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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11회 ~ 15회]

문수봉(李楨汕) 2018. 1. 29. 15:49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11회 ~ 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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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북한 전역에 ‘화교위원회’ 설립- 김일성, 중공의 ‘북한화교 동원 공작’ 전폭적 지원 


 


김일성은 중국을 방문할 때 지안(輯安)을 경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저우언라이는 지안까지 마중을 나왔다. 1953년 가을, 지안역에 도착한 김일성 일행을 저우언라이가 맞고 있다. 저우언라이와 함께 나온 동북인민정부 주석 가오강(高崗; 저우언라이 뒤 안경 쓴 사람)과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 김일성 뒤)의 모습도 보인다 

1992년 봄쯤으로 기억된다. 홍콩에서 알고 지내던 중국의 유명 잡지 편집인의 전화를 받았다. 내용은 간단했다. “어제 왕멍(王蒙)이 서울에 갔다. 한국이 초행이다. 네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연락이 올테니 만나봐라. 한나절 같이보내며 이런저런 얘기 나눠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연락했다. ”


지금도 그렇지만, 작가 왕멍에 대해서는 간간히 이름만 들었을 뿐, 아는게 거의 없을 때였다. 89년 천안문사태로 실각한 자오즈양이 권좌에 있던 시절 문화부장을 지냈다는 것도 당시에는 몰랐다.


중국의 지식인 중에는 대한족주의자(大漢族主義者)들이 수두룩하다. 거의 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본명보다 김용(金鏞)이라는 필명으로 널리 알려진 무협소설가 차량융(査良鏞)이나, 철학자 펑요란(馮友蘭), 명 산문가 지셴린(季羨林) 등 우리 귀에 낯설지 않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세상 구경을 많이 한 사람들일수록 정도가 심하다. 겉과 속이 달라야 세련된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답게 겉으로는 웃지만 속은 딴판이다. 특히 한국을 보는 눈이 그렇다.


왕멍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을 아래로 보는 기색이 표정에 묻어났다. 첫마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어제 회의장에 가서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회의였다. 도대체 나를 왜 초청했는지 모르겠다”며 픽 웃었다.


 초청한 사람들을 깔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 아침 베이징에 전화했다. 서울이 어떠냐고 묻기에 비행장과 호텔이 좋다고 말했다.”


초청한 기관을 듣고보니 전혀 엉뚱한 사람을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말이 나올만도 했지만 기분은 썩 좋지않았다.


몇년 뒤, 베이징에서 다시 만났을 때 태도가 확 달라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시종일관 한국 찬양 일색이었다. 내 중국친구에게 “왕멍은 네가 중국인인줄 알았다”고 하더라는 말을 듣고서야 이해가 됐다.


그와 서울 광화문 옛 중앙청 인근을 지날 때 왕멍이 정율성(鄭律成·1914~76)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이름은 들었지만 노래를 들어본 적은 없다고 하자 외교관 딩쉐쑹(丁雪松·1919~2011)을 아느냐고 물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회고록이나 평전이 있냐고 묻자 볼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율성의 부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때만 해도 나는 눈뜬 장님이었다. 홍콩에 간김에 딩쉐쑹의 회고록을 구해보니 겉표지가 눈에 익었다. 건성으로 몇 페이지 봤던 기억이 새로웠다. 객지의 호텔방에서 다시 봤지만 끝까지 보지는 않았다. 6·25 전쟁이 남쪽에서 도발한 전쟁이라는 구절이 나오자 그냥 덮어버렸다.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그 후에도 왕멍은 한국을 심심치않게 다녀갔다. 한번은 가까운 친구에게 왕멍이 정율성의 고향에 가서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불렀다는 말을 들었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적절한 처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였다. 정율성을 “중국 조선족”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겐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년의 딩쉐쑹. 여성으로는 중국 최초의 외국 주재 대사였다. 네덜란드와 덴마크 대사를 역임했다. 1992년 2월14일 오후, 베이징의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건물 앞에서 


동북전쟁중이던 중국 공산당은 - 화교들 재력·인력 동원 시급했다 - 서둘러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
김일성에 “협조해달라” 서신 보내자 - 공작에 필요한 간부파견 허용했다

조선노동당 중앙·각 도 당위원회에 - 화교위 설립, 비서장에 딩쉐쑹 임명
“주리즈 지시 받으라”는 말과 함께 - 모든 권한 부여하고 업무 일임했다


정율성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점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쟁의 상처가 가시고, 남북이 서로 오가는 날이 오면, 우리가 새롭게 조명해야 될 사람들 중 그 이름이 맨 앞에 올라가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 정율성이다.

“신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을 작곡한 네얼과 불후의 명작 ‘황하대합창(黃河大合唱)’의 작곡자 시싱하이(洗星海)의 뒤를 잇는 걸출하고 우수한 작곡가이며 중국 무산계급 혁명음악 사업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라는 전 중국 국가 부주석 왕쩐(王震)의 평가가 바뀔 가능성도 전혀 없다.


정율성은 북한의 군가인 ‘조선인민군행진곡’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중국쪽 기록에 의하면 한 사람이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사람은 정율성이 유일하다고 한다. 몇 년 전 딩쉐쑹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정율성의 고향인 국내 한 광역시에서 조문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아무리 고향이 자랑하는 인물의 부인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이다. 사설단체라면 모를까, 공공기관에서 나선 일이 적절했는지는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슨 일이건 때가 있는 법이다. 이 일은 세월이 지나면 후손들이 해야 마땅한 일이다.


딩쉐쑹은 남편 정율성 못지않게 북한과 인연이 깊었다. 중공 동북국 평양주재 전권대표 주리츠가 이끌던 ‘평양 이민공사’ 외에도 ‘북조선화교연합총회’라는 거창한 이름의 단체가 있었다. 화교위원회 비서장이었던 딩쉐쑹은 이 단체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일본 패망 직후, 한반도에는 6만명에 가까운 화교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중 2만여명이 38도선 이북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직업도 다양했다. 90%가 산둥 출신이다보니 농업 인구가 제일 많았지만 음식점, 잡화상, 바느질가게, 이발소 등을 운영하는 화교도 적지 않았다.


일본은 36년간 화교와 조선인들을 이간시켰다. 특히 중일전쟁이 본격화된 후에는 한국인들에게 ‘지구상에서 가장 게으르고, 비겁하고, 야비하고, 지저분한 민족이 중국민족’이라고 각인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식민지 교육의 귀재였던 시오하라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부임해 기획한 이 교육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골목에서 한국과 화교 청소년들이 조우하면 서로 조롱하고, 끝내는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특히 화교 밀집지역이던 서울의 순화동 골목은 조용할 날이 하루도 없을 정도였다.


연일 화교 배척사건이 일어나기는 북쪽도 마찬가지였다. 남쪽보다 더 심했다. 밖에 나갔다가 머릿통 깨지거나 엉금엉금 기어들어오는 사건들이 하루에도 몇건씩 발생했다.


그 와중에 동북에서 국공전쟁이 발발하자 상류층에 진입한 화교들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북한의 화교들 중에는 국민당을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국 공산당 편에 선 사람은 소수였다. 어느편에 서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화교들이 대부분이었다.


중공 동북국은 북한의 화교들을 같은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공작을 서둘렀다. 화교들의 재력과 물력,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 북한측에 협조를 요청했다. 동북국 부서기 천윈이 조선 노동당측에 화교 공작에 협조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편지를 받은 김일성은 이의가 없었다. 그쪽에서 알아서 하라며 화교 공작에 필요한 간부들을 파견해도 좋다는 답신을 보냈다. 중공 중앙과 동북국에서 파견된 간부들은 조선 노동당 중앙과 각 도의 당 위원회에 화교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김일성은 화교위원회를 대놓고 지원했다. 주임은 조선노동당원 중에서 임명했지만 뭘하는지 알 필요도 없다며 업무에서 배제시켰다. 비서장에 중국인을 임명해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이쯤되면 북한의 화교 업무를 중공측에 일임한거나 다름없었다. 김일성은 정율성의 부인 딩쉐쑹을 비서장에 임명했다.


1946년 겨울, 김일성은 딩쉐쑹에게 ‘조선 노동당 중앙교무위원회 비서장’ 임명장을 주며 주리츠의 지시를 받으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평양 이민공사의 진남포 지사장이었던 궁허셴(宮和軒)의 보좌관은 당시 딩쉐쑹이 김일성의 비서 비슷한 역할을 했다는 구술을 남겼다. 길지만 추려서 인용한다.


“궁허셴은 동북으로 보낼 무기와 장비 구입에 여념이 없었다. 하루는 함께 거리에 나왔다가 누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중국어가 유창한 조선인이었다. 궁허셴과는 항일전쟁시절의 동료였다. 궁허셴이 ‘군수물자 구입을 위해 왔다. 산둥 지역에는 조선인들에게 필요한 물건이 많다.


산둥의 특산물과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무기를 교환하고 싶다’고 하자 조선인은 김일성 위원장을 만나면 모든게 해결된다며 소개장을 써줬다. 평양에 가서 김일성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소개장을 내밀며 신분을 밝혔다. 잠시 후 한 여인이 나타났다. 우리는 조선말을 한마디도 못했다. 의사 교환을 어떻게 해야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여인이 김일성 위원장이 대신 만나보라고 했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딩쉐쑹이라면 옌안(延安)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름이었다. 조선인 정율성과의 연애 때문에 옌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딩쉐쑹은 우리를 김일성의 집무실까지 데리고갔다. 김일성은 우리 부탁을 모두 들어줬다. 다롄(大連)항에 있는 물자를 들여오고 싶다고 하자 서두르라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업무를 마친 나는 동북에 돌아와 고향 지안(輯安)의 철도청에 근무했다. 김일성 주석이 지안을 방문했을 때는 며칠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일도 일이지만, 진남포 시절 우리에게 해줬던 일을 생각하면 피로가 순식간에 달아났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12. 국공내전 전세 바꾼 ‘108일 전투’

 - 승전보 접한 마오쩌둥 “김일성은 일국 지도자…예의 갖춰라”
 

 

1947년 1월, 전선에서 돌아오는 동북민주연군을 맞이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린장 군민들 

1945년 8월8일, 소련이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이틑날 오전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는 일본 관동군사령관과 참모장의 방문을 받았다. 사령관은 소련 적군의 소·만 국경 월경 사실을 통보하며 퉁화(通化)로 정부를 이전한다고 통보했다.

당시 배석했던 푸이의 친척에 의하면 이전 장소로 퉁화를 선택한 이유도 설명했다고 한다.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했을 경우 천황 폐하도 퉁화로 올 계획이다. 통화의 산속에 대규모 지하 공사를 완료한지 오래다.” 실제로 퉁화의 산간지역에는 도처에 인공 지하요새가 널려있었다.

만주국 수도 창춘(長春: 당시는 신경(新京)이라고 불렀다)을 떠난 푸이 일행은 퉁화까지 가지 못했다. 지린(吉林)을 경유해 8월13일 새벽, 압록강을 마주하는 린장(臨江)현 다리쯔(大栗子)에 도착했다. 다리쯔의 청산녹수(靑山綠水)는 한마디로 별천지였다. 울창한 삼림과 압록강, 강 건너 조선 땅이 보였다.

린장 일대는 대청 제국의 문을 연 누르하치가 300여년 전 호랑이 눈 피해가며 산삼을 캐던 곳이었다. 할아버지의 발상지에 초라한 몰골로 도달한 푸이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가늠할 방법이 없다. 8월15일, 히로히토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며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다음날 푸이도 퇴위조서를 발표했다. 평민으로 돌아온 푸이는 “청산은 변함이 없고, 푸른물은 항상 흐른다, 훗날을 기약하자”며 린장을 떠났다. 일년 몇 개월 뒤, 이 평화로운 폐광지역에 엉뚱한 인물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압록강을 분주히 오가며 새로운 정권의 탄생을 예고하는 전주곡을 온 천하에 선보였다.

1946년 10월, 중국 국민당은 김일성의 제안에 의해 장백산 일대에 근거지를 마련한 동북민주연군(중국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전신)과 일전을 준비했다. 같은해 12월17일부터 이듬해 4월3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두위밍(杜聿明), 쑨리런(孫立人), 랴오야오샹(廖耀湘) 등이 지휘하는 국민당군(국민혁명군) 주력 8개사단이 4차례에 걸쳐 린장 지역의 동북민주연군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린뱌오(林彪)가 총 지휘하고 류야러우(劉亞樓), 샤오징광(蕭勁光), 훙쉐즈(洪學智), 리줘평(李作鵬) 등이 지휘한 동북민주연군은 국민당군의 끈질긴 공격을 저지하며 국민당군을 괴멸시켰다.

중공 전사(戰史)에 ‘4보임강(四保臨江)’으로 기록된 108일간의 전투는 국공내전의 이정표였다. ‘4보임강’에서 승리한 동북민주연군은 여유를 찾았다.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한 동북연군은 1948년 다시 공세로 전환,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승전보를 접한 마오쩌둥은 지휘관들에게 전문을 보냈다. “(전투에서 우리를 도와준)김일성은 지난날 우리의 동지였지만, 이제는 일국의 지도자다. 앞으로는 예의를 갖춰라.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예전처럼 허물 없이 대하지마라.”


1983년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을 맞이하는 천윈(왼쪽). 1946년 겨울 린장 보위전을 계기로 첫 인연을 맺었다 


압록강변 마주한 린장 일대에서 - 국민당군과 벌인 ‘린장 보위전’ 평북 초산은 동북군 최대 후방기지  300가구 마을에 13개 기관 이전-중공 부상병 1만5천명 북한서 치료-국민당군 괴멸뒤 주리즈보고서 

 “조선의 공로를 잊어선 안 된다 -형제국 곤란 겪으면 보살펴야” - 공식 외교관계 때 유의사항 언급


전쟁은 묘하다. 제 아무리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정신력으로 무장됐다하더라도 후방이 든든하지 않으면 승리할수 없다.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되고, 보급이 원만하지 못하면 사기와 정신력은 순긱간에 허물어진다. 린장 일대에서 국민당군과 일전을 앞둔 동북민주연군 사령관 린뱌오는 중공 동북국 서기와 정치위원을 겸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동북국 부서기 겸 부정치위원인 천윈을 북한으로 파견했다. 이어서 랴오둥(遼東) 군구사령관 샤오징광 앞으로 전문을 발송했다. “후근(후방) 업무가 중요하다. 안전한 지역에 후근부를 설치해라.” 안전한 지역은 강 건너 조선땅 외에는 없었다.


랴오둥 군구는 평안북도 강계에 후근부를 설치했다. 압록강변인 평북의 수풍, 초산, 만포, 중강 일대에 탄약고를 설치하고 필요할 때마다 강 건너 다리쯔, 창바이(長白), 안투(安圖)로 운송했다. 군량미 저장소와 의약품, 피복창고도 중강진과 초산 일대로 분산시켰다. 신의주, 만포 할 것 없이 북한 땅 곳곳에 랴오둥 군구의 창고가 들어섰다.


린장 보위전이 시작되자 군구 후근부는 북한에 저장했던 전략 물자들을 다시 동북으로 수송했다. 압록강 연변은 김일성의 지시로 동원된 군, 관, 민들로 복작거렸다.


전쟁기간 동안 평북 초산은 동북 민주연군이 북한 땅에 설치한최대의 후방기지였다. 300여가구가 살던 작은 지역에 랴오둥 군구 공병부와 야전병원을 포함해 13개 기관이 이전해 있었다. 심지어 퉁화현은 현 정부가 통째로 와 있었다고 한다.


전쟁은 사람 죽이는 놀음이다. 의료시설이 중요하다. 장정과 항일전쟁을 경험한 중공은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왔다. 의료진과 의약품의 확보가 전쟁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부분만 간단히 언급한다.


일본 패망 직후 하얼빈 등 대도시를 점령한 동북 민주연군은 일본이 운영하던 병원의 의사와 의약품들을 징발했다. 랴오둥 군구 위생부는 이들을 압록강 인근으로 집결시켜 북한 경내 진입을 준비했다. 다리쯔에 임시 총부를 신설하고 의사라면 돌팔이건 가축병원 의사건 깡그리 긁어 모았다.


사람을 치료해 본 적이 없다며 나서기를 거부하는 동물병원 의사들에겐 사람도 동물이라며 윽박질렀다. 북한 땅에 중국인 의사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김일성은 이들을 각 군에 골고루 배치했다. 만포와 강계 쪽에 특히 많았다. 일부는 항일 빨치산 시절의 추억이 어린 옌지(延吉) 지구의 왕칭(汪淸)현에서 대기시켜 전쟁 상황에 대비했다.


의료시설과 부상병들의 압록강 도하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랴오둥 군구 의료공작대원의 회고를 간추려 인용한다.

“산간지역에서 부상병들과 일개월 이상을 보낸 적도 있었다. 순전히 조선 쪽에서 보내오는 의료품 덕분이었다. 사방이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는 다들 죽는줄 알았다. 멀리 눈아래 압록강 바라보며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간신히 숨만 쉴뿐 죽은 목숨이나 매 한가지였다. 하루는 사단에서 파견된 사람이 상부의 지시를 전달했다.

재주껏 산에서 내려와 강변에 집결해라. 압록강만 건너면 무사하다는 내용이었다. 희망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지를 그때 처음 알았다. 당시 조선은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통신기구도 없는 상황에서 산간에 흩어져있는 부상병들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지만 기우였다. 희망이 담긴 소문은 그 어떤 통신기구보다 성능이 우수했다.

사방이 빙설천지였다. 적에게 발각될까봐 큰길은 나갈 엄두도 못냈다. 작은 산길은 얼음투성이였다. 미끄러지고 구르기 일쑤였다. 우리는 부상병들을 소 달구지로 실어 날랐다. 소들이 맥없이 주저않았다. 가까스로 얼음 언덕에 오르면 부상병들을 밑으로 밀었다. 얼음을 타고 내려온 부상병들을 밑에서 받았다. 압록강변에 도달했을 때 낙오자가 한명도 없었다.”


1947년 봄, 린장 보위전이 완료되자 북한 경내에 산재했던 군구의 의약 창고와 의료진들은 다시 압록강을 건너 다리쯔로 철수했다.


린장 보위전은 소수가 다수를 제압한 전쟁이었다. 중공의 주력인 팔로군이나 신사군은 보위전 이전까지만 해도 치고 빠지는 유격전 위주였다. 대형 전투를 치른 적은 거의 없었다. 린뱌오의 명성을 재확인시켜주는 전쟁이기도 했다.


항일전쟁 시절 상승장군이라 불리던 린뱌오도 국공전쟁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대도시를 국민당군에게 내주는 바람에 한동안 ‘철수장군’이라는 오명이 따라 다녔지만 린장보위전을 계기로 “우리는 린뱌오의 전사들”이라는 군가가 저절로 유행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가 됐다. 동북민주연군도 중공의 주력중의 주력, 정예중의 정예로 탈바꿈했다. 린뱌오 39세, 김일성 35세 때였다.


1947년 6월 27일, 중공 동북국 평양주재 연락사무소 전권대표 주리즈는 린장 보위전 기간동안 1만5000명의 부상병이 북한 땅에서 치료받았다는 보고서를 동북국에 올렸다. 1948년 8월11일, 동북 전역에 승리가 임박했을 때도 그는 보고서에서 “조선의 공로를 잊어서는 안된다”며 장차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성립되더라도 염두에 둬야할 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조선과의 관계는 외교관계가 되야한다. 단, 형제 나라와의 외교관계는 제국주의 국가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양국 간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상담이나 회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충분한 비판과 자아비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단결을 모색해야한다. 쌍방의 의견 충돌에 당황해선 안된다. 성급히 풀려고 하지말고 소련에게 주선을 부탁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견지할 것은 견지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해야 한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 조약을 통하거나 협의 형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되 준수해야 한다. 일처리를 할 때 공개와 비밀을 병행해야 한다. 북조선이 국제적으로 곤란에 처했을 때 우리가 보살펴야 한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13. 동북 토비소탕- ‘협상 달인’ 강신태, 1300명 토비를 총 안쏘고 투항시켰다 


 


동북민주연군에게 투항하는 국민당 기병대. 1948년 1월 신민(新民)현 



중일전쟁 초기인 1937년, 시인 원이둬(聞一多)는 학생들과 함께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윈난(雲南)성 쿤밍(昆明)까지 걸어갔다. 전쟁시절이다보니 별일을 다 겪었겠지만, 무슨 못볼 꼴을 봤는지 정부의 무능에 진절머리를 내며 토비(土匪)들에게 애정을 나타내는 일기를 남겼다.

“무슨 놈에 나라가 이렇게 큰지 처음 알았다. 평소 떵떵거리며 거드름이나 피우던 것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야비한지도 직접 체험했다. 나라가 환난에 처하다보니, 평소 사람 값에도 못든다고 여겼던 토비(土匪)들이 저들보다 더 애국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기야, 토비가 인생의 목표였던 사람은 거의 없다. 난세의 부득이한 생존방법 중 하나였다.”


약탈이 직업인 지방 불법세력을 흔히들 토비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떼강도와 비슷하지만 워낙 강대한 지방 무장세력이다보니, 정부가 직접 나선다면 몰라도 현지 관원이나 군인들은 감히 손댈 엄두도 못냈다. 비록 불법조직이긴 했지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다보니, 개중에는 규율이 엄하고 자존심이 강한 토비들도 많았다.


악질 지방 관리만 골라가며 터는가 하면,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과부가 생계를 꾸리는 집은 건드리지 않았다. 위법자는 법으로 다스리고, 부녀자 겁탈도 엄금했다. 여자 토비들도 많았다. 두목은 한결같이 머리(頭)가 잘 돌아가고, 안목(目)이 남달랐다. 평화시기라면 국가원수로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준재들도 손가락으로 셀 정도는 됐다.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을 “마적과 진배 없는 집단”이었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해방 뒤 미 군정시기 경찰 최고급간부 한사람은 “나는 독립운동했다는 사람과 공산당, 그리고 먼지가 제일 싫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요즘 같으면 공산당 매도는 그렇다 치고라도, 독립운동가들을 욕보였다며 당장 목이 달아날 발언이었지만, 친일파였던 형님이 의열단원에게 죽는 바람에 다들 웃어넘겼다고 한다.


동북의 항일세력 중에는 토비 출신들도 많았다.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했던 마덴산(馬占山)도 원래는 토비 두목이었다. 1931년 가을 일본 관동군이 동북을 점령하자 동북의 토비들은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졌다.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성사되자 토비들도 자의반, 타의반, 항일전선에 합류했다.


동북에서는 토비를 마적이라고 불렀다. 현지 사정과 지리에 익숙한 토비들은 일본과의 무장투쟁에서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토비들이 항일투쟁에 뛰어든 가장 큰 이유는 세력의 보존과 유지였다.


청나라 말기에서 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동북의 토비들은 확실한 관할 지역과 조직이 있었다. 일본의 동북 지배는 토비들의 이익을 위협했다. 일본 관동군은 시도 때도 없이 토비들을 소탕하고 토비들도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했다.


항일전에 나선 토비들은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변질됐다. 기율이 산만해지고 일본에 투항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일본도 이들을 적절히 이용했다. 그러다보니 토비에서 항일의 영웅으로 떠 올랐다가 민족의 죄인으로 추락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일본군 따라 도시에 들어가면 고대광실을 차지하고 산해진미와 화류계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일본의 동북점령으로 국민당 정부가 동북에서 통치권을 상실하자 중공은 동북의 토비들을 주목했다. 이론가 후차오무(胡喬木)를 파견해 동북항일 의용군 24로군 결성에 성공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한때 일본과의 투쟁에서 반짝 했을 뿐, 서서히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이들은 토비 생활이 더 적성에 맞았다. 강력한 화력을 소유한 일본군보다는 지방 부호들을 습격하고, 부잣집 아들이나 부녀자를 납치한 뒤 돈 받고 풀어주는 일이 더 편했다. 일본군도 토비와 항일세력들을 엄밀히 구분했다. 직접 습격을 받거나 일본인의 재산을 위협하지 않으면 그냥 내버려뒀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토비 두목. ‘한간’(漢奸)이라는 죄명이 붙은 걸 보면 일제에 협력했던 토비로 추정된다. 


일본 패망뒤 동북에 토비 득실 - 가공할 화력으로 팔로군 공격

평양의 김일성 “토비 소탕” 지시 - 동북인민자치군 사령관 강신태

융원타오 손잡고 2년만에 소탕 - 중공, 민심 얻고 동북 입지 굳혔다

융원타오는 임종 앞두고도 - 한국전 북한군 총참모장이었던 - 강신태 전사를 애석해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당시 동북은 전 중국에서 유일하게 현대화된 곳이었다. 국·공 양당이 동북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중공의 주축부대인 8로군(八路軍)과 신4군(新四軍)이 동북을 접수하기위해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자 국민당도 뒤질세라 최정예군을 동북으로 투입했다.


당시 동북에는 20여만의 토비들이 있었다. 토비들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킨 소련군에 대해 때가되면 떠날 사람들이라며 신경을 안썼다. 일본군이 떠났으니 우리세상이 왔다고 들썩거리던 토비들은 팔로군과 국민당 병력들이 몰려들자 긴장했다. “공비(共匪)들이 우리의 지반을 탈취하기 위해 이쪽으로 몰려왔다. 한판 겨루는 것외에는 별 방법이 없다.”


정통 정권이었던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을 공비(共匪)라고 비하할 때였다. 토비들의 공격에 신경을 쓰기는 국민당군도 마찬가지였다. 중공은 국민당군의 공격을 피해가며 토비들을 소탕했다. 그 과정을 통해 동북에서의 입지를 굳혔다. 중공이 2년만에 동북의 토비를 소멸해 민심을 얻고 세를 확장할 줄은 국공 양당 모두가 상상도 못했다.


김일성은 동북의 토비 소탕에도 일조를 했다. 동북 해방 직후 만주국의 경찰과 헌병, 특무요원들은 토비들을 회유하느라 혈안이 돼있었다. 동북에 진주한 국민당도 토비들을 ‘정치토비’로 변신시키기 위해 지혜를 짜냈다. 아편 거래를 묵인하고 웬만한 불법행위도 눈감아 줬다.


현지 사정에 밝은 토비들은 팔로군을 닥치는 대로 공격했다. 무기를 탈취하고, 납치한 팔로군을 엄동설한에 발가벗겨 산속에 내동댕이 쳤다. 평양의 김일성은 동북에 잔류중인 동북항일연군 출신 지휘관들에게 7가지를 지시했다. 그중 여섯번째가 토비소탕이었다.


1945년 가을 무렵, 남만 지구에는 유난히 토비들이 많았다. 동북에 산재해있던 토비들의 4분의1에 달하는 약 5만명이 이 지역에 몰려있었다. 퉁화(通化), 선양(瀋陽), 안둥(安東:현재의 단둥) 일대가 주 활동 무대였다.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로 무장한 토비들의 화력은 팔로군을 능가했다.


옌볜(延邊)지구에만 해도 약 1만3000명의 토비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온 중공의 동북민주연군을 위협했다. 김일성은 이 지역의 토비 토벌을 김책과 의논했다. 김책이 88국제여단 출신 강신태를 추천하자 김일성도 동의했다.


김일성이 자신의 최측근인 강신태를 염두에 두고도 김책의 의견을 물은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한때 김책은 강신태의 스승이었다. 이때 강신태는 옌볜에 있었다.


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을 준비하던 김일성은 동북에 파견할 옌볜분견대를 조직했다. 박락권, 지병학, 최광 등 30여명으로 구성된 옌볜분견대의 인솔자로 강신태를 지명했다. 1945년 9월5일, 하바로프스크의 88국제여단 부대를 출발한 강신태는 13일만인 9월18일 옌지(延吉)에 도착했다.


10월20일, 중공 동북국은 중공 옌볜위원회 설립을 비준하며 강신태를 서기에 임명했다. 강신태는 옌볜 주둔 소련홍군 경비사령부 부사령관직도 겸했다. 뒤이어 11월 초, 동북국은 옌볜과 안둥을 총괄할 옌안 지구 서기로 웡원타오(雍文濤)를 파견해 동북인민자치군 옌볜국 분구 설립을 서둘렀다. 사령관에 임명된 강신태는 정치위원 웡원타오와 함께 옌볜지구 건군과 토비소탕을 준비했다.


강신태는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계속된 토비 소탕을 국·공전쟁에서 맹위를 떨치게되는 이홍광 지대(토비토벌 당시는 조선의용군 제1지대. 경기도 용인 출신인 이홍광은 조선인 중에서 동북항일연군의 최고위직이었다. 압록강을 넘나들며 평안도 일대의 일본군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1935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마오쩌둥도 추도사를 발표했다.)와 항일영웅 양정위(楊靖宇)를 기리기위해 설립한 양정위 지대와 연합으로 전개했다. 지안(輯安), 퉁화(通化), 린장(臨江), 창바이(長白) 일대의 토비들과 백여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뤘다. 토비 5백여명을 사살하고 4백여명을 포로로 했다. 투항한 천여명은 동북 민주연군에 편입시켰다.


강신태는 1천300여명의 토비들을 총 한방 안쏘고 귀순시킬 정도로 협상에도 능했다. 김일성이 지시하고 강신태가 집행한 남만 지역의 토비 소탕이 아니었다면 장백산 지역에 중공이 최초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97년 9월, 광저우(廣州)의 간부요양 시설에서 중공중앙 고문위원회 위원 웡원타오가 86세로 사망했다. 반세기 전, 동북에서 강신태의 토비 소탕을 거들었던 웡원타오는 죽는 날까지 강신태를 잊지 못했다. 임종을 앞두고도 자손들에게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 총참모장으로 참전해 폭사한 강신태(강건)의 죽음을 애석해했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14. 88국제여단’의 항일유격전- 소련 거점 ‘김일성의 88여단’은 북한 인민군 모체가 됐다 


마오쩌둥은 동북항일연군과 88국제여단 출신들을 환대했다. 1964년 2월,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 외무상 박성철(사진 한가운데) 일행을 접견하는 마오쩌둥

 

북·중 우호관계의 출발점은 동북항일연군과 88국제여단이다. 1937년부터 8년간 전개된 중국 항일전쟁의 지도자는 국민당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였다. 장제스나 국민당 원로들은 북한의 지배층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당시 상황이 워낙 복잡하다보니, 흔히들 우스개 소리로 “놀던 동네가 틀렸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알고나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 많다.


1928년 12월28일, 동북 전역에 중국 국민당의 상징인 청천백일기가 펄럭였다. 이날을 계기로 50만에 육박하던 동북군도 국민당군에 편입됐다. 1931년 가을, 일본 관동군이 무력으로 동북을 강점했을 때 장제스는 일본과의 충돌을 피했다. 동북군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막강전력을 자랑하던 동북군은 하루 아침에 왜적의 침입에 저항을 포기한 군대로 전락했다.


국민당 중앙군의 공세에 쫓겨 옌안(延安)에 안착한 중공 중앙 홍군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때였다. 장제스는 동북에서 철수한 동북군을 시안(西安)에 배치한 후, 옌안의 홍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시안과 옌안은 거기서 거기였다. 위기에 몰린 중공은 선전전과 동북군과의 연합에 치중했다.


동북을 총 한방 안쏘고 일본에게 내주자 온 중국이 들썩거렸다. 중공의 지하당원이나 지지자들 중에는 선전의 고수들이 많았다. 중공은 국민당 통치에 염증을 느낀 진보적 지식인들도 적절히 활용했다. 말로만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보니 회유도 수월했다.


동북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항일 무장세력의 기개를 찬양하는 글과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현재 중국의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이 동북의 엄동설한에서 흰눈에 붉은 피를 뿌린 항일의용군의 처절한 투쟁을 영화화한, <풍운아녀(風雲兒女)>의 주제곡인 것을 보면 당시 중국인들의 정서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항일전쟁을 촉구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제 나라 땅에 들어온 남의 나라 군대를 내쫓자”는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부의 암덩어리인 중공 홍군을 먼저 정리하고 일본과 일전을 겨루겠다는 장제스의 기본전략인 ‘안내양외(安內攘外)’는 더이상 국민들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민심이 따르지 않다보니 정책의 옳고 그름은 둘째 문제였다. 중공 지도부는 공공외교에도 능했다. 미국 언론인 에드거 스노 등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정당성과 존재 이유를 외부세계에 알리는데도 성공했다.


근거지 동북을 떠나 유랑민 신세가 된 동북군은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장제스는 이들에게 무기나 군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 장제스의 옌안 공격 명령에 “같은 민족끼리 싸우느니, 고향에 돌아가 일본군과 싸우다 죽겠다”며 머뭇거렸다.


이 틈을 중공이 파고들었다. 훗날 6·25전쟁 휴전회담과 제네바 회담을 막후에서 지휘한 리커농(李克農) 등이 동북군의 고급지휘관과 접촉했다. 일선 지휘관들이 호응할 기색을 보이자 전국의 2인자나 다름없던 동북군 최고 사령관 장쉐량(張學良)과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국·공이 연합해 항일전쟁을 수행해야한다는 저우언라이의 의견에 장쉐량도 동의했다


소련에서 귀국한 김일성과 북한 주둔 소련군 지휘관들. 맨 위 왼쪽 첫째가 최석천(최용건). 1945년 가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1931년 일본의 중국 동북 침략에도 - 국민당은 저항없이 철수명령 내려
중공은 반발여론 이용 선전전 치중 - 항일전쟁 촉구 시위가 잇따르고

결국 1936년 국공합작이 성사됐다 -하지만 세력이 약화된 항일연군은

소련에 건너가 전력을 재정비한 뒤 - 김일성 등 주축 ‘88국제여단’ 창립

1천여차례 동북 침투전 승승장구 - 이후 중공과의 돈독함이 이어졌다


1936년 12월 장쉐량이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해 항일전쟁을 요구했다. 저우언라이의 주선으로 국공합작이 성사됐다. 국·공 양당의 최고지도자로 추대된 장제스는 일본에게 전면전을 선포했다. 단, 자신에게 총뿌리를 들이댄 장쉐량은 연금하고 동북군도 해산시켰다. 동북인들의 장제스와 국민당에 대한 불만은 해소할 방법이 없을지경으로 악화됐다.


중국과 일본이 전면전에 돌입하자, 동북의 일본 관동군은 긴장했다. 만주군과 합세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열을 올렸다. 조선인 항일무장세력들은 관동군의 큰 골칫거리였다. 이들을 소탕하기위해 조선 출신들로 구성된 특설대까지 만들 정도였다. 자의건 타의건, 훗날 후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 인물들이 속출했다.


땟국이 줄줄흐르는, 개털 옷을 걸친 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 전사들과 일본 군복을 뽐내는 조선인 청년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영광과 치욕의 개인사를 만들어 나갔다. 박한종, 이홍광, 이민환의 뒤를 이어 유만희, 이복림, 서광해, 황옥청, 장흥덕 등 조선팔도에서 몰려온 열혈 청년들이 동북의 눈밭에서 숨을 거두고, 다른편에 서있던 사람들의 견장은 점점 무거워졌다.


1939년 늦가을, 동북 목단강변의 허름한 상가에서 동북 항일연군의 역사에 남을 회의가 열렸다. 70여개 현에 달했던 항일연군의 활동무대가 10개에도 못미칠 정도로 위축돼 있던 때였다.


신중국 설립 후, 중앙군사위원과 운남성 부주석을 겸하게 되는 저우바오중(周保中)과 항일연군 총 정치부 주임 리자오린(李兆麟), 중공 만주성 위원회 상무위원 펑중윈(馮仲雲;신중국 수리부 부부장과 하얼빈 공업대학 총장, 베이징 도서관 관장 등을 역임), 동북항련 제3방면군 사령관 천한장(陳翰章), 경북 선산 출신 허형식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저우바오중은 획기적인 제안을 했다.

 “현재 동북항일연군은 2천명도 채 남지않았다. 마오쩌둥이 <논지구전(論持久戰)>에서 설파한 전략 사상을 행동에 옮기자.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강 건너 소련으로 가서 원동(遠東)지역에 야영을 설치하고 전력을 재정비하자.”


1940년 3월19일, 소련군 원동변방군 사령부는 중국 손님 3명을 맞이했다. 저우바오중은 소련 측 정치위원에게 곤경에 처한 동북항일연군의 실정을 설명하며 중·소 국경지역에 야영 설립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소련 측도 동북에 주둔하는 일본 관동군의 전략과 군사정보에 정통한 동북항일연군의 협조가 절실했다. 동의를 안할 이유가 없었다. 11월 하순, 동북항일연군 부대들은 흑룡강을 건너 소련 경내로 들어갔다.


김일성도 저우바오중과 함께 소련 행을 택했다. 동북항일연군의 총지휘자 양징위(楊靖宇)에게도 같이 가자고 권했지만 양징위는 고집이 셌다. 무슨일이 있어도 중국을 떠나지 않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40년 2월18일, 양징위는 끝까지 곁을 지키던 조선인 경호원과 함께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소련에서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양징위와 억지로라도 함께 오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소련생활을 시작한 동북항일연군은 남북 두곳에 야영(野營)을 건설했다. 북야영은 강신태(1945년 강건으로 개명), 남야영은 중국인 지칭(季靑)을 책임자로 선출했다.


소련 측의 보급은 부족함이 없었다. 항일연군들은 오랜만에 따듯하게 입고 편한 신발을 신었다. 빵과 고기도 실컷 먹었다. 소련 교관들은 별 이상한 교육을 다 시켰다. 유격전에 대비한 교량폭파와 적진 침투에 필요한 낙하산 훈련은 필수였다. 촬영, 측량, 정찰까지 익히며 동북항일연군의 수준은 하루가 다르게 향상됐다.


1942년 8월, 동북항일연군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정식으로 ‘항일연군 교도여단’을 출범시켰다. 정식 명칭은 ‘소련 원동방면군 제 88보병여단’, 혹은 ‘8641보병특별여단’이었다. ‘88국제여단’이라고도 불렀다.


동북에 흩어져있던 김책, 안길, 최석천(1945년 최용건으로 개명), 김일성, 최현, 강신태 등이 몰려있던 88여단은 북한 인민군의 모체나 다름없었다. 김일성은 이곳에서 “작렬하는 폭파음에 산하가 진동하면, 도처에서 왕샤오밍 얘기로 시간 가는줄 모른다”던 왕샤오밍(王效明)을 비롯해, 펑중윈, 차이스룽(柴世榮) 등과 인연을 맺었다.


88여단의 동북항일연군들은 틈만나면 동북에 침투해 소규모 유격전을 벌였다. 중국 측 통계에 의하면, 1260여차례에 걸친 유격전에서 인명 희생은 2백여명에 불과했다고한다. 여단 내에는 4명의 영장(營長)이 있었다.


제1영장이 김일성이었다. 차이스룽, 왕밍꾸이(王明貴), 왕샤오밍 등 나머지 세명의 영장 중 차이스룽은 1944년 소련에서 세상을 떠났고, 왕밍꾸이와 왕샤오밍은 1955년 소장 계급장을 받았다. 각 영의 정치위원 중 세명이 안길, 강신태, 김책 등 조선인이었다. 직급은 최석천이 여단의 부참모장으로 제일 높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하자 88여단의 동북항일연군 소속 중국인 선발대는 57개 소조로 나뉘어 동북의 중소 도시로 잠입했다. 소련 군복에 소련군 군관 계급장을 착용한 선발대원들은 러시아어에 능했다. 동북의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소련군과 협조가 잘됐다.


국민당이 발 빠르게 소련과 우호조약을 맺었지만 중공의 홍군과 신4군이 동북으로 밀려오는 것을 묵인하기까지는 이들의 도움이 컸다. 이쯤되면 동북에서 국공내전이 벌어졌을 때 중공이 김일성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고, 김일성이 중공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15. 중공 산하 조선인 부대 - “중공 승리해야 조선 해방” 조선인에게 투항이란 없었다 



평양으로 부임하는 초대 북한 주재 중국대사 니즈량(왼쪽 넷째)을 환송하는 중국 외교관들. 왼쪽 셋째가 외교부 판공청 주임 왕빙난(王炳男), 오른쪽 둘째는 훗날 초대 유엔대사와 외교부장을 역임하게 되는 차오관화(喬冠華). 북한의 초대 주중대사 이주연의 모습(왼쪽 둘째)도 보인다. 1950년 8월 베이징역. 

현대 중국의 경우, 정당과 정당 간의 합작은 성공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중국의 대표적 혁명정당인 국민당과 공산당도 예외가 아니다. 2차례 합작을 했지만, 뭔가 될 것 같다가도 결국은 피 비린내를 뿌리고 국민들만 골탕먹였다.


그런 와중에서 중국에 와 있던 우리 혁명가들도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북-중 관계의 뿌리도 얽히고설킬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밀월관계만 유지한 건 아니었다. 그 연원이 현 북한 정권의 주축이 된 동북항일연군과 88여단 출신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워낙 복잡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들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어차피 인간이 만든 일,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니다.


1923년 6월, 중국 공산당은 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듬해 1월20일, 광둥성 광저우에서 열린 국민당 전국대표자대회도 공산당원이 기초한 반제반봉건 선언을 통과시켰다. 1921년 창당 이후 180여차례의 파업을 주도한 솜씨를 무시할 수 없었다. 30일까지 열흘간 계속된 회의는 10명의 공산당원을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이나 후보위원에 선출했다. 국민당에 입당한 중공 당원들은 조직부장과 농민부장, 선전부장 대리 등 요직을 독차지했다.


1차 국공합작의 막이 오르자 전국에 산재해 있던 국민당 지부는 중공 당원과 국민당 좌파를 중심으로 개편됐다. 그러다 보니 지주와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던 국민당은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합작의 최대 명분은 북방의 군벌세력 타도였다. 국공 양당을 중심으로 국민혁명군이 편성되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조선 청년들이 대거 북벌전쟁에 참전했다. 중국인들은 고약했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조선 청년들을 선봉에 내세웠다.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한 청년들은 삼천리강산을 그리며 남의 나라 땅에 선혈을 뿌렸다. 그래도 일제의 야욕에 혀를 깨물지언정, 세상물정 몰랐던 지도자들을 못나디못난 것들이라고 원망하지는 않았다.


모든 연합이 그런 것처럼, 국공합작도 오래가지 않았다. 1927년 7월, 3년 6개월 만에 금이 갔다. 합작이 파열되고 중공이 무장폭동을 일으키자 조선 혁명가들도 분열됐다. 일부는 공산당 근거지로 향하고, 일부는 상하이나 베이징 주변에서 반일 투쟁을 그치지 않았다.


1937년 국공은 다시 연합했다. 1차와 달리 2차 합작의 명분은 항일전쟁이었다. 일본과의 전쟁에 조선 혁명가들은 환호했다. 항일전쟁 8년간 중공은 시종일관 동방 각 민족의 단결과 반파시스트 전선의 구축을 주장했다.


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자 후베이성 우한에 와 있던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청년전위동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도 연석회의를 열었다. 며칠 동안 계속된 회의는 각 조직의 연합에 성공했다. 조선민족연합전선 명의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우한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자 조선의용대도 우한에서 철수했다. 광시성 구이린(桂林)과 허난성 뤄양, 산베이(陝北)지역으로 흩어졌다. 산베이의 옌안 지역으로 철수한 조선 청년들은 거의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중공이 이끌던 항일대열에 숫자를 더했다.


항일투쟁 명분 ‘2차 국공합작’에 -조선 혁명가들 연합부대 조직 -중공 참모장 “반파시스트 새 일꾼”

“인간지옥”이라던 국공내전에선 - 중공과 떼려는 국민군 회유 안통해
중공 8개 대대 중 조선인 부대만 - 투항하지 않고 버텼단 기록도

특수한 시대, 특수한 환경이 만든 - 민족성 강한 부대가 조선인 부대였다


중국의 항일전쟁 3년이 지난 1940년, 중국의 홍색 근거지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조선 청년 40명은 중공이 홍군으로 불리었던 시절 중공과 함께 국민당군과 싸웠던 조선 출신 노전사(老戰士)들과 손을 잡았다. 팔로군(八路軍)과 신사군(新四軍)의 지도 아래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화베이(華北)와 화중(華中)지역에서 항일에 가담했던 조선 청년들도 화베이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했다. 화베이 조선청년연합회는 성립 반년 만에 국민당의 전시수도 충칭과 뤄양에서 온 조선 혁명단체의 청년들을 끌어들여 조선의용군을 발족시켰다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신사군과 긴밀한 관계를 수립했다. 중국 쪽에서 발행한 신사군 자료집에 조선의용군 화중지대가 신사군 지휘관들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조선인 전사들은 무기를 들고, 신사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해, 항일민주근거지를 보위하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항일민주근거지는 신사군의 국토이지만, 조선 혁명가들에겐 제2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1942년 7월, 조선청년연합회는 조직을 확대했다. 조선독립동맹을 출범시켰다. 부르기 쉽게 옌안독립동맹이라고 부르는 조선독립동맹 예하의 무장세력이 조선의용군이었다.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참모장 예젠잉(葉劍英)이 “조선의용군은 조선 혁명역량의 중추세력이다. 반파시스트 투쟁의 새로운 일꾼들이다. 팔로군, 신사군과 이상적인 배합”이라고 한 것을 보면 조선의용군은 중공의 기대를 충족시킨 듯하다.


마오쩌둥과 함께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설립했고, 자오스옌(趙世炎:전 중국 총리 리펑의 외삼촌), 저우언라이 등과 함께 프랑스에서 소년공산당을 결성했던 옌안 시인 샤오싼(蕭三)은 조선의용군을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국제종대(國際縱隊)에 비유했다. 업적을 찬양하는 시를 남겼다.


1945년 11월, 국민당군과 일전을 앞두고 동북으로 이동하는 신사군. 상인으로 변장한 조선 혁명가들도 이런 모습으로 동북으로 가는 관문인 산하이관을 넘었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소외되기 쉬운 지역인 변구(邊區)에 주력했다.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는 법, 변두리 지역도 조선 혁명가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조선독립동맹과 화베이 조선의용군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하고 조선 교민들의 진입을 환영했다. 근거지의 학교에 입학을 희망하는 조선 청년들에게 적당한 학교를 알선하고 학비도 받지 않았다.


조선의용군이나 팔로군, 신사군에 참가를 희망하는 조선 청년들에겐 소개장까지 써줬다. 중공은 “조선 민족의 해방과 간부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도 만들었다. 1945년 2월5일, 옌안에 조선혁명을 위한 군사정치학교인 ‘조선군정대학’(朝鮮軍政大學)을 설립했다.


조선의용군은 중공과 팔로군의 지도를 받기는 했지만 독립성을 유지했다. 이쯤 되면,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중공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짐작이 간다. 항일투쟁에서 중공의 승리가 조선의 해방과 직결된다고 확신해도 무리는 아니다.


일본이 투항하자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朱德)는 옌안의 조선군정대학 재학생 275명과 조선인 간부 40여명을 팔로군 포병사령관 김무정의 인솔하에 동북으로 이동시켰다. 주더의 명령으로 동북에 들어온 조선인 전사들은 병력을 확충했다.


88여단 시절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저우바오중의 기록에 따르면, 국공내전이 치열하던 1947년 당시 린뱌오가 지휘하던 동북민주연군(중공 제4야전군의 전신)의 정규군 부대에는 약 12만명의 조선인이 있었다고 한다. 지방 부대에 소속된 조선인까지 합하면 25만여명의 조선인들이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과 벌인 전투에 참전했다.


조선인 부대는 특수한 시대에, 특수한 환경이 만들어낸, 민족성이 강한 부대였다. 장제스의 국민당 부대에 대한 입장이 확고했고 전투력도 강했다. 평생 국공전쟁만 연구한 한 중국 학자의 글을 인용한다.


 “동북의 국공내전은 인간지옥이이었다. 잔혹하고 치열한 전투가 연일 벌어졌다. 국민당의 회유도 만만치 않았다. 중공 판스(磐石)현 대대에 3개 중대가 있었다. 그중 2개 중대가 조선인 부대였다. 1946년 봄, 대대가 철수하자 한족(漢族) 부대가 동요했다. 반란을 일으킬 기색이 엿보이자 현 위원회가 직접 나섰다. 조선인 부대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다. 조선인 부대는 단숨에 한족 부대를 평정했다. 둔화(敦化)현에는 중공 무장대대가 8개 있었다. 1946년 12월17일, 7개 대대가 국민당 쪽에 투항했다. 끝까지 남은 유일한 대대가 조선인 대대였다.”


조선인 부대는 의지가 강했다. 국민당 정부의 동북지역 최고 지휘부인 동북행영(東北行營)은 조선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선양에 조선인위원회를 설치하고 중공과 조선인 부대를 이간질시켰다. 1947년 장제스에게 보낸 보고서가 몇 년전 빛을 봤다.


“조선인들을 중공과 떼어놓기 위한 공작은 수포로 돌아갔다. 우리 쪽으로 올 듯 하다가 결국은 우리를 배신한다. 정말 교활하고 신의가 없는 민족이다. 희생만 크고 성과는 미미하다. 조선인들만 전담할 전문가 양성이 시급하다.”


동북에서 승리한 중공 제4야전군은 여세를 몰아 화베이를 점령하고 베이징에 입성했다. 1949년 10월1일, 천안문 광장에서 신중국 개국선언을 만천하에 알렸다. 1년 전 정권을 수립한 북한이 소련에 이어 두번째로 신중국을 승인했다. 서로 대사를 파견하고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했지만 순탄치는 못했다. 3년간 대사가 부임도 못하는 등 별의별 일들이 다 있었다.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 <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