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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21회 ~ 24회]

문수봉(李楨汕) 2018. 1. 29. 15:44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21회 ~ 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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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한국전 내내 덜컹덜컹

- 김일성, 펑더화이와 주먹질 직전까지…북한 냉대에 중국 “할만큼 했는데…” 


 

1954년 9월말 베이징에서 열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중국, 북한, 소련의 최고지도자들. 저우언라이(앞줄 왼쪽 셋째)와 주더(朱德)의 가운데에 자리한 김일성의 표정이 당시 중국과 소련의 관계를 말해주는 듯하다. 중국 국가주석 류사오치(앞줄 왼쪽 일곱째)와 마오쩌둥 사이가 소련의 흐루쇼프. 

중국의 6·25 전쟁 참전 이후 북-중 관계는 냉탕과 온탕을 수없이 오갔다. 전쟁기간에도 양쪽의 관계는 원만치 못했다. 심지어 펑더화이와 김일성이 주먹질 일보 직전까지 갈 정도였다. 원인은 북한의 냉대였다.


1950년 10월19일 오전 9시 무렵, 펑더화이의 전용기가 선양 공항에 도착했다. 펑더화이는 대기하던 동북군구 사령관 가오강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군구 사령부로 직행했다. 한반도 지도를 펴놓고 부서 배치를 마친 뒤 가오강과 함께 단둥행 비행기에 올랐다.


전쟁기간 펑더화이의 운전병이었던 류샹(劉祥)은 펑더화이의 첫인상을 평생 잊지 못했다.

“전날 밤, 단둥 공항에 가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낯선 비행기 두 대가 전투기 네 대의 호위를 받으며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명에게 에워싸인, 수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경호원과 함께 내 차에 올라탔다. 엄숙하고 흉악한 표정이었지만 위풍이 당당해 보였다. 굉장히 높은 고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들 그 앞에서 절절맸다. 눈이 충혈되고 만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일성은 펑더화이를 싫어했다 -  사령부에도 거의 방문 안해
중국지원군 남하 거부 결정 땐-펑더화이 집무실 집기 때려부숴-

서로 권총 빼들기 전에 안 말렸다면…


그날따라 압록강을 사이에 둔 국경도시 단둥의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보슬비가 그칠 줄을 몰랐다. 등화관제가 실시된 강변에 군인과 차량이 가득했다. 강 건너 신의주 쪽에서 터지는 포탄 소리가 은은했다. 가끔 조명탄이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압록강대교 인근에서 간단한 의식이 열렸다. 펑더화이의 보좌관이었던 양펑안(楊鳳安)도 구술을 남겼다.

“덩화(鄧華), 훙쉐즈(洪學智), 한셴추(韓先楚), 두핑(杜平) 등 역전의 맹장들과 악수를 나눈 펑더화이는 나와 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부교를 건넜다. 통신처장이 황급히 무전병과 함께 뒤를 따랐다. 대부대가 조선 땅에 들어오기 전에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서였지만 우리는 적의 동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험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압록강을 건넌 펑더화이는 그 누구의 마중도 받지 못했다. 보좌관 양펑안이 사람이 올 때까지 잠시 쉬자고 하자 고개를 흔들었다. “지형과 적의 동향을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길 안내자 한 사람 없이 남의 나라 전쟁터에 들어왔구나! 수십년간 전쟁터만 돌아다녔지만 오늘 같은 날은 처음이다. 김일성과 맥아더, 이승만이라는 이름 외에는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맥아더에 관한 책을 두 권 읽어 봤다.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것 같다. 가다 보면 사람을 만나겠지.”


펑더화이는 몇 시간이 지나서야 김일성과 연락이 됐다. 부랴부랴 달려온 박헌영의 안내로 김일성과 대면했다.



1958년 9월 중국인민지원군은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부총참모장 겸 베이징군구 사령관 부임을 앞둔 지원군 총사령관 양융의 송별식에 참석한 김일성 


펑더화이는 김일성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김일성은 펑더화이의 사령부를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두 번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말 몇 마디 나누고는 훌쩍 떠나 버렸다. 서울을 점령한 중국인민지원군이 더 이상 남하를 거부하고 철수를 결정했을 때는 펑더화이의 집무실에 달려와 멱살잡고 집기를 때려부수며 온갖 욕설을 퍼부어댔다.


서로 권총을 빼들기 일보 직전에 참모들이 달려와 말리지 않았더라면 무슨 해괴한 일이 벌어졌을지 모를 정도였다. 저우언라이의 수양딸인 쑨웨이스(孫維世)의 남편 진산(金山)이 자신의 여비서를 건드렸다며 총살시키겠다고 펑더화이를 난처하게 한 적도 있었다. 오죽했으면 펑더화이가 저우언라이에게 “진산의 목을 김일성에게 내주자. 김일성의 화를 가라앉힐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느냐”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1951년 10월23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중국지원군 참전 1주년을 기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팽덕회 장군에게 1급 국기훈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팽 장군은 탁월한 지휘예술로 미국 침략자들에게 거의 전멸할 정도의 타격을 입혔고, 조선 인민군에게 막대한 도움을 주었다.”


김일성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뻔히 아는 펑더화이는 무슨 영문인지 불안했다. 훈장 받을 만한 공을 세운 적이 없다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나는 훈장을 받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공로는 후방에서 탄약과 물자를 공급해준 가오강이 제일 큰 공로자다. 두 번째가 훙쉐즈다. 두 사람이 후방에서 무기와 식량을 비롯한 물자 공급을 원활히 해주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전쟁은 불가능했다. 두 사람에게 훈장이 돌아가야 한다.”


상황을 접한 중국 중앙군사위원회는 “훈장을 받는 것이 좋다”는 전문을 보냈다. 전문을 받고 펑더화이는 하는 수 없이 수락은 했지만, 그래도 찜찜해했다.


중, 정전뒤에도 북한 복구 도우려 -  제방·댐 건설 나서고 나무도 심어

그런데도 김일성이 계속 홀대하자 -저우언라이도 섭섭함 드러낼 정도

친중 연안파 숙청·지원 철군 요구로 - 관계는 더욱 냉랭해졌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김일성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평양에 전쟁전람관을 만들면서 중국지원군에 관한 내용은 거의 무시해버렸다. 12개의 전람실 중 11개가 북한 인민군의 업적으로 가득한 반면, 중국지원군의 공적은 1개만 배려했다.


중국 정부도 북한의 행동에 불만이 많았다. 외부에 발표는 않았지만 평양 주재 대사직을 3년간 공석으로 내버려뒀다. 저우언라이도 섭섭함을 드러냈다.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이 초대한 만찬에 참석은 해도 북한 주재원들과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귀갓길에 불편을 토로했다.

“그간 우리는 정말 하느라고 했다. 조선의 산수와 초목을 아끼고 사랑하라는 마오 주석의 지시에 따라 조국과 매한가지로 파괴된 조선의 회복에 열정을 다했다. 그래도 저 사람들은 우리를 믿지 않고 감격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저우언라이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중국은 정전 3개월 뒤부터 북한의 전후 복구와 건설에 집중했다. 철도를 복구시키고 크고 작은 교량 1300여개를 새로 만들거나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했다. 평양은 물론이고 함흥, 원산 등에 대규모 공병대를 투입해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를 새롭게 변모시켰다. 58년 철수 때까지 북한 재건에 참여한 연인원만 1000만명이 넘는다고 중국 쪽은 기록했다.


더화이의 후임으로 지원군 사령관을 역임한 양융(楊勇)의 보고서가 눈길을 끈다.

 “참전 이후 8년간 조선 인민들을 위해 공공건물 881개와 주택 4만5000여채를 우리 손으로 직접 지었다. 제방 4000여개와 댐 건설도 지원군이 나서서 추진했다. 심은 나무가 3600여만그루에 달하고 인분 1300여만톤을 우리가 직접 밭에 뿌리는 바람에 지원군 병사들 근처에만 가도 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원군 병사들은 조선 형제들을 위해 의식주도 절약했다. 양식 2100여만근(斤)과 의류 59만점을 주둔지 인근 주민들에게 제공해 이들을 재난에서 구했다. 전투가 치열했던 지역의 주민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살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인근에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느라 우리 병사들은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중국지원군에게 의지한 북한 재건은 생각지도 않았던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노동당 내의 일부 간부들 중에서 소련과 중국 주도의 전후 복구를 비판하는 세력이 고개를 들 조짐이 보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지위에 불안을 느꼈다.


1956년 소련 공산당이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한 다음부터 김일성 비판은 하루가 다를 정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김일성은 고위층 간부들에게 칼날을 세웠다. 중국과 가까운 연안파부터 손을 댔다.


마오쩌둥도 북한의 옛 동지들이 체포되거나 당에서 쫓겨나자 “스탈린과 다를 게 없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단 한마디도 듣기 싫어한다. 상대가 누구건 반대만 하면 무조건 죽여 없애려 한다”고 직접 김일성을 비난했다. 이어서 펑더화이를 평양에 파견했다.


연안파 숙청과 지원군 철군 문제로 북-중 관계는 급랭했다. 미코얀과 함께 평양으로 간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의 뜻”이라며 연안파를 숙청한 조선노동당의 결의안을 취소하라고 김일성을 압박했다. 김일성은 조건을 달았다. 지원군을 철수해라. 수십만 군대가 우리 땅에 머무는 것을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마오는 김일성의 철군 요구에 동의하지 않았다. 잘못을 인정하라며 김일성을 몰아붙였다.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를 만난 자리에서도 김일성을 티토와 히틀러에 비유하며 호되게 매도했다. “김일성이 지원군 철수를 요구한다. 그 사람은 티토의 길을 가려고 한다. 나치의 길을 갈 가능성도 크다.”


당시는 중-소 밀월기였다. 소련도 “중국지원군이 조선에 계속 주둔하는 것이 조선 인민과 모든 사회주의 진영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며 중국지원군이 북한에 계속 주둔하는 것을 지지했다.


6·25 전쟁 정전 이후 중국지원군은 철수를 주저했다. 1954년 7개 사단이 철수하고, 55년 3월에 6개 사단이 북한을 떠났다. 1956년 4월 북-중 관계가 심각해졌을 때도 44만의 지원군이 북한에 주둔하고 있었다. 완전히 철수하기까지는 2년이 더 걸렸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22. 김일성의 중-소 줄타기 외교

 - 김일성 경제난 밝히자 마오 탁자 치며 “우리 형제들…뭐든지 다 보내주겠다” 


마오쩌둥과 회담하기 직전의 김일성. 오른쪽 첫째가 한국전 정전회담 북쪽 수석대표였던 남일, 오른쪽 둘째는 북한 부녀동맹 주석 박정애. 1958년 12월2일 우한(武漢). 

1950년대 중반, 중국은 북한의 요구를 거의 들어주지 않았다. 북-중 관계는 거의 파멸 상태였다.

그 증거가 여러 곳에 드러난다. 56년 가을, 북한은 중국에 5천만위안(인민폐)가량의 무상원조를 요구했다. 중국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이듬해에 열린 무역담판에서도 중국은 북한을 만족시켜주지 않았다. 북한이 요청한 20만톤가량의 양식 지원 요청을 9만톤으로 깎아내렸다.


북한의 요청은 끈질겼다. 중국은 15만톤 이상은 불가능하다며 선을 그었다. 중국의 5개년 계획을 배우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겠다는 김일성의 요청에도 중국은 1개월 동안 확답을 주지 않았다. 북한이 소련 쪽에 중국의 태도를 비난하자 중국도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평양 주재 중국대사는 노동당 간부들의 면담 요청은 물론이고 전화조차 받으려 하지 않았다.


1957년 하반기부터 완화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원인은 중국의 경제 성장이었다. 자신이 생긴 마오쩌둥은 소련 공산당이 독점해온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영도권을 같이 행사하려 하기 시작했다. 마오는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김일성을 지지했다.


마오쩌둥은 그간 김일성이 취했던 반대자 탄압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당시 동북에는 북한에서 몸을 피해 온 연안파 출신들이 많았다. 한 회고담을 소개한다. 전 평양시위원회 조직부장 김충식이 조선 땅에 더 이상 못 살겠다며 창춘으로 이주했다. 길림성 서기였던 동북항일연군 출신 푸전성(富振聲)은 김충식과 가까운 사이였다.


 하루는 김충식을 만나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조선에서 우리나라로 이주한 것은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간 우리는 간간이 너의 귀국을 종용했다. 네가 귀국을 원하지 않으면 우리는 너의 중국 체류를 막지는 않겠지만 조건이 있다. 중국은 북한의 내부 문제에 간섭할 의향이 전혀 없다.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무슨 이유건 조선인과 조선족과의 접촉을 피해주기 바란다. 서신 왕래나 전화 통화도 마찬가지다.”


김충식이 중공 중앙의 지시냐고 묻자 푸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1957년 중국 경제성장 따라 - 북-중 관계 개선되기 시작했다 -
방중 북 대표단에 물자지원 ‘선물’ - 중국군이 북에 남긴- 1억8천만원 물자도 거저 넘겼다


1957년 11월2일, 마오쩌둥이 소련의 10월혁명 40돌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쑹칭링(宋慶齡), 펑더화이(彭德懷), 덩샤오핑(鄧小平) 등 대표단을 이끌고 온 마오쩌둥은 모스크바 대학 강당에 중국 유학생들을 모아놓고 “서풍(西風)이 동풍(東風)을 압도하던 시대는 끝났다. 동풍이 서풍을 압도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며 기염을 토했다.


소련에 와 있던 김일성과도 두차례 만났다. “1년 전에 있었던 내정간섭은 우리의 착오였다. 중국으로 도망온 연안파 출신 간부들의 사면과 귀국을 허락해 달라”고 건의했다. 김일성의 반응은 단호했다. “이미 조선에는 필요 없는 사람들이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마오도 확답을 줬다. “중국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들을 내세워 조선을 반대하지 않겠다.”


귀국한 김일성은 맘놓고 최창익, 윤공흠, 박창옥, 서휘 등 연안파, 소련파 간부들을 숙청했다. ‘반당 종파분자’ 죄목도 간단했다. 중국 쪽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중국의 북한 지원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 만찬에 마오를 비롯한 중공 중앙 상무위 위원들이 참석하고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에도 조선 노동당 고위 간부들의 출입이 잇따랐다.


중국은 북-중 우호관계를 전세계에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1958년 11월9일, 베이징의 북한 대사관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한 저우언라이가 북한 대사 이영호와 뭔가 귓속말을 나눴다. 만면에 화기가 돈 이영호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평양으로 달려갔다.


1958년 11월22일부터 12월9일까지 계속된 김일성의 두번째 중국 공식방문은 화려했다. 중국은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허룽(賀龍), 천이(陳毅)를 비롯해 리지선(李濟深), 궈모뤄(郭沫若) 등 민주인사들까지 총동원해 베이징역에서 김일성 일행을 맞이했다.


저우언라이와 함께 무개차를 타고 연도에 늘어선 30만 인파의 환영을 받으며 숙소에 도착한 김일성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가늠할 길이 없다. 김광협이 인솔하는 조선군사대표단도 김일성과 같은 열차로 베이징에 도착했다.


이들은 당 부주석 주더(朱德)의 영접을 받았다. 평소 보기 힘들던 중국의 흑막 리커눙(李克農)도 이날만은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밤, 저우언라이가 베푼 만찬에서 김일성은 대취했다.



1957년 11월2일, 러시아 혁명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오른쪽 둘째). 쑹칭링(왼쪽 셋째)과 덩샤오핑(왼쪽 첫째)도 보인다 


이틀 뒤, 베이징 체육관에서 환영대회가 열렸다. 중공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행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펑더화이는 김광협과 함께 비엔나 가무단 공연을 관람했다. 당시 마오쩌둥은 우한(武漢)에 있었다.


저우언라이와 허룽의 안내로 우한에 도착한 김일성과 김광협은 공항에서 대기중인 류사오치(劉少奇), 천윈(陳雲), 덩샤오핑, 리셴녠(李先念)의 영접을 받았다. 10여년 전,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동북에서 김일성의 도움을 받았던 천윈은 포옹을 풀려 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을 만난 김일성은 사정을 늘어놨다. 원자재 부족을 푸념하며 면화(棉花)를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다. 마오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며 큰소리쳤다. “우리 형제들이 추위에 떨면 안 된다. 필요한 양을 말해라. 뭐든지 다 보내주겠다.”


배석했던 저우언라이가 김일성을 거들었다. “조선은 석탄도 부족합니다. 100만톤을 지원하겠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마오는 잘했다며 저우언라이를 칭찬했다. 당시 중국은 600만톤가량 석탄이 부족할 때였다. 김일성은 중국도 풍부하지 않은 것들만 요구했다. 그래도 마오는 모두 승낙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에 남기고 온 1억8천만원 상당의 물자도 무상으로 북한 쪽에 이양하겠다며 김일성을 만족시켰다.


김일성도 듣기 좋은 말로 마오쩌둥을 흐뭇하게 했다. “중국의 강력한 힘이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국제사회에 거대한 작용을 하기 바란다.”


중국과 소련의 틈바구니에서 벌인 김일성의 외교는 성공적이었다. 1959년 10월 중-소 분쟁이 공개화됐다. 사회주의 진영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이라도 하듯이 중·소 양국은 북한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북한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 틈을 이용해 모든 이익을 취했다.


중국과 관계가 나빠진 소련도 -  북 끌어들이려 애써
모스크바 방문한 김일성에게 - ‘마오쩌둥이 김 비난’ 일러바치기도
중-소 틈새에 선 김일성은 - 두 나라에 대놓고 지원 요구


1960년 5월 애들 싸움이나 진배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베이징을 비밀 방문한 김일성은 흐루쇼프가 집권한 이후 소련과 있었던 일을 마오쩌둥에게 그대로 털어놨다. “5년 전, 흐루쇼프는 미국을 반대하지 말라고 요구했지만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치를 챈 흐루쇼프도 가만있지 않았다.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자 1956년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와 마오가 나눈 대화 기록을 김일성에게 건넸다. 마오가 김일성을 비난한 내용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화가 난 김일성은 흐루쇼프에게 장담했다. “조선 노동당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중요한 문제는 소련 공산당의 방침을 따르겠다.”


그는 귀국 뒤 열린 간부회의 석상에서도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중국은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 생각이다. 앞으로 다시는 중국을 믿지 않겠다. 가지도 않겠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대놓고 지원을 요구했다. 두 나라는 김일성의 요구에 거의 응했다. 소련은 한국전쟁 시절 북한에 제공했던 군사차관 7억6천만루블의 탕감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경제차관 1억4천만루블의 상환기간 연장 요구도 동의했다. 중국도 뒤지지 않았다. 사회주의 국가의 북한 지원 자금 중 약 31%를 차지할 정도였다.


중국에 대한 김일성의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중-소 관계가 점점 악화되자 중립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1963년 1월, 그는 당 기관지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친중노선을 분명히 했다. “조선노동당은 한 부분만 놓고 중국 공산당을 비난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유는 사회주의 진영을 분열시키고 공동사업에 손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김일성도 직접 자신의 견해를 표명했다.

“첫째, 우리 당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중국과 흐루쇼프의 논쟁이 계속되면 우리는 중국 편에 설 것이다.

둘째, 우리는 방관만 하지 않겠다. 이미 논쟁에 참가할 준비를 마무리했다. 소련이 그 대상이다.

셋째, 중국과 인도가 국경 문제로 충돌할 경우 우리는 중국을 지지할 것이다.”


중국과 북한은 전례에 없던 밀월기에 진입했다. 밀월관계는 가끔 기복은 있었지만, 문혁 시절 홍위병이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라고 단정하고 체포령을 내릴 때까지 계속됐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23. 문혁 전후 냉온탕 북-중 관계

 -  ‘방중’ 김일성 숙소 찾은 마오 “우정이 첫째, 오해는 그 다음” 


1969년 10월 3일 중국 국가부주석 둥비우(董必武)의 안내로 시안의 반풔춘(半坡村) 박물관을 참관하는 최용건. 

한국전쟁 시절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이 지원군 1호로 참전해 사망했다. 북한은 마오의 뜻에 따라 마오안잉을 평안북도 회창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 맨 앞에 매장했다. 묘비 정면에 ‘마오안잉 동지의 묘’, 뒷면에 ‘중국인민의 영수 마오쩌둥 동지의 장남’이라고 새겨넣어 북-중 혈맹의 상징으로 삼았다.


문혁 시절 홍위병들은 소련과 중국에 양다리를 걸치던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베이징 시내 곳곳에 주자파 김일성을 체포하라는 대자보가 덕지덕지 나붙었다.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대로했다. 중공군 묘지에 있는 비석들을 다 때려부수라고 지시했다. 마오안잉의 비석도 산산조각이 났다. 중-소 관계의 파열과 김일성의 친소정책이 희극의 주원인이었지만 영토와 민족 문제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한국전쟁 정전 이후 북한은 중국의 조선족들을 방치하지 않았다. 국경 인근과 동북지역의 조선족 동포들에게 “너희들의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조국관념과 “지도자는 김일성”이라는 영수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홍위병들이 보기에는 백두산 천지와 백두봉에 관한 문제도 빼놓을 수 없었다. 당시 홍위병들의 주장을 소개한다.

“국경 지역에 위치한 천지와 백두봉은 역사적으로 우리의 신성한 영토였다. 조선 쪽에서 우리에게 천지의 일부분을 요구했다. 김일성의 혁명사업의 발원지라는 이유 등을 대며 우리의 이해를 구했다. 우리는 여러 정황을 고려해 천지의 반을 조선 쪽에 할애했다. 조선은 괘씸하다. 접수 다음날 백두봉의 명칭을 장군봉으로 바꿔버렸다.”


며칠이 지나자 북한 쪽은 베이징 주재 대사관을 통해 성명을 발표했다. “흑룡강성, 요녕성의 일부분과 길림성의 대부분은 역사적으로 고구려의 판도에 속했다. 중국의 역대 왕조가 이 지역을 침범했지만, 현재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다. 우리에게 귀환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중국 쪽은 “우리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지역은 고구려와 무관하다. 무리한 요구”라며 거절했다.

1965년 초, 소련 수상 코시긴 일행이 평양을 방문해 조-소 양쪽의 우호를 강조했다. 북한도 소련 공산당 대회에 대표단까지 파견해 중국을 자극했다.


소련은 북한의 군사, 경제, 기술 지원 요청도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북한과 소련이 가까워질수록 북-중 관계는 찬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문혁 직전인 1965년부터 국경 문제로 설전이 오갔고, 3년 뒤 중국은 북-중 경계지역의 중국 쪽 통로를 봉쇄했다.


1965년부터 69년까지 북·중 양쪽은 문화협정이나 경제협정에 서명을 하기는커녕 지도층의 방문도 주고받지 않았다. 북한 쪽은 베이징에 체류할 이유가 없다며 대사까지 평양으로 소환해버렸다. 196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했을 때도 북한은 소련을 지지하며 중국과 정반대의 행동을 취했다. 압록강을 경계로 밤만 되면 양쪽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방송이 그칠 날이 없었다.


대치가 극에 달하자 완화 분위기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이 물꼬를 텄다. 외국에 대사들을 다시 파견하고 외국 지도자들을 중국으로 초청했다. 1969년 9월 중국은 10월1일 천안문광장에서 거행될 개국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북한에 발송했다.


김일성은 즉답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임박해서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용건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했다. 베이징에 온 최용건은 환대를 받았다. 천안문 누각 위에서 마오쩌둥과 포옹을 나누고 회의실에서 장시간 얘기를 나눴다. 운남강무당과 황포군관학교를 거친 최용건의 중국 인맥은 화려했다. 오랜만에 만난 당 지도부와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북-중 관계가 회복될 기미였다.



1970년 4월 5일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과 함께 시가지를 통과하는 저우언라이. 



이듬해 4월5일 총리 저우언라이가 평양을 방문했다. 김일성과 최용건의 영접을 받은 저우언라이는 귀국하기까지 3일간 문혁 이후 복잡했던 북-중 관계의 회복에 나섰다. 김일성도 문혁을 이해한다며 베이징 방문을 약속했다.


영토문제·북한의 친소정책 탓 - 65~69년 북-중 관계 파탄 위기
마오, 북 지도자 초청 ‘화해 물꼬’ - 70년엔 저우언라이를 평양 보내 - 김일성 베이징 방문 약속 받아


김일성의 중국 방문은 전주곡부터 요란했다. 그해 6월에 부수상 박성철을 파견하고 7월에 총참모장 오진우를 보내 중국의 의도를 탐색했다. 중공 지도부가 총동원돼 박성철과 오진우 일행을 환영하고 마오쩌둥이 두 사람을 접견한 뒤에야 베이징행을 결정했다.


 이때 통역을 담당했던 초대 주한중국대사 장팅옌(張庭延)의 회상을 소개한다.

“당시 나는 베이징에서 천리 밖에 있던 57간부학교에서 노동 중이었다. 갑자기 베이징으로 오라는 통보를 받고 부랴부랴 행장을 수습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꼬박 이틀 만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온몸이 먼지투성이였다. 마오 주석의 말은 원래 이해하기가 힘들었지만, 나도 오랫동안 조선말을 안 쓰다 보니 통역에 애를 먹었다.


김일성은 비밀 방문을 원했다. 마오 주석과 저우 총리만 만나면 된다. 저우 총리는 평양을 다녀갔지만 마오 주석은 평양에 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주석이 보고 싶어서 가는 것이니 널리 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1970년 10월8일 김일성의 베이징 방문을 마오쩌둥은 중요시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중난하이에서 환영연을 베풀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중국땅을 밟은 김일성에게 세심한 배려를 했다. 직접 김일성의 숙소인 조어대(釣漁臺·댜오위타이)를 찾아가 저녁을 함께 하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김일성이 나이를 거론하며 펄쩍 뛰어도 듣지 않았다. “나이는 무슨 놈의 나이, 우리는 평등한 사이다.”


몇 년간 만나지 못했던 두 사람은 할 말이 많았다. 2시간이 넘도록 저녁을 먹으며 얘기가 그치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먼저 그간 있었던 중국 쪽 과오를 인정했다. “우정이 첫번째고 오해는 그다음이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한집안이나 마찬가지다. 공동의 적에게 반대하고, 공동으로 각자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중, 방중 김일성 성대히 맞아 - 조선노동당 창당일까지 챙겨줘 - ‘감동’한 김일성 귀국뒤 교류 활기
부쉈던 마오 아들 묘 새단장하고 - 이듬해부터 해마다 중국 찾기도


이튿날 오후에 열린 김일성과 저우언라이의 회담은 7시간이 지나도 그칠 줄을 몰랐다. 모두 입술이 마를 정도였다.


10월10일은 조선노동당 창당 25주년 기념일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이날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인민대회당에 김일성과 수행원들을 초청해 성대한 경축연을 베풀며 국공전쟁 시절 김일성이 보내준 황색 다이너마이트 얘기를 그칠 줄 몰랐다. 감동한 김일성은 이날 이후 1년에 한두번은 꼭 중국을 찾았다.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별 재미가 없었던지 발길이 뜸했다.


김일성이 귀국하기가 무섭게 북-중 관계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0월17일 저우언라이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정준택과 대외경제위원장 김영련을 접견하고, 북한대사관에서 열린 만찬에 리셴녠(李先念)과 함께 참석해 우호를 만방에 확인시켰다.


워낙 사연이 많은 사이들이다 보니 맘만 먹으면 벌일 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중국은 한국전 참전 20주년 기념대회도 열었다. 저우언라이와 캉성(康生), 장칭(江靑), 장춘차오(張春橋), 예췬(葉群), 왕둥싱(汪東興), 궈모뤄(郭沫若) 등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총 출동한 성대한 집회였다.


베이징의 북한대사관은 허구한 날 중국 당·정 지도자들의 방문을 준비하느라 날밤을 새웠다고 한다. 북한 영화 <꽃파는 처녀>가 중국 전역에 상영되기 시작했다.


평양으로 돌아온 김일성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간 미련한 짓들만 골라서 했다며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을 다시 단장하고 마오안잉의 무덤 앞에 흉상까지 세우라고 지시했다. 중국과 미국의 관계개선에도 찬물을 끼얹지 않았다.


1971년 키신저가 몰래 중국을 방문했다. 회담을 마친 저우언라이는 북한의 반응을 우려했다. 키신저가 베이징을 떠나자 곧바로 평양으로 향했다. 김일성을 만난 저우언라이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이유를 상세히 설명했다. 듣기를 마친 김일성도 저우언라이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건 중대한 문제다. 나는 원칙적으로 중국의 구상에 찬성한다. 우리도 정치국 회의를 소집해 토의하겠다. 토론 결과는 베이징에 대표를 파견해 통보하겠다.”


당일로 돌아가려던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이 “안색이 안 좋다. 쉬며 개고기라도 먹고 가라”는 바람에 하루를 지체했다. 저우언라이는 그날 김일성과 함께 먹은 개고기 코스 요리가 어찌나 맛있었던지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랑을 했다.


김일성이 제1부수상 김일을 파견해 “중-미 관계 개선을 동의한다”는 조선노동당 중앙정치국의 입장을 통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일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평양을 방문한 체코 대통령에 대한 환영연설 중간에 중국과 미국의 관계개선을 지지한다고 밝혀 공개적으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안심시켰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24. 대북관계 전면 나선 덩샤오핑

- 저우언라이, 죽기 전 김일성에 “앞으론 덩샤오핑과 상의하라”



1982년 4월, 덩샤오핑은 중공 중앙 총서기 후야오방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김일성과 함께한 덩샤오핑

덩샤오핑은 한반도 안정에 나름대로 기여를 했다. 그러다 보니 남북한 어디서건 비난받은 적이 없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중공 1세대 지도자들처럼 북-중 관계도 원만했다.


덩샤오핑과 북한의 인연은 1961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4차 대회에 중공 대표단 단장 자격으로 참석하면서부터 시작됐다. 50년대에도 김일성이 중국에 왔을 때마다 접촉은 있었지만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평양에 온 덩샤오핑은 환대를 받았다. 단독으로 김일성과 여러 차례 회담하며 북한 지도층과도 안면을 텄다.


귀국한 뒤에도 덩샤오핑은 북한과의 인연을 계속 쌓아갔다. 1962년 6월16일, 박금철이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을 이끌고 베이징에 도착했다. 당시 중공 총서기였던 덩샤오핑은 박금철이 베이징을 떠나는 날까지 14일간 행동을 함께 했다.


우한(武漢)에 있는 마오쩌둥을 만나러 갈 때도 동행했고,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가 국부 쑨원의 부인 쑹칭링(宋慶齡)과 함께 베푼 만찬 석상에서도 박금철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총리 저우언라이가 한밤에 박금철의 숙소를 방문했을 때도 덩샤오핑은 배석했다.


덩샤오핑, 문혁때 몰락했다 -  73년 복직했지만 4인방이 ‘위협’- 김일성이 ‘구세주’ 될 줄이야…

75년 김일성 ‘병문안차’ 방중 - 병석의 마오와 저우언라이 - 김일성에 덩샤오핑 직접 연결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 소개 - 그 뒤 이틀간 내리 회담·여행도


덩샤오핑의 두번째 평양 방문은 1964년 봄이었다. 첫번째와 달리 비밀 방문이다 보니 무슨 의견을 교환했는지는 공개된 적이 없다. 소련의 흐루쇼프가 몰락한 직후여서 소련 공산당과의 관계 설정을 놓고 이런저런 의견들이 오갔으리라 짐작되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김일성은 덩샤오핑을 높이 평가하지 않은 듯하다. 북-중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부족한 방문이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과 함께 몰락한 덩샤오핑은 린뱌오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저우언라이의 병세가 심각해지는 바람에 1973년 복직에 성공했다. 2년 뒤, 당 부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해방군 총참모장을 겸했지만, 권력을 잡고 있던 4인방은 덩샤오핑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전부터 해오던 경험주의 비판에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정치국원들을 동원해 저우언라이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최종 목표가 덩샤오핑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알 정도였다. 마오쩌둥도 4인방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죽을 맛이었다. 저우언라이는 8시간 동안 수술을 받는 등 병상에서 허덕이고 있었고 마오쩌둥과의 단독 대면은 거부되기 일쑤였다. 직접 만나 정치동향을 보고하고, 속내를 읽기 위해 지혜를 짜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김일성이 구세주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1975년 4월2일 중공 원로 둥비우(董必武)가 세상을 떠나더니 4일 뒤엔 장제스(蔣介石)가 타이베이에서 숨을 거뒀다. 베이징과 평양에 장기 체류하던 시아누크의 지원을 받은 크메르루주가 캄보디아 프놈펜에 입성했다. 세상이 복잡하게 돌아갈 징조였다.


이때 김일성이 “마오쩌둥 방문과 저우언라이의 병문안을 위해 중국을 공식방문하겠다”고 중국 쪽에 통보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 노동신문 주편 이용익과의 회견에서 김일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중국 방문을 환영한다. 준비에 만전을 기하겠다.”


9개월간 항저우에서 요양중이던 마오쩌둥도 김일성이 온다는 말에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마지막 만남. 1975년 4월18일, 베이징 중난하이

덩샤오핑과 김일성을 직접 연결해준 사람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였다. 17일 오후, 국경도시 단둥에 도착한 김일성은 대기하고 있던 외교부장 차오관화(喬冠華)의 안내로 베이징으로 향했다.


베이징역에서 덩샤오핑, 장칭(江靑), 야오원위안(姚文元), 천시롄(陳錫聯) 등의 영접을 받은 김일성은 중국 쪽이 짜놓은 일정에 구애받지 않았다. 곧바로 마오를 만나겠다고 덩샤오핑에게 요구했다. 김일성이 오진우와 함께 마오를 만난 자리에 배석한 중국 지도층은 덩샤오핑이 유일했다.


2003년에 공개된 당시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담화 내용을 소개한다. 마오쩌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총리가 병이 났다. 그것도 암인지 뭔지 아주 고약한 병이다. 1년간 3번 수술했다. 방광에 이상이 있어서 두번 칼을 댔더니 대장에도 이상한 물건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또 칼질을 했다.”


김일성이 “덩샤오핑 부주석을 통해 알고 있다”고 하자 덩샤오핑이 보충설명했다.

“총리가 수술할 때마다 현준극 대사를 통해 김 주석에게 보고했습니다.”


덩샤오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오는 잘했다며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말을 계속했다. “둥비우가 세상을 떠났다. 총리도 환자고 나도 환자다. 캉성(康生)과 류보청(劉伯承)도 병 때문에 고생이 심하다. 이제 멀쩡한 건 너희 둘밖에 없다”며 김일성과 덩샤오핑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내 나이 이미 82세, 거동 못할 날이 멀지 않았다. 그땐 너희들에게 의지할 생각이다.”

김일성은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하고, 덩샤오핑은 이제야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날따라 마오는 말이 많았다. 자신의 상태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래도 생각은 정상이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


김일성이 말을 받았다.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주석이 오래 사시는 겁니다.”

마오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하자 김일성이 이유를 물었다. 마오가 “염라대왕이 자꾸 한잔하자며 초청장을 보낸다”며 웃자 김일성도 웃었다. 가지 마십시오.”


마오쩌둥은 북한의 유전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아직도 석유를 못 찾았느냐? 빨리 찾아라. 석유와 원자탄이 제일 중요하다. 그거 두개만 있으면 어디 가도 큰소리칠 수 있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잘난 척해도 국제사회에서 알아주지 않는다.”


이날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덩샤오핑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며 손으로 덩샤오핑을 가리켰다. “저 사람이 바로 덩샤오핑이다.” “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그간 많은 일을 한 옛 친구고 동지입니다.” “전쟁도 할 줄 안다.” “전쟁뿐 아니라 정치공작에도 능합니다. 지금은 사상투쟁을 진행중입니다. 10년간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홍위병에게 한동안 쫓겨났었다. 지금은 별일이 없다. 고꾸라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지금 우리는 저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도 환영합니다.”


마오쩌둥의 거처를 나선 김일성과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의 병실로 직행했다. 저우언라이도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배석한 덩샤오핑을 김일성에게 소개했다.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의논할 일이 있으면 이 사람과 상의해라.”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의중을 파악한 김일성과 덩샤오핑은 이틀간 내리 회담하고 3일간 난징(南京) 여행도 함께 다녀왔다.


78년 덩샤오핑 평양방문 ‘성대’ - 1주일 내내 김일성과 붙어다녀
그의 마지막 외국방문도 평양 - 늘 북한의 체면 신경 써줬다


평양으로 돌아온 김일성은 그해 말 저우언라이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접하자 특사 파견을 제의했다. 중국 쪽이 사람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한다며 완곡히 거절하자 김일성은 저우언라이의 사망이 임박했다고 직감했다. 1월8일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중공은 북한대사관에 제일 먼저 통보할 정도로 김일성에게 신경을 썼다.


저우언라이의 사망을 보고받았을 때 김일성은 눈에 질병이 심해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도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려 했지만 중국은 국가지도자의 영결식에 외국인이 참석한 전례가 없다며 거절했다. 몇날 며칠을 뜬눈으로 울다 보니 눈이 퉁퉁 붓는 바람에 수술 날짜를 미룰 정도였다.


그래도 직성이 안 풀렸는지 김일성은 저우언라이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3년 뒤 북한 땅에 세운 유일한 외국인 동상 제막식이 흥남화학 비료공장에서 열렸다. 9개월 뒤,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김일성은 평양의 중국대사관에 설치된 영당(靈堂)을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갔다.


덩샤오핑의 세번째 평양 방문은 1978년 9월8일이었다. 저우언라이 사망 뒤 또 쫓겨났다가 4인방이 체포되자 정계에 세번째로 복귀했고, 당과 정부는 물론이고 군까지 장악한 덩샤오핑의 방문을 김일성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게다가 9월9일은 마오쩌둥 사망 2년째가 되는 날이기도 했다. 김일성은 덩샤오핑이 가는 곳마다 같이 다녔다. 돌아가는 날까지 1주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것도 온종일 단독회견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함흥을 방문한 날은 시민 8만명을 동원해 카퍼레이드까지 벌였다.


덩샤오핑의 마지막 외국 방문지도 북한이었다. 1982년 4월에도 덩샤오핑은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과 함께 평양을 찾았다. 전통적 우의와, 국가와 국가 간의 특수한 관계를 세계에 재확인시켰다.


한-중 수교 과정에서 한때 북-중 관계는 미묘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덩샤오핑은 북한의 체면에 신경을 썼다. 중요한 일은 꼭 북한 쪽에 먼저 통보했다.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  김명호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