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를 가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
여러분은 김좌진 장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 아마도 백야 김좌진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홍성역에서 내려 홍성읍내로 들어오다 보면 김좌진 장군의 동상을 만날 수 있는데요. 김좌진 장군은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만주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성지역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
푸르름이 한껏 더해가는 5월! 저는 충남 홍성에 있는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를 찾았습니다.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지는 충남 홍성군 갈산면에 있었는데요. 1989년 12월 24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생가지는 생가와 김좌진 장군의 호 백야(白冶)를 붙여 조성한 백야기념관, 백야사(사당), 백야공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김좌진 장군 생가지 안내판
▲김좌진 장군 생가
김좌진 장군은 1889년 12월 16일(음력 11월 24일)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아버지 김형규와 어머니 한산 이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3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는데요. 어려서부터 글공부보다는 말 타기, 활쏘기 등의 무예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몸집이 크고 힘도 장사이어서 친구들과 병정놀이를 할 때면 언제나 대장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김좌진 장군은 서울로 가서 대한제국무관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애국계몽사상에 눈을 떴습니다. 무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고향인 홍성으로 내려와 1907년 호명학교를 세우고 자신의 집을 학교 건물로 사용하게 하며 학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는데요. 정작 자신은 초가집이었던 이곳 생가지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호명학교가 세워졌던 장군의 집터는 지금까지도 홍성군 갈산면에 있는 갈산고등학교 부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홍성에 대한협회지부를 설치하여 민중의 계몽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기호 흥학회를 창설하여 영특한 호명학교 학생 등 지방의 유능한 인재를 뽑아 서울에 유학을 보내주기도 했으며, 서북학회 산하 오성소학교 교감, 청년학우회 회원, 한성 신보 이사 등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며 민중 계몽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특히 1915년에는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독립 군사 학교 설립자금 모금활동 중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 여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는데요.
서대문감옥에서 출옥한 후엔 만주로 건너가 1919년 초 3.1독립선언서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서일, 여준, 정신 등 38명의 민족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여 발표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북로군정서 소속의 무장독립군 총사령관이 되어서 총재이었던 서일을 보필하는 한편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데 주력했습니다.
김좌진 장군 생가에 들어서면 왼쪽 편에 커다랗게 세워져 있는 단장지통이라는 비문이 있는데요.
이 비문의 시는 김좌진 장군이 만주로 가기위해 두만강을 건너면서 지은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비문을 보면서 장군의 나라사랑에 대한 애타는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단장지통(斷腸之痛)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 생각을 돋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단장의 아픈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김좌진 장군은 1920년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을 장백산으로 이동시키던 중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만나 1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일본군 3,300여명을 살상하는 대전과를 올렸는데요. 이 전투가 바로 소수의 독립군 병력으로 10배가 넘는 일본군을 물리쳐 대승리를 거둔 청산리대첩이며, 김좌진 장군은 그해 12월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이후에 김좌진 장군은 1925년 신민부를 조직하여 군사부 위원장 겸 총사령에 선임되었고, 1927년에는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여 신민부를 통할했습니다. 그 후 1928년 신민부가 해체되자 한국유일독립당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1929년에는 신민부 출신의 정신 등과 함께 북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군소 독립운동단체들을 규합하고, 무정부주의단체인 흑색동맹파와 연합해서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영안현 일대 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중동선 산시역 부근에 정미소를 설치하여 운영했습니다.
#백야기념관과 백야공원
김좌진 장군 생가 오른편에는 백야기념관이 있었습니다. 이 곳 기념관에는 김좌진 장군의 계몽사상과 독립운동, 청산리 전투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는 사진과 유물을 전시해 놓았는데요, 유물 중에는 당시 독립군이 사용하던 무기도 볼 수 있었습니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자 늠름한 김좌진 장군의 흉상이 가장 먼저 저를 맞이하여 주었습니다.
▲백야기념관 전경
▲백야기념관내의 김좌진 장군 흉상
▲백야기념관 전시물
생가지에서 김좌진 장군의 사당인 백야사로 가는 기념관 뒤쪽에는 김좌진 장군의 호를 붙여 조성하여 놓은 백야공원이 있었는데요, 김좌진 장군의 유년시절부터 청산리대첩에 이르기까지의 활동모습을 동상으로 세워놓아 그의 생애를 쉽게 되짚어 볼 수 있었는데요. 중간 중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도 많아서 나들이 나오기 좋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백야공원의 김좌진장군 활동 동상
그리고 공원 내에는 김좌진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김좌진 장군 추모비도 세워져 있었는데요, 이 추모비는 1949년 대한청년단의 홍성군 단원들이 성금을 모아 홍성읍 남산공원에 세웠었는데, 2007년에 이곳 백야공원으로 이전하였다고 합니다.
▲김좌진 장군 추모비
#백야사(김좌진 장군 사당)
생가에서 약 300여 미터 떨어진 기념관 뒤쪽에는 김좌진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백야사가 있었는데요. 김좌진 장군은 1930년 1월 24일 장군이 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설치·운영하고 있었던 중국 북만주 산시역부근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청년회원이며 재중 청년 동맹원인 박상실이 쏜 흉탄을 맞고 41세에 순국했습니다. 흉탄에 맞아 복부와 가슴을 관통 당하신 김좌진 장군은 “할일이…… 할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다고 하는데요. 죽음을 앞 둔 상황에서도 나라를 생각하셨다는 게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장례식은 1930년 1월 29일 중국 흑룡강성에서 한족총연합회 주관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요, 당시 동포의 슬픔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인들까지도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김좌진 장군의 유해는 1934년 5월 21일 국내로 은밀히 옮겨져, 현재 독립운동가 김복한 선생의 사당인 추양사 뒤쪽의 안동 김씨 종중산(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소재)에 밀장되었다가, 1957년 지금의 묘지인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로 이장되었으며, 현재는 충청남도 기념물 7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962년 정부에서 장군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는데요, 이후 매년 10월 청산리전투 전승기념일에 이곳 백야사에서는 장군의 독립운동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추모대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백야사(김좌진장군 사당)
▲백야사의 김좌진장군 영정
김좌진 장군은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전국 유림대표 136명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를 보내 일제의 침략상을 세계에 폭로한 지산 김복한선생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선생의 가르침을 통해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돕는다”는 신조를 가지고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현대를 살아감에 있어서도 모두가 매번 되새기고 실천해야 할 말인 것 같습니다. 교과서로만 접하던 청산리대첩을, 김좌진 장군의 굳은 의지를, 가까이서 느끼고 그의 나라사랑의 정신을 깊이 엿볼 수 있었던 뜻 깊은 생가지 방문이었습니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다가오고 있는데요. 여러분도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뜨거운 열정을 느껴보세요!
출처: http://mpva.tistory.com/4538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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