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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생애와 사상

문수봉(李楨汕) 2017. 11. 23. 18:18


퇴계 이황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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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생애와 사상 


퇴계 생애


1. 출생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 자는 경호, 호는 퇴계 혹은 도유, 퇴도, 청량산인 등이며, 관향은 진보이다.

퇴계는 연산군 7년(1501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잠, 하,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2. 초년기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 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청량산에 가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독학하기도 하였다.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권'태극도설'과 마지막권'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3. 중년기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임관기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과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이 후 52세 때 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퇴계는 외척의 권력 투쟁이 격심하였던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경적을 관장하고 글을 짓거나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은 홍문관의 관직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45세 때 을묘사화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한 때 파직 당하였으나 복직되었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하며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외직을 구하여 단양군수(9개월)와 풍기군수(1년 2개월)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특히 풍기 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하였다.

그가 물러나기를 결심한 것은 당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 잡는 일 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데 그 자신의 역할이 자각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일이 속출하여 27세에 허씨 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46세 때 그 권씨 부인마저 잃는다. 더구나 단양군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50세 때에는 친형인 좌윤공 해를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는다.



4. 만년기


 :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강학기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과 천명도설후서(1553), 고봉 기대승과의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1559~1566), 주자서절요(1556), 자성록(1558), 전습록논변(1566), 무진육조소(1568), 성학십도(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5. 사망


 선비의 품격은  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 들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이황의 사상



(1)‘이선기후’의 이일원론


이황의 철학사상은 ‘이(理)’를 최고의 범주로 삼고 이야말로 본체이며 천지만물을 낳는 근거 또는 본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이’는 만물을 낳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만물을 주재하기도 한다는 생각이기에 그의 철학에서 ‘이’는 최고 범주이며 객관 관념론의 절대관념이다.


이황은 이기(理氣)의 관계에서도 주희의 이일원론, 즉 이가 일차적인 데 반해 기는 이차적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이고 “이가 움직이면 기가 따라서 생겨 나온다”는 독창적인 견해를 내놓는다.


다시 말하면 ‘이’위에서, 즉 만물의 본원에서 말하자면 단지 이 만이 가장 높고 영원하며 유일한 절대적 존재라고 할 수 있지만 ‘물(物)’위에서, 즉 구체적인 사물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말하자면 이와 기는 서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고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황은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자연을 넘어 군신․부자등의 관계와 같은 봉건 윤리규범까지도 사람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만고불변의 ‘천리’로 만들어 버리며 이는 곧 조선왕조의 봉건적인 중앙집권제에 이론적인 근거를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황의 극단적인 사상은 정주학만을 정통으로 보고 나머지 일체의 학설들은 이단으로 몰아 배척하였기에 사회를 통일시키는 작용은 하였으나 반면에 각 학파들 사이의 자유로운 논쟁을 막아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기도 하였다.


이황은 주희의 “하나가 나뉘어 둘이 된다”는 변증법적 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는데 “나뉘어 둘이 된다”,“합해져 하나가 종합된다”는 분합론을 “나뉘어 둘이 되더라도 그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해치지 못하며, 합해져 둘이 하나가 되더라도 실제로는 결코 뒤섞이지 않는다. 그러니 두루 다하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라고 제시한다.





(2) ‘격물궁리’의 관념론적 인식론


이황은 인식론2)에서 인식대상의 객관적 실재성을 주장하고, 격물(格物)3).치지(致知)4).궁리(窮理)5)등 인식발전법칙에 부합하는 인식의 과정을 내놓았으며 왕수인의 치양지(致良知)6)설과 지행합일설7)을 반대하고 지행병진설을 주장한다.



“대체로 사람의 마음이 형기에서 발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알고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능하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안과 겉이 똑같다. 그러므로 호색을 보면 곧 그 좋음을 알아서 마음으로 정말 좋아하고, 악취를 맡으면 곧 그 싫음을 알아서 마음으로 정말 싫어한다. 이런 경우에는 행이 지에 깃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맞다. 그러나 의리(義理)에 이르러서는 그렇지가 않다. 배우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힘쓰지 않으면 능하지 못하다. 겉으로는 행한다 할지라도 속으로는 꼭 진실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선을 보고도 선인 줄 모르는 자가 있을 수 있고 선임을 알고도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는 자도 있을 수 있다...그러데 왕양명은 저 형기에서 하는 바를 이끌어다 이 의리의 지와 행의 경우까지 증명하려고 하니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기에 의리의 지와 행은 합해서 말하면 물론 서로 기다리고 함께 행하므로 어느 하나라도 빠뜨릴 수 없지만, 나누어 말하면 지를 행이라 할 수 없고 행을 지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어찌 합하여 하나로 여길 수 있겠는가?”


이 말에서처럼 이황은 먼저 지와 행을 구별한 다음 다시 지와 행을 통일하고 있는데 이때 말하는 지와 행, 즉 진지와 실천은 사회적인 인식과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봉건윤리․도덕규범의 인식과 실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 세계를 인식하는 능력은 인식주체 즉 마음에서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으며 군신의 이치를 안다는 것은 단지 마음 속에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군신의 이치를 인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그의 ‘사단칠정논변’에서 나타나는데 그시초는 정지운이 지은 「천명도설」에서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는 구절을 이황이 “사단은 이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기대승이 이에 이의를 표시한데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를 기화로 기대승과 이황은 8년여에 걸쳐 서신을 통한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이황이 편 주장은 ‘이기호발론’8)이고 기대승이 편 주장은 ‘이기겸발론’9)이었다. 그리고 그후 조선의 철학계는 이황을 대표로 하여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그것을 따른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그것을 탄 것이다’라는 주리파와 기대승의 주장을 ‘기발리승론’10)으로 발전시킨 이이의 주기파로 갈라져 3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사칠론

사단(四端)과 칠정(七精)은 마음에서 정(精)의 두 가지 발동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맹자는 사단의 마음을 인간의 성품이 선한 증거로서 제시한 것이며, 칠정은 <예기>에서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인정으로 제시한 것이다. 처음에 퇴계는 1553년 정지운의 <천명도설>에서 천명도를 수정하면서,'사단은 이의 발동이요, 칠정은 기의 발동이다.'(四端理之發, 七精氣之發)라고 고쳤다. 1558년 고봉의 지적을 받은후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여, '사단의 발동은 순수한 이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동은 기를 겸하므로 선도 있고 악도 있다.'(四端之發純理, 故無不善, 七精之發兼氣, 故有善有惡)고 제시하면서 고봉에게 의견을 묻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 8년에 걸친 퇴계와 고봉 사이에 벌어진 사칠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퇴계와 고봉이 주고 받았던 사칠논쟁은 학문적 진지성과 자신의 심성론적 논거를 구명하는 분석의 치밀함에서 한국유학사의 학문적 논쟁에 모범이 되고 있다.



(3) 인성론과 관념사관


이황은 사람이란 이중의 본성, 즉 ‘본연지성(本然之性)’11)과 ‘기질지성(氣質之性)’12)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사회에 등급의 차별이 있는 것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질’의 차이에서 비롯되어 인간이 지혜롭거나 어리석은 것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기질이 맑으냐 혼탁하냐, 순수하냐 불순하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사람을 ‘빼어난 사람 - 상지(上智)’, ‘보통사람 - 중인(中人)’, ‘어리석은 사람-하우(下愚)’ 세등급으로 구분하지만 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사람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라는 두 성품을 모두 가지고 있어서 기질의 차이는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줄여 나갈수도 바꿀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 입각하여 이황은 사람들이 서로 믿음을 가지기를 바랬으며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기질상의 몇몇 차이들은 교육을 통해서 혹은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극복하여 마침내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황의 윤리설에서는 천리와 인욕(人欲), 공(公)과 사(私), 의(義)와 이(利)등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는 천리, 즉 봉건 도덕규범에 합치하는 행동이 곧 공이요 의이며 이에 어긋나는 것이 사(私)요 이(利)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단칠정(四端七情)13)’과 ‘천리인욕(天理人欲)’에 대한 견해에선 사단은 곧 천리라 할 수 있지만 칠정은 인욕과 동일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칠정은 선으로 될 수도 있고 악으로 될 수도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다 포괄하지만 인욕은 필연적으로 악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양의 목적은 오로지 “인욕을 남김없이 바꾸어서 천리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러한 이황의 생각은 사회․정치에도 적용하여 왕도정치를 높이고 패도정치를 낮추어 봉건적 중앙집권제를 강화할 것을 주장한다. 그렇기에 이황의 사회․정치론은 조선의 봉건사회를 더욱 강화하고 굳건히 하는 데 적극적으로 공헌을 하였으며, 이에 따라 그는 조선사회의 집권층으로부터 아낌없는 신임을 받았다.


 

 

참고자료


 1)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1997년 학사원

  2) "퇴계의 삶과 철학" / 금장태 저 / 1998년 서울대출판부

   3) "퇴계선집" / 윤사순 역주 / 1993년 현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