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Ⅲ [21회~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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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1화 : 이순신의 노량해전 - ‘노량 출정식’ 고하던 날…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
남해군 ‘이충무공 전몰유허’(아래)에서 바라본 관음포 바다. 이순신의 순국 현장이다. 남해=박영철 기자
1598년 11월 18일 삼경(三更·밤 11시∼새벽 1시), 이순신은 광양만 바다의 대장선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에 빌었다.
“오늘 진실로 죽기로 결심했사오니 하늘은 반드시 왜적을 섬멸시켜 주시기를 원하나이다.”(‘연려실기술’)
이순신은 평소 “나는 적이 물러가는 그날에 죽는다면 아무런 유감도 없다”고 말했다.(유형의 ‘行狀’) 바로 그날이 다가왔음을 이순신은 직감했다.
사실이 그랬다. 그해 두 달(9∼10월)에 걸친 왜교성(순천왜성) 전투 후 일본으로 도망치려는 왜군을 섬멸하는 것이 이순신에게 남은 마지막 복수의 기회였다. 조명(朝明) 연합군은 철군 명령을 받은 조선 주둔 왜군들을 응징하기 위해 사로병진(四路竝進·네 개 방면에서 동시 진군) 전략을 펼쳤으나 동로군(東路軍)과 중로군(中路軍)은 모두 실패했다. 마지막 남은 서로군(西路軍·총사령관 유정)과 수로군(水路軍·총사령관 진린)의 왜교성(고니시 유키나가 군) 합동 공략마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이순신 수군의 연전연승에도 불구하고 육지의 명군은 왜군과 철수를 전제로 한 강화협상을 진행했다. 유정은 고니시의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주고자 했으나, 바다의 이순신만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해상길을 봉쇄해버렸다. 이에 사천왜성, 남해왜성, 고성왜성 등의 왜군들이 합세해 300여 척의 군선을 거느리고 노량해협에 출현했다.(‘선조실록’) 이순신은 왜교성에 고립된 고니시를 구원하려는 왜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하늘에 출정식을 고한 것이다.
그렇게 이순신이 축원을 마치자마자 문득 큰 별이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놀라면서 이상하게 여겼다.(‘이충무공신도비명’)
조선의 운명을 바꾼 혈투
이순신의 결연한 의지에 감복한 진린은 조명(朝明)수군 합동으로 출전했다. 밤 10시경 이순신과 명군 부장 등자룡이 좌우 선봉을 서고, 진린은 그 뒤를 따랐다. 맞은편으로는 노량해협을 가득 메운 왜선들의 불빛이 긴 뱀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왜군 함대에서 먼저 조총이 불을 뿜었다. 선봉의 조선 군사들이 총에 쓰러지면서 전투는 시작됐다.(‘은봉전서’)
“한번 바라 소리가 울리니 포와 북 소리가 겸하여 진동했다. 조선군과 명군이 좌우에서 엄습하니 화살과 돌이 섞여 떨어지고, 불붙은 섶이 마구 날아다녀 허다한 왜선을 태반이나 불태웠다. 적병은 목숨을 걸고 혈전하였으나 형세를 지탱할 수 없어 바로 물러가 관음포로 들어가니 날이 이미 밝았다.”(‘난중잡록’)
조명 연합함대는 처음부터 북서풍을 이용한 신화(薪火)와 화전(火箭)으로 화공(火攻)을 펴면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광양만의 밤바다는 거센 북서풍을 타고 날아다니는 불꽃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이 적선 10여 척을 불태우고, 명 장수 계금이 직접 왜군 7명을 참살하는 등 조명연합군이 왜군을 궁지로 몰았다.
이순신과 진린은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이 오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서로를 구원했다. 진린의 배가 세 겹으로 포위되고 왜군이 배에 올라 칼을 휘두를 때 이순신이 왜군 대장선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왜군의 포위를 풀어 진린을 구출했다.
이 와중에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참전한 등자룡 장군은 배를 빼앗기고 왜군에게 살해됐다. 왜군은 등자룡의 목을 베어 수급까지 챙겨갔다. 한편 이순신의 배가 적을 쫓아 적 함열 깊이 돌진하면서 왜선에게 포위되자 진린의 배가 급히 달려와 대포와 활로 왜선을 물리치기도 했다.(‘이충무공전서’ 부록5 紀實 上)
동이 트기 전, 큰 피해를 입은 왜군 함대는 퇴로를 찾던 중 관음포 내항으로 이동했다. 남해섬을 돌아나가는 외해(外海)로 오인해 들어갔다가 만에 갇힌 상황이 돼버렸다. 독 안에 가둬놓고 섬멸하려는 쪽과 생사를 걸고 빠져나가려는 쪽의 전투는 혈전으로 이어졌다.
“이순신이 친히 북채를 잡고 먼저 추격하며 죽이는데, 적의 포병이 배꼬리에 엎드렸다가 이순신을 향해 일제히 쏘았다. 이순신이 총알에 맞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급히 장좌(將佐)에게 명해 방패로 신체를 지탱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비밀로 하여 발상(發喪)하지 못하게 했다. 이때 그 아들 이회가 배에 있다가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북을 울리며 기를 휘둘렀다.”(‘난중잡록’)
이순신은 휘하 군관 송희립이 이마에 총탄을 맞아 쓰러졌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놀라 일어서다가 자신도 겨드랑이 밑에 총탄을 맞았던 것이다.(‘은봉전서’) 이순신은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죽음 앞에서도 오로지 싸움의 결말을 걱정하는 이순신의 유명을 받은 장자 회와 조카 완 등은 독전기를 휘두르고 북을 울리며 전투를 끝까지 수행했다. 이순신이 죽음으로 바꾼 전투의 결과는 찬란했다.
11월 19일 정오경, 왜군은 참패했다. 명군의 보고에 의하면 왜군 전선 100여 척을 포획하고 200여 척을 불살랐으며, 500여 급을 참수했고, 180여 명을 생포했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아직 떠오르지 않아 그 수를 알 수 없었다.(‘선조실록’)
사천왜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자신이 타고 있던 어립선(御立船)이 파손돼 겨우 다른 왜선에 구출됐다.(‘정한록’) 탈출에 성공한 왜선은 겨우 50여 척에 불과했다. 관음포 앞바다는 왜군의 시체, 부서진 배의 나무판자, 무기나 의복 등이 온통 수면을 뒤덮었고 바닷물은 붉었다.(‘선조실록’)
전투가 마무리되자 “통제공은 어서 나오시오”하며 진린이 소리쳤다.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려던 진린은 그러나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 배 위에서 세 번이나 넘어지고 뒹굴며 큰 소리로 통곡했다.(‘이충무공신도비명’)
이순신의 주검 앞에서 조선군과 명군의 뱃전에서 흘러나오는 통곡 소리는 바다를 진동시켰다. 곧 이순신의 전사 소식은 육지로 퍼져나갔다. 남도의 백성들은 먼 길을 내달려 쫓아와 골목을 메우고 통곡하였고, 시장을 보던 사람들은 술자리를 파하였다. 이순신의 상여가 돌아오자 남도의 선비들은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노인과 어린이들도 길을 막고 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연려실기술’)
이순신의 전공을 깎아내리기에 급급했던 선조도 “해상에서의 승리는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하였으니 이는 조금 위안도 되고 분도 풀린다”고 좋아했다.
기자는 이순신이 순국한 남해군 관음포의 첨망대에 올랐다.
노량해전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인근의 순천시, 광양시, 여수시가 빙 둘러싸고 있는 광양만 해역이다. 왜교성은 서쪽 바닷길로 불과 20여 km 떨어져 있다. 노량해전은 왜교성 전투와 바로 이어지는 싸움이었다. 왜교성 앞바다에서 시작해 노량해협의 전투로 마무리되는 ‘광양만 해전’이 두 달여에 걸쳐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볼 때, 노량의 승리는 정유재란을 조선이 이긴 전쟁으로 결말짓게 해 준 전투였다. 일본이 정유재란에서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한 전투 또한 바로 노량의 전투다. 이순신이 죽음 앞에서도 전쟁 결과에 무섭게 집착한 것도 이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겠다는 책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관왕묘, 韓中을 잇는 420년 인연
이순신의 유해가 83일간 안치됐던 완도군 고금도의 월송대(왼쪽). 월송대 아래쪽의 고금도충무사에 있는 관왕묘비. 고금도=박영철 기자
노량해협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시신은 관음포구 이락사에 잠시 안치됐다가 며칠 후 고금도 월송대로 모셔졌다. 이순신의 시신이 안치된 월송대 터는 아직도 풀이 자라지 않는다는 주민들의 말을 듣고 보니 마치 이순신의 한이 어려 있는 듯했다.
월송대 아래쪽에는 이순신 영정을 모신 고금도충무사(사적 114호)가 있다. 사당 왼쪽의 관왕묘 비가 눈길을 끌었다. 조선수군과 합류하러 고금도로 온 명의 도독 진린과 유격 계금이 이 자리에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했는데, 뒷날 이 자리에 충무사를 지으면서 관왕묘 묘비(廟碑)만 남겨둔 것이다. 사실 지금의 충무사는 정유재란 시절 명 수군이 주둔하던 군영이었고, 이순신의 수군은 그 건너편 덕동마을에 진을 치고 있었다.
관왕묘는 중국인들이 군신(軍神)으로 추앙하는 관우를 받들어 왜군들과 싸우는 명군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조성한 사당이다. 명군 장수들과 병사들은 출전 전 관우의 영험을 받아 승리하기를 기원했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 관왕묘는 가운데 군신 관왕을 모신 정전을 중심으로 동무(東廡)에는 진린과 등자룡을, 서무(西廡)에는 이순신을 배향해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냈다.
관왕묘는 일제강점기 때 항왜(降倭) 유적이라는 이유로 파손됐다가 광복 후인 1959년 충무사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새로 충무사로 재건하면서 정전에 이순신 초상, 동무에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영남 장군을 배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완도군에서는 고금도 관왕묘 복원사업을 진행 중이다. 관왕묘는 조선의 이순신과 명의 진린이 무장(武將)으로서 생사를 초월한 인연을 맺었던 곳임을 추념하는 의미가 있다. 한중 간 문화 교류의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4년 방한 당시 서울대 특강에서 “명나라 등자룡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했고, 명나라 장군 진린의 후손(광둥 진씨)은 오늘까지도 한국에서 살고 있다”면서 정유재란 당시의 한중 역사를 거론해 주목을 끌었다.
정유재란은 이순신의 전쟁
2년간에 걸친 정유재란은 1598년 11월 말까지 조선 주둔 왜군이 전원 일본으로 철수함으로써 끝이 났다. 왜교성의 고니시는 노량해전이 한창인 틈을 타 묘도 서쪽 수로를 통과해 멀리 남해섬 남쪽을 돌아 부산으로 도주했다. 왜군이 떠난 빈 성들을 점령한 명군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떠벌렸다.
그러나 이순신을 뺀 정유재란의 승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순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진린은 선조에게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가 있고, 보천욕일(補天浴日·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킴)의 공로가 있는 사람입니다”하고 격찬했다. 또 그 사실을 명나라 신종 황제에게도 보고해 이순신에게 도독(都督)의 인수(印綬)를 내리게 했다.(‘이충무공신도비명’)
이순신을 적으로 만난 일본조차도 임진·정유 7년전쟁을 ‘이순신의 전쟁’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일본 수군의 장수들은 이순신이 살아 있을 때 기를 펴지 못했다. 그는 실로 조선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을 통틀어 최고의 영웅이었다.”(도쿠토미 소호, ‘近世日本國民史’)
올 4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학술세미나 ‘세계 속의 이순신’에서 이언 바우어스 노르웨이 국방연구소 교수는 영국 군사학자 밸러드의 저서 등을 인용해 “영국인들은 넬슨의 업적을 다른 인물과 비교하는 것을 꺼리지만, 해전에서 패한 적이 없고 적의 흉탄에 맞아 전사한 이순신은 넬슨과 비교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세미나에 참석한 이노우에 야스시 일본 방위대 교수는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자신의 승리가 ‘넬슨한테는 비교될 수 있어도 이순신한테는 비교될 수 없다’고 말했다”라며 이순신을 넬슨보다 한 수 위로 쳤다.
전 세계적으로 격찬 받는 성웅 이순신은 419년 전 노량의 겨울바다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조선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던 듯하다. 젊은 시절부터 이순신을 보필했던 승려 옥형(玉泂)은 80여 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충민사에 머물면서 이순신을 위한 제사를 지내왔는데, “해상에 만일 경보(警報)가 있으면 통제공께서 반드시 먼저 꿈에 나타나 기미를 보인다”고 말했다.(이수광의 ‘승평지·상’)
[남해도·고금도=안영배 전문기자 ]
22. 22화: 한중일에 휘몰아친 전쟁 후폭풍
- 죽은 ‘원숭이’가 욕심 낸 조선 자기, 패전국 日 부활시켜
일본 사가현의 아리타 도자기마을. 조선 사기장 이삼평이 이곳에서 일본 최초로 백자를 구워냈다. 패전 후 도자기 수출로 경제대국으로 부흥한 일본은 이삼평을 도조(陶祖)로 추앙하고 있다. 아리타=박영철 기자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발발 22개월여 만에 종결됐다. 노량해협에서 대패한 왜군은 부산본영으로 집결해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임진년인 1592년 왜군의 침략으로 시작돼 7년간 조선 땅을 유린한 임진·정유 전쟁은 마무리됐다. 하지만 전쟁의 후유증은 컸다. 한·중·일 3국 모두에 거대한 후폭풍이 들이닥쳤다.
조선을 침략한 ‘섬나라 사루’(원숭이·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별명)는 결국 무모한 재롱을 부린 대가로 권력 기반마저 송두리째 잃고 말았다. 1598년 8월 히데요시는 죽기 전 원로그룹인 고다이로(五大老)에게 애원하다시피 유언을 남겼다.
“거듭거듭 히데요리(히데요시의 아들)를 부탁합니다. 당신들 다섯 사람만 믿습니다.”(일본 모리가문 문서 3)
그러나 다섯 명의 야심가 중 가장 선두에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이후의 최고 권력자가 되고자 했다. 결국 히데요시 권력의 중추를 이루던 세력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동군(東軍)과 히데요리의 계승을 지지하는 서군(西軍)으로 분열됐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는 히데요시의 혈족이면서도 동군에 가담했고, 호남지역 침공의 주역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서군에 서서 대립했다. 순천 왜교성 전투에서 고니시와 함께 농성전을 벌였던 마쓰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리노부 등 4명의 다이묘는 전우의 회유를 물리치고 동군 편에 섰다.(일본 ‘大村記’)
양측의 대립은 1600년 동군 승리로 끝났고, 고니시가 참수된 것을 비롯해 서군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히데요시의 처자도 모두 죽어 가문은 멸문하고 말았다. 히데요시를 배신해 동군에 가담한 가토 가문도 이에야스의 눈 밖에 나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로써 1603년 새로운 권력인 에도(江戶·도쿄) 정권이 출현했다.
조선에 구원군을 보냈던 명나라도 전후 정세가 편치 않았다. 명의 황제 만력제(萬曆帝·재위 1572∼1620년)는 은화 780만 냥 이상의 군비와 수백만 섬에 달하는 군량을 조선에 보냈다. 만력제 재위 시절 잇따른 2개의 변란에 더해 조선 전쟁으로 국고는 비었다. 만력제 자신은 황태자 책봉 문제로 대신들과 대립하면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결국 그의 사후 명은 이자성의 농민반란을 겪으면서 멸망의 길로 들어서 북방 만주족인 청나라로 대체됐다.
전쟁 피해 당사국인 조선은 전란으로 150만결의 토지가 50만결로 줄어들 정도로 국토가 황폐해졌다. 전쟁으로 죽은 조선 백성들의 숫자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고, 왜군에게 잡혀간 9만여 명의 포로 중 공식적으로 조선에 송환된 이는 73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심각한 반성을 할 겨를도 없이 전후 복구책에 급급했다.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조세 정책과 5군영의 군제 개혁이 이뤄졌을 뿐, 부강한 국가를 만들려는 정책 전환도, 당쟁에 대한 반성도 없었다. 왜군과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서로 반목했던 당쟁은 전후에도 여전히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정쟁으로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결국 조선은 정유재란이 끝난 뒤 38년 만에 다시 청의 침략을 받아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는 병자호란(1636년)을 맞았다.
조선 지원한 明, 만주족에 정권 뺏겨
히데요시가 탐을 냈던 조선 차 사발인 이도다완. 하단의 매화피가 특징이다. 이동천 제공
중국에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던 명청 교체기는 일본에 엄청난 기회로 작용했다. 중국 도자기를 사려는 유럽의 돈(銀貨)이 일본으로 향했다. 유럽의 도자기 수입상들은 명청 교체기의 혼란과 청의 폐쇄적 정책으로 중국 도자기 구입이 어려워지자 일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일본은 정유재란 후 도자기 강국으로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기껏 토기류의 도기 제작 수준에 머물러 있던 일본은 당대 최첨단 기술인 세라믹(자기) 제조법을 익혀 중국 도자기의 대체 시장으로 부상했다. 조선 사기장(도공)들이 구워낸 도자기 덕분이었다. 일본은 도자기를 팔아 아시아의 경제대국으로 다시 부상했다. 조선 사기장들을 대거 납치해온 히데요시의 ‘공로’가 제일 컸다.
히데요시는 일찌감치 다도(茶道) 및 다도기(茶陶器)가 당대 최고급 문화이자 고가의 보물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전국(戰國)시대 최고권력자이자 다인(茶人)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다완 정치’를 그대로 따라 했다. 고가의 다완을 재테크 수단으로 적극 수집하는 한편, 오사카성과 히젠나고야성에 황금다실(黃金茶室)을 차려 놓고 다회(茶會)를 열어 다이묘들에게 다완을 하사하는 식으로 충성을 확인하는 정치를 펼쳤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은덕을 기리는 편지에서 “다도는 정치의 도”라는 말까지 남겼다.(熊倉功夫, ‘資料による茶の湯の歷史·上’)
히데요시 주변의 다이묘와 무사들 사이에서 조선 차 사발인 이도다완(고려다완)을 헌상하는 것은 권력자의 환심을 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됐다. 이도다완은 일본의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센 리큐(千利休·1522∼1591년)가 천하제일로 꼽은 다완이다. 고급 이도다완은 일본성 한 채 값에 비유될 정도로 고가의 보물이었다. 그러니 히데요시가 침략 전쟁을 벌이면서 조선 땅에서 이도다완을 찾느라 혈안이 됐을 텐데, 그 어디에도 이도다완을 획득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찻잔 아래쪽 문양인 매화피(梅花皮)가 특징인 이도다완은 조선에서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서만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귀한 다완이었다. 조선 어디서나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막사발이 아니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 대안으로 일본에서 직접 만들기 위해 조선 사기장 납치를 지시했다. 왜장인 히라도(平戶)의 영주 마쓰라 시게노부에게 보낸 슈인조(朱印狀·붉은 도장이 찍힌 명령서)와 ‘히라도 도자기 연혁 일람’의 1598년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한국에서 7년의 전쟁을 끝내고 웅천(熊川)의 도사(陶師) 거관(巨關) 등 100여 명의 한국인과 같이 돌아왔다. (중략) 그보다 먼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고야 대본영에 있을 때 시게노부 공에게 명하여 도사를 데려오게 하였다. 시게노부 공은 특히 웅천의 도사 종차관(從次貫)을 나고야 진중에 보냈다. 도요토미는 그곳에 가마를 차려서 다기를 만들게 하였다.”(‘平戶窯沿革一覽’)
당시 전 세계에서 중국과 조선만 보유하고 있던 최첨단 도자기 제작 기술이 히데요시의 이도다완 집착으로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황금 알 낳는 거위’된 조선 사기장
조선 사기장들의 후예인 14대 이삼평(왼쪽)과 14대 심수관. 400년 넘게 조상들의 업을 이어오고 있다. 아리타·가고시마=박영철 기자
기자는 정유재란기에 일본으로 납치된 조선 도공의 자취를 찾기 위해 일본 도자기의 본향 규슈를 최근 두 차례 방문했다. 먼저 규슈 서북부 사가(佐賀)현의 아리타(有田)를 찾았다. 사가 번주(藩主)인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150여 명의 조선 도공을 붙잡아와 도자기를 만들게 한 곳 중 하나다. 한적한 산간 지역인 아리타 마을은 곳곳에 우뚝 솟아 있는 가마의 굴뚝과 가마에 사용하는 내화 벽돌로 만든 돌담길이 인상적이었다.
아리타의 상징인 도잔(陶山)신사는 일본의 도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는 조선 도공 이삼평(?∼1655년)의 혼을 모신 장소다. 1658년 세워진 신사는 360년의 연륜이 배어 고색창연했다. 이삼평이 이곳에 자리 잡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베시마에게 붙잡혀온 이삼평은 도자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바탕흙인 태토(胎土)를 구하지 못해 수년간 찾아 헤매다 마침내 1616년 아리타 동부 이즈미야마(泉山)에서 고령토(백토)가 함유된 양질의 자석광을 발견했다. 그는 조선 도공 18명을 데리고 와 이곳에서 ‘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열어 일본 최초로 백자를 생산해냈다. 이후 아리타 지역은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지가 됐다.
아리타의 도자기는 나가사키항 데지마의 외국인 거주지에 머물던 유럽인들의 눈에 띄어 70년 동안 약 700만 점이 유럽 등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고, 일본 자기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지금도 유럽의 많은 궁전에는 당시 사들인 아리타 도자기가 소장돼 있다.
아리타 사람들은 이삼평을 ‘대은인(大恩人)’이라고 표현한다. 이삼평 덕분에 아리타 사람들이 지금도 도자기를 만들고 있고, 아리타 도자기로 일본이 경제강국으로 성장했으니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주민들은 1916년 도잔신사 뒷산에 ‘도조 이삼평비’라고 새겨진 거대한 돌기둥을 세웠고, 매년 5월 4일 그를 기리는 도조제를 지내고 있다.
이삼평(일본명 가네가에 산페이)의 14대손(56)이 기자에게 건넨 명함에는 이름이 ‘14대 이삼평’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초대 이삼평이 만든 가마는 4대에 이르러 맥이 끊겼고, 5대 이후부터는 남의 가마에서 도자기 지도 교육을 하거나 다른 업에 종사했다. 그러다 그의 부친인 13대가 1971년 ‘이삼평’이라는 이름을 단 가마를 차려 200년 만에 다시 맥을 이었으며, 14대인 그는 부친 밑에서 도자기 제작 수련을 하다가 2005년에 습명(襲名·선대의 이름을 계승)했다고 한다.
14대 이삼평은 “중간에 맥이 끊겨서 일본에서도 ‘이삼평 가마’를 알아보는 사람이 적은 편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이삼평 가마’가 잘돼야 한다고 응원을 많이 해주고 있고 한국에서도 일부러 찾아와 용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는 이어 아리타에서 16km 정도 떨어진 이마리(伊万里) 근교의 오카와치야마 마을을 찾았다. 나베시마 가문이 고급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외부로 새나가지 않도록 험준한 바위산 속에 가마를 만든 마을인데, ‘신비의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도공무연탑(陶工無緣塔)’과 ‘고려인의 비’로 더 유명하다. 도공무연탑은 주민들이 마을 곳곳에 버려진 사기장들의 무덤에서 880개의 비석을 모아 쌓은 탑이다.
그밖에도 규슈에는 여러 지역에서 활동한 조선 사기장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규슈 남쪽 가고시마 현 미야마(美山)에는 전북 남원에서 끌려온 심당길과 박평의 등 조선 사기장의 후예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 사쓰마번주였던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붙잡혀온 이 지역의 사기장들은 사쓰마야키(薩摩燒)라는 도자기 유파를 열었다. 특히 심당길은 조선식 오름가마를 고집했고, 박평의와 함께 ‘불만 일본 것이고 나머지는 조선의 솜씨’라는 뜻의 ‘히바카리(火計り) 다완’을 만들어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메이지시대까지도 한복을 입었고, 한국말을 하였으며, 조선의 서당식 교육을 했다. 뿌리를 잃지 않기 위해 음력 8월 15일이면 옥산궁(玉山宮)이라는 단군 사당에 모여 고국을 향해 제를 지냈다.
이곳의 도예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심당길의 12대 후손인 심수관(沈壽官)이 1873년 조선식 가마에서 구워낸 도자기(大花甁)를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출품하면서부터다. 그 후손들은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습명해 현재 15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업에서 은퇴한 14대 심수관(91)은 기자와 만나 “나의 삶은 대를 이어 오면서 벌인 역사와의 고된 싸움”이라고 회고했다.
그들은 왜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나?
이마리에 살고 있는 일본인 도공들이 ‘고려인의 비’에서 공양을 하는 모습. 조선 사기장들의 공덕을 기리는 제사다. 이마리 나베시마도자기협동조합 제공
정유재란 당시 일본은 조선 사기장만 납치해 간 건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당시 파견 부대에 전투 병력 외에 따로 특수 임무를 띤 6개 부를 두어 운영했다. 도서·공예·포로·금속·보물·축부의 6개 약탈 전담부가 그것이다. 도서부는 조선의 전적(典籍)을, 공예부는 각종 공예품과 공장(工匠)을, 포로부는 조선의 젊은 남녀를, 금속부는 병기 및 금속예술품을, 보물부는 금은보화와 진기품을, 축부는 가축 포획을 전담했다.(국사편찬위원회, ‘韓國史·12’) 이로 인해 수많은 한국의 보물급 문화재, 서적과 금속활자 등이 넘어가 일본의 문화를 살찌웠다.
결국 임진·정유 7년 왜란은 조선과 명은 전쟁에서 이겼으나 피해만 컸고, 침략자 일본은 전쟁에서는 졌으나 챙긴 게 적지 않았다. 특히 일본은 도자기 제조 기술을 획득해 다시 나라를 부강케 함으로써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 측이 이 전쟁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하는 데는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유익한 전쟁이었음을 주장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으로 시작돼 이순신이라는 영웅의 희생으로 마무리된 정유재란은 동북아 최대의 국제전으로, 한중일 3국 모두의 역사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7주갑(1甲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던 조선 백성들의 처참한 삶과 전쟁의 구체적인 갈피들은 잡초에 덮여 있는 남부 지방의 왜성들처럼 사실상 역사에서 잊혀져 왔다. 이제는 망각에서 깨어나야 할 때다.
규슈=안영배 전문기자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연재를 마치며, 3인 좌담
- 420년이 흘렀건만, 위기 둔감-당쟁 어찌 그리 똑같은지”
좌담 중인 이대순 한일협력위원회 부회장, 김병연 임진·정유 역사재단 추진위원회 위원장, 최영훈 논설위원(왼쪽부터). 양회성 기자
동아일보가 7월부터 22회에 걸쳐 연재한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시리즈는 이 전쟁이 과거 속에 묻힌 역사가 아닌, 현재의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살아 있는 역사임을 보여줬다. 정유재란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미래를 대비하는 해법을 모색해보기 위해 5일 좌담회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는 김병연 임진·정유 역사재단 추진위원회 위원장(전 노르웨이 대사), 이대순 한일협력위원회 부회장(전 경원대·호남대 총장), 최영훈 논설위원이 참석했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정세가 심상치 않다. 정유재란의 경험을 통해 짚어 보아야 할 점은?
이대순: 현재의 한반도 정세와 16세기 당시의 조선 정세는 시대 배경이 다르고 시간적 차이도 크게 나지만, 한국인의 의식 구조는 4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임진·정유 7년 전쟁이 벌어지기 전 조선에는 위기의식이 별로 없었고, 국정을 이끄는 최고 통치자와 관료 집단의 리더십 또한 아주 취약했다. 관료들은 국가 전체의 이익이나 국민의 삶에 대한 관심보다는 소속 당파의 이익과 파쟁에만 몰두했다. 현재 상황도 비슷하다. 북한의 위협을 둘러싼 미·일·중·러의 각축전은 한반도가 내일을 예측하기 힘든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세계질서가 크게 재편되는 국제사회의 흐름에도 우리는 둔감하지 않은가 걱정된다. 국내 정치는 여야 할 것 없이 자기 세를 확장하는 데만 급급하고, 정부는 국민을 단합시켜 난국을 헤쳐 나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정유재란 당시 국난을 극복한 동력은 정부보다는 일반 백성들의 호국 혹은 국토 수호 정신과 열정적인 헌신에 있었다는 점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지금도 국민이 먼저 깨어서 위정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라를 이끌고 나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영훈: 국가를 이끄는 위정자들의 현실 인식과 판단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 율곡 이이는 “200년간 저축해온 나라에서 2년 먹을 양식조차 없으니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며 선조 임금에게 송곳 같은 질타를 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또 자주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했다. 그러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귀담아듣지 않았고 오히려 당파 논리에 집착했다. 임란 직전 일본 정세를 살피고 온 동인 계열 김성일은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서인인 황윤길은 쳐들어올 것이라는 정반대의 보고를 해 정세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현재도 북한 핵문제 등 사안을 놓고 우리 내부는 정반대되는 의견으로 나눠지는 등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420년 전의 국난이 또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김병연: 율곡 뿐만 아니라 서애 유성룡도 정유재란이 끝난 후 그간의 전쟁 경험을 기록한 ‘징비록’을 남겼다. 그런데 서애가 지난날의 잘못과 비리를 경계하는 뜻에서 남긴 ‘징비록’이 전후 조선인보다는 일본인들에게 더 많이 읽혔다는 것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재도 한일 간 외교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우리가 일본 외교에 밀리곤 하는 것도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징비’의 정신이 부족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또 하나 ‘징비록’에서 짚어볼 것은 서애는 구원군으로서의 명군 횡포와 명나라의 심각한 내정 간섭을 깊이 우려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은 외교적 협상권도, 군 지휘권도 명에 빼앗긴 상태였다. 심지어는 조선을 명의 속국으로 만들거나, 임금을 갈아 치우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게 해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나라’라고 명을 떠받든 결과 청나라의 침입을 받기까지 했다.
사실 명나라는 일본이 자국 영토를 침범해오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적 차원에서 조선을 지원했다. 그러니까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본토를 지키기 위한 대리전쟁을 조선에서 치른 것이다. 일본은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의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명을 치기 위한 대리전쟁의 터로 조선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이는 한반도가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대리전쟁의 터가 되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의 한국 외교에서도 이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정유재란이 ‘잊혀진 전쟁’이 된 이유는?
이: 임진·정유 7년 전쟁이 조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은 데도 ‘치욕의 역사’라서 그랬는지 학계의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일반인이 임진왜란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정유재란이라는 말은 잘 알지 못하고, 더욱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구별하는 이는 매우 드물다. 전쟁을 직접 겪은 조선에서는 ‘왜구의 하찮은 난’으로 치부해 전쟁의 의미를 축소시켰고, 현대에 들어와서도 전문가들의 진지한 연구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본다.
반면 일본은 어떠한가. 나는 오늘(5일) 일본에서 한일협력위원회 일로 나카소네 등 일본 정치인들을 만나고 공항에서 좌담장소로 바로 왔다. 일본 정치인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성격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은 ‘분로쿠(文祿)의 역(役)’이라고 해서 명나라를 치기 위한 대외 전쟁으로, 정유재란은 ‘게이초(慶長)의 역’이라고 해서 조선 정벌 전쟁으로 구별하고 있었다. 대개의 일반 일본인들도 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이름 붙이고서는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일본이 승리를 거둔 전쟁으로 여기고 있었다.
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 전쟁을 벌이면서 자기에게 극렬히 저항했던 규슈 지역의 다이묘 및 사무라이들과 병사들을 대거 파병했다. 히데요시는 이들을 조선에서 소모시킴으로써 자신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를 저항의 힘을 무너뜨리려는 의도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에 참여한 규슈 지역 다이묘들은 철수하면서 무수한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갔는데 이들이 남긴 도자기가 오늘의 일본을 일으키는 ‘자본’이 됐다. 그런 점에서 규슈 지역 사람들은 조선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동아일보의 ‘정유재란’ 연재물에서 되짚어봐야 할 점을 꼽는다면….
김: 동아일보가 정유재란 420주년을 맞아 정유재란의 역사를 과감하게 양지로 드러내준 점에 대해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린다. 연재물에서 지적했다시피 현재 정유재란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전적지가 무관심과 무분별한 훼손 속에 방치돼 있다. 국민의 의식 속에 정유재란의 의미가 희석돼 있기 때문에 아무런 제어 장치가 없이 전적지에 전혀 엉뚱한 기념물이 들어서 있는가 하면,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을 영구적으로 파괴하는 행태가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대표적인 게 순천 해룡면의 왜교성(순천왜성)이다. 왜교성은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호남을 지배하기 위해 세운 호남 유일의 왜성이자 독특한 건축구조물로 문화재적 가치 또한 큰 곳이다. 이곳은 다른 왜성처럼 왜군들의 성이라는 이유로 방치되고 훼손됐다. 또 왜교성 앞뒤로는 조명 연합군의 육군 지휘소인 검단산성과 수군 지휘소인 장도가 가시권내에 있다. 이곳 육지와 바다에서 조명 연합 육군과 수군이 왜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그런데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 사령부가 있던 장도는 산업단지 조성을 위한 간척사업으로 어이없이 메워져버렸다. 정유재란 전적지 중 가장 크게 훼손된 곳이 장도로, 이제는 육지 속에 갇힌 섬이 됐다. 이곳의 중요성을 조금만 알고 있었더라도 무모한 사업은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충무공 이순신의 전적지인 장도라도 바다의 섬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20화 기사 참조).
최: 임진·정유 7년 전쟁을 총괄해서 볼 때 전 국민적인 의병 운동을 재조명해 보는 기회가 됐다는 점도 곱씹어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 출신 의병들이 경상도의 진주성을 구하기 위해 대거 출전했고, 저 멀리 행주산성까지도 달려가 왜군과 싸운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정유재란 당시엔 이순신의 수군에 가담한 경상도 출신 백성들도 적지 않았다. 적어도 조선의 백성들은 국난을 당해서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온 국민이 합심해 극복했다. 이 점이 우리의 저력이고 나라를 지키는 힘이라고 본다.
김: 역사학계의 무관심과 현장을 방문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역사적 실체가 이번 시리즈를 통해 밝혀진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의 서해안 해상루트를 직접 탐사한 보도물이다(18화 기사 참조). 취재 기자가 배를 타고 당시의 판옥선 속력 등을 계산하면서 이순신 관련 섬들을 찾아다니고, 팔금도가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머물렀던 발음도였다는 점을 고증해낸 것은 중요한 성과라고 본다. 팔금도에는 이순신 관련 일화들이 꽤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팔금도 사람들은 이순신이 아들 면의 피살소식을 듣고 코피를 한 됫박이나 흘려 사경을 헤맬 때 마을 주민들이 염소를 잡아 먹여 이순신을 살려냈다는 얘기를 대대로 전해 듣고 살아왔다. 지금 팔금도 사람들은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최근 동아일보 정유재란 연재물로 상당수 고교에서 고교생들이 토론회를 열고 자기들끼리 역사 논쟁을 하는 수업도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전국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정유재란 독후감 대회가 열리고 있다. 미래를 짊어진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 데 동아일보가 역할을 한 점을 평가한다.
―정유재란을 통해 모색해보는 한중일의 미래와 과제는….
김: 16세기 동아시아의 최대 규모 대전인 정유재란은 과거의 일과성 전쟁이 아니며, 망각된 전쟁이 돼서도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유재란 전체를 상징하는 공간에서 한중일 3국 국민 모두에게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역사 교육과 함께 3국민 모두의 평화적 공존과 발전을 모색하는 장(場)마당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런 전제 하에 임진·정유 역사재단 추진위원회는 우선적으로 정유재란 최대 격전지였던 장도 등 광양만에 죽은 3국 국민들을 애도하는 추모공원, 혹은 평화적 공존을 기원하는 평화공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최: 정부 차원과는 별도로 민간 차원에서 3국의 국민이 함께 모이는 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의 후세들에게는 한중일 3국의 평화 중재자 역할을 하는 책임감과 자존감을 부여하고, 일본과 중국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평화적 공존만이 모두가 함께 잘사는 길임을 인식시키는 교육도 필요하다. 즉 동북아 평화를 기원하는 공원이자 역사 교육의 메카가 될 공간을 마련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본다.
이: 정유재란에서 국난 극복의 동력을 찾아내야 한다. 나는 이를 이념에 앞서 자신과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야 할 땅으로서의 국토 수호 의지로 해석하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독일의 히틀러에게 끝까지 저항해 자국을 지켜냈지만, 프랑스는 너무나 쉽게 독일군에게 점령됐다. 프랑스는 이념 갈등으로 국론이 분열돼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인한 전쟁 혐오증으로 막연한 평화무드에 젖어 있었다. 독일은 이 틈을 노려 기습적으로 프랑스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피를 흘려서라도 지키겠다는 국토수호 의지가 무력해진 상태였다고 할까.
김: 2018년 무술년은 정유재란이 끝난 해이자 조명연합수군의 통제사 이순신과 명 장군 등자룡이 사망한 해다. 수많은 조선군 장수와 군졸, 명군 및 왜군들이 광양만의 관음포 바다에서 죽었다. 420년이 되도록 한중일 그 누구도 이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내주지 않았다. 3국의 희생자 후손들을 모아 위령제를 지내주는 한편으로 3국 평화의 기원제가 되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 등자룡은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조상이면서 노구를 이끌고 전장에 나선 장군으로 중국에서도 추앙받고 있다. 몇 해 전 시진핑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진린과 등자룡을 언급하기도 했다. 사드 배치 문제 등으로 불편해진 한중 관계가 민간차원의 이런 행사를 통해 풀리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Ⅲ [21회~30회]|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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