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평화의 로고, 팔정도,
이쯤에서 생명평화로고를 팔정도로 설명해봅시다.
그 뜻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첫째가 ‘정견’이지요.
정견이란 일원상 또는 생명평화로고로 표현되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직면한 존재의 실상을 있는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실상의 내용인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무상’, 분리·독립된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무아’를 있는 그대로 알아보는 것이 정견이요,
정견이 바로 성인의 견해이지요.
대부분 정견을 거쳐서 성인의 견해로 발전해간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견 자체가 부처의 견해이지 달리 부처의 견해가 있지 않습니다.
수행의 입장에서 말하면,
삶의 현장에서 견해를 바르게 갈고 닦는 것이 ‘정견수행’이요,
두 번째는 ‘정사유’인데,
정견의 경우처럼 실상대로 사유하는 것이
‘정사유’이고 그것이 성인의 사유입니다.
그 밖에 성인의 사유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삶의 현장에서 사유를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사유의 수행이요,
세 번째는 ‘정어’입니다.
실상에 근거하고 그 이치에 맞게 말하는 것이 ‘정어’이지요.
《금강경》에 “여래는 사실대로 말하는 자,
진리대로 말하는 자, 진리와 다르게 말하지 않는 자,
진리에 근거하지 않는 허망한 말을 하지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물론 구체적으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폭언을 하지 않는다.” 등의 설명을 합니다.
앞에서처럼 실상대로 말하는 ‘정어’가 그대로 성인의 언어입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말하면,
일상적으로 언어를 바르게 또는 중도적으로 갈고 닦는 것이 ‘정어수행’이요,
네 번째는 ‘정업’인데,
실상에 맞게 행위하는 것을 뜻하지요.
앞에서처럼 실상에 맞게 행위하는 것이 ‘정업’인데,
그것이 바로 성인의 행위이지요.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일상적으로 행위를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업수행이요,
다섯 번째는 ‘정명’인데,
실상의 정신에 일치하는 생활을 위한 직업,
또는 실상에 일치하는 직업생활을 의미하지요.
앞에서처럼 실상에 맞게 직업생활을 하는 것이 정명입니다.
부처님의 생활도 그런 것이지요.
수행의 관점에서 말하면,
일상적으로 생활을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명수행이요,
여섯 번째는 ‘정정진’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실상에 일치하는
바른 견해·사유·언어·행위·생활·깨어있음·집중을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갈고 다듬는 노력을 ‘정정진’이라고 하지요.
바른 견해를 위시로 해서 바른 집중 등이 보다 더
선명해지도록 줄기차게 노력하는 것이 정정진수행이요,
그것이 바로 부처의 정진이기도 하지요.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일상적으로 노력을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정진수행이요,
일곱 번째는 ‘정념’입니다.
정념은 무엇일까요?
실상에 맞게 깨어 있음, 정신차림 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에는
존재의 실상에 대해 항상 잊지 않음, 또는 기억함이라고 배웠습니다.
요즘 성인께서 직접하신 수행은 “위빠사나다”
또는 “사마타다”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많은데,
그렇게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성인의 가르침은 존재의 실상에 입각해서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어느 하나만을 절대화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굳이 성인이 몸소 실천하시고
가르치신 수행을 말해야 한다면, ‘팔정도’라고 해야 마땅하지요.
앞에서처럼 실상에 맞게 언제나 깨어 있음,
정신차림, 기억함, 잊지 않음을 실천하는 것이 ‘정념’인데,
그것이 그대로 성인의 깨어 있음입니다.
그 밖에 성인의 깨어 있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일상적으로 깨어 있음을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념수행이요,
여덟 번째는 ‘정정’입니다.
불교인들이 ‘정정’을 정신집중·정신통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정신집중과 정신통일은 무엇이 다르지요?
불교에서 삿된 선정·바른 선정이라는 말은 왜 생겼을까요?
성인도 수행과정에서
고도의 정신집중·정신통일의 선정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런데도 존재의 실상이 드러나지 않았고,
고통으로부터의 해탈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길을 버리고 스스로 중도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