를 지니고
자유롭게 자신을 나타낸다. 이 때 상대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신과 직접
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없으므로 신의 입장에서 교조 나카야마 미
끼를 집으로 삼아 신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신은 창조자(創造者)이다. 이러한 신의 의미는 교전에서 어버
이 신을 ‘으뜸의 신’ ‘진실한 신’으로 명명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여기서
으뜸의 신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인간 세계를 만들어 영원히 변함없이
만물에 생명을 주고 있다고 하였으며, 인간 생명은 물론이며 모든 만물
을 창조한 근원적인 신을 의미하고 있다. 네 번째로 신은 수호자(守護者)
이다. 이러한 신의 특성은 진실한 신이 인간 창조의 즈음에 인간 신체의
불가사의한 구조와 자연 운행의 신비를 통해 그 숨을 불어넣고 또 십전
(十全)의 수호로써 이 세상과 인간을 만들었다는 데서 나타난다.21) 말하
19) ?天理敎敎典? (천리시: 천리교해외부, 2006), p.37.
20) ?天理敎槪說?, p.168.
21) 이러한 십전수호는 곧 월덕수기의 리, 일덕화기의 리, 결합수호의 리, 지탱수호의 리,
수기승강수호의 리, 풍기수호의 리, 절단수호의 리, 인출수호의 리, 남자추형종자의 리,
여자추형묘상의 리로 불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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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면 어버이신의 수호는 어떤 사물도 남김없이 세계만물에 침투해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수호의 완전함은 실제로 신의 전지전능함에 기인한다
고 볼 수 있다. 다섯째로 신은 구제자(救濟者)이다. 어버이신은 어디까지
나 온 세상 자녀들을 사랑하는 인간의 진실한 어버이에 해당한다. 따라
서 어버이신은 온 세상 자녀들에게 즐거운 삶을 누리게 하려는 한결같은
마음에서 교조를 현신으로 삼아 이 세상에 나타나서 태초의 인연이 있는
터전에서 구제한줄기의 길을 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교리로서 계시(啓示)의 문제가 있다. 천리교에서는 어버이신 천
리왕님의 현현과 그 직접적인 계시로부터 역사가 시작된다. 여기서 계시
는 절대 무한하고 영원 구극의 신존재가 자기 현현의 과정에서 인간의
상대적 이론적 언설을 뛰어넘어 그 깊은 의미를 실현하는 것을 가리킨다.
천리교의 교조는 바로 신의 ‘집’으로서 어버이신과 인간 사이에 직접적인
대화의 길을 터놓은 계기에 해당한다. 천리교에서는 이와 같은 교조의
입장을 정리하기를, 월일(月日)의 현신(顯身), 모본의 어버이, 교조존명의
리라고 부른다. 교조의 활동 가운데에서 이러한 계시를 기록으로 남긴
유일한 문헌이 바로 ?친필록(親筆錄)?이다. 17호 1711수의 노래로 되어
있는 이 친필 내용은 특히 근행(勤行)의 완성을 최대 주안점으로 삼고 있
다.22)
셋째, 교리로서 구제(救濟)가 있다. 어버이신은 교조를 통하여 인간세
계 창조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것은 곧 ‘즐거운 삶(陽氣ぐら
し)’을 영위하는 데 있으며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곧 구제라고 본다. 이
를 위해서 신은 구제한줄기의 역사를 계시하고 인간은 또한 신으로부터
전해진 수훈의 리를 받들어 근행을 통해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나가게 된
다. 그 결과 전 인류가 ‘즐거운 삶’을 달성하고 누구나 마음으로 즐거운
기분이 무한히 용솟음치게 하는데 최종 목표가 있다.
넷째, 교리로서는 인간관이 있다. 먼저 인간존재의 기본적인 탄생 의의
는 어버이신에 의해 신인화락(神人和樂)의 ‘즐거운 삶’을 목적으로 본고
22) ?용재핸드북?,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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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서 창조되었다. 그 이후 자라서 세월을 거쳐서 지금까지 길러졌다.
인간이 즐거운 삶을 창조하는 방법은 먼저 이러한 어버신의 존재를 알아
서 어버신의 의도대로 사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어버이신의 자손이므로
모두 형제 자매이다. 인간의 신체는 어버이신으로부터 빌린 대물(貸物)이
며 또한 차물(借物)이다. 빌린다는 것은 ‘나중에 반드시 돌려줄 것을 약
속하고 남의 물건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차물인 몸은 언젠가는
돌려주어야 한다. 이것을 죽음이라고 하며 또한 출직(出直)이라고 한다.
그리고 영원한 삶의 주체인 각자의 혼이 새로운 몸을 빌려 이 세상에 다
시 태어나는 것을 환생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인간은 금생의 마음쓰기에
따라 또 다른 출직과 환생의 과정을 거쳐 내생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23)
현세에 관한 인간생명의 충실과 완성에 대해서는 언제나 어버이신의 의
도에 맞지 않는 마음을 나날이 청소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즉 인간의
마음에는 여덟 가지 티끌이 있는데, 인색⋅탐⋅미움⋅편애⋅원망⋅분노⋅
욕심⋅교만 등이 그것이며, 이것이 신상(身上)의 장애, 사정의 표시로 나
타난다고 보았다. 인간 생명의 완성의 길로서 제시되는 것은 곧 근행과
수훈이다. 천리교가 창교된 의의는 인간의 어버이와 인간창조의 목적을
아는 것과 동시에 이 세계를 ‘즐거운 삶’의 세계로 만드는데 있어 그 방
법을 가르치는데 있다. 근행과 수훈은 바로 그 중요한 방법에 해당한다.
인간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 어버이신의 구제사업에 참여하는 정신이 요
구된다는 것이다. ‘히노끼싱(日の寄進)’이란 어버이신의 은혜에 보답하는
감사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매일의 실천적인 행위이다. 터전이나 각 교회
에 이바지하는 것 외에도 넓게는 직장이나 지역사회에서 남을 돕는 활동
등 히노끼싱의 표현방법은 실로 다양하다. 이렇게 어버이신의 의도에 맞
게 살아갈 때 인간과 어버이신의 마음이 일치가 되는데 이것을 성인(成
人)이라고 한다. 인간의 참된 이상은 성인의 상태에서 즐거운 삶을 누리
는데 있다고 본다.
23) 같은 책, p.67.
일본 천리교 본부 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특질 / 이경원 |51
3. 천리교 본부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의미
3.1. 감로대(甘露台)
천리교 본부 성소에 있어 가장 중심이 되는 구조물을 든다면 바로 감
로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천리교의 전체 경관을 형성한 기원이 되는
자리에 그 상징적인 구조물로 세워진 감로대는 천리교 성소의 핵심을 이
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리교의 모든 제전(祭典) 또한 이 감로대를
둘러싸고 거행되고 있다. 따라서 천리교의 성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제일 먼저 감로대의 기원 및 구조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다.
감로대가 세워진 곳을 천리교에서는 터전(ぢば)이라고 한다. 이곳은 교
조의 설명에 따르면 태초에 인간을 잉태한 지점이며 전 인류의 고향에
해당하므로 그 일대를 본고장이라고 부른다. 모든 장소 가운데 가장 으
뜸이 되는 곳이므로 그 증거로서 감로대를 세워 예배의 목표로 삼고 있
다.24)
천리교에서 감로대를 처음 세우게 된 계기는 교조 나카야마 미끼가 어
버이신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따른 것이다. 감로대 설치의 필요성과 그
명령에 관한 내용은 교조의 ?친필? 전반에 걸쳐서 나온다. 그 최초의 기
록을 살펴보면 1869년 3월의 제 2호 내용으로서 교조 나이 76세 때에 다
음과 같은 계시가 등장한다.
이제부터는 한길을 내기 시작한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 모두 용솟
음치게 할 거야.(제2호-1)
이 세상 창조의 진기한 감로대, 이것으로 온 세상 안정이 된다.(제
2호-39)
24) 일본 천리교 본부의 입장과는 달리 대한천리교에서는 1985년 12월 13일에 교단본부
신전에 목조모형 감로대를 설치하고 진좌제를 거행했다. 당시 신앙의 목표물로 사용
했던 신각을 모두 철거하고 목조모형 감로대로 복원할 것을 전국의 교회와 포교소에
지시 하달하였다.(정명수, ?대한천리교사? 제4권 (서울: 미래문화사, 2002), p.135.)
52 |신종교연구 제33집 / 기획논문
이에 따라 교조는 1873년에 당시 목수 이부리 이조로 하여금 감로대
모형을 만들게 하였으며, 그것은 높이 약 여섯 자, 직경 약 세치의 6각형
나무 아래위에 직경 약 한 자 두 치, 두께 약 세 치의 육각형 판자를 붙
인 것이었다. 이것은 모형이 만들어진 뒤 얼마동안 창고에 보관되어 있
다가 1875년 터전이 정해진 다음 처음으로 으뜸인 터전에 세워졌는데,
그 후 사람들은 그것을 예배의 목표로 삼았다.25) 친필의 계시내용에 따
르면 어버이신은 감로대의 설치를 계속 독려하였으며, 기둥만 빨리 세우
게 되면 영원히 확실하게 안정이 된다고 하였다.26) 오늘날 천리교 신전
감로대의 정식 원형이 된 것은 1875년 6월에 이르러서이다. 계시에 따르
면 “청소한 곳을 거닐다 멈추어선 그 자리에다 감로대를 세우고 나면 그
다음에 근행의 손을 갖추어 빨리 시작하라 마음 용솟음칠거야”27)라고 하
였으므로 교조는 먼저 집터 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뜰을 거닐다가 발이
땅에 딱 붙어 앞으로도 옆으로도 움직일 수 없게 된 지점에 표시를 하였
다. 이후 다른 사람들도 같은 곳에서 발이 땅에 들러붙어 움직이지 못하
게 되자 이 지점을 감로대의 터전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이 날이 양
력 6월 29일 즉 음력 5월 26일이다.28) 당시 감로대의 상세한 구조에 대
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참조할 수 있다.
감로대는 인간 창조의 증거로서 으뜸인 터전에 세워 놓는 것으로,
인간 창조와 성인의 리를 나타낸다. 그것은 맨 아래에 6각의 대(臺)
를 2단 놓고, 그 위에 10단, 다시 1단을 더하여 모두 13단을 쌓아 올
려서, 그 위에 닷 되들이 평발(平鉢)을 얹어 하늘의 혜택인 식물(食
物)을 받도록 한 대이다. 그 전체의 높이는 여덟 자 두 치이다.29)
이러한 감로대의 모습을 도면으로 살펴보면 다음 그림과 같다.
25) ?稿本天理敎敎祖傳? (천리시: 천리교해외부, 2007), p.81.
26) ?親筆? (천리시: 천리교한국교단 도우사, 2007), p.55.
27) 같은 책, p.225.
28) ?稿本天理敎敎祖傳?, pp.95-96.
29) 같은 책, p.96.
일본 천리교 본부 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특질 / 이경원 |53
감로대의 이와 같은 구조는 물론 어버이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지만 그
종교적 의미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수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
다. 즉 감로대의 형태에 표시된 크기 혹은 치수를 나타내는 수치는 아무
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교리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여타 천리교의 실천양식에서 이와 같은 수치가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곳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3수의 문제이다. 3수가 적용된 곳은 우선 감로대 하단의 육각형
직경이 3자로 되어있고, 중심 기둥의 직경이 1자 2치로 숫자를 더하면 3
이 된다. 또한 중심 기둥을 떠받치는 하단의 육각형이 2단으로 되어 있
고 상판의 6각형 1단을 더하면 곧 3이다. 이처럼 3이라는 숫자는 감로대
를 구성하는 주요한 원리가 되고 있는데, 이 숫자가 교리에서 나타난 실
례를 살펴보면 ?친필?에 언급된 신화(神話)가 그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
다. 즉 태초에 인간을 창조할 때에 잉태한 자녀의 숫자가 ‘9억 9만 9999’
라고 하였다. 이 사람 숫자를 3일 3야에 잉태해서 총 3년 3개월 머물러
있었다. 그로부터 태어난 것이 5푼인데, 5푼 5푼으로 성인되었으며, 이것
에 한번 가르친 수호로 같은 태내에 총 3번 잉태했다고 한다.30) 여기서
30) ?親筆? (천리시: 천리교한국교단 도우사, 2007), pp.150-151.
54 |신종교연구 제33집 / 기획논문
인간창조의 과정에 사용된 기본 숫자가 곧 3임을 알 수 있다. 동양 역학
(易學)의 상수(象數)이론에 따르면, 3은 곧 1의 신장(伸長)인데, 생명수(生
命數)인 그 1이 3에 이르러 생명 구성의 작용수가 된다고 한다. 즉 3은
변화의 수로서 상⋅중⋅하적인 한 계단을 이루며, 종(縱)으로 서고, 구절
(句節)을 이룬다는 것이다.31) 따라서 감로대에 3수가 적용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리(理)가 변화를 하여 모든 분화가 이루어지는 최초의 구성을 했
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둘째, 6수의 문제이다. 6수가 적용된 곳은 먼저 감로대의 상단과 하단
이 각각 6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심 기둥의 단 높이가 각각 6치로
되어 있고, 상단 중심의 내 외곽의 직경이 각각 2자 4치로 숫자를 더하
면 6이고, 1자 2치와 3자를 더하면 6이 된다. 이로써 볼 때 6수는 감로대
를 구성하는 중요한 수가 됨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6이 강조된 교리
는 곧 ‘인간창조의 육대(六臺)’에서 나타난다. 어버이신의 십전의 수호는
이 세상의 모든 수호를 포함한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태초 인간
을 잉태하였을 때 하나가 되어 활동한 월덕수기의 리, 일덕화기의 리, 결
합수호의 리, 지탱수호의 리, 남자추형종자의 리, 여자추형묘상의 리의
여섯 가지 수호의 리를 ‘인간 창조의 육대’라고 한다. 이것은 태초의 이
야기에서 인어에게 범고래를 끌어넣은 남자의 본에 달님이, 흰뱀에게 거
북을 끌어넣은 여자의 본에 해님이 듭시어 인간창조의 수호를 가르쳐, 9
억 9만 9천9백9십9인의 자녀를 잉태하였다는데 기인한 것이다.32) 또한
신악근행을 할 때는 신전 상단에서 남녀 세 사람씩 여섯 사람이 손춤을
올린다. 한편 동양의 역학(易學)에서는 상수(象數)이론에 따라 6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는데, 주로 5와 6이 상대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즉 5는 양
(陽)이므로 동적(動的)이고, 6은 음(陰)이므로 정적(靜的)이다. 5는 운동의
주가 되고 6은 운동의 구절이 된다. 5는 6을 얻어 운동을 하게 되고, 6은
5를 얻어서 절도를 이루게 된다고 한다.33) 5가 안이라면 6은 바깥이다.
31) 한규성, ?역학원리? (서울: 영문사, 1957), p.257.
32) ?용재핸드북?, p.57.
33) 한규성, 위의 책, p.260.
일본 천리교 본부 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특질 / 이경원 |55
이처럼 5가 하나의 원리가 되면 6은 구체적 형상으로 드러난 것을 말한
다. 이상에서 살펴보면 6수의 문제는 우주 근본의 어버이신이자 천리로
서의 단일한 리가 터전에 이르러 하나의 형상을 나타낸 것으로 먼저 6수
로 작용하여 6각형의 형체를 이룬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셋째는 8수이다. 이 8수가 적용된 곳은 감로대 하단의 두 단의 높이가
각각 8치라는 것이다. 특별히 이 8수의 의미가 적용된 곳을 찾기는 쉽지
않은데, 어느 날 교조는 감로대를 둘러싼 집터가 앞으로 8정(町) 4방(方)
이 된다고 예언한 적이 있다고 한데서 8수를 엿볼 수 있다.34) 상수론에
서 설명되는 8수는 또한 7과 짝이 되어 음수(陰數)로 작용한다. 7이 내면
이라면 8은 외형이 된다. 여기서 8은 8면(面)적인 분별상을 나타낸다고
한다.35) 이러한 8수는 지상의 8방위로 나타나거나 8괘와 같은 자연의 분
별상, 그리고 8×8=64괘로 분별되어 나타난다고 본다. 감로대의 하단에 8
수가 있다는 것은 곧 4방 8방의 모든 만물의 분별이 이 안에 다 포함되
어 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넷째로는 10수이다. 이것은 감로대의 중앙 기둥의 단수가 총 10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높이가 8자 2치로 합하면 10이 된다는 사실이다. 10
은 천리교의 교리에서 10전(全) 수호의 리로 표현되어진 바 있다. 즉 어버
이신은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한없
는 어버이마음으로 그 성인을 수호하고 거기에 맞추어 적절히 가르쳤다고
본다. 따라서 인류의 성인과 그 문화의 발달은 모두 다 어버이신의 돈독
한 수호의 덕택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총 열 가지의 리로 표현한 것이 곧
10전 수호의 리이다.36) 여기서 10수는 우선 완전(完全)의 의미를 나타내
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한편 상수론에서 10은 1의 리(理)가 추연(推
衍)된 것으로 본다. 즉 1의 리(理)와 같다는 말이다. 그리고 10은 공간과
같은 수로써 관계되지 않는데 없으나 나타남이 없는 수이다.37) 이렇게 본
34) ?稿本天理敎敎祖傳? (천리시: 천리교해외부, 2007), p.91.
35) 한규성, 위의 책, p.262.
36) ?天理敎敎典? (천리시: 천리교해외부, 2006), p.28.
37) 한규성, 위의 책, p.263.
56 |신종교연구 제33집 / 기획논문
다면 10수는 천리교에서 구제한줄기의 리가 감로대를 통해 중심기둥으로
표현되고 또한 모든 인간세계와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본 감로대의 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우주의 중심 터전
에 자리 잡고 있는 감로대는 인간을 잉태한 으뜸되는 터전에 그 증거로
세워 놓는 대(臺)로서, 그 형태는 인간의 창조와 성인의 리를 나타내며,
인간 세계의 근원과 그 한없는 발전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것이다.38) 달
리 말하면 감로대는 모든 우주 만물의 총체를 집약해 놓고 그 가운데를
관통하는 구제 한줄기의 리를 표현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3.2. 신전(神殿)과 예배장(禮拜場)
신전과 예배장은 감로대를 둘러싸고 있는 중심건물이다. 감로대가 세
워져 있는 중앙의 건물이 신전(神殿)이며, 신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
방에 예배장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매월 월차제(月次祭)나 대제(大
祭)가 거행되며, 감로대를 둘러싸고 신악 근행을 올리고 있다.
근행장소로서의 신전건축의 역사는 1864년 초기 천리교의 본석(本席)
에 해당하는 이부리 이조의 입신(入信)시기로 거슬
러 올라간다. 이 시기의 자세한 상황은 ?고본천리
교교조전?에 상세히 나와 있다.39)
당시에 목수 이부리 이조는 교조에게 아내의 신
상을 구제받은 보답으로서 신각(神閣)이라도 만들
어 바치겠다고 말하였다.40) 이 때 교조는 “신각은
필요없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집을 짓기 시작해라”
고 답하였으며, 크기는 ‘한 평 사방’인데 더 크게
지어도 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모인 사람들이
의논하여 21자에 36자 크기의 집을 짓기로 정하고
38) ?天理敎敎典?, p.15.
39) ?稿本天理敎敎祖傳?, pp.41-53 참조.
40) 이부리 이조의 생애에 대해서는 ������본석님의 생애? (천리교 해외포교전도부, 1985)에 자
세히 소개되어 있다.
일본 천리교 본부 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특질 / 이경원 |57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정월에 근행장소를 완성하였다. (아래 그림 참
조) 이 장소의 상단 방의 신단에는 어버이신님을 모시고, 교조는 같은 방
서쪽에 단을 마련하여 거기서 종일 동쪽을 향해 단좌한 채 모여오는 사
람들에게 자상하게 어버이마음을 전하였다고 한다.41) 1888년에는 신전을
증축하였다.
오늘날 천리교 성소의 신전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소위 대정(大正)역사
로 불리는 1906년 5월 28일의 일에 계기가 있다. 본석 이부리 이조가 갑
자기 병이 나서 지도말씀을 여쭙게 되고 이어서 돌연 다음과 같은 지시
를 내렸다고 한다.
큰 나무 사 주기 바란다. 바란다. 바란다. 바란다.42)
이 지도말씀은 곧 신전역사를 시작하고 싶으니 필요한 재목을 구입하
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대 진주가 ‘사겠다’고 대답하자, “사서
보여주겠는가, 사 주겠는가. 그렇다면 기다리마.”라고 하며 어버이신님이
대단히 만족해 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신전 건설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43)
1907년 6월 9일(음4.29) 이부리 이조가 갑자기 출직하게 되자 잠깐 충
격에 빠졌으나 곧 회복하고 다시 신전 건설의 역사에 착수하였다. 1910
년이 되어 이 때 모든 신도들은 즐거운
흙나르기 ‘히노끼싱’이 개시되었으며, 1911
년 4월에 가신전이 준공되었다. 여기에 어
버이신님, 교조님, 조령님을 천좌(遷座)하
고 구신전(근행장소)을 헐어내고 새로운
41) ?稿本天理敎敎祖傳?, p.48.
42) ?天理敎略史? (천리시: 천리교해외포교전도부, 1990), p.30.
43) 본래 1864년에 시작된 근행장소 건설과 관련하여 교조는 당시에 ‘이 역사는 30년 예
정’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893년에 교조 10년제를 3년 앞두
고 신전역사를 원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년 정도 지난 시기
에 어버이신 쪽에서 먼저 신전역사를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같은 책, p.32 참조.)
58 |신종교연구 제33집 / 기획논문
신전역사를 시작했다.44)
1911년 신전 기공식이 10월 27일에 올려지고, 매일 5, 6백명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히노끼싱에 임했다. 이윽고 1912년 11월 28일에는 신전상량
식을, 다음해 1913년 12월 25에 대망의 신전역사는 준공되었다. 이부리
이조의 지도말씀이 있은지 7년만의 일이며 ‘사방(四方)정면(正面)’이라는
구상에도 부합하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오늘
날 신전을 중심으로 한 북예배장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총 다다미 수는 271장이다.
이어서 예배장은 계속 확충되었으며, 남
예배장이 1934년에 총 다다미 수 546장으로
준공되었다. 이것을 ‘제1차 쇼와(昭和)역사’
라고 한다. 이 때 감로대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신전 형태가 완성되었다고 한다.45)
감로대 바로 위의 천정에는 한 평 사방의 넓이로 구멍이 뚫려있다. 동서
예배장은 철골 철근콘크리트구조의 내화(耐火)구조로서 철골의 기둥이나
대들보에는 내화재를 감고, 두꺼운 노송나무를 붙여 마감재로 처리를 하
였다. 내부는 모두 노송나무로 마감 처리되어 있다. 다다미의 수는 양쪽
다1170장, 서예배장은 1981년, 동예배장은 1984년
에 각각 준공되었다. 이 동서예배장의 역사는 ‘제
2차 쇼와역사’라고 불리고 있다.46) 이로써 동서남
북 예배장의 총 다다미 수는 합해서 3.157장에 이
른다. 건물구조는 그림과 같다.
신전 건축 양식에 외관상 특징적인 부분을 찾
는다면 그것은 바로 기와양식에 표현된 귀와(鬼
瓦) 문양이다. 그 특수한 모양을 살펴보면 치기
(千木; 고대 건축에서 지붕 위의 양 끝에 X자 모
44) 같은 책, p.38.
45) ?용재핸드북?, p.125.
46) 같은 책, pp.126-127.
<그림 1> 예배장 평면도
<그림 2> 본부 신전
지붕의 기와양식
일본 천리교 본부 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특질 / 이경원 |59
양으로 교차시킨 길다란 목재)와 가츠오키(堅魚木; 신
사나 궁전의 마룻대위의 장식으로서 마룻대와 직각
방향으로 늘어놓은 통나무)가 일체화되어 있다. 이러
한 양식은 천리교 이외에서는 볼 수 없다고 한다.47)
과거 국가신도에 소속되었을 때 탄압을 피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고 보지만, 역사적으로 천리교의 심볼
로 자주 사용되었을 만큼 특수한 문양을 이루고 있
다. 이러한 문양은 신전 외에 교조전의 건축양식에도
적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아래에 조각되어 있
는 문양은 천리교의 심벌로서 매화꽃을 상징한다. 이
것은 교조 나까야마 집안의 가문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초기 교회를 세울
때 건물바깥의 천막에 그려놓은 것이 전통으로 내려온 것이다. 교계 내
에서는 이러한 매화꽃에 대해 험한 눈보라 속에서도, 향기 그윽한 한 떨
기 꽃을 피워내는 초인적인 구제 정신, 곧 설중매의 혼을 상징한다고 본
다.
이상의 구조를 통해 일찍이 지도말씀 가운데 ‘사방정면 거울집터’라고
하는 예언이 그대로 실현된 것으로 믿고 있으며, 교조 100년제(1986)를
맞이하여 기념비적인 건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3. 교조전(敎祖殿)
교조전은 천리교의 역사에서 교조의 위상을 잘 나타내주는 건물이다.
교조 나카야마 미끼는 1887년 음력 1월 26일 9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으
나 신앙적으로는 어버이신이 다만 현신을 감춘 사건으로 기록되며, 영원
히 변함없이 으뜸인 집터에 머무르면서 ‘존명(存命)의 리(理)’로 활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교조전에서는 매일 3번의 식사와 목욕, 침실에 이
르기까지 재세시와 똑같이 시중을 들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교조전의 최초 역사는 교조 생전의 거처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찾아볼
47) 五十嵐太郞, ?新宗敎と巨大建築? (東京: 講談社, 2001), pp.48-49참조.
60 |신종교연구 제33집 / 기획논문
수 있다. 오늘날의 교조전이 지어지기까지 교조는 구 집터에 머물면서
구제활동에 매진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교조는 본석 이부리 이조가 입신
한 1864년 당시 극빈에 빠져 모본을 보여주던 때였으므로 주택도 사랑방
을 개조하여 거기서 아들 딸과 함께 세 사람이 머물면서 팔첩방에는 신
님을 모시고 그 옆 육첩방 한칸에서 기거하였다고 한다. 신님이라 해도
큰방 윗목에 어폐(御幣)가 하나 모셔져 있고, 그 앞에 박자목이 상자 안
에 들어 있을 뿐이었다.48) 이 때 이부리 이조가 신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근행장소를 새로 짓게 되면서 신전 건축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873년에 이르러 교조는 감로대 모형 제작을 지시하면서 “이 길의 근행
인원 75인이 갖추어지면 그 산 모습을 넣어둘 곳간을 지어야 한다”라고
하였으므로 정문이 있는 자리에 거실과 창문이 없는 곳간을 짓게 되었다.
이 역사는 1874년 9월 13일에 시작되어 10월 26일에 상량한 것으로 되어
있다.49) 교조는 1875년부터 1883년까지 이 중남의 문간채에서 기거하였
다고 한다.
1882년에 이르러 신자가 차츰 많아지자 이부리 이조는 교조가 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고자 그 곳간을 헐게 되는데, 이때 11월부터 교조를
위한 휴식소 건축을 시작하였다고 한다.50) 이듬해 1883년 가을에 겨우
내부 공사가 완성되었는데, 이
휴식소의 역사는 이부리 이조
본석의 터전에서의 마지막 역
사로 알려져 있다.51) 크기는
18자에 24자인 건물로서 4첩,
8첩 방 두 칸이었다. 당시 교
조는 음력 10월 26일 밤에 어
버이신님의 말씀에 따라 각한
48) ?본석님의 생애? (천리시: 천리교해외포교전도부, 1985), p.23.
49) 같은 책, p.50.
50) ?稿本天理敎敎祖傳?, p.176.
51) ?본석님의 생애?, p.68.
일본 천리교 본부 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특질 / 이경원 |61
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중남의 문간채에서 새로 지은 휴식소로 옮기게 되
었다.52) 오늘날 교조전의 원형은 이 다다미 4장의 거실과 8장의 어용장
(御用場)이 있는 작은 건물에 부속시설이 딸린 비좁은 휴식소에서 비롯되
었다고 할 수 있다.
교조 서거 이후 사람들의 생각은 자연히 하나가
되어 10년제에는 큼직한 교조전을 세워 교조를 기
쁘게 해드리고자 했으나 본석의 지도말씀에 허락
을 얻지 못하다가 20년이 훨씬 지난 후 신전을 상
량하고 나서 1913년 8월 15일에야 새로운 교조전
상량식을 올렸다.53) 이로써 터전을 둘러싼 예배장
과 교조전의 큰 형태가 집터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1914년 4월에 교조전 역사는 준공되고 부
속건물도 이루어져 마침내 대정(大正)역사가 마무
리된 것으로 본다.
1930년에 이르러 교조 50년제(1936년 11월 1일) 및 입교 100년제(1937
년 10월) 집행에 관한 발표가 있게 되는데, 여기서 3대 방침이 제창되었
다. 3대 방침이란 신전, 교조전의 증⋅개축을 중심으로 하는 집터의 확정,
전 일본인의 갱생운동과 자녀교육의 충실이다.54) 전교신자는 이 3대 방
침의 실현을 위해 활기를 띠었다. 교조전은 이때 1931년 6월에 새롭게
착공되어 1933년 10월 25일에 신축 낙성 봉고제를 올리게 되었다. 당시
에 공사에 종사한 연인원은 17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55) 이 새로운 교조
전이 완공되고 나서 이전에 사용하던 교조전은 조령전으로 바꾸어 사용
하게 되었다.
오늘날 교조전은 이렇게 1933년 제1차 쇼와역사 때 세워진 것으로, 기
와는 청동으로 되어 있으며, 교조전, 합전(合殿), 어용장(御用場)으로 이루
52) ?稿本天理敎敎祖傳?, p.189.
53) ?天理敎略史? (천리시: 천리교해외포교전도부, 1990), p.39.
54) 같은 책, p.64.
55) 같은 책, p.65.
62 |신종교연구 제33집 / 기획논문
어져 있다. 다다미 수는 교조전 446.5장, 합전이 96장, 그리고 어용장이
각각 414장으로 되어 있다.56) 이와 같은 교조전 건설의 의의는 무엇보다
도 교조존명의 리에 입각해 있다. 이러한 사상은 일찍이 신전 건축을 독
려한 1907년 이부리 이조의 다음과 같은 언설에 잘 나타나있다.
교조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교조에 의한 구제한줄기의 활동은
지금도 나날이 확실히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다름 아닌 교조인 것이다. 교조는 지금부터 20년전
(1887년)에 현신을 감추었지만 나날이 세계구제를 위해 활동하고 있
다.57)
교조전의 활용면을 보면 천리교의 진주가 교조의 리를 받들어 수훈의
리를 내려주는 장소이며, 어용장은 교조가 존명의 리로 활동하는 장소로
서 여기서 교조를 대신하여 순산허락과 증거수호부를 내려주고 있다. 또
조석근행 후의 손춤 연습, 손춤 교정 외에 강습회 등이 거행되는 때도
있다.58) 그리고 이 새 교조전이 낙성된 것을 계기로 4월 18일 교조 탄생
을 전교적으로 축하하기 위해 1934년부터 ‘교조탄생제’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교조전 건축은 천리교의
역사에서 교조의 위상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즉 나카야마 미끼 교조
는 천리교 내에서 육체적 생사와 무관하게
어버이신의 현신으로 받아들여지며, 오늘날도
교조전에서 존명(存命)의 상태로 지속적인 구
제활동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성소의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56) ?용재핸드북?, p.128.
57) ?天理敎略史? (천리시: 천리교해외포교전도부, 1990), p.35.
58) 같은 책, p.128.
일본 천리교 본부 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특질 / 이경원 |63
3.4. 조령전(祖靈殿)
지금의 조령전 건물은 일찍이 1914년 4월에 준공되었던 교조전 건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서 1933년 새로운 교조전 건물이 완공되자 조령전으로
이름을 새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전체
크기는 45자(13.5미터)에 66자(19.8미
터)의 건물이다. 당시의 평면도 설계는
그림과 같다.59)
조령전에 대한 설명은 ?용재핸드북?
에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조령전은 이 길에 정성을 다하신 선인들의 유덕을 기리는 장소이
다. 신단이 셋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가운데는 나카야먀 집안의 영위
와 이부리 이조, 우에다 나라이토(上田ナライト; 1863∼1937), 야마나
카 추시치(山中忠七; 1827∼1902)의 영위를, 정면에서 오른쪽에는 근
행인원의 영위를, 왼쪽에는 본부재적자, 교회장 및 용재 신자의 영위
를 모시고 있다.60)
천리교에서는 인간의 몸을 어버이신의 대물(貸物)로 보고 있으며 인간
각자의 몸은 또한 어버이신의 차물(借物)에 해당한다. 따라서 언제나 인
간의 몸은 어버이신의 의도에 맞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61) 이렇
게 살다가 인간이 죽게 되면 이것을 출직(出直)이라고 한다. 죽음은 그
자체로 끝이거나 마지막이 아니라 환생, 즉 다시 태어나기 위한 하나의
마디,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것이다.62) 그것은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
아입는 것과 같아서 ‘나의 리’인 마음 하나에 새로운 몸을 빌려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온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천리교에서는 어버신의 의도에 맞
59) 천리도서관개관80주년기념, ?おぢばがえりのお土産繪 一枚刷り版畵集? (천리시: 천리
대학출판부, 2010), p.29.
60) ?용재핸드북? , p.130.
61) ?天理敎敎典? (천리시: 천리교 해외부, 2006), p.63.
62) ?용재핸드북?, p.68.
64 |신종교연구 제33집 / 기획논문
게 살고자 노력하였던 초기 교단의 인물들을 포함하여 오늘날 이러한 길
을 가는 교회장 및 용재에 이르기까지 그 삶의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들
의 유덕을 기리는 뜻에서 조령전을 세워 모시고 있다.
3.5. 본고장저택(親里館, お弘さと弘廟た)
오늘날 천리교 본부는 신전의 감로대를 중심으로 주요 건축이 자리 잡
고 있고 또한 그 중심을 둘러싸고 동서남북으로 다양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이것은 신전을 포함하여 훨씬 넓은 영역의 공간을 하나의 집터로
보는 시각에서 천리교의 중요한 성지가 되고 있다. 이곳을 천리교에서는
본고장 저택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천리교가 추구하는 즐거운 삶의 세계
를 향하여 그 원형을 실현시키고자 하는데서 이룩된 것이다. 오늘날까지
도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적인 공사가 이어지고 있으며 천리시(天理市)를
하나의 종교도시로 변모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곳이다.
본고장 저택의 유래는 교조가 일찍이 어버이신의 강림 인연을 밝히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친필?에 따르면
어떤 곳에서 오는 사람이라도 모두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한 집터이니라. 그 인연으로서 하강했다. 앞으로는 온 세상을 한
결같이 구제할 길을 모두 가르칠테다.63)
라고 하여 교조로 하여금 중심의 기둥을 세우게 한 것이 바로 감로대
이다. 그리고 근행장소를 만들어 말하기를 “이곳 근행장소는 인간을 창
조해 낸 장소인거야”라고 하여 이 집터가 곧 창조의 장소이자 세계의 중
심이 되는 곳임을 밝혔다.
이 세상을 창조한 곳은 야마토(大和)로서 야마베군 쇼야시키니라.
그 안에 나카야마씨의 집터 인간 창조의 도구가 보이는 거야. 이 도
구들은 남자추형종자와 여자추형묘상과 결합수호와 지탱수호야. 월일
63) ?親筆? (천리시: 천리교한국교단 도우사, 2007), p.92.
일본 천리교 본부 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특질 / 이경원 |65
(月日)이 그것을 살펴보고 하강했다.64)
즉 월일에 해당하는 으뜸의 신은 이미 세계창조의 장소를 알고 있었으
며, 당시에 나카야마 교조가 살고 있었던 곳에서 교조를 알아보고 그 몸
에 하강을 하게 된 것이 천리교의 시작이 된 것이다. 또한 말하기를, “거
기서 온 세상 사람들을 모두 그 터전에서 창조한거야. 그 터전은 온 세
상 사람들 누구에게나 이것은 온 세상의 고향인거야. 인간을 창조한 증
거로서 감로대를 세워 두는 거야. 이 대가 완전히 세워지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65)라고 하였다. 따라서 천리교에 있
어서 집터는 창교주의 인격 이전에 그 성스러운 공간에 대한 의미가 훨
씬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교조를 통해 이 장소를 알리고
넓혀 나가는 것이 그 사명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본고장 저택의 규모는 ‘팔정(八町)사방(四方)’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유래는 교조 생전의 언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천리교교조전일화편
(天理敎敎祖傳逸話篇)?에 따르면 언젠가 교조는 이러한 집터의 구상과 발
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어느 때 교조님께서는 중남의 문간채에 있는 거실의 남쪽 창에서
대숲과 논뿐인 창밖의 경치를 내다보고 계시다가, 갑자기 사람들을
향해 “앞으로 이 주변 일대에는 집이 꼭 들어서는 거야. 나라, 하세
(初瀨) 70리 사이는 집으로 이어지고, 10리 사방은 숙소로 찰 것이니,
집터 안은 8정 사방이 되는 거야.”66)
“여기는 인간을 창조한 으뜸이 집터이다. 장래에는 온 세상 사람
들이 ‘고향이야, 본고장이야’, 하며 모여오고, 대문을 나서면 무엇하
나 없는 것 없는 번화한 거리가 되는 거야.”67)
위의 내용에 기반하여 천리교의 역사에서는 이와 같은 집터를 완성하
64) 같은 책, p.292.
65) 같은 책, pp.460∼461.
66) ?天理敎敎祖傳逸話篇? (천리시: 천리교해외부, 2008), p.91.
67) 같은 책, p.170.
66 |신종교연구 제33집 / 기획논문
기 위한 구상을 하고 순차적으로 그 역사를 진행시켜 나갔다. 그 역사는
1864년 근행장소를 신축하는 것에서 비롯하여 교조 30년제를 목표로 신
전 건축의 역사로 이어졌으며, 1914년에 이르러 신전 및 교조전이 완공
됨으로써 ‘사방정면’의 집터 구상에 한발 더 다가가게 되었다. 1934년까
지 신전 및 예배장 그리고 교조전을 신축 혹은 증축함으로써 오늘날 본
부 신전의 모양을 갖추게 되고, 집터 구상이 보다 구체화되었다. 오늘날
의 규모를 갖춘 본고장 저택의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53년 천
리교 제2대 진주에 이르러서이다. 역사서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3년 4월 18일, 교조탄생제에 즈음하여 연제활동의 구체적 구상
이 발표되었다. 거기에서는 유달의 정신을 깨우친 다음 인간창조의
으뜸인 터전…감로대를 둘러싼 8정 4방에 즐거운 도장을 건설한다고
하는 웅대한 본고장 건설 구상을 밝혔던 것이다. 연제를 향한 물결은
별석자의 급증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는데, 2대 진주님은,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해가고 싶습니다. 그 중에서 먼저 별석자의 수와 균형을
맞추어 3년 천날 동안에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별석장을 만들려고
하면 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을 백개나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한
방을 마련하고 싶습니다.”고 말했다.68)
이렇게 시작된 본고장 저택의 공사는 1955년 별석장 완공을 시작으로
하여69) 2015년 현재 총 26개 동에 이르고 있다. 그 용도는 교의 및 사료
집성부, 천리교교, 천리대학, 수양과, 휴식의 집(병원), 천리참고관, 신자숙
소 등 즐거운 삶을 실현해 나갈 여러 가지 목적에 사용되고 있다.70)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천리교의 본고장 저택은 중앙의 신전을 중심으
로 그 단일한 중심이 확장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천리교가 추구하
는 이상적인 삶을 현실화하는 데 목표를 두고 지속적으로 건설해 나가는
수행(혹은 히노끼싱)의 현장으로 여겨진다.
68) ?天理敎略史? (천리시: 천리교해외포교전도부, 1990), p.101.
69) 현재의 별석장 완성 후 첫 별석에는 하루에 12,000명이 모였다고 전한다.
70) ?용재핸드북?, p.136.
일본 천리교 본부 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특질 / 이경원 |67
4. 천리교 성소(聖所)의 종교적 특질 : 중심의 상징
이상에서 천리교 성소가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상징은 바로 세계의 중
심에 관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감로대를 위시하여 신전 및 터
전 전체는 세계의 중심에 해당하며 또한 공간을 성별(聖別)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중심으로부터 건설된 집터와 도시 전체는 세계 창
조를 수행하면서 태초의 우주 창조를 모방하고 반복 구현한 것으로 여겨
진다. 본장에서는 천리교 성소의 이해를 위해서 먼저 이러한 중심의 상
징이 지니는 의미를 고찰해보기로 한다.
반델레에우(G. van der Leeuw; 1890∼1950)의 종교현상학에 따르면, 모
든 공간은 각각 자체의 특징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어떤 공간에 어떤
힘이 나타나면 그 때문에 그 공간은 독특하게 되고, 다른 공간과 구별된
다. 우리는 그것을 성스러운 곳(성소)이라 부른다.71) 이러한 성소는 곧
‘힘의 중심지’가 되며 여러 가지 힘의 표상들과 서로 얽혀 있다고 한다.
71) 게라르두스 반델 레에우, ?종교현상학입문?, 손봉호⋅길희성 옮김 (서울: 분도출판사,
1995), p.204.
68 |신종교연구 제33집 / 기획논문
성소는 또한 지상의 장소성을 지니고 있지 않고 우주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속계 한가운데 있는 하나의 다른 세계이다. 힘이 집중되어 있고,
신비스러운 성격을 지니며 사람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
는 장소들이 모두 성소가 될 수 있다. 어떤 웅장한 자연물도 성소를 결정
짓는 표상이 될 수 있지만, 신의 현현이 이루어진 곳이 곧 성소가 된다.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는 이러한 성소의 의미를 그의 ?종
교형태론?에서 ‘중심의 상징’으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72) 천리교의 성
소개념을 이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성소는 히에로파니(hierophany; 聖顯)의 장소이다. 즉 성소라는 개
념은 어떤 장소를 변용하고 특수화하여, 요컨대 주위의 세속적인 공간으
로부터 그곳을 분리함으로써 그 장소를 성별하는 원초의 히에로파니를
반복하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성소는 힘과 성성(聖性)의 한량
없는 원천이 된다. 이 장소는 인간이 들어가기만 해도 인간에게 힘을 부
여해주고 성성과 교제를 갖게 한다는 것이다. 천리교의 성소에 해당하는
신전과 집터는 교리에 의하면, ‘인간을 창조한 집터’,73) ‘이 세상의 으뜸’,74)
‘근본’, ‘몸의 한복판’, ‘온 세상의 고향’75)등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감로
대란 인간을 잉태한 으뜸되는 터전에 그 증거로 세워 놓는 대(臺)에 해당
한다. 그 형태는 인간의 창조와 성인의 리를 나타내며, 인간 세계의 근원
과 그 한없는 발전을 의미한다고 하였다.76) 이에 따라 천리교의 성소는
지극한 성현의 공간으로 인정되고 또한 그 힘을 체험하는 장소로 받아들
여지고 있다. 실제로 천리교의 역사에서는 이곳을 신기로움이 나타나는
장소로 여겼는데, “본부라는 곳은 땅에 떨어져 있는 귤껍질을 주워 먹어
도 병이 낫는 신기로운 곳이야”라고들 했다. 또한 본부 터전 내에서 공
72) M. 엘리아데, ?종교형태론?, 이은봉 옮김 (서울: 한길사, 1996), pp.470-493 참조.
73) ?親筆? (천리시: 천리교한국교단 도우사, 2007), p.92.
74) 같은 책, p.211.
75) 같은 책, p.460.
76) ?天理敎敎典? (천리시: 천리교 해외부, 2006), p.15.
일본 천리교 본부 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특질 / 이경원 |69
사를 하던 중 사고가 발생하여 사람의 숨이 멎었는데, 교사가 신전을 향
하여 기원을 올리자 다시 숨을 쉬고 살아난 경우도 있었다한다. 이와 같
은 신기한 일은 본고장 도처에서 있었다고 전해진다.77)
둘째, 성소는 결코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발견되는
것으로서, 어떤 방법으로 인간에게 계시되는 것이다. 즉 성소는 어떤 경
우든 그 지점이 항상 그 밖의 어떤 것에 의해 지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성소의 건조(建造) 또한 ‘태초의 때’에 성소의 원형을 밝히는 원초의 계
시에 근거하고 있다. 이 원형은 새로운 제단, 사원, 성전 등을 건조할 때
무한히 모사되고 반복된다. 제단은 세속적인 공간, 시간과는 질적으로 구
별되는 신비적인 공간, 시간에 존재하는 소우주가 된다. 제단의 건조는
결국 우주창조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성스러운 건조물
은 모두 우주 전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천리교에서 집
터의 발견 혹은 감로대의 건조는 이처럼 철저한 계시에 의존하고 있다.
즉 교조전(敎祖傳)에 의하면, 1875년 6월에 감로대의 터전을 결정할 때의
일이다. 교조는 먼저 몸소 뜰을 거닐다가 발이 땅에 딱 붙어 움직일 수
없게 된 지점에 표시를 하였다. 그 뒤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눈을 가려
거닐게 하였는데, 모두 같은 곳에서 발이 들러붙듯 멈춰졌다고 한다. 이
렇게 성소의 지점을 결정하게 된 것은 결코 인간의 의지나 선택이 아니
라 신비한 힘의 발견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감로대의 제작에 있어서도
어버이신의 계시에 따라 6각의 대를 2단 놓고, 그 위에 10단, 다시 1단을
더하여 모두 13단을 쌓아올려서, 그 위에 닷 되들이 평발(平鉢)을 얹어
하늘의 혜택인 식물(食物)을 받도록 한 구조는 모두 우주창조의 리를 나
타내고 있다고 본다. 이때 감로대는 세계의 기둥으로 여겨지며 이 중심
기둥은 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요한 의례를 집행할 때는 그 기
둥 주위에서 하늘의 지고존재자에게 제물을 바친다.78) 한편 감로대를 둘
러싼 신전 건물의 지붕이 하늘을 향해 뚫려있는 구조도 우주적인 상징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곧 신이 지상으로 강림하고 또 인간이 상징적으
77) ?天理敎略史? (천리시: 천리교해외포교전도부, 1990), p.58.
78) M.엘리아데, ?성과 속?, 이은봉 역 (서울: 한길사, 1998), p.78.
70 |신종교연구 제33집 / 기획논문
로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79) 성소가 곧 천상계
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의 상징으로서 위를 향한 출구이자 신의 세계와의
교류를 보증한다는 의미에서 천리교에서는 이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
고 있다.
셋째, 성소는 특히 ‘창조적인 장소’이다. 성소는 모든 실재의 원천이며
에너지와 생의 원천이 이곳에서 발견된다. 모든 ‘건조(建造)’와 모든 ‘중
심’과의 접촉은 속적인 시간을 폐기하고 우주창조의 신화적인 시간인 ‘태
초의 때’에 들어가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세계의 창조는 중심에서 시작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창조도 동일한 지점 즉 가장 실재적이고 생생한
지점에서만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천리교의 교리에서는 성소를 중심으로
이와 같은 창조론을 철저히 견지하고 있는데, 교전에 의하면 창조주 신
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면서 등장하고 있다. 초기에는 ‘신’ ‘월일(月日)’
등으로 불렸으며, 이어서 ‘어버이’ ‘천리왕님’ ‘존명의 리’ ‘으뜸인 리’
‘십전수호의 리’ 등의 호칭이 사용되었다.80) 이렇게 호칭이 변화되는 이
유는 “자녀들이 성인됨에 따라서 월일 어버이신님의 리를 부지불식간에
깨닫게 하려는 어버이마음”이라고 전하고 있다.81) 한편 어버이신은 교조
를 통해 태초의 진실을 밝히고 있는데, “태초에 이 세상은 진흙바다였
다.…진흙바다 속을 살펴보니 많은 미꾸라지 가운데 인어와 흰뱀이 섞여
있었다.…이어 북서쪽에서 범고래를, 남동쪽에서 거북을 불러들여…이들
을 남자의 도구와 뼈 및 버팀이 도구로, 또 여자의 도구와 피부 및 연결
의 도구로 하여 각각 인어와 흰 뱀에게 끌어넣어 남녀의 본으로 정하셨
다.…그리하여 본과 도구가 정해지자 마침내 인간을 창조하시게 되었
다.…”82)와 같이 창조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같은 인간 창조의 과
정과 그 구체적인 역사의 결론은 모두 “월일이 차츰차츰 마음 기울여 그
덕택으로 되어진 인간”임을 밝히고, “이 세상의 진실한 신이 월일이며 그
79) 같은 책, p.59.
80) 천리교 신관의 특징에 대해서는 임태홍, 「민간신앙의 측면에서 본 일본천리교 교조의
신관」, ?역사민속학? 16 (2003) 참조.
81) ?稿本天理敎敎祖傳? (천리시: 천리교해외부, 2007), p.163.
82) ?天理敎敎典? (천리시: 천리교 해외부, 2006), pp.23-28.
일본 천리교 본부 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특질 / 이경원 |71
밖에는 모두 도구들”임을 말하는데 있다.83) 즉 천리교의 신관은 창조주
유일신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부 성소는 이와 같은
창조주 신의 현현 장소로서 중심의 상징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넷째, 성소는 중심의 상징으로서 거기에 도달하는 것은 가입의례에 해
당하며, 불사(不死)를 ‘영웅적’으로 ‘신비적’으로 획득하는 것과 똑같다.
이러한 중심에의 길은 장애를 수반한다고 한다. 따라서 성지순례는 어려
운 길이다. 하지만 모든 도시, 사원, 주거지는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이 경우 중심은 도시 전체를 포함하는데, 도시의 윤곽은 우주 그
자체를 재현하고 있다. 천리교에서는 본부 터전에 참배하는 것을 고향에
돌아간다는 의미로서 ‘터전귀참’이라고 한다. 매월 거행되는 ‘월차제’ 혹
은 년중 ‘대제(大祭)’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성지순례이며 가입의례에 해당한다. 교조는 생전에 집터를 찾아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많이 기다렸다. 이제 돌아왔구나”로 맞이하
곤 했는데, 오늘날도 교인들은 방문자들에게 이렇게 인사한다고 한다. 과
거에 많은 사람들이 집터를 방문하고 자신의 병을 치료한 사례를 볼 때
터전귀참은 중심을 향한 순례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섯째로 성소는 낙원에의 노스탤지어를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성소
는 인간이 성(聖)과 실재와 세계의 중심에 머물고자 하는 소망을 투영하
고 있다. 즉 자연적인 수단을 매개로 하여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고 신적
인 조건을 회복하고자 하는 소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천리
교의 본부 성소는 이와 같은 노스탤지어를 현실 속에 구현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이룩된 거대 성소의 하나로 주목된다. 신전의 감로대를 중심으
로 거행되는 신악가와 손춤은 천리교가 추구하는 신의 마음으로서 ‘즐거
운 삶(요끼구라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형태이며, 8정4방에 해당하는
본고장저택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버이신의 품속에서 즐겁게
살다 갈 수 있도록 구상한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천리
교의 주요교리 가운데 하나는 ‘세계일가(世界一家)’사상이다. ?친필(親筆)?에
83) 같은 책, p.28.
72 |신종교연구 제33집 / 기획논문
의하면, “온 세상 사람들은 모두 형제야, 남이라곤 전혀 없는 거야,…높
은 산에서 살고 있거나 골짜기에서 살고 있거나 같은 혼인 거야, 그리고
차츰차츰 쓰고 있는 도구는 모두 월일의 대물인거야”, “월일에게는 온 세
상 사람들이 모두 다 자녀, 한없이 귀여워하고 있지만, 그것을 모르고서
모든 사람들은 각자 티끌만을 생각하고 있다.”84)라고 하여 전 세계 인류
를 하나의 핏줄, 하나의 집안으로 보고 있다. 즉 어버이신을 부모로 하여
창조된 인간은 하나의 형제자매일 수밖에 없으며, 동일한 고향을 지니고
있고, 모두가 어버이신의 보호아래 태어나서 생활하고 있다. 따라서 한분
의 어버이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 신의 마음이 자녀들인 인간과 함께
즐기고 싶다는 의도를 파악함으로써 세계는 진정한 인류평등을 이루고
화목한 평화의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교조는 감로대
근행이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근행이라고 가르쳤다 한다.85) 이렇게 보면
천리교의 성소는 비록 특정 공간에 국한되고 성별(聖別)되어 있지만, 하
나의 중심이 무한대로 확장되어 나감으로써 전 세계의 통일적인 구조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인류보편의 특질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특징들을 통해볼 때 천리교 성소는 중심의 상징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5. 맺음말
본문에서 고찰한 천리교 본부 성소는 그 구조적인 면에서 성스러운 공
간으로서의 특질을 다분히 드러내고 있다. 천리교의 발생 배경에서부터
이미 교조는 어버이신의 강림과 계시에 의해 모든 종교활동이 이어지게
되었고, 장소에 대한 특별한 의미 규정과 함께 성스러운 구조물을 세움
으로써 공간을 성별하는 작업이 위주가 되었다. 물론 천리교의 역사에서
84) ?親筆? (천리시: 천리교한국교단 도우사, 2007), pp.358-359, p.475.
85) ?稿本天理敎敎祖傳?, p.103.
일본 천리교 본부 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특질 / 이경원 |73
도 교조 사망이후 수많은 교파가 분열하였으며,86) 이 과정에서 ‘장소의
종교화’를 통해 분파교단과의 차별성을 확보함으로써 교단의 존립을 모
색하였다는 견해도 있다.87) 하지만 교단 내부의 견해는 어디까지나 성소
가 교조의 권위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교단의 정통성과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로써 천리교는 어떤 종교보다도
성소의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강력한 성현(聖顯)의 체험을 유도하고 있다.
오늘날 천리교 종교활동의 구심점은 모두 이러한 성소의 보존과 귀참에
의해 신앙적 귀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부 성소의 내용을 요약하면 먼저 가장 중심이 되는 장소는 감로대가
세워져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인간세계의 창조가 이루어졌다고 보고 그
증거로서 감로대를 세웠다고 한다. 감로대를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 사
방으로 건축된 신전 및 예배장은 감로대를 향한 외경과 찬양을 위한 장
소이다. 천리교에서는 이와 같은 예배행위를 ‘근행’이라는 용어로 강조하
고 있다. 교조전은 교조 존명의 리를 좇아 세워진 집으로서 교조의 육체
적 생몰과 관계없이 여전히 세계구제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교조의 영을
받드는 곳이다. 조령전은 천리교발전에 헌신한 선인들의 유덕을 기리는
장소이다. 본고장저택은 본부신전을 중심으로 팔정사방의 거리에 동일한
형태로 다양한 용도의 건물을 세워 천리교가 추구하는 즐거운 삶을 구현
하는 성도(聖都)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성소의 건립은 모두 교조로부터
전해진 계시와 예언에 입각해있다. 또한 성소는 모두 천리교가 보여주는
중심의 상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상징에는 신의 존재
와 계시 그리고 인간의 창조 나아가서 세계평화를 향한 구제의 길을 포
함한다.
오늘날 천리교는 ‘히노끼싱’의 이념에 따라 교단 내부의 일 뿐만 아니
라 사회 각 분야에 다양한 봉사와 사회복지활동에 참여하고 있다.88) 특
86) 弓山達也, ?天啓のゆくえ: 宗敎が分派するとき? (東京: 日本地域社會硏究所, 2005),
pp.32-44 참조. (이 책에서는 천리교의 분파를 크게 3가지 범주로 나누고 대략 40개 교
파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87) 松井圭介, 「カリスマの継承からみた天理教系教団の分派形成: 場所の宗教と天啓者の宗教」, ?筑波大学人文地理学研究? 24 (2000),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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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재해구조활동에는 약 100년이상의 역사를 지닌 탁월한 실적을 가지고
있으며,89) 교육계 내에서도 오랜 역사와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다.90) 언
젠가 철학자 야스퍼스는 수십만이 운집한 천리교의 신자들을 보고 “원시
종교의 현대적인 폭발”이라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91) 그만큼 외부학자
들의 눈에 비친 천리교는 교리나 그 행위양식으로 볼 때 고대 종교의 원
형이 반복되거나 미분화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는 진화
론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영원회귀적으로 되살아난다는 점을 상기할 때
현대 천리교의 발전은 최소한 다음의 몇 가지 문제를 고민해왔고, 또 앞
으로도 고민해가야 하리라 본다. 즉 현대 사회의 제반문제와 관련된 종
교의 사회적 책임의식, 교리의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사회의 새로운 종
교적 수요에 부응하려는 노력, 미래 인류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통 가치
관으로서 종교윤리에 대한 건전한 모색 등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종교
지도자들의 지혜와 책임이 중요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천리교가 오
늘날 전통종교로 분류되기 보다는 신종교로 불리어지는 것은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는데 요인이 있을 것이다.
88) 천리교의 사회복지활동과 관련해서는, 이현경, 「일본신종교 사회복지활동의 현황과 과
제-천리교의 복지활동을 중심으로」, ?일본근대학연구? 10 (2005) 참조.
89) 金子昭, ?天理敎災害救援の百年;驅けつける信仰者たち? (천리시: 道友社, 2002) 참조.
90) 天理大學과 天理敎校, 天理外國語學校는 100년의 역사에서 일본국내외의 인지도를 갖
고 있다.
91) 천리학술연구회, ?즐거움이 넘치는 삶으로-내가 이해한 천리교? (서울: 대학출판사,
1997), p.20.
일본 천리교 본부 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특질 / 이경원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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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리교 본부 성소의 구조와 종교적 특질 / 이경원 |77
■ Abstract ■
The Structure and Religious Characteristics of
Tenrikyo Headquarters’ Sacred Place
Gyung-Won Lee
Daejin University
Tenrikyo is Japanese new religion descended from 178 years. Even
though its historic foundation is not too old but it becomes a
worldwide religion by maximizing the value of sacred place. If
someone research a religion focusing on the meaning of religious
space, Tenrikyo might be a representative religion that has rich
contents.
The most intensive symbolism of Tenrikyo’s sacred place is on
the center of world. The whole place of Tenrikyo’s headquarters
including Kanrodai, shrine hall, and hometown, is the center of
world and differentiate it with usual place. Every architecture and
whole town based on this center carry on creating world and
imitation for the beginning of the world. In order to understand the
sacred place of Tenrikyo, we need to review the symbolism of the
center.
Based on Mircea Eliade’s “Patterns in Comparative Religion”, we
can say five particularities on Tenrikyo’s symbolism of the center.
First one, the sacred place is the place of hierophany. Second one,
the sacred place is not chosen by human but is founded by human,
and it’s revealed to human with some way. Third one, the sacred
place is the spot for creation. Fourth one, sacred place is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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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bolism of the centre. The approaching to the place means a kind
of initiating rite and same that achieve immortality like a hero. Fifth
one, the sacred place reveal the nostalgia for paradise. According to
these points, the sacred place of Tenrikyo expresses the symbolism
of the center very well.
Key words: Tenrikyo, Symbolism, Center, Hierophany, Sacred Place
◎
◎
◎
투 고 일
심 사 기 간
게 재 확 정 일
: 2015년 8월 14일
: 2015년 9월 9일∼9월 23일
: 2015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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