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균 김옥균(古筠 金玉均)의 묘와 사당 - 附 청풍정 사적.유적 / 고적사적지
2010. 12. 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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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균 김옥균(古筠 金玉均)의 묘와 사당 -附 청풍정
시도기념물 제13-1호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
묘역에는 호석을 두르지 않는 봉분과 봉분 앞 상석, 향로석, 준석, 묘비가 있다. 묘비에는 ‘고균거사 안동김공 옥균지 묘, 배 정경부인 기계유씨 부좌’라 씌여 있다. 또 좌우에는 동자석, 석양, 문인석, 망주석이 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묘소 뒤에는 낮은 철담이 설치되어 있다. 원래 묘는 일본 청산(靑山) 외인 묘지에 있던 것을 1924년 9월 11일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김옥균선생의 사당은 묘소 우측에 있다.
찾아가는 길은 아산시에서 아산만 방향 39번 국도로 영인면 아신리 426번지 영인초등학교로 가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호인 여민루가 있다. 이곳에서 11시 방향으로 100m쯤 가면 김옥균선생유허(좌측 300m), 아산향교(직진 500m) 안내판이 있고 골목길을 따라 가면 우측 길가에 사당과 묘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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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의 묘소와 사당
김옥균의 사당
고균 김옥균의 고택
김옥균과 명월의 전설이 전해지는 청풍정
1790년경 참봉 김종경이 지은 정자로 1900년경 불에 타 옛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95년 옥천군에서 복원했다.금강가의 절벽위에 3칸자리 작은 정자지만 누각에 작은 방1칸이 딸려있어 한겨울의 강바람에도 금강의 절경을 감상할수 있도록 만들었다.
작고 아담한 굴뚝뒤로는 바위가 펼쳐져 있어 그곳에서 바라보는 금강의 절경도 그만이다. 대청호가 만들어지기전에는 청풍정이 금강이 굽이치던 높은 바위 위에 세운 것인데 지금은 대청호로 인하여 물가에 접해 있다.
명월이가 유서를 써놓고 투신한 바위에는 김옥균의 친필이라고 전해지는 명월암의 글씨가 새겨져 있고, 척박한 바위틈새에서 자란 나무에 단풍이 물들어 가고 있다.
생명의 호수 대청호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경치를 가진 청풍정이다. 상류에서 흘러들어온 금강이 이곳 청풍정 앞에서 잠시 모여 큰 호수를 이루며 막지리 장고개 와 도호리 앞으로 흘러들어간다.
갑신정변(1884년)이 3일 천하로 막을 내리면서 쫓기는 몸이 된 김옥균이 명월과 함께 이곳으로 숨어들었다고 전한다. 경치도 아름답고, 물과 산과 바위가 조화를 이루어 가히 명승지라 할 수 있으며 더구나 교통이 예나 지금이나 불편하여서 낙향 피신처로의 가장 알맞은 곳이기는 하다
명월이는 김옥균을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과 김옥균이 자기로 말미암아 이곳에서 떠나지 못하고 나약해지기만 하는 것을 보고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어느날 명월은 기나긴 편지를 정성을 다하여 썼다. 김옥균에 대한 연모의 정과 자기로 인하여 위대한 일에 조금이라도 지장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사연, 그리고 이곳에서 나약하게 지내지 말고 용기를 내어 큰 뜻을 기어코 펴서 대성을 거두라는 내용이었으리라.
이 편지를 청풍정에 놓고 거기에서 20여m 절벽아래 푸른 금강수에 몸을 날려 빠져 죽고 말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김옥균은 그 애절한 편지를 읽고 불쌍하고 감격스러움에 잠겼었다 한다. 그래서 여기에 명월암이라 친필로 쓴 필적을 새기게 하여 지금까지 전해온다.
지금은 사람은 가고 없지만 오직 바위만 쓸쓸히 남아서 그 옛날을 전설로 전해 줄뿐이다.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은 사실일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실패후 곧 일본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기녀와의 사랑이야기가 애틋하긴 하지만, 옥천으로 피신 온 김옥균의 부인 유씨와 딸 얘기는 전설이 아닌 사실로 전해 오고 있다.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위태로움을 느낀 유씨부인은 일곱 살 난 딸을 데리고 친정 집안과 인연이 있던 이 고장으로 피신하게 됐다.
그런데 동네 사람의 밀고로 옥천 관아에 잡혀들어가 노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행히 그녀의 주인이 된 고을 아전 정씨는 유씨부인 친정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
그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4 년 동안 잘 살게 됐다.
그러나 정씨가 공금횡령죄로 가산을 몰수당하는 바람에 주인이 바뀌어 이번에는 영락없는 노비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연히 일이 손에 익지 않은 유씨부인은 거리로 쫓겨나는 신세가 돼 모진 고생을 하게 됐다. 유씨부인은 이 사실을 수기로 밝혀놓았다
[출처] 고균 김옥균(古筠 金玉均)의 묘와 사당 - 附 청풍정|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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