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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의 교육사상]

문수봉(李楨汕) 2008. 10. 7. 11:32

공자의 교육사상



제자백가와 유가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산동성에 위치한 제(齊) 나라의 수도였던 임치(臨淄)라는 도시에 "직하"(稷下)라고 불리는 학술기구가 있었다. 직성(稷城)의 아래에 수도의 서쪽 문이 있는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직하" 혹은 "직하문"이라고 불려졌고, 그 곳은 학자들이 모여서 학문을 함께 논하는 곳이어서 일종의 학술기구이기도 하고 후진을 양성하였기 때문에 일종의 학교이기도 한 곳이었다.

이 기구는 기원 전 318년에 제 나라의 선왕(宣王)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 곳에 거주하는 학자들은 모두 대부(大夫)의 서열을 받아 임명되고 왕실에서 제공한 높은 대문의 큰 집에서 살면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거기에는 70여명의 대부들과 1천여명의 학사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유래로 말하면, 제 나라가 태공(太公) 때부터 어업과 염전을 개발하고 후에 철의 생산까지 발전시키면서 상공업을 진작시켰고 후에 관중(管仲)은 어업과 염전업에 세금을 부과하여 형성한 재정으로 학술을 장려한 것이 그 출발이었다. 위왕(威王), 선왕(宣王), 양왕(襄王) 등 후대의 왕들도 그 뒤를 이어 임치를 학술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맹자(孟子), 추연( ), 신도(愼到), 윤문(尹文), 순자(荀子), 묵자(墨子) 등을 포함하여 유가, 도가, 명가, 법가, 음양가 등의 학자들이 직하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저작을 통하여 통치술을 논하였고, 평시의 국정을 토론하였으며,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분위기가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3 세기 초에 이르러 혼왕( )은 무력을 숭상한 데다가 학자들의 충고를 거역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여 학자들은 점차로 직하를 떠나버렸다.

물론, 당시의 직하에서 고대의 학문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기원전 500 년 경에 이미 고도의 학술적 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직하의 규모와 학풍과 역할을 미루어 볼 때 고대 중국의 학술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다양한 노선의 사상가들이 형성한 학풍, 그것보다 시대적으로 훨씬 앞서서, 그리고 그것에 못지 않는 수준의 다양한 사상적 체계가 발달해 있었다.

중국사의 최근 연구는 고대 중국에서의 학술의 발달은 주(周)나라의 봉건제도가 붕괴되면서 시작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馮友蘭, 중국철학사, 정인재 역, 서울: 형설출판사, 1990, pp. 56-58) 봉건제도의 붕괴는 어느 시기부터인가를 단정할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기원전 7세기 경부터 3세기까지를 사회적, 정치적 변동기로 보며 이 시기에 봉건제도가 붕괴되어 가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봉건시대에는 왕실의 관리들이 학문분야의 대표들이었으나, 봉건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관리 혹은 귀족이 사방으로 흩어져 개인적 노력으로 사상을 전하는 직업적 교사가 됨으로써 여러 다양한 학파들이 형성되었다. 이 학파들을 통칭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일컫고 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 고대 중국의 학문적 개화가 시작하였고, 제자백가의 시대는 기원전 500 - 250 년 사이에 절정기를 이루었다. 학파들 가운데 중국사상의 양대 조류가 되는 유가(儒家)와 도가(道家)가 그 대표적인 것이지만 기원전 5-3세기까지만 해도 수많은 학파 중의 둘에 지니지 않는다.

물론 제자백가의 분류는 사마담(司馬談), 유흠(劉歆) 등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서 시도된 것이다.

사마담은 사가(史家)들 가운데 제자백가를 6가로 분류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기원전 2세기 후반의 사가이다. 그가 분류하여 명명한 6가에는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가 등이 포함된다. 다른 한편 유흠(기원전 46 - 기원후 23)은 제자백가를 사마담의 6가에다, 종횡가, 잡가, 농가, 소설가를 더하여 10가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그 중 소설가는 별로 주목할 만큼의 무게를 두지 않았다. 물론 유흠이 제자백가의 배경과 특징을 분석한 것에는 수정되어야 부분들이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풍우란, [중국철학사], 정인재 역, 서울: 형설출판사, 1990, pp. 53 - 56)

(1) 유가(儒家)는 대체적으로 주 나라의 교육을 맡는 관직인 사도(司徒)의 출신이었다. 그들은 음양의 도에 순응하면서 군주를 도와 교화를 밝히는 것을 직책으로 삼았다. 이 학파는 어느 다른 학파보다 그 지위를 확실히 하였고, 6경을 즐겨 연구했으며, 인의 도덕에 뜻을 두었고, 요순(堯舜)의 시대를 동경하였으며, 공자(孔子)를 최고의 스승으로 삼아 학술을 닦았다.
(2) 도가(道家)는 대체로 사관(史官)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성패, 존망, 화복 등 고금의 도를 빠짐없이 널리 기록하였으며 그 요점을 파악하여 근본을 알고자 하였다. 군주의 통치방법으로 청허한 마음, 그리고 욕심을 멀리하고 자신을 낮추며 유연한 태도를 가질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도가는 본래 양주(楊朱)의 사상에서 그 근원을 가진 것이나 주로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사상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흠은 주로 노자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장자의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3) 음양가(陰陽家)는 천지와 사계절의 변화에 대응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리였던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하늘을 삼가 존중하고 해와 달과 별들의 운행을 추산하여 천문을 보고 백성들에게 농사철을 일어 주었다.
(4) 법가(法家)는 옥사(獄事)를 심리하던 이관(理官)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상벌을 엄격하게 함으로써 예절의 제도적 관습을 보충하였다.
(5) 명가(名家)는 예절을 관장하던 예관(禮官)의 출신들이었다. 옛날에는 명칭과 지위가 다르면 그에 따라서 예의와 범절도 달랐다. 공자는 사물의 질서와 행동의 도리를 바로 나타내어야(이름을 바로 붙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 도리를 바로 나타내지 못하면 말이 순조로울 수가 없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어떤 일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6) 묵가(墨家)는 종묘의 관리인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검약을 귀하게 여겼으며 겸애를 주장하였고 현인을 존경하였으며 묘제(廟祭)를 엄숙히 지내고 효도하는 생활을 천하에 보여 주었다.
(7) 종횡가(縱橫家)는 나라의 외교를 맡은 관직인 행인(行人)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일을 처리할 때 실제에 비추어 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국가의 명령을 접수하더라도 그것을 실제의 상황을 보고 처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8) 잡가(雜家)는 간쟁하는 벼슬을 뜻하는 의관(議官)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유가, 묵가, 명가, 법가의 학설을 한데 통합시켰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제가의 주장과 관행을 모두 구비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여러 다른 주장에 대하여 관용성을 보였다.
(9) 농가(農家)는 농업을 관장하던 벼슬인 농직(農稷)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곡식의 씨를 뿌리고 밭갈며 누에치기를 권장하여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10) 소설가(小說家)는 거리의 풍속을 기록하는 패관(稗官)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거리에서 들은 것, 길에서 말한 것 등을 채집하여 이야기로 엮고 그것을 백성의 의견으로 수용하였다. 주 나라 말엽의 여러 학파를 일컬어 "제자백가"라고 하지만 유학(儒學)이 학술상의 정통이며 또한 주류였다. 제자백가는 모두 그 지류 혹은 아류이며 마치 해가 가운데 자리잡고 뭇 별들이 그 주위를 둘러 싼 격이라고 할 수 있다.[장기윤, [中國思想의 根源], 중국문화연구소 역, 서울: 문조사, 1989, P. 43] "유"(儒)라는

글자는 본래 "학자" 혹은 "문사"를 뜻하는 것이었다. 유에 속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옛 경전에 밝은 교사들이었고, 고대적 문화유산의 상속자들이었다. 공자는 이러한 사람들의 지도자였으므로 그의 사상을 따른 학자들이 "유가"(儒家)라고 부른 것이다. 춘추시대의 말엽까지만 하더라도 유가는 다만 직업상의 한 계급일 뿐이지 학파로서의 성격을 띤 것이 아니었다. 유가가 학파로서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전국시대의 초엽이었다. [공자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 [춘추](春秋)의 연대기에 포함된 부분을 "춘추시대"라고 부르나, 그것은 기원전 481년으로 끝난다. 보통은 그보다 훨씬 후인 기원전 5세기의 종말까지 춘추시대에 포함시킨다. 그리고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어 기원전 403년 당시의 강국인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의 3국으로 분리된 시기부터의 역사를 기록하였고, 그 이후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공자가 죽은 후에 그 제자들 중에 어떤 이는 스승의 도를 이어 받아 사숙(私塾)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고, 어떤 이는 연줄을 찾아 당시 전국시대의 어느 왕가의 조정에서 벼슬을 얻어 관료가 되거나 교육에 종사하거나 했다. 그들은 공자의 도를 전하면서 유학의 기초를 형성하고 하나의 독특한 학파로서의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가가 하나의 학파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이를 본받아, 그리고 이에 대항하여 새로운 학파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묵작(墨雀)의 사상을 이은 묵가(墨家)와 양주(楊朱)의 사상을 이은 도가(道家)가 그것이다. 장기윤(張其윤)은 유가가 도가와 묵가와 다른 점을 두 가지로 언급하였다.[P. 46] 하나는 자유의 개념에 관련된 것이다. 도가는 방임을 위주로 하고 묵가는 통제를 위주로 하여 극단적인 대립을 이루었으나. 유가는 중용을 숭상하여 예의 개념으로 둘을 절충하였다. 다른 하나는 평등의 개념에 관련된 것이다. 묵가는 겸애(兼愛)를 제창하고 도가는 제물(齊物)을 제창하여 모든 차별을 없앤 절대적 평등을 주장하였으나, 유가는 의(義)의 개념을 내세워 적절한 질서의 필요를 강조하고 차등주의를 표방하였다.

위의 세 학파 가운데 묵가의 사상은 후세의 사람들이 발전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漢) 나라 이후에는 더 이상 성행하지 못하였다.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중에서 후에 사상의 양대 주류를 형성해 온 학파는 유가와 도가이다. 표면상으로 볼 때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풍우란은 둘은 동일한 막대기의 양쪽 긑일 뿐이라고 비유하였다.[풍우란, P. 37] 그들은 모두 농업을 근본적인 생업으로 하는 고대의 사람들이 해와 달의 운행과 사계절의 순환과정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나타난 사상체계이며, 그러한 생활 속에서 자연사와 인간사를 두고 통찰한 결과가 다른 의견으로 나타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유가가 [주역]을 해석하여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고 더위가 가면 추위가 온다"[寒往則署來, 署往則寒來, [周易], 繫辭 下]고 하고 자연적 순환의 새로운 출발을 가리키는 복괘[복괘의 해설]에서 천지의 핵심을 파악한다고 한 것과 유사하게, 노자의 [도덕경]에는 "되돌아 가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다"[反者道之動, 노자, [도덕경](道德經), 제 10장]라고 한 것이 있다. 두 학파는 자연과 우주의 운행에 대한 동일한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도가는 원시사회의 단순성을 이상화하고 문명을 비판하는 경향을 취한 반면에 유가는 인간의 사회적 삶의 도리를 밝히는 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 도가는 전원적 농촌의 평화를 이상적인 세계로 묘사하였고,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을 동경하면서 자연, 즉 우주와 합일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유가는 농경사회의 경제조건에 따른 가족제도를 중심으로 사회제도의 질서을 세우는 도리를 추구하고 이론화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 우리는 유가적 전통을 중심으로 교육사상사를 다루게 된다. 그것은 한국의 교육사상에 도가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혹은 구체적으로 미친 바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사상사로 말하면 중국 유학의 영향과는 별도로 삼국시대, 신라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의 불교를 비롯한 교육사상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의 교육사상의 배경과 그 흐름을 이해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히려 고전유학과 신유학의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검토하는 것이 우선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된다.

장기윤은 전목(錢穆)을 인용하여 유가사상의 핵심을 "중용(中庸)의 도"에 있다고 하였다.[p. 68) "중용"은 곧 "중화"(中和)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중"(中)이며 나타나되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가 "화"(和)이다. [[중용]] 그러므로 중과 화의 두 개념은 희노애락의 전후 상태에 각기 적용되는 것일 뿐,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중은 천하의 근본이고 화는 천하에 통용되는 도이므로, 중과 화가 철저히 발휘되면 만사가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된다. 주자(朱子)는 중의 개념을 해석하여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것"(중용장구 2)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평상"(平常)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바뀔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와 유가의 중용은 인성론적 혹은 행위론적 수준의 개념만이 아니라 우주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중용"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golden mean)이 있다.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실천적 이성이 작용하는 원리로서 사용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이론적 이성과 실천적 이성으로 구분하고, 전자는 인간의 마음이 사물을 관조할 때 제일원리를 발견하고 종(種)과 유(類)의 개념적 망에 의해서 대상을 파악할 때 작용하고, 후자는 인간의 행위가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 위치를 지키는 것을 의미하였다. 중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사한 특징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으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공장의 중의 개념과는 무관하지만 화의 개념에 가까운 것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인간의 기질적 특징이 작용할 때 과다하거나 부족하지 않는 상태, 예컨대 만용을 부리거나 비겁하지 않는 상태의 것을 용기라고 하듯이 실천적 행위가 덕성(virtue)을 가지게 하는 조건이다. 이에 비하여 공자와 유가의 중용은 인성론적, 행위론적 수준만의 개념이 아니라 우주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유가사상은 치우치지 않으며 지나치지 않고 모든 일에 있어서 전체의 한가운데를 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무엇의 한가운데라는 말인가? 전목과 장기윤은 유가사상, 특히 공자의 사상은 묵가와 도가 사이의 한가운데를 이룬다고 하였다.(전게서, p. 68) 물론, 공자는 묵자나 양자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이므로 두 사상을 절충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묵가는 묵가대로 도가는 도가대로 발전하였지만, 공자의 사상은 이미 그 중도를 취하여 있었다는 것이다. 전목과 장기윤에 의하면, 중용의 도는 양자의 이기주의와 묵자의 정열을, 양자의 개인편중과 묵자의 사회편중을 조화시키는 사상적 체제로서의 지녔다는 것이다. 공자의 사상은 하늘을 떠받드는 묵자의 정신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 자유를 존중하는 양자의 정신을 보존하면서 어느 것으로 치우침이 없다.



君子敎育論

공자는 중국에서 공부자(孔夫子)라고 불려져 왔고 서양에서 공자를 일컬어 Confucius라고 하는 것도 바로 거기에서 온 표현이다. 그의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라고 한다. 그는 기원전 551년에 노(魯) 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출신이었으나 관직에 투신하여 50세 때에는 높은 관직에 등용되었다고 한다. 정치적 모략으로 그 직책에서 물러난 후에 13년 동안 그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국을 순방하였으나 어느 나라에서도 성공치 못하고 노년에 노 나라에 돌아와 기원전 4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공자의 사상에서 중심되는 개념은 "인"(仁)의 개념이다. 우리는 그 말을 "어질 인"이라고 하듯이 "어질다"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번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만으로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다. 우리말의 "어질다"라는 말은 마음이 너그럽고 인정이 두터우며 덕행이 높은 인격의 특징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칼날 같이 분명하고 사물을 보는 눈이 명석하고 지혜로우며 엄격하기만 한 인격의 소유자를 우리는 "어진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감싸주고 매사를 따지거나 밝히려고 하지 않으며 아무 것이나 용서해 주는 심성의 소유자도 때때로 "어진 사람"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어질다"는 우리말은 일상적인 용어로서 사용되는 것일 뿐,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체계적으로 밝힐 수 있는 이론적 용어는 아니다. 국어 사전에 그 뜻을 진술하고 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학(儒學)에서, 공자가 말한 "인"의 개념을 "어질다"의 말이 지니는 의미만으로 이해되기는 어렵다. 물론, 공자가 사용한 인의 개념에는 우리 말의 "어질다"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또한 그것을 순수한 우리말로 반드시 표현하도록 강요한다면 "어질다"의 말 이외에 또 다른 무슨 표현이 있겠는가?

대부분의 이론적 용어들이 그렇지만 인의 개념도 공자가 그 말을 사용할 당시에는 그 자체로서 일상적 용어에 불과하였고 체계적인 의미를 지닌 이론적 용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공자가 그 말을 자신의 사상과 교육을 가르칠 때 기본적인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인간의 행위와 사회의 제도를 설명하는 이론적 용어로서의 힘을 지니게 되었고, 또한 후대의 사람들이 그 개념을 다른 개념들과 관련시켜 해설하고 분석함으로써 그 의미의 함축성이 매우 크게 된 것이다."인"이라는 말의 상형적(象形的) 구조로 보아 그것은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특징을 나타내고, 확대해서 해석하면 인류의 공통된 속성이며 인간을 다른 모든 동물로부터 구별짓는 특징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서양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인간의 핵심적 본질로 규정하고 그것이 제 기능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다하는 것으로 본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공자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것은 인간성의 핵심적 본질이라고 하였다. 완전히 그것을 꽃피우는 것, 그것은 바로 인간으로서의 삶의 과업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은 지식과 지혜라는 가치를 획득하는 기관으로 이해하고 그것의 특징을 기능적 능력으로 한정한 데 비하여 공자의 인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기능적 특징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삶을 통하여 실현시켜야 할 원리(혹은 도)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성이 작용한다"는 말은 옳으나 이성을 실현한다는 말은 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인이 작용한다"는 말도 가능하고 "인을 실현한다"는 말도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 차이는 다소 암시된다.

그러므로 공자의 경우에 인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생활은 어떤 다른 보상을 기대하지 않으며, 인을 희생시켜 가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히려 쾌락, 재산, 명성, 권력 따위의 모든 다른 가치들은 인을 실천하기 위해서 때로는 버려야 한다. 그러나 공자는 인을 추상적 능력이나 이념으로 이해하거나 논리적-개념적 분석을 통하여 그 뜻을 가르치고자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이 관념적인 이해나 관조적 대상이 아니라, 실천을 통하여 체득될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제자에 따라서 인을 실천하는 과제를 달리 말하였다.

제자들이 인에 관해서 질문했을 때, 공자는 인의 개념을 정의한다든가, 아니면 한 마디로 인을 밝힌 일이 없다. 어떤 구체적인 행동의 실천을 언급하면서 거기에 인이 담겨 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번지(樊遲)가 인을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평소에 일이 없이 한가로히 있을 때도 공손한 태도를 가지고, 일에 임하였을 때도 경건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도 충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비록 오랑캐의 나라로 갈지언정 이 세 가지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논어, 자로 19) 그러나, 사마우(司馬牛)가 인을 물었을 때 "인자는 말함을 어려워 한다"고 하고 "행함이 어렵거늘 어찌 말함이 어렵지 않겠느냐?"(논어, 안연 3)고 덧붙였다. 그러나 자장(子張)에게는 또 이렇게 대답하였다. "다섯 가지를 실행하면 그것이 곧 인이다. 공손하고 너그러우며 믿음성있고 민첩하며 은혜를 베푸는 것이 그것이다. 공손하면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며, 너그러우면 인심을 얻게 되고, 믿음성이 있으면 사람들이 무엇이든 맡길 수 있으며, 민첩하면 공을 이루고, 은혜를 베풀면 사람들의 도움을 저절로 받을 수 있다."(양화 6) 그런가 하면, 중궁(仲弓)에게는 또한 달리 대답하였다. "문을 나서면 몸가짐을 바르게 하되 귀한 손님을 맞는 듯이 하고, 사람들에게 무엇을 시킬 때 큰 제사를 받들 듯이 하고, 자기가 하고 싶지 아니한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 그리하면 온 나라 백성의 원한이 없고 온 집안 가족의 원망이 없다." (안연 2)

공자가 이와 같이 인을 달리 가르친 것은 제자마다 인에 이르는 실천의 과제가 다르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실천을 통하여 인을 체득하고, 인을 실천하는 생활에서 가장 초보적인 "효"(孝)를 가르쳤다. 효의 실천은 모든 사람들이 인을 체득하여 인격의 완성적 경지에 이르는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하였다. 공자가 효도를 가르칠 때도 인을 가르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행동의 실천을 언급하면서 가르쳤다. "부친의 생존시는 그 뜻을 다하고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 그 행적을 살펴 3년 동안 부친의 유습을 고치지 않으면 좋은 효자라고 할 수 있다"(학이 11)고 한 것, "요즈음은 봉양함을 일러 효도라고 하나 개와 말도 사람이 기르는 데 공경치 아니하면 무엇이 다르겠느냐?"(위정 6)라고 한 것, 그리고 "어버이 살아 계시거든 멀리 떠나지 말며 부득이 나다녀야 할 경우는 방향을 정해 두어야 한다"든가가 그러하다.

공자는 인을 인간의 핵심적 본질이라고 가르쳤으나 그 개념만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었다. "덕"이라든가 "의"라든가의 다른 규범적 개념들도 사용하였다. 그것은 인의 실천적 내용이나 요소, 그리고 인을 실천하는 사람의 특성을 밝히는 데 필요한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의 개발은 "대인", 즉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을 생각한다"(이인 11)고 하였다. 그리고 "군자는 무엇이 의로운가를 이해하지만 소인은 무엇이 유익한가를 안다"(이인 16)고 하였다.

공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은 "군자"(君子)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군자"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임금의 아들"이지만 본래 그 말은 보통 당시의 봉건제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공자는 군자라는 말을 도덕이나 학문 혹은 재능을 가진 사람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군자는 "가르치는 데 있어서 구별이 없다"(유교무류)고 하여 교육의 평등을 주장한 사람으로 기술되기도 하나 그것은 신분상의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뜻으로 이해될 수는 있으나, "하나를 가르쳐 열을 깨우치지 못하면 가르치지 않는다"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능력적 차등주의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은 선천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양화 3) 중인 이상은 심오한 학리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중인 이하는 그럴 수 없다(계씨 9)고 하였다. "저절로 도리를 아는 자는 상급에 속하고 배워서 아는 자는 그 다음이며, 곤난을 당한 뒤에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고, 모르면서 배우지 아니하면 우민으로서 그 아래에 속한다."(계씨 9) 그러나, 공자가 학리를 익히고 배움을 통하여 안다는 것은 사물의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 원리, 즉 인의 도리를 배우고 익힌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인의 도를 실천하여 성인이 되어야 하지만,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범용한 인간이 수양과 공부를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을 "군자"라고 한 것이다. 공자는 "성인은 만나 볼 수 없고, 군자라도 만나 볼 수 있으면 좋겠다"(술이 25)고 말하기도 하였다. 군자의 기본적인 자질은 인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는 "군자가 인을 버리면 어찌 군자라고 하겠는가?"(이인 5)고 하였다.

공자는 군자의 도로서 인을 가르칠 때 비록 구체적인 행동의 실천을 언급하였지만, 거기에는 회통하는 하나의 원리를 암시한 바가 있다. 그것은 공자가 증자(曾子)와의 대화에서 암시된 것이다. 공자는 "삼(參: 증자)아, 나의 도는 하나의 원리로 회통하고 있다"(一以貫之)고 하자, 증자는 "예"라고 답하였다. 공자가 나간 후에 제자들이 증자에게 묻자, 증자는 "선생님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이인 15)라고 하였다. 충서에 대하여 주자(朱子)는 해석하기를 자기가 바라는 것을 미루어 타인이 바라는 것을 아는 것을 "충"이라고 하고, 자기가 원치않은 것을 미루어 타인이 원치않는 것을 아는 것을 "서"라고 하였다. 충(忠)은 적극적인 개념으로서 인을 실천할 때 남을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신이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하면 남도 이루어지도록 해 주는 것"(옹야)을 것이 충이다. 이에 비하여 서(恕)는 소극적인 개념으로서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것을 뜻한다.충서의 적극적인 면을 [중용](中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 자기가 자식들에게 바라는 그 마음으로 어버이를 섬기며, 자기가 신하들에게 바라는 그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며, 자기의 아우에게 바라는 그 마음으로 형을 섬기며, 벗들에게 바라는 그 마음으로 먼저 벗들에게 베풀어 주어라.(중용)

그리고 충서의 소극적인 면을 후대 유가의 학자들이 "혈구(潔矩)의 도"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귀절이 [대학](大學)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윗사람으로서 싫어하는 것을 아랫사람이라고 하여 시키지 말 것이며 아랫사람으로서 좋아하는 것이라고 하여 위사람을 섬길 때 하는 법이 아니다. 그리고 앞사람으로서 싫어하는 바를 앞서 있다고 해서 뒷사람에게 그것을 쓰지 말 것이며 뒷사람으로서 싫어하는 바를 앞사람을 쫓는 위치에 있다고 하여 그것을 쓰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오른쪽 사람으로서 싫어하는 바를 왼쪽 사람에게 주고 받지 말 것이며 왼쪽 사람으로서 싫어하는 바를 오른 쪽 사람에게 주고 받지 않는 법이다.

이것을 혈구의 도라고 한다. ([대학] 10)

공자의 교육목표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실천적"이라는 말은 좁게 이해될 수도 있고 넓게 이해될 수도 있다. 좁게 이해하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교육받은 결과 직접적으로 실제의 생활에 반영되어 어떤 유용성이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개인적으로는 지식을 배워 관직을 얻는다든가 기술을 익혀 직업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사회적으로는 국가나 사회가 필요로 하는 관리나 기술자를 양성하여 충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넓게 이해하면 고도로 이념적이거나 이론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현실적인 요구와는 무관하게 고답적인 이론이나 사상을 배우고 거기에 전념함으로써 고매한 인격을 갖추어 구체적인 현실에 초연함을 보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삶을 영위하고나 사회적 제도를 운영하는 원리에 관심을 둔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 경우에 이론이나 사상은 그 자체에 가치 혹은 목적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 보다 나은 개인적 혹은 사회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직접적 혹은 간접적 수단이나 방법이 된다는 것으로 수용될 뿐이다. 공자의 교육이 "실천적"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의 것이다.

공자가 교육의 사회적 목적을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두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와 같이 기술적으로 유능한 관료를 만드는 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가 목표로 하는 "교육받은 인간"의 모습, 즉 군자로서의 인간은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이다. 그러한 인간은 물론 인을 소유한 인간이지만 더욱 완전하게 표현하면 지혜(知)와 인의(仁)와 용기(勇)의 덕을 균형있게 갖춘 사람이다.(헌문 30)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의 과업, 즉 학문(文)을 닦고 실천(行)을 중시하며 충의(忠)를 다하고 신의(信)를 지키는 일에 힘써야 한다.

(술이 24) 그러나 공자가 그러한 덕목과 과업을 교육적으로 중시한 것은 그것들이 개인으로서 성공적인 정치적 생애를 살 수 있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교육을 받은 군자들이 통치에 종사할 때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학자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교양인으로서 정치에 종사할 지도자를 기르는 데 관심을 두었다. 그러므로 그가 일차적으로 가르치고자 한 것은 지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집안에 들면 효도하고(入則孝), 밖에 나가서는 사람들에게 공손의 정의(情誼)를 다하며(出則弟), 근신하여 신의를 지키고, 넓게 여러 사람을 사랑하며, 어진이를 가까히 하라. 그리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우라."(학이 6)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법은 전적으로 비형식적인 것이었다. 물론, 수업이나 시험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을 상대로 하여 대화하였고 때로는 질문을 하고 생각할 문제를 던져 주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가 가르치는 방법은 대상에 따라서 달랐다.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도 대상에 따라서 다르다. 논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자로(子路)가 "옳은 것을 배웠으면 곧 행하여야 합니까?"고 물은 즉, 공자는 "부모와 형제가 계신데 왜 여쭈어 보지 않고 행할 것인가?"라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염유(苒有)가 같은 질문을 했을 때 공자는 "들은 대로 어서 행하라"고 하였다. 그것은 염유가 무엇을 행하고자 할 때 언제나 주저함이 있고 자로는 오히려 행함에 지나침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공자는 잘못에 벌하거나 무엇을 강제하기보다는 옳게 행동하도록 자극하고 권유하는 방법르로 가르쳤다.



정명사상과 일이관지의 논리

공자가 증자에게 자신의 도에는 하나로써 꿰뚫는 원리(一以貫之)가 있다고 암시한 바 있으며(논어 4), 그 하나의 원리가 중요함을 말하기 위하여 자공(子貢)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내가 많은 것을 배워서 많을 것을 기억하여 모든 도리를 안다고 생각하느냐?" 자공은 그렇지 않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그렇지 않다. 나는 하나의 도리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다"고 하였다.(논어 15) 공자가 이와 같이 하나로 회통하는 원리가 있다고 할 때, 거기에는 자신의 우주관을 전제로 한 것이다. 즉, 천지의 만물은 천차만별의 복잡성을 띠고 있지만 그 가운데 전체를 하나의 조리바른 계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이관지에 대하여 하안(何晏)은 이렇게 주석하였다. 즉 "만가지 선에는 그 근원되는 것이 있고 만사는 모이는 데가 있다. 천하에 각가지 길이 있지만 돌아가는 데는 결국 같다."[善有元 事有會 天下殊塗而同歸]

증자가 공자의 일이관지를 충서로 이해한다고 언급한 이래 충서의 개념은 유가의 인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충서의 개념을 도덕론적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냐, 아니면 인식론적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냐를 두고 다른 의견이 있어 왔다. 도덕론적으로 이해하면 충서는 "자기의 마음을 다하여 자기를 타인에게 미치게 하는 것"[盡己之心推己及人]이나, 인식론적으로 이해하면 그것보다 넓은 의미가 된다. 호적은 대대례 삼조기(大戴禮三朝記)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충서의 개념을 인식의 방법으로 해석하는 편에 서고자 하였다.


충(忠)이라는 것을 알면 반드시 중(中)을 알고 중을 알면 반드시 서(恕)를 알고 서를 알면 밖(外)을 안다. ... 안으로 생각하는 일이 모두 마음에 합하는 것을 말하여 중을 안다고 한다. 이 중을 실제로 응용한 것을 말하여 서를 안다고 하고, 마음 속으로 서하여 바깥 세계에 견주는 것을 말하여 밖을 안다고 한다. [호적 p. 119]

이러한 의미의 충서는 도덕론적 개념 이상의 것이다. 그리고 호적은 장태염(章太炎)의 [정공하](訂孔下)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충서의 의미는 바로 일이관지 그대로를 말해준다고 지적하고 있다.

마음이 사물을 견주어 볼 수 있는 것을 서라고 하고, 널리 사물을 관찰하는 것을 충이라고 한다. 고로 하나를 듣고 열을 알며 한 모퉁이를 들어서 세 모퉁이를 미루어 아는 것은 서이다. ... 널리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적절히 증거로 삼아 그 중추의 이치를 가릴 수 있는 것은 충이다. (p. 119)

여기에서 충과 서의 두 개념은 서로 의미상 가깝기 때문에 구별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충서"라는 두 글자의 의미는 "서"자의 의미 그대로라고 해도 좋다. 그리하여 호적은 결론적으로 충서는 공문(孔門)의 인식론적 추론의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며, 단지 자기를 미루어 타인에게 미치게 한다고 하는 인생철학적 의미만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공자의 "일이관지"와 증자가 말한 "충서"라는 것은 단지 조리 바른 계통을 발견하고 이것으로써 추론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를 듣고 열을 알게 하고 하나를 들어 셋까지 유추하게 하는 것을 기대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충서가 인식론적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도덕적 행위도 어떤 의미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거기에도 충서의 개념이 적용되고, 공자가 인의 실현을 인간의 자질이며 과업으로 생각하는 이상 충서의 개념이 거기에 일차적으로 적용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로 회통하는 원리는 어떤 내용을 어떻게 포착하는 것일가? 호적은 [역경](易經)에서 그 뜻을 찾고자 하였다. 그에 의하면 역경의 기본적인 개념을 역(易), 상(象), 사(辭)로 들 수 있고, 역은 만물의 변화과정을 상정하는 개념이라면 그것의 질서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단서는 상과 사의 개념이며, 상과 사가 나타내어 주는 바에 의해서 우리는 사물과 우주의 복잡한 구조와 과정을 회통하고 있는 원리에 접근할 수 있다.

우주와 만물, 그리고 그 생성과 변화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원리를 구하려는 노력은 옛부터 동서양의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의 사유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체계적인 철학은 삼라만상의 구성과 변화의 원리를 근원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원리가 무엇일가를 두고 출발하였다.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사물과 현상의 변화를 지배하는 보편적 질서가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들의 기본적인 가정이다.

서양의 고대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은 변화하는 것을 지배하는 변하지 않은 실재(實在)가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동양의 철학자들은 오히려 변화 그 자체를 본질적이라고 보고 그 변화의 과정에 내축된 원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취하였다. "역경"은 바로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우주의 현상과 인간의 삶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기본적인 사고의 틀을 담고 있다.

그 세 개념은 주역에서 전개된 복잡한 것들을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 설명력을 지닌다. "역"은 만물이 변화 속에 있다는 기본 가정을 나타내는 말이며, "상"은 그 변화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사물의 상태 혹은 형상을 나타내는 말이며, "사"는 상을 언어로써 기술하고 설명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천지만물은 도도하게 흘러가는 냇물과 같이 현재에 이르면 곧장 과거를 이룬다. 만물의 변화과정, 이것이 곧 "역"이라는 글자의 뜻이다. 역은 만물의 생성과 창조적 작용을 하는 원천적인 힘으로써 그것이 작용한 결과는 온갖 형상으로 나타나므로 우리는 상을 통하여 역의 진행과 그 질서를 알 수 있다. "하늘에서 형상을 이루고 땅에서 형태를 이루어 변화를 들어낸다."(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易繫辭傳)고 하였듯이 상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우리가 역의 질서에 접근하는 일 혹은 역을 설명하는 일이 어렵다. 모든 상의 원본을 "法象"이라고 한다.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유사한 것이다. 공자는 인류 역사상에 있는 각종의 문물과 제도는 그 기원이 모두 이 상에 있는 것이라고 했고 모든 것들은 하나하나의 법상을 모방하여 일어난다고 하였다. 즉, 상 혹은 법상은 원본적 모형이며 사물은 이 모형을 모방하여 된 것이다. "사"는 상에 이름을 붙이고 그 뜻을 규정하며 또한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사물이 지니고 있는 "물상"(物象)이든지 사람의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의상"(意象)이든지 간에 상이 포착되었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상의 개념은 우주나 사물, 그리고 인간의 제도와 행위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설명력을 지닌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었다. 역은 상에 의하지 않고 이해될 수 없으며 사는 상을 발견하거나 성립시키지 않고 그 뜻을 지닐 수가 없다. 상은 그림으로도 비유될 수 있으나, 그것은 우리의 의식이나 지각의 작용이 사물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깨닫거나 설명하고자 할 때 외형적으로나 내면적으로 지각되는 대상의 구조 혹은 과정의 특징을 의미한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사물 자체가 지니고 있거나 우리의 마음이 성립시키거나 간에 그러한 상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상은 사물의 지각 혹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특질", 혹은 특질적 구조에 상당하는 것이다.

물상은 자연계의 여러 현상을 나타내는 상이고(계사하 2) 의상은 물상을 관찰하여 마음 속에 일으킨 상이다. 주역에서 팔괘는 각기 물상을 표시한다.[주역의 구조] 팔괘들 중에서 둘씩 배합된 64괘의 각각은 의상을 표시한다. 천하의 복잡한 사물을 관찰하여 그 형용을 본따서 사물의 형상을 포착한다. 그것이 "상"이다. 성인은 바로 천하의 움직임을 보고 거기에 회통하는 것(상)을 파악하여 그 전례(典禮)로 삼고 말을 붙여서 길흉을 판단한다.(계사상 12) 공자는 "성인은 상을 세워서 모든 뜻을 밝히고 괘(卦)를 세워서 모든 판단을 하고 사를 맺아서 모든 것을 알려준다"고 하였으며, 우리가 상을 필요로 하는 글로써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로써 뜻을 모두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상을 두어 생각한다고 하였다.(계사상 2)

역경에는 64괘(卦)와 384효(爻)가 있다. 각 괘와 각 효에는 하나의 "상"이 있다. 예컨대 --== ㅡ== (겸, 謙)과 같은 괘는 단지 "지중유산"(地中有山), 즉 대지 가운데 산이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상을 지니지만 그 이상의 길휼과 선악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계사(繫辭), 즉 말을 붙여서 무엇을 고한다. 그 고하는 바가 괘사(卦辭)로서 표현되며, 그것은 --== ㅡ== 겸형(謙亨) 군자유종(君子有終), 즉 "겸손하면 어떤 일에도 형통한다. 이러한 군자는 그 몸의 끝을 온전히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괘사만으로는 길흉을 충분히 알 수 없는 까닭에 각 효에 대한 효사(爻辭)가 또한 따른다.

괘사와 효사의 "사"는 개념 혹은 판단에 해당한다. 그것은 달리 표현해서 상의 "이름"이다. 이름으로서의 사는 의상의 추향(趨向)을 표시하고 행위의 길흉을 밝혀 주는 지침이 된다. 계사하전에 이런 말이 있다.

천지의 큰 덕을 생(生)이라고 하고, 성인의 큰 보배를 위(位)라고 한다. 무엇을 가지고 자리를 지킬 것이냐? 인으로 한다고 말한다. 무엇을 가지고 사람을 모을 것이냐? 재물로써 한다고 말한다. 재물을 다스리고 말을 바르게(正辭)하여 백성의 잘못을 금하는 것을 의(義)라고 한다.(계사하 1)

이 말을 이가원(李家源)은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이가원 역해, [주역], 서울 평범사, 1976) 천지의 큰 덕은 낳고 그것을 모두 기르는 것이요, 천자(天子)의 위치에 있으면서 만민을 기르는 것이 성인의 큰 보배이다. 성인이 천자의 지위를 보존하는 것은 어진 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며, 민중을 모아서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물질을 풍부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민중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 주고 민중에게 교육을 시키고 법에 의해서 나쁜 일을 금하는 것, 이것이 곧 의로운 정치이다.

정사(正辭), 즉 말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바른 것을 가르쳐 준다는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이름을 바로 붙인다는 뜻, 즉 상에 이름을 붙여 사물을 바로 설명해 준다는 뜻이 되기도 하고, 명분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정사"와 "정명"은 같은 것이다. 정사 혹은 정명은 한 편으로 천하의 모든 것을 제대로 보살피고 옳지 못한 것을 금하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정명사상"의 요지이다.

어느 날 자로(子路)가 위(衛) 나라의 임금이 나라의 일을 의논할탠데 무엇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겠는가고 무었을 때, 공자는 "말할 것도 없이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자의 논리는 이러하였다. 즉, 명분이 서지 않으면 말이 순리에 맞지 않으며, 말이 순리에 맞지 않으면 일을 이루지 못하고, 일을 이루지 못하면 예악이 진흥되지 않으며, 예악이 진흥되지 않으면 형벌이 바로 되지 않으며, 형벌이 바로 되지 못하면 백성은 수족을 둘 데가 없어지므로 군자는 명분에 맞는 말을 해야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자로 3)

정명사상은 바로 시비와 선악의 표준을 세우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것은 사물의 상에 바른 이름을 붙이는 것, 즉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고 판단을 바르게 하며 행위의 규범을 바르게 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온갖 복잡한 현상과 이들에 회통하는 상을 포착하여 바른 이름을 붙이는 것이므로, 정명사상과 충서사상과 일이관지는 종국적으로 같은 정신과 윈리를 나타내는 개념들이다. 정명사상은 정치를 논할 때, 충서사상은 도덕을 논할 때, 일이관지는 교육을 논할 때 각기 일차적 의미를 지닌다.



禮와 樂과 詩의 敎育

공자의 시대에 교과목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면 육예(六藝)를 들 수가 있다. 서(書), 수(數), 어(御), 사(射), 예(禮), 악(樂) 등이 그것이다. 공자도 군자는 모름지기 도에 뜻을 두고 덕을 지키며 육예(六藝)를 체득해야 한다고 하였다.(술이 6) 글씨쓰고(書) 수리공부(數)를 하는 것은 당시의 귀족의 자녀들이 배워야 하는 것 중에서 가장 초보적인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활쏘기(射)와 말타기(御)는 제외하였다. 본래 이 두 가지는 전쟁시에 필요한 것이었기는 하지만 단순히 그런 목적으로만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오늘의 체육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예의와 절도를 배운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공자 자신도 활쏘기를 언급하면서 예의를 말한 바 있고(팔일 7) 제자들도 말타기를 했다. 공자가 그 두 가지를 배격했다기보다는 단지 자신이 제자를 교육할 때의 실질적 내용으로 삼지는 않았을 뿐이다. 대신에 공자는 시의 교육적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이러한 관심의 상대적 전환은 종래의 세습적 혹은 군사적 귀족주의의 사고에서 문사적 혹은 도덕적 귀족주의의 사고로의 전환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예(禮)와 악(樂)과 시(詩)는 다소 심오한 것으로 고급 수준에서 가르쳐졌다. 이 교과들은 절제와 조화의 도야를 가능하게 하고 인간의 성정(性情)을 균형있게 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서 공자가 교육에서 가장 중시한 부분이다.

"예(禮)"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겠는가를 물으면, 우리는 "예의" 혹은 "예절"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공자 시대에 사용된 "예"라는 말의 의미는 매우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다. 넓다는 뜻은 예가 종교적 의식과 사회적 관습의 일체, 그리고 도덕적 규범을 총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며, 좁다는 뜻은 인간의 행실과 태도 등에 적용되는 행동적 규범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예"(禮)라는 글자의 상형적 구조는 제사(祭祀)의 기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며, 그 본래의 의미는 종교적 의식과 절차인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후에 그 의미는 점차로 확대되었다.

예컨대, 여섯 가지의 의례(儀禮), 즉 관례(冠禮), 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 향례(鄕禮), 상견례(相見禮) 등의 관습에서 "예"라는 말이 쓰인다. 본래 고대 중국에서는 부모에 대한 제사를 비롯하여 의식이 반드시 성직자에 의해서 집행되지 않았고 가정의 가장도 의식을 주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 의식과 세속적 의식은 확연히 구분되지 않았다. 예의 의미가 반드시 종교적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예는 점차로 사회일반의 관습과 풍속으로 지켜지는 의식이나 절차 등을 포괄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런데, 예의 넓은 의미는 그것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적-도덕적 규범의 모두를 포괄한다.

공자의 예는 법률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두 가지의 기율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다. "예는 미연(未然)에 금하는 것이며 법은 기연(旣然)에 금하는 것이다."(大戴禮記 경해편) 도리에 합치고 행위의 표준이 되고 도덕적 습관을 양성하고 사회의 치안을 증진시킬 수 있는 규범의 모두가 예에 속한다. (호적 151) 공자의 예는 인이 실천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자기를 극복하여 예를 행함이 곧 예이다. 단 하루라도 자기를 이겨 예를 행하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 올 것이므로 인은 자신에게 달린 것이지 남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안연1) 인이란 마음의 자세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생활에서 실천되어야 하고, 그것이 실천된다는 것은 세련된 품행을 통하여 나타내어지는 예의 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은 인격의 내면적 바탕이요 근원이라면 예는 그것이 밖으로 나타내어진 모습이며 군자의 품위 그 자체이다. 그리하여 공자의 예는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 균형을 이룬 교양인의 세련된 품행을 뜻하기도 한다. 그는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수고롭기만 하고, 신중하되 예가 없으면 두렵기만 하며, 용감하되 예가 없으면 난폭하기만 하고, 솔직하되 예가 없으면 경직되기만 할 뿐이다." (태백 2)

그러나 공자의 예는 외양적 갖춤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지키면서 공경스럽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팔일 26) 본래 당시의 귀족들이 지켜야 하는 행동의 형식적 규범이 얼마나 엄격하였던가는 우리가 [예기(禮記)]에 쓰인 행실의 도리들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그 한 가지만을 보면 이런 것이 있다.

무릇 손님을 인도해 들어가는 이는 문마다에서 손님에게 먼저 드시라고 하면서 사양한다. 손님이 침실의 문에 이르면 주인이 손님에게 말하고 들어가 자리를 편 뒤에 나와서 손님을 맞아들인다. 손님이 주인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굳이 사양한다면 주인이 앞에서 손님을 인도하여 들어간다.

주인은 문안에 들어가서 오른 쪽으로 가고, 손님은 문안에 들어가서 왼쪽으로 간다. 주인은 동쪽 계단으로, 손님은 서쪽 계단으로 향한다. 손님이 만약 주인보다 지위가 낮으면 주인이 오르내리는 계단의 동쪽을 향하여 간다. 주인이 굳이 사양하면 손님이 다시 서쪽 계단으로 간다.

주인과 손님이 서로 먼저 올라가기를 사양하다가 주인이 먼저 올라가면 손님이 뒤따라 올라가는 데 한 계단마다 두 발을 모아가면서 걸음을 이어 올라간다. 동쪽 계단으로 올라갈 때에는 오른쪽 발을 먼저 내고 서쪽 계단으로 올라갈 때에는 왼쪽 발을 먼저 낸다.

장막과 주렴 밖에서는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으며, 마루 위에서는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으며, 옥(玉)을 잡고는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으며, 마루 위에서는 발자취를 서로 붙이고, 마루 아래서는 서로 떨어지게 걷는다. 방 안에서는 팔을 벌리고 빨리 걷지 않는다.

남과 나란히 앉을 때에는 팔을 옆으로 벌리지 않으며, 서 있는 이에게 무엇을 줄 때에는 꿇어 앉으며, 앉은 이에게 줄 때에는 서서 주지 않는다. ([예기] 상, 곡예 상 44)

물론 이러한 세련된 행동은 마음 속의 인을 예의 형식으로 나타내는 방식이다. 공자에게서 인과 예는 군자의 양면적 자질이다. 그러나 형식적 규범의 세련성은 겉보기에만 좋을 뿐 실제로 마음은 공허한 것일 수가 있다. 유교의 관습은 후일에 그러한 특징을 보이기도 하였다.

공자의 예는 세련된 균형과 절도를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균형과 절도는 성정의 개념이 요하는 것이다. 여기에 공자가 음악의 교육적 중요성을 든 이유가 있다. 음악이 여러 가지의 의식에서 연주된다는 것은 예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이 균형과 절도와 조화의 질서를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의 음악은 예악으로서 예(의식)에서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음악을 직접 가르쳤다는 기록은 없으나, 남과 함께 노래 부를 때 그가 잘하면 반드시 다시 시킨 후에 이와 함께 불렀고,(술이 31) 예악은 도덕적 정서를 함양하고 군자가 배워야 할 중요한 것으로 언급한 것은 여러 군데 있다. 공자가 노(魯) 나라의 악관에게 한 말이 있다. "음악은 저절로 모든 것을 알아서 한다. 연주를 시작하면 음률은 모여서 화음을 이루고, 음률은 각기 맑고 밝게 이어지며, 점차 가경에 이르러 완성된다."

(팔일 23) 당시에 여러 가지의 악기로써 연주되는 음악이 있었던 것 같다.공자는 음악이 예와 도덕에 관련이 있음을 말하였다. "무릇 음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며, 악은 윤리에 통한다. 음을 상세히 살피면 악을 알게 되고 악을 잘 살피면 정치를 알게 된다." 표문태(表文台)는 이 귀절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음은 마음의 표현이고 리듬이다. 악은 인간의 도의심과 통한다. 인생의 도가 여기에 표시되어 있으므로 악을 잘 터득하면 정치의 이치를 알게 된다. 그것은 정치도 천리(天理), 즉 인간의 보편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표문태 주해, [논어], 서울: 현암사, 1966, 258)

시(詩)는 육예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공자는 그 교육적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공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시는 감흥을 일으키며, 세상을 관조할 수 있게 하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하며, 그릇됨을 원망할 줄 알게 하고, 가까히는 어버이 섬김을 가르치고, 나아가서는 임금 섬기는 바탕이 되며, 새와 짐승과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하기도 한다."(양화 9) 그는 "시로써 일어나서 예로써 서며 악으로써 완성한다"(태백 8)고 하였다. 이 말은 시에 의해서 정서를 북돋우고 예에 의해서 품위를 세우며 악을 통하여 군자의 에서 도덕을 완성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시와 예의 관계는 인의 도리에 따른 정조를 일으켜 예로 표현되게 하는 데 있어서 시가 정서를 순화하고 성정을 가다듬고, 희노애락의 감정이 중(中)을 유지하면서 화(和)를 이루는 것, 즉 중용의 덕을 성취하는 마음을 형성시킨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음악과 예의 관계는 예가 그 의미와 질서를 따라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실천된 극치의 상황에 있게 한다.

시는 고대의 문학이며 문학은 오직 시 뿐이었다. 공자는 시가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한다고 믿었다. 그는 시경 3백편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에 간사한 생각을 없게 한다"는 것이라고 하였다.(위정 2) 그리고 시경의 "관저"(關雎)에 실린 시는 즐겁되 결코 음탕함에 흐르지 않으며, 슬프되 감상(感傷)에 흐르지 않는다고 하였다.(팔일 20) 이렇듯 시는 인간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인의 정조가 순수하게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정서를 제공해 준다.

 

출처: 차이나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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