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고려시대♡

고려사의 재발견 2 [혜종,정종,광종,경종]

문수봉(李楨汕) 2018. 2. 1. 15:47

고려사의 재발견 2 [혜종,정종,광종,경종]

 

 

2.혜종 - 왕규의 난 - 외척 반발 빌미로 왕위 빼앗은 고려판 ‘왕자의 난’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에 위치한 3층 및 5층 석탑. 1988년 발굴 결과 10세기에 건립된 2층 높이의 대형 사찰터가 확인되었다. 고려 초기의 호족인 왕규와 관련된 사찰로 추정된다. 조용철 기자

  

한 번 치세(治世·훌륭한 통치) 뒤엔 난세(亂世)가 온다는 ‘일치일란(一治一亂)’은 왕조나 국왕의 교체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태조 왕건의 사후 장남 혜종(惠宗·912~945년, 943~945년 재위) 때도 그런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혜종이 병을 앓자 왕규(王規)가 딴 뜻을 품었다. 정종(定宗)이 가만히 왕식렴(王式廉)과 함께 변란에 대응할 방안을 모색했다. 왕규가 난을 일으키자, 왕식렴이 평양의 군사로 왕궁을 지키자 왕규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왕식렴은) 왕규와 그 일당 300여 명을 죽였다.” (고려사 권92 왕식렴 열전)

왕규는 지금 경기도 광주(廣州)의 호족이다. 궁예 휘하의 왕건이 899년 이곳을 정벌할 때 협조하면서 왕규는 정계에 등장한다. 그의 두 딸은 태조 왕건의 15ㆍ16번째 부인, 또 다른 딸은 혜종의 부인이 되었다. 왕규와 함께 처단된 무리가 300명이란 사실은 그가 당시 정계의 유력자였고, 그 바탕에는 한강의 수운(水運)을 장악해 축적한 그의 정치·경제 기반이 상당했음을 알려준다.

위 기록에서 왕규가 품었다는 '딴 뜻'은 태조의 16번째 부인이 낳은 광주원군(廣州院君)을 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히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고려사』에는 이를 ‘왕규의 난’이라 했다. 고려 후기 역사가 이제현(1287~1367년)은 왕규를 ‘중국 노나라의 은공(隱公)에게 환공(桓公)을 죽이라고

 

 건의했다가, 여의치 않게 되자 도리어 은공을 죽인 우부(羽父)와 같은 인물’로 평가했다. 이 같은 이제현의 견해가 『고려사』에 반영되면서 ‘왕규의 난’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당대 역사의 진실을 담는 그릇 역할을 하는 게 용어다. 현재 대부분의 역사책들이 ‘왕규의 난’이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난’이란 용어가 과연 당시의 진실을 담보하는 그릇이 될 수 있을까?


 

혜종의 묘인 순릉. 개성시 송악면 자하동에 있다. [사진 장경희 한서대 교수]

 

왕규가 외손을 왕 앉히려 딴 뜻 품었다? 


약 100년 뒤 이자겸(李資謙)은 왕규와 같은 길을 걷는다. 딸들을 각각 예종과 그의 아들 인종의 비로 들인 왕실 외척 이자겸은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른다. 이를 보다 못한 인종은 1126년 2월 장인이자 외조부인 이자겸을 치려다, 도리어 이자겸의 반격을 받아 궁궐이 모두 불타고 스스로 왕위를 이자겸에게 물려줄 뻔하는 수모를 겪는다.

 인종이 먼저 이자겸을 제거하려다 벌어진 사태인데도, 그뒤 석 달 만인 1126년 5월 인종의 사주를 받은 측근 척준경에 의해 이자겸이 제거되자 왕실 사가들은 이자겸에게 모든 잘못을 씌워 ‘이자겸의 난’이라 기록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왕규의 난’을 다시 봐야 할 근거는 여기에 있다. 혜종 때 일어난 정변의 진실은 무엇일까? 왕규는 왕(혜종)에게 “왕의 아우인 요(堯·뒤에 고려 3대 왕 정종이 됨)와 소(昭·뒤에 고려 4대 왕 광종이 됨)가 반역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알렸다.

그러나 왕은 이를 믿지 않고 배다른 동생인 요와 소를 잘 대우해주면서 자신의 딸을 소에게 시집보내 그들의 세력을 강하게 해줬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왕규가 혜종을 두 차례나 제거하려다 실패했다는 것이 『고려사절요』(권2 혜종 2년·945)의 기록이다.

아버지 왕건을 따라 수많은 전투에 참여해 명성을 쌓아 왕이 된 혜종은 자신을 제거하려 한 왕규는 물론 국왕으로서 당연히 대처해야 할, 배다른 형제들의 반역 조짐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즉위 이듬해부터 병을 앓아 소심해져 그랬을까? 혜종은 실제로 이들을 통제할 아무런 힘을 갖지 못했다.

“태조는 7살짜리 혜종을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그 어머니 오씨(吳氏·나주 출신 2비)가 미천해 태자로 세우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태조가 낡은 상자에 황제를 상징하는 자줏빛이 나는 황포(황제를 상징)를 담아 오씨에게 주자, 오씨는 그것을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였다. 태조의 뜻을 헤아린 박술희가 다시 요청하자, 태조는 혜종을 태자로 삼았다. 태조가 임종 때 박술희에게 군국(軍國)의 일을 부탁하고, 태자를 잘 보좌하라고 부탁하자, 박술희는 그대로 따랐다.” (『고려사』권92 박술희 열전)

오씨가 미천하다는 것은 다른 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뜻이다. 왕건은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즉 태조는 자신의 사후 29명의 부인에게 태어난 34명의 자식(왕자 25명, 공주 9명) 사이에 벌어질 권력투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조는 오씨가 미천하다는 이유로 임신을 원하지 않았으나 오씨가 억지로 임신해 혜종을 낳았다는 사실(『고려사』 권88 장화왕후 열전)도 이를 뒷받침한다. 태조는 비록 외가 세력은 약하지만 장남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혜종을 태자로 결정하고, 당진(면천) 출신의 호족 박술희에게 태자의 뒷날을 부탁했던 것이다.

태조의 장인인 왕규는 943년 5월 재상 염상(廉相), 박수문(朴守文)과 함께 태조 왕건의 임종 자리에 있었다. 태조는 ‘아직 결정하지 못한 중요한 일은 태자 무(武·혜종)와 함께 결정하라’는 유언을 왕규에게 남길 정도로, 왕규 역시 혜종의 후견인이었다.

 

태조는 29명의 부인 가운데 6명은 왕후로, 나머지 23명은 부인으로 호칭을 붙였다. 그리고 왕후의 자식에게만 왕위계승권을 주었다. 왕규의 두 딸은 태조의 부인들이어서 이들의 자식들은 애당초 왕위 계승의 서열에서 벗어나 있었다. 또 왕규는 혜종의 후견인이었기 때문에 외손을 왕위에 앉히려 난을 일으킬 입장도 아니었다.

요(정종)와 소(광종) 형제는 혜종이 즉위한 직후 곧바로 병석에 눕자, 왕위를 노리고 거사를 준비했다. ‘혜종이 병을 앓아 왕규가 딴 뜻을 품자, 정종이 몰래 왕식렴과 함께 변란의 대응책을 모색했다’는 사실(『고려사』 권92 왕식렴 열전)이 그를 뒷받침한다.

해상 세력 몰락하고 내륙 호족 득세


요와 소 형제는 각각 왕건의 차남과 3남이지만, 제3비인 충주 유씨(劉氏)의 자식으로 혜종과는 배다른 형제다. 이들의 음모를 알고도 혜종이 딸을 소에게 출가시킨 건 강력한 외가 세력을 업고 있던 이들 형제와 관계를 터 왕위를 유지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요와 소의 외가가 있던 충주는 중부 내륙의 요충지로 남부의 영남 지역, 북부의 강원도 지역과 연결되는 전략 거점이다. 충주 출신 호족 유권열(劉權說)의 권유로 궁예 휘하의 강릉 군벌인 왕순식(王順式) 군대가 고려에 귀부했다.

 

뒷날 후백제의 신검군을 격파한 주력이 왕순식과 충주 지역의 부대였다. 이런 충주 지역 출신인 요와 소 형제에게 혜종의 후견인 박술희와 왕규의 존재는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혜종이 병석에 눕자 왕규를 미워해 다투던 박술희는 군사 100여 명으로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정종은 박술희가 딴 뜻이 있음을 의심하여 (강화도) 갑곶에 귀양을 보냈다. 이것을 빌미로 왕규가 왕명이라 속이고 그를 죽였다.” (『고려사』 권88 박술희 열전)

정종이 박술희를 귀양 보내자, 왕규가 거짓으로 왕명을 만들어 그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왕규와 박술희가 갈등을 빚자 정종이 그 틈을 이용해 박술희가 딴 뜻이 있다는 이유로 귀양을 보낸 뒤 그를 죽인 것이다.

왕규는 혜종에게 요와 소 형제의 음모를 알렸으나 혜종은 도리어 자신의 딸을 소(광종)에게 혼인시켜 사태를 무마하려는 유화책을 펼쳤다. 이에 반발한 왕규가 혜종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왕규의 반발은 정종 세력에게 정변의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박술희와 왕규의 이탈로 세력을 잃은 혜종은 재위 2년 만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배다른 동생에게 허무하게 왕위를 빼앗기게 된다.(그뒤 혜종은 병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요컨대 혜종 때 일어난 왕실의 정변은 외척 ‘왕규의 난’이 아니라 정종 형제가 왕위 계승의 욕심을 드러낸 ‘왕자의 난’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한 궁중 내부의 권력게임이 아니었다. 고려 건국 이후 통일전쟁을 위해 왕권과 호족세력이 타협과 공존, 조화와 균형 속에 유지해온 정치질서가 이 정변을 계기로 크게 요동치게 됐다.

전쟁 상황에서도 억제됐던, 강한 군사력을 가진 세력이 현실 권력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정치와 역사의 전면에 노출되었다. 힘을 가진 다수가 소수를 누르고 승자가 되는 야만의 정치가 개시된 것이다. 세력이 약한 혜종을 태자로 책봉하면서 품었던 왕건의 우려가 그의 사후에 현실화되었다.

지금 황해도와 평안도의 패서(浿西) 지역은 통일신라 최강의 부대였던 패강진 부대가 주둔한 곳이다. 이곳 출신 호족 또한 그런 군사 전통을 가진 세력으로, 이후 고려 지상군의 주력이 된다. 왕식렴은 왕건의 사촌동생이자, 이 지역 군사력을 관장한 세력가였다.

평양과 충주 두 세력의 결합을 통해 정종과 광종 형제는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에 혜종과 그 후견인 역할을 한 서해 남부 나주의 혜종 외가, 한강의 수운(水運)을 관장했던 광주의 왕규와 당진(면천)출신 박술희의 몰락으로 해상세력은 정계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왕건의 강력한 카리스마 앞에 숨죽였던 정치의 야만성이 혜종 시절 왕자의 난을 계기로 본색을 드러내면서 또 다른 정치질서의 형성과 함께 험난한 격변을 예고하게 된다.  

 

[출처] : 박종기 국민대 국사과교수 : 고려사의 재발견 / 중앙Sunday

 

 

3. 정종의 서경 천도와 광군(光軍) -26세 젊은 왕, 도읍 옮기려다 민심 잃고 의문사

 

 

평양성 칠성문. 평양성의 북문이다. 성 앞에 방어용으로 작은 성(옹성)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 때와 고려 태조 5년(922년) 각각 축조되었다. 1712년(숙종 38) 개축되었다. 조용철 기자

 

 고려 제3대 왕인 정종(定宗: 923∼949년, 945∼949년 재위)은 즉위한 직후 왕규와 박술희를 제거해 자신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왕식렴(王式廉)을 공신으로 책봉한다. 다음이 공신 책봉 조서다.

“그대(왕식렴)는 3대(태조·혜종·정종)의 원훈(元勳)이며 나라의 주석(柱石)이다. …간신(*왕규)이 흉악한 무리들과 손잡고 변란을 일으켰다. 옥이 불에 들어가 더욱 냉기를 드러내고, 소나무가 눈을 맞고 더욱 푸르게 되듯이 그대는 역당들의 목을 베 기울어질 뻔한 나라를 바로 세웠다. 그대가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 ‘어지러울 때 성실한 신하를 알게 되고, 센 바람에 질긴 풀을 안다’는 말이 그대를 두고 한 말임을 이제야 알겠다. 내가 만석(萬石)의 넓은 땅으로 봉하고, 9주의 목사직을 모두 준다고 해도 어찌 그대의 공적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 (『고려사』권92 왕식렴 열전)

그런데 내용이 지나치다. ‘만석의 넓은 땅과 9주의 목사직’을 주어도 아까울 게 없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왕식렴을 치켜세우고 있다. 이는 정종이 재위기간(4년) 내내 왕식렴에게 기대어 정치를 하겠다는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정종은 강한 군사력을 가진 측근에 기대다 장차 초래할 참혹한 대가를 알기나 하고 이런 말을 한 것일까?

왕규가 제거될 때, 연루자 300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박술희가 제거될 때도 그를 호위한 100여 명이 함께 제거됐을 것이다. 이같이 왕식렴 군대에 의해 수백 명이 살육당한 정변의 현장, 개경은 공포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을 것이다. 최승로는 “혜종·정종·광종을 거치면서 개경과 서경의 문무관료 절반이 살해됐다” (『고려사』권93 최승로 열전)고 했다.

 

왕식렴이 숨진 뒤 광종의 개혁 때 희생된 관료 중엔 서경 관료가 많았겠지만, 개경 관료는 왕식렴이 가담한 혜종과 정종 때 일어난 왕자의 난으로 희생됐다. 이 때문에 왕식렴과 정종에 대한 개경 관료들 및 이들과 연결된 호족세력의 반감은 대단했을 것이다. 또한 정종의 외가 충주 세력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았다.

 

 

개심사(開心寺)터 5층석탑. 광군(光軍)이 이 탑의조성에 동원된 사실이 탑의 기단부에 기록되어 있다. 경북 예천 소재. [문화재청]

 

공신 왕식렴을 과하게 치켜세운 진짜 이유

수도 개경은 정종이 왕 노릇을 하는데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정치의 무대를 바꾸는 것이 필요했다. 그 대안은 강력한 후견인 왕식렴이 있는 서경이다. 정종이 왕식렴을 과분하게 치켜세운 건 그런 정치적 포석에서 나온 것이다.

정종이 서경 천도를 결심한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즉위 직후 곧바로 천도를 생각했던 건 분명하다. 서경 천도는 어느 정도 명분도 있었다. 정종의 부왕 태조 왕건이 일찍부터 서경을 재건하고, 그곳을 도읍지로 삼으려 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 고구려 도읍지 평양은 황폐한 지 비록 오래되었으나 터는 아직도 남아 있다. 가시밭이 우거져 오랑캐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사냥하다 우리 변경을 침략해 그 폐해가 크다. 백성을 옮겨 이곳에 거주하게 해 나라를 오래도록 이롭게 하겠다.” (『고려사』권1 태조 1년(918) 9월조)

이어 태조는 사촌동생인 왕식렴을 보내 평양을 지키게 했다. 14년이 지난 932년(태조 15) 5월, 왕건은 “서경을 완전히 보수하고 민호를 이곳으로 옮겨 채운 것은 이곳에 의지해 삼한을 평정하고 장차 여기에 도읍하려 한 것이다” (『고려사』권2)고 밝혔다.

평양 재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뒤 이곳으로 천도하려 했던 것이다. 천도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평양을 중시한 태조의 생각은 그가 숨지기 직전인 943년에 작성한 ‘훈요십조’ 5조에도 반영돼 있다.

“다섯째, 짐(태조)은 삼한 산천의 숨은 도움에 힘입어 대업(大業: 왕조의 창업)을 이루었다.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며, 대업(大業)을 만대에 전할 땅이다. 마땅히 사중월(四仲月: 4계절의 중간 달)에 (국왕은) 그곳에 행차해 100일 이상 머물러 (나라의) 안녕을 이루도록 하라.”

태조는 천도는 할 수 없었지만, 국왕이 1년에 100일 이상 서경에 머무르며 왕조의 안녕을 빌 것을 희망했다. 풍수지리의 서경 길지(吉地)론이나 건국이념의 고구려 계승론 때문에 서경을 중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더 중요한 건 현실적인 이유다.

태조는 평양을 재건하기 위해 황주·봉주·해주·백주·염주 지역의 주민을 이주시켰다(『고려사절요』권1 태조 1년 9월조). 왜 이 지역 주민을 평양으로 이주시켰을까? 이들 지역은 옛 통일신라 최강의 부대인 패강진 부대의 근거지였다. 패강(浿江)은 지금의 대동강이다. 패강진 부대는 평양에서 평산까지, 즉 지금의 평안도·황해도 일대에 배치된 군대다.

중국 당나라는 신라의 삼국통일 뒤에도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 신라가 함부로 개척할 수 없었다. 735년(성덕왕)이 돼서야 당나라가 비로소 이 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승인한다. 신라는 군대를 파견해 패강진 일대를 본격 개척하기 시작한다.

패강진은 평양 부근에 있었다(조이옥, ‘통일신라 북방개척과 패강진’ 참고). 패강진 일대의 군대는 왕건 부자가 궁예에게 귀부할 때 궁예 휘하에 들어갔다가, 고려가 건국한 뒤엔 고려군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패강진 부대는 고려 초기에도 여전히 왕조 최강의 지상군이었다.

태조가 서경을 중시한 현실적인 이유는 이곳 호족세력의 지지를 얻어 그들의 군사력으로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해 삼한을 통합하기 위해서였다. 서경 길지론과 고구려 계승론도 그런 명분의 하나로 내세워진 측면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왕건이 삼한통합 후 서경으로 천도하지 못한 건 개경 기득권 세력의 완강한 반대 때문이었다. 개경이 왕건의 태생지이자 본거지라는 점도 그러했다. 후원자 왕식렴이 서경에 있었지만, 부왕의 선례로 보아 정종의 서경 천도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종이 서경 천도를 즉위 후 곧바로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광군’ 30만 조직 과정서 호족과 대립


서경 천도는 947년(정종 2)에 착수하는데, 그 계기는 거란의 위협이었다. 태조의 문사인 최언위의 아들 최광윤(崔光胤)은 중국 후진으로 유학을 가다가 거란에 체포되었다. 거란은 그의 뛰어난 재주를 알고 관리로 임용했다.

947년(정종 2) 그는 거란 사신으로 고려에 와서, 장차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것이란 사실을 알렸다. 정종은 그에 대비해 30만 명의 광군(光軍)을 조직하고, 그런 조직을 관리하는 전담기구로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한다. 또 같은 해(947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국경지역에 대대적인 축성도 한다.

축성은 단순히 성을 쌓고 방어시설을 설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 군사와 주민을 이주시켜 새로운 군사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축성은 서경을 방어할 배후도시를 건설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주목되는 것은 정종이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구실로 서북지역에 축성을 하면서 서경에도 축성을 한 점이다. 서경 천도는 이를 계기로 같은 해(947년: 정종 2) 실행에 옮겨진 것으로 판단된다.

즉위 직후 구상한 서경 천도가 반대에 부닥쳐 지체되다가, 거란의 위협을 명분으로 전국에 걸쳐 광군을 조직하고 국경지역에 축성을 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개시된 것이다. 광군 30만은 실제 숫자이며, 중앙군이 아니라 지방 호족세력의 지휘 아래 조직된 전국 규모의 농민 예비군 성격을 지닌다.

 

 광군은 유사시에 군사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부대다. 정종은 거란의 위협에 대처하는 가운데 호족이 지휘하는 군사력을 전국적으로 조직화했던 것이다.

경북 예천에 개심사(開心寺)터 5층석탑이 있다. 1011년(현종 2)에 완성된 석탑에 새겨진 기록에 따르면, 광군 46대(隊: 1대는 25명), 즉 1150명이 동원돼 1년 만에 이 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광군이 조직된 지 50여 년이 지났으나, 광군은 여전히 지방 군사조직으로 석탑을 조성하는 등 각종 공역(工役)에 동원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광군은 뒷날 고려 지방군인 주현군으로 편제된다(이기백, ‘고려 광군고’).

광군의 조직은 결국 호족이 지닌 군사력을 중앙정부가 직접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종의 중앙정부는 광군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호족세력의 커다란 반발을 샀다. 서경 천도는 수도 개경 기득권층의 반발에 그쳤지만, 광군의 조직은 전국에 걸친 호족 세력의 반발을 불렀다.

 

이로 인해 서경 천도도 다시 커다란 압박을 받게 됐다. 정종이 천도에 착수한 지 2년 만인 949년(정종 4) 1월, 서경의 왕식렴이 갑자기 숨졌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949년 4월, 정종 또한 26세의 젊은 나이에 숨졌다. 같은 무렵 두 사람이 숨진 건 의문을 살 만한 일이다.

“(정종은) 도참을 믿어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려 장정을 징발하고 시중인 권직(權直)에게 명령해 궁궐을 경영하게 했다. 노역이 끊이지 않았다. 또 개경의 민가를 뽑아 서경에 보내자,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아 원망이 일어났다. 왕이 죽자 노역에 시달린 사람들이 뛸 듯이 기뻐했다.”

(『고려사절요』권2 정종 4년조)

정종의 서경 천도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고 원망을 불러일으킨’ 무모한 정책, 즉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정책이다. 더욱이 광군을 조직해 호족의 군사력을 직접 장악하려던 시도로 인해 반발은 더욱 거세었을 것이 분명하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 모두 놓친 꼴이다. 명분과 취지가 훌륭해도 지지를 받지 못한 정책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건 변함없는 역사의 진리다

 [출처] : 박종기 국민대 국사과교수 : 고려사의 재발견 / 중앙Sunday

 

 

4. 광종(光宗)

 

1] 개방 정책- 귀화인 쌍기를 재상 등용 … 중국계 관료 40명 달해

 

원나라의 고려 간섭기 때 역사가인 이제현(李齊賢·1287~1367년)이 충선왕과 나눈 대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충선왕이 “우리나라(고려)의 문물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자 이제현은 고려 4대 왕 광종(光宗·927~975년, 949~975년 재위)을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광종 이후 문교(文敎)를 닦아 서울에 국학(國學·국자감), 지방에 향교와 학당을 세워 학교에서 글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습니다. 문물이 중국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고려사』 권110 이제현 열전)
 
이제현은 교육기관을 확충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제도를 익히게 해 고려의 문물을 중국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높인 군주로 광종을 꼽았다. 광종은 호족을 대대적으로 숙청해 왕권을 강화한 전형적인 전제군주로 알려져 있다.

 

우리 학계 역시 광종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 광종의 호족 숙청이 당시 정계에 워낙 큰 광풍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현은 문치(文治)와 교화(敎化)를 중시한 광종의 통치를 새롭게 평가했다. 나아가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광종이 쌍기(雙冀)를 등용한 것을 두고 ‘현명한 사람을 쓰는 데 차이를 두지 않았다’(立賢無方)고 말할 수 있을까? 쌍기가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찌 임금을 착한 길로 이끌지 못하고 (임금이) 참소를 믿어 형벌을 함부로 쓰는 것을 막지 않았을까? (그러나) 과거를 실시하여 선비(文士)를 뽑은 것은 광종이 문사를 등용하여 풍속을 바로잡으려는(用文化俗) 뜻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쌍기 또한 그 뜻을 따라 아름다운 일을 이루는 데 보탬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고려사』 권2 이제현의 광종에 대한 평가)
 
이제현은 주변의 아첨을 믿어 숙청을 단행한 광종의 전제정치와 이를 막지 못한 광종의 측근이자 중국 귀화인인 쌍기에 대해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귀화인 쌍기를 등용하고, 그를 통해 과거제도를 실시해 훌륭한 선비를 발굴함으로써 고려의 학술과 문화 수준을 높인 점에서 광종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친소(親疏)와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은 광종의 ‘입현무방(立賢無方)’의 인재 등용책을 주목한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고려에 귀화해 관리가 된 중국계 고려인 채인범의 묘지명. 국내에서 발견된 최초의 고려시대 묘지명이며, 규모가 가장 크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쌍기 이어 아버지 쌍철까지 고위직 앉혀


이와 함께 “광종의 숙청을 막을 사람은 쌍기밖에 없다”는 이제현의 언급을 통해 쌍기와 같은 외국인 귀화 관료가 새로운 정치집단이 돼 광종 정치의 또 다른 중심축이 된 것도 확인하게 된다. 쌍기로 상징되는 외국인 관료의 채용은 광종 정치, 나아가 고려왕조의 개방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쌍기는 중국 후주(後周)사람이다. 광종7년(956년) 광종을 책봉하는 사신으로 왔다가 병이 나 고려에 머물렀다. 그를 만난 광종이 재주가 있다고 여겨 중국에 요청해 고려에 머물게 했다. 발탁 1년도 되지 않아 쌍기는 문병(文柄·학술계의 권력)을 장악했다. 958년(광종9)에는 과거제도를 건의하였고, 여러 번 과거의 고시관으로 임명돼 학문을 권장하여 고려에 문풍(文風·학술 기운)이 비로소 일어났다. (중략) 959년(광종10) 아버지 쌍철(雙哲)도 아들이 광종의 총애를 받는다고 해서 고려에 와 좌승(佐丞·3품)에 임명되었다.” (『고려사』 권93 쌍기 열전)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도가 실시되고, 그로 인해 학문이 권장되면서 학술 기운이 비로소 일어나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고려의 문물이 중화의 그것에 버금갔다는 이제현의 지적과 같은 내용이다. 즉 광종 때 고려의 문물 수준을 높이는 데 귀화인의 역할이 컸음을 보여준다. 광종은 외국인 쌍기만을 예외적으로 등용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광종의 묘 헌릉(憲陵). [사진 장경희 한서대 교수]

 

고려시대 독특한 장례문화의 하나는 죽은 자의 일대기를 적은 비석을 지상에 세우지 않고 관과 함께 지하에 매장하는 것이다. 지상의 묘비명(墓碑銘)과 구분하여 묘지명(墓誌銘)이라 한다. 묘지명은 땅속에 매장됐기 때문에 많이 전해지지는 않는다.

현재 확인된 것은 약 320점이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묘지명은 1024년(현종15)에 제작된 채인범(蔡仁範·934~998년)의 것이다. 그는 중국인으로 고려에 귀화한 관리다. 채인범의 묘지명은 그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공(公)의 성은 채이고, 이름은 인범이다. 송나라 강남 천주(泉州) 사람이다. (중략) 970년(광종21) 고려에 와서 국왕을 뵀다. (광종은 채인범을) 예빈성낭중(禮賓省郎中·5품)에 임명하고, 주택 한 채와 노비·토지를 하사했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물품을 모두 국가에서 공급하라고 명령했다. 공은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달하고 문장을 잘 지어 임금을 보좌한, 큰 재주를 품은 대학자였다.” (채인범 묘지명)

광종이 외국인을 등용하여 고려를 선진화하려는 노력이 채인범의 묘지명 속에 상징적으로 기록돼 있다. 채인범과 같이 공식 역사기록은 없지만 고려 전기에 중국(오대 및 송나라)과 거란·발해·여진 등에서 많은 인물이 고려에 귀화하여 정착한다.

그중 관료가 된 사람은 주로 중국계 귀화인이다. 『고려사』에 기록된 인물만 40명 정도나 된다. 반 이상이 학자나 문인 계통의 인물이다. 대부분 관리가 됐고 나머지는 상인·음악인·승려·역관(譯官)·의술·무예·점성술 등에 능한 특수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도 능력에 따라 관직을 얻은 경우가 있다. 이 가운데 쌍기와 같이 재상이 되는 등 행적이 뚜렷하여 『고려사』 열전에 수록된 인물은 거란 출신 위초(尉貂·효행)와 발해 출신 유충정(劉忠正·국왕의 총신)을 포함해 중국인 주저(周佇·재상)·유재(劉載·재상)·신수(愼脩·재상)·신안지(愼安之·재상)·쌍철(3품)·호종단(胡宗旦·5품)·임완(林完·6품) 등 모두 10명이다(박옥걸,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

외국인 기술자도 '글로벌 코리아' 혜택


우리 역사에서 외국인 출신이 고위 관료가 돼 중요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한 적이 있었던가? 박근혜정부 출범 직후 재미 한국인조차 입각에 실패한 적이 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능력을 구비한 인재를 가리지 않고 등용한, 광종의 ‘입현무방’의 인재 등용이 쉽지 않음을 누구나 실감했을 것이다.

천년 전 고려왕조가 능력 있는 외국인을 고위 관료로 등용한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려 개방 정책의 아이콘은 이러한 인재 등용에서 찾을 수 있다. 요즘 표현대로 고려는 국제화·세계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한 왕조, 즉 ‘글로벌 코리아’의 원조(元祖)가 되는 셈이다.

고려는 당시 세계의 중심인 중국의 선진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여 호족에 좌지우지되는 낡은 관료 시스템을 바꾸려 했다. 많은 외국인이 관리가 된 것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었다. 이 정책은 광종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1세기 초 고려는 관료 엘리트뿐만 아니라 기술자들도 정책적으로 받아들였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고려에 항복한 거란 포로 수만 명 가운데 10명 중 1명은 기술자인데, 그 가운데 기술이 정교한 자를 뽑아 고려에 머물게 했다. 이들로 인해 고려의 그릇과 옷 제조 기술이 더욱 정교하게 되었다.” (『고려도경』 권19 民庶 工技조).

포로는 노비로 만들어 공을 세운 사람에게 분배하는데, 고려는 기술자를 가려 그들의 기술을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11세기 중엽 문종은 송나라 진사 출신인 장정(張廷)이 귀화하자 그에게 벼슬을 내렸다. 이어 훌륭한 선비를 얻은 기쁨을 말하며 “타산(他山)의 돌이라도 나에게는 쓸모가 있는 것이다” (『고려사』 권5 문종 5년(1052) 6월조)라고 했다.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등용한다는 문종의 생각은 고려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국왕의 리더십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려 수도에는 중국인 수백 명이 있다. 민(閩·중국 복건성) 지역 사람이 많은데, 상선을 타고 왔다. 고려는 몰래 그들의 재능을 시험·회유하여 관리로 삼거나 강제로 평생 머물게 했다. 중국의 사신이 오면 이들 중 일부는 진정을 하여 귀국하기도 했다.” (『宋史』 고려 전)

수도 개경에 많은 중국인이 들어왔고, 고려 정부는 재능 있는 자를 가려 관리로 삼아 고려에 머물게 했다. 12세기 무렵 고려의 적극적인 개방 정책을 엿볼 수 있다. 광종은 그 개방 정책의 물꼬를 튼 군주였다.

 

이는 군사와 경제력에 의존하던 호족의 권력 정치를 청산하고 유교와 선진 문물에 눈뜬 문신 중심의 문치주의 정치를 열게 한 신호탄이었다. 광종의 정치를 재평가하는 이유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2] 관료제 정비

 

 

광종이 951년(광종 2년)에 어머니 신성황후 유씨를 위해 개경에 사찰 ‘불일사(佛日寺)’를 지으면서 세운 탑이다. 불일사 5층 석탑으로 불리며 장중하면서 웅건한 느낌을 준다. [사진 박종기]

 

고려 중기 문장가 이규보(1168~1241년)는 어느 지방 관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을을 다스리는 방법은 관대함과 엄격함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용을 얻는 데 있다(要不過寬猛得中耳). (중략) (지방관이) 엄하기만 하면 힘이 들어 백성이 떠나가게 되고, 관대하기만 하면 백성이 윗사람을 얕봐 방자해진다. 두 가지를 함께해야 백성들이 (지방관을) 하늘같이 두려워하고 부모같이 사랑하게 돼 잘 다스려진다.” (『동국이상국집』 권27 ‘어느 書記에게 보낸 편지’)

관대함과 엄격함은 당근채찍과 같은 양면성을 지니지만,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관만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이를 겸비한 제왕은 흔치 않다. 광종은 그것을 겸비한 군주였다.

외국인 관료를 우대한 건 광종의 관대한 통치의 일면을 보여준다. 반면에 광종이 호족 숙청과 과거제 실시로 정치판과 관료 시스템을 물갈이한 건 채찍과 같은 엄격한 통치의 일면을 보여준다. 당시 지배층 여론은 광종의 외국인 관료 우대 정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서필(徐弼)은 광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즘 투화인(投化人·귀화인)들이 벼슬과 집을 골라 차지하여 세신(世臣·기존 관료)들은 거처할 곳을 잃을 정도입니다. 재상인 저의 집은 원래 제 소유가 아니니 가져가시고, 저는 녹봉을 아껴 작은 집을 지어 살겠습니다.” (『고려사』 권93 서필 열전)

서필은 재상으로 고려 정계의 원로였다. 뒷날 거란과의 전쟁 때 압록강 동쪽 280리 땅을 고려 영토로 편입시킨 그의 아들 서희(徐熙)는 광종 때 처음 실시된 과거에 합격해 관료가 됐다. 서필 집안은 광종 정책의 수혜자였지만, 서필은 정계 원로로서 광종 정치에 불만을 가진 세력을 대변해 이같이 말한 것이다.

“(광종은) 쌍기를 등용한 뒤 문사(文士)를 지나치게 존중하고 우대했다. 이로 인해 재주 없는 자가 마구 승진해 1년도 되지 않아 재상이 된 자도 있다. (중략) (광종은) 화풍(華風·중국의 문물과 제도)을 중하게 여겼으나, 중국의 좋은 제도와 법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화사(華士·중국의 선비)를 예우한다고 했으나, 중국의 현명한 인재는 얻지 못했다.”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서필에 이어 유학자의 대표 격인 최승로(崔承老)도 광종을 이같이 비판했다. 두 사람의 발언을 통해 쌍기 등 중국인 귀화 관료를 중용한 광종의 인재 등용책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상당했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종은 왜 이런 정책을 강행했을까?

호족 숙청의 신호탄, 노비안검법


광종의 형이자 선왕인 정종은 서경(평양) 군벌 왕식렴의 도움으로 즉위했다. 그 때문에 정종은 서경으로 천도해 왕식렴에 의지해 정치를 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광종은 호족 세력에 의지한 정종의 정치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통감(痛感)했다.

 

왕식렴은 숨졌지만 신라 패강진 부대의 전통을 이은 서경 세력은 광종 시대에도 여전히 최대 군벌로서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쌍기 등 중국계 귀화인 관료를 등용시켜 정치판을 물갈이하려 했다. 

 

충북 청주의 ‘용두사’ 터에 있는 철당간(왼쪽). 표면에 “준풍(광종의 연호) 3년( 962년광종 13년)에 건립됐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사진 문화재청]

 

광종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는 더욱 충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956년(광종7)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한 것이다. 호족들을 대상으로 노비 소유의 불법 여부를 가리겠다는 정책이다.

“왕조 건국 당시 공신들은 원래 소유한 노비에다 전쟁에서 얻은 포로 노비와 거래를 통해 얻은 매매 노비를 갖고 있었다. 태조는 포로 노비를 해방하려 했으나 공신들이 동요할까 염려하여 그들의 편의에 맡긴 지 약 60년이 되었다. 광종이 처음으로 공신들의 노비를 조사하여 불법으로 소유한 노비를 가려내자, 공신들은 모두 불만으로 가득 찼다. 대목왕후(大穆王后·광종비)가 광종에게 그만둘 것을 간절히 말해도 듣지 않았다.”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노비는 호족들에게 토지와 함께 당시 중요한 재산의 일부였다. 그런데 광종은 호족들이 불법으로 취득한 노비는 해방시키거나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호족의 군사경제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조치였다. 요즘의 금융실명제에 버금가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서경 출신인 대목왕후가 남편 광종에게 노비안검법 시행 중단을 요청한 건 서경 출신 호족 세력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숙청의 화살이 최대 세력인 서경의 호족 세력을 겨냥하고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다. 그만큼 이 조치는 충격적이었다.

“박수경(朴守卿)이 죽었다. 정종이 즉위한 초기에 내란을 평정한 것은 대부분 박수경의 공이다. 그런데 이때 아들 승위(承位)·승경(承景)·승례(承禮)가 참소를 입어 옥에 갇히자, 수경이 근심하고 분노하여 죽었다.” (『고려사절요』 권2 광종 15년(964))

박수경은 황해도 평산의 호족으로 서경의 왕식렴과 함께 정종의 즉위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왕식렴이 숨진 뒤엔 지금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대표하는 군벌로 떠올랐다. 그의 딸은 태조의 28비 몽량원부인(夢良院夫人)이다.

박수경이 분노와 근심으로 스스로 죽었다지만, 광종이 그의 아들들을 숙청한 건 바로 당시 최대 군벌이었던 박수경을 겨냥한 것이었다. 박수경의 죽음은 가장 큰 호족 세력이 제거돼 광종의 숙청 작업이 성공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다음 기록은 당시 호족 숙청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일찍이 혜종·정종·광종이 서로 왕위를 이은 (고려 왕조의) 처음에는 모든 일이 편하지 않아 개경과 서경의 문무 관료가 절반이나 살상되었다. 광종 말년에는 세상이 어지럽고 참언(讒言)이 일어나 무릇 형장에 끌려간 사람은 대부분 죄 없는 사람이었다. 오래된 공신과 장군은 거의 죽음을 당했다. 경종이 즉위할 당시 옛 신하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40여 명에 불과했다.”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정치권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광종은 호족뿐 아니라 왕실까지 숙청했다.

숙청 피해 살아남은 신하는 40여 명뿐


“960년(광종11)부터 975년(광종26)의 16년간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가 상대방을 참소하는 풍조가 크게 일어나 군자는 들어설 수 없고 소인이 뜻을 얻었다. (중략) 하물며 혜종과 정종의 외아들도 목숨을 유지하지 못했다. (광종은) 말년에는 자신의 외아들(*경종)까지 의심해 (다음 왕인) 경종은 불안해 하다가 겨우 왕위에 올랐다. 통탄할 일이다.” (최승로 열전)

광종의 조카인 두 형의 아들까지 목숨을 잃었고, 심지어 아들까지 한때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던 것이다. 광종이 처가인 서경 세력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광종 숙청의 주된 표적은 당시 최대 군벌인 서경의 호족 세력이었다. 광종이 960년(광종11)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라고 이름을 고쳐 정종의 서경 우대정책을 버리고 개경 중심의 정치를 천명한 것도 그 때문이다.

광종은 같은 해 ‘준풍(峻豊)’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했다. 현재 청주의 용두사(龍頭寺) 터에 쇠로 만든 당간(幢竿)이 있다. “준풍(峻豊) 3년 (962·광종13)에 건립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광종의 치세를 독자적인 연호로 표기했음을 알려준다.

광종은 958년(광종9)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중국 귀화인 쌍기와 왕융(王融)이 고시관이 돼 재위 동안 여덟 차례 과거시험을 시행했다. 합격한 인물 가운데 공신과 호족 출신의 자제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옛 신라와 후백제 출신이나 서희와 같은 중부지역 출신 등의 새로운 인물들이 합격했다. 이런 인물들이 호족 세력을 대신해 새로운 관료집단으로 등장했다. 숙청이 인위적인 쇄신이라면, 과거제도는 호족 중심의 정치질서를 청산하고 능력과 실력을 갖춘 유교 관료가 지배 엘리트로 충원된 자연스러운 물갈이였다.

“이로 인해 남북의 용인(庸人·어리석은 사람)이 다투듯이 몰려왔다. 지혜와 재능을 따지지 않고 특별한 대우를 했다. 그런 까닭에 ‘후생(後生)’은 앞을 다투며 관리가 되었으나, ‘구덕(舊德·태조 이래 중용된 공신과 관료층)’은 점차 쇠락하였다.”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최승로는 새로운 관료집단의 등장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가 언급한 ‘남북 용인’ ‘후생’은 과거를 통해 등장한 새로운 관료집단이며, ‘구덕’은 태조 이래 중용된 공신과 관료집단이다. 하지만 최승로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광종의 과거제 실시는 문신이 정치문화를 주도하는 문치주의를 자연스럽게 뿌리내리게 했다.

[출처] : 박종기 국민대 국사과교수 : 고려사의 재발견 / 중앙Sunday

 

 

5. 경종의  왕실의 근친혼 -경종의 네 왕비는 고종사촌, 친사촌, 외사촌 자매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선법사라는 작은 절 뒤에 있는 마애약사불좌상(보물 제981호). “지금 황제(*경종)의 만수무강을 빈다”는 명문(銘文)이 삼각형 바위 왼쪽에 새겨져 있다. ‘태평 2년(977·경종 2년)’은 좌상이 만들어진 시점이다. 태평은 송나라 태종의 연호다. 경종은 연호를 송나라 것을 쓰되,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조용철 기자

 

고려 5대 국왕 경종(景宗: 955∼981년, 975∼981년 재위)은 6세 되던 960년부터 즉위 직전까지 15년간 지속된 광종이 일으킨 숙청의 광풍을 뚫고 어렵사리 즉위한다.

“경종은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부인(*광종의 부인 대목왕후)의 손에 자랐다. 따라서 궁궐 문 밖의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고 알지도 못했다. 다만 천성이 총명하여 아버지 광종의 말년에 겨우 죽음을 면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숙청의 회오리바람은 경종의 사촌이자, 혜종과 정종 아들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막강한 친정 서경세력을 등에 업은 어머니의 보호로 경종은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성장한 경종에게 영특한 군왕의 자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고, 상 주고 벌 주는 것이 고르지 않은 것이 통치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치를 게을리하고, 여색과 향락, 바둑과 장기에 빠졌다. 그의 주위에는 내시들뿐이었다. 군자의 말은 외면하고 소인의 말만 들었다. 처음은 있으나 끝이 없다는 말이 그를 두고 한 말이니, 충신의사들이 통분할 일이 아닌가?”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드러내 놓을 만한 치적이 없다는 얘기다. 자식을 따뜻하게 보듬지 못한, 강한 개성의 부모 아래 자란 자식에게 나타나는 유약성이 경종에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모의 영향력은 그의 혼인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경종의 1비 헌숙왕후 김씨는 광종의 친누이 낙랑공주와 신라 경순왕 김부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경종과 고종사촌이다. 2비 헌의왕후 유씨(劉氏)는 광종의 동생(경종의 삼촌)인 문원(文元)대왕의 딸로서 경종과 4촌이다.

3비 헌애왕후 황보씨와 4비 헌정왕후는 자매 사이로, 어머니 대목왕후의 동생인 대종(戴宗: 경종 외삼촌)의 딸이다. 경종과는 외4촌이다. 경종의 비는 이같이 모두 경종과 4촌 간이다. 근친혼(近親婚)으로 왕비를 맞아들인 것이다.

왕권 지키기 위해 왕족 끼리끼리 결혼


부전자전이랄까? 광종은 근친혼을 한 첫 국왕이다. 1비 대목왕후는 태조와 4비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에 태어난 딸로서, 광종의 배다른 형제다. 2비 경화궁부인은 형 혜종의 딸로서, 광종의 조카다.

 

이같이 국왕이 근친혼을 한 첫 사례는 태조의 아들 광종에서 찾을 수 있는데, 태조가 낳은 9명의 공주 가운데 신라 경순왕과 혼인한 2명을 제외하면 모두 근친혼을 했다(1명 미상). 고려왕실의 근친혼은 태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경종을 잇는 성종과 목종의 비도 각각 4촌·6촌과 근친혼을 한다.

근친혼은 이후 고려왕실 혼인 형태의 하나로 굳어지는데, 다음과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먼저, 국왕은 왕실이 아닌 이성(異姓)과 혼인하더라도 왕비 1명은 반드시 근친혼을 한다. 그 다음, 태어난 공주는 어머니 쪽 성씨인 모성(母姓)을 사용한다.

 

경종의 어머니 대목왕후는 태조의 딸이나 그 어머니 신정왕후 황보씨(태조 4비)의 성을 따라 황보씨라 한 것이 그 예다. 근친혼의 전통은 고려에서가 아니라, 이미 신라왕실에서 나타난다.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는 것은 분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다. 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는 물론 형제의 자식과 고종이종 자매까지 아내를 삼았다. 이는 도리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다.”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내물이사금조)

김부식은 『삼국사기』(1145년)에서 신라 내물왕이 삼촌인 미추왕의 딸을 왕비로 삼은 사실을 이같이 비난했다. 유교는 ‘동성불혼(同姓不婚)’의 원칙을 강조한다. 유교사가인 그에게 근친혼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초기 역사가 역시 고려의 근친혼을 심하게 비난했다.

“태조는 옛것을 본받아 풍속을 교화하려는 뜻을 가졌다. 그런데도 토착적인 풍습에 젖어 아들을 딸에게 장가보내고, 딸은 외가성을 따르게 했다. 자손들도 (근친혼을) 가법(家法)으로 삼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애석하다. 부부는 인륜의 근본이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운 것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고려사』 권88 후비전 서문)

 

고려의 근친혼 풍습을 비난한 『동국통감』. 조선 성종 때 편찬됐다.

 

근친혼은 인륜의 근본을 무너뜨려 국가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로 근친혼을 비난했다. 윤리적 차원에서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김부식과 같다. 한편 『동국통감(東國通鑑)』(1485년)을 편찬한 역사가들은 현실적인 이유에서 근친혼을 비난했다.

“『좌전(左傳)』에 ‘남녀가 성이 같으면 태어나는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다’고 했다. 같은 성씨 사이에도 그러한데, 더구나 아주 가까운 친족 간엔 어떻겠는가? 이제 그 고모나 자매에게 장가든 사람을 보면, 대개 후손이 없는 사람이 많다. (고려가) 오백 년의 오랜 세월을 지났어도 종손과 지손(支孫)이 결국 수십 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을 본다면 선왕(先王)이 (동성불혼의) 예를 제정한 뜻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계할 일이다.” (『동국통감(東國通鑑)』高麗紀 혜종 2년조작은사진)

고려 오백 년간 왕실의 자손이 번창하지 못한 원인을 근친혼에서 찾았다. 윤리 문제가 아니라 유전적인 결함의 위험성을 거론하며, 근친혼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왕실의 내밀한 사실을 역사의 붓자루를 쥔 그들이 기록으로 남길 리야 없겠지만, 간접적이나마 그런 실례는 찾을 수 있다.

건국 백 년 지나서야 다른 성씨와 혼사


고려 역대 34명 국왕의 비는 모두 135명이다. 국왕 1명당 평균 3.97명, 대략 4명의 왕비를 두었다. 혼인하지 않은 국왕 4명을 제외하면 평균 4.5명, 즉 4명 내지 5명의 비를 둔 셈이다. 출생한 전체 자녀는 164명이다. 비가 없는 국왕을 제외하면 평균 5.5명으로 약 5~6명의 자녀를 두었다.

1명의 비가 평균 1명 정도의 자녀를 출산한 셈이다. 가족관계가 기록된 묘지명 약 220점을 분석하면, 고려 관료의 평균 자녀 숫자는 4명 정도다. 당시 일부일처제인 점을 감안하면, 관료의 경우 1명의 부인이 4명의 자녀를 출산한 셈이다. 결국 국왕의 자녀 출산은 관료의 4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출산율이 매우 낮은 셈이다.

한편 묘지명에 따르면 관료의 평균 사망 연령은 65.5세다. 『고려사』열전에 사망 연령이 기록된 관료 176명의 평균 사망 연령은 60.7세다. 그에 비해 국왕의 평균 사망 연령은 42.3세에 불과하여, 일반 관료의 사망 연령과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통계만으로도 유전적 결함의 흔적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고려가 건국된 지 약 백 년이 지난 현종 때 김은부(金殷傅)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다. 고려 왕실이 이성(異姓) 후비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여기에서 태어난 왕자가 다음 국왕으로 즉위한 예는 현종이 처음이다.

물론 이후에도 근친혼의 관례는 지켜지나, 근친혼 대신 이성 후비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예외 없이 국왕으로 즉위한다. 현종 이후 인종 때까지 고려 전기 왕비 가운데 근친혼 출신 왕비는 6명, 이성 왕비는 24명으로, 이성 출신의 왕비 숫자도 늘어난다. 이성 후비와의 혼인은 유전적인 결함의 폐해를 막기 위한 고육책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유교 이념 취약했던 것도 근친혼 원인


왜 고려왕실은 근친혼을 했을까? 건국 당시 고려왕실은 송악 출신의 호족세력에 불과할 정도로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태조는 통합전쟁에서 호족세력의 협조를 얻기 위해 그들의 딸과 혼인하면서, 많은 부인을 두었다.

태어난 자녀들이 왕실 외부세력과 혼인관계를 맺을 경우, 태조가 죽은 뒤 왕규의 발호에서 보는 것처럼 왕실이 위태롭게 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29명의 부인에게서 태어난 많은 자녀는 근친혼을 할 여건이 되었다. 근친혼은 왕실과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고려왕실이 택한 불가피한 혼인 형태였다.

다음, 동성불혼의 원칙을 강조한 유교 정치이념이 보편화되지 못한 당시 사상풍토가 근친혼이 성행한 원인의 하나였다.

유교 정치이념은 국왕은 ‘천명지(天命之)’, 즉 하늘이 명한 것이라는 이른바 천명사상(天命思想)에 의해 초월적인 존재로 상징화시키고, 신하는 능력과 실력에 의해 충원된다는 엄격한 군신관계를 강조한다. 고려왕조 성립기엔 그런 이념기반이 취약하여 근친혼을 통해 국왕과 왕실의 세력기반을 강화하려 했다.

현종 이후 유교 정치이념이 뿌리를 내리고 왕권과 왕실이 안정되기 시작하는데, 이성 후비와의 혼인은 이런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왕권과 왕실이 점차 안정되자 도리어 유력가문의 딸을 맞아들이고 외척가문을 왕실의 울타리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근친혼이든 이성과의 혼인이든 왕권 강화와 왕실 세력기반을 유지하려 한 점에서 혼인의 법칙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의 유력한 정치·경제 실력자들 사이 혼인도 그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렇게 넓고도 깊다.

[출처] : 박종기 국민대 국사과교수 : 고려사의 재발견 / 중앙Sun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