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 고구려비에 관하여...
@ 목차...
1. 중원 고구려비를 찾아 가는길
2. 중원고구려비란...
3. 중원고구려비가 국보로 정해진 까닭
4. 남한 내의 유일한 고구려비 - 중원고구려비
5. 중원고구려비가 주는 역사적 의의
1. 중원 고구려비를 찾아 가는길 왼쪽의 지도를 보면 다들 아시겠지만 중원고구려비는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에 위치해 있다. 충주시가지에서 탄금대를 지나쳐 탄금대교를 건너간다. 이 길은 중앙탑,중원고구려비,장미산성,보련산성등등으로 향하는 길이자 서울로 올로가는 길이기도 하다. 탄금대교를 건너 대략 10여분 강변 길을 따라 쭉 가고나면 주유소가 있는 삼거리에 닿는다. 중앙탑은 이 곳에서도 잘보인다. 우회전하면 중앙탑 및 충주 박물관으로 진입하게 된다. 중원고구려비는 우회전하여 가도 무방하나 삼거리에서 직진하는 편이 수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답사코스로 중앙탑을 거쳐 중원 고구려비로 가는 경우가 많다.
2. 중원고구려비란...
◆ 중원고구려비
해방 후 한국사학계의 가장 큰 금석문(金石文) 발견은 단양적성비와 중원고구려비일 것이다. 우리 땅은 어디를 가나 우리 역사의 현장이 아닌 곳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발견된 두 비와 같은 귀중한 유적이나 유물이 또 언제 어디에서 발견될지 모를 일이다. 두 비의 발견은 행운도 함께 했으며 메스컴의 취제경쟁 속에 화려하게 우리의 관심을 끌어왔다.
1979년 2월에 발견된 고구려비의 발견된 동기는 충주시 예성동호회(현(사)예성문화연구회)에서 발견하여 학계에 보고 하였는데 발견 초기에, 비 전체를 덮고 있던 돌이끼를 벗기자 (大王) (新羅土內)란 비문이 나타나 처음에는 단양적성비와 같은 신라비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탁본에 高麗大王이란 글자가 확실히 나타났다. 高麗大王이란 高句麗大王이며 중원 땅에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한반도내 유일한 고구려비가 발견된 것이다. 하여간에 1천5백여년 전에 세워진 고구려비가 발견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 고구려비는 만주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축소한 그대로의 모습을 이어서 더욱 흥미롭다. 크고 긴 화강암 기둥돌을 그대로 다듬어서 비면을 만들었는데, 높이 약 2백㎝, 앞 뒤 넓은 면이 각 55.52㎝, 좁은 측면이 각37.32㎝이다. 이 비는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로 이름지어지고 국보제205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가 발견됨으로써 『三國史記』의 기록의 정확성이 증명되었고 삼국사기에 없는 사실들이 보완되었다. 장수왕 건립 추정. 사면비로서 전면 23자씩 10행으로 된 230자의 명문으로 한 좌측면에는 155자가 새겨졌는데 역사적으로 삼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금석문이다
3. 중원고구려비가 국보로 정해진 까닭
이 비가 고구려비인 것이 확인되던 날 “아니! 고구려가 충주지역까지!!” 삼국시대의 지도가 바뀌는 큰 발견이었다.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고구려가 한강이북 지역까지만 진출했다고 알고 있었다. 즉,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시이므로 고구려가 한강을 넘어 충주지역까지 진출하였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다.
옛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한반도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인 중원고구려비의 발견을 해방 이후 고고학계의 3대 발견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우물가의 빨래판이었던 돌이 국보로 정해진 까닭은 바로 이것이라 말할수 있다.
4. 남한 내의 유일한 고구려비 - 중원고구려비
처음엔 비 전체에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탁본을 하여도 글자를 해석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돌이 닳기도 했지만 올록볼록한 이 돌이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빨래판으로 인기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에 쓰여 있는 글씨를 통해서 이 돌이 고구려비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비문을 해석해 보면 첫째,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이때 ‘고려’는 ‘고구 려’를 뜻하고, 둘째,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제위(諸位)’, ‘사자(使者)’ 등 고구려의 관직 이름이 보이며, 셋째, 만주 집안시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 이 보이고, 넷째, ‘신라매금’, ‘모인삼백’, ‘신라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이나오기 때문이다.
5 중원고구려비가 주는 역사적 의의
이 비석의 중요성은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가 전달되는 과정을 연구 하는데에도 있다. 비문 중에 고구려가 신라에게 의복을 준다는 내용도 있는데, 의복외에도 관리의 명칭이나 제도가 이런 기회에 자연스럽게 알려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충주중원지방이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은 옛날의 기록에도 있으나 이 비석으로 인하여 다시 확인되었고 이 비석이 서 있는 곳이 고구려와 신라를 통하던 중요한 통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중원고구려비 탁본
|
예성문화연구회1987년도 會紙/그 당시에는 예성동호회
--------------------------------------------------------------------------------------------------------------------------------------------------------------------------
선돌부락 어귀에 서있던 돌기둥이 고구려비로 밝혀진것은 1979년 예성문화 연구회에 의해서이며 단국대학 학술조사단이 현지 조사하여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국내,외에 현존하는 고구려비는 현 길림성 집안시 통구 에있는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 고구려비 뿐인데 이비석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 비 임으로 역사적 가치기 매우 크다.
오랜 세월의 풍화 작용이었을까? 회손된 부분이 너무 많아 전체 내용을 완전히 알 수 없음이 안타깝다
주변은 남한강을 이용한 수로 교통과 육로 교통상 전략적 중요 지점으로 장미산성과 봉황리 마애불상군의 존재, 노은면에서 금동광배金銅光背가 출토되것으로 미루어 5세기 후반 고구려가 충주 지방을 점령한후 이 지역을 국원國原 이라 이름한뒤 남방진출의 거점으로 비를 세운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비각 전경
아주중요한 역사 자료 인데 관리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닙니다
고구려비각 근경
고구려비 전면국보 제205호
사진설명과 비문 내용설명
고구려비 정면과측면
높이 203cm,폭 55cm이다. 1979년 4월 5일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立石) 마을에서 조사되어 알려졌다.
형태는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며,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있다. 4면 모두에 글을 새긴 4면비이며, 글자는 전면이 10줄에 23자씩이고, 좌측면은 7줄에 23자씩, 우측면은 6줄이며 뒷면은 9줄로 추정되고 있는데, 글자의 지름은 3∼5cm이다.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발견 이후로 가장 큰 고구려비 발견이라는 점과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석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더구나 고구려의 금석문(金石文)이 남아 있는 것은 광개토대왕비 등 그 수가 적기때문에 이 곳 중원지방에 완전한 돌비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다.
글씨나 글에 고구려인의 독자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비가 만들어진 연대는 423년 장수왕 때로 추정하고 있다.
그 주요한 내용은
<前面>
五月中高麗大王相王公□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
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 桓]
奴主簿道德□□□安□□去□□到至 營□太子共□]
尙□上共看節賜太翟鄒□食□□賜寐錦之衣服建立處]
用者賜之隨者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衣服敎東]
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王國土]
大位諸位上下衣服兼受敎 營之十二月卄三日甲寅東]
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大使者多 桓奴主簿□]
□□□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
□□奴□□□□盖盧共□募人新羅土內衆人拜動□□]
해석
5월에 고려대왕상왕공(高麗大王相王公)과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수천(守天)하기 위해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太子) 공(共)…상(尙)…상공간노(上共看奴) 주부(主簿) 도덕(道德)'등이 …로 가서 궤영( 營)에 이르렀다. '태자(太子) 공?(共)…상(尙)…상공간(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의 의복을 내리고 '겅립처(建立處) 용자사지(用者賜之) 수자(隨者) … 노객인(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를 내렸다. 동이 매금이 늦게 돌아와 매금토내(寐錦土內)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공(共)이] 고구려 국토내의 대위(大位)·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를 궤영에서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매금(東夷寐錦)의 상하가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를 내렸다. 전부(前部)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와 주부 도덕(道德)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보노(補奴) …' 와 개로(盖盧)가 공히 신라 영토내의 주민을 모아서 …로 움직였다.
<左側面>
□□□中□□□□城不□□村舍□□□□□□□沙□]
□□□□□□□□班功□□□□□□□□節人□□□]
□□□□□□辛酉年□□□十□□□□□太王國土□]
□□□□□□□□□□□□□□□□□□□□□□□]
□□□□□□□□□上有□□酉□□□□東夷寐錦土]
□□□□□□方□桓□沙□斯色□□古鄒加共軍至于]
伐城□□□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해석
'… 중(中) … 성불(城不) … 촌사(村舍) … 사공(沙攻) … 절인(節人) … 신유년(辛酉年) … 십(十) … 태왕국토(太王國土) … 상유(上有) … 유(酉) … 동이(東夷)' 매금의 영토 '… 방(方) … 환□사□사색(桓□沙□斯色) … 고추가(古鄒加)' 공(共)의 군대가 우벌성에 이르렀다. '…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하부(下部) 대형(大兄) 야(耶)□'
<右側面>
□公□□□□衆殘□□□□□□□□□不□□使□□□壬子□□伐□□□□□□□□□□□□□□□□□
'☆우리의 역사☆ > ♡☞삼국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려는 중국 지방정권이 아니다.(동영상)] (0) | 2008.10.17 |
---|---|
[46차 고구려연구회 학술발표회] (0) | 2008.10.17 |
[고구려의도읍지 오녀산성 중국 단동] (0) | 2008.09.09 |
[고구려,백제,신라 문화재] (0) | 2008.09.08 |
[고구려 벽화] (0) | 2008.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