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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인물화]

문수봉(李楨汕) 2009. 2. 4. 16:54




불전을 장엄하는 많은 장식화 중에서 고대의 전설적인 현왕(賢王)이나, 삼국지의 주인공과 그에 얽힌 이야기, 시성(詩聖)이나 은일처사의 삶의 모습 등을 그린 그림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종류의 그림을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라 부른다. 고사인물화는 일반 초상화와 달리 특정 인물의 삶의 모습과 행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부처님 생애의 여덟 가지 중요한 사건을 그린 팔상도나 부처님의 전생 설화를 그린 본생담 등도 넓은 의미에서 고사인물화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 그림은 감상용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 되는 그림이기 때문에 일반 고사인물화와 구별해 다루고 있다.

원래 고사인물화는 유(儒)의 이상적 가치기준을 고대의 성현들에게서 찾으려는 상고주의(尙古主義) 정신에 뿌리를 두고 출발했다. 왕이나 대부와 같은 치자(治者)들 뿐만 아니라 정치를 떠나 있는 사인(士人)에게 있어서도 고사인물화를 향유하는 정신적 배경은 서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치인(治人)의 입장에 있는 왕이나 대부들이 그림의 가치를 교화의 효용성에 두고 있음에 반하여, 사인들은 정서의 함양과 인격의 도야라는 자기 수양적 측면에 가치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도 치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고대의 현명한 왕이나 유명한 신하 등 주로 정치적 인물을 선호한 반면에, 사인들은 속세를 초월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던 시성(詩聖)이나 선인(仙人)과 같은 재야의 인물들을 선호했다.


사찰에서는 이 두 가지 유형의 고사인물화를 동시에 볼 수 있는데, 상주 남장사 극락보전 후면 외벽에 그려진 ‘하우도강도’가 치자의 입장에서 바라 본 고사인물화의 한 예이다. 그림 왼쪽 상단의 ‘하우도강(夏禹渡江)’이라고 쓴 화제(畵題)가 이 그림이 하(夏)나라 우왕(禹王) 일행이 물난리를 평정하기 위해 강을 건너가는 장면을 그린 것을 알게 해준다. ‘하우도강도’는 치자의 입장에서 보아 ‘법으로 삼을 수 있고, 권할 만한 사적(事蹟)’의 한 예로서, 이와 유사한 그림이 조선시대 궁중에서 자주 그려졌다.

‘하우도강도’의 주인공 우왕은 중국 하나라를 개국한 전설상의 임금이다. 순(舜)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기 전에 그는 홍수를 막기 위해 강바닥에 쌓인 흙을 제거하는 공사를 직접 감독하면서 동분서주 한 결과 13년 만에 홍수를 다스렸다. 우왕은 이 기간 중 세 번이나 자기 집 앞을 지나갔지만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첫 번째 집 앞을 지날 때 그는 아기를 낳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내의 신음소리를 들었으나 시간을 지체하다 치수를 그르칠까 염려하여 들어가지 않았고, 두 번째 집 앞을 지날 때는 그의 아들이 아내의 품에 안겨 그에게 손짓을 하며 부르고 있었으나 그는 손으로만 응답하고 그냥 지나갔다. 세 번째 집 앞을 지날 때는 그의 아들이 달려와 그를 끌고 집으로 들어가려 하였지만, 그는 치수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아 집에 들어갈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그냥 지나갔다.

치자들이 선호했던 내용의 고사인물화는 ‘하우도강도’ 외에는 절에서 더 이상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선비들이 선호했던 시성이나 선인의 삶과 행적을 그린 고사인물화는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이들 그림에는 이백(李白)과 같은 시인, 임포(林浦). 한산(寒山).습득(拾得)과 같은 은일처사, 미불(米)과 같은 선비 화가 그리고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 관운장 등 여러 종류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고창 문수사 대웅전 포벽에 ‘임화정방학도(林和靖放鶴圖)’가 그려져 있다. 임화정으로 보이는 인물 뒤쪽에 서있는 큰 나무가 매화나무이고, 인물 앞쪽에 서있는 두 마리 흰 새가 학이 분명하다. 화제가 쓰여 있지 않아서 임화정의 고사를 그린 것인지 단언할 수는 없으나. 학과 매화 등을 소재로 그린 것을 미루어 볼 때 임화정방학도의 화의를 바탕으로 한 것만은 틀림없다고 보아진다.

임화정은 송나라 임포(林浦)를 말한다.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20여 년간 세속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산 속에서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삼아 평생을 독신으로 고고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는 매화를 노래한 주옥같은 시를 많이 남겼는데, 그의 시적 정조(情操)가 조선의 선비들의 시작(詩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옛 선비들은 임포의 삶의 모습을 흠모하여 자신의 심회를 임화정의 삶의 모습에 의탁하기도 했고, 그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려 방안에 걸어 두고 정서적 교감을 통한 대용의 쾌감을 즐기기도 했다.

고창 선운사 영산전에 ‘한산습득도(寒山拾得圖)’ 벽화가 있다. 고목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왼손으로 하늘의 달을 가리키는 한산과, 바위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 습득을 그렸다. 화폭 오른쪽에는 이들의 행동을 설명한 두 줄의 글이 써있다. 한산과 습득은 선승들이지만 그들을 그린 그림은 불자들보다 오히려 선비들이나 일반 대중들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선비들의 문집이나 저서에서 이 두 사람의 행적이나 선시(禪詩)의 세계가 즐겨 다루어졌고, 춘향전 등 국문소설에서 기생이나 중인들의 방치장을 묘사하는 대목에 ‘한산습득도’가 빈번히 등장하고 있는 것 등이 이를 증명해 준다.

한산은 중국 당나라의 선승으로 습득과 행각승(行脚僧)인 풍간(豊干)과 함께 절강성 천태산 국청사(國淸寺)에 드나들며 남루한 모습으로 주방에 들어가 승려들이 남긴 밥을 먹곤 하였다 하며, 이 세 사람을 삼은(三隱) 또는 삼성(三聖)이라고 부른다. 일명 〈한산시집(寒山詩集)〉이라고 하는 〈삼은시집(三隱詩集)〉은 한산의 시 314수를 중심으로 이들 3인의 시를 모은 것인데, 작품 중에는 민중을 대상으로 한 교훈적인 시라든가 선(禪)의 게(偈)를 닮은 것이 많으며, 그 중에는 한산에 얽힌 전설을 노래한 것도 있다. 한산 습득의 전설은 송나라 선(禪)의 유행과 더불어 애호되어 자주 선화(禪畵)의 소재가 됐다.

남장사 극락보전 내부 포벽에 시성 이백의 행적을 그린 그림이 있다. 그림 왼쪽 모퉁이에 ‘이백기경상천(李白騎鯨上天)’이라는 화제가 붙어 있고, 큰 물고기 등을 타고 거친 파도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백의 모습이 박진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이백이 타고 가는 것이 보통의 물고기처럼 보이지만, 고래를 그리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고래 등 위에 술병 두 개를 그려 놓은 것은 이백이 주선(酒仙)임을 상징하기 위한 묘책일 것이다.

이백은 당나라의 시인으로 성격이 호탕하여 음주를 즐겼으며, 무위자연을 갈파했던 노자(老子)를 흠모했다. 풍진에 찌든 세속과 속박된 규율을 싫어해 평생 동안 생업을 돌보지 않고 유랑하기를 좋아했다. 이백은 특히 달을 사랑했는데, 그가 죽은 것은 달밤에 채석강 뱃놀이 중에 강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두고 ‘이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李白騎鯨飛上天)’고 말들 했다. 물속의 달을 건질 수 없게 되자 이제는 혼백이 하늘에 있는 달을 잡으러 고래를 타고 올라갔다는 얘기일 것이다.

통도사 명부전 외부 공포벽에 삼국지 내용을 그린 그림이 있다. ‘차간유복룡봉추한제삼고(此間有伏龍鳳雛漢帝三顧)’라고 쓴 화제 아래쪽에 유비가 관우, 장비와 함께 제갈량을 찾아 온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초가 오두막에 들어 앉아 있는 이가 제갈량이고, 마당에 들어서 있는 이가 유비다. 사립문 밖에서 문복을 입고 이가 관우이고 무복차림을 한 사람이 장비이다. 후한 말엽, 유비는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한 종실 부흥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늘 조조군사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 그림 옆에 “서성월야탄금퇴위병(西城月夜彈琴退魏兵, 서쪽 성에서 달밤에 거문고를 타며 위나라 병사를 물리치다)”이라는 화제가 달린 그림이 있는데, 삼국지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판소리계 국문소설이나 근대 우화소설 등을 보면 집안 치장용 그림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방(房)안 장식 그림으로 삼국지의 삼고초려(三顧草廬) 장면이 많았다. 한산습득, 임포, 이백 등 선인, 시성 등의 행적을 그린 그림도 일반인들의 집 장식 그림으로 인기가 높았다.

절에서 볼 수 있는 고사인물화는 불전 장식을 목적으로 그려진 그림이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불교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다. 불교의 교리나 사상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보다 오히려 왕공대부나 선비들의 감상용 회화나 서민들이 향유했던 민화적 성격이 더 강한 그림이 많은 것이다. 이처럼 일반 회화가 불전 장식용 그림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불전이 비록 불교의 건축물이라고는 하나 한국이라는 문화적 토양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자연적인 현상으로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출처;불교신문

*道窓스님***合掌 道窓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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