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자료방☆/♡각종자료방♡

『인민공화국 이후의 미·중 관계』 Ⅲ - ▣미 해병대원 사고 잦아▣카터·덩샤오핑 집권,미·중 수교에 서광▣비밀담판,관계 정상화 합의▣수교발표 10시간전 장징궈에 통보▣대만에간미특사

문수봉(李楨汕) 2022. 3. 7. 19:42

『인민공화국 이후의 미·중 관계』 Ⅲ - ▣미 해병대원 사고 잦아▣카터·덩샤오핑 집권,미·중 수교에 서광▣비밀담판,관계 정상화 합의▣수교발표 10시간전 장징궈에 통보▣대만에간미특사

  28분 전
 

◆『김명호의 사진과 함께하는 중국 근현대』를 더 보실려면 맨아래 목록의 해당 URL을 클릭하세요

●『청의 미국 수교와 미·중 관계』 https://blog.naver.com/ohyh45/222404189767

① “화치귀신은 예절 바르고 겸손, 불미스런 일 안 일으켜”. ② 미 대통령이 보낸 쿠싱, 4만 달러로 청 관리들 회유

③ 미 주중 공사 벌링게임, 공정외교로 양국 우호에 기여. ④ 중 의화단 진압한 연합군, 만행 일삼았지만 미군은 자제

⑤ 청 서태후, 연합군 몰래 의화단에 “서양 귀신 박멸” 지시. ⑥ 량청, 의화단 사건 배상금 반환 대미 협상서 ‘묘수’ 제안

⑦ 량청, 미 장관 집무실서 배수진 치고 배상금 반환 협상. ⑧ 위안스카이, 미국 주중공사를 고문에 앉혀 일본 견제.

●『중화민국 시대의 미·중 관계』Ⅰ https://blog.naver.com/ohyh45/222482693196

① 미 록펠러 2세, 청 왕부 사들여 의료기관 설립. ② 미 록펠러재단 거금 지원 덕에 ‘베이징원인’ 발견.

③ 미 제1 갑부 록펠러가, 중 공산화 후에도 통 큰 기부. ④ 미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 중 현대 사상·문화에 큰 영향.

⑤ 중국학 대가 라티모어, 장제스·마오쩌둥 신임 얻어. ⑥ “미 트루먼 대통령, 중 국민정부에 원조 중단 보복” 소문

●『중화민국 시대의 미·중 관계』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532917042

① 옌칭대 세운 스튜어트, 20세기 격동의 미·중 관계 산증인. ② 선교사 출신 스튜어트, 옌칭대 중국화·국제화 힘써.

③ “스튜어트 대사 환영, 마오가 더 기뻐해” 저우언라이 전화. ④ 헐리 “미국, 중공 승인한 적 없다”.

⑤ 선양 입성 앞둔 마오 “무력 동원해 미 영사관 보호하라” ⑥ 중공, 무전기 압수 거부한 선양 미국 총영사 워드 추방

⑦ 난징 접수한 중공 “미, 국민당 도망정부와 단절하라” ⑧ 미 국무부, 중공·국민당 싸잡아 비방한 ‘중국백서’ 발표

●『인민공화국 이후의 미·중 관계』Ⅰ https://blog.naver.com/ohyh45/222582189809

① 중공, 옌칭대 등 미국인이 세운 13개 교회학교 국가 귀속. ② 마오쩌둥 “옛 친구 장제스는 미국에 너무 의존했다”

③ 중국 내 미국 간첩 사건, 냉전 초기 양국 대화 촉진시켜. ④ ‘담판의 고수’ 왕빙난, 중·미 대사급 회담 대표 9년 맡아

⑤ 반공주의자 닉슨 대통령 되자 미·중 관계 더 얼어붙어. ⑥ “접경지 전바오다오 유혈사태 풀자” 중·소 총리 전격 협상

●『인민공화국 이후의 미·중 관계』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630229852

① 마오 “미국 핑퐁선수단 초청하라”, ② 마오·닉슨 베이징 회동 위해 저우·키신저 ‘007 작전’,

③ ‘닉슨 방중 합의’ 자국 체면 살리려 밀당, ④ 마오쩌둥, 닉슨 베이징에 도착한 날 은밀히 만나 회담

⑤ 마오 만난 닉슨 “연임 땐 중·미 관계 정상화 문제 해결할 것”, ⑥ 마오·닉슨 4년 만에 재회,세계 언론 정치적 해석 분분

●『인민공화국 이후의 미·중 관계』Ⅲ https://blog.naver.com/ohyh45/222666371310

① 미 베이징연락처 해병대원 사고 잦아, 중 정부 골치 앓아, ② 카터·덩샤오핑 권력 쥐자, 미·중 수교에 서광

③ 중·미 6차례 비밀담판 끝, 양국 관계 정상화 합의, ④ 카터 “미·중 수교 발표 10시간 전 장징궈에게 통보해라”,

⑤ 카터, 미·중 수교 발표 11일 뒤 특사 보내 대만 달래, ⑥ 시위 우려한 첸푸, 미 특사단에 공항 후문 이용 권고,

13.미 베이징연락처 해병대원 사고 잦아, 중 정부 골치 앓아

1973년 가을, 미군 헬기로 뉴욕에 도착한 중국연락처 주임 황쩐과 미 국무장관 키신저.

두 사람 중간이 참사관 지자오주. 왼쪽 첫째는 중국의 유엔 대표 일원인 스옌화(施燕華). [사진 김명호]

1973년 3월, 중·미 양국은 워싱턴과 베이징에 연락사무소(연락처)를 두기로 합의했다.

미국의 초대 베이징 주재 연락처 주임 데이비드 브루스는 독일, 영국, 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직업외교관이었다.

양국 수뇌부의 의견 전달에만 전념했다. 중국 관료들과의 소통은 원만치 않았다.

안목은 뛰어났다. 중국 고대의 예술품 수장에만 열중했다. 직원들의 자녀교육은 신경을 썼다.

당시 베이징에는 프랑스와 파키스탄 학교가 있었지만 미국인들은 자녀를 보내려 하지 않았다.

브루스는 중국교육부에 학교 설립을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연락처 직원 자녀 6명으로 시작한 미국학교는 다른 나라 외교관 자녀들까지 몰려왔다.

중국인들, 미 해병대원들에게 반감

1974년 가을, 자전거로 베이징 거리를 질주하는 미국의 중국연락처 주임 부시. [사진 김명호]

베이징연락처는 인원이 늘자 안전이 중요문제로 등장했다. 관례대로 해군육전대(해병대)원을 파견해 달라고 국무부에 요청했다. 중국 측의 반대를 우려해 군복과 계급장, 훈장 착용은 안 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육전대 사령관은 국무부의 청을 거절했다. 남색 정장에 월남전에서 받은 훈장까지 착용하고 베이징에 나타난 미 육전대원들은 중국인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미군은 밤 생활이 중요했다. 베이징연락처는 육전대원이 거주하는 외교관 아파트에 카페를 겸한 바를 개설했다.

‘해군의 집(海軍之家)’ ‘해군육전대구락부(海軍陸戰隊俱樂部)’ 간판 걸고 입장권을 팔았다. 단골들에겐 회원증도 발부했다. 베이징 주재 외국인들이 해만 지면 몰려와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

여자 문제가 빠질 리 없었다. 주먹질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미 해병대원이 회원증 없이 입장한 아프리카 유학생을 구타했다. 화가 난 유학생은 기물 때려 부수고 인근에 있는 외교관 집으로 도망쳤다. 중국 정부는 모든 원인을 미국 측에 돌렸다. 브루스에게 육전대원 철수를 요구했다. 브루스는 엄하게 단속하겠다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11월 중순, 중국에 온 키신저가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선처를 구했다. 저우가 조건을 제시했다.

“중국은 주권국가다. 미국은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는 습관을 갖기 바란다. 해군육전대라는 명칭의 사용을 엄금한다. 군복을 착용하지 마라. 육전대원이건 아니건 중국은 상관치 않겠다. 일률적으로 연락처 관원으로 인정하겠다. 군복 입고 외부에 나오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 연락처 내에서 구보와 총검술로 세인의 주목을 끄는 행위도 불허한다.”

키신저는 모두 수용했다. 1974년 봄, 육전대원이 또 사고를 쳤다.

익명으로 미군의 횡포를 알리는 서신이 베이징 주재 각국 대사관 우편함에 쌓이기 시작했다. 브루스는 육전대원들을 철수시켰다.

보안요원을 민간인으로 교체했다. 새로운 보안요원도 군복만 안 입었을 뿐, 육전대원이긴 마찬가지였다. 중국 측은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중국도 워싱턴에 연락처 설치를 서둘렀다. 프랑스대사 황쩐(黃鎭·황진)과 훗날 주미대사를 역임하는 한쉬(韓敍·한서)를 주임과 부주임에 임명했다. 1973년 4월 14일, 한이 인솔하는 선발대가 워싱턴으로 떠났다.

참사관 지자오주(冀朝鑄·기조주)의 회고를 소개한다.

“화창한 봄날, 일행 10명이 베이징에서 출발했다. 도쿄에서 보잉747로 갈아탔다. 특등실에서 호강을 누렸다. 미국 지형과 교통법규를 숙지하기 위해 선발대에 합세한 황쩐 주임의 운전기사는 장신에 풍채가 훤하고 위풍이 당당했다. 주임으로 오인한 승무원들에게 각하 소리 들으며 온갖 환대를 받았다.

영어를 모르는 기사는 고개만 끄덕여도 위엄이 넘쳤다. 4월 17일 오후 덜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국무부 관계자 중 하버드 재학 시절 같은 기숙사에 있던 친구를 발견하고 놀랐다.

화교 신문과 미국 일간지가 선발대 도착을 큼지막하게 보도했다. 대만 지원받는 화교일보는 중공 비적(匪賊)이 워싱턴에 나타났다며 우리를 비난했다.”

윈난왕 롱윈 아들, 미서 중식당 운영

1971년 11월 8일, 유엔을 둘러보는 중국대표단 선발대. [사진 김명호]

메이플라워 호텔에 짐을 푼 선발대는 미국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먹고 나면 토하기 일쑤였다.

한발 늦게 도착한 황쩐도 서양 음식이라면 질색이었다. 인도네시아와 프랑스 대사 시절 뭘 먹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구세주가 나타났다. 화교협회 총간사 롱셩원(龍繩文·용승문)이 거금을 투자한 대형 중국식당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점심과 저녁을 선발대 숙소로 배달했다. 롱은 평범한 음식점 경영자가 아니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 합작과 반목을 거듭하다 중공으로 방향을 튼 윈난왕(雲南王) 롱윈(龍雲·용운)의 아들이었다. 먹는 걱정이 없어진 선발대는 록 크릭 공원 인근에 있는 품위 있는 호텔을 당시 돈 570만 달러에 샀다.

수영장과 테니스장을 갖춘 집 두 채도 주임과 부주임의 거처로 사들였다. 키신저는 자신의 집무실과 직통전화를 가설해 중국연락처의 업무를 원활하게 했다.

베이징의 브루스 주임은 중국과 궁합이 맞지 않았다. 연락처에서 두문불출했다.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닉슨을 부통령 포드가 승계했다. 포드는 사직을 원하는 브루스의 후임을 물색했다.

영국 대사로 내정된 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장 조지 부시가 베이징 연락처 주임을 자청했다. 부시는 유엔 대사시절 유엔 회원국이 된 중국대표단과 친분이 두터웠다. 1974년 10월 21일 베이징에 도착한 부시는 중국을 이해할 방법을 찾았다.

크라이슬러 리무진 타고 베이징을 누볐지만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1개월 후, 거리에 넘치는 자전거 행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인 바바라에게 들뜬 사람처럼 외쳐댔다. “자전거를 타야 중국을 이해할 수 있다.”

브루스는 당시 미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었다. 중국을 떠나기 전 베이징을 방문한 중국계 영국 작가 한수인(韓素音·한소음)에게 이런 예견을 했다.

“마오쩌둥의 글과 언어에 감동했다. 중국은 미래가 밝다. 풍부한 자원을 합리적으로 이용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면 개혁은 성공한다.” 한은 윌리엄 홀든과 제니퍼 존스가 주연한 영화 모정의 실제인물이었다.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 교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13.미 베이징연락처 해병대원 사고 잦아, 중 정부 골치 앓아 .제 751호, 2022. 1. 29.

14.카터·덩샤오핑 권력 쥐자, 지지부진 미·중 수교에 서광

미·중 양국은 정식 수교 전에도 학술과 문화교류는 활발했다.

미국으로 떠나는 중국 학술방문단 환송식을 마친 부총리 팡이(方毅. 앞줄 왼쪽 아홉 번째). 1978년 12월 2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 [사진 김명호]

닉슨과 포드는 미·중 수교를실현하지 못하고 낙마했다. 중국도 4인방의 득세로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양국의 왕래는 빈번해도 정식수교는 합의를 보지 못했다.

1976년 중국에 줄초상이 났다. 1월에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사망하고 8개월 후 마오쩌둥도 세상을 떠났다. 4인방 등쌀에 맥을 못 추던 1세대 혁명가들이 정변을 일으켰다.

4인방을 구금하고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을 전면에 내세웠다. 4인방 몰락 1개월 후, 미국도 이변이 일어났다. 39대 대선에서 무명의 지미 카터가 포드에게 승리했다.

카터, 어릴 때부터 중국에 호기심

부주석 쑹칭링(宋慶齡)은 아이작 스턴을 베이징으로 초청해 바이올린 연주 듣기를 즐겼다.

왼쪽 첫째는 외교부장 황화. [사진 김명호]

카터는 어릴 때부터 중국에 호기심이 많았다. 1982년에 출간된 첫 번째 회고록에 이런 내용을 남겼다.

“1930년대, 중국에서 활동 중인 침례교 목사의 선교일기 접하며 중국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군 무전병이던 외삼촌은 수시로 중국 해안을 오갔다.

상하이(上海)와 칭다오(靑島)에 정박하면 현지 풍물이 담긴 우편엽서에 근황을 적어 보냈다.

나는 글보다 사진이 더 신기했다.”

미·중 양국은 거의 동시에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했다. 사람이 바뀌자 지지부진했던 미·중 수교에 서광이 들기 시작했다. 당선이 확정된 카터가 국무장관 키신저에게 중국 문제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

“중국인을 신뢰해도 될지 궁금하다.”

키신저는 중국에 대한 좋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중국인은 강하면서도 유연하다. 자존심과 인내심은 말도 못한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 구두로 한 약속은 손해를 봐도 이행한다.”

카터는 중국과 수교를 결심했다. 취임 전, 닉슨과 키신저가 중국 지도자들과 주고받은 회담기록과 포드가 중국을 향해 발표했던 성명을 분석했다. “미·중 관계 정상화의 관건은 대만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취임 1개월 후인 1977년 2월, 중국의 워싱턴 주재 중국연락처 주임 황쩐(黃鎭·황진)과 회담 자리를 마련했다.

카터의 목적은 중국 최고 지도자의 의중을 탐색하기 위함이었다. 황쩐은 카터를 실망시켰다. 정식 외교관계 수립에는 관심이 없었다.

소련 비난에만 입에 거품을 물었다. 카터가 화제를 바꿨다. 중국 지도자의 미국 방문이 가능한지를 타진했다.

황쩐의 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대만 대사가 워싱턴에 주재하는 한, 중국 지도자의 미국 방문은 불가능하다.”

정식 수교 후 연락처 간판도 대사관으로 교체했다. 1979년 3월, 워싱턴 D.C. [사진 김명호]

카터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5월 25일, 인디애나주의 노트르담 대학에서 외교정책 밝히며 중국 측에 메시지를 보냈다. 양국 관계의 지속 과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미국의 이익에 미칠 중요성을 강조했다. 동시에 포드가 임명한 베이징 주재 미국연락처 주임 게이츠를 전국 자동차 노조 위원장 레오날드 우드콕으로 경질했다.

당시 중국에 유행하던 “무산계급 사유(思惟)”를 이해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중국도 화답했다. 황쩐을 차이쩌민(柴澤民·시택민)으로 교체했다. 우드콕은 부인과 15년째 별거 상태였다.

베이징 부임 후 연락처 전담 간호사와 눈이 맞았다. 주임 업무보다 데이트에 열중했다.

같은 해 7월, 부총리 덩샤오핑이 당과 정부, 군을 완전히 장악했다. 미국이 먼저 중국을 떠봤다.

8월 말, 국무장관 밴스가 베이징을 방문, 외교부에 닉슨과 포드 시절보다 못한 제안을 하고 덩과 회담했다.

밴스가 시험 삼아 던진 돌을 덩이 노련하게 받았다.

“제안한 문건을 봤다. 5년 전 닉슨 대통령과 협의한 내용은 양국 관계 정상화의 기점이었다.

그간 발전은커녕 후퇴했다. 대만 문제는 중국인들끼리 해결할 문제다.

중국인들은 해결할 능력이 있다. 미국 친구들이 우리 대신 걱정할 이유가 없다.

미국은 우리에게 대만을 무력으로 해방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고 싶어한다.

엄밀히 말하면 내정간섭이다. 미국의 전략은 북극곰(소련)에게만 유리할 뿐이다.

미국은 온갖 이유 들이대며 대사관 설치와 대사 교환을 질질 끈다.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

연락처건 대사관이건 간판 바꿨다는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다. 그간 우리는 여러 차례 성명 주고받으며 서로를 시험했다. 공통점을 더 찾기 위해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덩샤오핑 부총리, 당·정부·군 장악

밴스의 빈손 귀국은 카터에게 중국을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전 베이징 주재 미국연락처 주임 부시에게 중국 방문을 요청했다. “덩샤오핑의 속내를 파악해 주기 바란다.”

부시를 만난 덩은 재차 강조했다.

“중·미 관계 정상화에 속도가 필요하다. 미국 정부와 국회의 정치가들은 먼발치에서 정치적인 관점으로 중·미 관계를 봐야 한다. 외교 문제가 아닌 정치문제로 이해하면 결단을 내리기 쉽다.”

1978년 4월, 카터 행정부의 공개 선언에 세계가 진동했다.

“미국은 ‘1개의 중국’이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일관된 주장을 승인한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정식 외교관계 수립은 미국의 이익과 부합된다.”

국무장관 밴스도 성명을 냈다.

“카터 대통령의 1차 임기가 끝나기 전, 가장 중요한 목표는 미·중 관계 정상화의 실현이다.”

같은 무렵, 덩샤오핑도 미국 손님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미국 정부와 대통령이 양국 관계 정상화에 보다 적극적인 태도 취하기를 희망한다. 빠를수록 좋다.”

미국은 행동으로 화답했다. 백악관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를 태운 부통령 전용기가 중국으로 향했다.

5월 20일 베이징공항에 착륙한 브레진스키는 외교부장 황화(黃華·황화)를 발견하자 흥분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밴스처럼 빈손으로 돌아갈 염려는 없다는 징조였다.

30년 후 당시를 회상했다.

“덩샤오핑과 오랜 시간 회담했다. 대만 문제가 가장 민감했다.

일단 수교부터 하고 대만 문제는 차후에 시간을 두고 상의하기로 합의했다. 회담 마친 후 덩 부총리와 베이하이(北海)공원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일정에 없던 예우에 나는 감동했다.

만찬 도중 덩이 미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첫날 저녁은 우리 집에서 미국식 만찬을 대접하겠다는 답이 고작이었다. 덩의 말은 구체적이었다. 중국 최대의 명절인 춘제(春節·설날)의 저녁을 미국에서 하겠다며 즐거워했다.” 8개월 후, 두 사람 모두 약속을 지켰다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 교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15.중·미 6차례 비밀담판 끝, 양국 관계 정상화 합의, 2022. 2. 5.

15.중·미 6차례 비밀담판 끝, 양국 관계 정상화 합의

1979년 1월 28일 오후 4시30분, 부인 쭤린(卓林)과 함께 워싱턴의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한 덩샤오핑.

쭤린 뒤의 미국 여인은 상하이에서 합류한 미 국무부 의전관. [사진 김명호]

1912년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 미국은 타이베이(臺北)에 영사관을 개설했다. 국·공 내전에 패한 국민당이 대만에 둥지를 튼 후에도 미국은 국민당과 등을 지지 않았다. 냉전 시절엔 더했다. 대만의 중화민국은 미국의 맹방(盟邦)이었다. 미국의 중국대사관 소재지도 타이베이였다.

한국전쟁 정전 5개월 후, 미국은 대만과 공동방위조약까지 체결했다. 대만과 인근 도서(島嶼)에 미 육해공군이 넘쳐났다. 1958년, 진먼다오(金門島) 포격전이 벌어졌다. 진먼방위사령부 부사령관 3명 중 2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한 명은 불구자가 됐다.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대만방위를 강화했다. 타이난(臺南)의 공군기지에 핵무기를 배치했다. 타이중(臺中)의 미 공군기지는 동아시아 최대규모였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위협을 감당하고도 남았다.

대만 행정원장 장징궈, 미국 행보에 분노

1978년 5월, 인민대회당에서 브레진스키와 회담을 마친 덩샤오핑.

왼쪽 첫째가 미국의 베이징연락처 주임 우드콕. 수교 후 초대 중국대사를 역임했다. [사진 김명호]

냉전 시절 미국은 중국 정보가 취약했다. U-2기 발진 기지도 대만이었다. 미 공군이 전담했던 대륙 관련 정보수집이 중앙정보국(CIA)으로 이관될 무렵, 대만의 국방회의 부비서장이 장징궈(蔣經國·장경국)였다.

미 중앙정보국 대만분실장 크라인은 장과 죽이 맞았다. 장 사망 후 애도로 일관된 평전을 낼 정도였다.

U-2기는 1961년 4월부터 1965년 3월 31일 인민해방군의 고사포 공격으로 추락할 때까지, 5년간 대륙을 정찰했다. 중국의 두 차례 핵실험과 칭하이(靑海), 신장(新疆), 시베이(西北), 둥베이(東北), 둥난(東南) 일대, 베트남 국경 지역의 군사시설을 샅샅이 뒤졌다. 크라인은 U-2기가 수집한 정보를 장과 공유했다.

대만이 유엔에서 쫓겨나고, 닉슨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상하이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한 후 미국은 대만의 소련 접근을 우려했다. 당시 국민당 상층부에는 장징궈를 비롯한 소련 유학생 출신들이 많았다.

장은 부인도 소련 여자였다. 미국은 대륙과 대만에 양다리를 걸쳤다.

1974년 4월 1일 오전 주중대사 메카나기가 행정원장 장징궈에게 7월로 예정된 전투기와 핵무기 철수를 통보했다. 이틀 후 다시 메카나기를 만난 장은 한국을 거론했다.

“남한은 F-4 전투기 2개 중대를 보유하고 있다. 중화민국도 F-4 구매를 희망한다.”

보고를 받은 닉슨은 메카나기를 태국대사 레오날드 운저로 교체했다. 타이베이에 부임한 운저는 보증서나 다름없는 키신저의 서신을 장에게 전달했다.

“우리는 1954년에 체결한 협약을 준수한다.1972년 상하이에서 발표한 공동성명은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책과 행동을 문자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최근 수년간 중화민국의 지속적이고 경이로운 경제발전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앞으로도 중화민국과 계속된 합작을 희망한다. 우리는 우리의 우방을 버릴 의사가 추호도 없다. 중화민국 정부의 이익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행동을 하게 될 경우, 그 전에 중화민국 정부와 상의하겠다.” 읽기를 마친 장은 화를 냈다.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부친이 공산당보다 미국을 더 증오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틀린 말이 아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보다 루스벨트와 트루먼을 더 싫어했다. 1974년 8월, 미국의 F-4 전투기와 U-2기가 대만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카터는 미·중 수교가 자신의 가장 큰 업적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미·중 관계 정상화는 소련과의 전략적 우위 외에 경제적인 이점도 있었다. 중국은 미국의 자본가들이 군침을 흘리는 거대한 시장이었다. 당시 중국 시장은 서구와 일본이 점령하고 있었다.

1978년 상반기 일본의 중국 수출은 미국의 5배, 서구공동체는 3배였다. 1978년 초, 중국과 비밀담판을 구상했다. 1978년 5월, 베이징에서 열린 브레진스키와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의 회담이 물꼬를 텄다. 브레진스키는 덩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이런 일기를 남겼다.

“왜소한 체격에 담대함이 엄청났다. 생기가 넘치고, 노련하고, 민첩했다. 창문 열면 눈에 들어오는, 먼 산을 보는 느낌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수많은 풍파와 곡절을 견디며 벌떡 일어섰던 지혜가 묻어났다. 가슴에 품은 원대한 꿈과 박력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덩샤오핑, 79년 1월 말 미 방문 요청 수락

미·중 수교 발표 후 정치작전학교 간부들에게 훈시하는 대만 총통 장징궈. [사진 김명호]

1978년 7월부터 시작된 비밀담판은 6차례 열렸다. 장소가 베이징이다 보니 중국 측에서 비밀이 누설될 염려는 없었다. 미국은 달랐다. 카터는 국회를 멀리하고 국무부도 동원하지 않았다. 1978년 8월 일기에 이렇게 썼다.

“국무장관 밴스에게 비밀을 엄수하겠다는 서약을 요구했다. 국무부는 구성원들의 성향이 복잡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덩샤오핑에게 제안할 문건은 나와 브레진스키가 초안을 만들었다. 발송도 남에게 시키지 않았다. 백악관에서 직접 베이징으로 보냈다.”

7월부터 베이징에서 시작된 담판은 총 6차례 열렸다. 카터는 최종 결정을 덩샤오핑에게 맡겼다. 중국 외교부장 황화(黃華·황화)와 미국의 중국연락처 주임 우드콕과 부주임 로이가 마주한 담판은 순조로웠다. 타협과 양보를 거듭했다. 12월 4일 열린 회담에서 외교부 부부장 한넨룽(韓念龍·한염용)이 우드콕에게 통보했다.

“중국 정부가 1979년 1월 1일을 중·미관계 정상화의 기점으로 하자는 카터 대통령의 제안에 동의했다. 12월 13일,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 부총리가 두 사람의 접견을 허락했다.”

우드콕과 로이를 만난 덩샤오핑은 거침이 없었다. 비밀 누설을 막기 위해 미국 동부시간 1978년 12월 15일 밤 9시, 베이징 시간 12월 16일 오전 10시, 양국이 동시에 발표하자는 카터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1979년 1월 말, 미국을 방문해 달라는 요청도 흔쾌히 수락했다.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 교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15.중·미 6차례 비밀담판 끝, 양국 관계 정상화 합의,중앙Sunday.wp 2022. 2. 12.

16.카터 “미·중 수교 발표 10시간 전 장징궈에게 통보해라”

1978년 12월 16일 오후, 기자들에게 우방 미국의 단교(斷交) 선언을 매섭게 비판하는

중화민국 신문국장 겸 총통 비서 쑹추위. [사진 김명호]

1978년 2월. 중화민국 총통 옌자간(嚴家淦·엄가감)이 행정원장 장징궈(蔣經國·장경국)를 후임에 추천하고 하야했다. 5월 20일, 자녀는 물론 부인도 불참한 신임 총통 취임식이 열렸다. 철혈(鐵血)의 장징궈는 이튿날 총통부 명의로 언론매체에 서신을 보냈다. “내게 영수(領首)라는 용어를 쓰지 마라.” 당과 행정원에도 지시했다.

“1세대 혁명가들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보통 당원이고 보통 국민이다.

어떤 장소건 ‘총통만세’ 외치며 주책 떨지 마라. 호칭도 선생으로 통일해라.”

정부에서 새로 산 방탄 리무진도 부총통에게 양보했다.

장징궈, 노점 음식 즐긴 소탈한 성격

첸푸는 중화민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었다.

단교 후 주미 대표부 대표와 외교부장, 감찰원장을 역임했다. [사진 김명호]

장징궈의 개인 생활은 중산층만도 못했다. 거리의 노점 음식을 즐겼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고난 성격이 그랬다. 권위의식 집어 던지고, 거리의 상인이나 노동자들과 애환을 함께했다. 부인도 한몫했다.

공식 석상에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좋건 나쁘건, 화젯거리를 만들지 않았다. ‘침묵의 제1부인’에 만족했다. 권위가 저절로 생겼다.

취임식 날 장징궈는 희비가 엇갈렸다. 장년 시절, 노래와 미모가 빼어난 경극 배우를 어떻게 해보려다 미수에 그친 적이 있었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 여인은 지혜로웠다.

수십 년간 장징궈의 장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60이 훌쩍 넘은 나이에 화사한 화장하고 나타나 새로운 지도자에게 축가 선물하고 잔을 올렸다. 장은 30년 전의 무례와 치기를 용서받았다며 즐거워했다.

미국도 짓궂은 선물을 보냈다. 장징궈의 총통 취임 당일, 카터 대통령의 특사 브레진스키가 베이징에 도착,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과 밀담을 나눴다. 장은 짚이는 바가 있었다. 미국 사정에 정통한, 외교부 차장 첸푸(錢復·전복)에게 일렀다.

“50년 전 덩샤오핑과 모스크바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안다.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보다 더 지독한 사람이다. 대만 문제에 대한 카터의 의중은 명확하다.

양안 관계는 양안 인민들의 사정이니 중국인들끼리 알아서 처리하라는 투다. 덩은 속임수를 융통성으로 포장하는 재능이 탁월하다. 양안 관계는 세월이 해결할 일이라며 수교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단교(斷交)를 선언할 경우 초기 대응이 중요하다. 비망록 초안을 작성해라.”

타이베이(臺北) 주재 미국대사 레오날드 운저도 총통부로 초치했다.

“미국이 혼자 갈 길을 가더라도 중화민국과의 관계는 변치 않기를 희망한다.” 부탁도 했다.

“늦어도 수교 발표 2주 전엔 내게 알려주기 바란다.”

워싱턴 주재 중국연락처 주임 차이쩌민. 수교 후 초대 주미대사를 역임했다.

인상은 난공불락이었지만 행동이 유연하고 서예도 일품이었다. [사진 김명호]

카터의 중국 접촉은 보안유지가 철저했다. 미국 행정부와 의회에 인맥이 단단한 워싱턴의 중화민국 대사관도 미국과 중국의 비밀담판 내용을 알 길이 없었다.

장징궈는 카터 재임 중 베이징 측과의 수교협상이 타결될 것이라는 짐작은 했지만, 상당한 시간이 걸릴 줄 알았다. 미국 지인들이 보내온 정보도 한결같았다. 장의 지인들은 무기 판매를 1년간 중지하라는 덩의 제안을 카터가 수용한 줄 몰랐다.

카터는 12월 15일 오후 9시(대만시간 16일 오전 10시) 미·중 수교에 관한 공동성명 발표를 앞두고 대만 측에 비밀이 누설될까 우려했다. 중화민국 대사 선젠홍(沈劍虹·심검홍)과 가까운 상원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은 강연하기를 좋아했다. 상원의원이 제안한 강연을 겸한 부부동반 여행을 떠났다. 국무부에도 지시했다. “발표 2시간 전에 장징궈에게 통보해라.” 잠시 후 10시간 전으로 정정했다.

12월 15일 오후 2시 타이베이, 미국대사 운저가 장징궈의 비서를 겸하던 신문국장 쑹추위(宋超瑜·송초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오전 9시 장징궈 선생을 만나야 한다. 안배해 주기 바란다.” 운저와는 오랜 기간 교분을 나눈 사이였다. 시간까지 지정하며 총통 면담을 요청한 적은 없었다.

시간도 묘했다. 장은 오후에 외부인사 만나는 습관이 있었다. 첸푸와 상의했다.

“운저가 시간까지 정해 총통을 만나고 싶어한다. 긴급사태가 발생했는지 궁금하다.”

첸의 대답은 간단했다. “별일 없다. 만일에 대비해 수시로 연락 유지하자.”

대만 외교부 차장 첸푸 “총통 깨워라”

쑹추위의 보고를 받은 장징궈는 운저의 접견 요청을 수락했다. 저녁 7시, 쑹이첸푸의 전화를 받았다.

“주미 대사관에 특이한 동향이 감지되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중공의 주미연락처 주임 차이쩌민(柴澤民·시택민)은 두문불출이다. 관원들도 외출한 흔적이 없다. 주미대사 선젠홍은 애리조나주에서 강연 중이다. 미국 정부의 외몽골 승인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운저의 면담 요청이 외몽골 문제 때문인지 확인 중이다.”

밤 10시, 미 국무부가 운저에게 긴급전문을 보냈다. “미군사령부에 가서 전화를 기다려라.”

1979년 5월 14일, 워싱턴의 한 호텔에서 운저가 중국시보(中國時報) 특파원에게 5개월 전 일을 회상했다.

“12월 15일 밤, 나는 타이베이 미국화교상인연합회가 주관한 댄스파티에 참석 중이었다.

미군사령부는 도청이 불가능했다. 16일 오전 10시 중화민국과 단교를 발표한다는 국무부의 전화 받고 쑹추위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총통 면담시간을 오전 7시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쑹이 급한 일이냐고 묻기에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이 시간에 전화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쑹추위의 연락을 받은 첸푸는 무슨 일인지 직감했다. 쑹에게 총통을 깨우라고 지시했다.

쑹은 총통관저로 차를 몰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 교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16.카터 “미·중 수교 발표 10시간 전 장징궈에게 통보해라” /중앙Sunday.wp 2022. 2. 19.

17.카터, 미·중 수교 발표 11일 뒤 특사 보내 대만 달래

1978년 12월 27일 밤 10시 참모총장과 함께 크리스토퍼(왼쪽 둘째)

일행을 마중 나온 첸푸(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1978년 12월 16일 토요일 새벽 3시, 비서 쑹추위(宋超瑜·송초유)가 장징궈(蔣經國·장경국)를 깨웠다.

“미국대사 운저가 급히 만나고 싶어한다.” 황급히 달려온 외교부 차장 첸푸(錢復·전복)가 장에게 보고했다.

“미국과 중공의 수교선언이 임박했다.” 잠시 후 운저가 도착했다. 쑹의 구술을 소개한다.

“운저는 총통을 만날 때마다 공사 윌리엄 브라운을 대동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정치참사라 소개하며 이유까지 설명했다. ‘필리핀에서 수술받은 부인을 간호하기 위해 브라운은 타이베이에 부재 중이다.’ 총통은 브라운과 친분이 두터웠다. 입장이 난처해진 브라운이 자리를 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통의 거실로 이동하는 운저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미국대사, 새벽 3시에 대만 총통 설득

미·중 수교 발표 후 카터를 비난하는 대만시위대. [사진 김명호]

운저가 장징궈에게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오전 10시, 카터 대통령이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합의 내용을 직접 발표한다. 1월 1일, 미국과 중공의 정식 외교관계가 시작되고 귀국과의 외교관계는 단절된다.”

배석했던 첸푸의 회고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카터는 미국과 자유중국의 실질적인 관계와 민간교류는 보장했다. 공동방어조약은 폐기하되 다른 조약은 계속 유효하다는 묘한 태도였다. 무기 판매도 1년만 중지하겠다며 총통을 설득했다.

자유중국의 안전과 번영, 자립과 자강 정신을 높이 찬양했다.”

운저는 카터가 발표할 내용과 미국과 대륙이 서명한 공동선언 사본까지 보여주며 신신당부했다.

“카터의 성명이 나오기 전까지 비밀을 유지해 주기 바란다. 미국의 상·하원에는 보수세력들이 많다. 대만에서 먼저 발표하면 카터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듣기만 하던 장징궈가 입을 열었다.

“중화민국과 미국은 오랜 기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단교(斷交)라는 중대한 결정을 7시간 전에 우리측에 알려줬다. 심히 유감이며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대만의 안전과 계속된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카터의 말은 실현이 불가능하다.

중화민국은 미국의 충실한 동맹국이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공산당은 절대 미국의 동맹국이 될 수 없다. 후회할 날이 온다. 나는 국정의 최고 책임자다. 정부와 국민에게 알릴 의무가 있다.”

운저는 10시 이후에 하라고 애원했다.

“미국에도 이 일을 아는 사람은 국무장관 밴스와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 외에는 없다.”

장은 한마디 남기고 자리를 떴다.

“카터는 우리 국민에게 타격을 가하고 나를 모욕했다. 내가 국민에게 설명할 기회도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중화민국 총통이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하겠다.”

운저는 3시30분에 총통관저를 떠났다. 집무실에 자리한 장은 전 총통 옌자간(嚴家淦·엄가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전 10시, 미국이 단교를 선언한다. 원로들을 진정시키고 의견을 취합해주기 바란다.”

장징궈가 지정한 당과 정부요인들의 집에 전화벨 소리가 요란했다.

“총통이 찾는다. 편한 복장에 택시를 이용해라.”

1978년 12월 16일, 수교 선언 후 축배를 드는 덩샤오핑과 주중 미국연락사무처 주임 우드콕.

총통관저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외교부장이 회의 소집 이유를 설명했다.

“6시간 후, 미국이 중공과 수교를 선언한다. 우리도 성명을 내야 한다. 신속히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자. 진행 중인 국민대회 대표와 입법위원 선거는 뒤로 미루자. 외교부장은 책임지고 사직한다.”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합의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명서는 첸푸가 영어와 중국어로 작성한다. 오전 7시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를 소집한다.”

선거 연기는 찬반이 팽팽했다. 중앙상무위원회는 1주일 후에 열릴 선거를 만장일치로 중지시켰다.

외교부장 인책은 만류했지만 고집을 꺾지 못했다.

오전 10시, 장징궈는 위성으로 카터의 선언을 시청했다.

“1979년 1월 1일,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승인한다. 대만과 외교관계를 중지하고, 미국과 중화민국이 체결한 공동방위조약도 중지한다. 교역과 문화교류는 계속 유지한다.”

그날 밤 장이 직접 TV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이 조약을 위배했다. 자유 세계에 불리한 일을 자초했다.

중화민국은 절대 중공 비적들과 담판하지 않고 대륙광복의 신성한 사명을 포기하지 않겠다.

국민은 안심하고, 모든 공직자는 노력을 배가(倍加)하기 바란다.”

장은 현실을 인정하고 인재를 존중하는 지도자였다. 행정원장에게 지시했다.

“공산 비적들은 30년간 미국과 등을 졌다. 지금 미국에는 성공한 화교들이 각 분야에 널려 있다.

미국에서 자리 잡은 중년의 화교들은 특징이 있다. 중화민국이 대륙을 통치하던 시절 미국유학 떠난 인재들이 대부분이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교육과 과학에 관심이 많다. 미국과 수교 후 미국유학을 개방하고, 화교 과학자 영입에 광분할 것이 분명하다. 큰 부자 한 명이 천 명을 먹여 살리는 시절은 끝났다.

수천만의 살림을 책임질 반도체 전문가를 미국에서 물색해라".

행정원장 쑨윈쉔(孫運璿·손운선)은 장쭝머우(張忠謀·장충모)를 낙점했다. 6년간 공을 들였다. 1985년, 장은 54세의 나이에 대만으로 이주했다. 2년 후 그 유명한 타이지덴(臺積電·tsmc)을 설립했다.

장징궈, 직접 TV에 나와 대국민 연설

카터의 단교선언 후 대만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해 질 무렵, 청년들이 떼를 지어 미국 대사관으로 몰려갔다.

돌을 투척하고 계란을 집어 던졌다. 대사관을 지키던 미 해병대는 최루탄과 곤봉을 동원해도 역부족이었다.

외교부에 조심스럽게 항의했다.

“폭도들이 조직적이다. 국민당 외곽조직 구국단(救國團)이 배후에서 획책했다는 근거가 발견될까 우려된다.” 효과가 있었다. 대사관 문전에 적막이 감돌았다.

대신 인도차이나 반도가 들썩거렸다. 호찌민 사후 소련에 의존하던 베트남은 중공과 미국의 수교에 눈살을 찌푸렸다. 12월 25일 새벽, 중공과 가까운 캄보디아를 공격했다. 순식간에 프놈펜을 점령해 덩샤오핑과 카터를 놀라게 하였다.

카터는 대만을 토닥거렸다. 12월 25일 오전, 운저가 외무부로 첸푸를 방문했다.

“국무차관 크리스토퍼가 인솔하는 특사 일행이 27일 밤 타이베이에 도착한다.”

보고를 받은 장징궈가 첸푸에게 지시했다. “네가 영접해라. 담판도 주도해라.” 첸푸를 발탁한 이유는 명확했다.

모친의 교육이 추상같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첸의 회고를 소개한다.

“흔히들 어린 시절 회상하며 엄부(嚴父)와 자모(慈母)로 시작하는 것이 기본이다.

우리 집은 반대였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나무란 적이 없었다. 모친은 무시무시했다.

밥 한 톨만 흘려도 회초리 맞고, 복장이 단정하지 않아도 벌을 줬다.

전교 일등만 해도 칭찬 한마디 들어본 적이 없다. 남과 다투기라도 한 날은 협상할 줄 모른다며 날벼락이 떨어졌다. 나는 외교관이 된 후 모친의 고마움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다.”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 교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17.카터, 미·중 수교 발표 11일 뒤 특사 보내 대만 달래 /중앙Sunday.wp 2022. 2. 26.

18.시위 우려한 첸푸, 미 특사단에 공항 후문 이용 권고

미·중 수교 1년 후 양국은 군사교류와 합작을 시작했다.

1980년 봄, 샌디에이고의 미군함대 레이더 시설을 참관하는 중국 부총리 겸 국방부장 겅뺘오(耿飇).

1978년 12월 16일, 미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는 의회 휴회 기간에 중화인민공화국 승인을 발표했다.

상·하 양원은 물론, 민주당·공화당 할 것 없이 비난이 잇달았다. 베이징 주재 미국연락처 주임과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역임한 부시가 첫 방을 날렸다.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했다.

“베이징과의 교역은 얻을 것이 없다. 막대한 지출을 감수해야 한다. 미국은 중국이 제안한 조건을 수락하고 우리에게 충실했던 대만을 버렸다. 우리 역사상 처음인 평화로운 시기에 맹방(盟邦)과의 조약을 파기했다. 아무런 이유와 이익도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중공 승인한 카터, 국내서 뭇매 맞아

타이베이 도착 후 성명을 발표하는 크리스토퍼. 가장 왼쪽이 첸푸. [사진 김명호]

카터는 정식 단교를 앞둔 대만(중화민국)에 국무차관 크리스토퍼가 인솔하는 대표단 20명을 파견했다.

12월 23일, 대만 출발을 앞두고 크리스토퍼가 중화민국 대사관을 방문했다. 대사 선젠홍(沈劍虹·심검홍)에게 타이베이에 가는 이유를 설명했다.

“특사 자격으로 대표단과 함께 대만에 간다. 관계유지를 위한 토의가 주목적이다. 2개월 후 쌍방이 비관방(非官方) 기구를 설립해 대사관 업무를 접수하면 된다. 세부적인 토론은 나눌 단계가 아니다.”

태평양지구 미군 사령관과 국무부 법률담당 헐버트 한셀 외에 상무부와 국방부의 고위직이 포함된 미국대표단의 면면은 화려했다. 대만 측도 만만치 않았다. 외교부와 국방부, 경제부, 교통부, 신문국의 정예들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장징궈(蔣經國·장경국)가 담판 대표로 지목한 외교부 차장 첸푸(錢復·전복)의 회고에 이런 내용이 있다.

“크리스토퍼가 백악관에서 받은 훈령은 단순했다. 단교 이후 양국관계를 어떻게 안배하느냐가 다였다. 비관방 기관은 민간단체를 의미했다. 민간단체는 정부를 대표할 수 없었다. 우리 측에서 받아들이기엔 무리였다.”

대만 외교부장 장옌스(蔣彦士·장언사)는 남의 의견을 경청하는 장점이 있었다. 미국특사 일행이 도착하기 전 학자와 전문가들을 초청해 좌담회를 열었다. 비분강개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여성 참석자들이 특히 심했다.

“미국이 우리를 홀대했다. 우리 민중의 기세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줄 필요가 있다.

대표단이 머무르는 동안 대규모 반미 시위를 계속해 미국이 우리 의견을 받아들이게 하자.”

장은 말 같지 않은 소리에 당황했다. 첸푸를 힐끗 쳐다봤다. 첸이 입을 열었다.

“외교는 담판이다. 전문가들의 영역이다. 군중을 끌어들이는 것은 금물이다. 소란만 일어나고 될 일도 안 된다. 군중은 통제하기 힘들다. 들뜨게 하기는 쉬워도 진정시키기는 어렵다. 담판 석상에서 민의(民意)를 미국 측에 전달하겠다.”

첸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한마디 하자 여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맥없이 주저앉았다.

혈기 왕성한 당원들은 달랐다. 이를 악물고 씩씩거렸다.

미·중 수교 발표 후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는 3일간 휴교령을 내렸다.

1978년 12월 17일, 대만대학 정문 앞. [사진 김명호]

12월 27일 밤 10시, 크리스토퍼 일행이 타이베이에 도착했다. 당일 오후 신문국장이 첸푸에게 영문과 중문으로 작성한 성명서를 전달했다. “총통이 오늘 밤 공항에서 사용하라고 했다.” 초안 작성자를 물었다.

“당 원로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었다”는 말에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읽어보니 엄숙하기 그지없는, 중국 고문(古文)이 아니면 표현이 불가능한 선전포고문 같았다. 장징궈에게 달려가 양해를 구했다.

특사 영접을 위해 공항으로 향하던 첸푸는 깜짝 놀랐다. 거리 양편에 군중과 학생들이 가득했다. 질서정연하고 차량 소통도 원활했다. 첸의 차를 향해 박수 보내며 파이팅을 연발했다. 첸은 불안했다. 질서가 정연한 것이 수상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미국대사 운저에게 다가갔다.

“밖에 사람들이 많다. 위험하다. 만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공항을 떠날 때 후문을 이용하자.”

운저는 화를 버럭 냈다.

“특사 명단에 내 이름도 있다. 우리는 정정당당한 미국 대통령의 특사다. 뒷문으로 나갈 수 없다.”

첸은 답답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다 보니 두리번거리며 공사 브라운을 찾았다. 브라운이 첸을 안심시켰다.

“대사관은 정보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지 오래다. 소요 가능성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미국·대만 대표단 일행 어색한 만남

특사 일행은 구면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눌 사이였지만, 이날은 환영한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는 동안 “별일 없었느냐”가 고작이었다. 어색한 악수 하고 기자실로 향했다. 첸푸가 크리스토퍼의 의견을 구하고 성명서를 펴들었다.

“지금 미국 특사 일행을 대하는 심정은 슬픔과 유감을 감당하기 힘들다.

중화민국은 독립된 주권국가다. 다년간 서태평양의 안전과 평화에 기여했다.

중화민국 총통 장징궈 선생은 중·미 양국이 연합하면 공동의 이익을 누리고, 갈라서면 양국의 피해가 막심하다고 했다. 불행하게도 미국 정부는 12월 15일 중공이 제시한 조건을 수락했다.

양국의 전통적인 우의와 화목을 파괴하고, 아태(亞太)지역의 평화와 안전에 엄중한 손해를 끼쳤다.

카터 대통령은 인권이 미국 외교정책의 영혼임을 누차 강조했다. 무고한 살상을 남발하고, 인권을 무시하고, 인민의 자유를 박탈하는 중공과의 외교관계 수립은 한편의 코미디다.

중공은 허무맹랑한 구호로 세인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며 폭력혁명과 무력을 통한 대만해방을 포기하지 않았다.”

첸푸는 미국과 중공의 군사동맹 체결 가능성도 우려했다.

“미국은 1년 후 중·미 공동방위조약 종지(終止)를 결정했다. 아태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촉구한다. 미국대표단은 우리의 희망을 미국 정부에 충실히 전달하기 바란다.”

크리스토퍼의 성명은 간단했다. 장차 대만과의 관계에 비정식(非正式)이란 용어는 쓰지 않았다.

비관방만 강조했다. 묘한 여지를 남겼다.

[출처]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 교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근현대>- 18.시위 우려한 첸푸, 미 특사단에 공항 후문 이용 권고 /중앙Sunday.wp 2022. 3. 5.

◆『김명호의 사진과 함께하는 중국근현대』를 더 보실려면 아래 목록의 해당 URL을 클릭하세요

​ ●『청의 미국 수교와 미·중 관계』 https://blog.naver.com/ohyh45/222404189767

●『중화민국 시대의 미·중 관계』 Ⅰ https://blog.naver.com/ohyh45/222482693196

●『중화민국 시대의 미·중 관계』 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532917042

●『인민공화국 이후의 미·중 관계』Ⅰ https://blog.naver.com/ohyh45/222582189809

●『인민공화국 이후의 미·중 관계』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630229852

●『인민공화국 이후의 미·중 관계』Ⅲ https://blog.naver.com/ohyh45/222666371310

○중화민국 국가원수였던 마적 출신 동북왕 장쭤린[ 1~8회] https://blog.naver.com/ohyh45/222143886598

○『'동북왕' 장쭤린(張作霖)』 https://blog.naver.com/ohyh45/20208358169

○즈펑(直奉)전쟁 주역 우페이푸(吳佩孚)와 장쭤린[1~2회] https://blog.naver.com/ohyh45/222212169325

○베이징 정변의 주역 펑위샹(馮玉祥)①[1~7회] https://blog.naver.com/ohyh45/222213095004

○베이징 정변의 주역 펑위샹(馮玉祥)②[1~3회] https://blog.naver.com/ohyh45/222292938720

○『중일전쟁중 민주의 보루,위난(雲南)을 지배한 룽윈(龍雲)』Ⅰhttps://blog.naver.com/ohyh45/222304954948

○『중일전쟁중 민주의 보루,위난(雲南)을 지배한 룽윈(龍雲)』Ⅱhttps://blog.naver.com/ohyh45/222343054874

○중국 대한간 가와시마 요시코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22110870492

○중국여성교육선구자 우이팡 https://blog.naver.com/ohyh45/222068369294

○중공공군 창설·한국전쟁 https://blog.naver.com/ohyh45/222030882658

○원로작가 양센이 https://blog.naver.com/ohyh45/222002205968

○대만의 5·24 반미운동 https://blog.naver.com/ohyh45/221975316522

○중국의 홍콩통일전선전략 https://blog.naver.com/ohyh45/221832127283

○중국의 한국 국호인정 https://blog.naver.com/ohyh45/221793352948

○6·25전쟁과 중국의 항미원조 ① https://blog.naver.com/ohyh45/221580656954

https://blog.naver.com/ohyh45/221656385350https://blog.naver.com/ohyh45/221728153489

○상하이 시장 우궈쩐 https://blog.naver.com/ohyh45/221506795007

○둔황 수호신 창수훙 https://blog.naver.com/ohyh45/221196714587

○33년연금 된 항일전 명장 쑨리런https://blog.naver.com/ohyh45/221179374022

○광둥상단 단장 첸렌보 https://blog.naver.com/ohyh45/221154790356

○국공내전 화이하이 전역 패장 황웨이 https://blog.naver.com/ohyh45/221149265831

○장제스 신4군 지휘한 홍군출신 샹잉 https://blog.naver.com/ohyh45/221131474329

○덩샤오핑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21112808998

○중공 지하조직 이끈 판한넨 https://blog.naver.com/ohyh45/221089366857

○시진핑 아버지 시중쉰 https://blog.naver.com/ohyh45/221013298311

○덩샤오핑의 젊은 인재발굴 https://blog.naver.com/ohyh45/221009305674

○마오쩌뚱이 칭찬한 왕홍원 https://blog.naver.com/ohyh45/221009294165

○중공의 핵무기 개발 https://blog.naver.com/ohyh45/220962898036

○쑨원부인 숭칭링과 혁명외교관 천유런 https://blog.naver.com/ohyh45/220921156907

○중국우주개발아버지 첸쉐싼 https://blog.naver.com/ohyh45/220842459731

○대만 여성혁명가쎼쉐홍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607453

○漢語병음표기법 만든 저우유광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94061

○10년 복역한 자유주의자 레이전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88520

○제왕의 기상 칭찬에 취한 가오강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78907

○중국의 민족철도 건설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47725

○대한간 처벌된 루쉰동생 우쮜린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40112

○추방 60년만에 항조우에 묻힌 연경대 설립자 존 레이턴 슈트워트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25939

○버마 금삼각 국민당 패전부대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23297

○色에 빠진잡기의달인 추민이 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19293

○소년들'참새의 추억'이 10년뒤 홍위병 완장으로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16604

○타고르의 비폭력은 환영받지 못했다https://blog.naver.com/ohyh45/220819516604

○북양정부 최대 파벌 교통계의 영수 량스이 https://blog.naver.com/ohyh45/220818167619

○두부장수 출신 만주국 총리 장징후이https://blog.naver.com/ohyh45/220818121708

○전시 8년간 문을 연 중국최고학부 서남연합대학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898922

○칭화대학이 배출한 최고의 재사 뤄궁지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898922

○대만의 사마천 언론인 렌야탕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884825

○국적 속인 친일여배우 리샹란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674980

○별명으로 조롱받던 군벌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658576

○지질학의 태두 웡원하오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648074

○1950년대 동남아 최대갑부 호퉁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467323

○영화 '색계'의 실제 모델 띵무춘과 쩡핀루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445527

○중국에 '자본론'을 처음 들여온 마이후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436758

○루쉰 이후는최대 작가란 말을 듣는 짱아이링 https://blog.naver.com/ohyh45/220817019613

○'신인구론' 주장한 베이징총장 마인추https://blog.naver.com/ohyh45/220817015432

○20세기 화타 샤오룽유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995202

○난징학살 주범 히사오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839281

○중국올림픽이 아버지 왕정팅과 류창춘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827502

○세살에 황제가 된 광서제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809613

○중국 최초의 누드 모델 파문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801939

○중국최후의 고전 시인 천싼리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787570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 이야기 ① https://blog.naver.com/ohyh45/220459210100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724760

○우파두목으로 몰린 장보쥔과그의 딸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705638

○은둔화가 류전샤의 가족사 https://blog.naver.com/ohyh45/220816688610

○천커푸,천리푸형제와 삼촌 천치메이의 장제스와 은원 https://blog.naver.com/ohyh45/220798106428

○타이완의 좌익 사조 https://blog.naver.com/ohyh45/220760880792

○중공 옌안시절의 5대 원로(五老) https://blog.naver.com/ohyh45/220704282831

○중국5대 영수중 가장 어렸던 린비스 https://blog.naver.com/ohyh45/220670822460

○항일전과 승려-타이쉬,쉬윈,쥐잔, https://blog.naver.com/ohyh45/220633645278

○중칭 천도와 류원차이, 류원후이 형제 https://blog.naver.com/ohyh45/220593148619

○외교의 달인 구웨이쥔 https://blog.naver.com/ohyh45/220492673010

○장제스에게 변절자로 의심되어 암살된 초대총리 탕샤오이 https://blog.naver.com/ohyh45/220492527037

○항일의 피흘린 동북의용군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20459211600

○장제스와 스탈린이 탐낸 린뱌오https://blog.naver.com/ohyh45/220459208736

○중국 리더 제조창 황포군관학교https://blog.naver.com/ohyh45/220459201313

○장제스 부인 쑹메이링과 장쉐량 ①https://blog.naver.com/ohyh45/20209545433

https://blog.naver.com/ohyh45/220459200361

○마지막황제 푸이와 동생 푸제 https://blog.naver.com/ohyh45/220078276817

○'동북의 왕' 장쭤린 https://blog.naver.com/ohyh45/20208358169

○탄원루이, 양안 화해 초석깔다 https://blog.naver.com/ohyh45/20206496685

○장제스에게 항모건조제안한 38세 함대사령관 천샤오콴 https://blog.naver.com/ohyh45/20205207367

○실용파 대교육자 장멍린https://blog.naver.com/ohyh45/20203935022

○1910년대 폐스트 대재앙과 우렌더 https://blog.naver.com/ohyh45/20203451707

○화궈펑과 덩샤오핑 https://blog.naver.com/ohyh45/20200658926

○'그림자 실세'왕둥싱과 덩샤오핑 https://blog.naver.com/ohyh45/20199585594

○장칭과 4인방의 제거 https://blog.naver.com/ohyh45/20198722247

○덩샤오핑의 등장 https://blog.naver.com/ohyh45/20193779511

○마지막 황제 푸이의 생부 섭정왕 짜이펑 https://blog.naver.com/ohyh45/20190631034

○국·공의 인재쟁탈전 0순위였던 위유런 https://blog.naver.com/ohyh45/20188836483

○펑더화이 문화혁명의 먹구름 속으로 https://blog.naver.com/ohyh45/20179693912

○이쭝런과 다이리 https://blog.naver.com/ohyh45/20175074752

○쑹자왕조의 창시자 쑹자수 https://blog.naver.com/ohyh45/20175068859

○신해혁명과 쑨원,쑹칭링 https://blog.naver.com/ohyh45/20175064598

○마오쩌둥과 류샤오치 https://blog.naver.com/ohyh45/20175038819

○의원을 매수하여 쑨원을 누르고 총통이된 차오쿤 https://blog.naver.com/ohyh45/20175032410

○허리우드 漢流스타 황류솽 https://blog.naver.com/ohyh45/20175028551

○옌안의 홍색공주 쑨웨이스 https://blog.naver.com/ohyh45/20169850002

○26세의 무학 작가 선충원 https://blog.naver.com/ohyh45/20169848313

○일류 인물들이 만든 이류당(二流堂) https://blog.naver.com/ohyh45/20169845751

○혁명가들의 연애사-쑨원,장제스,마오쩌둥, 천비란,뤄이눙,리리싼,예첸위 https://blog.naver.com/ohyh45/20153301212

○대만 해협 금문도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52933075

○장제스 이야기 ①https://blog.naver.com/ohyh45/20103642022https://blog.naver.com/ohyh45/20152930023

○'상하이의 황제'두웨셩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52905787

○마오쩌둥이 극진이 대우한 량수밍 https://blog.naver.com/ohyh45/20152903617

○나라 좌지우지한 량스이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52901269

○청년 혁명가들 프랑스 유학 https://blog.naver.com/ohyh45/20135716593

○저우언라이와 키진저의 미·중 수교 https://blog.naver.com/ohyh45/20132306156

○청방(靑幇) 두목 황진룽의 배짱과 굴욕 https://blog.naver.com/ohyh45/20132303029

○중공군의 6·25참전 https://blog.naver.com/ohyh45/20128273602

○중국 외교 기틀 딱는데 공헌한 궁펑 https://blog.naver.com/ohyh45/20128231269

○중국 국방위원회 창설 주역들 https://blog.naver.com/ohyh45/20128217444

○장제스와 장징궈 https://blog.naver.com/ohyh45/20116715921

○중국 공산당의 특수공작원 엔바오항과 우스 https://blog.naver.com/ohyh45/20116713181

○김일성과 저우얼라이의 마지막 만남 https://blog.naver.com/ohyh45/20109178408

○홍위병이 탄생하던 그날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6437

○국민당 비밀 첩보조직 이끈 다이리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6074

○마지막 황제 푸이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5563

○루쉰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5207

○이홍장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4927

○장칭의 첫번째 남자 황징과 그의 가문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4152

○중국 근대화 앞장선 120명의 관비 유학생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3839

○마오쩌뚱 이야기 ①https://blog.naver.com/ohyh45/20103639345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3648

○5·4운동의 지도자 돤시펑(段錫朋)의 변절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3146

○90세 노정객 장스자오의 못다 이룬 국공 담판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2976

○중국국가 작곡한 니에얼 한국인 영화황제(진옌:김덕린)에게 연인뺏기다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2212

○린뱌오 며느리 간택 작전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1810

○암살된 제갈량 양융타이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1503

○장하오 마오쩌둥이 유일하게 관을 멘 동지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1323

○손자 구명하지 안한 주덕의 아내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1096

○직접 인분 뒤져' 굶는 농촌' 밝혀 낸 류사오치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0910

○3조(마오쩌둥,덩샤오핑,장쩌민)시대 원로 리센녠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0773

○중국의 프로메테우스,천두슈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0629

○부패한 관료 자본의 상징, 쑹쯔원 사후 청념 인정 받아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0417

○문화혁명기의 4인방 https://blog.naver.com/ohyh45/20104570130

○저우언라이,주더 가르치고 입당시킨 장선푸 https://blog.naver.com/ohyh45/20104179632

○후스와 장제스 https://blog.naver.com/ohyh45/20104177329

○공화제 꿈꾸는 호랑이 차이어와 황제 꿈꾸는 위안스카이 https://blog.naver.com/ohyh45/20104175292

○신중국 전야 동북해방- 베이징 입성 https://blog.naver.com/ohyh45/20104170241

○난징정부 주석 왕정웨 이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03643991

○중국국보의 대만 피난 작전 https://blog.naver.com/ohyh45/20103643118

○위안스카이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03640940

○전쟁의 천재 린뱌오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03640275

○장쉐량의 반세기 연금 생활 https://blog.naver.com/ohyh45/20103439025

○서태후 이야기 https://blog.naver.com/ohyh45/20100202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