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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 / 대종교 총본사 전강실 풀이

문수봉(李楨汕) 2018. 1. 9. 23:55

무오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 / 대종교 총본사 전강실 풀이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우리 대한 동족 남매와 온 세계 우방 동포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子孫 黎民)에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虐壓]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우리 대한은 예로부터 우리 대한의 한(韓)이요, 이민족의 한이 아니라, 반만년사의 내치외교(內治外交)는 한왕한제(韓王韓帝)의 고유 권한[固有權]이요, 백만방리의 고산려수는 한남한녀(韓男韓女)의 공유 재산[共有産]이요, 기골문언(氣骨文言)이 구아(歐亞)에 뛰어난[拔粹] 우리 민족은 능히 자국을 옹호하며 만방을 화합하여 세계에 공진할 천민(天民)이라, 우리 나라의 털끝만한 권한[韓一部의 權]이라도 이민족[異族]에게 양보할 의무가 없고, 우리 강토의 촌토[韓一尺의 土]라도 이민족이 점유할 권한이 없으며, 우리 나라 한 사람의 한인[韓一個의 民]이라도 이민족이 간섭할 조건이 없으니, 우리 한(韓)은 완전한 한인(韓人)의 한(韓)이라.

슬프도다 일본의 무력과 재앙[武孼]이여. 임진 이래로 반도에 쌓아 놓은 악은 만세에 엄폐[可掩]치 못할 지며, 갑오 이후 대륙에서 지은 죄는 만국에 용납[能容]지 못할지라. 그들이 전쟁을 즐기는[嗜戰] 악습은 자보(自保)니 자위(自衛)니 구실을 만들더니, 마침내 하늘에 반하고 인도에 거스르는[反天逆人] 보호 합병을 강제[逞]하고, 그들이 맹세를 어기는[□[*변할투]盟] 패습(悖習)은 영토니 문호니 기회니 구실을 거짓 삼다가 필경 몰의비법(沒義非法)한 밀관협약(密款脅約)을 강제로 맺고[勒結], 그들의 요망한 정책은 감히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였고, 교육을 제한하여 과학의 유통을 막았고[防□[*막을 알]], 인권을 박탈하며 경제를 농락하며 군경(軍警)의 무단과 이민이 암계(暗計)로 한족을 멸하고 일인을 증식[滅韓殖日]하려는 간흉을 실행한지라.

적극소극(積極消極)으로 우리의 한(韓)족을 마멸시킴이 얼마인가.
십년 무력과 재앙의 작란(作亂)이 여기서 극에 이르므로 하늘이 그들의 더러운 덕[穢德]을 꺼리시어[厭] 우리에게 좋은 기회[時機]를 주실새, 우리들은 하늘에 순종하고 인도에 응하여[順天應人] 대한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들의 합병하던 죄악을 선포하고 징계하니[宣布懲辨],

1. 일본의 합방 동기는 그들의 소위 범일본주의를 아시아에서 실행함이니, 이는 동아시아의 적이요,

2.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강박과 불법무도와 무력폭행을 구비하였으니, 이는 국제법규의 악마이며,

3. 일본의 합병 결과는 군경의 야만적 힘[蠻權]과 경제의 압박으로 종족을 마멸하며, 종교를 억압하고 핍박(抑迫)하며,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 문화를 저지하고 장애[沮障]하였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라,

그러므로 하늘의 뜻과 사람의 도리[天意人道]와 정의법리(正義法理)에 비추어 만국의 입증으로 합방 무효를 선포하며, 그들의 죄악을 응징하며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노라.

슬프도다 일본의 무력과 재앙이여! 작게 징계하고 크게 타이름[小懲大戒]이 너희의 복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할지어다.

각기 원상(原狀)을 회복함은 아시아의 바램[幸]인 동시에 너희도 바램이러니와, 만일 미련하게도 깨닫지 못하면 화근이 모두[全部禍根] 너희에게 있으니, 복구자신(復舊自新)의 이익을 반복하여 알아듣게 타이를 것[反復曉諭]이다.

보라! 인민의 마적이었던 전제와 강권은 잔재가 이미 다하였고, 인류에 부여된 평등과 평화는 명명백백[白日이 當空]하여, 공의(公義)의 심판과 자유의 보편성은 실로 광겁(曠劫)의 액(厄)을 일세(一洗)코자 하는 천의(天意)의 실현함이요, 약국잔족(弱國殘族)을 구제[濟]하는 대지의 복음이라.

장[大]하도다 시대[時]의 정의[義]여. 이때를 만난 우리는 함께 나아가[共進] 무도한 강권속박(强權束縛)을 해탈하고 광명한 평화독립을 회복함은, 하늘의 뜻을 높이 날리며 인심을 순응시키고자 함이며, 지구에 발을 붙인 권리로써 세계를 개조하여 대동건설을 협찬하는 소이로서 우리 여기 2천만 대중의 충성[赤衷]을 대표하여 ,감히 황황일신(皇皇一神)께 분명히 알리고[昭告] 세계 만방에 고하오니[誕誥], 우리 독립은 하늘과 사람이 모두 향응[天人合應]하는 순수한 동기로 민족자보(民族自保)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함이요, 결코 목전의 이해[眼前利害]에 우연한 충동이 아니며, 은혜와 원한(恩怨)에 관한 감정으로 비문명한 보복수단에 자족한 바가 아니라, 실로 항구일관(恒久一貫)한 국민의 지성이 격발하여 저 이민족으로 하여금[彼異類] 깨닫고 새롭게 함[感悟自新]이며, 우리의 결실은 야비한 정궤(政軌)를 초월하여 진정한 도의를 실현함이라.

아 우리 대중이여, 공의로 독립한 자는 공의로써 진행할지라, 일체의 방편[一切方便]으로 군국전제를 삭제하여 민족 평등을 세계에 널리 베풀[普施]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제일의 뜻[第逸意]이요, 무력 겸병(武力兼倂)을 근절하여 평등한 천하[平均天下]의 공도(公道)로 진행할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본령이요, 밀약사전(密約私戰)을 엄금하고 대동평화를 선전(宣傳)할지니 이는 우리 복국의 사명이요, 동등한 권리와 부[同權同富]를 모든 동포[一切同胞]에게 베풀며 남녀빈부를 고르게 다스리며[齊], 등현등수(等賢等壽)로 지우노유(知愚老幼)에게 균등[均]하게 하여 사해인류(四海人類)를 포용[度]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 건국[立國]의 기치(旗幟)요, 나아가 국제불의(國際不義)를 감독하고 우주의 진선미를 체현(體現)할 것이니 이는 우리 대한민족의 시세에 응하고 부활[應時復活]하는 궁극의 의의[究竟義]니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同心同德] 2천만 형제자매여! 우리 단군대황조께서 상제(上帝)에 좌우하시어 우리의 기운(機運)을 명하시며, 세계와 시대가 우리의 복리를 돕는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起]하라 독립군! 제[齊]하라 독립군!

천지로 망(網)한 죽음[一死]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同體)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되면[傾家復國] 3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一家)를 희생하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祇奉)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건국기원 4252년 2월 일

김교헌(金敎獻) 김규식(金奎植) 김동삼(金東三) 김약연(金躍淵) 김좌진(金佐鎭) 김학만(金學滿)
여 준(呂 準) 유동열(柳東說) 이 광(李 光) 이대위(李大爲)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범윤(李範允) 이봉우(李奉雨) 이상룡(李相龍) 이세영(李世永) 이승만(李承晩) 이시영(李始榮)
이종탁(李鍾倬) 이 탁(李 □) 문창범(文昌範) 박성태(朴性泰) 박용만(朴容萬) 박은식(朴殷植)
박찬익(朴贊翼) 손일민(孫一民) 신 정(申 檉) 신채호(申采浩) 안정근(安定根) 안창호(安昌浩)
임 방(任 □) 윤세복(尹世復) 조용은(趙鏞殷) 조 욱(曺 煜) 정재관(鄭在寬) 최병학(崔炳學)
한 흥(韓 興) 허 혁(許 爀) 황상규(黃尙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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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독립선언서에 대하여

1918년 음력 11월 만주 ·노령을 중심으로 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저명인사 39명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 1918년 무오년에 선포되었다 하여 '무오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라고 하며, 이 독립선언서 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임과 민주의 자립국임을 선포하고, 우리 대한은 타민족의 대한이 아닌 우리 민족의 대한이며, 우리 한토는 완전한 한인의 한토이니, 우리 독립은 민족을 스스로 보호하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결코 사원의 감정으로 보복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일본의 병합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무력폭행 등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2천만 동포들에게는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독립선언서의 특징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이며, 한일병합의 무효를 선포하고, 우리 독립의 기간이라 할 수 있는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게 할 것"을 요구하였다는 점, 무력적 대항을 선포하고 그 선언서의 대포자로는 해외의 저명한 인사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 독립선언서에는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김학만, 여 준, 유동열, 이 광, 이대위,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봉우, 이상룡, 이세영, 이승만, 이시영, 이종탁, 이 탁, 문창범, 박성태, 박용만, 박은식, 박찬익, 손일민, 신규식(신정), 신채호, 안정근, 안창호, 임 방, 윤세복, 조용은, 조 욱, 정재관, 최병학, 한 흥, 허 혁, 황상규 39인이 서명하였다. <김진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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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독립선언의 역사적 의의(논문발췌)

기초와 발표시기에 관한 문제

기초

「무오독립선언」을 기초한 인물에 대해서는 趙素昻이 기초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지만 당시 대종교교주였던 金敎獻이 기초했다는 설도 있다.

조소앙설:
「무오독립선언」의 기초를 조소앙이 기초했다는 근거는 먼저 조소앙의 자전에 보면,

…創立大韓獨立義軍府 呂爲正領 自任副領 手草「大韓獨立宣言書」尋見國內代表 來傳「獨立宣言書」之草稿 約與呼應23)

라는 내용과 정원택의「지산외유일지」에 보면 선언서의 기초를 조소앙이 맡은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조소앙이 吉林省 밖 어느 절간에서 선언서 작성을 했다는 정원택의 증언내용을 살필 수 있으며 조소앙에 의하여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대동단결선언」의 내용의 일부가「무오독립선언」의 내용 일부와 상당히 흡사하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김교헌설:
한편「무오독립선언」을 김교헌이 작성했다고 추측하는 이유는 당시 만주 대종교인이었던 김정후의 증언을 담은 글을 인용해 본다면 김교헌이 무오년 초에 대종교 교당에서 願禱를 드릴 때에 비몽사몽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백의민족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자 삽시간에 온 천지가 태극기에 뒤덮이는 희한한 광경을 願禱에서 목격했다 전한다. 김교헌은 하늘이 우리에게 독립을 묵시한 것이라 하여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하는 증언내용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무오독립선언」의 내용(이 글에서 인용하는 무오독립선언서의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독립사 3권에「대한독립선언서」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는 본문을 인용함. 이하 같음) 가운데,

檀君大皇祖께서는 上帝에 左右에 命을 내리셔 吾等에게 機運을 주시엿다.

라는 의미는 다름 아닌 무오년 초에 무원 김교헌의 원도 때에 백의 민족의 만세광경을 묵시한 것을 의미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世界와 時代와는 我等에게 福利를 주고자 한다.

라는 내용은 윌슨의 민족자결론 등 세계정세가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유추해 보건대「무오독립선언」이 당시 대종교의 중진들이 거의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대종교 교주였던 金敎獻의 영향은 더욱 강하게 표현되었을 가능성을 짙게 하고 있다.
23) 삼균학회,『조소앙문집』下, 횃불사, 1979, p.157.



발표시기
다음은「무오독립선언」에 관한 발표시기에 관한 是非 문제인데 그 발표시기가 확실치는 않지만 필자는 적어도 양력으로 1919년 2월 초 전에 이미 발표된 것으로 보고자 한다.29)

…「무오독립선언」은 만주지방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중광단원들을 중심으로 규합된「대한독립의군부」의 명의로 1919년 2월 경에 상당한 준비기간을 통하여 발표된 선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9)「무오독립선언」의 발표시기에 대한 이견은 대개 1918년 2월 발표설, 1918년 11월 발표설, 1919년 2월 발표설, 1919년 3월 발표설 등 확실한 발표시기가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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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와의 관계

발표장소
우선「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된 장소가 대종교총본사였다는 주목할 만한 설이 있다.

당시「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한 대한독립대표 39인 중의 한 사람인 윤세복(대종교 3세 교주)은「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된 곳이 정확하게 萬洲 吉林省 和龍縣 三道溝 大倧敎總本司였다고 한다.

내용
「무오독립선언」의 내용을 살펴 보더라도

二千萬 大衆의 赤衷을 代表하와 敢히 皇皇一神케 昭喜하오며……

라는 내용과

檀君大皇祖께서는 上帝에 左右에 命을 내리셔 吾等에게 機運을 주시엿다.

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一神은 大倧敎 重光後 나타나는 大倧敎 經典인 三一神誥에서 연유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바 있고, 檀君大皇祖라는 용어 또한 대종교 重光의 동기를 가져다 준「檀君敎佈明書」에서 사용되어 상용되었다는 점이다.

일제 정책 규탄
또한 「무오독립선언」에서는 1915년 반포된 朝鮮總督府令 83號 宗敎統制令44)에 의하여 대종교를 불법화시키고 대대적인 박해를 자행한테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탄하고 있다.

彼가 嗜戰의 惡習은 曰自保 曰自衛에 口를 籍하더니 終乃 反天逆人인 保護合倂을 접하고 彼가 □[*변할투]盟의 悖習은 曰領土 曰門戶 曰機會의 名을 假하다가 畢竟 沒義非法한 密款脅約을 勒結하고 彼가 妖忘의 政策은 敢히 宗敎를 통박하야 신화의 전달을 저지하얏고……

라고 질책하면서 당시 대종교를 사이비 종교로 몰아 억압해온 일제의 정책을 꾸짖고 있다.
44) 당시 일제는 대종교의 중앙본부는 물론 지방 교구에까지도 헌병을 파견하여 감시케 하고, 매월의 재산 상황을 보고케 함은 물론 간부들의 일거 일동과 교인들의 일상 출입까지도 간섭하였으며, 강연·집회·출판 등을 정지시키었다. 그럼에도 대종교의 교세가 날로 확산되자 일제는 對 大倧敎政策에 고심하던 끝에 마침내는 대종교를 閉敎·처분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합법화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1915년 10월 1일에 이른바 종교 통제안을 공포하였다. 이 종교 통제안은 조선내의 모든 종교는 설립 연원에 따라 佛敎 계통이면 佛敎佈敎規側에 준하고 神敎계통이면 神敎佈敎規側에 준하여 등록하고 포교 인가를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측은 고의적으로 一般類似宗團으로 보아 오던 群小信仰團體는 모두 서류를 접수하고 오직 대종교만은 神敎가 아니라는 이유로 신청 서류를 却下할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모든 종교 활동을 금지시켰다(대종교총본사편,『대종교중광 60년사』,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1971, pp.176∼186.; 신철호,『한국중흥종교교조론』, 대종교총본사, 1979, pp.52∼53).



대종교 관련 인물 

 
「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한 대한독립대표 39인 가운데 허혁, 이세영, 한흥, 최명학, 임방, 이승만, 김약연, 이대위, 황상규, 안창호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대종교의 지도급 중진이었다는데 특기할만 하다.

김교헌, 윤세복 등은 대종교의 종교적 지도자로서 만주독립군들에게 지대한 정신적 영향력을 현시하였으며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박찬익, 조성환, 이시영, 이동녕, 조소앙 등은 대종교 정신을 바탕한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차원높은 외교·문화·교육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김좌진, 김동삼 등은 무장항일 투쟁의 선봉에서 조국 독립을 위하여 지휘하던 인물들이다.

이렇게 볼 때「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한 대종교의 중진들은 당시 해외독립운동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활동하던 인물들로서 이해해 본다면「무오독립선언」은 대종교의 독립 선언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대종교의 영향은 컸다고 본다.

그러므로「무오독립선언」이 만주, 노령 등지 이외에 항일 독립운동에 명성을 크게 떨친 명사들을 포함시킨 것을 본다면「무오독립선언」은 대종교가 중심이 되어 만주·노령 등지의 독립운동 세력뿐만 아니라 거족적 차원에서 전개된 우리 광복사에 특기할 만한 쾌거로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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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독립 투쟁의 정신적 배경

일제하 항일독립전선의 맥락은 의병에서 독립군 그리고 광복군으로 계승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정신적 맥락은 만주에서 발표된「무오독립선언」에 천명되었다.

당시「무오독립선언」은 만주 지방으로 모여든 독립운동지도자들의 단결된 표현으로서 일제에 대한 선전포고와도 같은 강렬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보더라도「무오독립선언」은 본격적인 무장독립투쟁의 서막을 예고하는 신호탄으로 이해되어 진다.47)

전술한 바와 같이 만주지방에서 대종교도들에 의해 조직된 중광단원들이 중심되어 발표된「무오독립선언」은 종래 대종교의 중광 교조인 홍암 나철이 대일 민간외교에서 주창한 동양평화론 등과는 달리 민족종교의 바탕 위에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조국을 광복하고 말겠다는 굳은 결심과 결단코 살신 성인으로 독립투쟁에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투영하고 있다.48)

후일 중광단의 맥을 계승한 북로군정서는 이 선언의 무장혈전주의를 계승하여 청산리독립전쟁에서 미증유의 대승리를 올리게 된다.

또한 全滿洲 독립군들에게도「무오독립선언」은 독립운동의 방략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해 정신적 재무장의 계기가 되었으며 새로운 차원에서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한마디로「무오독립선언」은 일개 중광단 선언 또는 대종교가 중심이 된 것이었다고 하겠으나 이 선언은 당시 항일독립운동의 책원지에서 발표된 한민족 전체의 대일항쟁선언이요, 한민족 전체의 의지의 표현으로서 만주독립투쟁단체50)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친 사건이었다.
47) 박성수,『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집현전, 1985, p.132.

48) 박영석, 앞의 글(「대종교의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일제하 독립운동사 연구』, 일조각, 1984, p.272.)

물론 홍암 나철의 동양 평화론은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의 홍암 나철의 투쟁 방법이다. 사실상 대종교가 중광(1909)하여 만주로 처음 진출한 이후 일제 탄압에 의한 종교적 망명(1917)을 단행하면서 무장 독립 투쟁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있어 그 정신적 원동력은 홍암 나철이 을사 오적 주살을 계획 주도한 사건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1916년 홍암 나철의 殉命은 대종교 무장 독립 투쟁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50) 당시「무오독립선언」을 전후해서 만주에 성립된 독립군 양성 기관과 무장 단체들의 명칭을 서·북간도로 나누어 열거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 西間島(서간도)> 耕學社(경학사)·新興武官學校(신흥무관학교)·扶民團(부민단)·韓民會(한민회)·西路軍政署(서로군정서)·光韓團(광한단)·大韓獨立團(대한독립단)·大韓靑年聯合會(대한청년연합회)·光復軍司令部(광복군사령부)·天摩山隊(천마산대)·普合團(보합단)·義成團(의성단)·大韓獨立軍備團(대한독립군비단)·韓矯公會(한교공회)

< 北間島(북간도)> 重光團(중광단)·正義團(정의단)·北路軍政署(북로군정서)·間島國民會(간도국민회)·大韓正義軍政司(대한정의군정사)·大韓獨立軍(대한독립군)·都督府(도독부)(軍務都督府[군무도독부])·間島義軍府(간도의군부)·野團(야단)·血誠團(혈성단)·大韓新民會(대한신민회)·新民團(신민단)·義軍團(의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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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전주의로서의 무오독립선언

이러한 「무오독립선언」의 혈전주의는 연결되어 2·8독립선언 또한 일본이 만일 吾族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 텐데 吾族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겠다는 외침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이 볼 때「무오독립선언」의 혈전주의는 동경 2·8독립선언 에도 강경하게 나타나지만 국내 3·1독립선언으로 나타나면서 평화주의적 온건 노선으로 바뀌어 진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문제들을 살피더라도 만주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은 분명히「무오독립선언」의 무장혈전주의의 맥을 계승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으며 시대적·지역적 상황을 살피더라도「무오독립선언」이 당시 무장독립운동의 책원지라 할 수 있는 만주의 심장부에서 발표되었다라는 면에서도 더욱 그것을 확실하게 한다.58)
58) 후일「무오독립선언」의 주축이 되었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무장 독립 투쟁과 기타 독립 운동 전선에서 피흘린 것과는 달리 3·1독립선언의 주축이었던 최린·최남선 등 많은 민족 대표의 대부분이 직접·간접으로 친일적 인물로서 전향해 버림은 대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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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 선언과의 관계

「무오독립선언」이 발표시기에 대한 많은 異說을 안고 있으면서도 2·8동경유학생독립선언, 그리고 국내 3·1독립선언과 연관하여 볼 때에 불과 1개월 가량의 간격을 두고 마치 계주경기처럼 만주와 일본, 그리고 국내에서 잇달아 일어 났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바다건너 일본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은 본국에 영향을 주었고 대륙으로 연결된 만주에서 당시 독립운동지도자들이 총망라되어 국내외로 발표된 독립선언은 3·1독립선언의 배경설명에서 그다지 취급되지 않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사 또는 3·1운동을 다룸에 있어서「무오독립선언」은 결코 경시될 수 없는 것이며 단절된 역사의 사건이 아니라 3·1운동의 도화선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되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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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무오독립선언」은 당시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만주 심장부에서 완전자주독립을 쟁취하겠다는 혈전주의로 발표되어 국내외적으로 많은 역사적 계기를 만들어준 사건이었다. 특히 일제의 桎梏으로부터 벗어나려는 3·1운동의 거족적인 민족봉기에 있어서도「무오독립선언」이 기폭제적 역할을 했다는데 더욱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일제의 팽창적 한반도 상륙으로 시작되는 식민지화 과정을 통하여, 또는 한일합방으로 시작되는 일제의 완전식민지화 과정을 통하여 일제의 침략이 그토록 일방적이고 강도적이며 야수적이 아니었던들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그토록 사생결단의 격렬한 무장투쟁으로는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73)

「무오독립선언」은 이러한 침략과 일제에 대한 사생결단을 위한 혈전의 선언으로 우리민족독립의 의지를 대한독립대표의 이름으로 최초로 표명한 사건으로서 무장독립투쟁의 새로운 장을 예고하는 선언이었다는데도 주목된다.

이 글에서 필자는「무오독립선언」이 독립운동기의 어떠한 역사적 사건보다도 중요한 사건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무오독립선언」이라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3·1독립선언과 연결시키면서 보다 폭녋은 역사적 시각을 형성시키고 역사적 가치확인을 위한 기본적 시도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자료제약의 무리가 따르고 필자 스스로 견문의 미천함을 통박하면서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상술한「무오독립선언」의 역사적 비중을 다음과 같이 결론맺고자 한다.

첫째,「무오독립선언」이 당시 독립운동의 책원지라 할 수 있는 만주에서 발표되었다는 것은「무오독립선언」이전의 군소독립단체들에 단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훗날 무장항일투쟁에 혈전주의의 맥을 계승시켰다.

둘째,「무오독립선언」은 대종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해외독립운동 지도자들인 대한독립대표들에 의해 발표된 최초의 독립선으로 혈전주의적 대일항전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셋째,「무오독립선언」은 그 시대적 상황을 견주어 볼 때 3·1독립선언의 動團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끝으로 독립운동사연구에 있어서「무오독립선언」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연구작업과 사료의 발굴, 특히 그 발표시기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많은 연구를 기대해 본다.
73) 김창순,「항일독립운동에 있어서의 무장투쟁의 위치」『일제하 식민지시대의 민족운동』, 풀빛, 1981, p.153.



■ 김동환,「무오독립선언의 역사적 의의」『국학연구 2집』국학연구소, 1988.

Written Time : 2007-07-11 00:35:00



도오사 (2007-07-11 00:39:46)
기미 독립 선언 1년전 만주에서 무장 독립을 선언한다. 그 여파가 조선에 전달 기미 만세의 기폭제가 되었다 3월1일로 정한 이유는 배달민족의 삼신일체 삼일정신을 길이 기리고자 3.1로 정했다.



도오사 (2007-07-11 00:42:09)
무오 독립 선언이후 대종교인은 아니나 대종교 교주 김교헌의 제자 최남선이 이 소식을 듣고 민족 세력을 규합 3월 1일을 기하여 역사적 기미 만세 운동을 선도했다. 후에 반민족으로 돌아서 아까운 인물이지만 만일 그가 대종교에 입문 했더라면 민족 반역자 대열에



도오사 (2007-07-11 00:44:35)
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이유는 30만이 넘는 대종교인이, 일제에 항거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하였으며, 아무도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다. 놀라운 정신력 아닌가? 만주에서 일본군 학살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청산리 대첩 후, 일반 주민 10만을 학살 하였는데,



도오사 (2007-07-11 00:46:33)
대종교도들의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학교를 짓어서 배달얼을 전수시켰고, 18세가 되면 전원 무장 독립군이 되어서 독립투쟁을 했다고 전해진다. 어느 민족이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늘 민족 빛의 민족 천손 민족 배달 민족이기에 가능하다.



도오사 (2007-07-11 00:50:31)
이글을 읽고 뭉클하지 않는 자, 숙연해 지지 않는 자, 믿을 수 없다고 괴변을 늘어 놓는 자, 눈 망울이 젖지 않는 자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국적을 바꾸고 (바꾼 사람도 있지만) 한 민족이라 말하지 마라. 한글/말을 쓰지마라. 자격이 없다.



도오사 (2007-07-11 00:52:37)
중국 북경 지방 하북성에 고구려 미라미드 집단이 있다. 그것이 바로 단군이 실체하는 유적이다. 돈있고 시간있는 사람들은 중국에 가보라. 어디를 가든지 낯익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음식,문화,사람,풍속, 등 관광지에만 가지 말고 내륙으로 가보라



도오사 (2007-07-11 00:55:00)
거기에 단군의 자손들이 중국말로 하며 우리를 반길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하나 우리의 역사를 알고 정신을 알고 잠시 이야기하면 그들이 절을 한다. 조상의 나라에서 온 손님이라고, 아는 만큼 보이며, 보이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깨달고 오라.



도오사 (2007-07-11 00:56:41)
케사르의 말을 빌어 감히 말한다. 가서 보고 느끼고 오라고!!! 절강성 왠주에 갔을때, 식생활이 너무 우리와 똑같아 놀란적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옛 신라 땅이었다.
느끼는 자만이 나의 글을 이해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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