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空 ひばり - 川の流れのように 흐르는 강물처럼(미소라 히바리)
Youtube 2017.07.09
한국계 엔카가수/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 노래모음
02) 川の流れのように(흐르는 강물처럼)
03) 釜山港へ歸れ(돌아와요 부산하에)
04) 悲しい酒(슬픈 술)
05) みだれ髮(흐트러진 머리)
06) 裏町酒場(뒷골목[우라마찌]술집)
07) 大阪しぐれ(오오사카 가을비)
08) 北國の春(북극의 봄)
09) 眞珠の淚(진주의 눈물)
10) 終着驛(종착역)
11) 미소라 히바리 히트곡 메들리
이러한 점을 어느 일본인 학자는 일본의 어느 방면이든지 정상에는 항상 재일 한국인이 있다고 했다.
그 예로, 재계에는 롯데의 신격호 회장, 레스링계 역도산, 프로 야구계에 장훈, 김정일,
카라테의 최영의, 골프계의 유명한 아오키(靑木)이며, 특히 스포츠 및 연예계에는
한국인의 핏줄을 받은 이들 중 일부는 출신을 비밀로 하기도 한다는데,
아마도 차별로 인해 정관계(政官界)로 진출 못하는 한(恨)을 노래나 스포츠로 발산 한 것 같다.
이에 한국계 엔카(演歌) 가수이며 일본의 국민 가수인
엔카는 일본에서 대중가요를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 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젊은층의 노래에 밀려 인기 차트
이에 비하여 일반 대중에 있어서 엔카는 아직도 카라오케 주점이나
그 예로 연말이 되면 연말 가요 결산 방송인 ‘가요 홍백전’이 방송 되는데
일본 민요와 다른 점이 ‘라-시-도-미-파-라’ 로 구성 되어 있어
한국의 트롯 가수들이나 작곡가들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일부에서 일본 엔카와 한국의 트롯이 정서적인 면에서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동양권에 해당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문물의 전달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사 내용이, 일본 근대기에 공업의 발달로 농촌 사회에서 도시 사회로 전환 하는
과정에서 농어촌의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타향살이 하는
이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 사랑과 이별, 인생, 외로움과 술에 대한 노래, 항구 등의
정서를 대변하는 형태를 담고 있어 그것이 ‘엔카’ 라는 장르로 만들어 졌다고한다.
주로 고향에 대한 향수를 노래한 대표 곡들로, ‘북쪽 고향의 여인(北國의 女)’
‘북쪽의 고향의 구석진 술집에서는 여인이 날 위해 기다린다’,
‘눈 내리는 아름다운 고향에 가고 싶다’
등의 가사 내용을 담은 엔카는 타향에서 사는
일본 최고의 엔카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의 본명은,
가토 히바리(加藤 和枝)이며,
그녀는 1938년에 아버지(김해 출신) 가토 마스키츠(加藤 增吉)와
어머니 기미에(喜美枝) 사이에서 태어나 9세 때 데뷔하여
몇 편의 영화 출연과 함께 40년을 엔카와 함께 한 가수이다.
그녀의 사후, 일본 여성으로써 최초로 ‘일본 국민 영예상’을 수상 하여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조’ 라는 별칭을 얻었다고 한다.
한국의 트롯의 여왕이 이미자씨 라고 한다면,
일본 엔카(演歌)의 여왕이 미소라 히바리씨(氏)라고 보면 된다.
일부에서는 미소라 히바리의 출신에 대해 여러 가지 말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일본에서 활약하다가 돌아온 작곡가 손목인씨가,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소라 히바리’, ‘미야코 하루미’등의
유명 엔카 가수가 한국계라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술회했으며, 우에다(植田 剛彦)씨가 쓴 책,
재일(在日)한국인의 실력>에서도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계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또한, 미소라 히바리의 어머니와 이웃에 살았고,
미소라의 한국 공연을 추진한 스즈키 마사부미(鈴木 正文)씨는,
미소라는 아버지의 고향 한국에서 노래하는 것이 소원 이었다고 증언 하였으며,
그 꿈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해 애통해 했다고 한다.
토쿄에서 발행되는 교포 월간지 ‘아리랑’에서는, 미소라 히바리가 어린시절
일본인 작곡가 고가 마사오(古賀 正男)씨 앞에서 ‘아리랑’을 불렀고,
사후에 나온 ‘히바리 세계의 노래를 부르다’ 앨범에 도라지 타령이 수록 되! 어 있으며,
후렴 부분인 ‘에헤야’ 는 또렷한 한국어로 수록 되어 있다고 했다.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계라는것은 유명한 사실로 아버지가 김해출신이라고 합니다
생선가게집 딸로태어나 9세때 데뷔햇고 천재소녀란 명성을얻엇다고 합니다
그녀는 죽기전까지도 한국을 아주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음반을내고 공연을 하고싶엇지만 당시는 수입금지된 시기라
항상 아쉬워햇고 일본어로
노래를 부를수없다고 해서 영어로 곡을불러 공연하는것까지
검토했을 정도였답니다
그토록 한국을 그리워햇건만 인생의 말년에 와서야
그녀는 자신이 한국출신임을 밝힐수 있엇음니다
폐허의 잿더미속에서 일본 주식회사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엇다는
최대의 찬사와함께 <국만영예상> 을 받을만큼 전국민적
사랑을 받은 그녀이기에 한국 출신임을 밝히는게 더더욱 어려워겠지요?
일본의 전국민적스타가 그토록 한국을 그리워 마지않았다니 아이러니입니다.
또.그녀는 단 한번도 해외공연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매니저는 다른 나라에서 공연을 권했으나 자신의 첫번째 공연은 반드시
한국이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일간의 문화개방이 되기 전이어서
그녀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녀는 죽기 2년 전인 1987년에 대퇴골골두양사(大腿骨骨頭壤死)라는 병으로
후쿠오카 재생병원(福岡再生病院)에 입원하였고,
100일여간의 투병 생활 끝에 재기 하였으나 1989년에 간질성 폐질환으로
5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호소력 짙은 가창력에 미모까지 갖추었으며 1천4백 여곡을 발표 했고,
수많은 히트 곡을 남겨서 음반 판매량이 4천만 장을 넘었다고 한다.
그중에도 말년의 병상에서 일어나 발표한 곡, 괴롭고도 무거운 여인의 사랑을 표현한
‘흐트러진 머리(みだれ 髮)’ 는
그녀가 자신의 심경을 작사가에게 의뢰하여 작사한 곡이라 한다.
이곡의 마지막 가사를 보면,/
날려버린 여자의 기원이 슬프게 하네/
홀로 외톨이로 있지 말게 해 주오/
는 어쩌면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1)
가미노 미다레니 데오야레바 아까이 게다시가 가제니 마우
かみの みだれに 手をやれば 赤い蹴出しが 風に舞う
헝클어진 머리에 손을 얹으면 빨간 게다시가 바람에 춤추네
니쿠야 고이시야 시오야노미사키 나게테도도카누 오모이노 이토가
憎や こいしや しおやの岬 投げてとどかぬ 想いのいとが
밉고도 그리운 시오야곶 던져도 닿지 않는 상념의 실이
무네니 가란데 나미다오 시보루
胸にからんで なみだをしぼる
가슴에 엉켜 눈물을 짜내네
2)
스테타오가타노 시아와세오 이노루 온나노 세가가나시
捨てたお方の しあわせを 祈る女の 性かかなし
날 버린 분의 행복을 기원하는 여자의 본성이 슬프네
쯔라야 오모다야 와가고이나가라 오끼노세오유쿠 소코비키 아미노
辛や 重たや わがこいながら 沖のせをゆく 底曳き網の
괴롭고도 무거운 나의 사랑이지만 바다를 가는 저인망의
후네니 노세타이 고노가타나사케
舟にのせたい この片情け
배에 싣고픈 이 짝사랑
3)
하루와 후타에니 마이다오비 미에니 마이데모 아마루 아키
春は二重に まいたおび 三重にまいても 余る秋
봄엔 두겹으로 감던 띠가 세겹으로 감아도 남는 가을
구라야 하테나야 시오야노 미사키 미에누 고코로오 데라시데 오쿠레
暗や 涯てなやしおやの岬 見えぬ心を 照らしておくれ
어둡고도 끝없는 시오야곶 보이지 않는 이 마음을 비쳐다오
히토리봇치니 시나이데 오쿠레
ひとりぼっちに しないでおくれ
나홀로 있지 않게 해다오
** 蹴出し,게다시--여자가 腰卷(고시마끼)위에 겹쳐 입는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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