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문화재가 남아있는 통화, 환인, 집안의 위치
중국 동북 3성을 여행하는 내내 뚱딴지 부부의 감정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미묘했다. 여행의 초반부라 잔뜩 긴장한 탓도 있지만, 아마도 그 이상한 감정의 근원은 우리민족의 혼이 살아 있는 만주벌판과 조선족 자치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리라 짐작한다.
북한의 신의주와 국경을 마주한 단동. 중국어를 못해도 전혀 불편할 게 없는 도시였다. 거리마다 즐비한 한국어 간판은 마치 내 집 앞 거리를 거닐 듯 편안한 마음이 들게 했고, 강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북한식당과 한식당에서 오랜만에 맛본 한국음식은 나이 서른에도 그리운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한국어 간판이 즐비한 단동의 거리
종종 단동 거리에서 가슴에 김일성 뺏지를 달고 다니는 북한 사람들을 만나는 건 설레는 일이었다. 비록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일행들과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며 자연스레 우리 옆을 지나가는 그들의 말을 엿듣고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반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서로 다른 이념으로, 비록 남과 북이 원수처럼 갈라져 있을 지언 정 '우리는 한 민족이 틀림 없구나.'하는 동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단동을 떠나 수천 년 전에 우리 민족이 나라를 세우고 터를 잡았던 통화와 환인, 그리고 집안으로 한 발짝씩 다가서면서부터 복잡미묘해지는 감정은 주체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단동에서 통화가는 길
단동(丹東)에서 통화(通化) 까지는 버스로 8시간. 지금은 길이 뚫려 4~5시간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는데, 우리부부가 여행하던 2005년에는 도로 곳곳이 한창 공사 중 이었다. 때문에 안전벨트는 고사하고 가다가 곧 서버릴 것 같은 고물버스를 타고서 한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산길을 따라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셀 수 없이 엉덩방아를 쿵쿵 찧어가며 달리는 길에서 위안이 되어 준 건 8시간 내내 눈 앞에 그림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이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 풍경
달리는 차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
봄을 맞은 들판에는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린 농부들이 바쁜 손놀림으로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집집마다 굴뚝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에서 사람 사는 향내가 솔솔 풍겨오는 평온한 시골마을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우거진 낭만적인 산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기도 했다. 마침 봄비가 더해져 운해가 내려 앉은 호젓한 산길은 여느 관광지보다 경치가 빼어나서 단둘이 드라이브를 즐기러 나온 듯한 착각에 빠지기 충분했다.
우리네 농촌을 쏙 빼 닮은 중국의 농촌마을
모내기가 한창이던 중국의 농촌 마을
우리가 '고구려문화탐방'에 베이스캠프로 삼은 곳은 통화. 단동에서 환인(桓仁)이 더 가깝기는 하지만 이삿짐만한 크기의 여행 가방이 부담스러워 통화에서 3박을 하면서 환인과 집안을 당일치기로 다녀올 계획이었다.
통화의 버스터미널
아담한 통화 시내
그런데 다음날. 환인에서부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통화에서 환인까지는 2시간 남짓한 가까운 거리다. 통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부랴부랴 버스를 타고 환인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11시. 우리는 환인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통화로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표를 미리 사놓을 요랑이었다. 그런데 막차 시간을 확인하는 순간 ‘아차’싶다. 환인에서 통화로 가는 막차가 오후 1시 30분으로 끝이라니.
겨우 2시간 30분만에 환인 관광을 마치거나, 아니면 통화에 이미 지불해 놓은 숙박비 중 하루치를 버리고 계획에도 없던 환인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1박을 해야 할 판이다. 우리는 우선 거두절미하고 오녀산성에 가서 환인에서 숙박을 할 지 여부를 결정짓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 낭패가 또 어디에 있으랴. 오녀산성에 오르기 위해서는 관광객은 무조건 관광지 내에서만 운영하는 전용 버스를 타고 올라야 한다는데 버스를 타겠다고 모인 관광객이라고는 고작 우리 둘뿐. 환인 관광에 나섰던 6월 4일은
그래도 단군신화로 익숙한 환인의 오녀산성을 먼발치에서 바라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주몽이 부여를 떠나 첫 도읍을 세운 졸본. 그 고구려의 시발점이 된 곳이 바로 이 오녀산성이라니. 산언덕배기에 요새처럼 자리한 오녀산성 앞에서 경건한 마음과 벅차 오르는 감동을 느끼는 걸 보면 우리 뚱딴지 부부 역시 고구려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관광객들이 모이기만을 기다리며 주차장에서 바라 본 오녀산성
주차장에 우두커니 앉아서 커다란 구름 떼가 지나는 산성을 바라보았다. 구름 떼가 지나는 모습에 따라 산성에 그늘이 드리워지기도 하고, 잠시 눈부신 햇살이 산성을 내리쬐기도 한다. 순간순간 자연의 변화에 따라 오녀산성도 때로는 웅장하게, 때로는 신비롭게 변화무쌍했다.
좀더 가까이서 바라 본 오녀산성
결국에 오녀산성은 눈 앞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끝이 났다. 아쉬운 마음에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어미가 어린 아이를 늙은 할머니에게 맡겨두고 타국으로 돈을 벌러 떠나는 마음이 이럴까? 광활한 만주벌판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오녀산성이 어린 아들처럼 자꾸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자꾸만 돌아서서 바라보게 한다.
끝내 오르지 못한 오녀산성을 뒤로 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장거리 버스역으로 가자는 우리에게 기사가 '오녀산성은 구경도 못 했죠?'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아직 중국인의 발길이 뜸한 관광지라서 한국단체가 오지 않으면 개별적으로는 오녀산성에 오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덧붙여 자기가 오녀산성을 좀더 가까이 볼 수 있고 경치가 아주 아름다운 댐을 하나 알고 있으니 잠깐 구경하고 가란다. “돈 30원이면 거저”라는 호객행위도 잊지 않았다.
돈을 벌어볼 꼼수를 부리는 아저씨의 마음이 훤히 들여다 보이기는 했지만, ‘오녀산성을 좀더 가까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여 아저씨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장난이란 말인가. 오녀산성을 더 가까이 볼 수 있기는커녕, 오녀산성이 자꾸만 더 멀어지는 게 아닌가. “오녀산성이 왜 보이지를 않냐”는 딴지여사 질문에 아저씨는 “오녀산성으로 향하는 길에 이미 들어섰기 때문에 산성이 보이지 않는 거라며 실질적으로는 산성에 더 근접했다”는 대답을 한다. 그러면서 “아무튼 댐의 경치가 무척 아름답지 않냐”는 말로 대충 얼버무렸다.
오녀산성 밑으로 흐르는 혼강
오녀산성 밑에 자리한 댐(환인댐)을 보니 오녀산성이 적군을 차단한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고구려 시절에는 이 댐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적군이 오녀산성으로 진군을 하기 위해서는 분명 압록강의 지류인 이 혼강을 건너야 했을 것이다. 맞은 편으로는 드넓게 펼쳐진 환인 분지가 눈에 들어온다. 초록빛으로 물든 풍요로운 대지를 바라보며 안치환이 부른 ‘광야에서’가 떠올랐다.
드넓은 환인분지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진 뜨거운 흙이여…
갑자기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무엇인가가 울컥한다. 조용히 서서 강을 하염없이 응시하는 MR. 뚱의 마음도 나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우리가 지키지 못한 땅이 되어버렸지만 그 문화재만이라도 지켰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지키지 못할 문화재였다면 중국과 북한이 동시에 고구려문화재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신청을 했을 때 북한의 편에 서 줬어야 하는 게 옳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부부의 고요한 침묵에 돌을 던진 건 천천히 뒤따라 올라온 택시 운전기사 아저씨이다. 아주 염장을 지른다. 아저씨의 한 마디가 천불이 나게 한다.
“너희도 한때는 우리나라의 소수민족이었지. 지금의 조선족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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