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
전 철
권터보른캄 | 나사렛 예수 Jesus von Nazareth
I
복음서에 있어서 신앙과 역사
1.예수전을 쓸 만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벌써 아무도 없다. 이것은 거의 200년 동안 결코 부실하지 않았던 비 상한 노력을 들여 교리와 교의의 온갓 '분장'에서 풀려 나온 역사적 예수의 생애를 회복하고 기술하려던 한 연구의 성과인데, 오늘도 별로 다툴 여지가 없는 놀라운 성과이다. 예수전 연구의 마지막에 이르러 연구 자 체의 실패를 인식한 셈이다. 쉬바이쳐는 그의 고전적 저작 "예수전 연구사"Die 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에서 이 연구에 기념비를 세웠지만, 동시에 그는 거기에 조사를 올렸던 것이다.
2.교회와 그 전승의 관심은 과거의 저 때Einst가 아니라 오늘Heute에 머물고 이 오늘은 단순한 달력 날짜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결정된 현재와 동시에 하나님에 의하여 타개된 미래의 의미를 가진다. 하 나님에 의하여 끌려 나와서 규정되고 예수의 못박힘과 부활을 통하여 열려진 지금Jetzt과 미래의 그 ? Dann의 빛 아래서 교회는 수난 금요일과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과거 역사를 이해하며 이것을 언제나 현재 에 관여하며 미래를 열어주는 역사로서 교회의 선교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렇게 예수의 역사의 이해는 끝 에서 시작하여 다시 끝으로 넘어오는 이해이다. 복음서 안에 모여진 전승은 모두 다 이런 이해로 판찍혀 있다.
3.전승은 땅 위에 인물로서 교회와 만난 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자로서 교회에게 자신의 현재를 증명되신 분을 자기자신을 넘어서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승은 각층과 개개의 단편에 있어서 예수의 역사 적 현실성과 그의 부활의 현실성을 증거하는 증언이다. 따라서 복음서의 케류그마 안에서 역사를, 또 이 역 사 안에서 케류그마를 찾는 것이 우리에게 지워진 과제이다. 만일 이 둘을 꼭 구별해야 한다면, 이는 그 둘 의 순서와 서로 엇갈려 끼어든 것을 보다 뚜렷하게 하려는 것뿐이다.
4.복음서와 그 안에 수집된 전승의 발생 기원을 신앙과 동떨어진 어떤 사실적 관심에 돌리는 것만큼 그릇된 일은 없을 것이다. 더우기 그 안에서 예수는 그리스도, 즉 땅 위에 사신 분과 믿어진 분이 하나라는 고백만 이 표명되어 있다. 따라서 복음서가 증언하는 바는 신앙은 그 자체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어떤 미리 주어진 역사에 의하여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인데, 그 역사는 신앙이 서 있는 바로 그 현재 때문에 지금일지라도 모든 복음서에서 처럼 오직 과거의 시칭에서만 말해져야 하는 것이다.
II
시대와 환경
1.예수의 역사는 로마의 공문서와 연감이나 어느 유대의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거대한 세계사는 그 를 별로 주목해 보지 못하였다. 그를 대체로 언급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이외의 소수 자료들은 얼른 셀 수 있을 정도이다. 현대 사람은 이 자료를 편견에 매이지 않은 것이라 하여 특별한 의의를 이 자료에 인정하 는 것이 예사이다. 가장 중요한 자료는 로마의 역사가 타키우스의 연대기에 있는 기록인데, 이것은 네로의 치하에서 당한 그리스도인의 첫 박해에 관련된 것이었다. 큰 화재가 로마의 대부분을 불태웠었다. 미움을 사고 있던 황제 자신이 화재를 일으킨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인류의 적"에 해당하는 그리스도 인에게 혐의를 전가시키고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잔인한 연극으로 죽게 하였던 것이다. 이 관련에서 타키투 스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이름은 디벨리우스 치하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사형 판결을 한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한다. 이 증오할 만한 미신은 한동안 배척을 받았으나 그 폐해가 시작 된 유대에 번졌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온갖 흉악하고 욕된 것이 다 몰려드는 로마에까지 번져서 수많 은 추종자를 얻고 있다"
2.예수시대의 유대 민족은 작고 보잘 것 없으며 국가적으로는 무력하다는 선고를 받고 또 버림받은 메마른 땅에 살고, 어느 세계의 역사의 열강과는 전혀 다른 민족이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한한 이래, 그들은 성전 중심의 공동체가 되어 오래 연속되는 외국 지배로 말미암아 정치적 자주성을 잃고 말았다. 즉 페르샤 의 지배로부터 알렉산더 대왕에 이르기까지, 이로부터 애굽의 프톨레미까지, 또 1백년 후 수리아의 셀류쿠 스까지, 마지막으로 로마인의 지배에 이르기까지였다. 이렇듯 엇갈리는 역사 속에서라도 작은 이스라엘은 결코 줏대없는 노리개공은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동방 민족들 사이에서매우 특이한 무엇을 가지고 있었 다. 그들의 하나님은 주변 세계의 신들과는 다른 분이요, 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이 민족의 고유한 삶의 중추요 유지하는 힘이다.
3.유대 민족은 그들의 종교 관습에 있어서 로마의 지배 밑에서도 우선 제한을 받지 않는 대로였다. 실로 이 민족의 종교적 감정에 대한 배려는 대단했던 것으로 로마 군대는 유대인에게 특별히 거리낌이 되는 황제의 초상을 들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이 예사일 정도였다.
4.이 격동하는 역사를 살펴볼 때, 놀랍게도 이 역사는 이 민족을 이해함에 있어서 다만 간접적으로 무슨 기여 를 해 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유대 민족 이외의 어떤 민족에게도 적용되는 사실, 즉 모든 민족들은 그 역사로부터 자기의 성질과 형태를 얻고 또한 역사 안에서 그 민족의 특징과 본질을 자연히 드 러낸다는 사실이 유대 민족에게는 매우 제한된 한도 안에서만 적용된다. 이 민족은 자기들 위로 지나가 버 렸거나, 자기들이 너무도 고통스럽게 그 와중에 휘몰려 들었던 엇갈리는 역사 안에서 생명력을 과시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런 역사에 거슬러서 증명한다. 이것은 그들의 생명력이 그때 그때의 새로운 상황과 권력 에 대하여 강인한 인내력으로 반항하며 거절하는 것 안에 결정적으로 깃들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 국가적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기까지 끊임없는 정치적 파국에 오래 견디어 남은 이유 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오직 독자적인 의미에서 유대교에 적용된다. 확실히 다른 민족들의 경우에도 여기 저기서 실로 무진장한 생명력을 인정할 수가 있는데 이것은 깊은 데서 졸고 있다가 극심한 참패에서도 다 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한 민족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밖의 다른 민족을 규정하는 자연적 전제조건, 이를테먼 지리적 위치, 자연자원, 환경, 역사, 문화 등을 고집하는 모든 관찰은 이스라엘의 특이성 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민족의 종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는 그들의 삶의 법칙이다.
5.유대인의 신앙하는 하나님은 동양과 희랍 종교의 신들과는 다르게 신화와 신상을 갖지 않는다. 또한 인간을 신의 자연적, 초자연적 능력에 참여시키려는 제의가 행해지지 않는다. 실은 이스라엘의 종교에도 신화적 요 소가 있기는 하다. 즉 원시의 괴물에 대항하는 신의 창조의 투쟁을 하는 고대 동양의 신화는, 우선 시편에 많은 흔적을 남겨 놓았고, 신화적인 요소가 이스라엘의 메시아 대망에 들어가 있고, 그 후기의 묵시문학적 희망을 아로 새겨놓고 있다. 제의와 경건마저도 종교사가 넓은 범위에서 점술과 마술, 희생이나 정결의식에 서 되찾고 있는 생각과 동기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현저하게 부숴져 있고 변두리로 몰려서 전혀 다른 신 인식에 이바지하도록 되어 있다. 신화와의 끈질긴 투쟁은 이스라엘과 유대 종교사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6.얘수 시대의 유대교와 종교의 모습은 앞서 약술한 데서 보는바와 같이 물론 일률적인 것은 아니다. 상세한 점에서는 매우 상이한 여러 집단과 경향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역시 복음서 들이 보여주는 대로 바리새파의 집단이다. 이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경건파'라는 이름으로 마카비우스 시대에 처음 출현하여 저 세속화한 제사계급과 처음은 동맹을 맺은 사이였다가 즉 시 이와 극도로 대립하 고 나섰다. 그들의 취지는 일상생활의 모든 분야와 상황에서 율법을 엄격하게 타협없이 지키는 일이다.
7.예수의 설교는 종교적 정치적 표어들과 아무 관계 없다. 그러나 이렇듯 수많은 인물들과 운동들이 예수와 동시대에 일어났다는 것은 오마인들에 의한 예수의 혐의와 유죄 판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 시대의 메시아적 예언자들 중에 단 한 사람은 예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세례 요한과 그가 새로 일으킨 운동이다.
8.요한도 예수와 마찬가지로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예언자이다. 정치적 선동자나 메시아 참칭자와는 아무 런 관계도 없다. 오히려 그의 금욕주의적 복장, 즉 털옷과 가죽 띠며 그의 빈약한 식생활은 예언자 엘리아 를 상기시킨다. 또 그의 등장하는 장소, 즉 남쪽 강줄기의 넓은 골짜기에 있는 요단 초원이 의미 있다. 고 대로부터 광야는 이스라엘의 종말의 희망이 결부된 장소인데, 이는 종말의 때가 태초와 같을 것이라는 것 이 옛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세속화의 장소를 떠나서, 또한 신성시되는 예배의 장소마저도 멀리 또나서, 이 스라엘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최후의 계시에 대하여 준비를 갖추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은 회개하라고 외치는데, 이 외침은 모든 사람에게 향해지는 것이다.
9.세례자가 통고하는 메시아는 세계 심판자이다. 정치적 희망의 성취자가 아니라, 마지막 수확을 거두어들이 는 자이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 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마 3:12). 또 하나의 비유를 써서 말하고 있는 같은 세례자의 외침은 "오고 있는 자"의 할 일은참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 회개의 준비가 없는 자들을 진멸하기 위한 성령과 불의 세례라고 한다(마 3:11).
10.우리는 요한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했는가에 대하여 사실적으로 신빙할 만한 것을 알고 싶어할 것이다. 그 는 예수를 약속된 메시아로 인식하였는가? 이런 인식이 그에게 나중에야 떠올랐을까?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사실 그렇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는 잘 알려진 관념이라고 해도 우리의 판단은 여기서 비 판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세례자의 설교자의 설교에서의 메시아상은 우리가 위에서 본 대로 예수에 게 들어맞지 않는다. 세례자의 멧시지는 하늘의 세계 심판자를 말하고 있지, 땅 위의 인간을 말하고 있지 않다. 역시 요한의 운동이 계속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오직 예수의 메시아성(性)과 그의 교회에 대한 명백한 모순관계에서만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III
나사렛 예수
1.예수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은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모호하다. 적지 않게 서로 상이한 마태와 누가의 서 사들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메시아 교리의 전설과 사상에 너무 부풀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사실적 확증 을 위해 이용할 수는 없다. 이 본문들의 해석과 의미는 별개의 문제이다. 예수의 고향은 반 이교적인 멸시 받는 갈릴리이며 나사렛이 그의 고향 마을이다. 그의 가족은 마카비우스 시대 이후, 다시금 예루살렘의 성 전 제의와 유대교의 율법적 관습에 집착했던 유대인 주민층에 속해 있었음이 확실하다. 다만 종족 관념으 로 눈이 어두워진 비평가만이 예수의 유대인 혈동에 이의를 말할 수 있었다. 예수의 아버지는 목수인데 아 마 예수 자신도 그랬을 것이다.
2.예수의 공적 활동은 세례 요한의 활동과 관련되어 시작되는데 누가의 특별 기록에 의하면, 그가 30세 가량 되었을 때이다. 요한에게서 받은 예수 자신의 세례는 그의 생애 중에 가장 확실하게 입증된 사실에 속한다. 그 역사는 물론 전승 안에서 전부 그리스도의 증언으로 변해 있으므로 그 역사가 예수 자신과 그의 결단과 내적 발전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우리가 문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의 의를 가진 사것이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3.오고 있는 하나님 예언자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율법에 의해 선교하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제자들을 모으 고 다른 율법학자들과 더불어 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토론하며 동일한 성서의 권위를 받드는 랍비이기도 하다. 율법학자들의 전승의 형식과 법칙은 예수의 말씀에서도 풍부히 인식된다. 예언자와 랍비 - 이것은 어 떻게 조화되는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와 하나님의 뜻의 선교가 어떻게 서로 합치되는가? 또한 예수가 불 러 세워서 추종자가 되며 제자가 되는 것은 이 일치성을 지적함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4.복음서에 말해진 각 장면은 예수의 놀랄 만한 권위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 권위로써 그는 자기와 만나는 사 람들에 따라서 그 정황을 지배한다. 이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는 수많은 교훈과 논쟁의 말씀들 가운데서 그 는 반대자들을 꿰뚫어보고 그들의 항의를 해소시키며 질문에 대답하거나 다른 사람 자신으로 하여금 대답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는 반대자들의 입을 열 수도 있고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릴 수도 있다.
5.복읍서들은 이렇게 직접 증명되는 예수의 주권을 그의 권위라고 부른다. 복음서들은 이 말을 그의 가르침에 적용한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읍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치심이 율법학자들과 같지 않고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것은 그의 병 고치는 말씀의 능력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확실히 권위라는 말 속 에는 신앙이 이해하는 대로의 예수의 인격과 활동의 모든 신비가 이미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순 수하게 사실적인 것을 넘어선다.
6.복음서들이 말하는 역사는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지만, 물론 이것은 눈에 보이는 연극과 볼 수 있는 파국이 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반대로 그 역사 안에서 눈에 띄게 볼수 있도록 끝나는 것은 그야말로 세계가 아 니라, 십자가상의 나사렛 에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 안에서 세계는 그 종말에 싸여든다. 세계는 끝장이 나고 거기에 속한 사람들은 율법과 전통의 수호자들인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나 제사장 할 것 없이 각기 자기의 방식대로 이 사건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죄와 운명으로 말미암아 그 당시 세계의 규준 대로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권리와 자리를 얻지 못하던 배척받은 자들이 지금은 단번에 예수의 식탁의 동 료로 용납을 받는다. 예수의 말씀으로 악령의 지배에서 해방된 자들과 고침받은 병자들이 있는가 하면, 모 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름에 순종하는 제자들도 있다. 어느 경우에나 세계는 구원으로든 지 심판으로 끝이 나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통용되지 않으며 그 때까지 통용되던 모든 전통과 율법대로 세계가 행해 나가는 그 미래도 이미 통용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도 그 사람이 나온 배후의 과거를 확 증한다든가 그 사람이 굼꾸고 있는 미래를 보증하는 시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바로 이렇게 각 개인은 자기 의 현재를 새롭게 받는다. 왜냐하면 삶과 세계와 각 개인의 현존이 이제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현실성과 그 의 현재의 빛이 직접 비치는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선교는 이 현실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IV
하나님 나라의 출현
1.아무리 어떤 정치적 꿈이나 어떤 환상적인 세계 멸망과 세계 혁신의 기대가 유대교의 희망과 결부되어 있 다 할지라도, 근본적인 것은 그 희망이 한나님을 막연한 이상의 피안으로 추방하는 체념과 세계의 변치 않 는 것과 타협하는 체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 희망은 매우 이지러진 형태에 있어서도 괴로운 현 재의 절망 상태를 단순한 급변으로써도, 화려한 색체로 미래상을 설계해 넣은 현재의 곤경과 절망의 반대 상으로써도 처리되지 않는다. 따라서 유대교의 희망 가운데에는 그런 특징도 들어가 있기지만, 니체가 말하 는 보복이란 판정을 내릴 수 없다. 하나님은 이 수수께끼 같은 세계의 주님이어서 영원히 먼 곳에 머물어 계시지 않고 자신을 계시하시며 자기의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그 희망의 토대 위에 살아 있다. 유대교의 신앙에는 이 확신이 우선 현재의 아직은 아임을 본래의 곤경으로 만들도 하나님 나라의 오심에 대한 희망을 극도로 긴박한 것으로 한다.
2.하나님 나라의 오심에 대한 이 말씀들은 분명히 예수 자신과 그의 선교와 활동을 동시에 지시하는 것으로 서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하나 하나 동떨어져 있고, 아직은 메시아 존칭의 공공연한 주장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의 선교 활동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표증과 통고이다. 한때 회개로의 부름을 외치 던 예언자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표증이었듯이, 그야말로 지금은 예수 자신이 그 표증 이다. 누구든지 이것을 보고 놓치거나 듣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실 특별한 우주적인 기적을 쓸데 없이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그 표증이 사실 자체는 아니다. 예수 자신은 그의 인격에 있어써 그의 그 의 메시지의 유일한 내용으로 계속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를 배제하거나 대신하지 않는다.
3.에수의 비유는 전혀 통상적이 아닌 사건들까지도 호감을 가지고 매우 재치있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누구나 이해하는 것으로서 일상적이면서도 가능한 경험의 범위 안에 머물어 있다. 과연 그렇구나 하는 것이 어느 비유에서나 바라고 있는 첫째 대답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결코 어떤 고등 수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비유는 걸코 둘이나 그 이상의 미지수를 가진 방정식이 아니다. 그래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당장 사로잡는 격렬한 질문 곧 "너희 중에 누가 ...하겠느냐?"라는 말로 시작되는 예수의 상징의 말씀 과 비유가 적지 않다. 이런 비유의 형식은 두드러지게도 랍비의 전승에는 단 하나의 유례도 없는 것이다.
4.마태는 산상 설교에 그리고 누가는 평지 설교에 손질해 놓은 최초의 주님의 말씀집 가운데 축복의 가르침 은 처음에 나와 있다. 축복들은 이 밖의 유대교와 희랍 문헌에도 많이 있지만 두드러지게는 주로 지혜의 잠언이 있다. 거기서는 정절한 아내와 단정한 자녀와 성공과 행운이 주어진 사람이나 생애를 행복하게 마 쳤다고 비문에 새긴 죽은 자들이 축복을 받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축복의 말씀은 결코 지혜의 잠언이 아 니라 그저 어떤 예언자의 말씀과 같은 물러 외침이요 약속이다.
5.모든 축복들은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향해 있고 이 한 가지, 즉 하나님은 자기를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 해서 그들의 욕구와 빈곤이 여러가지이며 특수한 사정에 따라 여러가지로 각자에게 그의 편이 되시고자 하 시며 또 계시리라는 한 가지로 요약된다. 그래서 바로 이 예수의 말슴이 특별히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세상의 사물이나 먼 선경처럼 묘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6.회개의 필요성과 약속에 대하여는 유대교도 이를 알고 있다. 랍비들의 격언 중에는 일반인이나 경건한 자에 게도 적용되는 회개의 의무, 더우기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런 의무에 대하여, 그 속죄의 능력에 대하여, 하 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대하여, 삼베와 재를 쓰고 참회의 눈물과 기도와 금식 중에 회개를 표명하는 일 에 대하여, 범한 죄에서 끊으며 저지른 부정을 개선하는 데서 증명되는 진정한 회개의 마음 등, 이 모든 것 에 대하여 말하느 수많은 말씀들이 있다.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을 거기에 의지하든지 거만 하게 은혜의 약속에 의지하여 죄에 그대로 머물어 있는 그런 경솔함을 경계하는 말씀들도 없지 않다.
7.지금 회개란 말은 이미 현재의 구원을 포촉하며 그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놓는다는 것을 말한다. 즉 "하늘 나라는 마치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한 하늘 나라는 좋은 구하는 장사꾼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 견하면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마 13:44-46). 지금 회개는 만찬에 처음 초청받은 자들과 같 이 여러가지 그럴 듯한 이유로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초청을 받아들이고 떨쳐 일어나서 가는 것을 말한다.
8.밭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며 가서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산다. 예수의 구원에의 부름이 동시에 회개에의 부름이라면, 그 회개에의 부름은 동시에 기쁨에로의 부름이다. 그래서 에수는 회개 의 옛 관습인 금식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울한 표정을 짓지 말라. 그들은 금식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그 기색을 낸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것을 다 받았다. 너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터럼 침울한 표정을 짓지 말라. 그들은 금식 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그 기색을 낸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것을 다 받았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그래서 금식하는 것을 남에게 보 이지 말고 은밀한 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보이도록 하라. 그리하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 아 주실 것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경건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자기들의 의에 뒤따르는 심각한 기쁨의 잃음 이 늘 보인다. 이를테면 죄인들과 같이 하는 예수의 식사에 대해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수군거릴 때, 예수가 중풍환자에게 말하는 죄의 용서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의 분격, 그들이 예수를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라고 부를 때의 양심, 예루살렘 입성때에 예수에게 외치는 환호를 들었을 때 그들의 모반 등이 그렇다.
9.하나님의 미래는 현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현재는 하나님의 미래의 빛 아래 있는 결단의 시간 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이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서 조심하고 깨어 있으라는 권고가 늘 들려온다. 이렇 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모든 호기심 많은 감시와는 뚜렷이 상반되어 있다. 그래서 바로 미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예수의 말슴들까지도 어떤 사람이 적절하게 말한 대로 묵시문학적인 가르침으로가 아니라 종 말론적인 약속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0.우리는 다시 한 번 "조심하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에 들아가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이 복음서의 "묵시록" 을 명백히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르 계산에 넣으며 때를 파악하되 그 시간들을 계산하지 말라고 예수 의 메세지는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올바른 자세로 기다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지금 온갖 힘을 다해 서 행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V
하나님의 뜻
1.예수는 한 율법학자처럼 등장한다. 그는 회당에서 가르치며 반대자들과 논쟁한다. 사람들은 게명의 의미와 적용에 대해서 또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바른 교의에 대해서 그에게 질문을 하고, 심지어는 권리 다툼에 있어서 그의 판결을 구하기도 한다. 이는 신학자요 동시에 법관이기도 한 유대교의 랍비의 상(像)과 일치한 다. 우리는 그가 과연 어떤 유명한 랍비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는 것을 전혀 듣지 못하며 더우기 그의 반 대자들은 그를 "배우지 못한 자"라고 부른다.
2.울법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바요 모든 차별은 인간의 불손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의 선교에 있어서는 그 구별이 거리낌없이 활발하게 행해지고 있는데 물론 비판적인 이해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이해의 긍정까지도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의 직접적인 현재에서 행해진다. 이것은 다 같이 율법을 위함이지 율법을 거스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3.예수의 말씀은 두 다른 면으로 나누인다. 이것은 예수와 초대 그리스도교회의 시대 이래로 결코 현실성을 상실한 적이 없다. 그 첫째는 열광주의자들의 면인데 이들은 자기들 편으로 예수를 위대한 혁명가로 새로 운 세계 질서의 예언자로, 또 새로운 세계 질서의 에언자로, 또 새로운 미래를 가져오는 자로 맞이하려고 한다. 이들은 어떤 세계의 미래상에 사로잡힌 자들인데, 이들에게는 이미 우리를 늘 부르며 속박하던 하나 님의 뜻은 내버려야 할 귀찮은 고량이다. 이 미래의 세계상이 이제는 유일하게 타당한 율법으로 부각된다. 이 미래의 세계상을 억지로 끌어들이며 이것을 선포하고 이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대의 긴급한 명령이 되는 것이다.
4.예수의 말씀은 가상의 방볍을 곧장 꿰뚫고 나가서 하나님의 듯을 곡해시킴으로써 법규나 종교적, 도덕적 전 통의 조직체 안으로 허용되어진 장소들에 부딛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율법 판의 화석화로부터 해방시키 고 율법의 보호 아래 자신을 봉쇄하며 방비하고 있는 인간의 마음을 붙잡는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인간 의 전통"으로부터 풀어내어 자유롭게 하고 현존의 질서 아래 자기의 삶이 질서정연한 것으로 공상하고 있 는 인간을 새로운 의미로 사로잡힌 자가되게 한다.
5.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에 단순히 흡수되는 것이 아닌 만큼 예수는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부터 말하자면 그 사랑의 인간적인 대상을 빼앗거나 그것을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수단으로 삼지도 않는다. 이런 의미로 본래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참 사람이 아니다. 실례로 서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자비로운 사마리아인에 관한 이야기에 서술되어 있다.
6.예수는 사랑의 요구를 결코 어떤 보편적 신관념이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논란되던 어떤 민족문제 나 신앙문제에 대해서 공평한 판단을 가지고 뒷받침하지 않고 또한 스토아 학파가 가르친 대로 인간 자체 가 거룩한 것이라는 인간관을 가지고 그러는 것도 아니다. 또 예수의 원수 사랑의 계명은 남에게 대한 교 육적 의도라든가 혹은 자기 교양적인 효과라는 동기와도 전혀 상관이 없다. 그의 사랑의 요구의 근거는 오 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무한계성이 어떤 인류라는 관념의 막연한 무 한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친구와 원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 바리새인과 세 리,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사이에 놓인 자연적인 한계는 바로 어디서나 전제되어 있어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나와의 결속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시는 형제 때문에 그 한 계를 돌파한다. 그래서 "형제가 제게 죄를 지을 때에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 까? 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봅 번을 일흔 번까지도 하라"로 대답하고 있다.
7.예수는 창조와 세계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며 이것들을 하나님에 관한 설교 자료로 삼는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 이 비를 내려 주신다" 창조야말로 아무런 한계를 세우지 않고 모든 한계를 돌파하는 원수 사랑의 증인이다. 새와 백합화는 모든 염려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한나님의 돌보심의 증인이다. 참새 한 마리도 너의 아버지 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씨와 성장과 추수는 하나님의 약속을 말해 주며 번개와 비와 폭풍 우는 그의 심판을 말해 준다. 창조와 역사의 활동에서 하나님이 추론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그것들 이 하나님의 주권과 듯의 빛 아래 있다. 이같이 역사는 비유가 되며 스스로 창조임을 입증한다. 역사란 언 제나 공상과 꿈, 더우기 종교적인 환상과는 거리가 먼 숨김없는 인간 자신의 자리엔디 이로써 듣는 자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무엇을 행하시고 또 그의 주권의 의미가 무엇임을 바로 그런 모양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8.예수에게 있어서 간구의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리에 속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에 관한 사상은 인 간의 일반적 관찰에 의해서 비약해 올라가야 하는 높은 망대 같은 무엇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 기 필연성이라는 제한 속에 갇혀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기도하는 중에 자기 스스로에게서 자신의 의의 환상이나 허상을 만들어내지 말아야 할 자유가 주어져 있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바로 이와 같이 인간에게 는 기도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에수는 기도가 들려지리라는 것을인간에게 단호히 약속하고 잇다. "구 하라, 주어질 것이요. 찾으라, 찾아질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 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동일한 말씀이 명령과 약속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 기도를 명하는 말씀은 동시에 기도의 권고이기도 하다.
9.하나님은 주인이며 인간은 그의 종이다.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종된 관계는 확실히 보상 사 상을 제외하거나 적어도 이를 제한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종은 몸이나 목숨과 함께 주인의 것이어서 특별 히 보상을 요구할 수 없는 종신 노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대로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들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라"
10.예수는 인간 상호간의 모든 행동에 해독이 되는 보상사상의 영향력을 특히 산상설교에서 명백히 지적하였 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일을 하며 또 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많은 보상이 있을 것이요 너희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거짓 사랑과 참된 사랑은 바로 여기서 구별된 다. 앞의 것은 일과 보수의 흥정이요 되돌아올 사랑을 넘겨다보는 사랑이다. 뒤의 것은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돕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인데 그야말로 그 일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보상에 대한 생각 마저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사람들을 놀램과 갈채로 이끄는 궁리에서 자유할 뿐만 아 니라, 사랑하고 있는 사람 자신으로부터도 숨겨지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결코 타산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얕보지 않는다.
VI
제자됨
1.복음서들은 예수가 특히 갈릴리 활동시기에 민중 가운데서 일으킨 유력한 운동에 대하여 뚜렷한 인상을 주 고 있다. 우리가 거듭 들을 수 있는 것은 무리가 예수를 둘러싸고 밀려들어서 애를 써야 이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열렬히 그의 말을 들으며 그의 가르침의 권위에 놀라고 병자들을 위해 그의 치료 의 능력을 구하며 그가 행하는 기적을 찬양한다. 이것이 예수의 역사의 수많은 개개의 장면들을 복음서들 이 약술하고 있는 상이다. 그러나 이 민중이 아직은 그의 제자는 아니며 밀려든다는 것이 아직은 추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제자들은 예수의 말슴과 행위에 있어서 이미 현재에 힘이 미치고 있는 저 나타나 오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 의 능력을 받는 자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들은 이것을 선교하며 그 승리를 전달하는 직무에 매우 적극 적으로 끌려들어가 있다. 동시에 우리가 확실히 고려해야 할 것은 제자들과 그 파송 및 이들의 성령의 역 사에 의한 행위에 관한 서술에는 원시교회의 경험도 함께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땅 위의 예수가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 권위에 참여케 하였다는 사실을 결코 제외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 잘 알 수 있는 것은 이들 사이에 어떤 측별한 보상에 관한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것인데 물론 이것 은 매우 인간적인 문제로서 세베대의 아들들의 요청에 대한 대답이 보여주듯이 예수에게 단호히 거절당하 고 있는 것이다.
3.예수가 걸어간 땅 위의 행적대로 그를 따르고 있는 제자들에게서 후대의 교회는 자신의 모습을 재인식하였 다. 이들은 자신을 종말 때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또한 새 이스라엘로 이해하였고, 부활절 후에도 제자들과 같은 정황에서 자기의 신앙의 헌신과 확증을 위해서 자신들이 주님에게 부름받고 있음을 땅위에서 자기 존 재에서 자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제자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믿는 사람이라는 칭호가 되어 있다. 따라서 과거의 제자들의 시련과 괴로움이 오늘날 믿는자들의 괴로움과 약속의 상징으로 된 것이다. 이같이 마태는 최초로 폭풍을 잔잔케 하심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복음서의 보도와는 대조적으로, 에수에의 순종과 제자됨 의 실례와 상징으로 이해할 수가 있었다.
4.후대의 교회가 어떻게 과거의 제자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재인식하였는가에 대해 많은 예들 중에 또 하나를 든다면, 요한복음서의 고별도 이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전의 제자들의 괴로움과 약속이 부활절 이후와 예수의 재림 이전의 믿는 자들의 사정과 직접 같은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VII
예수의 예루살렘 여행 : 수난과 죽음
1.예수의 갈릴리 활동 시기는 성공의 시기일 뿐만 아니라 이미 실패의 시기이기도 하다. 옛 예수전 기술에서 하듯이 예루살렘에서의 파국이 곧 뒤따르게 될 갈릴리의 청춘기에 대하여 말할 만한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 다. 어떤 이들은 예수의 역사에서 이미 이 위대한 처음 시기에 있었던 위기를 고려에 두고 있다. 즉 반대자 들의 시기가 거세지고, 민중은 회개하지 않아 그를 실망시켰고, 또 로마의 사분영주가 된 총치자 헤롯 안티 파스는 그를 주시하며 이 '재생한' 세례 요한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떠나가는 이유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다가오는 한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이제는 하나님의 도사, 즉 "큰 임금의 도시"로 불리우던 예루살렘에서도 예수 자신이 전하려는 것 이었다. 모든 유대인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에게도 예루살렘은 나라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특별한 모양으로 이스라엘의 운명과 결부되어 있는 장소이다. 이 발걸음이 종교적 권력자와의 새롭고도 중대한 투 쟁 속으로 끌려 들어야 했고 또한 예수는 자기의 정해진 강제적 최후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 리라는 점을 우리는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수난과 부활 예언의 사실적 정확성을 낱낱이 논란할 만 한 이유들은 남아 있다. 예수가 과연 자기 제자들에게도 요구했던 각오, 즉 죽음까지도 자신이 짊어지려는 각오가 어느 순간부터 자기 앞에 놓인 죽음의 확신이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자료가 이미 확실히 알려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선 우리가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무엇보다도 이 거룩한 도시의 민중을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앞에 내세우며 마지막 기회에 결단을 촉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 다는 점이다.
3.예수가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것은 이미 예수의 역사에 마지막을 형성한다. 때는 애굽으로부터의민족해방을 축하하기 위하여 굉장한 순례자의 무리가 이 거룩한 도시로 밀려들고 있는 유월 절의 시기이다. 이 때는 이후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종말론적인 희망이 특별히 활발해진 때였다. 다가 오는 한나님 나라의 기대는 예수에게나 또한 갈릴리 출신 에언자인 예수에게 환호를 외치며 그를 메시아로 찬양하고 있는 동반자들에게도 가득차 있다.
4.예수는 자기의 죽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제자들과 같이 마지막 만찬을 거행한다. 우리는 이미 이 만찬의 사실적인 절차를 확실히 밝힐 수 없다. 그 까닭은 현존 형태의 본문이 후대 교회의 만찬 거행과 에배의식 문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본문이 확실하게 알려주는 것은 예수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와 자기 의 고별을 내다보며 제자들과 같이 만찬을 거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5.제자들과 같이 거행한 예수의 최후의 만찬 다음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독한 밤중 기도의 투쟁이 뒤따르 고 있다. 이 설화도 그대로 사실적인 보도로 읽혀져서느 안 될 것이다. 예수의 이 고투에 목격자가 된 사람 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이경우에도 다시금 이 설화는 보다 높은 의미의 역 사 증언이다. 즉예수는 어떤 신존재로서가 아니라 바로 그의 인간성에 있어서 홀로 제자들과는 떨어져서 깊은 유혹의 고통 가운데 빠져 있는 분이었다는 증언이다.
6.예수는 로마 군인들에게 넘기워져서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의 처형에 이르게 되는데 그의 제자들 로부터도 버림을 당한다. 대제사장의 궁전 뜰까지 예수를 따라갔던 단 한 사람인 베드로는 거기서 하녀와 종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였다. 어떤 하녀가 그를 예수의 추종자로 알아보았다고 한다. 이 갈릴리 사람은 다른 종들 앞에서도 자기 말씨로 자기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러나 베드로는 저주와 맹세로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예수를 부인하여 말한다.
7.대개 못박힌 자의 죽음은 오랜 동안의 고통을 겪고 나서 힘이 다한 후에 비로소 끝이 난다. 예수는 여섯 시 간 후 이른 오후에 절명한다. 처형된 자는 보통 격리된 곳에서 조곡과 장례 행렬이 없이 매장되는 것인데, 명망 있는 한 경건한 의회의원이던 아리마대 요셉의 과감한 등장으로 이런 수치는 면하고 있다. 그는 빌라 도에서 예수의 시체를 간청하여 받아가지고 자기 소유인 바위 무덤에 매장한다. 두 여인이 이에 대한 증인 이다. 이들의 이름과 무덤의 장소 표시는 이미 부활사(史)로 넘어간다. 예수의 매장에 관한 보도는 아무런 편중도 없이 간결하고 냉정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히려 바로 그런 때문에 이것은 벵겔이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 바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말해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무덤이 그 죽음을 공인한다"(sepultuta mortem ratam facit).
VIII
메시아성의 문제
1.율법에 대해 예수가 취한 입장에서나 하나님의 뜻의 체현에 있어서도 우리는 거듭 그의 사명에 대한 주장 과 신비에 부딪치곤 한다. 그의 신국 설교 중에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고 한 것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한 것과 꼭 일치한다. 제자들을 부름과 열 둘의 선택, 그리고 예수가 일으키고 있는 운 동은 이 주장이 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 예수의 성도 입성, 이곳에서 개시하는 그의 투쟁 및 성전 청결도 이 주장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예수에게 외치는 병자들의 부르짖음과 악령에 사로잡힌 자들의 아우성, 추종자들이 그에게 걸고 있는 기대, 그를 빌라도에게 넘겨 주는 유대 당국의 불안과 소동, 그리고 그가 "유대인의 왕"으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까지, 이 모두가 다 예수의 인격에서 이들에게 드러나 는 저 주장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2.부활하신 자와 승천하신 자가 믿는 자들에게는 땅 위의 나사렛 예수와 다른 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은 그의 생애의 최후를 전제하고 있는 존칭들이 벌써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이 에수에게 주신 권위에 대하여 말하고,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시간과 영원에 걸쳐 이루신 구원에 대하여, 예수의 품격과 그의 생애와 그의 사업에 대하여 말해 주는데, 언제나 확실히 종말과 완성이 여기서는 완전히 예수의 땅위의 존재와 함께 보여진다.
3.인자의 칭호는 예수의 자기 발언들 중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앞에서 본 대로 이것은 후기 유대교의 묵 시문학에서 유래한 것인데 거기서는 사람들이 쉽사리 오해하고 있는 대로 어떤 신존재나 천적 존재와는 다 른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비적 초월자를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비할 데 없는 존 칭이며 비천한 인간에게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이 결코 아니다.
4.인자라는 명칭이 처음 세 복음서와 이들에 의하여 가필된 자료들 가운데 훨씬 더 많이 나타나 있다. 또 언 제나 예수 자신의 말씀 중에 나타나 있다. 설화에서는 예수가 결코 인자로 언급되지 않으며, 또 호칭이나 신앙고백에서도 결코 그렇게 불리우지 않는다. 확실히 이것은 인자라는 칭호가 실제로 다툴 여지 없이 에 수의 자기 칭호였다는 것을 지시해 주는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도 어떤 사실적 관찰은 금지를 당한다. 우선 이것만은 확실한데, 즉 완전히 묵시문학적 종말 기대의 의미로 인자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는 예수의 인자에 관한 말씀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말씀들은 대부분은 약간씩만은 변경 되어서 유대교의 묵시문학 전통으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전승으로 받아들여진 것일 수 있다.
5.사실적 예수는 매우 확실하게 장차 올 세계 심판자에 대하여 그 당시의 묵시문학적 기대의 의미로 말했다 는 것, 또한 4그는 여기서 자기와 자기 말씀에 대하여 내려지느 결정이 세계 심판 때에 증명된다는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이것을 말했다는 것, 그러나 그가 자기 자신을 그 인자라는 칭호로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6.유대교의 전통과 기대가 마련해 두었던 어떠한 주지의 통용개념이나 어떠한 치호나 직위도 예수의 사명을 증명함에는 기여하지 못하며 그의 존재의 비밀을 다 설명해 내지는 못한다. 그 비밀은 그 논리의 종류가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어뗘한 지나간 교리적 체계의 논리로는 해결되지 못한다. 이에서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존재의 비밀은 그의 부활에서 비로소 제자들에게 열려 보여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IX
예수 그리스도
1.예수의 역사는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부활에서 새로 시작된다. 제 정신을 잃고 흩어졌 던 제자들의 무리가 모여서 그를 믿는 신앙과 그의 재림의 기대 가운데 교회가 된다. 부활하고 승천하신 주의 영이 그들에게 주의 임재와 미래를 확신시킨다. 그들은 그들의 닫혔던 입이 열리고 "하나님의 크신 역 사"를 선교한다. 그들의 증언은 새로운 신앙을 일으키고 또한 새로운 반항과 박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교회 의 역사는 시작되어 교회의 선교와 확장이 팔레스틴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한다. 이는 매우 파란 많고 긴장으로 가득 찬 역사이다. 이 역사 안에서 세계는 복음 앞에 불리어 나오며 또한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세지를 늘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언어로 전달하도록 세계로부터 요구를 받는다. 민족들 간에나 인간의 마음 가운데 강력한 영향을 주는가 하면 역시 긴장과 실패도 초래하는 역사, 충실과 불충실, 인식과 오류, 승리와 패배의 역사이다. 이 역사를 사명과 신앙의 척도에서 볼 때 실로 자주 그리스도인의 명백한 승리는 그 패배라 할 수 있고 그들의 패배는 승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 예수 그리 스도의 역사이며 그의 권위의 역사요 결코 끝이 나지 않는 수난의 역사이기도 하다.
2.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메시지 없이는 신약성서의 복음이나, 단 하나의 설화나 서신도, 그리스도인의 신앙 도, 교회도, 예배도 기도도 오늘까지 존속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절 사건이 어떤 모 양으로 일어났느냐에 대하여는 충분히 표상해 내기가 어렵고 또 불가능하다. 부활절 메시지의 명백성에 대 하여 부활절 보도의 애매성과 역사적인 문제성은 부정할 수 없는 긴장관계에 있다.
3.부활절 역사도 기록이나 연대기로서가 아니라, 신앙의 증언으로서 이해해야 하고 따라서 부활절 역사 안에 있는 부활절 메시지를 문제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부활에 관한 메시지가 믿는 교회 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그 메시지의 형태는 확실히 이 신앙으 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똑같이 확실한 것은 부활하신 자의 현현과 그 증인들의 말이 무엇보다도 먼저 이 신앙을 기초 세웠다는 것이다. 거기서 교회에세 분명하고 확실해진 것은 하나님 자신이 전능의 손으로 이 세계의 악하고 반항적인 활동에 간섭해 들어오셔서 이 나사렛 예수를 그에게 항거하는 죄와 죽음의 세 력으로부터 뺏어내어 세계의 주님으로 앉히셨다는 사실이었다. 이같이 원시 그리스도교의 이해에 의하면 부활절은 무엇보다도 세상이 그에게 대하여 그들의 고백을 거절했고 또 그의 제자들마저도 충성을 지키지 못했던 이 예수에게 대한 하나님의 고백이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죄와 죽음으로 낙인 찍힌 옛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수립이요 그 시작이다. 그것은 이 시간과 세계 안에 서의 사건인 동시에 이 시간과 세계의 종말과 한계를 짓는 사건이다. 물론 이것은 신앙만이 체험한다. 왜냐 하면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는 다른 사건처럼 관찰되거나 보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부활의 기적은 제자들의 내면성 가운데 충분한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자연의 영속적인 사멸 과 생성 - 이것은 전혀 비성서적 사상임 - 에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과거와 현재는 예수 자신의 인격, 즉 하나님께서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이 인간 나사렛 예수에게 있어서만 통일을 이룬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자 자신이 비로소 그의 역사와 그의 인격의 비밀, 특히 그의 수난과 죽음의 의 미를 밝혀 주는것이다. 이것이 엠마오 제자들의 역사에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들이 길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자가 그들에게 부지중에 동행자가 된다. 그들은 곁에 일행이 된 낯선 자에게 자기들의 모든 희망 을 환멸로 돌린 끔찍스러운 그들의 스승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더우기 부활절 아침의 사건도 말해 주고 있 는데 이 일는 누구나 다 알고 있지 만 이 외인만은 모르고 있는 것 같은 절망적인 역사로서 이야기하고 있 다.
5.마태복음 16장 18절 이하의 말씀은 예수의 부활에 기초를 둔 교회의 설립에 대한 증언이며 또한 그것은 음 부의 권세가 결코 대항해 낼 수 없는 종말 때의 교회라고 하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자각에 대한 증언임에 는 변함이 없다. 이 교회 안에서는 종말 때에 약속된 성령의 능력이 예언과 기도와 기적 행위 가운데 살아 움직이며,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용납받기 위한 종말적인 성례전으로서 세례도 다시 행하여지는 데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여진다. 이 교회에서는 또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면서 기쁨과 환호 속에 성만찬도 공동으로 지켜지는 것이다. 그러나 오실 자를 기다리며 성령으로그의 임재를 확신하고 있는 이 교회는 동시에 의식적으로 자신을 땅 위의 예수의 생애와 메시지에 결속시켜 그들 자신의 땅 위의 생애를 위한 그의 지시와 약속을 받아들이되 그들의 미래에로 향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희망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오실 자에 대한 그들의 기대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지식에서 그 능력과 근 거를 얻는다. 금후로 오는 것은 원시 그리스도교 선교라는 큰 주제는 십자가와 부활로 일어난 예수 그리스 도의 구속과 주권을 온 세계에 외치며 전하는 것이다.
6.원시 그리스도교가 여러가지 형태로 짧은 신앙고백 형식문과 설교 형식문 가운데 그리고 찬송과 기도 가운 데 공식화한 이 고백들은 그 본질상 분명히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신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그 고백들은 모두 이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그리스도,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인자, 주님 등의 존칭을 드리고 이로 써 그들 영원한 구원의 지참자라고 부르고 있다.
7.우리가 여기서 그 발단과 그 안에 움직이고 있는 동기에 국한시켜 말한다면, 원시 그리스도교 신앙의 증거 가 여러가지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처음의 세 복음서들 사이에 이미 분명하 고 또 제4복음서에도 매우 분명하며 바울과 사도 이후 시대의 문서에는 또 다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 있 는 바와 같다. 인자라는 이름이 헬라적 기독교에서는 더 이해되지 못하고 곧 사라졌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또한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도 더 나아가서 고유명사가 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 이란 칭호는 헬레니즘 세계에서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지고 더우기 후대의 신학에서는 구주의 신적 존재와 신적 본성에 관한 여러가지 사변이 결합된 개념으로 되어 있다. 큐리오스(주님)란 칭호도 유대교적 기독교 로부터 헬라적 기독교로 이해할 때 철저한 변천을 겪고 있다.
8.제자들의 고백은 언제나 하나님의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말해진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예수 자 신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그들에게 물으시는 분이다. 제자들의 대답은 세상이 제시해 주는 길에 대하여는 부정이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긍정이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읍 니까? 당신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신 것을 믿고 또 알고 있읍니다" 같은 복음서에는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믿는 자의 인식이 넓혀져 갈 것을 약속 해 주고 있다. 그가 보내실 성령이 그들을 온갖 진리에로 인도하시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미래에로의 길 은 동시에 예수의 말씀에로 돌아가는 길 이외의 다른 길이 아니다. 이는 성령이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모두 생각나게 하실 것이기"(요 14:26) 때문이다.
권터 보른캄의 {나사렛 예수}를 읽고
- 신앙인과 신학인의 영원한 물음 "역사적 예수" -
I.
불독의 외모를 품고 우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불트만을 머리에 떠올려 본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 비교적 무관심하였다. 오히려 초 월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교회의 케리그마에 대한 신앙이며, 예수는 케리그마 속으로 부활한 것 이라고 그는 강한 어조로 우리에게 전한다. 어떻게 보면 그는 케리그마된 그리 스도 상으로 역사의 예수를 박제화 시킨 장본인이다. 하지만 나는 질문해본다. "그리스도 케리그마"로 온전히 환원할 수 없는 "역사의 예수"는 존재하는가? 즉, "역사의 예수"를 뺀 "그리스도 케리그마"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다.
II.
이러한 물음에 대한 모종의 답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얻고자 하였다. 권터 보른캄은 불트만의 제자이다. 불트만의 제자인 케 제만과 궤를 같이 하여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물음', 또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인식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갖는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 이들이다.
III.
권터 보른캄의 {나사렛 예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흔적을 발견하려는 시도 가 베어있는 책이다. 난 아직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흔적과 자취를 확연히 발 견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 책이 나 자신을 새롭게 열어준 지평은, 믿음의 대상인 예수를, 이해의 대상인 예수로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진지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결코 신앙은 이해를 외면하지 않는다. 결코 신앙과 이해는 대립항 이 아니다.
IV.
나는 이 책을 통하여 2000여년 전의 나사렛 예수와 그의 자취와 그 시대의 역 사를 추적해 나가는 작업은 신앙을 도려내는 아픔도 아니고 믿음을 유폐시키 는 고통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전면적인 논의 야 말로 진정한 신앙의 순수성과 복음의 순수성을 옹호하고자 하는 시도라는 인상을 받았다. 또한 신앙인으로서, 신학자는 자로서 예수의 역사를 묻는 작업 은 결코 도외시될 수 없다는 깊은 생각을 건네주었다. 마지막으로 권터 보른캄 의 {나사렛 예수}는 나에게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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