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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분국(分國)인 왜의 위치는 어디?

문수봉(李楨汕) 2021. 4. 3. 12:24

백제의 분국(分國)인 왜의 위치는 어디?

왜의 위치는 일본열도가 아닌 양자강 이남의 대륙과 큰 섬

2008/07/08 pluskorea 성훈 칼럼니스트

 

 

본 글은 아래 3부작의 (3)입니다.

(1)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왕가의 정체는?

(2) 칠지도와 응신으로 본 왜왕가의 비밀은?

(3) 백제의 분국(分國)인 왜의 위치는 어디?

 

지금까지 (1)(2)에서 백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왜왕가(倭王家)에 대해 알아보았다시피, 백제와 왜의 관계는 일반적인 황제국과 제후국의 관계가 아닌 가까운 직계 혈통으로 맺어진 분국(分國)이라는 단어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더 나아가 왜왕은 백제의 왕족이었으므로 당연히 = 작은 백제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작은 백제인 왜라는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A.D 670년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기 전 일본은 왜 또는 왜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식민사학계에서는 이 왜의 위치를 일본열도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매국적인 식민사학이론인 반도사관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는 왜가 당연히 일본열도에 있었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말해 일제가 망국의 사관인 반도사관을 이 땅에 정착시킨 이유가 바로 왜가 일본열도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일왕 특명으로 조선사편수회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역사조작이 이루어진 것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으나, 그에 버금가는 다른 이유의 하나가 바로 왜의 위치를 일본열도로 정착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본은 서기 390년이 되어서야 응신왕에 의해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왜(大和倭)가 세워질 정도로 원래 역사가 짧은 민족이다. 왜는 응신왕 이후로 줄곧 백제의 왕실에 의해 통치되다가 (물론 잠시 고구려계와 신라계가 왜왕을 한 적도 있음),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자 670년 국호를 일본으로 바꾼다. 따라서 670년 이전은 왜()라 하고 이후는 일본(日本)으로 불러야 한다.

 

 

 

663년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서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국인이 서로 말하길주유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 " 왜는 백제의 분국이었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중국 25>에는 670년 이후 공식적인 외교문서 상에는 일본국이란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예전부터 통상적으로 쓰던 왜인(倭人)이란 명칭도 사서에 많이 등장한다. 1404년 명나라는 그동안 국가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현재의 일본(大和州)에게 "일본"이라는 국호를 주면서 동이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양자강 이남에 있었던 왜의 역사까지 현재 일본에 주어버린다.

 

따라서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현재 일본의 역사를 아래와 같이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다 일본으로 부르고 있어 혼돈이 되고 있으나, 기간에 따라 아래와 같이 셋으로 분명하게 나누어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예로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임진신일본란으로 불러야 역사적으로 맞지 않겠는가라는 논리이다.

 

1) 670년 이전의 왜()의 시대 (대륙 남부에 위치)

2) 670 ~ 1404년의 일본(日本)의 시대 (대륙 --> 대만 --> 점차 열도로 옮아감)

3) 그리고 1404년 이후의 신일본(新日本)의 시대 (현 일본열도에 정착)

 

<한단고기> 기록으로 본 왜의 기원

 

(일본)의 역사를 알려면 <일본서기>를 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로 필자가 일본서기를 정독해 본 결과 일본서기에는 왜의 기원조차 제대로 기록이 되어 있지 않고 15대 응신왕 전후의 왕통이 많이 조작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게다가 670년 국호를 일본으로 바꾼 사실도 기록이 되어있지 않다. 한마디로 <일본서기>는 그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서인지라 그것을 진짜 왜의 역사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많다고 하겠다.

 

<한단고기>가 일본에서 출간되어 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일본인들이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했다. 일본인들의 조상의 뿌리를 잘 밝혀주어 일본민족이 역사 없는 민족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 책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한단고기로 인해 일본의 기원을 약 1,000년 가까이 끌어 올릴 수 있게 되었다고 여긴 것이다. 과연 그런지 살펴보기로 하자.

 

<한단고기 단군세기> “36세 매륵단군 갑인 38(B.C 667) 협야후 배반명(陜野侯 裵幋命)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고조선이 바다의 도적인 왜를 정벌한 기사로 인정해 일본인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삼도란 본시 일본열도를 나타내는 말로 여겼기 때문에 평정당하고 안 당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때까지 열도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1대 신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일본서기>에 협야(狹野 사노)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로 인해 1대 신무왕이 응신왕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비록 협야의 협자가 으로 서로 다르지만 같은 인물이라는 가정 하에, 여하튼 <한단고기>로 인해 그 같은 주장을 불식시키고 일본의 기원을 B.C 7세기까지 끌어 올릴 수 있다고 본 것이기에 환호를 올렸던 것이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고주몽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해 졸본으로 같이 오는 사람들 중의 한명인 협보(陜父)남한으로 도망쳐 마한의 산중에 살았다. (중략) 협보는 장혁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를 따라 내려와 해포로부터 몰래 항해하여 곧바로 구야한국(拘耶韓國)에 이르니 곧 가라해(加羅海)의 북안이다. 여기서 수개월 동안 살다가 아소산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라 한다.

 

 

 

주몽과 함께 동부여를 탈출하는 오이, 마리, 협보 (좌측 부터).

이 협보가 나중에 다파라국의 시조가 된다. 따라서 왜의 기원은 빨라야 기원전 58년 이후가 된다.

 

뒤에 임나를 병합하여 연정을 세워 이를 통치케 하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처음 변진구야국의 사람들이 모여 산 적이 있었는데 이를 구야한국이라 한다. 다파라를 다라한국이라고도 한다. 홀본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치감치 친교를 갖고 있었으므로 늘 열제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과 이웃하며 성이 같다. (이하생략)

 

왜의 위치에 대해 <한단고기>에 적혀 있다. 우선 협보(陜父)가 구야한국으로 가기 전 남한으로 도망쳐 마한의 산중에 살았다는 마한은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하해 세운 한()이 있던 곳이다.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은 연나라에서 온 정치망명객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조상인 기자가 살던 땅인 서화(하남성)와 몽성(안휘성) 근처인 해대(海岱; 대는 태산)의 해() 지방으로 남하하여 한(삼한)의 왕이 되었는데 진국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유.....(대륙의 동부)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와 왜가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중 사로(泗盧)-->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비미국과 구노국은 나중에 왜()로 발전된다.

 

 

 

양자강 이남 오.월의 위치가 왜가 있던 곳. 양자강 이남 월 지역에 회계라는 지명이 보인다.

 

참고로 사로의 泗水 지역으로 장보고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고, 지방은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이다.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흐르는 회수(淮水)라는 강이름은 기준의 준()자에서 따온 것이라고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설명한다. <삼국지>에 회당작준 견전세국전주(淮當作準 見前歲國傳注)라는 주가 있어 회수의 기원이 기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아주 중요한 기록은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로 이것으로만 봐도 왜는 분명 육지()와 섬(바다)에 걸쳐 있었지, 결코 섬나라인 일본열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임나는 한반도 남부가 절대 될 수가 없기에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은 한단고기로 인해 허구라는 것이 밝혀졌다 하겠다.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는 사실 대륙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는 회계군(會稽郡)의 동쪽 동야현의 동쪽에 있으며 배로 9,000리를 건너 나패(那覇)에 이른다. 또 다시 천리를 건너서 근도(根島)에 이르른다. 근도는 역시 저도(柢島)라고도 한다. 때에 구노인(狗奴人)은 여왕과 서로 싸워 길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구야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자는 진도(津島) 가라산(加羅山) 지가도(志加島)로부터 비로서 말로호자(末盧戶資)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동쪽 경계는 곧 구야한국의 땅이다. (중략)

 

.(.)은 본래 구려(九黎)의 옛 읍이며, 산월(山越)과 좌월(左越)은 모두 그 후예가 나뉘어 산 땅이다. 항상 왜와 왕래하며 무역하여 이익을 얻는 자가 매우 많았다. 진 때 서불(徐巿)은 동야현의 해상으로부터 곧바로 나패에 이르러 종도(種島)를 거쳐 뢰호내해(瀨戶內海)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 이세(伊勢)에 옛날 서복(徐福)의 무덤이 있었다. 단주(亶州)는 서복이 있던 곳이라고도

 

<한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서 왜의 위치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회계군은 절강성에 있는 지명으로 그 동쪽인 동야현의 동쪽이 바로 왜였던 것이다. 회계군이란 기록은 아래에 나오는 <중국 25>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오.월은 왜와 항상 왕래하는 곳이라 했다. 오와 월은 대륙의 남부지방(현 광서장족자치구, 광동성, 복건성, 절강성)을 통칭하는 지역이다. 즉 오.월이란 양자강 이남에서 대륙의 동남부 지역을 말함이다.

 

진사황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쪽으로 배를 타고 떠난 인물인 서복의 무덤이 현재 일본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서복은 현 일본 열도에 간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무덤들은 가짜임에 틀림없다. <한단고기>에도 나와 있듯이 서복은 분명 절강성과 복건성/광동성 앞바다에서 왔다리 갔다리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서복이 일본열도에 왔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일본은 현 일본열도에 서복의 무덤을 만들었던 것이다. 즉 왜의 위치가 대륙 남부가 아니고 일본열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한 짓이나 어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는가?

 

이어서 <한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를 보면, 일본은 옛날 이국에 있었나니 역시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동은 안라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들어갔는데 고구려와 이미 친교를 맺었다. ...(중략)...

 

때에 왜인들은 갈리어서 산도에 근거하여 살며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이 가장 크니 본래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월의 무리들 모두 통상했다. 처음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대마국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리쯤 된다. 또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리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여기는 사방 300여리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이하 생략)

 

이 기록에서 이상한 점은 일본이 왜와 이웃한 별개의 나라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대진국(발해)이 존재했을 당시에는 왜가 이미 670년에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고 한참이 지난 후인데 일본과 왜가 이웃했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여하튼 양자강 이남 대륙의 동남부인 오.월과 통상했다고 하니 거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왜(일본)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겠다. 현재의 일본열도를 여기에 대입하는 것은 분명한 넌센스라고 할 수 있다.

 

<중국 25> 기록으로 본 왜의 위치

 

중국 25사의 기록에 보면 분명 왜는 고구려/백제/신라와 함께 동이(東夷)에 포함되어 있다. 즉 같은 계통의 민족이란 말이다. 실제로 현 일본인들이 쓰는 일본어는 어순이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계로 중국어를 쓰는 지나족과는 어순이 확연히 구별된다 하겠다.

 

그리고 왜왕들은 백제왕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함인가? 필자는 지금까지 백제의 위치를 대륙의 산동성으로 비정했다. 산동성에 있던 백제가 왜와 그렇게 밀접한 관계를 가지려면 왜의 위치는 현 일본열도가 아니라 백제와 가까운 대륙으로 와야 한다. 그리고 역사 기록도 왜가 대륙 남부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동이 왜가 대륙 남부에 있었다는 역사 기록을 놓고 지금의 일본열도에서 배를 타고 양자강 이남에 진출하여 오랫동안 광대한 지역을 다스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일본인들은 역사 날조에 능한 민족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일 열도에 있으면서 대륙을 경영할 정도의 항해술을 가졌더라면 아마 당시 왜는 세계를 제패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리라!!! 분명한 것은 670년 이전의 왜는 일본열도와 전혀 상관없는 국가였던 것이다. 역사의 기록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중국대륙 근처의 해류의 흐름. 대만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일본열도로 흘러간다. 이러한 해류를 거슬러 일본열도에 있던 왜가 대륙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시의 항해술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결국 왜는 대륙 남부에 있었던 것이다. 후에 대륙에서 밀려난 왜가 대만에 있다가 일본열도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나라를 중심으로 왜의 위치를 표시한 기록도 있지만 너무 광범위해 방위를 알기 어려운 점이 있어 인용치 않겠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나마 확실한 지명을 중심으로 해서 왜의 위치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삼국지 동이전><진서> <남제서>왜인은 대방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倭人在帶方東南大海中)”라고 기록하였고, <양서>의 동이전에는왜는 스스로 태백의 후손이라 말하고 그들의 풍속은 모두 문신을 하였으며 대방에서 거리가 12,000리에 있고 대개 회계의 동쪽에 있다 (倭者自云太佰之後俗皆文身去帶方萬二千里大抵在會稽之東)”고 기록하였다.

 

여기서의 회계란 지명은 절강성에 있는 지명으로, “왜는 회계군(會稽郡)의 동쪽 동야현의 동쪽에 있다는 위의 <한단고기>의 기록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왜인의 풍습은 몸에 문신을 하는 것이라 기록했는데, 실제로 홍콩 주변의 광동성 주민들의 풍습도 몸에 문신을 많이 하고 있다. 그리고 기준이 되는 대방의 위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한국의 매국식민사학계는 한사군의 하나였던 이 대방의 위치를 반도사관에 찌들어 황해도로 비정하고 있다 (물론 인접한 석문이 어디라는 정확한 설명도 없다). 그러나 그 대방의 위치는 결코 한반도의 황해도가 될 수 없다. 대방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으나 가장 확실한 것 하나만 들기로 하겠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보면 문무왕이 백제의 옛 땅을 점령하여 차지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보내어 토벌케 하였다. 그리하여 당군은 말갈병과 함께 석문(石門)의 들에 진영을 만들고, 신라왕(문무)은 장군 의복. 춘장 등을 보내어 방어케 하였는데 대방(帶方)의 들에 군영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후 당나라와 전투를 벌여 당나라를 백제 땅에서 몰아내는 광경이다. 여기서 석문(石門)이라 함은 현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石家庄)이고, 대방은 석문 아래로 접한 곳으로 황하와 가까운 곳이며 초기 백제의 도읍지와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사서 기록의 기준이 되는 대방의 위치를 확실히 알고 나면 왜의 위치가 보인다. 대방의 동남쪽이면 대충 가까운 곳부터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순이다. 여기서 백제와 신라의 영역을 빼면 절강성 쪽이 된다. 게다가 절강성은 회계군이 있는 곳이므로 그 조건이 충족된다 하겠다.

 

 

 

왜의 기준이 되는 대방은 하북성에 석문(석가장)과 붙어잇는 곳. 대방의 동남쪽에 왜가 있었다.

 

이렇게 대방의 위치를 통해 왜의 위치를 확실히 밝혔음에도 아직도 왜는 일본열도로 일본열도도 대방의 동남쪽은 동남쪽이다라고 우기는 식민사학자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만일 일본열도가 왜였다면 많은 사서의 기록이 왜는 대방의 동남쪽이 아니라 대방의 동쪽 대해중이라고 해야 방위상으로 맞지 않을까? 여하튼 이런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펴는 일본족(?)들을 위해 아래와 같이 ""에 대한 사서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1) 삼국지 동이전

회계 주애 회계동치지동 담이(會稽 朱崖 會稽東治之東 憺耳)가 함께 있으며, 이 모두 대방(帶方)의 동남쪽에 있다.

(2) 후한서

회계동야지동 회계동야현 주애 이주 단주 봉래가 담이(會稽東冶之東 會稽東冶縣 朱崖 夷州 亶洲 蓬萊憺耳)와 함께 기록되었다.

(3)

회계지동(會稽之東) 주애(朱崖)와 함께 담이(憺耳)가 기록되어 있고, 대방지왜(帶方至倭)가 기록하고 있다.

(4)

회계동여담이(會稽東與憺耳)의 기록이 있고 이주(夷州)의 기록이 있는데 낙랑대방 에서 떨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5)

주애(朱崖)와 함께 담이(憺耳)가 기록되어 있다.

 

위 사서의 내용 중 관련 지명을 최고(最古)의 중국고지도인 우적도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우측부터 보면

- 회계(會稽)는 양자강 이남 절강성에

- 남월(憺耳本南越地 - "담이는 본래 남월지 이다"),

- 해남도에 있는 주애(朱崖),

- 진번(, 眞番 - "파담이진번군(罷憺耳眞番郡)")

- 이주(夷州)"대만"이다.

 

 

 

© 성훈

 

어떻게 왜()와 관련된 이러한 지명이 양자강 이남에 남아 있는가? 결국 이 지역은 A.D 670년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하기 전 왜의 땅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왜인의 두드러진 풍습중 하나가 斷髮文身(용문신)’ 습관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시아에서 문신습관은 홍콩지역이 제일 많이 남아 있다. 그러한 홍콩 주위에 주애, 담이, 이주, 회계, 남월, 주산, 태 등 왜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겠는가!!!

 

 

 

양자강 이남 오.월 지역에 있는 왜의 지명들.

 

왜가 대륙 남부 또는 큰 섬에 있었다는 가장 확실한 근거로는 <천하고금대총편람도>를 들 수 있겠다. 이 지도는 1666년 제작된 지도로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지도에 보면 대마도와 일본국이 현 일본 열도에 그려져 있지 않고, 중국의 양자강 이남 동부 해안 대만 땅에 그려져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식기록분석으로 본 왜의 위치

 

사서의 기록으로 일본()이 언제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 갔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래 박창범 교수의 일본서기의 일식기록분석이 주는 결론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박창범교수는 편의상 일본사서의 일식기록을 시대별로 아래와 같이 분류하였다.

) 709년 이전의 야마토시대의 일식 10

) 710 ~ 792년의 나라시대의 일식 36

) 794 ~ 1,183년의 헤이안(平安)/후지하라(藤原)시대의 일식 132

 

) 1,189 ~ 1,326년의 카마쿠라(鎌倉)시대의 일식 38

) 1,343 ~ 1,599년의 일식 80

) 1,600 ~ 1,899년의 일식 119

 

6개의 시대구분 중

)의 결집 위치는 남지나해상이고, 결집도가 매우 높아 실제로 관측된 자료로 보인다.

) 일본의 전 역사기간 중 가장 결집도도 낮고, 결집 위치도 일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실제 관측에 의한 자료로 보기 어렵다.

) 만주 지역에 약간의 집중이 되고 있으나 결집도가 아주 낮다.

 

) + ) + ) 시대는 결집도도 높고, 정확히 일본 열도나 가까운 곳으로 결집위치가 나타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으로 A.D 709년 이전의 야마토시대의 일식 10개를 분석한 것인데, 결집도가 높아 실제로 관측된 자료로 보인다 하는데 그 위치가 현 일본열도가 아닌 남지나 해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중국 25><한단고기>에 나오는 왜의 위치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창범교수의 일본사서 일식기록분석. 좌측 상단이 ) 야마토시대는 남지나해상으로 결집되며, ))은 불확실하다. ) 부터는 열도로 결집된다.

 

기타 기록으로 본 왜의 위치

 

그리고 신라와 왜 사이에 특이한 기록이 있다. 왜에서 신라로 온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신라에서는 호공을 대보(大輔)에 임명을 한다. 참고로 대보는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 정도의 직위로 脫解王도 대보에 있다가 왕이 된다. 현재의 일본인이 한국에 와서 국무총리를 할 수 있다고 보는가? 상식적으로 이것은 동족일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결국 동이 5국 즉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왜는 전부 같은 민족 즉 동족(同族)인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왜가 신라를 무려 30번 넘게 침공한다. 만일 왜가 일본열도에 있었다면 배타고 이러한 해외원정 전쟁을 그렇게 자주 할 수가 없다. 결국 이는 신라와 왜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실제로 아래의 <삼국사기> 기록에 보면 왜가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기록으로 보인다.

 

지마이사금 10왜인이 동쪽 변방을 침략하였다.”

내해이사금 13왜인이 국경을 침범했다.”

조분이사금 4왜병이 동쪽 변두리를 침략하였다.”

실성이사금 6왜인이 동쪽 변방과 남쪽변방을 침범했다.”

눌지이사금 10왜병이 와서 동쪽 변방을 침범했다.”

24남쪽 변두리를 침범하고 동쪽 변두리를 침범했다.”

 

 

 

전후 일본의 지진피해 기록. 일본서기엔 이런 지진의 기록이 없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일본열도는 지진이 잦은 곳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은 몇 번 있으나 지진의 피해 정도가 기록된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이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지진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로 경미한 지진인 것이다. 왜가 만일 현 일본열도에 있었다면, 관동대지진이나 고베 지진 같은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 지진의 기록이 안 씌어졌을 리가 없다.

 

<일본서기>는 일본열도에 살지 않았던 사람들인 왜인(倭人)들의 기록인 것이다. 따라서 왜는 열도에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대륙에 있던 왜는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륙에서 대만으로 쫓겨 간 것으로 보인다. 마치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에게 밀려 쫓겨 가듯이.... 명나라 초기까지 대륙에서 왜구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왜의 본토수복 작전이 아니겠는가? 현 대만에는 A.D 1,600년 이전의 역사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 일본의 고대사는 분명 조작된 것이 많다. 그토록 역사를 조작해서라도 자기네 역사를 새로 만들려는 일본민족의 처절한 몸부림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역사가 짧다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보이나, 이러한 일본의 의도에 동조하며 자기네 역사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의 행동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

 

그렇다면 대륙에 있던 왜가 열도로 오기 전 열도에는 누가 있었을까? 일본의 원래 원주민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 홋까이도오(北海島)로 쫓겨가 살면서 곰을 숭상한다는 아이누(倭奴)족은 언제 어디에서 열도로 건너간 종족들일까? 그리고 아스카 문화로 대표되는 일본의 고대 문화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한반도의 역사를 보면 고조선--> B.C 195년부터는 낙랑국 --> A.D 32년부터는 고구려 --> A.D 503년부터는 동신라 순으로 주인이 바뀐다. 따라서 고조선/낙랑국/고구려/동신라 시대에 일본 열도로 문화가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낙랑(樂浪)국의 문화가 나라(奈良)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동신라의 문화가 일본열도로도 전해지고, 왜의 주인이었던 백제계가 대륙 남부에서 열도로 오면서 독자적인 일본의 문화가 발달하게 되나 그 근본은 역시 백제 문화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원래 일본민족의 조상인 670년 이전까지는 대륙에서 고구려/백제/신라와 함께 활동하던 같은 민족이었다. 명나라는 역사과대망상소설인 삼국연의(三國演義)를 보급하면서 동이의 역사를 한반도로 밀어내려고 했고, 일본민족은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고 싶었던 이해관계의 합치로 양자강 이남의 의 역사를 명나라 때 지금의 일본지역으로 넘김으로써 동이역사의 말살을 시도 한 것은 아닌지?

 

역사적 사실이 이럼에도 일본인들은 당시 왜는 일본열도에 있으면서 양자강 이남으로 가서 대륙을 지배했다는 엉터리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왜의 항해술로 보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사서의 기록이나 천문학적 분석으로나 관습/역사적 인물 등을 통해서 보더라도, 670년 이전 가 지금의 일본 열도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는 분명 같은 동이의 일부였으며, 양자강 이남에 있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일본민족은 우리상고사의 비밀이 밝혀지면 자기들의 조작된 역사가 송두리 채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의 상고사를 그토록 왜곡/조작하려고 노력하는지 모르겠다. 일본민족이 예전에도 열도에 있었다는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제 때 조작된 반도사관에 우리는 아직까지 농락당하고 있다. 반도사관을 탈피해야만 왜와 백제/신라와의 모든 역사 기록이 제대로 읽혀지고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망국적인 반도사관을 훌훌 털고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찾아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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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백제의 분국(分國)인 왜의 위치는 어디? (대륙 삼국설 13)|작성자 jajuwa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