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10개 군 기습과 신라·백제 동맹의 파기 https://blog.naver.com/lucky7loves/222422908538 번역하기 |
반갑습니다:-ㅁ
마리큐 이지요.
이번에도 마이 사이트를 찾아주셔서 고마워요.!!
세상이 클린한게 진짜 만족해요. 이웃님들~ 오늘하루 무엇 하면서 보냈나요? ^^
이제 논의할 토픽은 신라의 10개 군 기습과 신라·백제 동맹의 파기 인데요.
마음의 준비 되셨으면 총알보다 빠르게 시작해보도록 할게요.
가보쥬 :-]
하면된다! 2021년! 신라의 10개 군 기습과 신라·백제 동맹의 파기 보면놀랄걸?
서기 548년, 고구려 양원왕이 예족 군대를 거느리고 한강 이북에 있는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했다. 진흥왕은 동맹의 약속에 의거하여 장군 주진이 정예병 3천을 데리고 고구려군을 격퇴하도록 했다. 당시 한강 이북은 안장왕의 연애전으로 인해 모두 고구려의 소유였다. 그럼, 위에서 말한 한강 이북은 어느 땅일까? 이것은 지금의 양성(陽城)1) 한래(한자로 번역하면 이것도 한강이다)2)의 북쪽을 가리킨다. 독산성은 지금의 수원과 진위(振威, 지금의 평택시에 진위면이 있다_옮긴이)의 중간에 있는 독산고성(禿山古城)3)인 듯하다.
신라가 군대를 보냈다는 소식을 들은 양원왕은 대군을 동원해서 더욱 깊숙이 침입했다. 이듬해에 고구려군은 지금의 충청도 동북 일대로 진입했다. 고구려군은 도살성(지금의 청안(淸安)4))에 주둔하고 백제군은 금현성 즉 지금의 진천에 주둔한 상태에서, 1년 좀 넘게 혈전이 벌어졌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한 사이였지만, 이번에는 병력을 움직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듬해인 서기 551년 돌궐족이 지금의 몽골로부터 동진하여 고구려의 신성 및 백암성을 공격했다. 병력을 나눈 양원왕은 장군 고흘을 보내 돌궐을 격퇴하도록 했다. 이때 백제 달솔(백제 16관등 중에서 두 번째 관등_옮긴이)인 부여달기가 정예병 1만 명으로 평양을 기습해서 점령하자, 양원왕은 달아나 장안성을 신축하고 그리로 천도했다. 장안성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만일 이곳이 평양이라면 양원왕이 평양에서 평양으로 달아났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장안성은 지금의 봉황성일 것이다. 봉황성은 당시의 신(新)평양이니, “안동도호부(지금의 요양)에서 남쪽으로 평양까지는 800리5)”라고 할 때의 평양은 바로 이곳이다. 〈고구려 본기〉에서는 평원왕 28년6)에 장안성에 천도했다고 했다. 양원왕이 도읍을 옮겼다가 곧바로 평양으로 환도한 뒤 평원왕이 다시 장안성 즉 신평양에 천도했기 때문에 이런 기록이 나왔을 것이다.
만약 신라가 동맹의 우의를 지키고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쳤다면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라는 가까운 백제를 먼 고구려보다 더 증오했다. 그래서 백제를 위해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결과적으로 백제가 강성해져 신라가 대적하기 힘들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진흥왕은 가만히 백제의 뒤를 기습해서 백제의 신(新)점령지를 탈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병부령 이사부가 지금의 충청도 동북부로 출병하는 한편, 대아찬(원문은 ‘한아손’_옮긴이) 거칠부가 구진·비태·탐지·비서·노부·서력부·비차부·미진부 등 장군 여덟 명을 거느리고 죽령7) 이북으로 출병했다. 백제는 이것을 동맹에 의한 출병으로 판단하고 매우 환영했다.
그러나 국가 간의 투쟁에 무슨 신의가 있겠는가. 이사부는 백제와 합력하여 도살성을 탈환한 뒤 곧바로 백제군을 기습하여 금현성을 함락하고, 거칠부는 병력을 나눈 뒤 죽령 이북에 있는 백제 진영을 기습하고 백제가 점령한 죽령 이북에서 고현(高峴) 이남의 10개 군(郡)을 탈취했다. 백제는 10개 군만 빼앗긴 게 아니었다. 평양을 침공한 수만 명의 백제 대군도 진퇴유곡(進退維谷)에 빠져 패배했다.
신라는 맹약을 배신한 자국의 행위를 숨기고자 백제가 평양을 점령한 사실을 〈신라 본기〉에서 빼버리고 거칠부가 누구와 싸워 10개 군을 빼앗았는지를 밝히지 않았다.8) “백제선공파평양(百濟先攻破平壤, 백제가 먼저 평양을 격파한 뒤에_옮긴이)”란 일곱 글자를 우연히 남겨둔 탓에, 이것이 〈거칠부 열전〉을 통해 후세에 명확히 알려지게 된 것이다.
청안(淸安)의 옛 이름은 도살(道薩) 혹은 도서(道西)다. 둘 다 ‘돌시울’로 읽어야 한다. 진천의 옛 이름은 흑양(黑壤)·금양(金壤)·금현(金峴)·금물내(金勿內) 혹은 만노(萬弩)였다. 우리 고어에서는 천(千)을 ‘지물’, 만(萬)을 ‘거물’이라고 했다. 진천은 ‘거물래’이므로, 흑양의 흑(黑)과 만노의 만(萬)은 다 ‘거물’이란 뜻이다. 금물(今勿)과 금물(金勿)은 ‘거물’의 소리를 표시한 것이다. 양(壤)·내(內)·노(弩)는 ‘래’의 소리를 표시한 것이다. 금양·금현의 금(金)은 금물(金勿)을 축약한 것이다. 그리고 현(峴)은 금물 안의 산성을 가리킨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지금의 경기도는 물론이고 충청도의 충주·괴산 등지도 고구려의 강역이 되었다. 그런데 근세에 정약용(원문은 ‘정다산’_옮긴이)·한진서 선생 같은 분들은 고구려가 지금의 한강 이남을 단 한 발짝도 밟은 적이 없다면서 《삼국사기》를 공격했다. 하지만 도살성 점령 사건9)을 보면, 고구려가 한강을 넘지 못했다는 말이 어떻게 잠꼬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고구려는 이곳을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황해도까지도 항상 백제의 땅이었다. 그러니 충북 지역을 고구려 땅으로 만든 《삼국사기》에 오류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런데 죽령 이북에서 고현 이남의 10개 군은 어느 지역일까? 고현은 지금의 지평(砥平, 경기도 양평군의 옛 이름_옮긴이)에 있는 용문산의 명치(鳴峙)10)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10개 군은 제천·원주·횡성·홍주·지평·가평·춘천·낭천(狼川,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_옮긴이) 등지라고 봐야 한다. 훗날 신라 9주(州)의 하나인 우수주 관내의 군현이 바로 이곳이다.
이 포스팅은 신라의 10개 군 기습과 신라·백제 동맹의 파기 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마음에 좀 드시나요?
오늘 하루도 보람찬 하루 되셔요
저는 마리끄 드립니다.
우리 또봐요!
이상 끝!
[출처] 신라의 10개 군 기습과 신라·백제 동맹의 파기|작성자 사랑스런 럭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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