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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Ⅳ-민영환,유길준,어윤중,명성황후,이완용,이승만

문수봉(李楨汕) 2017. 12. 9. 13:56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Ⅳ-민영환,유길준,어윤중,명성황후,이완용,이승만 분류사.통사 / 우리역사

2017. 11. 5.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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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Ⅳ-민영환,유길준,어윤중,명성황후,이완용,이승만 




21. 민영환(閔泳煥) - 을사늑약 체결되자 자결로 항거한 순국열사



  1873년(고종 10),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조선은 개방정책을 폈다. 그중 하나가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 창설이었다. 재정난으로 기존의 군인들에 대한 군료(軍料)가 제대로 지불되지 못하자 1882년, 일본인 교관과 일본인 13명이 살해되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했다. 고종은 청국에 군란 제압을 요청했다. 청이 4500명의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군함을 이끌고 와서 군란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청이 군란을 수습한 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자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신진 혁신 세력이 반대에 나섰다. 메이지 신(新)일본의 성공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청의 조선 속방화 정책에 저항하면서 친청 민씨 척족 세력과 각을 세워 대립하였다. 정한론(征韓論)의 분위기가 팽배해진 일본은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일본 공사를 통해 이들을 부추겼다.
 
  김옥균 등은 1884년 10월 우정국(郵政局) 개설 축하연을 이용하여 거사를 감행했다. 때마침 조선에 주둔한 청군은 베트남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3000여 명이 철수한 상태였다. 이들은 일본군 200명과 조선 군인 50여 명을 동원하여 고종과 민비를 볼모로 잡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것이다.
 
  정변이 일어나자 민비와 외척 정권은 다시 청에 원병을 요청했다. 서울에 남아 있던 1500여 명의 청군이 정변 세력을 공격하자 일본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은 공사관 화재와 거류민 희생에 대한 책임을 조선에 전가하였다. 결국 조선은 일본에 배상금과 일본 공사관 수축비를 부담하는 굴욕적인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고 마무리하였다. 일본은 청국과도 천진(天津)조약을 체결해 조선에 대한 파병(派兵)권을 얻게 되었다.  
   
  청의 간섭 견제하기 위한 親露拒淸策과 한러 밀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치르며 청의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이 도를 넘었다. 청을 견제하기 위해 고종이 러시아에 접근한 이면에는 ‘외교 참모’ 민비가 있었다. 러시아도 독일과 영국이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조선과의 국교 수립을 서둘러 1884년 7월 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군란과 정변의 내우외환 와중에 생부 민겸호(閔謙鎬)가 살해되어 거상하고 있던 민영환은 1884년(고종 21) 9월 이조참의에 임명되어 정치에 복귀했다. 이때 민씨 척족의 실세인 민영익(閔泳翊)이 갑신정변에서 칼에 맞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민영환이 민씨 척족 세력의 중심인물로 주목받게 된다.
 
  1885년(고종 22) 2월, 예조참판 서상우(徐相雨)는 일본에 있던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Davidov)와 접촉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보호와 군사교관의 파견 등을 협의했다. ‘제1차 한러 밀약’ 사건이다. 이 밀약이 청과 일본에 알려지면서 청의 이홍장(李鴻章)은 흥선대원군을 귀국시켜 조선의 친러정책을 견제하려 했다. 대원군은 고종을 폐위하고 큰아들 이재면을 임금으로 만들려는 계획도 꾸몄으나 실패했다.
 
  제1차 러시아 접촉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종과 민비는 민영환을 내세웠다. 1886년 3월 민영환은 김가진(金嘉鎭) 등과 함께 러시아 측에 접근했다.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를 통해 유사시 청국 견제를 위해 러시아가 군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제2차 한러 밀약’ 사건이다. 이 시도도 민영익이 청국 주차관 원세개(袁世凱)에게 밀고함으로써 실패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리자 다시 1887년 출국하여 홍콩과 상해 등지를 전전하게 되고, 원세개는 청 정부에 고종 폐위와 대원군 섭정을 건의했다. 당황한 고종은 러시아 접촉을 부인하고 김가진 등을 문서날조 혐의로 유배시켜 사건을 무마시켰다. 김가진은 유배됐지만 민영환은 왕실의 보호로 이듬해에 예조판서가 된다.  
   
  일본 견제를 위한 引俄拒日策과 을미사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조선은 다시 청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일본도 10년 전 체결한 ‘천진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출병했다. 출병에 앞서 정한을 위해 지난 10년을 준비해 온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일본은 전리품으로 요동반도(遼東半島)도 점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만주에 이해가 큰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연합해 1895년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개입했다. 일본은 수중에 넣었던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하고 말았다. 러시아의 힘을 목격한 민비는 민영환 등을 앞세워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으로 러시아를 일본의 경쟁상대로 등장시킨 것이다.
 
  러시아의 힘을 두려워한 일본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민비를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이 만행이 1895년 8월 자행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일본은 국모를 시해한 후 그 만행을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투쟁에서 빚어진 사고로 위장시켰다. 고종은 할 수 없이 “왕후 민씨는 짐의 명령을 위조해 사변이 일어나게 만들었고 홀로 몸을 피해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왕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곧이어 친러파가 축출되고, 김홍집(金弘集)을 주축으로 하는 친일 내각을 구성해 개혁을 단행했다. 개혁 중에는 단발령(斷髮令)도 포함돼 있었다. 고종은 1895년 11월, 단발령을 명하면서 동시에 왕세자와 함께 상투를 잘랐다.  
   
  아관파천과 친러 세력의 부활

돈덕전에서 기증 받은 벽기를 내려다 보는 고종. 중앙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가 고종이다​.바로 옆에 순종 그리고 왼쪽에 어린 영친왕이 보인다 


  을미사변을 당한 고종은 이제 궁궐도 불안했다. 이범진(李範瑨) 등 친러파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1895년 11월 이 거사는 삼청동 춘생문(春生門)의 담을 넘다가 협력을 약속했던 친위대장 이진호(李軫鎬)가 배신해 실패하고 사건을 주도했던 이범진은 해외로 탈출했다. 이 사건에는 미국인 선교사와 교관, 미국 공사관 서기관 알렌(H.N.Allen), 러시아 공사 베베르(Veber) 등 구미 외교관도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단발령이 실시되자 전국에 걸쳐 의병이 일어났다.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진위대가 의병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자 중앙의 친위대 병력까지 동원했다. 수도 경비에 공백이 생긴 틈새를 이용해 해외로 탈출했던 이범진이 비밀리에 귀국하여 이완용(李完用) 등 친러 인사들과 고종의 파천 계획을 다시 모의했다.
 
  고종이 파천(播遷)에 동의하자 러시아는 1896년 2월 10일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군함 수군 120여 명을 무장시켜 한양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는 극비리에 궁녀의 교자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하였다. 고종은 선조(宣祖), 인조(仁祖)에 이어 세 번째로 궁궐을 나와 파천한 왕이 되었다.
 
  파천을 성공시킨 친러파는 고종을 앞세워 친일내각을 응징했다. 총리대신 김홍집은 성난 민중에게 타살되고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는 참형되었다. 유길준(兪吉濬)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은 도피 중에 백성에게 살해되었고,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파견된 조선의 특사
  

민영환(중앙에 갓을 쓴 인물)은 1896년 학부대신 윤치호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했다
   

  파천 후의 문제는 어떻게 고종이 경복궁으로 돌아오느냐는 것이었다. 이 문제도 러시아에 의지해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민영환은 을미사변 후 친일 내각이 들어서면서 전격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한 후 낙향했다.
 
  고종은 파천 후 민영환을 불러냈다. 민영환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축하사절 특사로 모스크바에 파견하기 위함이었다. 임무는 일본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의 지원을 얻고 당면과제인 국왕의 환궁문제를 협의하는 것이었다. 이제 파천 이후 ‘인아거일(引俄拒日)’ 외교가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1896년 3월, 민영환은 대관식 참석을 위해 학부협판 윤치호(尹致昊) 등을 대동하고 제물포에서 출발하여 상해, 요코하마, 도쿄, 밴쿠버, 뉴욕, 워싱턴, 런던,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에 도착한다. 이때 그는 서구 문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데, 기행문 《해천추범(海天秋帆)》은 이 여행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민영환 일행은 정작 대관식장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관모를 벗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러시아 차르의 대관식 참석은 그런대로 마쳤으나 대러 교섭은 녹록지 않았다. 고종의 밀명은 구체적으로 왕의 신변보호와 군경 양성을 위한 교관 파견, 내정과 산업을 지도할 고문 초빙, 차관 300만원 제공과 한러 간 전신선 건설 등이었다.
 
  그중 핵심은 대일본 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차관 교섭으로, 로바노프(Rovanov) 외무장관은 물론 외교부 아주국장 등과 협상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러시아는 군사고문 파견은 가능하나 차관 제공과 전신선 설치는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러시아가 이 문제에 냉담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민영환이 대러 교섭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조러협상의 ‘장외(場外)’에서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밀거래
 

1896년 6월, 러시아 황제 대관식이 거행될 당시 비밀 협상을 벌였던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와 일본 전직 총리 야마가타 일행 


  러시아는 고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벌채권, 월미도의 저탄소 설치권 등 여러 이권을 차지했다. 일본은 큰 타격을 받았지만 러시아와의 무력대결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해 먼저 아관파천에 대한 열강의 태도를 타진했다. 열강들이 중립, 불간섭 입장을 표방함에 따라 일본은 파천의 현상을 인정하는 선에서 당분간 러시아와의 정면충돌을 피하는 방향으로 상호 접근을 모색해 나갔다.
 
  일본 외상대리 사이온지(西園寺公望)와 주일러시아 공사 히트로보(Hitro Vo) 간에 고종의 환궁과 조선 내 주요 지역에 배치할 양국 군사의 규모 등에 대해 원칙 합의를 보았다. 5월 14일에는 일본이 아관파천의 인정,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 시인과 조선 주둔 일본군 병력 감원 등을 골자로 하는 ‘베베르-고무라 각서(Veber-Komura Memorandum)’가 체결되었다(제1차 러일협정).
 
  1896년 6월 9일, 러시아 황제 대관식이 치러지고 있던 모스크바의 한 밀실에서는 대관식 특사로 참석한 일본의 전직 총리 야마가타(山縣有朋)와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 간에 은밀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 측은 대동강과 원산 사이(북위 39도)를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하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로바노프는 이를 거부했다. 러시아는 며칠 전 6월 3일 청국과 비밀동맹을 교섭하면서 이때 이미 청에 조선의 영토보전을 약속한 바 있었다. 또한 현재의 유리한 상황에서 한반도가 분할되면 자국 함선의 출입과 육군의 활동도 구속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양국은 일본이 제안한 39도선 국토 분할안을 명기하지 않는 대신, 비밀조항에 향후 필요한 경우 러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할 수 있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고 제1차협정을 재확인하는 내용의 제2차 러일협정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Yamagata-Lobanov Agreement)’를 체결했다. 이러한 러일의 비밀교섭을 알지 못한 조선은 러시아의 개입과 관여를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고종은 러시아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각종 이권을 러시아에 제공했음에도 정작 러시아는 일본과 다른 거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양 세력의 反러시아 연대와 러일 ‘로젠-니시 협정’
 
  러시아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통해 조정의 인사와 정책에도 간여했다. 1897년 영국과 미국이 추천한 재정고문 브라운을 해고하고 러시아에서 알렉세예프를 데려왔다. 그를 통해 군사고문 파견, 한러은행 설립, 마산 군사기지화 등 경제・군사적 세력 확장을 획책했다.
 
  또한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조선에 진출한 여타 서구 열강도 조선의 중요한 이권을 차지하려고 했다. 파천 중인 조선 정부는 실제로 많은 이권을 이들 열강에 넘겨주었다. 일본은 경인철도를 넘겨받기 위해 인수조합을 발족시키고 방곡령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목포와 진남포를 개항시켰다.
 
  고종은 이러한 열강들의 이해가 교차하는 가운데 러시아 주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면서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하 한국)을 선포할 수 있었다.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민비를 명성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개칭하는 등 청국, 일본과 동등한 지위로 승격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대한제국은 자력이 아닌 러시아 수중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고종이 환궁해 대한제국이 선포되던 1897년 11월, 독일이 산동반도 남부의 교주만을 기습적으로 점령하자 러시아는 여순과 대련을 강제 점령했다. 러시아가 만주에 영향력을 넓혀 나가자 이곳에 경제적 이해가 큰 미국과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던 영국은 긴장했다. 러시아 견제에 이해를 같이한 일본, 미국, 영국의 해양 삼국은 상호 접근하면서 반(反)러시아 연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만주 지역에서의 열강의 대립은 곧바로 조선을 둘러싼 러일의 이해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1897년 11월, 8척의 군함으로 거문도를 점령하는 무력시위를 벌이고, 미국은 조선에서 빼앗은 경인철도 부설권 등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어 일본을 통한 러시아 견제에 착수했다. 이듬해 1898년 러시아는 일본과의 타협을 모색했다. 러시아가 만주를 확보하는 대신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기로 양국 간에 합의를 만들어 냈다. 1898년 4월, 일본과 러시아는 ‘만한교환(滿韓交換)’을 내용으로 하는 제3차 러일협약 ‘로젠-니시 협정(Rosen-Nish Agreement)’을 맺었다.  
   
  러일의 충돌과 미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이 각각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를 상호 인정하기로 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당사자인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왼쪽)와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 



  1904년 2월, 준비된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기습, 격파했다. 일본은 1차전은 승리했지만 많은 전쟁비용을 미국-영국에 의존하고 있어 장기전은 어려웠다. 러시아도 국내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내심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이에 앞서 미국과 일본은 1905년 7월 비밀리에 ‘가쓰라-태프트 메모랜덤(Memorandum of Taft and Katsura)’에 합의해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승인을 교환해 놓고 있었다. 또한 그해 8월 일본은 영국과 ‘2차 영일동맹’을 맺어 조선과 인도의 지배를 상호 승인하였다.
 
  일본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미국과 영국은 ‘극동의 평화를 위해 일본이 탁월한 세력을 유지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며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루스벨트의 중재하에 9월 러일 양국은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보호 조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포츠머스 조약을 맺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에 앞서 ‘한국보호화’ 계획도 치밀하게 준비해 놓고 있었다. 5만여 명의 일본군을 앞세워 전쟁 발발 보름 만에 한반도에서 군사전략상 필요한 곳을 사용할 수 있게 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맺고,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맺어 일본인에 의한 고문정치를 실시해 나갔다.  
   
  을사늑약과 대한제국의 종말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


  1905년 10월, 일본 정부 수뇌는 추밀원의장(樞密院議長)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파견했다. 11월 9일 ‘한일협약안’을 들고 서울에 온 이토는 다음날 궁궐 내외를 포위하고 고종을 협박했다. 고종이 조약 승인을 거부하자 일본은 조정 대신들을 위협하면서 매수공작에 나섰다.
 
  이토는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고종은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했다. 이토는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궐내로 들어가 대신들에게 가부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은 불가(不可)를,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은 찬성했다. 이 다섯 명이 ‘을사오적’이다.

2차 한일협약이 무효임을 알리기 위해 영국에 전달한 고종의 친서
  
 

  이토는 고종의 칙재(勅裁)를 강요했다. 이어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간에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되었다(제2차 한일협약). 이 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군사권을 일본에 박탈당했다. 외국의 공사관이 전부 폐지되고 주한공사관들도 철수했다.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한 것이다.
 
  고종은 제2차 한일협약이 무효임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1935년 국제연맹은 ‘보호조약’의 효력이 발생할 수 없는 역사상의 조약 3개 중 하나로 을사늑약을 꼽았는데 이것은 1935년 발표된 〈하버드 법대 보고서〉를 인용한 것이다. 1963년에는 유엔 총회가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보고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한 바 있다.  
   
  스스로 무너진 조선의 망국을 돌아보면서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은 5적의 처형과 조약 파기를 요구하고 항쟁할 것을 제기했으나 대세를 뒤집을 수 없게 되자 자결했다. 세 통의 유서를 남긴 민영환의 유서
 

  민영환은 러일전쟁 당시 내부대신·학부대신에 있으며 러일전쟁에 엄정중립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친일각료들과 일본의 압력에 의해 한직인 시종무관장으로 좌천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끝났을 때는 한성부 감옥에 수감 중인 이승만(李承晩)을 석방시켜 고종의 밀서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전달토록 하였으나 이미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상태여서 이승만이 들고 간 밀서는 묵살당하고 말았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은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고 항쟁할 것을 의론하였으나 대세를 뒤집을 수 없게 되자 자결을 선택하였다. 민영환의 자결은 연쇄적인 ‘순국 투쟁’을 불렀다. 전 참판 홍만식(洪萬植), 전 좌의정 조병세(趙秉世), 전 대사헌 송병선(宋秉璿),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喆), 군인 김봉학(金奉學) 등도 순절했다.
 

후손들이 보관해 온 민영환의 혈죽


  민영환은 세 통의 유서를 남겼다. 한 통은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제하의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 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또 다른 한 통은 고종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그가 자결했던 곳에서는 대나무가 솟아났고 이 대나무는 ‘혈죽’(血竹)이라 불렸다.
 
  이제 민영환의 다른 모습을 통해 조선 망국의 원인을 추적해 보자. 동학혁명의 지도자 전봉준(全琫準)은 법정진술에서 민영환을 매관매직, 부정부패의 주역으로 지목하였다. 전봉준의 발언만으로 민영환이 부패한 관리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는 민영준, 민영달, 민영소와 함께 당시 실세 4인방 중 한 명이었다.
 
  영국인 브라운(J.M.Brown)은 고종의 재정문란을 지적한 바 있고 민영환도 고종을 닮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공사 알렌도 이러한 부패상을 기록에 남겼다. 그러나 민영환의 자결 파장은 컸다. 권력의 핵심인물이었던 그의 죽음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범으로 받아들여졌다. 부마(駙馬)였던 박영효가 일본 귀족이 되었고, 이완용 등 을사오적이 일제하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것과 대비되면서 민영환의 혈죽 ‘신화’는 더 부각됐다. 윤치호는 민영환이 생시의 노력으로 이룬 것보다 죽음으로 이룬 것이 더 많았다고 전했다.⊙
       
 

[출처] : 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 서희외교퍼럼 대표: <인물로 본 한국외교사> / 월간조선     




22. 유길준(兪吉濬) - 근대화 개혁의 이론적 토대 마련



  19세기 말 조선에서 쇄국주의를 비판하는 근대적 개방론이 등장했다.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에 의해 선도되고 김옥균, 박영효 등 세상의 변화를 느낀 젊은 양반 자제들에 의해서다. 이들 개혁세력은 청(淸)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 점진적 개혁노선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성공모델을 추구하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의 급진적 개혁노선으로 분화된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근대화 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정립한 이가 유길준(兪吉濬·1856~1914) 이다.
 
  그는 여러 면에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선각자였다. 조선 최초로 일본과 미국에 유학했으며 최초로 국한문(國漢文) 혼용 신문과 서적을 발간했다. 그는 일어와 영어로 말하고 쓸 줄 아는 ‘유학파’ 1세대로, 한문 지식이 해박했음에도 국한문 혼용체로 저술한 최초의 ‘사대부’였다. 또한 유길준은 서학과 동학을 접목시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정립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박규수와의 인연
 
  유길준은 조선의 명문가 출신으로 서울 북촌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외할아버지 이경직에게서 한문을 배우면서 양반 자제들과 어울렸다. 그가 당대의 실세 가문 자제인 민영익과 함께 공부하면서 인연을 맺은 것이 그의 인생행로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는 1873년 17세에 당시 근대화 개혁사상의 선구자로서 젊은이들을 교육 중이던 박규수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조선의 근대화에 눈을 뜨게 된다.
 
  두 사람의 인연에 얽힌 이야기가 《과정록(過庭錄)》에 전해오고 있다. 유길준은 유한준의 자손인데 박규수의 조부 박지원과 유한준은 당대 쌍벽을 이루던 문우(文友)였다. 박지원이 “글이 너무 기교에 치우쳤다”며 유한준을 혹평하자, 유한준은 연암에게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虜號之稿)을 쓴다” 하여 둘은 끝내 원수가 됐다. 박규수가 유길준에게 “너희 집과 우리 집이 지난날 사소한 문제로 불화했으나 이제부터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면 구원(舊怨)을 우리가 풀어드리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하여 그의 인품에 감복한 유길준은 박규수를 스승으로 예우하게 됐다고 한다.
 
  유길준은 박규수의 문하에서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읽은 뒤로 실학과 청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에 관한 책을 탐독한다. 그는 이 사랑방 모임에서 박영효, 김옥균 등과 사귀면서 근대화 개혁세력에 합류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에게서 ‘문명개화론’을 배우다
 


개화파를 자극했던 일본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 


  1881년 5월, 조선은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조정에서는 이 기회에 메이지 유신 이후 발전한 신(新)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배우게 하려고 유능한 청년들을 선정해 일본으로 보냈다. 이때 유길준은 민영익의 도움으로 유정수, 윤치호 등과 함께 수행원에 합류해 일본에 갔다. 사절단은 3개월 여정으로 일본을 돌아보고 귀국했지만 유길준은 근대지식과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남았다.
 
  이렇게 해서 유길준은 최초의 일본 유학생 중의 한 명이 됐다. 그는 일본 메이지 유신의 요람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서 그의 지도를 받았다. 후쿠자와가 저술한 《서양사정(西洋事情)》과 《문명논지개략(文明論之槪略)》은 당시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유길준은 후쿠자와의 ‘문명개화론’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1882년 7월, 박영효를 수신사(修信使)로 하는 임오군란의 진사사절단이 일본에 왔다. 김옥균과 서광범을 비롯한 개혁파 인사들도 함께 방문했다. 박영효와 김옥균 등은 후쿠자와를 만나 그와 의기투합했다. 유길준은 사절의 통역을 맡아 이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다.
 
  귀국 후 유길준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오늘날의 외교부)에 들어가 일하면서 다른 개혁파 동료들과 함께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만들어 상신했다. 러시아의 남하를 경고하는 등의 대외정책에 관한 정책도 건의했다. 《한성순보(漢城旬報)》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도 창간했다. 박영효가 한성부윤이 되면서 그에게 일을 맡긴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그가 국민계몽을 위해 국한문 혼용체로 신문을 발간했다는 점이다.
  
  최초의 미국 유학생
 

1883년 9월 미국에 도착한 조선의 첫 외교사절 보빙사 일행이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홍영식·민영익·서광범, 미국인 로웰. 뒷줄 왼쪽부터 현흥택·최경석·유길준·고영철·변수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1883년 9월 민영익은 미국으로 가는 보빙사(報聘使)에 임명되었다. 그는 유길준을 수행원으로 대동했다. 보빙사 일행은 40여 일 일정으로 미국을 시찰한 뒤 귀국했지만, 유길준은 다시 민영익의 후원으로 미국에 남아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다. 조선에 비하면 청국과 일본의 해외유학은 훨씬 앞섰다. 청국 유학생은 1850년대에, 일본 유학생은 1860년대에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 바 있다.
 
  유길준이 미국 유학을 시작할 당시에는 아직 공사관이 설치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일본에서부터 면식이 있던 사회진화론자 모스(Edward Morse) 박사를 찾아갔다. 유길준은 그의 집에서 개인지도를 받으며 그의 사회진화론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8개월 후, 유길준은 더머 아카데미(Governor Dummer Academy)에 입학했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영어를 배운 지 7개월 만에 영문 편지를 쓸 정도로 어학 능력이 남달랐다고 한다.
 
  한창 공부에 매진하고 있던 그에게 1884년 12월, 충격적인 갑신정변 소식이 들려왔다. 정부는 유학생들의 귀국을 지시했다. 유길준도 연락을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로에 유럽을 경유하면서 서양 정세를 살피고 견문을 넓혔다(유길준이 유학했던 미국 더머 아카데미는 120여 년이 지난 2003년, 유길준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귀국에 앞서 유길준은 일본에 들러 망명한 김옥균과 재회했다. 김옥균은 너무 일본에 의지한 게 큰 실책이었다고 자책하면서 귀국을 만류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존경해 온 후쿠자와도 지금은 ‘아시아 연대론(連帶論)’을 부정하고 서구를 지향하는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오랜 연금생활에서 탄생한 《서유견문(西遊見聞)》

유길준의 《서유견문》.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인문지리서이자 국제정치학 교본이다   


  김옥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길준은 1885년 12월 귀국했다. 당시 갑신정변의 실패로 주도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혔다. 유길준도 7년간의 연금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에, 뒤에는 서울 가회동에 위치한 민영익의 별장 취운정(翠雲亭)으로 옮겨 연금생활을 했다. 이로 미루어 그는 유폐된 것이라기보다는 민영익과 한규설이 유길준을 보호하기 위해 ‘안전가옥’에 그를 연금했던 것 같다. 당시 유길준은 실세 민영익과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외부와의 연락이 끊긴 속에서 6년여에 걸쳐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완성했다. 연금 상태였던 관계로 바로 책이 출판되지는 못하고 1895년에 후쿠자와의 출판사를 통해 일본에서 발간되었다. 《서유견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인쇄서이다. 《한성순보》에 이어 다시 국한문 혼용체로 쓰였다는 점에서 그의 동도서기(東道西器)에 입각한 근대화론과 국민계몽 정신을 가늠해 볼 수 있겠다.
 
  20편으로 구성된 《서유견문》은 5대양 6대주의 지리학적 개관을 시작으로 국가와 정부, 정치와 정당, 교육과 군사, 화폐와 무역 등 경제, 개화의 등급, 외국의 예의와 풍속, 증기기관과 전신기, 회사, 미국과 영국의 큰 도시들에 대한 소개에 이르는 방대한 서적이다. 서양의 사회적 배경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논평을 추가하여 개혁사상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서유견문》은 국제인문지리서이자 서양의 정치, 사회, 교육 제도 등을 소개하는 한국 역사상 초유의 국제정치학 교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국한문 혼용체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사회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서유견문》에서 유길준은 국가의 성립조건과 국권의 핵심으로 일국 주재권, 일국 독립권, 일국 동등권을 제시하고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서양의 공법적인 국제질서를 상정했다. 또한 유길준은 대표적인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 군주명령제, 귀족제, 입헌군주제, 공화제의 5가지로 분류하고 조선은 군주명령제에 가장 가까운데 이 체제에선 국민들이 국가에 충성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은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가 조선에 가장 적합한 제도라고 본다고 했다.  
   
  조공(租貢)체제와 공법(公法)체제를 절충한 양절체제론(兩截體制論)
 
  이어 유길준은 조선이 독립국이며 청의 속국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조선과 같이 주권이 불완전한 국가들을 세 가지 형태로 분류했다. 첫째는 증공국(贈貢國) 또는 조공국(朝貢國)이다. 둘째는 대내외적으로 자주권이 전혀 없는 속방(屬邦)이다. 셋째는 수호국(受護國)으로 독립국이지만 자위 수단으로 다른 나라의 보호를 받는 약소국의 경우라고 정의했다.
 
  조선은 독립국으로 청의 속방이 아니며, 청과의 관계에서는 증공국이면서 수호국의 이중적 관계에 있는데, 이 관계를 두 개로 접혀 있는 ‘양절체제(兩截體制)’라고 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청의 관계는 상호 독립국으로 전통적 조공관계와 근대적인 국제법 관계를 공유하는 이중적 양절관계라는 것이다.
 
  조선은 청국이 조선의 대미국 외교상의 자주권을 제한하기 위하여 제시한 ‘영약삼단(另約三端)’에 따라 주미공사 박정양의 ‘자주외교’를 문제 삼자 양절체제의 개념을 현실외교에 적용했다. 조선과 청국 사이는 불평등한 사대(事大)의 관계이나 조선과 타국(미국)은 상호 자주독립국으로 동등한 교린(交隣)의 관계에 있는 양절체제이므로 조선이 미국과 자주적인 외교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개념이다. 이후 이 논쟁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조선의 중립화론 주장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중립국이 되는 것은 러시아를 막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며, 또한 아시아의 여러 대국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정략도 될 것이다. … 오직 중립 한 가지만이 우리나라를 지키는 방책이다.”
 
  유길준이 저술한 《중립론(中立論)》에 나오는 말이다. 유길준은 주변 열강들의 정책을 분석한 후, 일본, 러시아, 미국, 세 나라 중 어느 한 나라와 깊은 의존관계를 갖는 것을 경계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열강들 사이에서 조선을 보호하기 위하여 청국이 주도하고 관련국들이 보장하는 조선의 중립화를 제시했다.
 
  청국이 조선의 중립을 주도해야 하는 이유는 조선이 침략을 받을 경우 청은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므로 조선을 중립화시켜 열강의 침략 밖에 둠으로써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밖에 없다고 평가한 것이다. 결국 양절체제의 현실을 감안하여 청국을 이용해 중립국이 되어 조선의 자주권을 유지하려는 방책이다. 그는 이미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순망치한(脣亡齒寒)’ 전략과 ‘완충지대’의 현대적 개념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중립론도 제안으로 끝났을 뿐 실현되지는 못했다. 당시 조선의 집권층은 외세에 의존해 권력을 유지하려 했고 천진조약(天津條約)으로 청일 간에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있다고 안이하게 생각한 것이다.
     
  갑오개혁(甲午改革)의 핵심 브레인으로 활약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의 보호국화를 결정하고 친청(親淸) 민씨정권을 타도한 후, 대원군을 앞세워 신정권을 수립했다. 그러고 내정개혁을 담당할 군국기무처를 설치해 영의정 김홍집으로 하여금 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개혁 추진 과정에서 정치세력들이 갑오개혁파, 갑신정변파, 정동파(친미파), 대원군파, 민씨왕정파 등으로 나뉘어 다툼으로써 개혁 추진에 차질을 초래하게 된다. 이 와중에 유길준은 김홍집을 직접 보좌하면서 ‘갑오개혁’으로 불리게 되는 이 내정개혁에서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좁히기 어려운 보수와 진보의 대립적인 개혁방안들을 폭넓은 지식과 침착한 태도로 조정하여 ‘내정의 신법’을 구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개혁은 1894년 7월~1896년 2월 기간에 3차로 나뉘어 추진되었다. 제1차 개혁 중 오랫동안 조선사회의 폐단으로 지목되어 왔던 문벌과 반상제도(班常制度), 문무존비(文武尊卑)의 차별, 노비법(奴婢法)의 혁파 등은 수구적인 흥선대원군의 거센 반발을 받았다. 대원군은 적손자인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고 청군과 내통했다.
 
  그러자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대원군을 퇴출시키고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였다. 그는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하다가 고종과 민비의 반발을 사 일본으로 다시 망명했다. 그래서 제2차 개혁도 김홍집 내각이 주도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3차 개혁 또한 민비의 친러외교로 일본세력이 퇴조한 가운데 다시 김홍집 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일본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서도 김홍집 내각은 계속 내정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을미사변의 미진한 사후처리와 단발령의 무리한 실시는 보수 유생층과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播遷)하면서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고 개혁은 중단되었다.  
   
  아관파천(俄館播遷)과 일본 망명
 
  을미사변 후 고종이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자 이완용 등의 친러정권이 수립되었다. 김홍집과 어윤중은 백주에 살해되고 외부대신 김윤식은 제주도로 귀양,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0년, 그는 일본에서 당시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한 조선 청년장교들이 조직한 일심회(一心會)와 손잡고 쿠데타를 계획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는 김옥균이 갇혀 있던 일본의 남해 고도(孤島) 오가사와라 섬에서 4년 동안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일제는 영국, 미국과 손을 잡고 끝내 러일전쟁까지 치르면서 1905년 11월, 마침내 불법적인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를 설치했다. 한국이 보호국으로 전락되자 뜻을 이루지 못한 유길준은 기독교에 귀의했다. 한편으로는 미국 유학 시에 영향을 받은 사회진화론에 따라 그는 사회계몽운동을 통해 조선사회를 진화시켜 나가기로 작정했다. 당시의 대세였던 일본의 ‘실력양성론’에 주목한 것이다.
 
  1907년 6월, 일본은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후, 일제가 법령제정권, 행정권 및 일본 관리 임명권 등을 갖는 한일신협약을 제시했다. ‘정미7조약’이다. 유길준은 《신지신문(新知新聞)》에 비판기사를 발표하는 한편, 일본의 총리대신에게 정미7조약은 무효라는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는 등 이 조약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일본이 하사한 남작 작위 거부


유길준이 국민계몽운동을 위해 설립한 흥사단 취지서   


  정미7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되면서 일본 망명객들이 고국으로 속속 돌아왔다. 1907년 8월, 일본은 망명객 모두에게 벼슬을 주었지만 유길준은 이를 거부했다. 그동안 유길준을 친일파로 생각했던 고종은 그에게 ‘용용봉정(龍龍鳳亭)’을 하사했다.
 
  유길준은 조선이 망국의 길을 걷게 된 원인이 교육이 보급되지 못해 백성들이 개화하지 못한 데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국민들을 근대적 지식과 도덕을 갖춘 선비로 만든다는 ‘국민개사(國民皆士)’론을 제창하고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했다. 고종은 1만원의 찬조금과 수진궁(壽進宮)을 사무실로 쓰도록 배려했다.
 
  흥사단을 통해 유길준은 국민계몽에 앞장섰다. 대중교육을 위해 어려운 한문 대신 한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말 문법의 체계를 세운 《대한문전(大韓文典)》을 직접 저술하여 국어 문법의 정리에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는 교과서를 스스로 편찬하여 보급했고, 교사양성기관인 사범학교도 설립했다. 《이태리 독립운동사》 등 유럽의 역사책 또는 멸망사를 써서 구국의 정신적 귀감으로 삼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1910년 8월, 일제는 한국을 강제병합했다. 그리고 병합에 협조한 한국인 78명에게 작(爵)을 제수했다. 유길준에게는 남작(男爵)을 제시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해 조선 사대부로서의 지조를 지켰다.
 
  그가 설립했던 흥사단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가 1913년 안창호가 무실역행(務實力行)을 내세우면서 재건한다. 그는 동료인 박은식, 신채호처럼 청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국내에 남아 국민계몽을 통한 근대의식의 형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이 아비는 아무 한 일이 없으니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동도서기론을 정립한 ‘유학파 사대부’
   


유길준이 공부했던 더머 아카데미의 교실


  유길준은 메이지 유신으로 성공한 일본을 발전모델로 삼았지만, 전통적 유교사상을 배격하고 서구적 근대화를 주장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과는 생각을 달리했다. 유길준의 근대화는 자기정체성은 지키면서 서구문명의 장점을 수용해 개혁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는 유학(留學)을 통해 동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전통을 계승하면서 서학을 조화시킨 동도서기의 근대화론을 설계한 것이다.
 
  그는 시의적절한 개혁을 위해서 전통적 유교 윤리 체계를 보수해야 하지만 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수구당은 ‘개화의 원수’로, 남의 겉모습만 따르는 자는 ‘개화의 병신’이라고 공히 비판했다. 전통적 실학과 근대적 사회진화론을 접목시킨 그의 이러한 노선을 ‘조화와 균형’으로 함축해 본다. 그는 문체에서도 동서고금의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국한문 혼용체로도 표출되었다. 이러한 그의 조화와 균형은 국제정치와 외교의 영역에서도 두드러지게 돋보인다. 구한말 만국공법이 도입되면서 전통적인 사대질서와 근대적인 주권평등질서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이미 아시아와 서구 양측에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출처] : 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 서희외교퍼럼 대표: <인물로 본 한국외교사> / 월간조선     




23. 어윤중(魚允中) - 경제 근대화를 설계한 경제통 개혁론자



경제·통상 전문 개화론자였던 어윤중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은 재정과 통상 분야에서 경제개혁을 추진했던 당대의 온건파 엘리트 관료였다.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재직 시에는 청과의 통상협력을 도모하는 한편 간도지방을 조선의 영역에 포함시키려 노력했지만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정세가 변화되자 낙향하다 비운의 죽음을 맞는다.
 
  어윤중은 9세에 어머니, 16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20세 때인 1868년(고종 5) 지방 유생 50명에게 기회가 부여된 전시(殿試) 칠석제(七夕製)에 장원급제해 관리로 등용됐다. 이때 박지원과 그의 손자 박규수의 문집을 읽고 그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 실학과 대외개방론에 눈을 떴다. 박규수를 따르는 김홍집·김윤식 등과 어울리며 주변 정세에 일찍 눈을 떴다.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강화도 광성진을 지키며 미 해병대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순무중군 어재연이 그의 친족이다. 어윤중은 1875년, 경상도 양산군수와 밀양부사를 겸임하던 시기에는 울산과 김해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에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백성들의 고충을 조사하고, 문제를 해결했다.
 
  1877년에는 전라도 암행어사가 되어 탐관오리들을 징벌하는 한편, 전라도 농민의 참상 원인이 주로 수취제도의 문란과 조세수탈에 있음을 지적했다. 현지 상황을 근거로 조세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12개조에 걸친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아 고종과 대신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잡세의 혁파, 지세제도의 개혁, 환곡제도의 폐지, 삼수포세의 폐지, 재결감세(災結減稅) 등의 개혁을 주장했으며 궁방전과 아문둔전의 개혁, 지방수령의 5년 임기 보장, 도량형의 통일, 조운선 제조, 역로(驛路)제도 개혁 등을 건의했다. 이 개혁안은 20여년 뒤인 1894년 갑오개혁기에 구체화된다.  
   
  청·일 근대화 현장 시찰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 


  그가 정계의 주요인물로 등장해 조선의 개혁·개방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은 1881년, 일본에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파견할 때 조사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면서부터다. 그는 박정양·홍영식 등과 함께 이 시찰단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재정·경제 부문을 담당하게 된다.
 
  어윤중은 4개월 정도 일본에 머물면서 메이지 유신의 시설과 문물 등을 시찰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이후 고종의 특명에 따라 일본에서 직접 청의 톈진으로 건너갔다. 여기에서 김윤식과 청에 유학 온 조선의 공학도(工學徒)를 만나 격려하는 한편 당시 청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 해관총독(海關總督) 주복(周馥) 등과 대미(對美)관계에 관해 회담한 후 귀국했다.
 
  귀국 후 어윤중은 이런 보고를 했다. “지금 시국을 돌아볼 때 부강이 아니고는 나라를 보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일본)은 상하가 합심하여 오로지 경영에 힘쓰고 있을 뿐입니다. 청국은 일찍부터 많은 사건이 일어났지만 근래에 외국 사정에 밝아 크게 군사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조미(朝美)수교 겪으며 청에 대해 비판적 인식 갖게 돼
 
  1881년 당시 청국의 외교수장인 이홍장은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조선 진출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홍장은 1879년, 고종에게 미국 등 서양 여러 나라와의 수교를 권고했다. 고종도 이용숙을 비밀리에 이홍장에게 보내 미국과 수교할 뜻이 있음을 전달했다.
 
  이홍장은 조미수호조약의 체결을 강력히 권고하는 한편, 조약의 초안까지 준비하고 조선 측에 영선사(領選使)의 파견을 촉구하면서 톈진에서 협상할 것을 제의했다. 고종은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어윤중을 밀사로, 김윤식을 영선사로 비밀리에 톈진에 파견한 것이다.
 
  이홍장은 1881년 10월 어윤중과 회담을 가진 데 이어 12월에는 김윤식과 회담을 갖고, 조선 측이 조미수호조약 체결 협상을 이홍장에게 위임할 것과 조약상에 조선이 청국의 ‘속국(屬國)’임을 명문화하는 데 대한 동의를 받아냈다. 조선 측이 동의한 것은 전통적인 조공(朝貢)체제와 새로운 공법체제를 조화시키는 한편, 청국을 ‘안보 우산’으로 삼아 조선의 독립을 수호하려는 당시 온건개혁 노선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1882년 제물포에서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어윤중은 다시 청에 파견돼 이홍장 등과 회담했다. 청측은 종주국과 속국 관계를 들어 초안해 놓은 불평등조약인 조중수륙무역장정(朝中水陸貿易章程)의 체결을 요구했다. 어윤중은 이 불평등조약에 조인하는 굴욕을 겪으면서 종전의 청에 대한 우호적인 생각을 바꾸게 된다.  
   
  외교문제로 다투게 된 간도 영유권
 


1887년에 만들어진 백두산정계비 지도. 백두산정계비에 조선과 청의 국경으로 명시된 ‘토문강’이 어디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조선과 청나라의 의견 불일치를 한눈에 보여준다


  1882년,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 참의에 임명된 어윤중은 국가재정 확보에 힘을 쏟는 한편, 20개조로 된 정부기구 개혁안을 제출했다. 이 때문에 민씨 척족과 집권 세력의 미움을 사서 서북경략사라는 변방의 외직으로 밀려났다. 이 자리에 있으면서 그는 1883년 3월 청측과 중강(中江)무역장정을, 6월에는 회령통상장정을 체결하는 등 북방무역에서 조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서북경략사로 재직하면서 백두산정계비를 기준으로 토문강(土門江)과 두만강(豆滿江)의 국경지대를 조사, 숙종 때 세운 백두산정계비의 탁본을 떠오도록 했다. 그리고 답사 결과를 토대로 토문강이 쑹화강 상류로 간도 지방은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어 청의 현지 관료에게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 조사를 통해 국경을 획정하자고 제기했다.
 
  조선 정부도 청에 대해 토문감계(土門勘界)를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이후 1885년부터 1888년에 걸쳐 3차례의 간도문제에 관한 조청 감계회담(勘界會談)이 개최되었으나 양측이 기존 입장을 고수해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최초의 근대학교 원산학사(元山學舍)
 

 
원산 주민들과 관리들이 힘을 합쳐 만든 원산학사. 최초의 근대식 학교다


  조선 정부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학교는 1886년에 세워진 육영공원(育英公院, 영어로는 Royal English School 또는 Royal College라고 표기)으로 알려져 있다

육영공원보다 3년 앞서 1883년(고종 20)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元山學舍)가 세워졌다. 당시 원산은 1880년 개항된 이후 일본영사관이 설치되고, 일본인 거류지가 만들어지는 등 일본의 경제활동이 강화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1883년 덕원부사로 부임한 정현석이 일본에 대응하기 위한 근대적인 학교를 세우려 했다. 이 지역 책임자인 서부경략사 어윤중도 학교 건립에 적극 나섰다.
 
  설립기금은 덕원·원산의 주민들, 원산상회소(元山商會所), 원산항의 통상을 담당하던 정헌시, 그리고 외국인 등이 참여해서 모았다. 1883년 8월에 학교 설립을 정부에 보고하여 정식 승인도 받았다. 설립 초기에는 학교를 문예반과 무예반(武藝班)으로 편성하였는데, 무예반은 정원 200명을 뽑아서 별군관(別軍官)을 양성하도록 하였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그는 이 정변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갑신정변에 연좌되어 굶어 죽은 스승 박원양의 장례를 치러 주었다가 비판을 받아 귀향해야만 했다. 1893년 봄, 충북 보은(報恩)에 수만 명의 동학도가 교주 최제우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며 모여들었다. 보은은 어윤중의 고향이다.
 
  조정은 어윤중을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순무사로 임명해 보은으로 급파했다. 어윤중은 동학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동학도들은 교조신원(敎祖伸寃)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주장했다. 어윤중은 조정의 관대한 처분을 약속했고 동학지도부는 해산을 결정했다. 동학도를 비도(匪徒)라 칭하면서 탄압하는 분위기에서 어윤중은 장계를 올려 동학을 ‘비도(匪徒)’가 아니라 ‘민당(民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로 인해 어윤중은 동학농민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관료들과 재야 선비들로부터 식언을 했다는 빈축을 샀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어윤중이 장계에서 동학교도를 가리켜 비도라 하지 않고 민당이라 한 점을 비판했다.


강직한 원칙주의자.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조선은 내정(內政)개혁을 담당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고 영의정 김홍집으로 하여금 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이 개혁내각에 어윤중은 탁지부(度支部)의 대신(기획재정부장관)에 임명된다. 내각은 오랫동안 조선사회의 폐단으로 지목되어 왔던 여러 제도 및 관습에 대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재정·경제부문의 개혁은 어윤중이 중심이 되어 단행했다. 우선 국가재정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조세수납을 탁지부로 일원화했다. ‘신식화폐장정’을 의결하여 은본위제(銀本位制)를 채택하는 한편, 종래의 물납세제(物納稅制)를 금납제(金納制)로 대체하고, 전국적으로 도량형(度量衡)을 통일시켰다. 그리고 과거부터 자신이 건의해 온 비리와 수탈로 얼룩진 조세개혁안을 시행했다.
 
  어윤중의 긴축정책과 조세개혁을 세간에서는 어윤중을 ‘전(田)조림(성씨 魚의 중간 부분인 田를 따서 붙인 별명)’이라고 부르면서 응원했다. 어윤중은 고종과 민비의 요청도 법에 어긋나면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일본 측이 300만원의 차관을 일본화폐로 주려고 했지만, 어윤중은 은(銀)이 아니면 받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어윤중의 이러한 태도에 관한 일화를 전하고 있다. 고종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군부대신 조희연을 물러나게 하려고 하자 대신들이 반대했다. 고종이 화를 참지 못하고 “대신 하나도 물리치지 못한다면 어찌 임금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면서 옥새를 집어던졌다.
 
  “짐은 임금이 아니니 경들이 이것을 가져가라.” 이때 어윤중이 일어나 말했다.
 
  “성인이 말하길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忠)으로써 섬긴다’고 했습니다. 폐하께서 신들을 이렇게 대하시니, 장차 신들은 어떻게 폐하를 섬기겠습니까. 바라건대 노여움을 푸시고 굽어 살피시어 공의를 펴소서.” 고종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을미사변과 춘생문 사건.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전리품으로 만주의 요동반도를 점유하자 만주에 이해가 큰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연합해 개입했다. 삼국간섭이다. 아직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한 일본은 이미 수중에 넣었던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고 말았다.
 
  러시아의 힘을 목격한 민비는 소위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으로 러시아를 일본의 새로운 경쟁상대로 등장시켜 세력균형을 이루자는 전략을 세웠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K. I. Veber)와 손을 잡고 친일파를 추방하고 친러파 이윤용과 이완용(이전에는 친미였으나 이때에는 친러로, 후에 친일로 변신)을 입각시킨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러시아와 당장에 일전을 결할 수 없었던 일본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친러외교의 배후인 민비를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1895년 8월 발생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고종은 이제 궁궐에 있는 것도 불안했다. 독살을 피하기 위해 눈앞에서 딴 깡통 연유와 날달걀 외에는 먹지 않고, 미국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침실을 지키게 했다. 고종은 하루바삐 왕궁을 탈출하려고 했다. 이것이 친미파와 친러파 성향의 인사들이 주동이 돼1895년 11월 28일 발생한 춘생문 사건이다.
 
  어윤중은 현장에 나타나 거사에 참여한 군사들을 설득하였다. 군사 수십 명과 이도철이 체포되었고 핵심 주모자들은 역모죄로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주도했던 이범진은 해외로 탈출했다. 한편, 일본 측은 이를 ‘국왕탈취사건’이라 규정하고 서양인도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대서특필하면서 이를 기화로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 중이던 을미사변 관련 주모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전원 석방하는 데 이용했다.


단발령과 아관파천.


춘생문 사건’으로 친러파는 축출되고, 일본의 영향하에 김홍집을 주축으로 하는 제3차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 내각은 1895년 7월부터 12월에 걸쳐 전문 수십 조에 달하는 개혁 법령을 반포하였다. 이른바 ‘을미개혁’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중 11월 15일에 양력시행령과 함께 공포된 단발령(斷髮令)은 일파만파로 문제를 키웠다.
 
  단발령에 대해 학부대신 이도재는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상소하고는 대신 직을 사임하였다. 원로 김병시도 단발령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하였다. 당대 유림의 거두 최익현은 단발을 강행하려 하자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며 단발을 단호히 거부했다.
 
  한편, 두 달 전 을미사변 때문에 시작된 의병운동은 단발령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재야유림 및 전직관료의 주도로 전개된 의병운동은 다양한 항일운동을 촉발시켰다. 일본의 횡포에 불만을 품어 온 전국의 유생, 농민, 춘생문 사건 때 흩어진 친위대 출신의 군인, 동학교도들이 곳곳에서 합세했다.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친위대가 의병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자 중앙의 친위대 병력까지 동원했다. 이때 수도경비에 공백이 생긴 틈새를 이용해 해외로 탈출했던 이범진이 비밀리에 귀국하여 이완용 등 친러 인사들과 고종의 파천(播遷) 계획을 다시 모의했다.
 
  고종이 동의하자 러시아는 1896년 2월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군함 수군 120여 명을 무장시켜 한양에 주둔토록 했다. 그리고 다음 날 11일 고종은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했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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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비(魚肥)울이’ 마을에서 타살 .


파천을 성공시킨 친러파는 고종을 동원해 김홍집 ‘친일내각’을 응징했다. 단발령도 폐지하고 을미사변 가담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총리대신 김홍집은 일본의 망명 제의를 거절하고 고종을 만나러 가다가 경복궁 앞에서 성난 민중에 의해 타살됐다.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는 참형되었다. 놀란 내무대신 유길준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외무대신 김윤식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어윤중도 일본 측의 망명 제의가 있었지만 거절하고 고향인 충북 보은(報恩)으로 낙향하기로 하고 여인이 타는 가마로 위장한 행장을 꾸렸다. 일행은 날이 저물자 안성과 용인 경계에 있는 마을 주막에 들러 여장을 풀었다. 어윤중이 마을 이름을 알아보니 여기 사람들은 ‘어비(魚肥)울이’라고 부르는데 외지에서는 ‘어사리(魚死里)’라고 부른다고 했다. 원래는 냇물이 좋아 고기가 살찐다는 뜻으로 어비울이인데, 살찐 고기가 죽는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한 어사리라는 말이 걸린 어윤중은 행장을 챙겨 이웃 송전리로 옮겨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어비울이 마을 사람들은 여장한 과객이 어윤중임을 알아챘다. 이 사실은 송전리까지 퍼져 그 마을에 사는 정원로와 그의 집에 식객으로 와 있던 유진구에게 알려졌다. 유진구는 궁내부 순사였는데 춘생문 사건 당시 거사에 참여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추격을 피해 이곳 정원로의 집에 숨어 있다가 어윤중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진구는 이진호의 배신과 어윤중 때문에 춘생문 거사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던 참에 그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던 것이다.
 
  정원로와 유진구는 동네 청년들을 이끌고 어윤중의 가마를 추적했다. 마침내 이들은 어윤중 일행이 처음 묵어가려 했던 어비울이에서 일행을 붙잡았다. 어윤중은 몽둥이에 맞아 무참하게 타살되었고 그의 시신은 장작더미에 얹혀 태워졌다. 이때가 1896년 2월, 그의 나이 47세였다.
   
  황현, “세상을 구제할 만한 인재” 



어윤중을 높이 평가한 매천 황현 


  어윤중이 설계한 경제개혁의 뿌리는 박지원의 ‘이용후생’과 ‘실사구시(實事求是)’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윤중은 박지원의 개방적 중상주의(重商主義)와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손자 박규수의 문호개방 ‘근대화론’을 계승해서 생산력을 증대하고 화폐경제를 발달시킬 수 있는 국가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한 경제 근대화를 설계했다.
 
  이러한 근대화 개혁론은 성공하지 못했다. ‘위로부터의 혁명’인 갑신정변도, 10년이 지나 ‘밑으로부터의 혁명’인 동학봉기도 모두 실패했다. 이러한 개혁 노력들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외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조선 내부의 문제도 적지 않다. 조선 왕정은 개혁을 위해 절대권력을 내려놓지 않고 외세에 의존해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이에 편승한 ‘권력 집착형’ 정치권의 갑론을박(甲論乙駁)과 이전투구(泥田鬪狗)는 개혁 응집력을 분화시키면서 스스로 개혁의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진정한 이용후생의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화 노력이 자체적으로 제기되고 시도되었지만 이를 소화해 내지 못한 조선은 끝내 망국의 길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어윤중의 사망 소식을 들은 황현은 “어윤중은 김홍집과 함께 세상을 구제할 만한 인재로 칭해졌다. 그가 살해된 후 개화에 앞장설 사람이 없음을 모두 한탄했다”며 아쉬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권력에 편승하지도, 권력을 위해 투쟁하지도 않았다. 수구 왕정파도 급진 정변파도 아니었으며 더욱이 외세에 의존하는 친청파(親淸派)도, 친일파(親日派)도, 친로파도(親露派) 아니었다.
 
  그는 단지 국민들에게 상당히 신뢰받던 유능하고 시대를 앞서간 명망 있는 엘리트 관료였다. 집권세력이 거부감을 갖고 있던 민감한 조세개혁도 단호히 조치하고 그들로부터의 외압을 거부한 강직한 성품의 원칙주의자였다고 평가해 마땅하다. 아울러 개혁을 외면하고 권력에 편승해 계속 분화하는 오늘날의 정치·사회현상을 돌아보면서 어윤중이야말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인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출처] : 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 서희외교퍼럼 대표: <인물로 본 한국외교사> / 월간조선     




24. 명성황후 - 고종의 정치·외교 대리인



명성황후의 초상.
종래 명성황후 사진으로 알려진 것들은 신빙성이 떨어져 새로 그린 것이다.


  조선 왕조의 대외관계사에 여성이 등장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예외가 있다면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년)이다. 그는 구한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거친 파고 속에서 고종을 대신해 조선의 정치와 외교의 한 축을 감당했던 여장부였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 고종의 왕비를 간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처가인 여흥 민씨 가문의 민자영(閔玆暎)을 주목한다. 안동김씨 왕실 외척이 정치를 좌우하는 폐단을 경험한 흥선대원군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형제도 없는 그녀야말로 왕비에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왕비 간택과정은 《동치오년병인삼월가례도감의궤(同治五年丙寅三月嘉禮都監儀軌)》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민자영은 노론의 거물이었던 민유중의 6대손 민치록(閔致祿)의 외동딸이었다. 민치록은 훗날 대를 잇기 위해 11촌 아저씨인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閔升鎬)를 양자로 들였는데,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친동생이다. 민치록은 딸에게 《소학(小學)》 《효경(孝經)》 등을 가르쳤지만 그녀는 역사를 좋아했다고 한다.
 
  민 왕후는 대원군의 집권에 공을 세웠음에도 소외당한 조대비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 형제, 대원군 시절 남인·북인 세력 등용에 반발하던 노론,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그의 형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 서원철폐 과정에서 등을 돌리게 된 유학자 세력 등을 포섭해 반(反)대원군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1873년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은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실현됐다. 이후 민 왕후와 대원군은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정적(政敵)이 됐다.  
   
  문호개방과 친청배일(親淸排日) 외교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대원군이 일시 정권을 장악했다. 민 왕후는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청나라 군대의 지원으로 정권을 탈환한 민 왕후와 민영익(閔泳翊) 등 척족(戚族) 세력은 친청사대를 견고히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의 친일 급진개혁 세력이 일본을 등에 업고 1884년 10월 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이번에도 민 왕후는 민영익 등으로 하여금 다시 청군에 원조를 청하도록 했다.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개입으로 정변은 사흘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를 계기로 민 왕후는 일본을 경계하면서 친청사대(親淸事大)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
 
  1894년 전봉준(全琫準)을 중심으로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민 왕후는 동학교도들을, 대원군을 추종하면서 조정을 뒤엎으려는 비적으로 ‘동비(東匪)’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특히 흥선대원군과 전봉준의 관계에 주목했다. 전봉준이 1890년부터 운현궁의 식객 노릇을 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이 대원군의 사주를 받아 고종을 폐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민 왕후는 민영준을 청에 보내 원병을 청했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당시 그녀는 “동학의 무리를 내 어찌 왜놈처럼 여기랴만 임오군란과 같은 일을 다시는 참을 수 없다”면서 청병(請兵)을 주저하는 민영준을 나무랐다고 한다.  
  
  민 왕후, 친러정책으로 전환
 
  청군이 파병되자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빌미로 파병하였다. 일본은 조선에 진주하면서 정부 차원에서 미리 ‘조선보호국화’를 결정했다. 일본군은 고종 부부를 연금한 후 친청(親淸) 노선의 민 왕후가 정치에서 물러나도록 서약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대원군을 앞세웠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의 영향력이 거세졌다. 그러자 1895년 4월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얻어냈던 랴오둥(遼東) 반도를 반환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일본은 이에 굴복했다.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한다.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를 면밀히 주시하던 민 왕후는 청을 대신해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했다. 친러외교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균세(均勢)외교로, 소위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이다.
 
  1895년 7월, 민 왕후는 일본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 친러내각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해 민씨 척족들을 조정에 불러들였다. 친일내각이 추진해 왔던 내정개혁은 취소했다. 일본군의 영향력 아래 있는 훈련대도 해산시키려 했다. 이는 청일전쟁 개전 이래 일본이 추진해 온 조선보호국화 작업을 백지화하는 것이었다.  
   
  ‘여우사냥’
 


을미사변을 저지른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 


  이 시점에서 1894년 조선에 부임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공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외상·내상 등을 두루 역임한 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함께 당시 일본정계의 거물로 정한론(征韓論)의 선두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민 왕후를 제거하지 않고는 조선병탄을 실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비밀리에 왕비시해 음모를 마련한 후 일본으로 귀국했다. 내각회의에서는 외교 경험이 전혀 없는 예비역 육군중장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이노우에의 후임으로 결정했다.
 
  조선에 부임한 미우라 공사는 이노우에가 기획한 시해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일본공사관 밀실에서는 미우라,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공사관 서기), 오카모토 류스노케(岡本柳之助·공사관부무관 겸 조선 군부 고문), 구스노세 사치히코(楠瀨幸彦·포병중좌) 등이 행동계획을 마련하였다. 작전명은 ‘여우사냥’이다.
 

일본 구시다(櫛田)신사에서 발견된 일본도.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거사 전, 일본은 대원군으로부터 민 왕후 제거와 관련된 문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그 내용은 왕비 사후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정사를 맡겨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895년 10월 8일, 미우라는 작전 결행에 들어갔다.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가 이끄는 일본 낭인 30여 명이 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 앞에 도착했다. 폭도들은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한 다음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궁녀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결국 민 왕후는 뜰에서 붙잡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왕후의 시신을 녹원(鹿園) 숲속으로 옮긴 다음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렀다.
 
  이 충격적인 왕후 시해범은 전 조선 군부 고문 일본인 오카모토와 스즈키, 와타나베 등이었다. 왕후를 시해한 지 꼭 100년째가 되는 지난 1995년에 당시에 사용되었던 일본도가 규슈(九州) 지방 구시다(櫛田)신사에서 발견되었다. 이 절 금고 속에 보존되어 있는 이 칼의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진실 밝힌 일본인 보고서도 있어
 
  일본은 이 사건을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에 의한 우발적인 것으로 날조하려 했다. 범죄자 처벌을 요구하는 국제여론이 들끓자 범인으로 지목된 미우라 외 56명의 용의자를 일본으로 소환해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수감했다. 히로시마 재판부는 “피의자들이 광화문을 통해 왕성 안으로 들어가 바로 건청궁까지 이른 등의 사실은 인정되나 이들 중에 범죄를 실행한 자가 있음을 인정할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며 시해범들을 모두 석방했다.
 
  이 만행은 미국 대리공사 알렌(H. N. Allen), 영국 영사 힐리어(Hilie), 러시아 베베르 등 주한 외교관들의 보고와 《뉴욕헤럴드》 특파원 코커릴(Colonel Cookerill) 등에 의해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1895년 10월 31일 자 《노스차이나 헤럴드 신문》은 〈일본이 깡패들이 흔히 저지른 하찮은 소란으로 의미를 축소하려는 것은 일본인들의 잔꾀〉라고 보도했다.
 
  일본인이 작성한 보고서 중에서도 왕비 시해를 입증하는 것들이 있다. 1895년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가 작성한 보고서는 일본인이 작성한 보고서로는 이례적으로 사건 주범을 일본인이라고 명시했다. 조선 정부 내부(內部) 고문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는 일본 법제국 장관에게 직접 보고한 보고서에서 사건의 원인에서부터 실행자, 사후대책까지 충실히 기록하면서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 필요성을 암시했다.
 
  전 모스크바 대학 박종효(朴鍾涍) 교수는 1995년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에서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Karl I. Waeber) 조선공사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에게 보낸 보고서를 찾아냈다. 이 보고서에는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르진 사바틴(A. J. Scredin Sabatine) 등 당시 궁내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록, 주한 외교 공사들의 회의록과 당시 신문 자료 등이 첨부되어 있다. 니콜라이2세는 베베르의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자필로 ‘정말로 놀랍다.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났단 말인가’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주(州) 주둔군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다고 한다.  
   
  남은 의혹들
 


러시아 일간지 《노보예브레먀》 1895년 10월 20일 자에 실린 명성황후 스케치 사진 


  2013년에는 독일과 영국에서 민 왕후가 을미사변 이후에도 비밀리에 생존했으며 사건 현장을 탈출했다는 내용이 담긴 외교문서가 발견되었다. 독일 외교관 리돌린이 1896년 2월 6일 작성해 독일제국 총리에게 보낸 이 보고서에는 〈왕비가 살아 있고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어느 조선인으로부터 왕비의 공사관 피신을 비밀리에 요청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는 1986년 2월 베이징 주재 영국 대리공사에게 보낸 문서에서 〈왕은 여전히 왕비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고 적혀 있다.
 
  이 문서를 발견해 공개한 정상수 교수는 “독일과 영국 등 당시 조선과 관계를 맺었던 나라들의 외교문서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학계에서는 사료의 진실성을 검증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 외교문서들이 정설을 뒤집을 만한 반증자료는 아니라고 보는 주장이 많다.
 
  민 왕후의 사진과 초상화에 대한 논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 광복 이후 국사교과서에 실렸던 왕후 사진의 주인공이 ‘궁녀’라는 논란이 일어 2000년대 초반 교과서에서 삭제됐다. 학계에서는 명성황후 사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명성황후의 사진이 부재한 이유를 그녀가 생전에 흥선대원군 추종 세력에 의해 친척들이 암살당하면서 노출기피증과 대인기피증, 암살공포증이 심해져 가까운 친척이 아니면 만나지도 않았고 초상화나 사진을 일절 찍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추측한다.
 
  전남대 세계한상문화연구단은 최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행된 일간지 《노보예브레먀》 1895년 10월 21일 자에 실린 민 왕후로 추정되는 세밀화를 공개해 관심을 끈 바 있다.  
  
  민 왕후에 대한 엇갈린 평가
 

민 왕후를 호평한 릴리어스 언더우드 


  민 왕후에 대해서는 긍정·부정적 평가가 교차한다. 그녀는 정치적으로는 절대왕권을 유지하면서 서양 문명을 절충하는 정책노선을 취했다. 때문에 급진개혁파로부터는 개혁이 미진하다고, 척사파로부터는 문호개방을 추진한다고 비판받았다.
 
  비판의 다른 이유는 민씨 일족이 당시 요직을 독차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880년대 중앙과 지방 관직에 진출한 민씨 친족은 260여 명에 이르렀다. 요직에 오른 일부 민씨가 전횡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었다. 왕비의 사치와 민씨 정권의 매관매직이 도마 위에 올랐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고종과 왕후가 원자(元子)가 잘되길 빈다는 핑계로 제사를 8도 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며 지내 국고를 탕진했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內需司·왕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던 관청)만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있다. 권력유지를 위해 외세를 이용한 결과,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청과 일본을 끌어들여 이 땅을 그들의 대리 전쟁터로 전락시킨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외국인이 본 민 왕후는 어떤가? 명성황후의 어의였던 그랜트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는 《조선견문록(Old Korea)》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우아하고 근엄하다. … 순수하면서도 뛰어난 기지와 매력을 지닌 분으로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에도 완벽한 귀부인이다. 그녀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 일본을 반대했고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을 발간한 영국의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도 유사한 기록을 남겼다.
 
  일본 외교관들은 그녀를 ‘여우’라고 불렀다. 《한성신보》 기자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는 훗날 왕후가 시해된 후 “조선의 정치 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민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었으니, 민후는 실로 당대 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면서 “일본으로서는 대표적 인물인 민후를 제거하여 조선과 러시아가 결탁할 여지를 없애는 것밖에는 방책이 없었다”고 했다.  
   
  고종의 정치·외교적 대리인
 
  민 왕후의 총명함과 자질의 비상함은 그녀의 비판세력들도 인정했다.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오랜 망명생활을 해야 했던 서재필은 이렇게 회고했다.
 
  “김옥균의 지략은 역사적인 것이었소. 박영효와 홍영식과 서광범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재사들이었지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다 나까지 넣어 다섯 사람의 기지와 계략을 모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까지 일컬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다섯 사람이 함께 왕비 앞에 나가면 으레 그녀에게 기선을 잡혀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러나오기 마련이었지요. 왕비는 실로 당할 길 없는 지략과 재략을 지닌 걸물이었소.”
 
  고종의 왕후에 대한 의존도는 절대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외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왕비가 자신의 친정을 위한 정치적 후원자였고 외교의 일급 조언자였다. 고종이 직접 지은 명성황후 행록(行錄)을 보면 이런 내용이 보인다.
 
  〈경서와 역사를 널리 알고 옛 규례에 익숙하여 나를 도와주고 안을 다스리는 데 유익한 것이 많았다. 사변에 대처해서는 정상적인 방도와 임시변통을 잘 배합했다. … 일찍이 왕비가 말한 것마다 모두 들어맞았다.〉
 
  민 왕후는 안으로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의 생사를 건 권력투쟁에 함몰되면서 나라의 이익보다는 왕권과 가족의 수호를 위해 살았다. 밖으로는 일제의 조선 병탄을 저지하기 위해 청나라와 러시아 등 외세를 이용한 줄타기 외교를 해야 했다. 그녀의 삶은 구한말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출처] : 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 서희외교퍼럼 대표: <인물로 본 한국외교사> / 월간조선     




25. 이완용(李完用) - 매국(賣國)의 선봉이 된 개화(開化) 관료



을사늑약과 한일합병에 찬성해 ‘매국노’가 된 이완용.


  이완용(李完用·1858~1926)은 영특하고 재주가 비상했다. 입신출세를 위해 정치적으로는 수구(보수)와 개혁(진보)을 오가고 대외적으로는 친미, 친러, 친일로 변신하면서 총리대신에 올라서는 한일병탄을 주도해 망국의 주역이 됐다. 그 뒤 일제의 주구가 돼 민족혼과 뿌리마저 말살하려는 일제의 동화정책에 앞장서면서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매국노’로 비판받고 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완용에 대한 변론도 없지 않다. 이미 몰락한 조선의 망국 책임을 그에게만 물을 수 있는가? 이완용이 아니었더라도 누군가는 이완용의 역할을 했지 않았을까? 독립협회 회장 역임 등 그의 ‘애국적’ 행적에 대해서는 평가가 인색하다는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대대로 양자를 입양한 집안에 양자로 입양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에서 잔반(殘班)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0세 때인 1867년에 일가인 중추부 판사 이호준(李鎬俊)에게 입양됐다. 이호준은 이조참의,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한 정계의 거물로 이조판서를 지낸 민 왕후의 친척 민응현의 사위였으며 흥선대원군과는 정치적 동지였다. 이완용이 이런 명문 가문에 양자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소문났기 때문이다.
 
  서자(庶子)와 딸만 있었던 이호준은 서자인 이윤용(李允用)을 대원군의 서녀(庶女)와 결혼시켜 왕실과 이중삼중의 연을 맺어 핵심 권력층에 자리 잡게 된다. 이호준의 가계(家系)는 350년 전부터 후사(後嗣) 문제로 입양을 시작한 이후 여덟 번이나 양자를 들였다. 이완용을 입양한 이호준 자신도 어렸을 때 입양 온 양자였다.
 
  이완용은 입양된 후 정익호에게 사사(師事)하였고, 이용희에게 서예를 익혀 후일 당대 명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양부 이호준의 후원으로 과거를 준비하던 이완용은 25세가 되는 1882년 왕실에서 특별히 실시한 증광시(增廣試) 별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이 증광시는 임오군란으로 피란 갔던 민 왕후가 청군(淸軍)의 도움으로 환궁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치러진 것이었다.
 
  이완용은 갑과(甲科)나 을과(乙科)가 아니라 병과로 합격한 데 불과했지만,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8, 9품을 거치지 않고, 정7품 규장각 대교(待敎)에 임명됐다. 이 자리는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이는 양부 이호준이 청국에 끌려간 대원군과 손을 끊고 발 빠르게 민씨 정권으로 말을 갈아탔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속출세
 

 


대한제국의 주미 공사관 건물. 1889년 박정양 초대 주미 공사가 임차해 16년간 사용됐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 민씨 일족이 내몰리게 되자 민씨 정권에 줄을 섰던 이호준은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정변 세력의 표적이 됐다. 그러나 정변이 민비가 요청한 청국(淸國)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나자 이호준은 권력 핵심에 복귀할 수 있었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던 이호준은 이완용을 조선 최초의 근대적 관료교육기관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시켜 영어와 신문물을 배우도록 했다. 그 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보덕(輔德·정3품)에 보임돼 왕세자 순종(純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는데 그가 정3품 당상관에 오르기까지는 불과 5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갑신정변 실패 후 밀려나간 급진개혁 세력의 자리를 이호준의 후광으로 이완용이 차지한 셈이다.
 
  30세가 되는 1887년, 이완용은 주미전권공사로 부임하는 박정양(朴定陽)을 따라 참찬관(參贊官)으로 미국에 부임했다가 병이 나서 7개월여 만에 귀국하고 만다. 귀국 후에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조참의, 외무참의 등 요직을 지냈다.
 
  미국에 부임한 박정양 전권공사는 청에 약속한 영약삼단(另約三端)을 지키지 않고 독자외교를 펼치다 청국의 압력으로 귀국하게 된다. 이완용은 1888년 다시 주미 참찬관으로 부임해 2년여 서리(署理) 공사로서 공관장의 역할을 수행한다. 오늘날로 치면 워싱턴에서 주미 대사대리를 한 셈이다.
 
  1890년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 대사성과 형조참판, 공조참판, 우부승지(右副承旨), 내무참의(內務參議) 등 차관급 요직을 두루 섭렵했다. 성균관 대사성 재임 시에는 초등교육의 의무화를 제도화하고, 근대적 교사 양성사업 계획을 지휘했으며 성균관에 서양 학문 이수 과목을 신설했다.
 
  이완용의 행보는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대원군이 하야하고 친정(親政)을 시작한 고종은 쇄국을 버리고 개방정책으로 선회했다.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을 이용해 균세(均勢)외교를 추진하자 이완용은 이호준의 후견을 업어 서재필(徐載弼) 등이 주도하는 ‘정동파(貞洞派)’에 접근하면서 친미(親美) 행보를 걷게 된다.
 
  친미 행보로 이완용은 1894년 김홍집(金弘集) 내각에서 외무협판이 되었다. 이때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등 급진개혁 세력이 일본의 비호 아래 조선으로 돌아왔다. 친청(親淸) 수구파 정권은 붕괴했다. 이완용 부자는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호준은 친일정권에 부응하는 한편 고종과 민비 측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양다리를 걸쳤다. 이완용은 1895년 박영효가 주도하는 친일내각에 학부대신(學部大臣) 겸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입각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요동반도를 점유하자 만주에 이해가 큰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연합해 개입했다. ‘삼국간섭(三國干涉)’이다. 아직 힘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했다. 러시아의 힘을 목격한 민비는 러시아를 일본의 새로운 경쟁상대로 등장시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전략을 추진했다.
 
  위기를 느낀 박영효는 고종과 민비를 러시아와 차단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키려다 왕후시해 음모라는 누명을 쓰고 다시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민씨 정권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Veber.K.I)와 손을 잡고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완용은 이 내각에도 입각했다. 위기를 느낀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민비를 시해했다. 이완용 부자도 목숨이 위험했지만 미국 공사관 서기관 알렌(H.N.Allen·安連)의 도움으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 주도
 

이완용이 학부대신 시절 문을 연 법어(프랑스어)학교. 맨 왼쪽이 프랑스인 교사 마르텔이다. 


  을미사변 후 고종은 궁궐에 머무는 것도 불안해했다. 고종의 뜻에 따라 이호준은 이범진(李範晉) 등과 모의해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이완용을 러시아에 접근시켰다. 첫 번째 파천 시도는 내부에 배신자가 있어 실패했다. 이게 ‘춘생문(春生門) 사건’이다. 다시 모의를 거듭한 끝에 1896년 친위대가 지방 소요를 진압하러 떠난 사이 마침내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파천이 성공하자 친러내각이 들어섰다. 파천에 공을 세운 이완용은 박정양 내각의 외부대신 겸 학부대신으로 중용되었다. 1년 뒤 1897년, 조선반도에 힘의 공백이 생기자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해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러시아는 각종 이권 획득에 만족지 않고 사사건건 내정에도 개입했다. 러시아의 간섭이 도를 넘자 고종은 외부대신 이완용의 의견에 따라 이번에는 미국 쪽에 줄을 대고 각종 이권을 미국에 넘겨주었다.
 
  이완용은 서재필, 윤치호(尹致昊) 등이 주도하는 친미 성향의 독립협회를 지원해 초대 협회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독립문 정초식(定礎式)에서 그는 “조선이 독립을 하면 미국과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고 주장했다.(《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
 
  독립협회는 미국식 참정권을 주장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해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해고하라고 요구했다. 분노한 러시아의 견제를 받은 이완용은 1897년 외직인 평양관찰사로 좌천됐다. 1898년 11월 17일자 《황성신문》에 의하면, 그는 이 시절 “유람하러 나서면서 기생 4명에 나졸을 합해 100여 명이 움직였으며 돈 4000냥을 경비로 사용했다”고 한다. 게다가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아 원성이 높았다.
 
  이 사례는 그가 개인적으로 영특했지만 매우 부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젊은 시절 주미 공사관에 있을 때부터 수십 년간 그를 지켜봐 왔던 윤치호는 그의 일기(1896년 1월 21일자)에 “나는 이완용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의 특권의식, 야비한 교활함과 음흉함, 그와 같거나 열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집스럽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는 굴욕적일 만큼 복종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편견을 갖게 한다”는 평을 남겼다. 그는 이완용이 학부대신으로 있으면서 공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행적도 일기에 남겼다.  
   
  을사늑약
 

을사늑약을 강요하러 방한한 이토 히로부미. 


  이 와중에 1901년 2월 의정부 참정(參政·정1품)이던 이호준이 노환으로 쓰러졌다. 고종은 이호준의 후계인 이완용을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으로 불러올렸다. 이호준은 얼마 안 가 81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이완용은 곧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자 보호자였던 아버지를 대신해 수구파의 좌장 자리에 올랐다.
 
  이완용은 인생 최대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전 그의 정치적 행보가 전적으로 양부 이호준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의 국권 침탈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04년 9월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지자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이완용이 스스로 내린 정치적 결단은 친일이었다. 1905년 일본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방한해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요했다. 이완용은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면서 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이완용의 조카이자 이완용의 비서직으로 있던 김명수(金明秀)는 1927년 펴낸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이 말을 들은 이토는 하세가와를 대동해 궁궐로 들어가 마구잡이로 보호조약을 통과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어전회의에 참석한 여덟 대신 중에 다섯 명은 찬성, 세 명은 반대했다. 처음부터 찬성을 외친 대신은 이완용과 이지용(李址鎔) 둘뿐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을사늑약 후 친일 행보
 
  을사늑약 이후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가 됐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1907년에는 대한제국 총리대신직에 올랐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등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 침략의 부당성과 을사늑약 무효를 세계에 호소해 보려 했으나 좌절됐다. 이완용은 이 사건을 빌미로 이토를 도와 고종을 퇴위시키고 내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는 정미(丁未)7조약을 체결했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이완용은 황제를 향해 칼을 빼들고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고함까지 질렀다고 한다. 반일 단체인 동우회(同友會) 회원들은 이완용의 자택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전국 각지에서 이완용 화형식이 격렬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이완용은 군대 해산에 앞장서는 등 친일 행보를 계속했다. 그 공로로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동화장(旭日桐花章)을 받았다.
 
  그는 자식이 없었던 순종의 황태자로 고종의 막내아들 영친왕을 내세웠다. 막후에서 실질적 권력을 쥐려 했던 고종의 노욕을 이용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에서 물러나면서 사법권을 넘기는 작업을 계획하고 이 일을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맡겼다. 내각 내에서도 반대가 빗발쳤지만 그는 일본과 단독으로 기유각서(己酉覺書)에 서명해 버렸다. 그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대훈위국화대수장(大勲位菊花大綬章)을 받았다. 조선인으로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조선 왕족 3명을 제외하면 이완용이 유일하다.  
   
  통감부, “그물도 안 쳤는데 물고기가 뛰어들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를 하얼빈역에서 사살했다. 이완용은 추도회에 참석해 “이토 공은 나의 스승과 같은 존재였으며 그가 제창한 극동평화론(極東平和論)의 뜻을 지지하고 존경한다”고 말하고 안중근 의사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해 12월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李在明) 의사가 이완용을 습격했다. 이완용은 칼에 세 군데를 찔렸지만 목숨을 건졌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합방(合邦)을 앞당기기 위해 이완용과 대립관계에 있던 송병준(宋秉畯)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게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완용은 핵심 측근 이인직(李人稙)을 통해 “현 내각이 와해되어도 이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면서 일본에 합병을 먼저 제의했다. 송병준과 친일 경쟁을 하던 그가 선수를 친 것이다. 통감부마저도 “그물도 안 쳤는데 물고기가 뛰어들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합병조약문에서 이완용은 “국호 한국과 황실의 왕 칭호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제는 국호는 조선으로 변경했지만 순종에게 ‘이왕(李王)’, 고종에게 ‘이태왕(李太王)’이라는 칭호를 주고 한국 황실을 일본 황족에 준해 예우하기로 약속했다.
 
  1910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어전회의를 열어 한일병합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통감부 관사로 찾아가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와 조약문에 서명했다. 조약체결 후 이완용은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伯爵)의 작위와 퇴직금 1458원 33전, 총독부의 은사(恩賜)공채금 15만 원을 받았다.  
   
  3·1운동 당시 ‘경고문’ 발표
 
  1912년 이완용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올랐다. 일제하에서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다. 이완용은 ‘일선융화(日鮮融化)’를 내세우며,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권장하는 동화정책에도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가 그를 찾아가 독립선언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했다. 오히려 당시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편지를 보내 탄압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완용은 1919년 3월 28일에 쓴 친필 편지에서 “수습방책은 내선인동화(內鮮人同化)에 있습니다. … 먼저 조선인들에게 국어(일본어)를 보급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
 
  더 나아가 이완용은 조선 민중을 상대로 “조선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몰각한 망동으로서 이를 자각하지 못하면 강압책을 쓸 수밖에 없다. 한일합방은 조선 민족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이다. 일본과 조선은 한 뿌리로서 민족자결주의는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경고문까지 발표했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백작에서 후작으로 올려주었다. 1923년에는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이 되었다. 1924년에는 그의 아들 이항구(李恒九)도 남작(男爵)이 돼 보기 드문 부자귀족(父子貴族)이 되었다. 이완용은 일제에 협력한 공으로 막대한 부(富)도 누렸다.
 
  이완용은 1926년 폐병으로 69세에 삶을 마감했다. 장례식은 일본인, 조선인 합쳐 50명의 장례위원이 엄수했고 장례 행렬의 규모는 고종 황제 장례 행렬을 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이 된 이후에도 친일파 박중양(朴重陽)은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했다. 그는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에 항거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고 국난을 당하여 분사(憤死)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사상계의 자극은 될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일 뿐이다”라면서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고 변호했다. 근래에 나온 ‘애국과 매국의 두 얼굴’이라는 부제(副題)가 달린 《이완용평전》은 “지금까지 우리는 탐욕스럽고 패륜적이며 배은망덕한 인간 말종이라는 ‘그럴듯한 매국노 이완용 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삿대질을 하면서 망국과 매국의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겨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명수의 《일당기사》에는 이완용의 인생관이 기록되어 있다. “나(이완용)는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 갑오경장 후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露黨)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에는 … 일파(日派)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망국의 책임을 이완용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고종의 정치력 부족, 민비와 대원군의 이전투구(泥田鬪狗), 척사 세력과 개혁 세력의 투쟁과 분화, 조선사회의 경직성과 부실한 근대화 개혁 등등 구한말 조선에 망국의 총체적 책임이 있다. 이완용이 총리대신으로서 ‘자진해서’ 일제에 협조하여 망국에 마침표를 찍는 선봉장의 역할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이완용은 ‘매국노’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다. 자신이 고백한 ‘천도와 변역’ 그리고 이러한 인생관에 따른 기회주의적 행적은 정치적 변신을 거듭했던 양아버지 이호준으로부터의 학습효과와 자기최면의 결과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출처] : 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 서희외교퍼럼 대표: <인물로 본 한국외교사> / 월간조선         



​26.(끝). 이승만(李承晩) - ‘외교를 통한 독립’ 추구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시절의 이승만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한국 최초의 미국 박사이자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初代) 대통령으로 미국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로 보고 외교활동에 진력했다. 이러한 그의 독립외교론은 무장투쟁 노선과 대립했다. 해방 공간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주도했으나 일부에서는 그에게 분단과 친일파 청산 실패의 책임을 묻는다. 대한민국 1~3대 대통령을 지냈지만 장기집권과 부정선거 등 부정적인 그림자도 따라다닌다. 오늘날까지도 그를 둘러싸고 ‘국부(國父)’와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이승만은 청년시절에 서구의 물결이 쇄도하고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1895년 4월 단발(斷髮)을 결행하고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이승만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徐載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이승만은 후에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배재에 갔는데 서재필로부터 영어보다 더 중요한 민주주의를 배웠다”고 회고했다.
 
  언변과 행동력이 뛰어났던 그는 서재필이 만든 청년단체인 협성회(協成會)에 참가해 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1897년 졸업 후 협성회가 독립협회(獨立協會)로 발전하자 협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과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해 언론인으로서도 주목을 받았다. 그의 논조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 한다는 혐의도 받게 됐다. 얼마 안 가 그는 고종퇴위 운동에 가담한 죄로 체포되어 수감됐다.  
   
 
대한제국의 밀사
 
  이승만은 수년 동안의 옥중생활을 하면서 한영사전을 정리하고 동료 죄수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면서 개화 인사들을 교육했다. 1904년 러일전쟁 개전 후에는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예견되자 고종은 미국에 국권 보존을 위해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이 영어를 잘하는 이승만을 특사(特使)로 천거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했으나 이승만은 고종을 알현하지 않고 미국행(行)에 올랐다. 그는 고종을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1905년 1월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한국에 왔던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상원의원 딘스모어와 국무장관 존 헤이와 면담하였다. 헤이 장관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으나, 헤이 장관은 얼마 후 사망했다.
 
  이승만은 호놀룰루 한인 선교부의 존 와드먼 박사를 통해 태프트와 접촉, 그의 추천장을 받아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居中調整) 조항에 따라 대한제국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루스벨트는 “외교적인 일이므로 문서를 국무부에 공식 절차를 거쳐 제출하면 조선 문제를 포츠머스 회담의 의제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승만은 당시 주미공사인 김윤정(金潤晶)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외면당했다. 미국은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조선과 필리핀 교환에 합의한 뒤였기 때문이다. 20여 년 후 밀약의 진실을 알게 된 이승만은 미국에 대한 외교적 노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국 최초의 미국 박사 



이승만은 프린스턴대에서 미국의 전시중립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밀사 활동에 실패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1907년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10년 마침내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d)〉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논문은 1776년부터 1872년까지의 국제법상에서의 전시(戰時) 중립을 다룬 것이었다.

이승만의 전공은 국제법, 부전공은 미국 역사와 서양사였다. 1910년 이승만은 후에 미국 대통령이 되어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하는 윌슨(T. W. Wilson) 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은 5년 반 만에 학사, 석사, 박사를 모두 마치고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가 된 것이다.
 
  미국에서 박사가 된 후 귀국한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일제의 압박을 받자, 1912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옥중에서 만났던 박용만(朴容萬)의 도움으로 1913년 하와이로 가게 된다. 그는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서구 열강 특히 미국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독립외교론을 주장했다. 이때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는 박용만 등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윌슨 대통령은 1918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국제연맹 창설을 제의했다. 이승만은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 이승만은 그와의 인연에 기대가 컸으나 당시 일본은 승전국이었던 관계로 한국 문제는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1920년 12월 28일 상하이에서 열린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부임 환영식. 오른쪽 두 번째부터 신규식 박은식 안창호 이승만 이동휘 이시영 이동녕 손정도


  이듬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이 운동이야말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침 3월에 수립된 노령(露領) 임시정부가 그를 외무총장으로 임명하고, 4월에는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 임시정부가 그를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일제는 이승만에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는 6월부터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일본 등의 국가원수들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 이어 국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선언서’를 발표하고, 워싱턴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그리고 구미위원부를 만들어 ‘대한민국 공채표’를 발행해서 거둔 의연금을 상하이에 소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하기도 했다.
 
  1919년 9월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인국민회, 서울의 한성정부 등은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로 하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했다. 이승만은 통합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그의 외교론과 민주제는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이동휘, 여운형(呂運亨) 등과 대립했다. 신채호(申采浩)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李完用)보다 더한 역적이다”고 비판했다.
 
  이승만은 1919년 10월부터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공화국’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고 다녔다. 상하이 임정에서는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돌아오라는 서한을 여러 차례 보냈다. 그는 마지못해 1920년 12월 처음으로 상하이에 잠시 건너왔다가 1921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될 군축회의 참석차 미국으로 돌아가 활동했다. 그러자 1925년 3월 임시정부 의정원은 상하이로 돌아오지 않는 이승만을 탄핵, 대통령 직을 박탈했다.
 
  1920년대 후반 들어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임정의 김구(金九)는 고민 끝에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자금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교민들의 성금 일부를 임시정부에 송금해 주면서 임정과의 관계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1932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의해 국제연맹 한국 전권대사로, 1933년에는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어 탄핵당한 지 8년 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하게 된다. 임정 일각의 반대가 없지 않았지만 그의 외교적 역할도 크다는 이동녕(李東寧), 김구 등의 주장이 반영됐다.  
   
 
태평양전쟁과 임시정부 승인 외교
 
  이승만은 임정의 각료 자격으로 국제연맹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한국의 독립외교를 전개했다. 이러던 중 1933년 2월 한 식당에서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나 후에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다.
 
  이승만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기 이전인 1941년 6월,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장차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될 것임을 예견한 《일본을 벗기다,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를 발간했다. 이 책이 출간될 당시에는 혹평이 쏟아졌다. 6개월 후 12월에 실제로 진주만 공격이 일어나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의 명성도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
 
  이승만은 전후(戰後)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야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정부에 로비를 하기 위해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조직하여 국무부와 접촉하는 한편, 임정과 연락해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하도록 했다.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국무부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 국무부 장관 코델 헐 등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공한을 전달하였다.
 
  1942년 1월,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에서 주목받던 알저 히스(Alger Hiss)와 면담하고 소련이 장차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일본을 상대로 한 대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한 무기원조를 요청하였다. 히스와의 면담은 실수였다. 히스는 후에 소련 첩자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그 뒤에도 계속 미국 측에 임시정부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왜 미국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것인가? 당시 중국에는 임시정부 이외에도 러시아와 연계된 사회주의 노선, 그리고 마오쩌둥의 공산당과의 연합 등 중국과 러시아 여러 방면에서 독립운동이 각자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승만의 요청을 접한 미국은 우선 중국 충칭(重慶) 소재 미국 대사관에 현황 파악과 현지 의견을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미 대사관은 정보가 많은 영국 대사관과 중국 국민당 정부에 문의했다. 영국은 “한국인 간에 상당한 분열이 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효과적 저항 가능성은 적다”고 답신했다.

당시 영국 외무부의 보고서도 “해외의 한인단체는 그들의 힘을 전적으로 상호 알력에 소모하고 있으며 일본이 물러가면 싸움이 천 배로 증가할 것”이라고 적고 있다. 중국 정부도 “한국인 간 정치적 분열이 있으며, 반일 행동은 유용하지만 파벌 해결 전에 한국해방 운동의 승인은 불가하다”면서 “중국의 거중조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충칭의 미국대사는 이러한 회신을 본국에 보고하면서 “미국이나 중국이 임정을 승인하면 시베리아 거주 한국인 2개 사단이 한국으로 진격해 별도 정부를 수립할 가능성이 있고 … 소련의 한반도 점령 우려도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첨가했다.
 
  내부 검토를 마친 미국정부는 이승만에게 “한국인 단체 간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고 해외단체와 본국 대중 간의 관계가 미비하여 임시정부를 승인할 수 없다”고 회신했다. 계속된 치열한 항일투쟁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열이 미국과 연합국으로 하여금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카이로선언의 진실은?
 
  전후 한국의 독립문제가 표류하는 가운데 1943년 11월 27일 한국독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카이로선언이 나왔다.
 
  “한국인들의 노예 상태를 유념하여,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한국을 자유로운 독립국가로 수립할 것을 결의한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총리,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공동으로 발표한 이 선언은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된 역사적 선언이다.
 
  이 선언이 최근 들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카이로선언에 한국독립 문구가 들어간 것이 누구의 공로인가 하는 점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크게 장제스가 주도했다는 의견과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작성했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본질은 김구 등 임시정부의 공이냐, 이승만 외교의 덕이냐의 문제로 다투는 것이다.
 
  김구-장제스 설은 1943년 4월 미국과 영국이 전후 한국을 국제공동 관리하에 두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한 김구 등이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를 찾아가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창해 달라고 요청했고, 장제스는 한국 독립을 위해 미국과 영국에 힘껏 싸우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이승만-홉킨스 설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한국 독립을 제기했다는 근거가 없으며, 루스벨트의 전후 식민지 독립 구상에 따라 그의 측근 해리 홉킨스가 독자적으로 작성한 문안이라는 것이다. 장제스는 공식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거론한 적이 없고, 오히려 장제스와 단독 회담한 루스벨트가 처칠에게 ‘그의 목적은 한국의 재점령’이라고 밝힌 기록을 제시하고 있다.
 
  해리 홉킨스와 카이로선언과의 관계, 이승만과 홉킨스의 연관성 등은 아직 더 연구해야 할 분야이다. 다만 홉킨스가 독실한 감리교 신자로 이승만도 미국 감리교단에 많은 지원자를 갖고 있었고, 의회에도 감리교 출신의 의원들이 있어 이들과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홉킨스의 연결 개연성은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카이로선언에 한국 조항이 들어가게 된 것이 누구의 공로이냐를 주장하기 이전에 미국의 정책결정 과정을 살펴보아야 그 전모가 파악된다는 점이다.  
   
 
신탁통치는 대륙세력에 대한 ‘안전벨트’ 


카이로회담에 참석한 3거두. 왼쪽부터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오른쪽 끝은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


  1941년 8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있기 4개월 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총리는 대서양헌장을 통해 피(被)침략국의 민족자결을 명시하고 통일된 경제제도와 국제기구 유엔 창설을 시사하는 전후 국제정치경제 신질서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이 구상에서 식민지는 국제기구가 관리한다는 데에도 합의가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루스벨트와 처칠은 1943년 1월 카사블랑카에서 스탈린과 회동하여 대서양헌장에 대한 그의 동의를 받아내려 했다. 이를 눈치챈 스탈린이 불참하자 2개월 후 3월, 루스벨트와 처칠은 카이로에서 장제스와 먼저 회동해 전후 문제를 논의하고 만주의 중국 반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등에 합의했다. 이 합의는 전쟁과 전후 질서 창출에 주도권을 쥔 미국의 정책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이 회의를 준비한 〈미국 국무부자문위원회 한국보고서〉(1942년 8월)에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주로 루스벨트의 세계관과 한국에 대한 인식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소련의 남하 저지가 1차 목표이고, 일본 통제가 2차 목표로 설정되어 있다. 이를 위해 만주는 중국에 반환하고 한국은 관련국이 신탁통치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신탁통치안은 대륙세력에 대한 ‘안전벨트’라고 그 의미까지 부여되어 있다.
 
  이는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필리핀에 대한 인식이 한국에 접목되면서 한국도 독립시키기 전에 40여 년 정도의 자치기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카이로선언문에 나타난 ‘적절한 절차를 밟아서(in due course)’라는 단서와 관련해 이승만은 미국 측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히 밝혀줄 것을 요구했으나, 미국정부로부터는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했다. 이 문구가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밝혀지는 것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였다.  
   
  이승만의 무장투쟁 계획
 
  ‘외교독립론자’로 알려진 이승만은 흔히 무장투쟁을 배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후 이승만은 전후 독립을 위해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연합군과 합동작전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는 대일 무장투쟁이 충칭의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일본군과 싸울 한인 전투부대를 창설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미국의 소리(VOA)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했다.
 
  이와 함께 이승만은 미군 정보조정국(COI)에 재미 한인들의 독립적인 특수부대를 창설해서 일본 전투에 투입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미군과의 연결은 나중에 그 기구의 중국 책임자가 된 에슨 맥도웰 게일과 알게 되면서 성사되었다. 게일은 이승만이 한국에 있을 때 아주 가까이 지내던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조카였다. 게일을 통해 이승만은 그 기구의 책임자인 도노번과 프레스턴 굿펠로 대령과도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1941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열린 여러 차례의 정보조정국 회의에도 직접 참석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미국 육군의 전략정보처(OSS)는 ‘독수리계획’이나 ‘냅코(NAPKO)계획’과 같은 특수유격훈련 계획을 마련하고 훈련을 마친 한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진공(進攻)하는 작전을 세웠다. 독수리계획은 중국에 있는 광복군 소수정예를 공수부대처럼 한반도에 침투시키는 것이고, 냅코계획은 미국 하와이의 한인을 한반도와 일본에 침투시키는 것이었다. OSS는 이들 계획을 집행하기 위해 광복군 안에 한미합동지휘부를 세웠다.
 
  또한 이승만은 1944년 7월, 미국 체신청에 태극마크가 들어 있는 우표를 공식 발행해 주도록 교섭해 11월에 미국정부가 한국인의 대일항전을 기념하기 위해 5센트짜리 태극우표를 발행했다.⊙
   

[출처] : 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 서희외교퍼럼 대표: <인물로 본 한국외교사> /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