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의 도자기, 상감청자 [도자기로 보는 역사 3]
칼의 노래 상감청자 **다시 무늬의 시대로
비색청자가 아름다움을 뽐낼 무렵, 새로운 청자 하나가 등장했습니다. 이 청자는 비색청자에 없던 무늬가 있습니다. 토기든 도자기든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가장 빨리 알려주는 지표가 바로 이 '무늬'인데요, 비색청자의 절정기와 교차하며 나타난 무늬 역시 고려사회에 무시무시한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처음, 무늬가 나타난 것은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의종임금 때입니다. 당연히 문벌귀족들이 고려사회를 손안에 넣고 뒤흔들 때이기도 합니다. 왕은 귀족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문벌귀족들은 하늘 무서운 줄 몰랐습니다. 의종은 자존심이 강했던 모양입니다. 문신들에 대하여 그 어느 임금보다 우대하였지만 그것으로부터도 고통을 받았거든요. 임금은 지나치게 오만방자해진 문벌귀족들로부터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임금의 노력만으로 유학자인 문벌귀족들의 학문적 수준을 넘어서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혹시라도 문신들로부터 '학문을 싫어하는 임금'이란 소리를 들을까 봐 문신들에게 온갖 혜택을 다 주면서도 그들이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내내 괴로웠습니다.
유학자인 그들을 학문으로 따라잡기 쉽지 않다고 생각한 임금은 나라 곳간을 있는 대로 털어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고 으리으리한 건물이나 정원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귀족들의 콧대를 누르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귀족도 궁궐을 짓고 살수는 없는 법이었지요. 의종임금은 귀족들이 꿈도 꾸지 못할 사치를 부리는 일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잔치에 초대받는 사람들은 고귀한 신분들, 귀족 중의 귀족인 문벌귀족들, 그들은 임금에게 조금도 굽히려 하지 않은 채 잘난 체를 해댔습니다. 임금은 틈만 나면 송나라 문학이 어떻고, 역사가 어떻고 하고 떠들어대는 귀족들의 입을 아예 틀어 막아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여 감히 왕실을 우습게 보는 일 따위를 하지 못하게 할 일을 의종은 꿈꿨습니다. 바로 그때, 청자로 지붕을 덮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원래 지붕을 덮은 기와는 그렇게 값비싼 재료가 아닙니다. 하지만 청자라면 달랐지요. 청자로 지붕을 만든다는 것은 그 규모만 생각해도 아찔할 지경입니다. 임금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그 청자를 좀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걸 본다면 어떤 귀족도 왕실을 업신여길 생각을 하지 못할것이니까요.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양각청자로 만든 기와입니다.
▲ 청자모란꽃새김무늬막새 고려 의종때 청자로 기와를 만들었다는 문헌기록은 이런 막새 유물이 출토되면서 증명되었습니다. 화려한 양각기술과 고급청자 제작기법을 보여주는 문벌귀족사회 최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북한]
이 기와로 지붕을 덮고 잔치를 벌여 귀족들을 초대했습니다. 양각청자로 만든 그릇에 음식을 담고, 양각청자로 만든 술병에 술을 담아 양각청자로 만든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습니다. 정말로 임금을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칼과 청자
고려는 정복국가시대를 끝내면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호족에게서 칼과 힘을 빼앗는 것이 임금들의 과제였습니다. 그 후 무관은 고려귀족사회에 참여할 길이 없어졌습니다. 과거시험에 무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를 빛냈던 서희, 윤관, 강감찬 등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장수들 모두 문과출신의 문신들입니다. 이름난 장수가 되는 길은 학문을 닦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다보니 무신들은 높은 벼슬에 오르지도 못하고 문신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였습니다.
문벌귀족들이 하는 행동은 기가 찰뿐이었습니다. 거란과 여진이 국경선을 뻔질나게 넘어오는 상황이라 고생은 무신들의 몫이었고, 문신들은 개경에 앉아 잔치만 벌였습니다. 그런데도 문신들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니 울분이 쌓이고 있었지요.
그때 의종임금이 보현원에 나들이를 갔습니다. 물론 잔치를 벌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임금은 허구한 날 잔치를 벌여놓고 문신들을 초대하여, 화려한 임금의 자태를 보여주는 일에 빠졌습니다. 고려 최고의 시인들과 술잔을 맞부딪히며 이야기를 나누노라면 스스로도 최고의 학자가 된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요?
오랫동안 이를 갈아오던 무신들 중에서 정중부 일행은 더 이상 참지 않기로 결심, 이날을 거사일로 삼았습니다. 마침내 반란이 일어난 것이지요. 언제나 효율과 일사분란한 명령체계를 최우선의 덕목으로 하는 무신들은 칼의 힘을 앞세워 신속하고도 확실하게 문신들을 비로 쓸듯이 쓸어버렸습니다. 의종임금은 유배를 가는 신세가 되었고요. 이렇게 해서 1170년부터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무신정권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나라는 칼을 쥔 사람의 품에서 품으로 휩쓸렸습니다.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 등 여러 무인들을 거쳐 마침내 1196년에 최충헌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무신정권은 더욱 강하고 더욱 무서운 시대로 접어든 것입니다.
새파랗게 젊은 문신이 오랫동안 국경에서 고생한 늙은 무신의 수염을 쥐고 흔들어도 아무 말도 못했었으니 문벌귀족들에 대한 무신정권의 태도는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드러내놓고 그들에게 분풀이를 했습니다. 그것은 청자에도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문벌귀족들은 중국 송나라에서 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라 중국풍을 좇는 일이 많았습니다. 불티나게 중국 책을 베끼고, 중국 귀족들 사는 모습을 따라하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었습니다. 의종임금 때엔 왕과 귀족은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이 사치를 부려 보통 때보다 무려 스무 배가 넘는 중국 상인들이 벽란도를 드나들며 물건을 팔아댔습니다.
문신들은 송나라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무신들에게 그런 모습이 좋아 보일 리 없었지요. 무신들은 약해빠진 학자들이나 좋아하는 송나라 도자기에 대항해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정말 놀랍고도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최고의 도자기로 여겨지는 상감청자가 그런 무신들에 의해 꽃피웠다는 것입니다. 차별받던 무신들의 칼의 노래가 상감청자로 울려 퍼진 것일까요?
**상감청자의 탄생배경
왜 청자의 나라인 중국에는 상감청자가 없는 것일까요?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우리나라 상감청자의 진가를 전혀 모르는 소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만이 상감청자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생각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과학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청자에 무늬를 그려 넣지 않은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청자의 바탕은 도화지처럼 하얗지 않아 그림을 그리면 지저분해집니다. 그래서 그림이 그려진 청자는 없습니다. 대신 무늬를 넣는 양각청자가 만들어졌습니다.
▲ 청자 목단문태고동 중국 북송시대 양각청자로, 화려한 당초문양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송나라 자기에는 양각무늬는 등장하지만 그림을 그리거나 상감기법을 사용한 청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대신, 북송시대 이전부터 내려온 당나라의 당삼채와 같은 화려한 색채기술을 이용한 자기가 있어서 단색청자를 보완하고 있습니다 [중국] 무신들은 자신들만의 청자를 만들려니 순청자도, 상형청자도, 양각청자도 아닌 새로운 청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요. 하지만 그림을 그려 넣는 것만 빼고는 이미 다 세상에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뼈 속까지 문신들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힌 무신들이 문신들을 따라할리 없었습니다.
무신들의 제작 의뢰를 받은 고려의 도공들은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려 넣자니 오히려 지저분해지고, 그렇다고 그것 외엔 딱히 방법도 없고...
그러나 창조성에서는 그 어떤 민족보다 우수한 우리민족의 선조답게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청자의 표면을 파서 색을 메워 그림을 그려 내면 어떨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표면을 파서 문양을 만들었기 때문에 '상감기법'이라고 부르는 이 새롭고 창조적인 방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청자가 '상감청자'입니다.
물론 상감기법은 이때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장식품인 금속에도 상감기법을 이용해서 금과 은을 세공하거나 보석을 넣는 일을 했던 것이니 아주 새로운 기법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기법 자체만으로 창조적이다, 하고 감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왜 상감청자가 그토록 위대한 것일까요?
**상감청자속 숨은 과학의 힘
상감기법은 고려청자가 처음으로 도입한 방법은 아닙니다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묻게 됩니다. '왜 고려청자만이 이 기법을 도입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나라 상감청자에는 상감기법이 가능하게 된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유약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상감기법이 기발하고, 그래서 멋진 무늬와 그림을 그려낸다고 해도 청자유약이 희끄무레하고 불투명하다면 어찌되었을까요? 지저분해서 안하느니만 못하단 소리를 들었을법합니다. 그러니까, 상감기법으로 만든 밑그림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아니 더욱 화려하게 빛나게 해준 유약, 그런 유약을 만들어낸 비밀의 물질이 바로 '인'입니다.
비오는 날 시골에서는 하얀 달덩어리 같은 불빛이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사람들은 그것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에 '도깨비불'이라고 부르곤 하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본 경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옛날 어린 시절에 본 기억이 나는데요, 어두컴컴하고 흐린 날, 비가 그칠 때쯤 가랑비 속으로 올라가던 그 놀라운 경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그것이 도깨비불인지도 몰랐습니다만.
바로 그 도깨비불의 정체가 '인'입니다. 인은 우리 몸의 뼈를 이루는 구성성분인데요, 무덤 속 시체의 뼈 속에 있었던 인이 증발하면 도깨비불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원소기호 P)은 자연계속에 12번째로 많은 원소이니만큼 유약 속에 쉽게 섞여 들어옵니다.
중국 유약에는 이 인이 우리나라 청자보다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청자보다 훨씬 불투명합니다. 이 유약을 발라 구운 청자에 얇게 새긴 조각이나 그림은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거기에다 상감기법으로 섬세하고 다양한 그림을 넣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불투명한 중국 청자유약으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상감청자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기술적 배경에는 기법이 참신함에 더해 기술적 진보가 있었던 것이지요. 유약을 투명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인의 함량을 줄여야 했고, 그 방법을 찾아낸 도공들의 노력의 결과가 고려시대 '상감청자'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청자가 중국 청자를 제치고 세계 제일의 청자가 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것이었지요. 창조적이고 동시에 과학적인 도공들의 힘.
투명유약을 만들 수 있어야 백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우리나라가 백자를 그토록 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기술적 밑받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려적인 청자 탄생과 무신정권의 민족주의
1258년에 마지막 지배자였던 최의가 죽을 때까지 최씨 정권은 68년간 집권했습니다. 잠시 권력을 잡았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지배자로서 자신들의 도자기가 필요했습니다. 오랫동안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답게 그들은 도자기가 가진 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름난 도자소는 재빨리 그들 차지가 되었습니다.
몽골족이 침략했을 때 강화도로 옮긴 무신정권이 그 조그만 섬에서 버텨낸 것은 남해안 지역에 있는 곡창지대와 도자소를 미리 손아귀에 넣어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뱃길로 들어오는 도자기와 곡식으로 부족한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 고려시대 조운로 이 그림은 고려시대 조운로를 나타낸 것으로 도자기운송로이기도 하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강화도가 단지 몽골이 해전에 약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드러나느데요, 전국의 세금창고는 모두 이 조운로를 따라 남해,서해안을 타고 올라가 강화도에 도착했으니 무신정권이 아쉬울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무신정권은 군인들답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졌습니다. 문신들은 송나라를 비롯해 선진국 유학파들이 많고,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외국의 선진문물을 더 추종하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기층 민중들과 유리되기 쉽고 그 결과가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한 군인정권의 탄생을 낳는 게 아닌 가 싶습니다. 무신정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벌귀족들 사이에서는 절대적이었던 신분서열도 무너졌고, 천민들도 칼의 능력을 보여준다면 쉽게 권력자의 자리로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소외되었던 사람들에게 무신정권은 해방자이기도 했습니다. 신분질서는 꿈틀거렸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신정권은 민족주의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송나라나 그 뒤를 이은 원나라에 대해 무신정권이 그토록 배타적이었던 것은 이런 이데올로기가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유지하는 무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시험을 통해서라거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배자가 된 것이 아니라 칼에 기댄 쿠테타로 잡은 권력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벌귀족의 기반이 된 외국세력과의 단절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씨정권이 있는 한 외국 도자기는 더 이상 개경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외국풍이 주름잡았던 도자기 시장도 급변했습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외국도자기를 소유하려는 사람은 매국노였던 셈이지요. 이런 분위기에서는 결국 가장 고려적인 도자기가 만들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가 나온 것은 바로 이때입니다.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 상감청자는 최씨 무신 정권의 대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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