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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 장면총리의 생애

문수봉(李楨汕) 2017. 12. 6. 01:18

장 면

*** 원문출처 : 위키 백과

*** 부분편집 : 최 안드레아

 

 
출생1899년 8월 28일
대한제국의 국기 대한제국 한성부 종로방 적선동
사망1966년 6월 4일 16:50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1가 36-1
사인간장염
국적대한제국의 국기 대한제국, 일본 제국의 국기 일본 제국,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별칭호 운석(雲石), 세례명 요한(Johan), 영문명 존 면(John Myeon)
학력맨하탄 대학 문학부(법학박사)
직업교육자·종교가·출판인·공무원·외교관·정치가
종교천주교
배우자김옥윤
자녀장진, 장의숙, 장익 등 6남 3녀
부모

장기빈, 황루시아

 

 

넷째 아들: 장익 (張益, 십자가의 요한, 1933년 11월 20일~ , 로마 가톨릭 주교, 前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주 미국 대사 시절

윤보선 대통령과 공동정권 수립 후

총리 인준 받은 당시


 

평가와 비판

 

 평가


인물평으로는 총명하고 지성적이라는 평가가 있다.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에 발군의 역할을 한 외교관이며[12] 1948년 9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UN에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성사시킨 것과 1950년 6월부터 한국 전쟁 당시 미국과 국제 사회를 설득하여 미군과 UN군의 한국 전쟁 참전을 이끌어낸 점이 높이 평가된다. 단독정부 수립이후 남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을 이끌어냈고, 6·25 전쟁 시 미군과 유엔군의 파병을 이끌어내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국공로자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의원내각제를 실시하였다는 평가와, 정부수립 후 최초로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한 정권교체라는 의미를 둘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5·16 군사정변 이후 장면을 부정, 부패 무능의 상징이라 주장하였으나, 박정희는 장면 내각 출범 이후 19일 뒤부터 군사 정변을 모의하였다. 군사 정권은 장면의 통솔력 부족과 무능력함을 집중적으로 조명했으나, 이는 장면에게 부여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반론로 제기되고 있다.

한국헌법사를 쓴 김영수에 의하면 '급변하는 정치적 현실 속에서 이익의 조직화를 이루어 내는 능력을 갖고 있던 이승만과는 달리, 안정적인 정치상황 속에서만 장기적인 정책을 입안하고 수행하는데 적합한 행정적 인물이다. 그는 경제와 외교 분야에 상당한 의욕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126]'고 평가를 내렸다.

언론인 봉두완은 그의 업적은 '건국의 주도자로서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자리매김한 외교적 성과에 있다.'고 평가했다.[127] '해방과 함께 그는 입법위원회 의원, 제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대한민국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제3차 유엔 총회에 한국 수석 대표로 참가, 대한민국의 국제 승인을 이끌어냈다.'[127]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봉두완은 그를 '청렴함'과 '온화함'의 상징으로 평가하였다.[128] 바티칸 특시 당시 지원과 협력을 얻어낸 것에 대해, '지원자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장면의 인품과 신앙의 힘이 음양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보았다.[128]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을 지낸 이원교와 장면의 측근이었던 송원영은 "장면박사야 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속죄양이었다."라고 평가하였다.

대한민국의 가톨릭추기경 김수환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당시 동성고등학교의 교장이었던 그는 일본인 장학관이 방문했을 때 학교 학생 김수환은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며 발표하여 파문을 일으켰다.[129] 장면 교장은 김수환 학생을 불러 체벌을 가하였으나 김수환은 "선생님께서 나를 살리시려고 일본인 선생들 앞에서 '오버'를 하신 것"이라며 증언하였다.[129][130] 한편 김수환에 의하면 '선생님은 성인(聖人) 반열에 오르셔야 할 분'이라고 평가하였으며 친일파로 지목된 것을 안타까워 하였다.[129] 김수환은 그뒤 장면이 친일파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09년 2월 16일 사망하였다.[129][130] 한국 현대사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국민경제를 발전시키며, 분단을 극복하려는 방향성을 갖는다고 한다면, 그 방향성을 제대로 지킨 제2공화국 정부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는 평가도 있다.[131]

 

 

 

 

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은 1999년 '운석 장면 박사 탄신 100주기 추모미사'에 참석하여

추모사를 발표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132]

 

"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민주주의 지도자 "

 

사람이 일생을 사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평가를 받습니다. 젊었을 때 혹은 살았을 때 엄청난 영예를 누리고 찬양받던 사람도 차후에 엄중한 심판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또 생전에 여러 가지 비판을 받던 사람도 시간이 지난 뒤 정당하게 평가를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역사를 믿고 바르게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인은 결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국민과 더불어 사는 사람은 결코 영원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운석 장면 선생의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나라 최고 훈장을 추서하면서 참으로 우리는 의인 불멸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고, 한없이 축하하는 마음과 자랑스러운 심정을 갖습니다. 저는 1957년 장면 박사를 대부로 보시고 가톨릭 영세를 받았습니다. 장 박사님의 민주당에서 장 박사님을 도와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국무총리가 되신 이후에는 여당의 대변인으로서 우리 총리를 방어하고, 여당의 입장을 국민에게 알리는 데 나름대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5·16에 의해서 우리들이 나라를 바르게 세우겠다는 꿈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 사실입니다. 5·16을 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면 정권은 너무도 유약했다. 그런 약한 정권 가지고 나라를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옆에서 본 장면 총리는 결코 약한 분이 아니라 강력한 빈주적 신념을 갖고 이를 실천한 분이었습니다. 장면 박사는 민주적인 경선을 통해서 총리가 되었고, 총리가 되어 오랫동안 폐지되었던 지방자치제를 완벽하게 실시했습니다. 읍장·면장까지 선거하는 그러한 일을 아무 차질없이 전국적으로 해냈습니다.

또한 야당인사들을 과감하게 입각시켜서 연립내각을 만드는 결단도 내렸습니다.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과거 자유당 정치인, 경제인,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소급입법을 하려고 할 때 장면 총리가 이것을 단호하게 반대했던 일입니다. 저는 지금도 농협 강단에서 중앙상무위원회를 할 때 장면 총리가 거의 목멘 소리로 "민주국가에서는 소급입법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설득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소급입법은 되고 말았습니다만 총리는 저를 만날 때마다 이런 일을 하면 안된다고 굉장히 개탄하셨습니다. 그 당시 내각책임제하에 국회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시대였고 의원들의 각성과 자질이 부족해서 지도자의 그러한 훌륭한 말씀을 여야간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적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의 말처럼 5·16 직전이 나라가 붕괴의 직전에 있었는가, 혼란의 위기에 있었는가, 정반대입니다. 그때 4·19가 일어나고 시민들이 데모 한 번 안하는 사람은 병신이라고 할 정도로 데모를 많이했습니다. 그리고 정부가 폭력적인 진압이 아니라 시위를 평화적으로 유도하는 노력을 해서 결국 5·16직전에는 시위도 거의 없어지고, 시위가 있어도 국민들도 별 관심을 안 가질 정도로 안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면 정권을 그대로 두었으면 나라가 말할 것 같아서 5·16을 일으켰다." 이렇게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앞에서 김수환 추기경께서 박순천 선생의 삼민회 대표 연설을 말씀하셨는데, 그 삼민회 대표 연설을 바로 제가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박순천 선생이 어디서 얻어들으신 것이 아니라 민주당 정권이 수립되자마자 한 달도 안되어서 충무로에 있는 충무장에서 나중에 군사 쿠데타를 한 사람들이 모여서 정권 전복을 모의했다는 것은 그들이 출판한 5·16 군사혁명사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발견해서 박순천 선생께 보이고, 그 연설 속에 넣었습니다. 사실이기 때문에 여당이 감히 반박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그 책은 모든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수거되어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장면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1개월도 될까 말까 한데 어떻게 부패할 줄을 알고, 어떻게 무능할 줄을 알고, 어떻게 공산당이 나라를 지배할 줄을 알겠습니까? 이것은 나중에 군사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붙인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이 신문지 양면에 걸쳐서 깨알같은 글로 민주당 부패상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군사재판을 했습니다. 그러나 재판 결과는 어느 장관이 외국 출장 가 있는 동안에 누가 중고품 냉장고 하나 갖다 놓은 것만이 유죄가 되고, 나머지는 전부 무죄가 되었습니다. 5·16 직전에 그렇게 천하를 뒤엎다시피 떠들어댔던 사건이 결국 군사정권의 손에 의해서 무죄가 되었습니다. 부패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또, 무능한 정권이 어떻게 질서를 회복해서 5·16 직전에 거의 안정된 나라를 만들었겠습니까? 무능한 정권이 어떻게 해서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겁이 나서 못하던 지방자치제를 과감하게 실시하게 되었습니까? 그뿐입니까? 장면 정권은 국토건설단을 발대시켜 전국민의 에너지를 국토재건에 투입하는 일을 시작해서 돌아가신 장준하 선생께서 그 단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5개년계획을 수립해서 나라경제를 바로잡는 개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쿠데타가 났는데 군사정권이 그 5개년계획을 가져다가 표지만 바꾸어서 그대로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능한 정권이 어떻게 이런 준비를 하겠습니까? 모두가 나중에 붙인 이유가 된 것입니다. 장면 총리는 정치인으로서 건국의 공로자이십니다. 한국을 UN에서 승인받도록 하는 데 그 당시 소련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성공하신 것입니다. 또한 6·25때 UN군 파병에 절대적으로 공헌을 하신 구국의 공로자이십니다. 1952년 이래 1960년 4·19까지 8년동안 이 박사의 독재에 반대해서 싸우고, 이 박사 정권으로부터 가장 미움받는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 때 이번에도 불행히 대통령 후보가 선거 시작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당내에서는 "대통령 후보 없는 선거 두 번째 해서 뭐 하느냐? 그만두자"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 부통령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우리는 끝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 정권도 좋지만 국민의 권리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싸웠습니다. 저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노력했습니다.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3·15 부정이 저질러졌던 그 삼엄한 시대에, 군인들이 영내에 있다가 철조망 쪽으로 와서 우리가 마이크를 들고 가니까 손을 내밀면서 삐라를 달라고 해서 모두 주었습니다. 그런데 뒤따라 오던 자유당이 와서 그들에게 삐라를 준다고 하니까 전부 안 받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이런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어떻게 되었든 3·15 부정선거에서 야당 표가 전혀 안 나오고, 장면 박사 표가 안 나오고, 모두가 여당 표만 나왔습니다. 표가 너무 많아서 줄이려고 난리치는 이런 부정선거가 행해졌는데, 그런 부정 선거를 안할 수 없게 만든 것이 자염ㄴ 후보의 불굴의 지도력과 투쟁, 또 우리가 모두 싸운 결과였습니다. 그것이 4·19를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3·15를 포기했으면 4·19는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장면 박사는 최초의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한 이 나라의 역사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지도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민주정권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정권의 책임자인 장면 총리의 책임도 큽니다. 그러나 그 당시 많은 정치인들이 야당뿐 아니라 여당 내에서까지도 총리를 괴롭히고 협력을 안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국민으로부터 정부가 의심을 받게 만들고, 심지어 당내에서 별도 조직을 만들어 총리를 괴롭혔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책임은 없었습니까? 과거 이 박사 빝에서는 숨도 크게 못쉬고 감옥에 끌려다니던 사람들이 장면 총리 빝에서 자유를 주니까 오히려 장면 정권 타도의 선봉에 나선 그런 과오를 범했습니다. 과거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반성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면 박사는 또 우리나라에서 가장 첫줄에 서는 위대한 신앙인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장면 박사가 우리 교회에 끼친 위대한 영향은 어느 성작자 못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100주년을 맞이해서 오랫동안 상식화된 장면 박사에 대한 "무능했다. 부패했다. 약했다. 그대로 두었으면 공산화되었다." 이처럼,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이 조작하여 수십 년을 되풀이해서 국민의 머리에 세뇌시킨 장면 박사에 대한 부당한 판단이 이제 건국훈장의 수여와 더불어 말끔히 씻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도자가 누명을 벗을 뿐아니라 우리 국민의 스승으로서 이 나라의 위대한 민주 지도자로서 남게 된 것을 국가를 위해서 한없는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참으로 하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장면 박사의 대자로서 이 점에서 하나(느)님께 한없이 감사를 드립니다.

또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훌륭한 우리들의 지도자를 오랫동안에 걸친 부당한 평가와 누명으로부터 벗겨 드리고, 이렇게 해서 이 나라 건국의 한 원훈으로서 훈장을 드리고 그 영예를 높이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부당한 박해 때문에 많은 심려를 하셨던 박사님의 사모님, 또 그 가족들, 박사님을 존경하는 모든 사람들의 한과 고통이 말끔히 씻겨지고, 새로운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앞으로도 장면 박사의 위대한 인격과 민주 지도자로서 탁월한 경륜을 가졌던 분으로서의 진가가 우리 역사에 영원히 빛나기를 바랍니다.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박정희는 역사적 죄인으로 쿠데타가 없었으면 그가 나라를 잘 이끌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133][134] 강원용은 기독교도 연맹에서 활동할때 그를 보았다고 하며, 그는 본래 정치는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135] 권모술수를 쓰지 않은 몇안되는 정치인이라는 시각도 있다.

허동현 교수는 장면이 “이승만의 최대의 협력자였다”라고 보았다.[12] 더구나 그는 “당시 냉전논리적 반공 이데올로기는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지식인들 대다수의 지지를 얻었던 정치적 이념”이었으며, 장면은 “남한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6.25전쟁시 유엔군의 파병을 이끌어내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국공로자[12]”라고 평가하였다. 노길명 교수는 “장면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가톨릭신앙이 결합되어 있는 분으로, 미국 유학을 통해 자유와 평화에 대한 열망을 지니게 되었고, 해방 후에 그가 택할 수 있었던 국가형태는 당연히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다”고 부연 설명하였다.[12] 한편 노 교수는 해방 이전에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던 교회가 해방 이후에 적극적인 정치참여에 나서게 되었으며, 장면이 가톨릭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 당시 교회가 반공주의 사목정책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신앙인으로서 장면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교회의 방침에 따라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12] 그 밖에 근면하고 청렴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비판


5·16 군사 정변을 막지 못한 일로 무능하다, 나약하다는 평가가 있다. 정치적으로 부패하였다는 평가가 있으나 이는 장면 내각 출범 직후 18일 만에 5·16 군사 정변이 모의되고 있었으므로 논리상 타당하지 않은 평가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대학 교수 강준만은 그가 검소하고 온화하였지만, 나약하고 의타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80] 우유부단했다는 평도 있다.[136] 미국측 문헌에는 지적이고 유능하며 합리적이요, 유순한 인물로 묘사되었다는 의견도 있다.[137]

중국 상하이 복단대학 교수 곽정평(郭定平)은 장면의 민주당 정권이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과 마찬가지로 부패하고 무능했기 때문에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질서를 확립할 수 없었다고 보았다.[138]

전북대학교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은 장면은 직업을 잘못 찾은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인이 되었으면 딱 어울렸을 사람이었다.[139] 장면은 지독한 숭미주의자였다.[139]는 평도 내렸다. 강준만은 그가 리더십과도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고 보았다.[139]

'우유부단', '무능', '나약'이라는 비판에 대해 봉두완은 '이러한 꼬리표가 쉽게 떼어지지 않는 것은 1960년 4월의 피로 쟁취한 민주주의의 불씨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원망과 질책 때문'으로 분석했다.[127] 김영삼은 장면이 참 무능하다고 혹평하기도 했다.[134] 김영삼은 그가 '무능력자였습니다. 쿠데타를 당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평가할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혹평하기도 했다.[140] 그밖에 강력하지 못했던 리더십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러나 이 비판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최대한 지키려 했다는 반론도 상존한다.

허동현 교수는 '다만 그가 개인적으로는 “교육자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일제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교육활동은 할 수 없었[12]”으며 교회적으로는 일제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중간에서 도맡아 방어하는 역할을 전담”했기 때문에 신앙적인 이유로 일제에 저항할 수 없었노라고 변론했다.[12]

재일본 저술가 겸 사회운동가 정경모는 수녀원 피신을 두고 '도망한 지 5일째에 모습을 나타내어 학생들의 선혈로 얻어진 한국 사상 유일한 민주주의 정권을 너무도 간단히 박정희 앞에 내밀어 그것을 이양하는 서약서에 서명하였다'며 '피노체트에게 습격당해도 최후까지 저항하여 기관총을 쏘면서 죽어간 칠레의 아옌데에 비해 그 말로가 너무도 교활해 한국인으로써 부끄럽다.[141]'고 비판하기도 했다.

[편집] 윤보선과의 비교
이덕일은 5·16후 윤보선과 그의 행보를 비교하여 평가하였다. 그에 의하면 장면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역사의 죄인이란 죄의식 속에 참회하다가 죽어간 반면,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던 쿠데타세력의 박정희 후보와 1963년과 67년 두 차례 대결했으나 패배했다며 대조적으로 평가하였다.[142] 또, 이덕일은 현실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꿈을 접었을 무렵인 1980년대에는 전두환 정권에 협력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쿠데타후 두 사람의 삶은 현재우리 정치의 낙후성의 한 원인을 말없이 웅변해준다고도 평가하였다.[142]

[편집] 그밖의 평가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직을 내놓을 경우, 자신 대신 대통령이 될 인물로 장면과 조병옥을 꼽았다.[143] 그러나 이승만은 이 두 사람의 도덕성과 능력, 그리고 애국심(특히 미국에 대한 독립적인 자세)을 의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나라를 맡기느니 차라리 욕을 더 먹더라도 자기가 좀 더 오래 집권하면서 나라를 보위하고 그 기반을 다지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다 한다.[143]

장면은 개인적으로 사돈 관계였던 경향신문사 사장 한창우와 경향신문 관계자들이 추천하는 인사에 관련 되어서도 채용을 주저하였고, 이 때문에 경향신문은 장면의 집권기간 중에도 비판적인 기사를 쓰기도 했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이자 민주주의 신봉자이며 온건 합리주의자 라는 평가도 있다.[127] 한편 군사 정권은 5·16 군사 정변의 정당화를 위해 장면 내각이 부패했다고 주장해왔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근거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장면 내각 출범 후 23일 되는 날부터 군사 정변을 준비해온 박정희 등의 5·16 군사 정변이 준비된 무력정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윤재는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깊은 신앙심과 자신에 대한 엄격한 자제력을 소유했던 인물로 항상 단정한 차림으로 자세를 흩트리지 않은 신사였다. 또 선거 유세 중 여러 사람과 함께 투숙한 여관의 이불이 불결하다 해서 혼자서만 덮지 않고 잤으며, 시골 주막집에서 때가 묻은 '더러운' 표주박으로 떠 주는 막걸리를 마시지 못하고 거절한 위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정치인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144]

[편집] 일화
장면은 직접 가톨릭 교회의 교리관련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여 발표, 출간하기도 했다. 현석호에 의하면 그는 '웬만한 성직자보다도 오히려 많은 교리를 알고 있었으며, 또한 성직자 못지 않게 엄격하고 정결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분은 교리에 금지된 행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전차가 만원이어서, 표를 주지 못한 채 그대로 내릴 때면 전차표 한 장을 반드시 그 자리에서 찢어 없앴다 한다. 언론인 봉두완이 장면의 혜화동 사저를 방문했을때 '집이 무척 작았다.'고 한다.[128] 내각 책임제 하에서는 총리는 집권자나 다름이 없는데, 그런 그의 집이 연탄난로를 땔 정도로 초라했다[128] 한다. 그는 총리 재직 중에도 호화로운 식사를 마다하고 직접 도시락을 집에서 싸들고 다니며 식사하였다.

개인적인 일가 친족의 이해 청탁이나 만남을 거절하였고, 민주당 신파 내에서도 장면의 총리 취임 후, 신파 내부에서 미는 인물에 대한 인사 청탁 압력이 수시로 들어왔으나 장면은 이를 모두 거절하였다. 한편 자녀들 중에도 그가 국회의원이나 국무총리 재직 중 아버지의 전용 차량을 이용하려 하였으나 장면은 자녀들을 향해 너희가 언제부터 정치가였느냐며 단호하게 물리쳤다 한다.

주미대사로 재직할 당시 그는 흑인 운전수를 채용하였다. 흑인 운전수는 장면이 이임한 뒤에도 주미한국대사관의 운전수로 있었고, 그는 한국에서 미국을 방문하는 사절단에게 장면의 소식을 물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 나를 사람취급해준 사람은 그분밖에 없었다'고 회고하였다.[145]

독실한 가톨릭신앙인이었던 그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둑 같은 취미도 없었다. 그러나 현석호에 의하면 누군가를만나게 되어 낮이면 점심을 나누고 밤이면 저녁 식사까지 나누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주로 종교에 대한 토론을 했다고 한다.[146] 현석호에 의하면 그는 종교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피로한 줄도 모르고 정열을 다해 말씀했고, 자기의 뜻이 전달되지 않으면 몹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146] 한편 자유당을 탈당하여 그의 문하에 온 김영삼은 술도 담배도 하지 않고 종교 이야기만 하는 그에게 고리타분함을 느끼고 그의 곁을 떠나 조병옥에게 갔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일본인 장학관이 장학지도를 나왔을 때 김수환은 교사에게 창씨개명을 할 이유가 없다고 대들었다. 참관하던 교장 장면은 즉석에서 김수환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뒤에 김수환을 눈여겨보던 중 장학생으로 선정하고 유학을 추천하기도 했다.

7대 국무총리 재직 당시 장면은 윤치영을 영입하려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장면의 영입 제의에 윤치영은 "당신이 그렇게도 바라던 내각책임제 세상이 되었으니 잘 해 보시오, 국민의 한 사람으로 말한다면 치안부터 안정시키길 바랄 뿐이오"라며[147]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