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일신고에 지감 조식 금촉의 삼법 수행을 설하고 있는데....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한 것이다.
수진비록(修眞秘錄)
차례/ 단암 이 용 태 道兄
머리말 | 제1장 지감설 | 제2장 조식법 | 제3장 금촉법 | 맺는말 ||
--------------------------------------------------------------------------------
머리말
사람은 한얼의 일분자(一分子)라. 그러므로 사람의 임자는 정신(精神)이오, 육체(肉體)는 정신이 깃드는 집이라. 육체를 기름에는 음식(飮食)과 의복(衣服)과 주택(住宅)이 있어야 함과 같이 정신을 기름에는 수양(修養)만 같음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언필칭(言必稱) 수양은 신비파(神秘派)의 전유(專有)로 돌려 마치 둔갑장신(遁甲藏身)을 연상(聯想)하고 도외시(度外視)하나 사실 수양(修養)이란 정신면(精神面)으로나 육체면(肉體面)으로나 양생(養生)상 필요불가결(必要不可缺)한 요소(要素)가 되니 세상(世上)을 옳고 바르게 살아가려면 전문적(專門的)인 수행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수양의 길을 밟아가야만 한다. 종교신앙(宗敎信仰)의 목표(目標)가 어디 있는가?
수양은 누구나 말하기는 좋아하나 어떻게 하는가를 아는 이는 드물고 더구나 이를 올바르게 지도(指導)하는 서적(書籍)이라고는 거의 찾을 수도 없음이 현실(現實)이라. 혹 뜻있는 사람이 수도생활(修道生活)을 하다가도 그 방법(方法)을 알지 못하여 중도(中途)에서 얻은 지식(知識)과 사부(師傅)의 구전심수(口傳心授)하신 방법과 종불선(倧佛仙) 각 교문(敎門)의 비설(秘說)들을 요약참고(要約參考)하여 이 비록을 엮음은 오로지 후래동호(後來同好)의 방향(方向)을 지시(指示)코자 함인 바 이에 뜻하는 이는 반드시 먼저 마음을 바로 하여 경신(敬神)의 성의(誠意)를 온축(蘊蓄)하고 부선멸악(扶善滅惡)의 덕업(德業)을 쌓음으로서 일신(一身)을 청정온건(淸靜穩健)히 안정(安定)한 후(後)에 시작할 것이오, 만일 확고(確固)한 신념(信念)이 없이 호기심(好奇心)에서 착수(着手)한다면 성공(成功)은 고사(姑捨)하고 심력(心力)만 소모(消耗)하고 심지어는 신(神)의 주책(誅責)을 면(免)치 못할 것이니 이에 깊이 생각하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회고(回顧)하건대 본인(本人)은 왕석(往昔) 무진세(戊辰歲)에 대종교(大倧敎)에 봉교(奉敎)한 후로 지조금(止調禁) 삼법(三法)을 알고 수행할 뜻은 간절(懇切)하였으나 번거로운 생활(生活)에 겨를을 얻지 못하다가 기묘년(己卯年)에 일체(一切)의 공직(公職)을 사(辭)하고 만주동경성(滿洲東京城)의 대종교 총본사로 단애종사(檀崖宗師)를 배방(拜訪)하고 친히 지도하심을 받으며 삼법(三法)을 수행한지 어언 20여년! 그 동안에 얻은 바 정신상(精神上) 육체상(肉體上)의 쾌락(快樂)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리요. 오직 삼법의 황홀(恍惚)함을 이를 뿐이다.
본인의 수행이 오로지 단애종사의 지도(指導)하심에 힘입었기에 삼설(三說) 이외에 종사의《수진삼법회통(修眞三法會通)》을 이에 번역문(번譯文)으로 싣고 또 백포종사의《구변원방도(九變圓方圖)》를 역해(譯解)하여 삼일진리(三一眞理)의 이해에 이바지하고 삼묘운회(三妙運會)를 수리(數理)와 경험(經驗)에서 이에 성문수록(成文蒐錄)한 바 이는 오로지 대방가(大方家)의 척정(斥正)을 기다릴 뿐이다.
경자(庚子) 5월 단양지일(端陽之日) 단암(檀菴) 이용태(李容兌) 근식(謹識)
--------------------------------------------------------------------------------
제1장 지감설(止感說)
제1절 정좌(靜坐)
맑고 밝고 깨끗한 방을 가리어 모든 먼지를 깨끗이 떨어 버리고 목욕재계한 뒤 북쪽 벽을 향하여 앉을 자리를 정하여 잡아라. 먼저 작은 상 하나를 앉을 자리 앞에 놓고 그 위에 흰 종이를 펴고 그 위에 천수[天水:밤중 자정에 나오는 물] 한 그릇을 받들어 놓되 날마다 한번씩 인시(寅時)에 갈도록 하고 그 앞에 향로(香爐)와 향합(香盒)과 초를 갖추어 놓아라.
먼저 술과 담배와 고기와 생선과 파와 마늘과 고추와 생강 등 모든 냄새가 독하고 자극성 있는 음식을 끊고 성신일관(誠信一貫)하려는 마음의 맹세를 한 후에 날마다 새벽에 촛불을 켜고 자단향을 피운 뒤에〈각사〉{신령재상(神靈在上) 천시천청(天視天聽) 생아활아(生我活我) 만만세강충(萬萬世降衷)}를 세 번 외우고 한배검께 정성껏 마음속으로 원도치성(願禱致誠)한 다음에 무릎을 가로 꿇어 앉되 왼발이 오른쪽 종아리 위에 놓이도록 두 다리를 마주 걸치게 하고 두 손은 두 다리가 걸쳐진 종아리 위에 얹되 왼손의 엄지손가락이 오른손바닥에 들도록 싸서 마주잡아 가볍게 얹고 허리를 펴서 머리로부터 등과 허리에 굽음이 없도록 곧게 하여 앉아라.
정좌하는 시간은 처음에는 15분, 3일이 지나면 30분으로, 15일부터는 1시간으로 하고 공부가 차츰 숙달(熟達)이 되면 더 늘이되 두 시간을 넘게 하지 말고 정좌하는 횟수는 처음에는 아침과 저녁의 두 번으로 시작하되 익숙해졌다고 하더라도 6회를 넘지 않도록 할지니 과도하면 오래 계속할 수도 없거니와 욕심이 지나치면 도리어 성공을 늦추는 결과를 초래하니 첫째로 욕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간 마음을 가질 것이 중요하다.
방의 사방 벽에는 일·선·광·성(一·善·光·成)의 넉자를 각각 정하게 써서 방위를 맞추어 바르게 붙이고 앉은 자리 밑에는 백마화진(百魔化盡) 넉자를 써서 깔고 앉으며 남쪽 벽 곧 앉은 뒷벽에는 진리도(眞理圖)를 걸고 북쪽 벽 위에는 천진(天眞) 곧 한배검의 영진(影眞)을 봉안하되 천진을 얻지 못할 때에는 신위(神位: 三神一體上帝大皇祖神位)를 봉안하고 오직 한배검께서 나려와 계시다는 마음으로 삼가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고개 숙여 정성을 다하되 매일 묘시(卯時:오전 6시경)와 오시(午時:오후 12시경)와 유시(酉時:오후 6시경)에 세 번씩 매일 향불을 피우고 네 번 절하여 참알례(參謁禮)를 올리라.
음식은 반드시 하루 두 번씩 때맞추어 채소담식(菜蔬淡食)을 주로 하고 수면(睡眠)은 차츰 그 시간을 줄여 가서 불면의 지경에 도달하게 하되 7일 이내에는 참고 견디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나 7일이 지나면 절로 잠을 자지 아니하는 묘법이 있을 것이며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등불을 끄지 말아라.
제2절 수령(修靈)
수령이라 함은 성품을 닦음이니 느낌을 그침에 있어 가장 요긴한 핵심이 되니 무사무려(無思無慮)를 원칙으로 하되 눈을 감아 보지 말고(閉目不視) 귀는 들여 듣지 말고(收耳不聽) 모든 사특한 생각을 끊어 없애고 모든 사물을 잊도록 하여 인정(人情)과 물욕(物慾)에 관련되는 기쁘고 두렵고 슬프고 성내고 욕심 내고 싫어하는 등의 감정(喜懼哀怒貪厭)을 마음에 두지 말고 온 정신을 현궁(玄宮:두 눈 사이)에 기울여서 마음속으로 보면 심지(心地)가 점점 맑아지고 욕심불[慾火]이 차츰 줄고 마침내는 사라져 없어지게 되는데 이때에 육체적으로는 경련증(痙攣症)과 근골통(筋骨痛)과 갈증(渴症)과 담증(痰症) 등의 증세가 일어나니 정신적으로는 사념(邪念)과 가슴이 답답함과 오한(惡寒)과 번열(煩熱)과 지나간 일의 생각과 허영에 뜬 생각들이 겹치어 일어나니 이를 신마(身魔)와 의마(意魔)라고 하는데 마음을 가다듬어 굳게 참고 억제하여 이 고비를 극복하면 순간찰나에 모든 마귀가 소멸되고 심경(心境)이 명랑(明朗)하여 7일 또는 14일, 21일이 지나면 영대(靈臺), 곧 마음의 먼지가 차츰 사라지는 신비함을 얻게 되어 한 점의 티끌도 남지 아니하고 사라져 없어지는 지경에 다다르면 자연히 심령(心靈)이 열리어져서 무계(無界)의 세계를 보게 될 것이다.
영(靈)이라고 하는 실체는 무엇을 가리킴인가? 곧 신의 작용을 말함이니 맑고 밝아서 유리와 같으며 안과 밖이 없이 투명(透明)하여 신속(迅速)함이 전광(電光)과 같아서 멀고 가까움이 없이 왕래하는 고동이라 신이 부여(賦與)된 물체에는 모두 구비하였으나 기운품수[氣品]의 맑고 흐림[淸濁]과 몸바탕[體質]의 두텁고 얇음[厚薄]에 따라서 본래의 우열(優劣)이 있으므로 수양을 잘하면 본래의 능력을 발휘하여 밝고 두텁게 되며 인정과 물욕이 가리면 흐리고 얇아져서 본래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니 모든 학문(學問)의 근본이 이 영성(靈性)을 닦고 닦지 아니함에 비롯함이다.
제3절 현상(顯相)
심령(心靈)이 열리면 모든 물체의 형상이 나타나게 된다. 혹은 검고 혹은 붉으며 혹은 희고 혹은 누른 광선도 보이고 혹은 밝고 혹은 어두우며 혹은 산이 되고 혹은 물이 되어 세계가 잠깐 나타났다가 잠깐 없어지며 천태만상의 이상한 형상이 내왕하면서 마음의 눈[心眼]을 현혹(眩惑)하게 한다. 이 지경을 허령(虛靈)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이 모든 형상이 나타남을 기이(奇異)하게 생각하여 만약에 심신(心神)이 이에 집착(執着)이 되면 느낌을 그치는[止感] 대도(大道)에는 이르지 못하고 혹은 맞고 혹은 맞지 못하여 잘 해야 소성(小成)을 맛볼 뿐이다.
이와 같이 형상의 나타남[顯相]을 예사로이 보고 성품을 통함[性通]을 목적으로 한결같이 지극한 정성으로 쉬지 말고 공부를 이어 가면 모든 형상이 사라지며 정신은 굳게 다져지고 심령(心靈)이 명랑하여 비치지 아니하는 물건이 없는 지경에 도달한다.
지난 옛날로 거슬러 살펴보면 옛 사람들이 조그마한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원하되 어떤 이는 차력술(借力術)을 어떤 이는 의술(醫術)을 또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아는 점술(占術)을 혹은 변화(變化)의 술법(術法) 등을 찾아 공부를 수행(修行)하여 혹은 구하고 원하는 바를 성취한 이도 있고 혹은 악덕비행(惡德非行)의 탈선으로 한얼의 주벌(誅罰)을 받은 이도 있고 또는 성력(誠力)의 부족으로 중도에서 폐한 사람도 많았으니 모름지기 앞으로 이에 뜻을 둔 사람들은 근신(謹愼)과 지성(至誠)과 인내(忍耐)로서 확고한 신념(信念)을 가지고 닦아 나갈지니라.
이 때에 더욱 삼가고 주의할 것은 사물(事物)의 마장(魔障)이 이르기 쉬운 것이니 이것은 수행하는 사람의 근기(根基)의 경중(輕重)과 강약(强弱)을 시험하여 참된 공부의 길을 닦아 나갈 문을 열어줌이니라. 때로는 부모와 처자식이 죽었다는 기별이 이르기도 하고 천선현녀(天仙玄女)나 묘령(妙齡)의 색마(色魔)가 이르거나 사갈호표(蛇蝎虎豹)와 이매망량(魑魅魍魎) 등의 사나운 짐승과 도깨비가 덮치거나 사귀흉도(邪鬼凶盜)가 죽이려고 덤벼드는 등 헛것이 나타나 장난질함에 동요(動搖)해서는 아니 된다.
만약 조금이라도 신념이 풀어지고 심신에 동요가 생기면 지난날에 쌓은 공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며 동요된 후에 다시 마음을 잡고 계속하여 한다면 도리어 재앙의 벌을 받게 되나니 매우 조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마물(魔物)이 나타나 시험하더라도 반석(盤石)과 같이 굳고 정대(正大)한 신념과 지성으로서 개의치 말고 냉정(冷靜)하고 엄숙한 태도를 굳게 가지고 쉬지 말고 한결같은 정성으로 닦아 나아가면 모든 만물은 순식간의 찰나에 가라앉고 공부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되리라.
제4절 통지(通知)
통지라 함은 알린다는 말이니 형상이 나타나는 현상(顯相)의 과정을 지나 더욱 공부하여 오래 수행하여 깊어 가면 통지(通知=頓悟)의 길이 열리어 비로소 신비가 나타남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물을 상세하게 통지하게 된다.
수행의 경험과 통지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허황(虛荒)한 말이라고 꾸짖고 미신(迷信)으로 돌려서 코웃음도 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혹시 그렇게 될 수가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할 것도 헤아리면서 이 글을 쓰는 바이나 수행에 뜻을 둔 이상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태도는 절대로 금물(禁物)이니 무엇보다도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하고 만약 신념이 서지 아니한 사람은 절대로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수도(修道)란 어디까지나 자신의 정신을 개발함이요,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님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물 속이 깊고 얕음은 강가에 앉아서 깊으니 얕으니 단언하기보다 배를 타고 강심(江心)에 들어가서 실제로 측량해 보는 것이 확실할 것이오, 동산(東山)에 오를 때는 눈앞에는 노나라(魯國)만 보이므로 한 나라의 영토가 협소(狹小)함을 깨닫게 되고 태산(泰山)에 오를 때는 시야가 넓어져서 천하도 오히려 작음을 알게 됨은 옛날 성현(聖賢)도 실제 경험에서 확실하게 말한 바 있는데 오직 과학(科學)만을 연구한 사람은 철학(哲學)을 눈에 보이지 않으니 허무한 것이라고 멸시(蔑視)하며 그와는 반대로 철학만을 연구한 사람은 천박하다고 오히려 과학을 무시(無視)하는 것을 흔히 보는 바, 이는 모두가 한쪽만을 아는 아집(我執)에서 오는 일인데 철학이나 과학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학문의 근본이 되는 신학(神學)은 공부할 생각조차 아니하고 부질없이 부인(否認)부터 앞세운다고 하면 이는 열대지방(熱帶地方)에 사는 사람이 한대지방(寒帶地方)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한대지방에 사는 사람이 열대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서로가 의아해하면서 한대와 열대의 근본적 차이가 태양(太陽)과 멀고 가까움에 있음을 부인함과 같은 행동이라. 만약에 의문되는 바가 있다고 하면 한 달의 세월을 허송할 각오로 한 차례 실제를 시험한다면 참된 종학(倧學=天神學)의 첫 단계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말하였거니와 만일 처음부터 반신반의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나 이 세상에 살아오는 동안에 착한 일은 적고 악한 일을 많이 지은 사람은 비록 10년의 세월을 보낸다고 할지라도 성공은 고사하고 진경(眞境)의 첫 단계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오, 심하면 재앙의 신벌을 받게 될 것이다.
유학(儒學)에서 몸을 닦아 성품을 거느림[修身率性]으로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확실히 함[格物致知]에 이름도 정성 여하에 달렸고, 불법(佛法)에서 마음을 밝혀 성품을 봄[明心見性]으로서 차츰 닦고 문득 깨달음[漸修頓悟]에 이름도 정성 여하에 달렸고, 선도(仙道)에서 기운을 길러 성품을 단련함[養氣煉性]으로서 신선으로 바뀌어 하늘에 오름[羽化飛昇]도 정성 여하에 있으며, 종문(倧門)에서 성품을 트고 공적을 마침[性通功完]으로서 영원토록 쾌락을 누림[永得快樂]도 정성 여하에 달렸으니 오직 정성은 온갖 이치를 트는 원동력(原動力)이 되고 믿음은 온갖 일을 행하는 유일(唯一)한 법칙이 되나니, 이 정성[誠]과 믿음[信]을 한결같이 쌓아 나가면 마침내는 심령(心靈)을 통하여 앎을 얻는 지경에 이르게 되리라.
제5절 망아(忘我)
나[我]는 육체의 나[肉體我]와 정신의 나[精神我]의 두 가지가 있는데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정신의 나에 의하여 육체의 내가 있게 됨을 알지 못하고 육체의 내가 있음으로 해서 정신의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릇되게 인식하는 이가 많은데 이것은 우리 종도(倧道)가 아직 널리 퍼지지 못하였으므로 삼일(三一)의 진리(眞理)를 알지 못하고 삼일(三一)진리를 모르는 까닭으로 신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살아오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운데도 모든 학문은 실제(實際)보다 이론(理論)이 많고 이론이 많음에 따라서 이상(理想)에 편중(偏重)하여서 후인(後人)들이 선각자(先覺者)의 체험에 의한 참된 학문을 배우지 못한 이들이 많으므로 고루(固陋)하게 제 나름대로의 일방적 학설(學說)을 내세우게 됨에 따라 공리공론(空理空論)적인 허설(虛說)에 귀착(歸着)되는 폐단이 많고 그에 따라서 보편성(普遍性)의 결함을 수반하게 되므로 모든 학설이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식의 나쁜 배척관념이 생기고 뿌리 박혀 공격(攻擊)과 말살(抹殺)의 나쁜 버릇에 의하여 학파(學派)의 성쇠(盛衰)가 순환(循環)하게 됨은 유감스러운 일로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만물의 있고 없음을 주재(主宰)함을 신(神)이요, 신의 이치를 발현(發現)하고 신의 공업(功業)을 대신 실행함은 사람이다. 신의 실체(實體)는 변함이 없는 참된 허무(虛無)이되 덕·혜·력(德·慧·力)의 삼대만은 온전히 가지고 있으며 사람의 실체는 변천(變遷)이 계속하는 존재로서 감·식·촉(感·息·觸)으로 달리어 떨어지고 만다.
허무를 가리켜서 어찌 존재함으로 인증하느냐 하면 있던 것이 없음에로 돌아감을 똑바로 살펴보면 있던 전신(前身)이 없음이오, 없던 전신이 있음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없었다고 있던 것을 부인한다고 하면 지나간 옛날의 것은 모두가 빈 세계일 뿐이요, 있었다고 해서 없었던 것을 부인한다면 현재만이 변함없이 존속(存續)할 것이다. 빈 데[虛]서 실제[實]가 나타나고 없음[無]에서 있음[有]이 발생하나니 실(實)과 유(有)의 모체(母體)는 허무(虛無)임이 확실하게 판명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을 허가 내포(內包)하고 유를 무가 생산함이 증명하고 있다.
만물을 실제하게 하며 있게 하는 것과 또 비게 하고 없게 하는 것은 곧 신의 덕·혜·력으로 조화(造化)함이라. 이에서 망아(忘我)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나를 잊어버리고 정신의 나를 단결(團結)함이니 잊는다는 것[忘]은 성품[性]의 분얼작용(分蘖作用)인 곧 마음[心]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육체의 유무관념(有無觀念)이 없는 지경에 도달하여 허울[形]이 정신[神]에 의존하였는지 정신이 허울에 의존하였는가를 초월하여 허울은 허울대로[形自形] 정신은 정신대[神自神]로 분리(分離)함을 가리켜 말함인데 정신이 허울에서 오래 떠나면 죽음[死]이 되나 호흡작용(呼吸作用)이 기혈(氣血)의 순환(循環)에 따라 존속할 때까지 허울과 정신의 합작공부[形神合作工夫]를 하면 죽음에까지 이르지 아니하고 육체의 나도 삶을 회복하게 된다.
종(倧)이라 함은 한얼사람 곧 신인(神人)이란 뜻 이외에 능히 신도 되고 사람도 됨을 가리킴인데 허울을 떠난 신은 신이고 사람이 아니며 허울을 합한 신은 신이 아니고 사람이다. 바꾸어 말하면 종이라 함은 신과 사람을 아울러 일컫는 명사(名詞)요 종도(倧道)라 함은 능히 신도 되고 사람도 되는 이치와 방법을 가리켜 말함이다. 불교(佛敎)에서 성불(成佛)한다고 하는 것은 곧 육체의 삶을 존속하려면 모든 고뇌(苦惱)가 따라 있게 되므로 허울과 정신의 분리작용[形神分離作用]을 영구히 하여 허울을 버리는 것을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까닭에 사람 아닌 사람[弗人]을 이룬다는 뜻이다.
제6절 원각(圓覺)
나를 잊는 현묘한 지경[忘我妙境]에 이르면 허울은 일단(一團)의 원(圓)으로 남게 되어 체내(體內)에는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진공(眞空)만을 이루게 되고, 정신은 일단의 원으로 결정(結晶)되어 밝은 거울과 같이 환하게 비치고 그친 물과 같고 고요히 맑아[明鏡止水] 고정(固定)함을 이루어 보고 듣고 알고 행하는 견문지행(見聞知行)의 고동[神機]을 발동하여 분합변환(分合變幻)의 조화(造化)를 행하나니 세상의 속된 사람들의 육안(肉眼)으로는 이를 불가사의(不可思議)라 일컫고, 불교에서는 견성(見性)이라 하고, 선가에서는 성단(成丹)이라 하고, 유학에서는 명덕(明德)이라 일컬어 각각 붙인 이름이 있는데 네모도 없고 세뿔도 없는[無方無角] 원(圓)을 깨달음은, 방법은 비록 달라도 다같은 성공(成功)에로 귀일(歸一)하는 한 이치[一理]요 진리(眞理)가 각각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의 고동[神機]이 크게 발동하면 보고 듣고 알고 행함을 마음대로 하여 위나 아래나 멀거나 가깝거나 겉이나 속을 막론하고 모든 소리와 행동을 빠짐없이 살펴보고 나뉘고 합하고 변함을 때에 따라 하여 비와 바람과 구름과 우레를 때없이 부리게 되나 사람의 품격(品格)의 수박(粹粕)과 업적(業蹟)의 선악(善惡)에 따라서 문득 깨달아 대각이 되고[頓悟大覺] 차츰 닦아서 작게 깨닫는[漸修小悟] 것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오직 하나요 둘이 없는[唯一無二] 정성과 믿음으로 수도(修道)한다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르지 못할 이치가 없는 것이다.
정기를 보정(保精)함으로써 목숨을 알고[知命], 목숨을 앎으로써 성품을 트게[通性]되나니 삼법(三法)이 서로 불가분(不可分)의 원리(原理)로 관련되어 있으므로 상품(上品)인 사람은 학문으로 들어가서 착함을 돌이키는(返眞) 전능(全能)을 이루나 뭇사람은 금촉문(禁觸門)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정기를 보전하지 못하고 또 조식문(調息門)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목숨을 알지 못하고 지감문(止感門)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성품을 트지 못하므로 이 세문을 차례로 거쳐서야 비로소 완전한 공효(功效)를 얻게 되는 것이다.
지감문에서는 없게는 할지언정 있게 하기는 불가능하고, 조식문에서는 있게는 할지언정 없게 할 수는 없고 금촉문에서는 변하게는 할지언정 화(化)하게는 하지 못하나니 불가분의 원리에 순종하여 삼법을 아울러 수행하면 변화(變化)의 만전(萬全)을 이루게 되리라.
--------------------------------------------------------------------------------
제2장 조식법(調息法)
제1절 총론
숨쉼을 고루어 연단(煉丹)의 도를 닦는 법이 지극히 간단하고 쉬우나 예로부터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 처음 시작하는 방법을 몰라서 오래 살기를 원하다가 도리어 중도에 폐하거나 혹은 일찍 죽어 가는 사람이 많았음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개 조식(調息)을 함에 있어 그 첫째 공부는 자기의 숨기운을 닫음[閉氣]에 있을 뿐인데 옛 사람들이 이 방법을 숨기고 입 밖에 내지 않았으므로 연단(煉丹)하는 것이 자신의 숨기운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이를 함부로 금석약품(金石藥品)에서 구하다가 실패를 가져 오고 말았다.
만약 숨기운을 닫는[閉氣] 공부를 하고자 하면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두 다리를 겹쳐 단정히 앉아서 눈을 감은 채 내려서 아래를 보되 눈은 코끝을 빗겨 보고 코끝은 배꼽을 향하여 들숨을 천천히 길게 들이쉬고 날숨은 가늘게 내쉬되 숨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도록 코로만 숨을 쉬고 정신과 기운으로 하여금 항상 배꼽 아래 한치 세푼 되는 단전(丹田=氣海) 가운데 머물게 하되 숨기운을 꼭 닫고 내쉬지 아니할 것은 없고 참기 어려우면 오줌을 눌 때와 같이 힘주어 내리면 자연히 숨기운이 내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처음에는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혹은 찌르는 듯이 아프기도 하고 때로는 골골하는 소리가 나서 두려운 생각도 나니 이것들은 모두 좋은 조짐이다. 위 부분의 풍사(風師=風氣)가 바른 숨기운[正氣]에 쫓겨 공활(空闊)한 곳으로 흘러 들어가다가 전송(傳送)할 길을 찾으면 기운이 편안하고 질병(疾病)은 저절로 사라져서(소화불량·위장병·심화병·폐병·신장병·간장병·담증 등) 질병을 예방함은 물론 낫게도 하여 한 몸이 건강함을 얻으니 이것은 공부하는 초기의 체험(體驗)하는 바로서 항상 가슴앓이와 배앓이 곧 심장병·폐병·위장병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더욱 힘쓰고 행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심묘한 효험을 볼 것이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쉬임없이 닦아 나가 공부가 조금 숙련(熟練)되어 이른바 현빈(玄牝)의 한 구멍이 열리면 마침내 모든 구멍이 열리게 되니 이를 회도(會度)라 한다. 조식수도(調息修道)의 근본 목표가 이 한 구멍을 얻음에 있으니 이로써 태식(胎息)을 하고 주천화후(周天火候)도 행하게 되고 단태(丹胎)도 이루어지니 모든 것이 이에서 비롯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정성을 다하여 한달 동안만 공부를 계속하면 한 몸에 젖어든 모든 질병은 스스로 소멸(消滅)할 조짐이 생기게 되고 한달 이상이 되면 오래면 오랠수록 그에 해당한 공효(功效)를 얻게 될 것이다.
대개 사람의 육체상의 질병은 풍사(風邪=風氣)가 혈액(血液) 가운데 들어가 잠복(潛伏)해 있다가 함부로 치달리어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질병이 위중해진 뒤에야 의사를 찾고 약을 먹게 되나 때는 이미 늦었으니 어찌 조식수도(調息修道)에 정성을 다하지 않을 것이랴. 의원은 병이 난 뒤에야 병을 고치게 되나 조식수도하는 사람은 병이 나기 이전에 고치고 낫게 하는 것이다.
정기(正氣)와 풍사(風邪)는 마치 얼음과 숯이 서로 용납하지 않는 것과 같아서 정기가 체내(體內)에 가득 차면 풍사는 침범하지 못하고 달아나게 되어 신체의 모든 혈맥(血脈)은 자연히 순조롭게 유통하니 질병이 어디로부터 발생할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이 숨쉼을 고루 하는 공부를 지성(至誠)으로 한결같이 수행하여 차츰 숙련(熟練)하게 되면 반드시 연명강녕(延命康寧)에 이름을 기약할 것이오, 그 정수(精粹)에 이르지 못하고 조박(糟粕)만 얻는다고 하더라도 몸은 회복되어 무병건강(無病健康)에 이를 것이니 살기를 좋아하는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이 아닌가.
본인이 항상 이로서 동호첨체(同好僉棣)에게 권면해 왔으니 이 또한 서로가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본인의 참람함을 용서하기를 바라나 무엇보다 뜻을 세움은 빠를수록 좋은 결과를 가져오되 정신과 기운이 늙어서 여려진 뒤에는 비록 백배의 공을 드려도 상선(上仙)의 반열(班列)에는 참례하지 못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제2절 폐기(閉氣)
폐기(閉氣)라 함은 복기(伏氣)라고도 하는데 곧 들이쉰 숨을 단전[丹田=기해라고도 하니 곧 배꼽 아래 한치 세푼되는 곳]에 누적(累積)함을 이름이니 눈으로서 깃발을 삼아서 숨기운이 오르고 내리고 왼쪽으로 또 오른쪽으로 앞으로 하고 뒤로 함을 생각의 가는 바와 같이 함이니 기운을 올리고자 하면 시선(視線)을 올리고 기운을 내리고자 하면 시선을 내린다.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을 떠서 시선을 올리면 왼쪽 기운이 먼저 오르고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을 떠서 시선을 올리면 오른쪽 기운이 먼저 올라서 아래로는 임맥(任脈)의 앞에까지 이르고 위로는 독맥(督脈)의 뒤에까지 이르러서 정신이 가면 기운도 가고 정신이 머물면 기운도 머물러서 기운의 가는 바에 기운이 그치지 않아 눈으로서 군령(軍令)을 삼지 않음이 없으니 마치 군중(軍中)에서 군기(軍旗)를 사용함과 같다. 또 시선을 올리고자 하면 눈을 뜰 필요가 없이 다만 눈동자만을 굴리면 마찬가지가 되는데 세상 사람들이 모두 위는 왕성하나 아래는 허(虛)하여 매양 이 기운의 오름을 걱정하나 오르고 내림이 고르지 못하므로 무엇보다도 이 기운이 무기토(戊己土)의 중궁(中宮)에 내리도록 힘써 비위로 하여금 화창(和暢)하도록 하기에 힘써 혈맥(血脈)이 두루 고르게 흐르도록 할 뿐이다. 그리하여 혈맥이 고르게 두루 흐르게 하여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이 모두 통하면 연명(延命)함을 기약할 것이니 어찌 이를 실행하지 아니할 것이랴.
그러므로 연단(煉丹) 공부를 하는 길은 반드시 숨기운을 누적(累積)하는 폐기(閉氣)로부터 시작하되 얼굴에 화한 빛[和色]을 띠고 눈을 감고 아래를 보며 반드시 정신과 기운으로 하여금 서로 배꼽 아래의 단전(丹田) 가운데 머물게 하면 위쪽의 풍사(風邪)는 구름처럼 모이고 안개처럼 쏟아져 내려 처음에는 가슴이 아프면서 가슴과 배로 치달려 전송(傳送)할 길을 찾은 뒤에라야 몸이 편안하여지고 한 몸의 모든 혈맥이 두루 퍼져서 마음이 화하롭게 되면 눈앞에는 흰 눈이 마치 쏟아져 내려 나의 허울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허울이 또한 내가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오직 아득하고 그윽이 황홀하여 태극(太極)이 갈리기 이전과 같으니 이것이 이른바 참다운 지경이오, 참다운 길이오, 이 밖의 모든 것은 모두 사설(邪說)이오, 망령된 행동일 뿐이라고 하겠다.
제3절 태식(胎息)
태식(胎息)이라 함은 사람의 태(胎)가 처음 부모의 복기(伏氣) 가운데서 맺혀지고 숨기운이 태식의 가운데에서 생기니 정신이 머무르고 숨기운이 들면 남[生]이라 이르고 정신이 이탈(離脫)하고 숨기운이 끊어져서 허울을 떠나면 죽음[死]이라 이르니 정신과 숨기운이 서로 머물러 있어 정신이 행하면 숨기운이 행하고 정신이 머무르면 숨기운도 머무르니 정신과 숨기운이 서로 떠나지 말도록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 불로장생하는 참다운 길이다. 다시 말하면 모태(母胎) 속에서 코로써 호흡(呼吸)하지 않고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이 태(胎)를 통하여 호흡함과 같이 환원(還元)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폐기(閉氣)의 첫 단계적인 공부가 차츰 숙련되고 정신과 숨기운이 점차 자리를 잡으면 이로부터 차츰 아랫배의 불두덩에 이르도록 숨기운을 내리도록 하여 정밀하게 이 숨기운이 좇아 나온 곳을 살피면서 들고 남을 따르되 한번 들이쉬고 한번 내쉬는 숨기운으로 하여금 항상 그 가운데 있게 하되(이것이 이른바 현빈의 한 구멍으로서 연단하는 길이 오직 이에 있을 뿐이다) 입이나 코로 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나 얼마간의 숨기운은 항상 입과 코에 머물러 있어 이것이 이른바 모태(母胎) 속에서의 숨쉬는 법으로 귀원복명(歸元復命)하는 방법이다.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모든 질병이 숨쉬는 데로부터 생기고 또 요사(夭死)함도 이를 좇아서 이루어지니 이 귀복(歸復)의 법을 터득하여 정진(精進)하지 않으면 벽곡(辟穀)과 등선(登仙)도 어려울 것이다. 옛사람의 시에도「집이 허물어지면 고치기 쉽고, 마른 잎은 살아나기 어렵지 아니하고, 다만 귀원복명의 이치를 알면 사람에겐 보배가 산같이 쌓임과 같다」고 하였으므로 능히 태식(胎息)을 한 뒤에라야 이 숨기운이 부드럽고 화해지고 화한 뒤에 정해서 호흡(呼吸)이 없는 가운데 숨쉬는 지경에 이르니 황정경에 말한 숨기운이 자리잡으면 호흡이 없다고 함이 곧 이것이다. 옛날에 갈선옹(葛仙翁)이란 선인(仙人)은 매양 더운 여름철을 당하면 깊은 연못에 들어가 열흘을 그 속에 머물러 있다가 나왔으니 그것은 태식(胎息)과 폐기(閉氣)를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니 이것이 곧 조식연단(調息煉丹)하는 데 있어 둘째 단계의 공부가 되니 더욱 정성을 다하여 닦아 나갈 것이다.
제4절 주천화후(周天火候)
불[火]에는 안팎과 빠름이 있어 처음에는 기혈이 허(虛)함으로 폐기(閉氣)한 지 오래지 아니하면 화기(火氣)가 흩어지기 쉬우므로 배꼽 언저리에서 오래도록 흩어지지 아니하면 되는데 주천화후(周天火候)란 곧 열기(熱氣)를 온몸에 퍼지게 함을 말한다. 정신과 숨기운이 배꼽 언저리에 항상 머물러 있으면 그 가운데 따뜻한 기운이 나오고 이 때에 혈기(血氣)도 점차로 차[實]게 되고 화기(火氣)도 또한 더디게 되고 또 불에는 문화(文火)와 무화(武火)가 있는데 문화는 자시(子時) 이후요, 무화는 오시(午時) 후인 바 나가고 물러가는 이치를 살피지 아니할 수 없다.
심신(心身)이 고요히 자리잡은 후에 화기를 이치에 따라 들이면 방광(膀胱)이 불처럼 뜨겁고 두 쪽 불알은 뜨겁게 화끈거리되 허리로부터 윗몸은 예사 때와 마찬가지로 시원하다. 만약 고요히 자리잡지 못한 화기를 빠르게 들이면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서 도리어 몸에 큰 해로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조심할 것이다. 이 때에 힘주어 불어 쉬면 따뜻한 기운이 가는 데로부터 차차 드러나 아래로부터 위로 이르는데 이는 더운 기운이 이르는 바에 점점 널리 열려서 위로 이름이라 마치 꽃이 조금씩 피는 것과 같으므로 화지(華池)에서 연꽃이 피는 것이라고 한다. 보수(保守)하기를 차차 오래하면 열리고 점점 왕성하여져서 신수(神水)는 거슬러 오르고 감진(甘津:예천 또는 옥장·금액이라고도 함)이 입안에 생기고 뱃속은 크게 열리어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게 되고 이내 열기가 온몸에 퍼지니 이것이 이른바 주천화후(周天火候)라 진실로 이치대로 화기(火氣=熱氣)를 들인다고 하면 결코 참고 견디지 못할 지경에는 이르지 아니한다.
뇌(腦)는 수해(髓海)가 되니 곧 상단전(上丹田)으로 기운을 저장하는 곳이오, 마음은 강궁(絳宮)이 되니 곧 중단전(中丹田)으로 정신을 모으는 곳이오, 배꼽밑 한치 세푼 되는 곳은 하단전(下丹田)이 되니 정신과 기운이 항상 이곳에 머물도록 하는 곳으로 정기를 저장하는 곳이 된다. 상단전은 니환궁(泥丸宮)이라고도 하는데 하단전과 상단전이 부르면 대답할 듯 서로 대하니 이른바 옥로(玉爐=丹田)의 불은 따뜻하고 정수리[頂上=泥丸所存]에는 자하(紫霞)가 나른다는 것이다. 위와 아래에서 물대듯 불어넣으면 마치 고리에 끝이 없음과 같아서 진실로 이 화기 곧 화후(火候)로 하여금 따뜻하게 기름을 잃지 아니하면 공부는 절로 성공하여 맑고 밝은 기운이 위의 니환궁(泥丸宮)에 맺힌다. 이를 선도(仙道)에서는 현주(玄珠)라 하고, 불교에서는 사리(舍利)라고 하는데 반드시 그리되는 것이나 성도(成道)하느냐 못하느냐는 오직 공부하는 사람의 정성이 지극한가 아닌가에 달려 있을 뿐이고 무엇보다 조달(早達)하는 것이 가장 귀중한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꼭 지킬 것은 하루 중에 자시(子時=밤 12시)와 묘시(卯時=오전 6시)와 오시(午時=낮 12시), 유시(酉時=오후 6시)의 네 번은 반드시 화기를 들게 하여 따뜻한 기운으로 하여금 잠시도 쉬지 아니하도록 화기를 들이되 항상 밤낮으로 한결같이 하면 열 달이 지난 뒤에 도태(道胎)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불로 약(藥)을 단련(鍛鍊)하여 단도(丹道)를 이룬다고 하는 것이 다름이 아니오, 정신으로 기운을 막음으로서 기운을 허울에 머무르게 함이다. 수도하는 방술(方術)을 안다고 절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니오, 방술은 알기 쉬우나 도(道)는 만나기 어렵고 비록 도를 만났다고 하더라도 전일(專一)하게 실행하지 아니하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수행은 하였어도 마침내는 성공하는 사람이 극히 적은 바, 수도에 있어 가장 귀중한 것은 정성이니 도와 방술을 굳게 믿고 한결같이 정성껏 닦아 천궁(天宮)에 올라 비길 데 없는 쾌락(快樂)을 누리지 아니할 것인가?
황정경(黃庭經)에 말하되,「사람들은 모두 오곡(五穀)의 정기를 배불리 먹고 살아가나 나는 홀로 음양(陰陽)의 기운을 먹고 산다」고 하였으니 벽곡(벽穀)도 오직 태식(胎息)에서 말미암아 나고 벽곡은 음양의 기운에서 이르니 땅의 문은 닫히고 하늘의 문이 열리는데 어찌 신선으로 오르지 못할 것인가?
이제 폐기(閉氣)와 태식(胎息)과 주천화후(周天火候)의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였으나 이것은 오늘에 한 가지를 행하고 내일에 또 한 가지를 행하는 것이 아니오, 그 수행은 오로지 폐기하는 가운데 있고 다만 수도의 깊고 얕음에 따라 높고 낮은 등급과 공효(功效)의 크고 작음은 있을 것이나 지성만 다하면 변화(變化)하고 날아오르는[飛升] 술법도 이 조식(調息)의 세 가지 방법에 지나지 않음을 깊이 생각할 것이며 이보다 더 자세한 수행법은 먼저 깨달은 사람에게 지도를 받아야만 소기의 공효(功效)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
제3장 금촉법(禁觸法)
제1절 금정욕(禁情慾)
정(情)은 마음에서 갈려짐이고, 욕심(慾)은 정에서 갈림이다. 아무리 성철(聖哲)이라도 정욕(情慾)이 없을 수 없고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품[性心]이 없을 수 없음은 마치 본말(本末)과 모자(母子)와의 관계와 같다. 바꾸어 말하면 근본이 없는 끝이 없으며 어미가 없는 자식이 없는 것이니 근본은 하나이나 그 끝은 천 갈래 만 갈래에 이르고 어미는 하나이나 열 곱이나 되는 아들딸을 낳음과 같이 성품은 참된 한 원[일원(一圓)]이오, 마음은 선악의 두 갈래요, 정은 공과 사곡과 사특[公·私·邪]의 세뿔[三角]이오, 욕심은 소리와 빛과 냄새와 맛과 음탕함과 닿음[聲色臭味淫抵]의 여섯 길의 무수한 각도로 퍼져 나감을 감추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므로 유학에서도 사사로운 마음을 억제하고 예의를 다시 세우는 조목으로서 듣고 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곧 귀와 눈과 입과 몸의 접촉에 있어 예가 아니고 바르지 아니함을 상대하지 말도록 규정하여 놓았다.
금(禁)함은 이목구비(耳目口鼻)의 공능(功能)을 완전히 폐함이 아니라 음탕한 소리와 사특한 빛을 귀와 눈에 접하지 말고 나쁜 냄새와 후한 맛을 입과 코에 들이지 말고 간음과 일함에 있어 난잡하게 하지 말 것이니 이것이 약(藥)을 쓰지 아니하고 스스로 몸의 건강을 얻는 근본방법(根本方法)이며 생명을 위하여 기혈(氣血)을 기르고 정수(精髓)를 보전(保全)하여 하늘이 부여(賦與)한 명한(命限)을 온전하게 하는 법칙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여섯 가지 욕심에 끌리어서 호화롭게 사치를 다함으로서 귀와 눈으로 보고 듣는 욕심을 채우고, 맛좋은 음식으로 위장을 쇠약하게 하고, 음란한 행위로서 기혈(氣血)을 쇠약하게 하니 이것은 살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기를 재촉하기 위해 사는 것이니 어찌 가련하지 아니한가.
삶을 사랑하는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죽은 뒤에 저승의 극락(極樂)과 천당(天堂)을 동경(憧憬)해 바라지 말고 현세(現世)의 몸을 편안하게 하고 입명(立命) 곧 하늘이 명하여 부여한 본 성품을 온전히 하여 이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수진(修眞)의 비법(秘法)을 정성껏 수행할 것이다. 마음을 바로 하고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차례로 나감이 이치에 당연한 길이니 한배검께서 마련하신 윤리(倫理)를 밝히고 제천보본(祭天報本)하신 교화(敎化)를 지키어 착하면 복을 주고 악하면 재앙을 내리는 하늘의 법칙을 잘 지킴으로서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생활을 해 나가려면 먼저 정욕의 불길[情慾火]을 끄기에 힘쓸지어다. 집에 붙은 불은 끄기에 힘쓰면서 마음에 붙은 정욕의 불길은 그대로 내버려 둘 뿐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이를 더해 나가니 참으로 우매(愚昧)함을 탄식하며 가엾음을 견디기 어려운 바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가장 맹렬하고 무서운 욕심불은 재물을 탐내는 것[財利火]과 명예를 탐내는 것[名利火]과 주색을 탐내는 것[酒色火]과 분노하는 것[忿怒火]의 네 가지가 시간을 다투어 마음을 불태우며 목숨을 재촉하니 깊이 반성하고 깨달아 사대욕화(四大慾火)를 끄고 막기에 힘을 다할 것이다.
제2절 독신고(讀神誥)
정욕(情慾)을 금하면 몸이 건강해지고 몸이 건강해지면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방을 가리어 지감하는 방법과 같이 자리잡아 앉되 북쪽 벽에는 천진(天眞)을 모신 뒤 남쪽 벽에는 창호지 한 장 크기의 진리도(眞理圖)를 써 붙이고 향불을 피우고 촛불을 밝힌 다음 정성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서원(誓願)하되 모든 사념(邪念)을 끊어 없애고 서사를 읽고〈각사〉를 염송한 후에 목소리를 가다듬어《삼일신고(三一神誥)》를 낭송(朗誦)하되 하루의 공부하는 과정은 자신의 역량과 능력에 따라서 미리 정하되 총횟수(總回數)를 3만독(三萬讀)이나 5만독(五萬讀)이나 백만독(百萬讀)이나 자기의 뜻에 따라 먼저 정하고 일정(日程)은 쉬임없이 한결같이 계속하여 실천하라.
먼저 몸에는 3백 66알의 대단주(大檀珠)를 걸고 손에는 36알의 소단주(小檀珠)를 쥐고 한 말씀에 한 알을 헤아리며 복동하되 어김이 없도록 하라. 적어도 한번 공부하는 독고수(讀誥數)는 3만회를 내리지 않음이 좋고 오직 경건(敬虔)한 마음과 정성과 믿음을 다하여 소원하는 목표를 다하도록 주의하라. 지성(至誠)이면 하늘이 감응(感應)한다고 함은 수도하는 사람의 격언(格言)이니 성공(成功)에 이르지 못함은 오직 신념이 빈약함과 정성이 미치지 못한 것임을 스스로 깨달을 것이다. 이에 서사(誓辭)와 각사(覺辭)와 신고(神誥)의 원문(原文)과 진리도(眞理圖)를 적어 둔다.*
제3절 성변화(成變化)
변화(變化)라 함은 물체(物體)와 사태(事態)의 변천상태(變遷狀態)로 알 것이나 여기에서 말하는 변화라 함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신비(神秘)로운 변화이니 참[眞]을 닦는 사람은 먼저 이 점에 마음 두어 이해하고 공부할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말에 지성감천(至誠感天)이라고 하는 것은 성력(誠力)을 다하면 하늘의 현묘(玄妙)한 이치가 감응(感應)하여 때아닌 물질도 얻고 뜻밖의 사업도 성취하고 피하지 못할 재액(災厄)도 모면하고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세(事勢)에도 봉착하게 되니, 예를 들면 부모의 병환을 구원하려는 지극한 정성에서 맹종(孟宗)은 눈 속에서 죽순(竹筍)을 얻고, 왕상(王祥)은 얼음 속에 잉어를 얻었고, 솔거(率居)는 한배검(天神)께 원도(願禱)하여 비법(秘法)을 받아 절세(絶世)의 명화가(名畵家)가 되었으며, 흘나사한(訖那沙翰)이 출유(出遊)할 때에 삼척동자(三尺童子)가 아비의 명을 실행하고자 엿새 동안 전력한 결과로 폭우(暴雨)가 몰아쳐서 바위를 운전함이나 천지신령께 기도하여 자손을 낳고 병을 고쳤다는 등 사람의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들이 예로부터 수없이 현실에 나타났음을 옛 문헌이나 전해 오는 고담에서 익히 보고 들어온 바이다.
역경(逆境)에서도 선(善)을 행하면 순경(順境)으로 변화하고, 편안한 곳에서도 악(惡)을 행하면 위험한 데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 하늘의 이치인데 이와 같이 변화하는 근본(根本)은 진선(眞善)이고. 그 작용(作用)은 성신(誠信)인 바 평소에 착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행동을 쌓으면서 오직 하나요, 둘이 없는 정성을 다하고 믿음을 다하면 그 어떤 일을 기원하여 이루지 못할 이치가 있으랴.
부딪힘을 금하는 수행을 정성을 다하여 쉬지 말고 어김없이 실행하므로써 하늘로부터 받은 바 양심(良心)을 지키고 귀와 눈과 입과 코와 정혈(精血)의 남용을 막고 스스로 몸에 지닌 정신과 기운을 건강하게 한 후에 일심(一心)으로《삼일신고》를 정성껏 읽음으로써 큰 고동을 발동할 것을 목적하면 혹은 그 성력(誠力)에 따라서 혹은《신고》를 읽은 횟수에 따라서 차차 좋고 맑은 조짐을 징험하게 된다.
징험(徵驗)과 성공(成功)의 순서와 공효(功效)를 들어 보면 재앙(災殃)과 액운(厄運)이 차츰 사라져 없어지고, 질병(疾病)이 침입하지 못하고, 병장기(兵仗器)를 피하게 되고, 금수(禽獸)를 순복(馴伏)케 하고, 사람과 귀신이 공경하고 두려워 하며, 선관(仙官)과 신장(神將)들이 지도하고 환골탈태(換骨脫胎)하여 도수를 모아서[會度] 한 몸이 천변만화(千變萬化)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을 과학자(科學者)는 의심도 하고 불신(不信)도 하고 부인(否認)도 할 것이나 다시 한번 인식과 사고(思考)를 바꾸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질은 형체(形體)가 있음으로 자연적인 변화도 있고 인위적(人爲的)인 변화도 있음을 눈으로 볼 수 있으나 마음은 본래 형체가 없이 허령(虛靈)한 것임으로 고요하면 보이지 아니하고 움직이면 나타나는 작용(作用)의 변화가 지극히 큰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자각(自覺)으로서 인식(認識)하게 되는 것이다. 빈 것 곧 허(虛)는 본래 부피[量]가 없고, 영(靈)은 일정한 한정(限定)이 없음으로 형체가 있는 물체는 변화의 도수가 더디고 형체가 없는 물체의 변화는 그 도수가 빠르다는 것은 현대의 과학상에서도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어찌하여 물질은 변화가 있으되 정신과 마음은 변화가 없음을 누가 보증하며 그 누가 단정할 것이랴. 이것은 어리석고 몽매(蒙昧)한 사람의 추상(推想)이며 억설(抑說)인 것이다.
큰 고동[大神機 곧 見聞知行]의 발현과정(發現課程)은 수진(修眞) 공부를 하는 사람의 체험하는 현비(玄秘)에 맡기고 이에서 자세하게 설명함은 피하나 물방울이 떨어져서 바위를 뚫으며 성심(誠心)을 모아 금석(金石)을 꿰뚫어 봄과 같으니 빨리 성공하고자 탐내고 재촉함은 절대로 금할 일이다. 열매가 다 익으면 손을 대지 아니 하더라도 절로 나무에서 떨어지게 마련이니 서둘지 말고 쉬지 말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닦아 나갈 것이다.
정성이 부족하고 게으른 사람과 신념이 서지 아니한 사람 곧 호기심(好奇心)에서 시작하는 사람 그리고 죄과(罪過)가 많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수행을 시작하지 말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비록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신기(神機)가 발동되지 아니함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리어 재앙과 책벌(責罰)을 입어 수명(壽命)이 줄어지거나 질병을 얻는 등 해침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설혹 눈앞에 화해(禍害)는 나타나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수행에 발전이 없고 더구나 성공이란 절대로 기약할 수 없으니 앞에 말한 바, 정성이 부족하고 게으른 사람과 신념이 서지 아니한 사람 곧 호기심에 끌린 사람과 죄과가 많은 사람은 시간과 심력을 허비하지 말고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 것을 다시금 주의시켜 두는 바이다.
맺는말
이상에서 해설한 것으로 우선 수진삼법(修眞三法)의 서술(敍述)을 마치는 바, 그 어느 것이나를 막론하고 평소에 겪은 바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선사(先師)의 가르치심과 각 종문의 설법에 벗어남이 없이 수행하는 사람에게 스스로 현비(玄秘)를 찾도록 하였다.
사람마다 제각기 가진 정신이 곧 천신(天神)의 한 분자(分子)임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주재(主宰)가 육체인 것으로 그릇 알고 육체는 두텁게 양생(養生)코자 힘쓰나 정신은 이를 정양코자 하는 사람이 적고 또 자기의 정신은 중하게 여기면서 만물을 주재하시는 천신은 소홀히 하는 사람이 많음은 실로 탄식할 노릇이다.
사람이 삼재(三才)에 참여함도 이 신심(神心)이오, 만물을 지배하는 것도 이 신심이오, 만사를 조성(造成)함도 이 신심이오, 자유자재로 변화함도 이 신심이오, 하나에서 비롯하고 하나에서 마침과 셋에 나아가고 셋을 모음도 모두 이 신심 작용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신심의 작용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오직 정성[誠]과 믿음[信]과 부지런함[勤]의 여하에 달려 있으니 믿음을 세우고 정성을 다하는 힘으로 심령(心靈)의 신비(神秘)함을 통하여 영원토록 쾌락(快樂)을 누리는 만덕문(萬德門)으로 오르기를 거듭거듭 바라며 추호라도 거짓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경자(庚子:개천 4417[1960]년) 단오날에 지은이 삼가 씀
--------------------------------------------------------------------------------
* 서사(誓辭)
開天立道 四千幾百幾年 干支幾月 幾日 (不肖子孫某) 謹告于
개천입도 사천기배기년 간지기월 기일 (불초자손모) 근고우
三神一體上帝 伏惟 聖靈在上 善福惡禍 儆示天解 終身服膺 罔敢改易 有渝此心 甘心罪罰
삼신일제상제 복유 성령제상 선복악화 경시천해 종신복응 망감개이 유투차심 감심죄벌
* 각사(覺辭-깨닫는 말씀): 한배검께 원도(願禱)하는 송주(誦奏)이니 아래와 같다.
神靈在上 天視天聽 生我活我 萬萬世降衷 [세 검 한 몸이신 우리 한배검이시여 가마히 위에 계시사 신령재상 천시천청 생아활아 만만세강충 한으로 듣고 보시며 낳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
'☆종교와영의세계☆ > ♡대종교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오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 / 대종교 총본사 전강실 풀이 (0) | 2018.01.09 |
---|---|
대종교와 개천절 (0) | 2017.10.25 |
[대종교-일명 단군교] (0) | 2008.08.22 |
[대종교란?] (0) | 2008.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