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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대상인(商人) 열전 Ⅱ-범려, 백규

문수봉(李楨汕) 2017. 12. 10. 22:17


중국 역대상인(商人) 열전 -범려, 백규



『중국 역대 상인열전』을 더 보시려면 아래 포스트를  클릭하세요


『중국 역대 상인열전』Ⅰ[왕해,강태공,관중,현고,등석,공자,자공,계연] http://blog.naver.com/ohyh45/220977959098

『중국 역대 상인열전』Ⅱ[범려,백류  ] http://blog.naver.com/ohyh45/221149469870
 


12.  범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1] 정치·군사·경영 두루 통달한 중국의 商神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이 많지만 중국인들은 서슴지 않고 김용(金庸)의 무협소설을 꼽는다. 억 단위가 팔렸다는 통계도 있는 것을 보면 허무맹랑한 과장은 아닌 듯하다.

김용은 역사에 대단히 조예가 깊어 몇 해 전에는 저장(浙江)대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기까지 했다. 그의 소설이 대륙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가졌는데 역사상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범려를 지목해 많은 뒷이야기를 낳았다

(김용 자신도 범려처럼 여러 직업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인물이란 평을 받고 있는데, 범려를 존경함과 동시에 자신과 범려가 닮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존경하는 인물로 범려를 지목해 세간의 관심과 범려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킨 무협 소설가 김용

와신상담 월나라 부흥

▷춘추시대 정치가이자, 거상

범려는 춘추시대 말기인 기원전 5세기 초에 활동한 정치가이자 군사 전문가였으며, 또 상인이었다. 범려가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초나라 완(宛) 지역의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으로 여기저기를 떠돌다 평생 친구 문종(文種)의 추천으로 월나라 구천(句踐)이 기용했다. 이후 정치와 군사 방면을 맡아 이른바 ‘오월동주(吳越同舟)’로 대변되는 오월쟁패(吳越爭霸) 과정에서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오와 월이 사활을 건 투쟁을 벌이던 춘추시대 말기. 범려가 속한 월나라는 오나라에 패했고 범려는 구천을 모시고 3년 동안 오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천고의 고사성어가 탄생한 배경이다. 3년 동안 범려는 오나라의 상황을 면밀히 살피는 한편 구천에게 굴욕을 참고 기회를 기다리라고 충고해 마침내 3년 만에 귀국을 이끌어냈다. 귀국한 다음 범려는 스승 계연의 일곱 가지 계책, 즉 ‘계연칠책(計然七策)’ 중 다섯 가지를 활용해 월나라를 부흥시키고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켜 복수에 성공했다.

공을 이룬 뒤 범려는 미련 없이 은퇴했다. 천하의 절반을 주겠다는 월왕 구천의 제안도 물리친 채 은퇴를 결행했다. 떠나면서 범려는 평생 친구 문종에게 편지를 보내 ‘토사구팽(兎死狗烹)’을 언급하며 함께 은퇴할 것을 권했다. 문종은 망설이다 결국 구천이 보낸 검으로 자살했다.

범려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거쳐 제나라에 정착한 다음 상업에 종사했다. 당시 범려는 떠나면서 신분과 성명을 감춘 채 자신의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로 바꿨는데, 필생의 라이벌 오자서(伍子胥)를 추모하기 위한 이름으로 보인다. 오자서가 자살하면서 오왕 부차(夫差)를 저주하자, 오자서를 가죽 주머니에 싸서 첸탕강에 내다 버렸는데 여기서 ‘치이자피’가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제나라에서 범려는 상업에 종사해 천금을 모았다. 제나라 왕이 범려의 명성을 듣고 그를 초빙해 정치를 맡기려 하자 다시 도(陶)라는 지역으로 떠났다. 이 부분은 ‘사기’의 ‘화식열전’에 잘 나타나 있다.

“도라는 지역에서는 ‘주공(朱公)’이라 했다. 주공은 도 지역이 천하의 중심으로 사방 제후국들과 통해 있어 물자의 교역이 이뤄지는 곳이라 판단했다. 이에 생업에 종사해 물건을 사서 비축해뒀다가 때맞춰 팔았지, 사람의 노력으로 경영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생업을 잘 운영하는 사람이 됐는데 인력이 아닌 적당한 시기를 봐 운영했을 뿐이다. 그는 19년간 세 차례에 걸쳐 천금의 재산을 모아 두 번은 가난한 친구들과 고향 친지들에게 나눠줬다. 이것이 이른바 군자는 부유하면 덕을 즐겨 행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늙자 자손들에게 일을 물려줬는데 자손들도 생업을 잘 관리하며 이자를 불려 재산이 수만금에 이르렀다. 그래서 부자 하면 모두들 도주공(陶朱公)을 말하는 것이다.”

범려는 19년 동안 세 번이나 억만금을 모았으나 자신이 모은 재산을 모두 이웃과 친인척에게 나눠줬다. ‘삼취삼산’이란 고사성어가 등장한 배경이다. ‘(재산을) 세 번 모아 세 번 나눴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훗날 범려는 ‘상업의 성인(상성·商聖)’ 또는 ‘상업의 신(상신·商神)’으로 추앙받는다(중국인들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를 재신(財神)으로 추앙하는데, 재신은 재물을 지켜주는 신이고 상신은 치부의 신이자 성인이다). 삼취삼산 또한 부자가 사회적 책임감을 갖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선행을 비유하는 고사성어가 됐다

▶범려의 성공 비결은 

​▷물러날 때를 잘 알아야 

범려는 정치, 군사, 상업 모두에서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특히 만년에는 현명한 은퇴를 결단해 파란만장한 삶을 평온하게 마무리했다. 범려는 말하자면 인생 3모작을 모두 성공시킨 참으로 보기 드문 인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 됐다. 범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범려의 학식이다. 학식은 배움과 식견을 말한다. 범려는 젊은 날 많은 경험을 했고, 이것을 배움과 결합해 남다른 식견을 갖췄다. 특히 ‘오월쟁패’에서 가장 시급했던 병법에 관해 남다른 자질을 보여줬으며 이를 훗날 자신의 상업 활동에 다시 활용해 크게 성공했다. 범려에게 있어 치국(治國)과 치군(治軍), 경영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 점에서 범려의 경영철학은 남들과 달랐다.

또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물, 특히 인재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 자신의 것으로 체득했다. 오자서로부터 기개와 충절을 배웠고, 손무에게서는 병법을 배웠다. 부차와 구천 등 권력자들에게서 권력과 권력자의 속성을 정확하게 통찰하는 식견을 갖춤으로써 성공 가도를 달렸다.

정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도 성공 비결 중 하나다. 그는 젊은 날 여러 곳을 떠돈 경험을 축적했고, 이를 통해 각지에서 다양한 고급 정보를 얻었다. 오나라 왕과 오자서를 비롯한 대신들의 사이를 갈라놓은 이간책 등은 모두 범려로부터 나왔고, 오나라는 이 이간책에 말려들어 오자서를 죽이는 엄청난 실책을 저질렀다. 이 같은 고급 정보는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안목을 갖추는 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좋은 스승 계연을 만나 그의 경영철학을 전수받은 것도 범려의 성공 요인이다.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면 미리 군비를 정돈해야 한다. 언제, 어떤 물건이 필요한 것을 미리 파악해야 한다. 물건 값이 오르면 썩은 흙 버리듯 처리하고 싼 물건은 주옥을 줍듯 사야 한다. 재물과 화폐는 흐르는 물과 같이 움직이는 속성이 있으니 그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범려의 스승 계연의 경영이론을 살펴보면 기업가의 재치가 돋보인다. 범려는 스승의 가르침을 정치와 경영, 모두 잘 활용한 인물이다.

무엇보다 범려는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날 때를 잘 알고 있었다. 월나라와의 전쟁 때도 그랬고 이후에는 현명한 처신과 결단으로 인생을 잘 마무리했다. 범려의 축복받은 인생은 남다른 통찰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2] 너그럽고 후덕한 생활로 巨富 반열 올라
 

자신이 모신 주군을 춘추오패 주인공으로 만들고 홀연 자리를 떠난 범려. 정치, 군사, 경영 모두에서 성공했던 범려는 부를 이웃과 나눴다. 각종 고서에는 범려가 갖춘 남다른 식견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생각하는 방식이 남들과 달랐다. 



범려를 모시고 있는 허난성 남양(南陽)의 재신부(財神府)의 입구(정면 석상이 상성 범려상이다).


▶사물을 보는 안목 남달라

▷다른 관점에서 보면 길이 보인다

위(魏)나라에 판단하기 어려운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신하 절반은 그 사람이 유죄라고 판정했고, 나머지 절반은 무죄라고 판정했다. 위나라 왕도 결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위왕은 “평민 신분으로 거부가 된 도주공(陶朱公, 범려 별칭)에게는 틀림없이 기가 막힌 지혜가 있을 것”이라며 사람을 시켜 범려를 불러 사안의 경위를 설명한 다음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자문을 구했다. 범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저는 일개 평민 백성에 지나지 않아 이런 형사 사건을 판결할 줄은 모릅니다. 다만 제 집에 흰 옥이 두 개 있사온데, 색도 같고 크기도 같고 광택도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천금이 나가고, 하나는 오백금이 나갑니다.”

위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색도 크기도 광택도 똑같은데 어째서 값이 그렇게 다르오?”라고 물었다. 범려는 “그것을 옆에서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가 좀 더 두껍습니다. 그래서 값이 배나 더 나가지요”라고 했다. 이에 위왕은 “옳거니! 죄를 판정하기가 어려우면 사면하고 되고, 상을 줄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우면 그냥 상을 주면 되지!”라며 기뻐했다.

위나라 백성들은 왕의 조치에 크게 만족했다.

위왕이 결단을 내리기 힘든 문제에 직면해 범려에게 가르침을 청했을 때, 범려는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직접 말하지 않고, 사업에서 흔히 부딪히게 되는 백옥의 값을 예로 들어 비유함으로써 풀기 어려운 문제를 풀 때 지켜야 할 두 가지 방법을 알려줬다. 하나는 옆에서 살펴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두꺼운 것이 귀하다는 것이었다. 위왕은 이 말을 알아듣고는 바로 판정을 내렸다.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일에 직면하거나 두 가지 방안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가늠이 안 설 때 우리는 ‘사유의 인식’이란 면에서 곤혹스러움에 직면한다. 이익과 손해 또는 우세와 열세를 놓고 분명한 분석을 내리지 못할 때가 많다. 범려가 옆에서 살피라고 한 것은 실제로는 늘 하던 관찰 방식, 즉 기존 시각을 버리고 새로운 각도에서 사안을 다시 봄으로써 기존 시각으로는 이해관계를 밝히거나 우열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충고다.

여기서 범려가 말한 ‘두꺼운 것이 비싸다’ 또는 ‘두꺼운 것이 귀하다’는 표현에 주목해보자. ‘두껍다’는 뜻의 ‘후(厚)’는 특별한 의미를 암시한다. ‘주역’의 ‘곤(坤)’괘에 보면 “군자는 후덕(厚德)으로 재물을 얻는다”고 했고, 또 ‘국어(國語)’에서는 “후덕한 자만이 복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이는 너그럽고 후한 인생 태도로 세상을 살라고 사람들에게 권하는 말이다.

위왕은 범려가 말한 ‘후’의 의미를 알아들은 것이다. 이왕이면 ‘후’하게 처리하라는 의미를 읽어냈다. 시비 관점에서뿐 아니라 처세 측면에서 다시 이 사안을 살폈고, ‘두꺼운 것이 귀하다’는 가치관을 받아들임으로써 일순간에 깨달음을 얻었다. 백성들이 크게 만족하는 효과를 거둔 것은 보너스다.

전국시대 여러 나라는 완전한 법제를 통치 기반으로 하는 나라들이 아니었다. 법률에 의거해 모든 사건을 심사하거나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맡은 사람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사건이 처리되기 일쑤였다. 따라서 사건을 맡은 사람의 주관적 동기가 아무리 순수하고 공정해도 어느 정도 허점과 결점을 피할 수 없었고 의문스러운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경영에서도 비슷한 상황은 얼마든지 발생한다.

‘신서’에는 범려로부터 자극을 받아 ‘후덕’의 의미와 치국 방식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얻은 위왕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이어진다.

“이렇게 보면 담이 얇으면 무너지고, 옷감이 얇으면 찢어지며, 그릇이 얇으면 깨지고, 술이 얕으면 이내 시어진다. 무릇 각박하면서 오래 버티는 자는 없다.”



범려가 마지막 여생을 보낸 정도의 범려 무덤(만년에 범려는 취미로 물고기를 길렀다고 한다. 그래서 일설에는 그가 물고기를 기르는 법에 관한 ‘양어경(養魚經)’이란 책을 썼다고도 한다).


▶성공적 인생을 살았던 범려도

▷둘째 아들 죽음은 막지 못해

사물을 보는 인식이나 통찰력이 남달랐던 범려. 처세술의 달인이었던 그도 하늘 뜻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월나라를 탈출한 뒤 제나라로 들어간 범려는 이름을 바꾸고 장사를 시작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범려 이름을 들은 제나라 왕은 범려에게 재상 자리를 권유한다. 하지만 범려는 헛되게 이름을 떨치는 것은 불행의 씨앗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모든 재산을 나눠준 뒤 홀연히 제나라를 떠난다. 현재 산둥성 도현에 위치한 도나라로 거처를 옮긴 후 다시 장사를 시작한다. 나이가 들어선 자식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유유자적한 노후를 보냈다.

완벽한 인생인 것처럼 보였던 범려에게도 비극이 찾아온다. 둘째 아들이 초나라에서 살인죄를 저지르고 옥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셋째 아들을 초나라로 보내기로 한다. 그러자 장남은 자신이 이 일을 하겠다고 주장하며 “만약 이 일을 셋째에게 맡기면 자결하겠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범려는 장남에게 황금 천금을 주며 초나라 오랜 친구인 장생을 찾아가라면서 이 같은 당부를 덧붙였다.

“무조건 그가 하라는 대로 해라. 둘째가 풀려나도 아무 이유를 묻지도 말고 그저 황금을 장생에게 주고 와라.”

선비 장생은 초나라 왕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범려 장남으로부터 황금을 받으며 말했다.

“너는 어서 이 나라를 떠나라. 나중에 동생이 살아나오더라도 그 연유를 묻지 말아라.”

범려의 장남을 돌려보낸 장생은 즉시 초나라 왕을 찾는다.

“별의 움직임을 보니 초나라에 해로움이 있겠습니다. 사면령을 내려 덕을 베푸는 것이 그것을 피하는 방법입니다.”

초조한 마음에 초나라를 떠나지 못하고 다른 귀족을 대상으로 로비 작업을 펼쳤던 범려의 장남은 곧 사면령이 있을 것이란 소문을 듣는다. 그는 사면령이 장생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하지 못하고 황금을 되돌려 달라고 한다. 장생은 두말 않고 황금을 돌려준다.

장남을 돌려보낸 장생은 즉시 초나라 왕을 찾아 말한다.

“도주공(범려) 아들이 사람을 죽이고 옥에 갇혀 있는데, 왕의 측근이 주공 뇌물을 받아 왕께서 그를 살리려고 사면령을 내리실 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대노한 왕은 도주공 아들을 먼저 사형에 처한 후 사면령을 내렸다. 결국 장남은 동생 시신만을 들고 돌아왔다. 다른 가족은 통곡했지만 범려는 태연했다.

“첫째를 보낼 때부터 둘째 아이 시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첫째는 어려서부터 고생하며 자랐기에 돈이 귀한 것을 잘 안다. 셋째는 부자일 때 태어나 돈을 쓸 줄만 알지, 아낄 줄 모른다. 돈에 미련이 없는 셋째를 보내려 했지만 어쩔 수 없구나. 이건 하늘의 뜻이다.”



13. 전국시대 거상 ‘백규’ ‘시간=돈’ 깨달은 중국 최초 경제 이론가


춘추시대부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자유 상인은 전국시대 들어 상업자본을 바탕으로 더욱더 성장해간다. ‘천금(千金)’으로 대변되는 춘추시대 부상(富商)은 이제 ‘만금(萬金)’이란 수식어가 붙는 ‘거상’으로 변모했다. 거상들은 축적된 부를 이용해 사회적·정치적 지위까지 획득함으로써 위상을 높였다. 전국시대 거상 출현을 알리고, 이들의 치부 방법을 실천과 이론으로 뒷받침한 인물로 ‘백규’란 상인이 있다.



본격적인 경영이론과 경제 사상을 정립하고 이를 실천해 상업자본의 축적과 거상의 출현을 알린 백규.


▶주(周)나라 출신 상인

▷시세 변화를 정확히 예측

백규는 전국시대 사람으로, 태어나고 죽은 해는 알려져 있지 않다. 상공업으로 크게 부자가 된 사람들의 기록인 ‘사기’와 ‘한서’의 ‘화식열전’을 통해 그의 일생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백규는 주(周)나라 출신으로 대략 위나라 문후 때 재상을 지낸 저명한 법가 인물 ‘이리(李悝, 기원전 455~기원전 395년)’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상인으로 추정된다. 한서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직접 상업 활동에 종사한 것은 물론 경영과 무역, 생산 발전 등 경제에 관한 기본적인 이론을 최초로 수립한 인물이다. 자신의 이론을 책으로 남기지 않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도 백규는 뛰어난 사업가이자 경제 사상가였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역발상해라. 시장 변화를 주시하고 상황에 맞게 빠르게 대처하라.”

백규 경제 사상의 기본이다.

그가 활동한 전국시대 초기는 노예제에서 봉건제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주요 생산 방식은 농업과 목축업이었다. 시장에서 교환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상업 활동이 활발하진 않았다. 이런 사회 조건에서 백규는 특유의 지혜와 날카로운 안목으로 시세 변화를 관찰하고 매매 교역을 통해 큰 이익을 얻었다. 사마천과 반고는 백규 경제 사상을 법가 사상가인 이리가 주장했던 ‘땅을 최대한 이용한다’는 농업 사상과 함께 거론함으로써 그의 사상을 높이 평가했다.

백규는 다른 상인과 비교해 시장에 대한 통찰력이 남달랐다. 다른 사람은 물건이 남아돈다고 생각해 내다 팔 때 그는 대량으로 사들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부족하다고 여겨 사들일 때 그는 급히 필요로 하는 곳에 내다 팔았다. 쉽게 말해 ‘쌀 때 사고 비쌀 때 내다 파는’ 경제 활동의 기본 원리를 잘 지켜 부를 축적했다. 이는 오늘날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그의 이론은 진, 한 이후 각 왕조의 시장 교역과 물가 정책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백규는 아주 예민한 두뇌를 소유한 인물이었다. 경제 상황이나 교역 장소에 대한 정보, 시장 변화에 대단히 민감히 반응했다. 일단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바로 사들이거나 내다 팔았다. 그는 1분 1초를 다퉈가며 경영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요컨대 백규는 ‘시간이 곧 돈’이란 점을 누구보다 일찍 깨우쳤던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재물이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본 축적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자신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노복들과 고락을 같이했다. 거친 음식이라도 달게 먹었고 하고 싶은 것을 자제할 줄 알았다.

상황에 맞게 유연한 대처를 강조한 것도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그는 4가지 원칙만 잘 지키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곡식 찧는 모습을 묘사한 벽돌 그림

 

“첫째, 다른 사람이 없는 제품을 내놔야 한다. 둘째, 상대가 동일 제품을 내놓는다면 먼저 선보여야 한다. 셋째, 상대방의 신제품보다 더 새로운 제품으로 시선을 사로잡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3가지 조건에서도 경쟁 업체에 쫓긴다면 제품 원가를 낮춰 가격 우위를 점해야 한다.”

백규는 시장경쟁 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경제 활동에 접근했지만 사업에서 작은 이익을 차지하려 하지 않았다. 삐뚤어진 논리와 얄팍한 꾀로 의롭지 못한 재물을 얻으려는 시도 또한 없었다.

또 많은 것으로 모자란 것을 보충하거나 구제할 것을 주장했다. 즉, 각종 상품이 서로 교환되고 유통되면서 서로 발전하도록 돕고, 무역과 물물교환을 경제와 생산성 향상의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풍년이 들어 곡식 값이 떨어지면 그것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대신, 농가에서 필요한 실이나 옻을 내다 팔아 그들의 수요에 부응했다. 흉년이 들어 곡식이 모자라면 곡식을 내다 팔아 식량을 공급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백규 경제 사상은 소박하면서도 깊은 뜻이 있었다.

기상 변화, 즉 날씨를 잘 살펴 화물을 비축할 때와 유통시켜야 할 때를 정확히 파악했는가 하면, 경영인이 가야 할 진정한 길을 알고 있었다. 사마천은 백규의 경영철학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백규는 돈을 늘리기 위해 값싼 곡식을 사들였고, 곡식을 늘리기 위해서는 상품(上品)의 종자를 사들였다. 가장 소박한 음식을 먹었으며, 소비 향락 욕구를 억제하고 의복도 절약하면서 일을 할 때는 노예들과 고락을 같이했다.”

진정한 ‘상도’가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인물인 셈이다.

백규 경제 사상에 함축된 의미는 심오하다. 백규는 자신의 경영법을 아무에게나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는 경영자가 갖춰야 할 자질이자 조건으로 지(智), 용(勇), 인(仁), 강(强) 4가지 덕목을 강조했다. 학문의 경지에까지 이른 그의 사상은 쉽사리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많은 고관들이나 권력자들은 백규의 이런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날 경영자들도 그의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자신의 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경영은 마치 이윤과 여상(강태공)이 계책을 꾀하고, 손자와 오자가 군대를 부리고, 상앙이 변법개혁을 시행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임기응변하는 지혜(지·智)가 없거나 일을 결단할 수 있는 용기(용·勇)가 없거나 주고받는 미덕(인·仁)이 없거나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강단(강· 强)이 없는 사람은 내 방법을 배우고 싶어도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다.”

경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다. 오늘날 이런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백규가 생활했던 시대에는 이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규는 경제가 정치나 군사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봤다. “경영하는 사람은 나라를 관리하고 군대를 다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풍부한 지혜와 결단, 임기응변할 줄 아는 능력과 덕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백규의 생각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백규는 직접 노력하고 실천하면서 자신의 경제 사상을 보다 구체화했다. 사마천은 백규에 대해 “그는 직접 시험을 해봤고,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아무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