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의 생애] 데바닷타의 독립(獨立)
부처님의 전도의 나날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개천이란 개천은 모두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이,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歸依)했다고 전할 정도다. 이는 한결같이 부처님의 성품이 지닌 원만무결(圓滿無缺)한 덕(德)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부처님은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고 하였다. 큰 곳,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다 보고, 세상을 받아들이며, 세상을 품고 간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종교의 선전에 뒤따르기 마련인 박해는 부처님이 아는 바 없던 일인 것이다. 다만 몇 가지 전해진 것으로는 앞서 기록한 바와 같이 코삼비시(市)에서 포교를 할 때 처음에 약간의 비방이 있었던 사실과 그리고 언제의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위성에서 외도(外道)가 친챠(▩遮)라는 미녀를 시켜 부처님을 중상한 사실, 그리고 또 같은 사위성에서의 일이지만 순다리(孫陀利)라는 비구니가 외도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부처님과 관계가 있었던 듯이 날조(捏造)하여 말을 퍼뜨리고 다닌 사실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근거 없는 사실이었으므로 곧 사라지고 말았고, 부처님이 있는 곳에서는 초목이 바람에 나부끼듯이 사람들의 귀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만년에 이르러 부처님과 불교교단에 있어서 처음으로 중대한 사실이 일어났다. 그것은 데바닷타의 반역(反逆)이었다.
데바닷타(提婆達多)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아난다의 형이란 설과 야쇼다라의 동생이라는 설이 있으며, 이 후자가 옳은 것같이 생각되지만 어쨌든 샤카족의 명문(名門)출신으로 상당한 인물이었던 것임은 틀림이 없다. 부처님의 근친(近親)으로서 명문의 출신이고 위풍(威風)도 당당하고 아름다우며, 인물도 착실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신망(信望)이 상당히 두터웠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세간에 대한 집착심이 근절(根絶)되어 있지 않고 출세간의 일, 다시 말하면 종교의 일을 세간의 이익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삼으려는 심사(心思)가 그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무엇인가 세간의 이득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어디에든지 나타나던 것이, 그의 교단 안에서의 지위가 점차 향상됨에 따라 더욱 격화(激化)되어 자연히 반기(反旗)를 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이 어느 때의 일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아쟈타삿투(阿▩世王)의 왕위(王位) 찬탈(簒奪)이 부처님이 돌아가기 8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면, 그 때가 부처님의 71세 때의 일이고, 이것보다 1-2년 앞선, 즉 부처님의 69세 또는 70세 때의 일이라고 짐작된다. 이 때 데바닷타의 나이가 몇이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가령 24-5세 때에 출가했다고 하면, 그 때부터 31-3년은 지났으므로 56-7세는 되어 있어야 한다. 야쇼다라비(妃)의 동생이라고 한다면 7-8세 차의 동생이 되며 아난다의 형이라고 한다면 2-3세 차의 형으로서 출가 후 30여년은 그럭저럭 무사히 지내왔으나 56-7세 때에 태자의 지위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불평이 많던 아자타삿투 태자의 귀의를 받게 되자, 반역의 심사(心思)가 더욱 굳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괴롭혔다는 것은 상당히 오래된 시대의 시구 속에도 나오고 있다.
“데바닷타는 지자(智者)로서 알려지고 몸을 닦은 자로서 존숭(尊崇)되고, 명예는 불길처럼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게으름에 젖어, 여래를 괴롭히고 네 개의 강이 있는 무서운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떨어졌다고 전해진다.”
이 시구에서는 데바닷타가 게으름에 젖어 여래를 괴롭혔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본래 그의 명성은 자못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었음도 알게 해준다. 그가 게으름에 젖었다는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표면상으로 볼 때 그는 오히려 엄격한 고행주의를 표방하고 부처님의 중도(中道)의 정신을 배척까지 하였기 때문이다. 후대의 기록들을 보면, 그는 불교교단의 수행방법이 당시 인도의 다른 종교에 비해서 미온적(微溫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데바닷타는 교단 안에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조항(五個條)의 준엄한 실행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① 죽을 때까지 숲속에 살 것.
② 죽을 때까지 탁발하며, 초대를 받고 포식(飽食)하지 말 것.
③ 죽을 때까지 누더기를 기워 입고, 남이 주는 시의(施衣)를 입지 말 것.
④ 죽을 때까지 나무밑에서 살며, 지붕 밑으로 들어가지 말 것.
⑤ 죽을 때까지 어육(魚肉)을 먹지 말 것.
이 다섯 가지 조항은 전적(典籍)에 따라서 조목이 다른 것이 있으나 대체로 같은 정신을 나타내 주고 있다. 다섯 조항 중의 ①과 ④는 본래 같은 것이며, 이 중에서 ①, ②, ③은 비구·비구니가 지켜야 할 필수조건이 되어 있는 것이므로 무슨 새로운 주장이 아닐 것같이 생각될 수가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원칙들에 대해 예외를 허락하여 그 실행을 완화(緩和)하고 있었으므로 당시의 고행자의 견지에서 보면 문제가 안될 정도로 쉬운 일이라고 생각되었을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데바닷타는 이 원칙들을 엄격히 실행할 것을 주장하고 일반 민중들로부터의 존숭도 받을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앞서 인용한 시구 중의 ‘게으름에 젖어’란 말은 부처님의 법을 제대로 따르는 그 정신적인 면에서 소홀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부처님의 정신이 ‘마음’ 위주라고 한다면 데바닷타의 원칙은 ‘율법조항(律法條項)’ 위주라고 할 수가 있다. 부처님에게는 무소득(無所得)의 마음이 있었는데 데바닷타에게는 어디까지나 유소득(有所得)의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이러한 데바닷타의 요구를 듣지 않자, 데바닷타는 오백의 비구들을 데리고 상두산(象頭山)으로 들어가 거기에 자리잡고 분당(分黨)을 획책했던 것이다. 이 중에는 코칼리카(瞿伽梨), 카타모라카팃사카(伽留羅提舍), 칸다 데비야풋타(▩陀達多), 사뭇다닷타(三聞達多) 등이 있었고, 그 강력한 지지자(支持者)며 공모자(共謀者)로서 아자타삿투 태자가 있었다.
부처님의 교단 안에는 물론 여러 가지 분자(分子)가 들어와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인도의 고행주의 풍습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데바닷타의 율법주의에 동조(同調)하는 자가 결코 적지는 않았던 것이며, 불교 교단에는 일대 동요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 데바닷타의 일당에 가맹(加盟)한 대다수는 사리풋타와 목갈라나 이대(二大) 제자의 힘에 의해 복귀(復歸)하였다. 그러나 데바닷타와 그 측근들의 반대공세는 더욱 맹렬해지는 것이었다.
석가/이기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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