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
독일사람 홀거 케르스텐이 쓴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라는 책은 지성인 다운 의욕이 엿보이는 책이다. 우선 종교적 고정관념을 깨고 종교의 배후에 대한 진실을 파악하려 했다는 점에서 선견자 다운 자세가 엿보이고 또 그 열정으로 많은 연구를 했다는 점이 들어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의 연구결과 중에는 무리한 결론도 있다는 점이다.
그는 많은 유럽인들이 그렇듯이 그들의 전통적 종교인 기독교에 희의를 품고 동양의 신비주의에 매력을 느낀 사람인 것 같다. 진정한 동양이 아니라 인도철학이나 그 사상에 애정을 느끼는 사람이며 그러한 기호(嗜好)적인 선입견을 바탕으로 해서 그의 연구가 진행되었음을 알수 있다.
인도의 북부지방인 캐시미르에서 예수님의 또 다른 생애의 흔적을 찾아내는 데 그는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의 청소년기가 그곳 인도에서 있었다는 사실은 캐시미르에서 가까운 라다크(캐시미르와 티벳의 국경지대)의 헤미스라는 사원에 기록으로 남아 있고, 예수님이 부활 후에 캐시미르 지방에서 남은 생을 살았다는 사실은 그 지방의 역사서를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한다.
우리 지구인들의 탁월한 스승이었던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이러한 사실들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이런 중대한 과거의 역사들은 우매한 대중이나 아직 어린 성장기의 지구인들도 모두 알아야 할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미국인 베어드 스폴딩이라는 사람의 체험담인 '초인생할'이라는 책을 읽고서야 홀거케르스텐이 왜 캐시미르가 에덴동산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접촉자들' 33-34장에서 자세히 다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지만, 캐시미르의 배경인 히말라야 산악지대에서 베어드 스폴딩과 그 일행인 고고학 탐사대를 접촉한 예수님은 유대교의 배경인 구약성경의 기록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대부분 뉴에이져들이 여호와는 악한 외계인이었다 하고 또 그렇게 오해받을 만한 여러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인생활'이라는 책을 자세히 읽으면 거기에는 분명 많은 행간의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고 성경에 대한 불신은 옳지 않음을 묵시적으로 말해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본인은 '초인생활'을 읽기 전에 홀거 케르스텐의 저서를 만났기 때문에 많은 아쉬움을 느끼며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를 읽었다. 그리고 그의 관점에는 개인적인 기호(嗜好)성이 너무 짙다고 생각된 것이다. 기독교의 단순한 윤리적 교훈보다 인도 종교의 배경인 철학성에 심취한 나머지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역사연구에 임하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면 홀거 케르스텐의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를 읽었을 때의 본인의 의구심들을 몇 가지 예를 들겠다.
우선 에덴동산이 캐시미르에 있었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여러 모순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의 모든 연구는 에덴동산을 캐시미르에 고정시키고 그 가정하에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편향된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든 것 같다.
에덴에서 발원했다는 네 개의 강 중에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캐시미르가 에덴동산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지도를 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수천년의 역사 동안에 지형이 바뀌었다 해도, 히말라야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다시 이란의 고원지대를 지나, 아라랏 산맥을 경유해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이 페르샤 만으로 흘렀을까?
또 성경에서는 분명 노아 이전의 아담의 계보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어떻게 히브리족이 노아 이전의 계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하면서 히브리 족이 인도의 노예족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히브리 족의 신화를 완전히 무시한다는 관점인데, 그러면서 어떻게 인도나 이집트의 신화들은 인정해서 히브리족의 언어와 혈통도 그것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도의 캐시미르 지방에는 지명과 인명, 그리고 생활풍습이 유대인들의 그것과 같은 것들이 많다고 한다. 이것은 그 지방 학자들의 연구결과이기 때문에 확실한 사실인 것 같다. 그곳에는 유즈 아사프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친 부활 후의 예수님의 족적도 분명히 남아 있다 한다. 유즈 아사프란 다름아닌 '예수 요셉'이란 뜻의 이름이다. 또 솔로몬이라는 이름으로 건축된 사원도 있다고 한다.
히브리 족은 캐시미르 뿐만 아니라 이웃의 아프가니스탄이나 중국에까지 그 발길이 닿았다는 사실도 근래에 들어 밝혀지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홀거 케르스텐 자신도 말했듯이 히브리 족이 BC 7백년 경에 아씨리아의 침략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 12부족 중 10부족이 고국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잖은가?
인도는 예로부터 라마라는 이름으로 페니키아와 무역이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의 신화시대에도 잘 알려진 땅이었다. 제우스 신이 바람을 피워 생긴 아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미움을 받아 쫓겨나고, 제우스의 어머니 에아에 의해 보호받다가 라마(인도)에 가서 성장기를 보냈다고 한다. 히브리의 신화서 '아담과 이브의 생애'에서도 에덴동산의 지도자 여호와가 사탄을 인도의 땅에 가서 살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아씨리아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들은 남쪽을 향해 이집트로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동쪽으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난 것 같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유랑했으나 그들이 안주할 곳은 이미 다른 종족의 땅이었고 그 마지막에 도달한 곳이 히말라야 산맥 중의 조용한 분지 캐시미르였을 것이다. 그곳은 그들에겐 새로운 낙원이었을 것이다. 분지라는 지형상 기후조건이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아리안 족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주해서 인도에 정착했다는 사실은 오랜 역사학적 정설인데, 홀거 케르스텐은 그 사실을 뒤집어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어가 인도의 싼스크리트어의 가지라든가 히브리 족이 인도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은 수긍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현대에 지구를 방문하고 있는 우주인들도 히브리어가 우주인들의 언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한다. 싼스크리트 어도 같은 계통의 언어일 것이다. 히브리 신화서의 내용처럼 에덴에서 쫓겨난 천사들이 그곳 인도에 가서 살았다면 말이다.
케르스텐은 일부 역사학자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지만, 그가 인용한 역사적 논리들을 모든 역사학자들이 함께 인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고대의 역사를 거짓없이 말해주는 것은 그 민족의 신화인 것이다. 신화가 비록 과장되고 알쏭달쏭한 은유적인 표현법에 의해 전수되긴 했지만, 신화는 아직 유아기에 있었던 인류가 보고 들은 놀라운 이야기들을 유아적인 표현법으로 후손들에게 전한 인류 최초의 역사인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정직하듯이 신화에 거짓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히브리의 신화와 모세5경의 기록을 깡그리 무시하는 홀거 케르스텐의 역사관점은 그래서 매우 기호(嗜好)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모세5경이 다른 민족의 신화를 가져다가 짜맞춘 누더기 신화라면 그것은 모세의 문학작품이지 민족의 역사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히브리 민족 모두가 모세의 거짓 이야기에 동조해서 함께 춤췄단 말인가?
석가님이 태어나자 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쳤듯이 예수님도 어린 나이에 어른들을 가르칠 정도로 비범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지성주의자 케르스텐은 이해할 수 없었든 것 같다. '어린 성자 이사'의 정신적 스승을 찾아 그는 많은 역사학적 여행을 했지만, 고도로 발달한 우주인들의 영혼이 지구인의 몸을 입고 태어날 수도 있다는 21세기적 사고에 눈을 뜬다면, 어린 성자 예수의 정신적 스승을 찾아 동양과 서양을 헤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위대한 스승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지구인들에게 주어졌었고 그들은 동양에도 태어나고 서양에도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겐 동양을 더 선호한다든가 혹은 서양을 더 선호하는 편협한 자세로 지구인들을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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