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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문수봉(李楨汕) 2017. 11. 23. 18:09

율곡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율곡의 생애(生涯)

 

율곡의 생애는 크게 4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제1기인 입지기(立志期 :1세부터 28세까지)는 선생이 시류와 도학(道學)사이에서 정신적 방황을 하다가 어머니 사임당과의 사별을 기점으로 마침내 홀로서기를 하고 금강산에서 하산한 후 삶의 큰 뜻을 세운 시기이며,

 

제2기인 출사기(出仕期 : 29세부터 40세까지)는 호조좌랑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탁월한 시사의 진단과 처방으로 선조임금의 총애를 받던 시기이며,

 

제3기인 은거(隱居)와 후진양성기(後進養成期 : 41세부터 45세까지)는 해주 석담에 은거하여 격몽요결, 경연일기 등의 집필활동과 사계 김장생 등 후진양성에 몰두하던 시기이며,

 

제4기인 재출사기(再出仕期 : 46세부터 49세까지)는 다시 정계로 돌아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대비책을 마련코자 10만 양병을 주장하였다가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위 사람들에게 넌지시 가르쳐주는 등 그 동안의 경륜으로 민족과 나라를 위해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한 시기이다.

 

1. 가정환경(家庭環境)

  율곡의 성(姓)은 이씨(李氏), 이름은 이(珥), 자(字)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이씨(李氏)로서, 아버지는 원수(元秀),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아버지는 이 원수(李元秀)공은 수운판관,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은 시, 서, 화 삼절(三絶)로 이름난 여인으로 기묘 명현 평산 신명화와 용인 이씨 사이의 둘째 딸이다.

 

율곡은 7남매 중 다섯째(위로 형 2, 누나 2)로 외가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6세 때 서울 수진방(壽鎭坊:지금의 수송동과 청진동)의 아버지 본가로 올라와 10여년을 살다가 16세 되던 해 봄에 다시 삼청동(三淸洞)으로 이사하여 생활하게 된다.

 

22세 되던 해 9월 다섯 살이 아래인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따님과 결혼했다. 그런데 율곡은 불행히도 정처인 노씨(盧氏) 부인에게서는 손이 없었고, 두 측실(側室)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경림(景臨)으로 율곡의 나이 39세 때 낳았고, 둘째 아들은 경정(景鼎)으로 율곡이 44세 때 낳았다.

 

율곡에게 있어서 주로 생활의 근거지가 된 곳은 외가가 있는 강릉 오죽헌, 처가가 있는 해주 석담, 그리고 친가가 있는 파주 율곡리였다. 율곡의 가정환경은 16세 이전까지 사임당의 밑에서 생활하던 시기와 40세 이후 해주시절 몇 년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좋은 편에 속하는 가정환경은 아니었다.

 

2. 출사(出仕)의 길

율곡은 남에게 보이는 학문인 과거(科擧)공부를 자기 스스로를 완성하는 도학(道學)공부에 비하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 제도는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벼슬길에 나갈 수 없으므로, 수기(修己)뿐만 아니라 치인(治人)도 중시했던 율곡은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본의 아니게 아홉 번이나 과거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율곡은 29세 8월에 대과에 장원급제하면서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어 첫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벼슬길에 오른 그는 정치 사회에 참여하면서 가슴에 간직하고 있던 이상을 실현하기 시작하였다.

 

31세 5월에 동료들과 더불어 시국의 급선무라 할 '시무삼사(時務三事)'를 임금께 상소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마음을 바로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 둘째 어진 이를 등용하여 조정을 맑게 할 것, 셋째 백성을 편안케하여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할 것 등이었다.

 

33세 가을에는 명나라로 가는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수도까지 멀고 힘든 길을 다녀오며 견문을 넓혔다. 당시의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아쉽다.

 

34세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함)의 명을 받고 '동호문답' 11조를 지어 임금께 올렸는데, 그 요지는 왕도정치를 회복할 수 있는 방책과 포부를 명쾌하게 논술하고 있다.

 

36세에 율곡은 36세에 청주목사(淸州牧使)에 임명되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토대로 손수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어 그 고을의 자치능력을 길러 주고자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으로 그 자리를 물러나게 되어 계속적인 실시는 어려웠다.

 

39세 정월에 승정원 우부승지로 승진하여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다.

그 내용은 첫째 제도 개혁을 이루어 때에 맞는 변법을 하자는 것이고, 둘째는 일곱 가지 무실(無實)을 없애고 실사(實事)에 힘쓰자는 것이고, 셋째는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있는 방책을 말하고 있다.

 

40세 9월에는 '성학집요'를 저술하여 선조 임금께 올렸다.

이것은 선조가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성군(聖君)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성인의 학문을 공부하는데 필요한 사서육경을 기본으로 하고, 선유(先儒)의 학설과 역대의 사실을 참고로 하여 학문과 정사의 긴요한 요령을 모은 것이다.

46세 겨울에 '경연일기(經筵日記)'가 완성되었다.

이것은 율곡이 벼슬길에 오른 이후 조정에 올린 개인적인 의견 중 요점만을 정리하여 후에 법이 될 만한 것을 기록한 것인데, 1565년 명종 을축년부터 시작하여 1581년 선조 신사년에 이르기까지 17년간의 일을 손수 해서(楷書)로 기록하여 3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47세 정월에 이조판서에 오르자 오래된 폐해를 개혁하였고

7월에는 '인심도심설'을 저술하고 다시 '학교모범' 16조 및 사목(事目: 공적인 일에 관한 규칙)을 저술하였는데, 그것은 모두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 쓴 것이다.

9월에 '만언소'를 올려 시폐를 극진히 하였고, 10월에는 원접사의 명을 받고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극기복례설'을 지으니 명나라 사신들이 거듭 경탄하였다.

12월에는 병조판서로 임명되어 황해도와 평안도의 민폐를 개혁할 것을 조정에 알렸다.

 

48세 2월에 '시무 6조계'를 개진하였는데 그 내용은,

첫째 능력있고 어진 이에게 맡길 것, 둘째 군민(軍民)을 기를 것, 셋째 재정(財政)을 풍족히 할 것, 넷째 국방을 든든히 할 것, 다섯째 전마를 준비할 것, 여섯째 교화를 선명히 할 것 등이다.

 

49세에 율곡은 별세하기 10여일 전부터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14일 북방의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떠나는 서익에게 병조판서의 경험을 전하기 위해 아들과 조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생 우를 앉혀 놓고 자신의 말을 대서하게 하였다.

이것이 '육조방략'이며 율곡의 죽기 전의 마지막 글이 되었다.

 

3. 율곡의 죽음

1584년 정월(선조17), 49세 되는 해에 율곡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인 14일에는 순무어사(巡撫御史) 서익(徐益)이 임금의 명을 받고 북쪽 변방 백성들의 삶을 둘러보고 위로하기 위해 떠나면서, 먼저 병조판서를 지낸 율곡을 찾아와 변방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선생의 건강을 걱정한 가족과 제자들은,

 

"병이 조금 차도가 있는 중이므로 노동하는 것이 마땅치 않으니 만나는 것을 사양하시라"

고 당부하니 선생이 이를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내 몸은 단지 나라를 위한 것일 뿐이다.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진다 하더라도 역시 운명이 아니겠는가!"

"이는 나라의 대사이니 이 기회를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다." 고 하면서 일어나 앉아서 여섯 조목의 방략(六條方略)을 불러 아우 우에게 받아쓰도록 하였다.

 

선생은 16일 새벽에 부축을 받고 일어나서 손톱과 발톱을 자르게 하고 의건(衣巾)을 단정히 한 채, 서울 대사동(현 인사동)에서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쳤다.

 

대체 무슨 한이 크토록 많았던지 선생은 운명한 후 이틀 동안이나 눈을 감지 못하였다고 하며, 선생이 운명하기 전날 밤에는 부인 곡산 노씨가 꿈에 흑룡이 침방으로부터 나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율곡의 부음이 전해지자 선조는 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도록 애통해 하였으며 수라상에 고기를 올리지 못하게 하고,

"어진 재상이 서거하니 내 마음이 극히 아프다" 면서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을 것을 명하였다.

 

또한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되,

"나라를 위해 몸이 여위도록 정성을 다해 애쓴 경이야 무엇이 슬프리오? 큰 물 가운데서 노를 잃었으니 나야말로 애통하도다." 라고 비통함을 전했다.

 

또 각지의 선비들은 모두 친척상을 당한 듯 슬프게 울지 않는 이가 없었고 백성들도 눈물을 흘리며 애도해 마지 않았다.

 

동향의 친구 우계 성혼은 율곡의 도학에 대하여,

"진리의 본원을 꿰뚫었으며 사물의 본체를 통달한 그 경지는 산과 물의 기상을 얻었으니, 실로 율곡은 다시없는 큰 인물이었다." 고 평하였다.

 

특기할 사항은 대제학을 지낸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율곡시장(栗谷諡狀)>에 '율곡이 운명한 뒤에 집에는 한 섬 곡식의 저축도 없고, 옷을 빌어다가 염을 하였다. 서울에 집이 없어 처자들이 의지할 데가 없이 옮겨 살며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다. 친우 및 선비들이 쌀고 포목을 내어 서울에 집 한 채를 사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율곡이 평생을 얼마나 청빈한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율곡의 사상(思想)

율곡의 사상은 철학,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학, 국방 과 성학(聖學)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철학사상

 

1) 이기론(理氣論)

 

가) 이기지묘(理氣之妙) : 이(理)와 기(氣)는 '하나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 一)'인 묘합(妙合) 관계이다.

나) 기발이승(氣發理乘) : 운동하는 것은 기(氣)요, 스스로는 운동하지 않으면서 기의 운동 원인이 되는 것은 이(理)다.

다) 이통기국(理通氣局) : 이(理)는 형상이 없으므로 언제 어디서나 두루 통하지만, 기(氣) 는 형상이 있으므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2) 심성론(心性論) : 심성정의(心性情意) 일로(一路) : (천인합일(天人合一))

 

가) 성(性) : 본연지성(本然之性) - 이(理)(마음의 본체)

기질지성(氣質之性) - 이(理)와 기(氣)의 합

 

나) 정(情) : 사단(四端) -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칠정(七情) 중 선한 부분

칠정(七情) - 희,노,애,구,애,오,욕 - 사단(四端)을 종합한 것

 

다) 심(心) : 인심(人心) - 기(氣)의 가린 바 (*인욕-인심과는 다르다. 인심 속에 인욕이 포 함됨)

도심(道心) - 기(氣)가 가리지 않는 것

 

라) 의(意) : 마음이 발한 것을 헤아려 생각하는 것

 

3) 학문의 주체성과 독창성을 확립함(주자, 퇴계 등의 호발설을 비판함)

 

2. 정치사상

 

1) 민본 덕치주의 : 왕도정치의 실현(요순시대의 재실현)

 

2) 현실인식과 역사의식 : 정치에는 때를 아는 것이 귀하고, 일에는 참을 힘쓰는 것이 중요 하다((정귀지시(政貴知時) 사요무실(事要務實))

 

3) 여론정치(與論政治)

 

가) 국시론(國是論) : 인심(人心) - 공론(公論) - 국시(國是)

 

나) 민의(民意)에 의한 정치 : 정치의 주체 - 국민

 

다) 언로(言路)의 개방 : 언로가 열리느냐, 닫히느냐에 국가의 흥망(興亡)이 달려있다.

 

3. 경제사상

 

1) 애민정신(愛民精神) : 인간 생명 중시(정치의 본질을 생민(生民), 양민(養民)에 둠)

 

2) 양민(養民)과 교민(敎民)의 조화 : 양민(養民) 연후 교민(敎民)

 

3) 생산, 분배, 소비의 원리 : 생산장려, 국부증대. 분배의 형평. 절약, 검소의 소비윤리

 

4) 사창(社倉)제도 실시 : 빈민구제

 

5) 율곡은 오늘날 정치의 핵심이 되고 있는 경제에 있어서 의리(義理)와 실리(實利)가 조화 를 이루는 경제 윤리를 제시하여 이익에만 치우치는 경제를 경고하고 있다.

 

4. 사회사상

 

1) 인간 평등의식 :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

 

2) 인사의 합리화 : 도덕적 자질(도덕성)과 실무적 능력(전문성)을 기준으로 인사.

 

3) 신분차별에 대한 관심 : 서얼사로 허통과 노비해방 주장

 

4) 사회기강의 확립

 

5) 권간(權奸)의 처벌과 사림(士林)의 옹호

 

6) 붕당의 해소와 지도층의 화합

 

7) 변사정(辨邪正)과 사풍(士風)의 쇄신

 

8) 예법(禮法)의 합리적 개선

 

5. 교육사상

 

1) 교육이념 : 성인, 군자의 이상적 인간상 추구(천인합일(天人合一))

 

2) 교육목적 : 성인, 군자를 목표로 하는 이상주의 실현

 

3) 교육목표 : 성인, 군자를 기르는 것

입지(立志), 성(誠), 수기(修己)공부, 극기(克己)공부.

 

4) 교육방법 : 귀납적 교육방법 채택(기질변화론)

경(敬), 궁리(窮理), 거경(居敬), 역행(力行).

 

5) 교육과정 : 유교적 경서, 중국의 역사, 문학, 국사

소학, 대학, 근사록, 논어, 맹자, 중용, 사기.

 

6) 교사론 : 교화의 도구는 스승을 잘 선택하는 일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

 

7) 교육관련 저서 : 격몽요결, 학교모범, 은병정사학규, 문헌서원학규, 서원향약, 해주향약, 사창계약속

 

6. 문학사상

 

1) 문학의 정의 : 문이형도(도는 오묘해서 형상이 없으니 문(文)을 통해서 도를 형상화함).

 

2) 문학이란 사상의 형상화로서, 추상적 사상을 구체적 형태로 형성시키는 것이요, 철학적 논리를 예술적 형상으로 형상화시키는 것이다.

 

3) 문학의 최고단계 : 선명(善鳴) - 사람이 소리를 내서 여러 사람에게 호감을 주고, 여러 사람으로부터 호감의 사서 문장으로 표현하고, 문장에 표현하여 정(正)에 부합한 것.

 

4) 문(文)이란 천지의 문과 성현의 문과 속유의 문이 있는데, 의식적으로 문학을 하기 위한 문이 아니라 도덕적인 수양이 문학 창조에 선행되어 도의 경지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불문의 문(不文之文)'이 진정한 문학적 가치를 지니는 '지문(至文)'이 될 수 있다고 봄.

 

7. 국방사상

 

1) 주변 정세의 인식과 국방의식 : 보국안민과 민족주체의식 확립 강조.

 

2) 국민통합과 안보의식의 제고 : 국민의 의지를 보국안민의 가치로 통합하는 동시에 정신 계발을 중시.

 

3) 국방 대책과 경륜 : 6조계와 십만양병을 주장.

 

8. 율곡의 성학(聖學)

 

성학(聖學)이란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학문' 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인이란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통해 주위 사람들까지 도덕적으로 감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또 성인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그가 몸 담고 있는 사회 전체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는 지도자를 뜻하기도 한다.

 

결국 온전한 의미의 성인은, 자기 수양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귀감이 될 수 있는 도덕성을 갖추고, 한 사회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사람이라 하겠다.

 

율곡은 성인과 범인이 그 본성에 있어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만 기(氣)의 청(淸), 탁(濁), 순수(純粹), 잡박(雜駁:뒤섞여서 고르지 못함)의 관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사람 가운데는 성인이 있어 홀로 지극히 통하고,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맑고, 지극히 순수한 기를 타고 나서 그 덕이 천지와 합치되었다."

 

'천지는 성인이 본받아야 할 준칙이며, 성인은 범인이 본받아야 할 준칙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수양이란 성인이 이미 이루어 놓은 규범을 따르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범인도 가변적인 기(氣)를 갈고 닦아 타고난 본성을 완전하게 실현함으로써 모두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성학집요'는 율곡이 그의 나이 40세때(1575년) 홍문관 부제학 벼슬을 하던 당시 완성하여, 선조 임금에게 올린 책이다. 선조가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그래서 조선이 성인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율곡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총설(總說), 수기(修己), 정가(正家), 위정(爲政), 성학도통(聖學道統) 등의 5편으로 나누고, 그 각각을 다시 여러 장으로 세분하여, 유교의 사서 가운데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가르침과 관련 있는 옛 성현의 말씀을 정리한 뒤, 율곡 자신의 간략한 설명을 첨부한 형식이다.

 

(이 글은 《이이, 율곡전서》- 장숙필著/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율곡전서》그리고 충남대학교 철학과 황의동 교수의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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