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건국 담론』 - ▣안창호의 민주 공화제, ▣손병희의 자치형 입헌군주제 [신명호의 근·현대건국운동사]
◆신명호의 근·현대건국운동사-Ⅰ『근·현대 건국 담론』···목차
1.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 꿈꾼 도산 안창호 -군주제 대체할 자유문명국 건립 천명
2. 민주공화제 실현 위해 행동에 나선 도산 - 비밀 정치결사 신민회를 조직하다
3. 손병희의 ‘자치형(自治形) 입헌군주제’ 구상 - 동학 농민이 다스리는 문명국 실현 꿈
4. 손병희의 진보회(進步會),한국 첫 대중 진보조직 탄생-무능한 황제 대신 민(民)이나서 국권수호
1.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 꿈꾼 도산 안창호 -군주제 대체할 자유문명국 건립 천명
샌프란시스코 유학시절 새 국가 성립 목표로 대한신민회 창설
을사늑약 체결되자 한양 돌아와 비밀리에 조직 만들어 공론화
1905년 을사늑약과 함께 사실상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다양한 현대 국가 건설 담론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상동파(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조직된 신민회의 자유민주국가 건설 담론이다. 이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국가 건설 담론은 상호 협조·경쟁하면서 3.1 운동으로 승화됐다.
3.1 운동 이후 양측은 각자 임시정부를 조직해 경쟁했고, 그것은 결국 남북 간 체제 경쟁으로 이어졌다. 이 연재에서는 과거 100여년간 국가 건설 담론과 갈등을 반추하는 한편 미래 통일 한국을 전망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도산 안창호는 미국 유학을 통해 부강한 문명국가 건설 필요성을 깨달았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위치한 도산공원 내 도산 동상.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제국에 강탈당했다. 외교권은 내치권과 더불어 국권을 구성하는 양대 기둥이다. 그런 외교권을 강탈당한 대한제국은 사실상 멸망한 나라로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다.
을사늑약은 공식적으로 1905년 11월 17일 체결됐다. 하지만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을사늑약을 보도하던 기자들의 마음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 제목에 압축됐다.
‘오늘, 목놓아 통곡한다’는 사설 제목 그대로 을사늑약을 접한 기자들은 목놓아 통곡했다. 나라가 망했기에 목놓아 통곡했고, 2000만 동포가 식민지 노예가 됐기에 목놓아 통곡했다. 황성신문을 통해 을사늑약 소식을 접한 대한제국 백성도 목놓아 통곡했다.
진실로 을사늑약은 500년 조선왕조의 죽음을 알린 조종(弔鐘)이었다. 그 조종을 울린 주인공이 조선 동포가 아니라 일본 침략자였기에 2000만 대한제국 백성은 더더욱 목놓아 통곡했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새 생명으로 이어지듯, 모든 통곡도 새 희망으로 이어져야 했다. 을사늑약에 목놓아 통곡하던 2000만 대한제국 백성들은 새 희망을 찾기 시작했다.
조국의 멸망을 목도한 대한제국 백성에게 새 희망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멸망한 조국을 다시 건국해내는 것이 새 희망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식민지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이 바로 새 희망이었다. 그 같은 새 희망은 두 가지 건국 담론으로 모색됐다. 하나는 옛 방식의 건국 담론이었고, 또 하나는 새로운 방식의 건국 담론이었다.
대한제국이 제국으로 멸망했으니 다시 군주국으로 건국하자는 것은 옛 방식의 건국 담론이었다. 옛 방식의 건국 담론은 이른바 위정척사파로 불리던 양반과 성리학자들이 추구했다. 그들은 반만년 한국 역사상 단군조선으로부터 대한제국까지 존재했던 모든 국가는 군주제 국가였기에 당연히 전통을 계승해 군주국으로 건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충성과 효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위정척사파는 멸망한 대한제국을 부활시키고 고종을 황제로 복권시키는 것이 신민(臣民)의 도리상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서 위정척사파는 을사늑약을 무효화하고자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의 최종 목표는 멸망한 대한제국의 부활 그리고 고종황제의 복권이었다. 그런 면에서 위정척사파의 건국 담론은 옛 방식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복벽(復辟) 운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20세에 만민공동회 대표 연설가로 명성
▎송재 서재필(왼쪽)과 도산 안창호. 서재필은 대중 연설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반면 당시의 개화파 그리고 동학 계열은 새로운 방식의 건국 담론을 모색했다. 개화파는 세계 추세에 맞춰 군주제 대신 자유민주제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동학 계열은 수천 년 지속한 군주제에서 농민이 큰 고통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새로운 건국 담론을 모색했다.
이에 따라 을사늑약 이후 위정척사파·개화파 그리고 동학 계열 사이에서 다양한 건국 담론이 제기됐고, 다양한 건국 운동도 출현했다. 그렇게 등장한 다양한 건국 담론과 건국 운동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담론과 운동은 도산 안창호 주도로 1907년 4월 한양에서 창립한 신민회(新民會)가 이끌어나갔다.
한양의 신민회는 1880년대 김옥균의 개화운동, 1890년대 박영효의 개혁 운동 그리고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계승한다는 점에서 역사적이었다.
게다가 도산 안창호를 비롯해 우남 이승만, 백범 김구, 성재 이동휘 그리고 전덕기 목사 등 식민지 시대 민족운동을 주도한 핵심지도자들이 신민회에 대거 망라됐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이었다.
1907년 당시 안창호·이승만·김구·이동휘 등은 공히 30대(代)로 각각 한 지역을 대표하던 젊은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천타천 미래 독립국의 최고 지도자감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1907년에 30세이던 안창호는 평안도를 대표하는, 32세이던 김구는 황해도를 대표하는 지도자였다. 또한 33세이던 이승만은 기호지역을 대표하는, 35세이던 이동휘는 함경도를 대표하는 민족지도자였다.
그들은 비슷한 연배에 더해 국권 회복이라는 공통분모 그리고 기독교 신앙과 자유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공통분모까지 있었기에 신민회를 중심으로 뭉칠 수 있었다. 아울러 신민회의 핵심 지도자 중 한 명이던 성재 이동휘가 훗날 사회주의로 전향해 식민지 시기 사회주의 건국 담론을 주도했다는 사실에서도 한양의 신민회 창립은 역사적이었다.
그런데 한양의 신민회가 1880년대 김옥균의 개화운동, 1890년대 박영효의 개혁 운동 그리고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계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안창호를 비롯해 이승만·이동휘·전덕기 등이 독립협회 회원으로 개화운동을 벌인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재필이 지도한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안창호·이승만·이동휘·전덕기 등은 민족독립 정신과 자유주의 국가 사상을 공유하게 됐다.
안창호는 1878년 11월 평남 강서군 초리면 칠리 도롱섬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가 될 때까지 집안일을 도우며 한문과 유교를 공부하던 안창호는 17세이던 1894년 한양에 올라가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했다.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은 당연히 장로교 계통의 학당이었다. 그래서 안창호는 유교 교양을 갖춘 장로교 신자로 성장했다.
안창호는 19세 되던 1896년 구세학당을 졸업했고, 다음 해에는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당시 20세이던 안창호는 이승만·이동휘 등과 더불어 만민공동회를 대표하는 대중 연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한국의 근·현대 역사에서 만민공동회는 대중 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 지도자들을 양성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이었다.
급진보다 점진 추구했던 도산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의 안창호. 오른쪽 둘째 컵을 들고 있는 사람이 안창호다.
조선시대 지도자들은 기본적으로 사서삼경을 공부한 양반들이었다. 그들은 연설이 아니라 과거시험 즉 문장 실력으로 양반이 됐다. 따라서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뛰어난 문장가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대중 연설을 연마하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조선 양반들에게 대중 연설의 중요성을 알린 사람은 서재필이었다.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은 미래 조선의 지도자들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대중 연설가가 돼야 함을 예견하고 배재학당 등에서 대중 연설을 훈련시켰다. 당시 배제학당에서 대중 연설로 단연 두각을 나타낸 학생이 이승만이었다.
만민공동회가 활성화되면서 대중 연설의 중요성은 현실로 나타났다.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는 명칭 그대로 만민공동회에는 수많은 대중이 운집했고, 그래서 대중 연설이 중요했다. 아무리 뛰어난 문장가라고 해도 대중 연설 능력이 없으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고 지도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민공동회를 통해 뛰어난 대중 연설을 자랑하던 젊은 운동가들이 차세대 지도자로 떠올랐다. 안창호·이승만·이동휘 등이 그들이었다.
김구는 비록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신민회 활동 기간에 뛰어난 대중 연설을 자랑했다. 이런 사실에서 안창호·이승만·김구·이동휘 등은 공히 뛰어난 대중 연설 능력을 바탕으로 핵심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민공동회에서 대중 연설가로 이름을 날리던 안창호는 1898년 연말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당하자 1899년 평양으로 낙향했다. 한양에 그대로 있다가는 체포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평양에서 안창호는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해 학생들을 교육했다.
점진(漸進)이란 ‘점차로 진전한다’는 뜻인데, 안창호가 이런 이름의 학교를 설립한 사실에서 그의 성품을 추정해볼 수 있다. 즉 안창호는 급진적인 경향보다는 점진적인 경향의 성품을 가졌다고 판단할 수 있다.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당한 그 상황에서도 안창호는 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점차로 진전시키는 것이 국권회복의 첩경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점진을 선호하는 그의 성품이 천성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20대 전후로 안창호는 급진보다는 점진을 추구했고, 그것이 안창호의 전 일생을 관통하는 특징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대략 3년 정도 점진학교를 운영하던 안창호는 1902년 9월 3일 한양에서 이혜련과 혼인하고, 다음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혼인 당시 안창호는 25세, 이혜련은 19세였다.
안창호는 1932년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진술한 신문조서(訊問調書)에서 미국 유학 이유를
“교육학을 배우고 조선에 귀국한 후 조선에서 교육 사업에 종사하고자 생각하고 있었고 또한 기독교의 깊은 뜻도 연구하고자”라고 밝혔다. 즉 교육학과 기독교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에 올랐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진술은 정확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때 안창호를 신문한 판사는 “당시 한국은 전제정치 상황으로 미국의 정치를 동경해 미국으로 간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했는데,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학습하기 위해 즉 정치적 목적으로 유학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해 질문한 것이었다. 그 질문에 안창호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자유민주주의 배우러 美 유학길
▎1937년 11월 세상을 떠나기 4개월 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 안창호의 모습.
하지만 실제 유학 목적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학습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당시 안창호는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킨 대한제국의 황제체제에 크게 실망해 미국 유학을 결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렇게 진술할 경우 안창호의 미국 유학과 유학 이후의 활동 모두가 대한제국의 황제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활동, 즉 반정부 활동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래서 안창호는 미국 유학의 정치적 목적은 단호히 부정하고 단지 교육적·신앙적 목적만 인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상황에서는 안창호의 미국 유학 목적을 정치적·교육적·신앙적 측면에서 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안창호가 정치적 목적에서 미국 유학을 했다는 함의(含意)는 그가 대한제국의 황제체제를 대체할 자유민주주의를 배우기 위해 유학했다는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1902년 안창호의 미국 유학은 자유민주주의를 배우기 위한 조선인 최초의 미국 유학이라 평가할 수 있다.
1902년 9월 4일 제물포를 출항한 안창호는 상해에 잠깐 들렀다가 요코하마·하와이·밴쿠버·시애틀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상해에 들른 안창호는 그곳에서 양주삼을 만나 자기 여동생 안신호와 혼인할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때 양주삼은 아직 학생 신분이라 학업 이후 결정하겠다고 대답했다. 물론 평양의 안신호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1903년 연초부터 근대 교육과 기독교 운동에 적극 투신한 황해도의 김구가 그해 여름 평양에 갔다가 안신호를 만나 선을 보게 됐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김구와 안신호는 다음 날 만나 약혼식을 올리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그날 밤 상해의 양주삼이 보낸 편지가 안신호에게 도착했다. 자신은 이제 학업을 마쳤으니, 오빠 안창호의 부탁대로 자신과 혼인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라는 편지였다.
결국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안신호는 김구도 포기하고 양주삼도 포기하고 말았다. 미국 유학길에 잠깐 들른 안창호의 상해 체류가 동생 안신호와 김구의 인연을 가로막은 셈이었다. 해방 이후 김구가 남북연석회의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안신호를 시켜 김구를 안내하게 함으로써 두 사람의 인연이 잠시 동안 이어지기도 했다.
상해·요코하마를 거쳐 태평양을 횡단하던 안창호는 하와이 근처에서 오랜만에 육지섬을 보았다. 그때의 감격을 안창호는 ‘태평양 상의 일소도(一小島)’라는 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벌써 30여년 전에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갈 때의 일이지요.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망망한 태평양을 지나게 됐습니다. 하루 이틀 십여 일을 가도 도무지 육지를 볼 수가 없더군요. 정말로 지루하고 갑갑한 중 육지가 여간 그립지가 않습디다. 그러자 하와이 부근을 지나게 됐지요. 망망한 수평선 저쪽에 조그만 섬 하나가 있더군요. 그 섬을 바라보니 여간 반갑고 그립지 않습디다. 표망(漂茫)한 대양 중에 홀로 서 있는 그 섬의 기개 --- 나는 그 섬을 바라보고 어떤 대양의 선구자나 만난듯해 여간 감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 호를 도산(島山)이라 했습니다.”(안창호, [조광(朝光)], 1937년 8월)
윗글에 의하면 하와이 부근에서 조그만 섬을 만난 안창호는 마치 대양의 선구자를 만난 것처럼 감격스러워 하며 자신의 호를 도산이라 했다고 한다. 즉 안창호에게 도산은 희망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상징했던 것이다. 그 희망은 안창호 자신에게만의 희망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확인된다.
이스라엘 백성 구한 모세의 마음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보낸 우남 이승만의 편지.
“상항(桑港-샌프란시스코)에 내려 하룻밤을 자고 거리에 나가니까 조선 사람들이 서로 상투를 붙잡고 뺨을 치며 싸움을 하는구려. 해외 수만리를 와서 조선인끼리 싸움을 하다니요? 기막힌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들의 싸움을 말리고 그 이유를 물으니까 그들은 인삼을 파는 사람인데 서로 딴 곳으로 갈려 다니며 인삼을 팔자고 했는데, 자기가 가는 곳으로 그 사람이 살짝 먼저 가서 인삼을 팔았다고 괘씸해 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도산 노릇을 했지요. 그들에게 좋은 말로 설명하고 해외에 와서 고생하는 우리들이니 상부상조하고 서로 위로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공부도 공부려니와 재류 조선인을 도와주자는 주의 아래서 공립협회(共立協會)라는 것을 조직하고 그들의 살길을 열어주고 생활 개선과 융화의 정신을 가르쳐줬습니다.”(안창호, [조광], 1937년 8월)
윗글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창호는 공부보다는 재미 교포 사회를 조직하는 데 주력했고, 그런 자신의 역할을 도산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자신의 본래 미국 유학 목적이 교육학과 기독교에 있었다는 신문조서와는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즉 안창호의 본래 미국 유학 목적은 신문조서에서 밝힌 교육적·신앙적 차원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측면이 컸다는 방증이라고 하겠다.
애초부터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배우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에서 유학길에 올랐던 안창호는 하와이 부근의 작은 섬을 바라보며 모세의 시내산을 떠올렸던 듯하다. 주지하듯 애굽인에게 매 맞던 동족을 구하기 위해 애굽인을 살해한 모세는 그 동족들의 싸움을 말리다가 시내산으로 도망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신의 부름을 받고 동족을 구하기 위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갔다. 파라오와의 대결에서 이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시내산에 와서 하나님을 대면해 율법을 받았고, 그 율법의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 입구까지 인도했다.
그 같은 성경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태평양 상의 일소도(一小島)’를 읽으면 안창호에게 도산은 시내산의 율법이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싸우는 동포를 말리던 도산 자신은 동족의 싸움을 말리던 모세임을 연상할 수 있다.
즉 안창호는 신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이집트로 향하던 모세의 마음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조선 동포들을 구할지는 막연하기만 했다.
그 방법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입학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할지 고민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안창호는 하와이 부근의 도산에서 마치 신의 음성 같은 대답, 즉 조선 동포들을 구원할 해답을 떠올린 듯하다.
그 해답은 다름 아닌 ‘동포 사랑’이었다. 그것을 안창호는 1937년 [조광]에 발표한 ‘기독교인의 갈 길’이라는 글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도 서로 사랑할지라 하셨거니와, 신약 처음부터 묵시 마지막 장까지 전권의 골자는 곧 사랑이외다”라고 표현했다.
이로 볼 때 안창호는 하와이 부근의 도산에서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새 계명을 떠올리고, 그 ‘사랑’을 ‘동포 사랑’으로 확장하는 것이 민족구원의 비결이라 확신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확신을 일평생 지키기 위해 안창호는 자신의 호를 도산이라 지었을 것이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족 간의 싸움을 말린 자신의 행동을 ‘도산 노릇’이라 표현했는데, 이는 ‘동포 사랑’의 계명을 실천했다는 의미라고 하겠다.
즉 안창호는 하와이 부근의 작은 섬에서 ‘동포 사랑’이라는 신의 계명을 떠올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 그 계명을 실천하면서 학교 공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해 학교 공부는 뒷전에 두고 재미교포 조직에 주력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안창호의 ‘동포 사랑’은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동포에 대한 사랑 헌신적 실천
▎안창호는 미국에서 체류할 때 오렌지 농장에서 잡부로 일하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는 말 그대로 ‘동포 사랑’을 헌신적으로 실천했다. 그 헌신에 힘입어 샌프란시스코 교포들은 안창호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결속했다. 그런 결속력을 바탕으로 안창호는 1903년 9월 한인친목회(韓人親睦會)를 창설해 회장에 취임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 대략 1년 만이었다.
그리고 다시 7개월 후인 1905년 4월에는 한인친목회를 확장해 공립협회를 창설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함께 서자’는 공립(共立)의 의미 그대로 안창호는 동포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것이 교포들도 살고 조국도 살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안창호가 실천한 ‘동포사랑’의 구체적인 방법론은 1906년 4월 공립협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서 그가 했던 연설에 잘 드러난다. 그 연설에 의하면 안창호를 비롯한 샌프란시스코 교포들이 미국에 온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문명하고 부강한 것을 배우고 본받아가지고 우리나라도 미국과 같이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즉 미국의 선진문명, 그중에서도 정치 문명을 배우기 위해 미국에 왔다는 것이 안창호 연설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당시 모든 교포가 그 목적으로 미국에 왔다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최소한 안창호 자신은 바로 그 목적으로 유학 왔다는 고백이라 이해할 수 있다.
안창호는 공립협회 창립 1주년 기념 연설에서 미국의 문명하고 부강한 것을 배우고 본받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문명과 부강을 구하자 하면 또한 문명과 부강의 뿌리와 씨를 구할 것인즉, 문명과 부강의 씨는 무엇이뇨? 우리 협회의 목적이니, 같은 나라 인종이 서로 보호하자는 뜻으로 단합하는 것”이었다.
즉 안창호는 미국의 문명과 부강의 뿌리는 다름 아니라 사랑이라는 기독교 원리라고 인식했던 것이고, 그 같은 기독교의 사랑 원리를 동포 사회에 적용한 것이 바로 한인친목회였고 공립협회였던 것이다.
안창호가 공립협회 창립 1주년 기념 연설을 하던 1906년 4월에는 이미 을사늑약의 소식이 미국에도 퍼진 시점이었다. 동포 사랑을 통해 재미 교포들의 노예적 상황을 구원하고자 한인친목회와 공립협회를 창설했던 안창호 입장에서는 당연히 본국 동포들을 구원하기 위한 조직도 창설해야 했다. 그런 필요에서 안창호는 1906년 연말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를 조직했다.
안창호는 대한신민회 목적을 ‘자유문명국 성립’이라 명시함으로써 을사늑약 이후 본국 동포들을 구원할 새로운 국가 형태는 곧 자유주의 국가임을 천명했다. 1907년 1월 20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안창호는 2월 20일 한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4월에 ‘자유문명국 성립’을 목표로 하는 한양의 신민회가 비밀리에 조직됐다. 이로써 5000년 역사에서 군주제를 대체할 건국 담론으로 자유주의 국가 담론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론화되기에 이르렀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근·현대건국운동사> - Ⅰ『근·현대건국담론』-①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꿈꾼 도산안창호 / 월간 중앙 2021년 1월호, 2020.12.17.
2.민주공화제 실현 위해 행동에 나선 도산 - 비밀 정치결사 신민회를 조직하다
입헌군주제 표방하는 장경과 대립, 재미교포 사회 분열
을사늑약 계기로 국민이 주체가 되는 신국가 건설 천명
1900년대 초반 미국 하와이로 이민 갔던 한국인들.
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그들은 밤낮 없이 일해야 했다.
1905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서 조직된 공립협회(共立協會)는 1909년 2월 하와이 합성협회(合成協會)와 통합해 국민회(國民會)가 됐다. 이로부터 국민회는 재미 교포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조직이 됐다. 국민회 본부는 리버사이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옮겼고, 기관지로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간했다.
1914년 2월 5일 자 [신한민보]는 국민회 통합 5주년을 기념해 ‘국민회 역사’라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기사에 의하면 을사늑약 직후 재미교포들은 “모국의 변란을 듣고 감개 격앙해 사람마다 국권 회복을 창도하며 정치사상이 날로 발달해 국가에 대한 관념이 그 행동을 일치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그 행동을 통일시켰다’는 것은 재미교포들의 정치사상과 국가 관념이 하나로 통일됐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반대로 정치사상과 국가 관념에 따라 재미교포 사회가 크게 분열됐다는 의미다.
그 이유는 국권 회복에 대한 방법과 국권 회복 이후 국가 건설 목표가 재미교포 간에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재미교포 각 사회가 조선의 축소판 같았기에 모국 조선에서처럼 정치사상과 국가 관념이 통일되지 않은 결과였다.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은 공식적으로 1903년 하와이 노동 이민부터 시작됐다. 당시 100여 명의 한국 노동자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하와이로 갔다. 이후 1905년까지 약 7000여 명의 한국인이 하와이로 건너갔다. 따라서 1900년대 재미교포 사회의 주류는 하와이에 있었다.
그러나 하와이 노동 이민 이전에 이미 샌프란시스코로 간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샌프란시스코로 갔는지, 또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는 국민회 하와이 지부의 기관지인 [국민보(國民報)]에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국민회 창설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민보]는 1958년 4월 23일 자 기사에 ‘국민회 역사 간략’이라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기사에 의하면 초기 샌프란시스코 교민 사회에는 상호간에 부르는 두 가지 칭호가 있었다고 한다.
“단발한 청년들에게는 까까중이라 했고, 삼상(蔘商) 노인들에게는 상투쟁이라 칭했다”는 것인데 단발 청년들은 삼상 노인들을 ‘상투쟁이’라 부르고, 반대로 삼상 노인들은 단발 청년들을 ‘까까중’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통해 샌프란시스코의 교포사회가 상투를 튼 삼상과 단발한 청년들로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상투쟁이 vs 까까중, 갈라진 샌프란시스코 교민
▎신민회를 조직한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상투를 튼 삼상은 말 그대로 상투를 튼 인삼 상인이었다. 한국의 그 많은 상인 중에서도 하필 인삼 상인이 제일 먼저 샌프란시스코에 온 이유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 때문이었다. 1860년 전후로 청나라와 일본은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때를 전후로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해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 차이나타운·재팬타운이 형성됐다. 그들에게 인삼을 판매하기 위해 한국의 인삼 상인들이 하와이 그리고 샌프란시스코까지 갔다.
그런데 [국민보] 특집 기사에 의하면 ‘유학생을 제외하고 상민으로 1887년 박영순씨가 선도자로 도미했고’란 내용이 있는데, 그 박영순씨는 인삼 상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에 앞서 1882년 조미수호조약 이후 젊은 청년들이 유학 차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1902년 샌프란시스코에 간 안창호 역시 유학 차 도미한 젊은 청년이었다. 1903년 9월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친목회를 창설했을 때 남자 회원은 총 10명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가족까지 합쳐도 당시 샌프란시스코 교포는 전체 20명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교포가 혼인 전 청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 20명 내외의 교포가 서로 간에 ‘상투쟁이’ 또는 ‘까까중’이라 부르며 분열돼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상투쟁이’와 ‘까까중’은 단순히 머리 스타일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출신 지역도 달랐고, 이념도 달랐다.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달랐다. 우선 상투를 튼 인삼 상인들은 주로 기호 지역 출신이었다. 그들은 전통 유학을 고수했기에 상투를 고집했다. 또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에게 조선 출신 인삼 상인이라는 각인 또는 신뢰를 주기 위해 상투를 고집했을 수도 있다.
반면 단발한 청년들은 주로 관서 지역 출신으로 평민이 많았고, 기독교를 신앙했다. 이런 배경에서 상투를 튼 인삼 상인들은 단발한 청년들을 “까까중”이라 멸시했다. “까까중”이란 “까까머리를 한 중”이란 뜻이다. 물론 조선 양반들이 불교 스님을 멸시하던 칭호다.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았으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효경] 구절을 주문처럼 외우던 조선 양반들에게 머리를 박박 깎은 스님들은 효도를 저버린 짐승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조선시대 “까까중”이란 “인륜을 저버린 짐승 같은 중놈”이란 욕과 같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인삼 상인들은 비록 자신들이 타국에서 인삼을 파는 상인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상투를 틀고 최소한의 인륜을 지키는 선비라는 자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눈에 자발적으로 단발한 고국의 청년들은 ‘짐승 같은 중’이나 마찬가지로 경멸스러웠을 것이 분명하다.
반면 단발한 청년들에게 상투를 튼 인삼 상인들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완고한 사람들로 비쳤을 것이다. 저들의 완고함 때문에 조선이 개화에 실패해 멸망 직전으로 몰렸는데, 미국까지 와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상투를 고집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했겠는가? 단발한 청년들이 말하는 ‘상투쟁이’란 ‘상투만 아는 천한 장사치’라는 의미다.
조선시대 상인은 기술자보다도 못한 천민으로 대우받았고, 그래서 ‘장사치’ 또는 ‘쟁이’로 불렸다. 결국 ‘까까중’이나 ‘상투쟁이’란 본국 조선에서 다른 신분층을 무시하고 깔보던 용어였고, 그런 용어들이 동족 간에 남발될 정도로 샌프란시스코 교민 사회가 처음부터 분열돼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분열을 없애기 위해 안창호는 1903년 친목회, 1905년 공립협회를 만들었다. 공립협회 조직 당시 샌프란시스코 교포는 100여 명으로 증가한 상황이었다. 또한 1907년에는 200여 명으로 늘어나는 등 샌프란시스코 교포사회는 확장일로에 있었다.
교포사회가 확장될수록 갈등 요인 역시 늘어났지만 핵심은 ‘상투쟁이’와 ‘까까중’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런 면에서 샌프란시스코의 친목회와 공립협회는 사실상 ‘상투쟁이’와 ‘까까중’의 통합체였다. 그 같은 공립협회를 통해 교포사회의 갈등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는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해소되지는 않았다. 지역 갈등, 이념 갈등, 직업 갈등 등 여러 요인이 그대로 잠복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수면 아래 잠복했던 갈등들이 을사늑약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물론 을사늑약이 처음부터 샌프란시스코 교포사회의 갈등을 조장한 것은 아니었다. 통합체인 공립협회가 있었기에 처음에는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상투쟁이’와 ‘까까중’ 사이의 갈등이 폭발했다.
이와 관련해 1958년 4월 23일 자 [국민보] 특집 기사에는
“안창호·장경(張景) 두 분 선생이 국사 문제로 주야 간 토의한 결과, 한 분은 귀국해 또 한 분은 원동(遠東-만주와 연해주)에 가서 활동하기로 내정이 된 후, 안창호 선생 말씀에 지도자로서는 무엇보다 도중(徒衆)에게 신임을 득함이 최상에 양책이라 삼상을 말라고 권고함에 이에 반감이 발해 분립됐다 합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명분 같았지만 길이 달랐던 두 지도자
▎하와이 한인 교포들이 사탕수수밭 작업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위에 등장하는 안창호는 단발 청년인 ‘까까중’ 대표이고, 장경은 인삼 상인인 ‘상투쟁이’ 대표이다. 처음에 안창호는 장경의 협조를 얻어 친목회도 조직할 수 있었고 공립협회도 조직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을사늑약 직후 공립협회가 어떻게 대응할지를 놓고 안창호가 주로 장경과 논의했을 것은 불문가지다. 처음에 장경은 친목회나 공립협회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협조적이었다. 특집기사는 바로 이런 상황을 묘사한다.
이런 상황은 1914년 2월 5일자 [신한민보]의 특집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즉
“공립협회는 이 시기를 당하여 정당한 방침으로 일시 인물을 지배해 동년(1905) 12월에 리버사이드·로스앤젤레스·큐카롱가 등 여러 지방에 지방회를 조직하고 상항(桑港, 샌프란시스코)에 총회기관을 설치해 홀로 미주(美州) 한인 우이(牛耳)를 잡았으며”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 내용에 의하면 을사늑약을 계기로 공립협회는 리버사이드·로스앤젤레스·큐카롱가에 지방회를 조직하고, 샌프란시스코에 총회기관을 창설해 미 본토의 한인사회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런 상황을 [신한민보]에서는 “홀로 미주(美州) 한인 우이(牛耳)를 잡았으며”라고 묘사했던 것이다. 또한 공립협회는 총회기관을 설치하기 한 달 전인 11월 22일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도 창간했다.
을사늑약이 11월 17일 체결된 사실을 고려하면, 공립협회는 을사늑약에 대응하기 위해 곧바로 [공립신보]를 창간하고 뒤이어 공립협회 조직을 강화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일들이 단기간에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안창호와 장경의 협조 때문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아주 협조적이었던 두 사람이 무엇 때문인지 갈라서고 말았다. 그 원인을 [국민보]에서는 “안창호 선생 말씀에 지도자로서는 무엇보다 도중에게 신임을 득함이 최상에 양책이라 삼상을 말라고 권고함에 이에 반감이 발해 분립됐다”고 했다. 즉 안창호가 장경에게 지도자가 되려면 인삼 상인을 그만둬야 한다고 해서, 장경이 반감을 갖고 갈라섰다는 의미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라 이해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치사상과 국가 관념의 차이 때문이었다. 을사늑약 직후 안창호와 장경은 국권 회복이라는 대의명분 앞에서는 같은 의견이었다. 하지만 국권 회복을 어떤 방식으로 추진할지, 또 국권 회복 이후 어떤 국가를 건설할지에 대해서는 확연히 달랐다.
비록 미국으로 이민왔지만 전통 유학의 영향 속에 있던 장경은 군주제를 버릴 수 없었다. 그나마 장경 그리고 그와 의견을 같이하는 ‘상투쟁이’들이 생각하는 군주제는 개명된 군주제 즉 ‘입헌군주제’ 정도였다.
하지만 안창호를 비롯한 ‘까까중’들은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884년 김옥균의 갑신정변부터 1896년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이르기까지 개화파들은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개혁운동을 벌여왔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전제군주 고종 때문에 실패했다. 따라서 국권 회복 이후 입헌군주제를 추구한다는 것은 지난날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입헌군주제를 넘어 미국식 민주공화제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전제군주 때문에 나라 망했다고 본 도산
▎[대한매일신보]가 순종의 일본 방문을 전하고 있다. 육군대장의 복장이 특이하다.
이에 따라 을사늑약 이후 안창호와 장경은 국권 회복 방법과 국권 회복 이후 국가 건설을 놓고 상당한 기간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1906년 9월쯤 갈라서고 말았다.
그 사실은 “1906년 9월 5일 장경씨가 분립해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를 조직한 후 1907년 3월 19일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개조하고 동년(1907) 10월에 대동공보를 발간했습니다”는 [국민보]의 특집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1905년 연말부터 1906년 9월까지 약 9개월가량 상호 간에 협조하며 논쟁하던 안창호와 장경이 1906년 9월 5일부로 완전히 갈라서게 됐다는 의미다. 두 사람이 갈라선 결과 장경은 대동교육회와 그 후신인 대동보국회를 조직하고, 안창호는 신민회를 조직하게 됐다.
그러므로 당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논쟁이 오갔는지를 확인하려면 대동교육회와 대동보국회의 취지서 그리고 신민회의 취지서를 분석해 상호 검토·비교할 필요가 있다.
먼저 대동교육회 취지서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장경이 대동교육회를 처음 조직한 시점은 1905년 12월 9일이었다. 그때는 장경이 안창호와 협력하던 시점이었다. 1905년 12월 조직된 대동교육회가 무엇을 목표로 했는지는 그 이름에서 추정할 수 있다. 우선 ‘대동’이라는 용어 그리고 ‘교육’이라는 용어가 중요하다. 대동이란 ‘대동단결’이란 의미다.
이는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한국 사람들이 상하귀천 없이 모두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의미와 같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을사늑약의 책임이 고종황제보다는 고종황제에 도전한 개화파 또는 동학 같은 어리석은 백성들 때문에 국론이 분열된 결과라는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국권 회복을 위해 상하귀천 없이 모두 대동단결하자는 것은 결국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대동단결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다만 ‘대동교육회’의 ‘교육’은 교육을 통해 세계화된 상황에서 대동단결해야 국권 회복이 가능하다는 뜻을 함축하므로 ‘대동교육회’는 생각에 따라 진취적일 수도 있었고, 퇴보적일 수도 있었다. 만약 세계화가 국민 교육만 지칭하고 정치제도는 제외한다면 그것은 한정된 의미에서만 진취적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국민 교육은 물론 정치제도까지 포괄한다면 대단히 진취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905년 12월 장경이 대동교육회를 조직했을 때 안창호는 대동교육회의 최종 목표가 국민 교육의 세계화를 넘어 정치제도의 세계화까지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반해 장경은 대동교육회의 최종목표는 말 그대로 국민교육의 세계화만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으로 이해된다.아마도 장경은 조선의 현실을 감안하면 일단 국민 교육의 세계화부터 추진하고, 정치제도의 세계화는 나중에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을 듯하다.
당시 절대군주제 하의 대한제국 상황에서 민주공화제를 최종 목표로 내세운다면 그것은 곧 반정부 활동을 공식화하는 것과 같은데, 그렇게 되면 국권 회복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와 더불어 대한제국까지 두 곳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므로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창호는 1880~90년대 개화운동 실패를 들어 이왕 하는 국권 회복 운동이라면 정치제도의 세계화를 최종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이 같은 의견 차이를 좁히기 위해 안창호와 장경은 상당 기간 논쟁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양자 사이의 의견은 접점을 찾지 못했다.
국권 상실, 못 배운 백성 탓으로 돌린 장경
▎[르 프티 파리지앵] 1905년 10월 8일 자.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 루스벨트가 고종 황제를 만나기 위해 궁궐로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했다.
결국 장경은 1906년 8월 9일 고국의 [대한매일신보]에 ‘대동교육회 취지서’를 공개해버렸다. 그 취지서에서는 을사늑약의 원인을 “불학(不學)” 때문이라고 해 무엇보다도 교육을 강조했다. 그런데 을사늑약의 근본 원인을 “불학”이라고 한다면 그 책임은 주로 불학무식한 백성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동교육회’는 불학무식한 백성을 열심히 교육해 그들이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국권 회복을 추진하게 만들려는 조직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 점을 대동교육회 취지서에서는 “대한인사(大韓人士)는 무론재외재내(無論在外在內) 하고 상하남녀노유(上下男女老幼)가 의각출성력(宜各出誠力) 하야 이조성대사(以助成大事)”라고 명시했다.
이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장경은 1907년 7월 10일 대동보국회의 목적을 [황성신문]에 기고했는데, 그것은 “위로 군주와 정부를 조력(助力)하며 아래로 부로(父老)와 자제를 상구(相救) 하기로 정신을 치(致)하고 목적을 입(立)하야”라고 천명했다.
요컨대 장경의 대동교육회 그리고 대동보국회는국권회복 방법을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대동단결 하는 것에서 찾았고 나아가 국권 회복 이후의 국가 형태는 문명화된 입헌군주제 정도로 구상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반면 안창호는 이 같은 대동교육회 그리고 대동보국회의 국권 회복 방법과 국가 건설 목표에 동의하지 않았다. 안창호는 장경이 1906년 8월 9일 고국의 [대한매일신보]에 ‘대동교육회 취지서’를 공개하자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1906년 9월 5일 장경씨가 분립해 대동교육회를 조직한 후’라는 [국민보] 특집기사는 1906년 9월 5일 장경이 처음으로 대동교육회를 조직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한매일신보]에 대동교육회 취지서가 공개된 사실을 알게 된 안창호가 대동교육회를 포기하고 별도 조직을 만들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는 의미라 하겠다. 그 조직이 바로 신민회(新民會) 즉 대한신민회였다.
안창호가 구상한 신민회는 여러 면에서 장경의 대동교육회와 대조적이었다. 우선 대동교육회는 1906년 8월 9일 [대한매일신보]에 취지서를 공개할 정도로 합법 조직이었다. 달리 말하면 공개적으로 입헌군주제를 추구할 정도로 합법조직이었다.
반면 신민회는 처음부터 비밀결사를 염두에 둔 비합법 조직이었다. 달리 말하면 입헌군주제를 넘어서려는 정치조직이었던 것이다. 또한 대동교육회는 기존 리더십과의 대동단결을 강조하는 ‘대동’이 핵심인 반면, 신민회는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그대로 기존 정치제도와 사회제도를 새롭게 뜯어고치겠다는 ‘유신(維新)’이 핵심이었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구상했을 뿐만 아니라 취지서와 세부조직도 작성했다. 안창호가 정확히 언제 신민회를 구상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대동교육회를 염두에 둔다면 1906년 9월 5일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신민회를 구상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신민회 취지서 및 세부조직은 1906년 연말쯤 완성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신민회는 애초부터 비밀결사로 구성됐기에 취지서나 세부규칙 등은 오직 회원들만 알 수 있었고 공개된 적이 없었다.
1907년 초 조선에 입국한 안창호는 신민회를 은밀하게 확산시켰지만 취지서나 세부규칙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신민회 회원들 역시 비밀을 엄수한 덕분에 일제 정보망은 1909년에 가서야 신민회 관련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신민회, 대한제국과 일제 모두 타도 대상
▎형무소로 끌려가는 신민회 독립운동가들. 일제는 을사늑약 후 105인 사건 등을 조작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
그 정보는 1909년 3월 5일자헌병기밀 제501호로 보고됐으며 신민회 취지서와 통용장정(通用章程)이 첨부됐다. 신민회 관련 정보를 조사한 일제 정보망은 신민회를 “기(其) 심의(深意)는 한국으로 하여금 열국(列國) 보호 아래 공화정체의 독립국으로 함에 목적이 있다고 운(云)함”이라고 결론지음으로써 신민회를 민주공화제를 추구하는 비밀정치조직으로 판단했다.
이는 나름대로 정확한 판단이었다. 안창호가 애초부터 신민회를 비밀결사로 구상한 이유는 당연히 민주공화제를 목표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신민회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제를 목표로 조직된 비밀 정치결사라 할 수 있다.
일제 정보망에서 파악한 신민회 취지서에는 “본인 등은 국민의 일분자로서 해외에 표박(漂泊)하는 일이 지금 여러 해, 바라건대 학문견문(學問見聞) 하는 중에 얻은 바로써 국민의 책임을 보답하고, 국민의 직분을 실행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 등장하는 ‘본인’은 물론 안창호다. 아울러 신민회 취지서는 “위로 천지신명에게 묻고 아래로 동포형제와 상의해 드디어 일회(一會)를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서 발기하고 그 이름을 대한신민회라 한다”고 함으로서 이 취지서를 안창호가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서 직접 작성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신민회를 조직한 근본 취지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배운 지식으로 국민의 책임과 직분을 다하고자 하려는 데 있음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안창호가 언급한 국민의 책임과 직분은 주권자로서의 책임과 직분이다. 그 책임과 직분은 유신(維新)된 국민이 주체가 돼 국권을 회복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유신된 국민이 주체가 돼 유신된 국가 즉 민주공화제를 건설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안창호는 신민회 취지서 결론 부분에서 “무릇 우리 한국인은 내외를 논할 것 없이 통일연합으로 그 길을 정하고, 독립과 자유로 그 목적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는 신민회가 발원하는 바이며 신민회가 회포(懷抱)하는 바다. 약언(略言)하면 역시 말하기를 신(新)정신을 불러 깨우치고, 신단체를 조직해서 신국가를 건설할 뿐”이라고 천명했다.
요컨대 안창호는 신민회로서 한국인들을 정신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으로 유신시켜 국권을 회복하게 하고, 국권 회복 후에는 궁극적으로 신국가인민주공화제 국가를 건설할 것임을 천명했던 것이다.
이 같은 민주공화제는 당시 상황에서 대한제국 체제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안창호가 신민회를 비밀 정치조직으로 구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근·현대건국운동사> - Ⅰ『근·현대건국담론』-②민주공화제 실현 위해 행동에 나선 도산 / 월간 중앙 2021년 2월호, 2021.1.17.
3.손병희의 ‘자치형(自治形) 입헌군주제’ 구상
- 동학 농민이 다스리는 문명국 실현 꿈
일본 직접 본 뒤 ‘척양척왜’ 노선 버리고 개화파와 손잡아
조선의 친러정권 몰아내려 한·일 군사동맹 추진하다 무산
▎1994년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 신창극 ‘천명’. 출연 배우들이 동학혁명 당시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손병희는 동학의 제3대 교조(敎祖)다. 호는 의암(義菴)이다. 1861년(철종 12) 충북 청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22세 되던 1882년(고종 19) 동학에 입도(入徒)했다. 제2대 교조 최시형의 측근이 된 그는 북접(北接) 지도자로 성장했고, 34세 되던 1894년(고종 32) 남접 지도자 전봉준 등과 합세해 갑오 농민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참패했다. 손병희는 최시형과 함께 깊은 산속으로 피신해 겨우 살아남았다. 하지만 전봉준·김개남 등 수많은 동학 지도자가 체포돼 죽임을 당했고, 동학은 궤멸 직전으로 몰렸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최시형은 1897년(고종 35) 교조에서 물러났고, 손병희를 제3대 교조로 임명했다.
37세의 동학 교조 손병희는 갑오 농민운동 실패 원인과 동학 재건 방법을 놓고 고민했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양척왜(斥洋斥倭)를 기치로 궐기했던 갑오 농민운동은 왜 실패했을까?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라는 목표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목표는 좋았는데 방법론이 잘못된 것일까? 궤멸 직전에 몰린 동학을 재건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런 문제를 놓고 몇 년간 고민하던 손병희는 척양척왜의 대상인 서양과 일본을 정확히 아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달았다. 적을 정확히 알아야 어떻게 싸울지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00년(광무 4)에 손병희는 미국으로 망명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동학의 2인자 김연국이 반대해 성사되지 못했다. 그때 김연국이 왜 반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벼랑 끝 위기에 몰린 동학을 내버려두고 교조가 해외 망명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생각했을 듯하다.
그러나 전봉준과 함께 갑오 농민운동의 주모자로 몰린 손병희는 도피처를 찾아야 했다. 만에 하나 교조 손병희가 체포된다면 동학은 재기 불능으로 빠질 수 있었다. 신변 안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동학을 세계 대세에 맞춰 혁신하려면 해외 망명밖에 대안이 없었다.
이런 공감대에서 손병희는 1901년(광무 5) 3월, 원산에서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나가사키로 갔다. 우선 일본에 갔다가 미국으로 망명할 생각이었다. 세계 대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본보다 미국이 적합하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비가 넉넉지 못해 일본으로 망명하게 됐다. 당시 손병희의 나이 41세였다.
손병희의 일본 망명은 안창호의 미국 유학보다 1년여 앞섰다. 만약 손병희가 처음 목표대로 미국 망명에 성공했다면 그의 사상은 훨씬 더 세계화됐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안창호와 만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안창호와 손병희 두 사람이 협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됐다면 1900년 대 민족운동 그리고 동학운동이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손병희가 미국 망명에 실패하고 일본에 체류함에 따라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손병희는 미국의 안창호 대신 일본의 개화파 망명객들을 만나 협력하게 됐다.
손병희는 일본으로 망명할 때 손병흠과 이용구 두 사람을 대동했다. 손병흠은 동생이고, 이용구는 핵심 측근이다. 특히 이용구는 손병희보다 7세 아래로 동학의 차기 지도자로 손꼽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손병희와 이용구의 일본 망명은 현재와 차기 동학 수뇌부의 일본 망명이란 측면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손병희는 1906년(광무 10) 1월 귀국하기까지 5년 동안 오사카·교토·도쿄 등에 머물며 일본과 서양을 공부했다.
충청도 갑부 행세하며 개화파 망명객들과 교류
▎독립운동가이자 동학 제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
또한 일본에 망명한 개화파 인사들과도 교류했다. 그러면서 손병희는 크게 바뀌었다. 특히 서양과 일본을 야만으로 간주하던 기존 생각이 변했다. 손병희가 직접 확인한 일본은 절대 야만이 아니었다. 냉정히 봤을 때 일본은 선진국이었고 오히려 조선은 후진국이었다.
본래 동학의 척양척왜는 조선의 문명과 백성을 수호하기 위해 야만 서양과 야만 일본을 몰아내자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가서 직접 확인해보니 서양과 일본은 보고 배워야 할 문명국이자 선진국이었다. 배척 대상이 아니라 학습 대상이었던 것이다. 깊은 고민 끝에 손병희는 척양척왜 노선을 버리고 문명개화 노선으로 전환했다.
손병희의 문명개화 노선은 특히 박영효·권동진·조희연·오세창 등 개화파 망명객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박영효 등이 일본 망명을 선택한 이래로 개화파 인사들은 정치적 위기에 몰릴 때마다 일본으로 망명했다.
권동진·조희연·오세창 역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공히 친일반중 또는 친일반러에 입각한 문명개화를 추진하다 실패해 일본에 망명한 사람들이었다. 강력한 동지애로 결속한 그들은 일본 협력을 얻어 권토중래(捲土重來)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본에 망명한 손병희는 처음 이상헌이란 가명을 쓰며 충청도 출신 갑부 행세를 했다. 권동진은 1930년 1월 31일 자[동아일보] 기사에서 손병희를 처음 만났을 때의 회고담을 소개했다.
그중에 “충청도 어느 고을 아전으로, 상납한 돈을 훔쳐가지고 도망해온 사람 같으나. (…) 자객이 아닌 것만은 간파했으므로 돌아가 조희연에게 자객은 아니니 안심하라고 말해뒀다”는 내용이 있다. 충청도 갑부 행세를 하는 손병희를 보고 공금을 횡령해서 도망한 아전이 아닐까 의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손병희를 처음 만났을 때 권동진의 첫 번째 관심은 자객 여부였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이 1894년 자객에게 암살당한 후 개화파 망명객들은 조선에서 낯선 이가 올 때마다 자객 여부부터 의심했던 것이다. 권동진 역시 정체불명의 손병희를 처음 만났을 때 자객 여부부터 의심했다.
확인 결과 자객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자 권동진은 조희연 등 동지들에게 안심하라고 알려줬다. 그 결과 권동진·조희연·오세창 등 개화파 망명객들은 손병희와 가까운 사이가 됐고, 결국 손병희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권동진의 회고담에 의하면 손병희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운동비는 몇 만원이라도 댈 것이니 널리 동지를 규합해 장차 큰일을 이루길 준비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권동진은 “우리도 굳게 맹세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 목적을 달함에는 당시 수백만 대중을 가진 동학당의 당력(黨力)과 자금이 실로 백만 대군을 얻은 것보다도 나은 것 때문”이라 한다.
이로 본다면 손병희와 개화파 망명객들은 상호 필요에 의해 협력관계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기왕의 동학과 개화파가 서로 갈등했던 근본 이유는 동학의 척양척왜 노선 때문이었다. 그런데 동학의 척양척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보국안민을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따라서 손병희 입장에서는 척양척왜가 보국안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심지어 개화파가 주장하는 문명개화가 동학의 보국안민과 궁극적으로 상통하는 목적이라면 문명개화 노선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손병희는 문명개화된 일본 현실을 자신이 직접 확인했고 나아가 개화파 망명객들과도 교류하면서 척양척왜 노선이 비현실적임을 깨달았다.
동학은 ‘폐정개혁’, 개화파는 ‘문명개화’ 염원
▎1915년쯤 손병희 선생이 타고 다니던 자동차.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민간인으로는 처음 자가용을 이용한 인물로 전해진다.
아울러 당시 국제 현실에서 진정한 보국안민을 위해서는 문명개화가 절실함도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에서 손병희는 동학이 추구하는 ‘큰일’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개화파 망명객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판단해 협력을 제안했다고 이해된다. 개화파 망명객들 역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동학의 도움이 절실했다.
당시 손병희가 언급한 ‘큰일’이란 갑오 농민운동에서 동학군이 추구했던 ‘폐정개혁(弊政改革)’이라 할 수 있고, 권동진이 언급한 ‘우리 목적’이란 개화파가 추구했던 ‘문명개화’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손병희와 개화파 망명객들이 협력한다는 것은 동학의 폐정개혁과 개화파의 문명개화가 협력한다는 것이나 같은 의미였다.
그런데 이 문제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 그리고 국가체제라는 측면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폐정개혁이나 문명개화는 궁극적으로 국가권력 그리고 국가체제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갑오 농민운동에서 동학군이 추구했던 폐정개혁은 폐정의 내용 그리고 그 폐정을 개혁할 방법론이 중요했다. 갑오농민운동 당시 전봉준 등의 농민군이 주장한 폐정이란 궁극적으로 농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부정부패한 국가권력이었다.
그런 부정부패한 국가권력을 개혁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전봉준 등 동학군이 제안했던 것이 이른바 집강소(執綱所)라고 하는 군현 단위의 농민 자치조직이었다.
즉 갑오 농민운동에서 농민군은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만 군주제의 폐정을 개혁하기 위한 대안으로 집강소라고 하는 농민 주도의 지방 자치를 제안했던 것이다.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 역시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군주는 문명개화를 추진할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해 군주를 상징적인 존재로 놓고 중앙 개화파 관료들이 문명개화를 추진하는 국가체제를 세우고자 했다. 그런 생각은 결국 입헌군주제로 귀결됐다.
그러므로 손병희와 개화파 망명객들이 협력해 국가권력을 장악한다면 군주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면서 중앙권력은 개화파 망명객들이 장악하고, 군현 단위의 지방권력은 동학이 장악하는 국가체제로 바뀔 가능성이 컸다.
그런 국가체제라야 손병희와 개화파 망명객들 공히 만족할 수 있고, 나아가 상호간 협력도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군현 단위의 지방권력을 동학이 장악한다는 것은 집강소라고 하는 농민군들의 염원이 실현되는 것이고, 중앙권력을 개화파 망명객들이 장악한다는 것은 입헌군주제라고 하는 개화파의 염원이 실현되는 것이다.
이처럼 군주를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고 중앙권력과 지방권력을 개화파 망명객들과 동학이 양분해 장악하는 국가제체는 ‘자치형(自治形) 입헌군주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자치형 입헌군주제는 다분히 동학 농민군의 요구가 반영된 한국적 국가체제로 이해될 수 있다.
권동진의 회고에 의하면 “운동비는 몇 만원이라도 댈 것이니 널리 동지를 규합해 장차 큰일을 이루길 준비하라”는 손병희의 제안에 그는 “우리도 굳게 맹세했다”고 답했다. 이는 손병희와 개화파 망명객들이 상호 협력을 맹세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손병희, 러일전쟁에서 일본 승리 예상
▎1885년 초 일본 망명 시절의 갑신정변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서재필·김옥균.
물론 상호협력이란 힘을 합쳐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 동학의 폐정개혁과 개화파의 문명개화를 실현하겠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당시 손병희와 개화파 망명객들이 상호협력 해 국가권력을 장악한 뒤 ‘자치형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겠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상호협력은 궁극적으로 ‘자치형 입헌군주제’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손병희는 ‘자치형 입헌군주제’의 세부 내용을 1906년 (광무 10) 저술한 [향자치(鄕自治)]에서 자세하게 밝혔다.
손병희는 1902년(광무 6) [삼전론(三戰論)], 1903년(광무 7) [명리전(明理傳)] 등을 통해 문명개화를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나아가 1903년(광무 7) 초부터는 한·일 군사동맹까지도 주장했다.
손병희가 한·일 군사동맹을 주장하던 시점에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1903년 음력 3월의 이른바 용암포 사건 때문이었다. 용암포 사건이란 러시아군이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무력점령하고 조차(租借)를 요구한 사건이다. 일본은 용암포 사건을 러시아의 한반도 무력점거를 위한 사전포석으로 보고 전쟁을 해서라도 저지하고자 했다.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던 손병희는 전쟁이 난다면 일본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근거는 네 가지였다.
첫째, 러시아는 수만 리 원정(遠征)이므로 지리에서 불리하다.
둘째, 전쟁 동기가 러시아는 영토 확장과 부동항 획득이지만, 일본은 한반도를 점거하려는 러시아 위협에서 벗어나
자는 것이므로 일본이 더 절박하다.
셋째, 러시아는 쇠퇴 중이고 일본은 번영 중이므로 일본의 전의(戰意)가 훨씬 강하다.
마지막으로 일본은 국운을 걸고 결사항전 자세로 임하기에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승리가 예상된다고 하더라도 러시아는 세계적인 강대국이었다. 설혹 일본이 단기적으로 이긴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보면 러시아는 일본에 크나큰 후환이 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는 한 패배한 러시아가 언젠가 복수하고자 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려면 일본은 확실한 대책이 필요했다.
1902년 1월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전략적 요충지 한반도에 자리한 대한제국과 군사동맹이 절실했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은 친러파 관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손병희는 이 같은 국제 환경이 동학 재건과 국가 혁신에 오히려 도움이 될 것으로 봤다. 우선 동학이 일본 협력을 끌어내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만약 동학이 나서서 친러파 정권을 타도하겠다고 한다면 일본이 적극 협조할 가능성이 컸다. 일본 협력으로 친러파 정권을 타도한다면 동학이 주도권을 잡고 국가를 혁신시킬 수도 있었다.
나아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다면 일본은 대한제국과의 군사동맹을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도 계속 우호적으로 나올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 이런 판단과 기대에서 손병희는 1903년(광무 7) 초부터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손병희 선생 기념사업회가 1967년 편찬한 [의암 손병희 선생 전기(義菴孫秉熙先生傳記)]에는
“그러므로 우리 한국은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 하는 동시에 일본과 동맹하여 공동출병의 입장을 취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한국의 내각은 모두 친러파에 속하기 때문에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부득이 동학군의 힘으로 정부를 개혁하는 수밖에 없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군 당국과도 사전양해가 성립되지 않고는 갑오혁명 때와 같은 사태가 벌어질 것을 우려하여, 손병희 선생은 권동진으로 하여금 일본군 참모 다무라(田村)를 만나 사유를 말하고 쾌락을 받는 동시에 손병흠을 국내에 파견하여 국내의 동지들로 하여금 거사의 준비를 서두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방권력 장악 대비해 동학 조직 재정비 나서
▎동학혁명에 참여했다 체포된 농민군이 목에 칼을 쓰고 있다.
위에 등장하는 일본군 참모 다무라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02년(광무 6) 일본 육군참모본부 차장이 된 인물이다. 손병희는 권동진의 소개로 1903년(광무 7) 초 다무라를 만나 한·일 군사동맹을 제안해 쾌락(快諾)을 받았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협력 방안은
“먼저 일본 병사로 하여금 상인으로 변장해 비밀리에 불통상항(不通商港)에 들어가 있다가 동학교도들과 더불어 일제히 성세(成勢)를 올리며 일어나서 곧바로 경성에 충격을 줘 당시 정부 내의 친러파를 제거하고, 그다음에 한편으로는 내정을 혁신하고 한편으로는 대군을 내보내서 일본국과 같이 한국도 참전해 러시아를 격퇴시키자는 것”이라 한다.
권동진의 회고는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우리는 수백 만의 동학당을 움직일 수 있고, 또한 개명의 선봉인 독립협회 잔당을 규합하면 가위 공고한 민당(民黨)이 돼 조선 정부쯤이야 능히 움직일 수 있다고 하였소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민당의 힘으로 조선 정부를 견제해 러시아의 진출을 제어하고 그 대상으로 우리가 정부를 조직할 때 일본이 원조해주기로 다무라와 사이에 밀약이 체결됐소이다.”
요컨대 동학·개화파 그리고 일본군이 합세해 친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고 문명개화를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방안은 지난 1884년 갑신정변 때 김옥균이 일본군과 협력해 친청파를 타도하고 문명개화를 추진하고자 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갑신정변의 역사에 비춰보면 일본군이 손병희와 개화파 망명객들의 기대와 예상대로 끝까지 움직여줄지는 사실 미지수였다.
아무튼 다무라와 협상 후 손병희는 한·일 군사동맹에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우선 동학 조직을 재정비했다. 1903년(광무 7) 2월, 기왕의 접주제(接主制)를 강화해 대두령제(大頭領制)로 전환했다.
대두령제는 100호(戶) 이상에 해접주(該接主), 500호 이상에 수접주(首接主), 1000호 이상에 대접주(大接主), 1만 호 이상에 의창대령(義昌頭領), 5만 호 이상에 해명대령(海明大領), 10만 호 이상에 수청대령(水淸大領)을 두는 체제였다.
당시 동학의 대접주가 200여 명, 대령이 1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대접주는 1000호 이상에 뒀으므로, 대접주 200여 명이라고 하면 적어도 20만 호가 넘었다는 의미이고, 호당 인구를 5명으로 계산하면 100만이나 된다. 그동안 손병희의 노력으로 동학 세력이 크게 확장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당시 2000만 명으로 추산되던 대한제국 총인구에서 100만은 어마어마한 수였다. 동학교도가 100만이라면 그중에서 10만 병력을 동원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당시 손병희가 대두령제로 동학 조직을 개편한 이유는 비상시 10만 병력동원 및 성공 시 지방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사전포석으로 이해된다.
동학 조직을 재정비한 손병희는 동생 손병흠과 측근 이용구를 국내로 파견해 거사를 준비하게 했다. 특히 이용구는 1903년(광무 7) 3~5월 사이, 수청대령(水淸大領) 자격으로 귀국해 조직 강화에 주력했다.
그 결과 1903년 가을쯤에는 100만 동학교도가 결집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10만여 병력을 동원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 10만여 동학군이 일본군과 합세해 일시에 궐기한다면 친러파 정권 타도는 어렵지 않을 수 있었다.
손병흠·다무라 죽음으로 한·일 군사동맹 무산
▎1905년 1월 5일 뤼순(旅順)에 있는 호두산 203고지 (러시아군의 요새)에서 일본군에 투항하는 러시아 장병들.
그런데 국내의 동학 조직을 재정비한 후 손병흠은 보고차 일본으로 가기 위해 1903년 8월 3일 부산에 갔다가 여관에서 객사했다고 한다. 설상가상 손병희와 밀약했던 다무라 역시 이틀 뒤인 8월 5일 급사했다. 이 결과 1903년(광무 7)가을이나 겨울쯤, 동학과 독립협회 잔당들 그리고 일본군이 합세해 친러파 정권을 타도하고 국가권력을 잡으려던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1903년 봄부터 손병희가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주장하자 그를 친일매국노로 간주해 암살하려는 한국인도 등장했다. [의암 손병희 선생 전기]에 의하면 1903년(광무 7) 5월 15일 저녁, 손병희가 도쿄 우에노(上野) 공원을 홀로 산책하고 있을 때 한국 유학생 한 명이 품속에서 시퍼런 단도를 꺼내들고 다가와 “내가 네 뒤를 따른 지 이미 오래됐다. 오늘은 내 칼에 죽어봐라. 이놈 네가 우리 조국을 왜놈에게 팔아먹으려는 매국노 아니냐?”라며 찌르려 했다고 한다.
그때 손병희는 “매국노를 죽이겠다 하니 듣기에 반갑소만 자객은 사실을 바로 안 뒤에 사람도 바로 알고 죽여야지.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고 후회하기도 쉬운 것이니, 먼저 내 이야기나 들어보고 나를 죽여도 죽이는 것이 늦지 않을 것 아닌가”라고 한 뒤 한·일 군사동맹의 이점을 설득했다고 한다.
손병희의 설득 논리는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이번 기회에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막게 하자는 것이요, 또한 일본을 가까이 하는 사이에 내정을 탐지할 수도 있으며 한국 정신을 가지고 일본 정신을 매수할 수도 있는 것이니, 이것이 겉으로 보면 친일인 것 같으나 내용으로 보면 반로(反露)인 동시에 반일본이라, 동양에서 먼저 러시아를 몰아낸 뒤에 일본 정신을 빼앗아 주기만 하면 장래의 동양은 한국의 동양으로 될 것이 아니겠소”였다.
즉 손병희는 동학사상으로 일본 정신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한·일 군사동맹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 점이 문명개화를 주장하며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과의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손병희가 암살 위험을 무릅쓰며 추진했던 한·일 군사동맹은 손병흠과 다무라의 죽음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들의 사망 소식을 접한 손병희는 3일 간이나 먹지 않고 크게 걱정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1903년 손병희가 개화파 망명객들과 추진했던 문명개화 및 한·일 군사동맹은 실패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무엇보다도 동학과 오랫동안 갈등관계에 있던 개화파와 협력관계를 맺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이었다. 다음으로 동학의 척양척왜 노선을 문명개화 노선으로 바꿨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보국안민과 집강소라는 다소 모호하던 동학의 국가 관념이 개화파 망명객들과의 협력을 통해 훗날 손병희의 ‘향자치’에서 밝혀진 ‘자치형 입헌군주제’로 구체화됐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이었다. 특히 ‘자치형 입헌군주제’는 동학의 요구를 적극 반영한 한국적 국가체제라는 점에서 역사적이었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근·현대건국운동사> - Ⅰ『근·현대건국담론』 - 3.손병희의 ‘자치형(自治形) 입헌군주제’ 구상 - 동학 농민이 다스리는 문명국 실현 꿈 / 월간 중앙 2021년 3월호, 2021.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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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중 일본 돕는 대신 식민지화 못하도록 막아
▎구한말 프랑스 일간지에 실렸던 만평.
조선 지도를 밟고 있는 일본이 러시아와 링에서 싸우고 있는 가운데 천막 밖의 청나라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1903(광무 7)년 들어 러시아와 일본 간 전운이 짙어지자 고종황제는 ‘중립화’를 추진했다. ‘중립화’를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고자 고종황제는 1903년 8월 현상건을 유럽과 러시아에 밀사로 파견했다.
파리·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을 거친 현상건은 마지막으로 요동반도 여순항에서 러시아 극동총독 알렉세예프와 회견했다. 그 회견에서 알렉세예프는 유사시 2000 병력을 한양에 파견해 고종황제를 보호해주겠다고 밀약했다.
현상건은 1904(광무 8)년 1월 11일 귀국했다. 그즈음 러시아와 일본은 일촉즉발 상황이었다. 전쟁은 시간문제일 뿐 조만간 터질 것이 분명했고 고종황제는 입장을 밝혀야만 했다. 1904년 1월 21일, 고종황제는 현상건에게 명령해 러일전쟁 시 대한제국은 ‘엄정중립’ 입장임을 각국에 알리게 했다.
즉 고종황제는 러일전쟁에 대비해 비공식적으로는 ‘러시아 병력 2000 파병 밀약’을 준비하고 공식적으로는 ‘엄정중립 선언’을 준비했다.
이 같은 준비를 통해 고종황제가 러일전쟁의 승패를 어떻게 예상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우선 ‘엄정중립’이라는 공식 입장에서 본다면 무승부 내지는 장기전을 예상했다고 이해된다.
만약 어느 한쪽의 일방적 낙승을 예상했다면 ‘엄정중립’은 어리석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 병력 2000 파병’이라는 비공식 입장에서 본다면 러시아 승리를 예상했다고 짐작된다.
요컨대 고종황제는 장기전 끝에 러시아 승리를 예상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국제관계를 무시하고 두 나라 국력을 단순 비교해 판단하면 그런 예상이 가능했다.
예컨대 인구의 경우 러시아는 대략 1억2000만 정도로 추산됐는데, 이는 4000만쯤으로 추산되던 일본 인구의 3배에 달했다.
장기전 끝에 러시아 승리가 확실하다면 공식적 ‘엄정중립’과 비공식적 ‘러시아 병력 2000 파병’은 최선의 준비가 될 수 있었다. 승패를 알 수 없는 초반에는 ‘엄정중립’을 지키다가 러시아 승리가 확실시되는 후반에 ‘러시아 병력 2000명 파병’을 요청하면 큰 위험부담 없이 승전국과 함께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예상과 준비는 러일전쟁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국제관계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결과였다.
일본 도쿄에 체류하던 손병희는 이런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2월 10일 러일전쟁이 공식화되자 손병희는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여러모로 봤을 때 일본 승리가 예상되는데 고종황제는 ‘엄정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손병희는 고종황제가 ‘엄정중립’을 고집한다면 일본이 전쟁 중에 반드시 무슨 일인가 꾸미리라 우려했다. 게다가 지난 청일전쟁 후의 삼국간섭이나 아관파천 같은 일도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
예컨대 일본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한 다음 날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를 추방했다. 제2의 아관파천을 막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전쟁 중 일본이 대한제국의 보호국화 또는 식민지화를 도모한다면 고종황제는 막을 길이 없었다. 자칫 고종황제가 제2의 아관파천을 시도하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손병희는 대한제국 당국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파악한 일본 내부 정보를 알리고 대안을 제시했다. 예컨대 총리대신 윤용선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 황제 폐하께서 외국 공사관으로 파천하시려 한다고들 운운하니, 소문이 설왕설래함에 피눈물이 흐릅니다”며 제2의 아관파천을 막고자 했다.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고종의 오판
▎러일전쟁 당시 고종황제는 엄정중립을 선언했을 만큼 국제 정세에 어두웠다.
당시 고종황제가 실제 제2의 아관파천을 도모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공포를 느낀 고종황제가 프랑스나 미국 공사관으로 파천하려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손병희의 편지 내용으로 본다면 그럴 것이라는 소문이 일본에 자자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일본이 무슨 일을 벌일지 예상할 수 없기에 손병희는 이를 막고자 총리대신에게 편지를 썼다.
총리대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무릇 독립의 권(權)은 정부에 있고, 독립의 력(力)은 인민에 있습니다. (…) 개명 이래로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은(民維邦本) 세계 만국이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양 강대국이 여러 나라를 정복함이 헤아릴 수 없지만, 민심이 화합한 나라는 손대지 못했습니다”는 내용이다.
이는 ‘민유방본’이라는 유교사상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래 유교사상에서 민은 국가 통치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간주될 뿐이었다.
그런데 손병희는 그 민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해 “독립의 력(力)은 인민에 있습니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국가 독립의 궁극적 주체 또는 궁극적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뜻과 같았다.
그의 인민주권 인식은 1905년 4월 집필하고 다음 해 출간한 [준비시대(準備時代)]와 [향자치(鄕自治)]에서 보다 구체화됐다. 손병희는 [준비시대]에서 “국가는 한 사람이 사유하는 바가 아니요 곧 만민이 공유하는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인민주권을 명확히 했다.
당시 전제 군주제를 표방하던 대한제국에서 인민주권이란 대역무도와 같았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손병희가 총리대신에게 편지를 쓴 까닭은 국권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심 화합’뿐이고, ‘인심 화합’은 인민주권의 실현으로만 가능하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손병희가 언급한 인민은 동학농민이었다. 총리대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손병희는 당시 동학에 호응하는 자가 800만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따라서 손병희는 대한제국이 800만 동학농민을 주권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국권을 지킬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국권을 지킬 수 없으리라 경고한 것이었다.
손병희는 동학을 국교(國敎)로 공인하는 것이 동학농민을 주권자로 인정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동학농민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라고도 했다.
러일전쟁 확전 원하지 않았던 서구열강
▎고종황제가 1903년 유럽과 러시아에 밀사로 파견한 현상건.
여기에 더해 문명개화를 추진한다면 부국강병이 가능하기에 국권 기초가 더욱 튼튼해질 것이라 했다. 그런 생각은 법부대신 이윤용에게 1904년 3월 15일 자로 쓴 편지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편지에서 손병희는 러일전쟁에 대한 예상, 전쟁 중 일본이 추구할 책략, 일본의 책략으로부터 국권을 지킬 대책 등을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손병희의 예상이 정확했다. 일본 군부의 요인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내부 정보를 파악한 결과였다.
손병희는 러일전쟁에 대해 “겉으로 보면 이 전쟁이 여러 해와 달을 허비할 것 같으나 그 이치를 미뤄 생각하면 그렇지 않은 까닭이 있으니”라며 단기전을 예상했다.
그 근거는 국제관계에서 찾았다. 러일전쟁이 장기전으로 이어지다가 한쪽이 승리한다는 것은 한쪽의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는데, 이를 서구열강이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일 일본이 러시아를 완전히 격파하면 한반도는 물론 만주까지 석권하게 되는데 서구열강은 이런 상황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일본이 너무나 많은 이권을 챙기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황인종 국가 일본에 백인종 국가 러시아가 완패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예상했다. 반대로 러시아가 일본을 완파하면 거꾸로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를 석권하게 되는데, 이 또한 서구열강이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 했다.
따라서 손병희는 러일전쟁이 어중간하게 승패가 결정된 상황에서 서구열강의 중재로 일찍 종결될 것으로 예상했다. 만일 일본이 단기간에 러시아를 격파하면 한반도 이권은 일본이 장악하고, 만주 이권은 서구열강이 분할해 장악하는 방식이었다.
반대로 러시아가 단기간에 일본을 격파하면 만주 이권은 러시아가 장악하고, 한반도 이권은 서구열강이 분할해 장악하는 방식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초전 승리가 확실한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주장했다.
손병희는 일본 역시 서구열강의 속셈을 잘 알기에 전쟁을 단기간에 끝내려 할 것이고, 나아가 대한제국에 대한 책략 역시 단기간에 끝내려 할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일본 당국자들은 서구열강의 중재 전에 대한제국의 통치권·외교권 등을 장악하려 획책할 것으로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대한제국은 러일전쟁 중 보호국이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손병희는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했다.
“인민 가운에 뜻있는 자 수백·수천·수만을 골라 화육(化育)의 안으로 불러들여 무엇으로 이름을 하든지 민회(民會)를 설립하고, 정부가 크고 작은 일을 민회와 더불어 의논해 교섭한다면, 민회의 외교 실력이 비록 완전치 못할지라도 보국안민의 정신은 골수에 젖어 들 것입니다. 이처럼 한 후에 외적이 까다로운 청구 사건을 강요하면 민심이 죽기로 지켜 대항할 것입니다. 그러면 외적에게 어떤 협박을 받을지라도 백성에게 해로울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손병희가 언급한 ‘화육의 안으로 불러들인다’는 것은 동학 대표들로 조직된 민간단체 즉 민회를 공인해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의미였다.
민회 설립해 국정 의논 제안
▎구한말 서울 중구 정동의 지도
손병희는 민회를 ‘수백·수천·수만’으로 묘사했는데, ‘수백’으로 구성되는 민회는 국회와 도회, ‘수천’으로 구성되는 민회는 군회, ‘수만’으로 구성되는 민회는 면회로 상정할 수 있다. 손병희가 구상하는 민회는 1905년에 저술한 ‘향자치’에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당시 향(鄕)은 면 단위였고 총 5000개 정도로 추산됐다. 향에는 면회에 해당하는 향회(鄕會)를 구성하고, 일정 자격을 갖춘 향장(鄕長) 1명, 부장(副長) 1명, 평의원 약간 명을 둬 호적과 지적도 관리, 세금 징수, 병역 징발, 도로 정비, 소학교 운영 등 다양한 사무를 자치하게 하는 것으로 했다. 그러면 총 5000개의 향회에 향장 5000, 부장 5000, 평의원 수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 같은 향회를 군과 도에도 시행해 군회와 도회를 구성하면 332개의 군회에는 군장 332명, 부장 332명, 평의원 수 천이 존재하게 되고, 13개의 도회에는 도장 13명, 부장 13명, 평의원 수백 명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 군회와 도회 역시 향회와 마찬가지로 자치를 시행하게 되면 인민이 명실상부 주권자인 동시에 이권 당사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외세가 마음대로 국권이나 이권을 강탈할 수 없게 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손병희의 구상대로 향회·군회·도회·국회가 조직된다면 대한제국은 ‘전제 군주제’에서 ‘자치형 입헌군주제’로 탈바꿈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을 손병희는 “향자치 제도를 지방에 시행해 (…) 군회와 도회로 점차 확대해 국회를 조직하는 데까지”라고 묘사했다.
그런데 손병희가 요구하는 ‘민회’ 즉 ‘자치형 입헌군주제’는 사실상 고종황제의 통치권을 면 단위에서부터 배제하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대한제국 당국자들이 그의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손병희 편지를 받은 윤용선은 요언(妖言)이라며 편지 전달자를 잡아 죽이려 했다고 한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 손병희는 일본과의 군사동맹 불씨를 살리기 위해 군자금 1만 엔을 일본 군부에 헌금하고, 일본 적십자사에도 3000엔을 기부했다. 만약 이런 행위를 친일이나 매국으로 이해한다면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기본 병법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손병희는 보국안민 정신으로 일본 군부와 교류했고 나아가 군사동맹도 주장했다. 일본 군부의 내밀한 의중을 파악하고, 조국의 국권을 수호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국제 정세와 병법에 무지했던 대한제국 당국자들은 손병희의 대책을 수용하기는커녕 이해조차 못했다.
대한제국 당국자들의 무지로 한·일 군사동맹이 불가능해지자 손병희는 동학 자체의 힘으로 국권을 수호하고자 했다. 러일전쟁 직후 손병희는 동학 간부 40여 명을 도쿄로 불러 국권 수호 대책을 논의했다.
[의암손병희선생전기]에 그 내용이 소개돼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국안민의 책(策)이 상·중·하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대거 혁명(大擧革命)하여 폐혼입명(廢昏立明)이 그 상책, 둘째는 악정부(惡政府)를 통렬히 씻어내고 새 정부를 조직함이 그 중책, 셋째는 러일전쟁에 관여하여 그 우승을 보아 얻음이 하책이었다.”
동학과 개화파 사상의 통합
▎독립운동가이자 동학 지도자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
이 중 상책 즉 ‘대거 혁명하여 폐혼입명’이란 혁명을 일으켜 혼군을 폐위하고 명군을 세운다는 의미였다. 즉 어리석은 고종황제를 몰아내고 총명한 황제를 새로 옹립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다음으로 중책 즉 ‘악정부를 통렬히 씻어내고 새 정부를 조직함’이란 친러 정권을 타도하고 친일 정권을 수립한다는 의미였다.
마지막으로 하책 즉 ‘러일전쟁에 관여해 그 우승을 보아 얻음’이란 패배가 예상되는 러시아에 경도된 고종황제나 친러 정권 대신, 동학만이라도 일본을 도와 러시아를 격퇴하겠다는 의미였다.
이 같은 세 가지 대책 중 최선은 당연히 상책이었다. 그렇지만 한반도가 전시 상황이라 혁명도 불가능했고 정부 전복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손병희는 부득이 하책을 택해 ‘러일전쟁에 관여해 그 우승 얻음을 도모할 것’이라 천명했다.
그러자 동학 간부들은 “만일 전쟁에 관여해 일본 군사를 방해하면 일본이 반듯이 우리를 해할 것이니 그 결과가 어찌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이런 반문에서 당시 동학 간부들은 손병희와 달리 러시아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손병희는 “이때 우리 도인 수십만이 발기해 전쟁에 관여하고 보면 일본이 위급존망의 때를 당해 반드시 안정을 내외에 요구할 것이니, 내가 이때 일본 당국과 한국 정부 개혁의 밀약을 굳게 맺은 후에, 일본을 위해 러시아를 치고 한편으로 국권을 잡은 뒤에 제정(諸政)을 혁신하면 우리나라 재생의 길이 여기에 있을 뿐”이라고 답했다.
즉 동학 수십만으로 민회를 조직해 일본군을 돕자는 의미였다. 전쟁 중에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이나 식민지로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려 들면 수십만 민회 회원들이 저항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쟁에서 질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그 기회를 이용해 일본과 담판, 정권을 장악하고 문명개화를 추진해 국권을 수호하겠다는 것이 손병희의 복심이었다. 그 후에 기왕의 민회를 향회·군회·도회·국회로 전환하면 되는 것이었다.
도쿄에서 귀국한 동학 간부들은 손병희의 지침에 따라 대동회(大同會)라는 민회를 조직하고자 했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제2의 갑오농민운동이라 의심해 탄압으로 일관했다. 이에 동학 간부들은 대동회를 포기하고 잠시 시간을 갖고 기다렸다.
그러다 7월에 중립회(中立會)라는 민회를 조직하려 했으나 결국 8월에 진보회(進步會)라는 민회를 조직하게 됐다. 진보회는 ‘보국안민을 위해 급급하게 진보하는 조직’이란 의미였고, 동학 내부의 조직이었다. 진보회가 조직됨으로써 대중에 근거한 한국 진보 운동이 본격적으로 출발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도쿄 손병희는 국내 진보회 운영을 이용구에게 전담하게 했다. 먼 이국에서 국내 진보회 문제에 일일이 간섭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손병희는 진보회 강령 4개를 제정해 이용구가 마음대로 운영하지 못하도록 했다.
강령 4개는
첫째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 기초를 공고히 할 것,
둘째 정부를 개선할 것,
셋째 군정(軍政)과 재정을 정리할 것,
넷째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할 것이었다.
이 4대 강령은 보국안민이라는 동학사상에 문명개화라는 개화파 사상이 통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처음 손병희는 대한제국의 332개 군 모두에 진보회를 조직하려 했다. 그 진보회를 위아래로 확장하면 면회·도회·국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 332개 군 모두에 진보회가 조직되지는 못했다. 정부 탄압 때문이었다.
1904년 연말 상황에서 진보회는 80개 군에서 조직됐고 총 회원은 근 12만 명이었다. 332개 군 중에서 80개는 대략 25% 수준이었다. 100만으로 추산되던 동학교도 중 대략 10%가 진보회에 참여한 셈이었다. 근 12만 명 진보회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대중 진보 조직이었다.
진보회만 걸림돌, 한반도 공략 쉬워져 ‘양날의 칼’
1895년 청·일 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언론인 조르주 비고가 파리로 돌아간 1899년 찍어낸 그림엽서
그림의 제목은 ‘조선을 둘러싼 일·청·러’(위),‘러시아와 싸우라고 일본의 등을 떠미는 영국과 미국’(아래).
군 단위로 조직된 진보회에는 회장 1명, 부회장 1명 그리고 10명 내외의 평의원을 뒀다. 이런 조직은 손병희가 ‘항자치’에서 밝힌 향회 조직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런 면에서 80개 군에 조직된 진보회는 일종의 군회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80개 군에 조직된 진보회에는 총회장으로 이용구가 있었고, 전체 군회에 회장 80명, 부회장 80명, 평의원 720명 등 대략 1000명 간부가 있었다. 회원이 근 12만 정도였으므로 간부 비율은 1% 정도라고 추산할 수 있다.
손병희는 진보회 회원들에게 크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는 단발과 흑의였다. 고래의 상투와 백의를 버리고 단발과 흑의를 결행함으로써 세계 문명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였다. 손병희의 지침에 따라 단발에 참여한 인원은 2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둘째는 일분 군을 도와 승리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러일전쟁에 관여해 그 우승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런 손병희의 지침에 따라 진보회원들은 일본군을 위해 군수물자를 무료로 운반하기도 하고, 철도를 무료로 건설하기도 했다. 진보회의 협력이 크면 클수록 일본군은 진보회에 의존하게 됐고, 그럴수록 진보회의 협력이 필요했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진보회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서 일본은 대한제국을 보호국이나 식민지로 만들 수 없었다는 의미였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진보회가 존재하는 동안에 일본은 대한제국을 보호국이나 식민지로 만들지 못했다. 따라서 진보회를 통해 국권을 수호하려 했던 손병희의 대책은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손병희는 도쿄에 있었고, 진보회는 한양의 이용구가 총회장 자격으로 전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이 총회장 이용구만 포섭하면 대한제국의 보호국화나 식민지화는 오히려 쉬울 수도 있었다. 진보회의 저항만 제거한다면 대한제국 내에서 일본에 저항할 만한 현실적인 세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손병희나 일본에 진보회는 양날의 칼 같은 존재였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근·현대건국운동사> - Ⅰ『근·현대건국담론』 - 4.손병희의 진보회(進步會), 한국 첫 대중 진보조직 탄생 -무능한 황제 대신 민(民)이 나서 국권 수호 / 월간 중앙 2021년 4월호, 2021. 3.17.
[출처] 『근·현대 건국 담론』 - ▣안창호의 민주 공화제, ▣손병희의 자치형 입헌군주제 [신명호의 근·현대건국운동사]|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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