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차 고구려연구회 학술발표회
때 : 2007년 9월 14일(금) 오전 10시
곳 : 배재대학교 학술지원센터
* 중국 학자의 고구려 왕릉 비정에 대한 비판적 고찰
발표 : 서길수 (서경대)
토론 :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백승옥(함안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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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는 글>
동북공정은 끝났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왜곡은 계속된다.
지난 1월 고구려연구회 학술대회 주제였습니다.
그 뒤 우리는 계속 중국 측 연구 성과를 스크린하고 분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최근 상당히 우려할만한 주장이 나왔습니다.
고구려 28대 왕릉은 모두 중국에 있다.
평양에서 세상을 뜬 왕의 능도 모두 중국에 있고 한반도에는 없다.
결국 고구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 중국 땅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사 = 중국사’라는 주장을 하기 위한 프로젝트 결과입니다.
이번에 서길수 교수가 이 책을 전면적으로 검토하고 비판적으로 연구 한 결과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오셔서 토론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7년 9월 9일
고구려연구회 회장 한규철
* 논문은 고구려연구회 홈페이지(www.koguryo.org) 자료실 게시판에!
“평양 천도 뒤 죽은 고구려 왕의 능도 모두 중국 땅에 있다.
길림성사회과학원에서 나오는 『동북사지(東北史地)』 2007년 4기(7․8월호) 2쪽에 실린 「고구려 왕릉 통고 요보(高句麗王陵通考要報)」라는 글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고구려 28대 왕의 모든 왕릉을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무덤과 일대일로 비정(比定)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고구려 28대 왕릉은 모두 중국 땅에 있다.” “평양 천도 뒤 죽은 고구려 왕의 능도 모두 중국 땅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지금까지 수십 년간 논의 되어온 몇몇 왕릉에 대한 비정을 넘어서 모든 왕릉의 위치를 다 비정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처럼 졸속하게 모든 왕릉을 비정하다보니 스스로 많은 모순에 직면하고 논리적 비약이 심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고구려 왕릉 통고』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뒤 평양에서 세상을 떠난 모든 고구려 왕들의 능도 모두 중국에 있고, 압록강 이남 한반도에는 왕릉이 하나도 없다는 주장이었다. 고구려는 20대 장수왕(서기 427년)이 수도를 현재 중국의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긴다. 그 뒤 장수왕부터 보장왕까지 9명의 왕이 더 나온다. 당나라로 끌려간 보장왕을 빼놓고 8명의 왕이 평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 8명 모두가 평양에 장사지내지 않고, 현재 중국의 길림성 집안으로 돌아와 묻혔다는 것이다. 참 놀라운 발상이고, 지금까지 그 누구도 주장하지 못했던 뜻밖의 논리다.
중국이 주장하는 고구려 후기 왕릉
21. 문자명왕릉 - 집안시 우산하무덤떼 2112호 무덤(지름 40m, 높이 8m)
22. 안장왕릉 - 우산2101호 다섯무덤(五盔墳) 1호(지름 30m, 높이 8m)
23. 안원왕릉 - 우산2102호 다섯무덤(五盔墳) 2호(지름 55m, 높이 15m)
24. 양원왕릉 - 우산2114호(지름 28m, 높이 7m)
25. 평원왕릉 - 우산2113호 사신무덤(四神塚)(지름 35m, 높이 8m)
26. 영양왕릉 - 우산2103호 다섯무덤(五盔墳) 3호(지름 35m, 높이 8m)
27. 영류왕릉 - 우산2104호 다섯무덤(五盔墳) 4호(지름 28m, 높이 8m)
그러나 이렇게 비정한 고구려 후기 왕릉들은 본인들이 만든 왕릉의 조건에 맞지 않았다. 새로 비정된 7기의 왕릉 가운데 자신들이 제시한 7가지 조건에 맞는 왕릉은 2기 정도이고, 나머지 5기는 모두 충족시켜 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왕릉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조건이 되었다.
설령 7기가 모두 모두 왕릉이라고 해도, 어떤 무덤이 어떤 왕의 능인지 비정할 수 있는 정보가 전혀 없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정보로는 단 한 기의 왕릉도 비정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7기 무덤의 피장자를 모두 밝혔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모두가 잘 못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 상태에서 어떤 무덤이 어떤 왕의 능이라고 비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후기 7명의 왕에 대한 왕릉을 모두 비정한 것은 그 시도 자체부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후기 왕릉은 평양에 있었다.
평양 주변에는 5~7세기 돌칸흙무덤을 검토한 결과, 왕릉급 무덤도 많고, 이미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같은 왕들의 능이 연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일 장복유 팀의 주장대로라면 모든 왕릉은 압록강 북녘에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평양에는 왕릉이 있을 수 없다. 반대로 평양 천도 이후의 왕릉이 평양지역에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집안지역의 왕릉은 허구가 된다. 그런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평양지역의 왕릉에 대해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어 있고, 비정된 왕릉도 제법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실일까? 당연히 평양에서 집권한 왕들의 능이 평양에 있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중국은 왜 이런 무리한 연구를 하는가?
그렇다면 기라성 같은 고구려 전문가들, 최고의 고고학자들이 감히 할 수 없는 내용을 어떻게 한 아마추어 사가와 박물관 직원 2명이 모든 것을 단 3년에 해 치울 수가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연구팀의 팀장인 장복유 개인의 위치와 성향을 따져보면 쉽게 결론이 난다.
장복유는 고구려ㆍ발해사는 물론 역사를 연구하는 사학계에 전혀 족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2004년, 길림성 선전부 부부장(正廳長 급)이 되면서 갑자기 두각을 나타낸다. 바로 동북공정의 전문가위원회 위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을 끌고 가는 실질적인 기구인 이 위원회에는 동북 3성인 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의 선전부 부부장과 사회과학원 원장이나 부원장이 당연직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장복유가 길림성 선전부 부부장이 되어 동북공정 전문가 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동시에 길림성사회과학원 부원장, 백두산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길림성 장백산문화연구회’ 회장까지 중요 요직을 도맡았다.
저자는 길림성 선전부 부부장, 장백산문화연구원 회장
그 뒤 한중관계에 동북공정이 문제가 되고, 실질적인 작업이 국가에서 지방으로 이전되면서 장복유는 고구려 역사왜곡의 선봉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2004년 역사왜곡의 발표장이 될 새로운 학술지 『동북사지』가 나오면서, 그 출판사 사장까지 맡게 된다. 2004년 이전까지 단 한 편의 고구려 관련 논문도 없던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 고구려 논문을 3년 동안 10편 이상 발표하고, 이번에는 30만자짜리 『고구려 왕릉 통고(高句麗王陵通考)』란 책을 공저로 내고, 사진이 600장이나 들어가는 『고구려 왕릉 통감(高句麗王陵統鑒)』을 개인이름으로 내게 된다.
이 책은 쓰기 위해 “40 수차례에 걸쳐 환인과 집안의 무덤들을 답사하고, 그 가운데 33기의 대형 무덤을 중점적으로 조사하였다. 그리고 1년간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왕릉 27기와 석굴 1개를 선정하였다. 총계 210차 이상 이 왕릉을 고찰하고 대량의 1차 자료를 얻었다.”고 하였다. 어떤 학자도 그런 시간과 돈을 지불할 수 없다. 이것은 큰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각종 관계기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그런 면에서 장복유가 가지고 있는 각종 직함들은 모든 문제를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고구려 왕릉 통고(高句麗王陵通考)』란 책의 내용이 그렇게 과감하게 고구려 28대 왕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비정했는지 알 수 있다. 거기에는 학술적인 문제가 아니고 정책적인 목표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학술적인 뒷받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목표는 간단하다. “고구려 왕릉은 모두 중국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 역사다.”는 결론을 이끌어가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학술적인 접근은 결국 학문을 황폐화 시키고, 한중 양국의 학술 교류, 나아가 양국의 선린관계에도 크게 나쁜 영향을 줄 것이다. 이에 대해 이미 1963년 당시 중국의 총리였던 주은래가 경고와 함께 대안을 내놓고 있어 양국의 학자들이 모두 경청할 만하다.
중국 총리 주은래 :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잘못이다.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지,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옛날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藩屬)이었다고 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국수주의가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심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을 바쳤다고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와 얼굴을 대하고 서로 우호적으로 교류할 때도 그들은 조현(朝見, 신하가 임금을 뵙는! 것 : 옮긴이 주)하러 왔다고 했고,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여러분이 신복(臣服, 신하가 되어 복종했다 : 옮긴이 주)한다고 말했으며, 스스로 천자의 나라(天朝), 위나라(上邦)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곧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잘못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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