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의 본 모습 시간이 보여준다]
사망 50년 맞은 체 게바라의 진실 - ‘그는 사이비 혁명가였다’
⊙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의대 졸업생 명부에는 체 게바라 이름 없어
⊙ 쿠바혁명 후 정치범수용소 ‘라 카바냐’ 소장으로 정치범·양민 학살
⊙ 체포될 때 권총에 총탄 가득… “쏘지 말라”고 외치며 투항
2017년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체 게바라(본명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1928~1967)가 사망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 태생인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에서 정부군에게 사살됐다.
이후 체 게바라는 ‘혁명과 반항의 아이콘’으로 부활했다. 베레모를 쓰고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체 게바라의 얼굴을 담은 티셔츠는 널리 알려져 있다. 체 게바라의 모습을 담은 여성용 속옷도 있다.
한국에서도 체 게바라는 인기 상품이다. 인터넷 교보문고에 들어가서 ‘체 게바라’를 검색어로 해서 쳐 보면 72건의 서적이 검색된다(e-북 포함). 10여 년 전 베스트셀러였던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부터 《체 게바라 자서전》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체 게바라 어록》 등이다.
공산주의 혁명가였던 체 게바라와는 어울리지 않게 《체 게바라식 경영》이라는 책도 있다. 청소년이나 어린이용 체 게바라 전기들도 여럿 나와 있다. 《체 게바라-불가능을 꿈꾼 혁명가》 《체 게바라와 랄랄라 라틴아메리카》 《총을 든 의사 체 게바라》 같은 책들이다.
국내에 나와 있는 체 게바라 관련 책들. 어린이용 위인전도 여럿 있다.
이런 책들은 체 게바라를 ‘혁명의 성자(聖者)’로 추앙하는 책들이다. 의사라는 안정된 미래를 포기하고 고통받는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을 위해 혁명운동에 투신했던 휴머니스트, 가는 곳마다 승리했던 상승(常勝)의 게릴라 지휘관, 쿠바혁명에 성공한 후에는 육군 대장, 산업부 장관, 중앙은행 총재라는 자리를 박차고 밀림으로 들어간 무욕(無慾)의 혁명가, 그리고 볼리비아의 산악지대에서 미(美)제국주의자들과 그 주구(走狗)인 볼리비아 군대에 쫓기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혁명의 순교자,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 “우리 시대의 예수”라고 찬탄했던 인간….
체 게바라는 정말 그런 사람이었을까?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어려서부터 모범으로 삼을 만한 훌륭한 사람이었을까?
의대 졸업생 명단에 체 게바라는 없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의사라고 알려져 있다. 장 코르미에는 《체 게바라 평전》에서 〈스물다섯 살의 생일을 이틀 앞둔 날,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카를로 A.반카랄리 교수의 서명이 든 의학박사 학위기를 수여받았다〉고 했다.
《체 게바라의 진실을 폭로한다(Exposing the Real Che Guevara)》를 쓴 훔베르토 폰타바는 체 게바라가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에서 의학 학위를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의대 졸업생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체 게바라 자신도 볼리비아에서 체포되었을 때, 자기가 의학 공부를 한 적이 있고 의학 지식이 있기는 하지만 의사 면허를 가진 적은 없다고 실토했다고 한다.
쿠바의 ‘보천보 전투’
게바라가 바티스타 정부군에게 승리했다는 쿠바 산타클라라에 세워진 체 게바라의 동상.
체 게바라는 알려진 것처럼 ‘게릴라전의 천재’도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58년 12월의 산타클라라 전투다. 쿠바혁명 성공 전야에 펼쳐진 이 전투에서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들은 바티스타 정부군이 보낸 장갑열차를 탈취하고 이어 산타클라라를 함락시켰다. 장 코르미에는 체 게바라의 회상을 이렇게 인용한다.
〈12월 30일, 우리는 정부군의 산타클라라 본부와 장갑열차 간의 교신을 단절시켰다. 적군들은 카피로 언덕 위에서 포위된 걸 알자 철로를 통해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그 육중한 덩치 때문에 장갑열차들은 끊어진 철로 위에서 탈선하고 말았다.
이윽고 보기 드문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탈선된 객차들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면서 다가오는 반군들에 의해 기차는 포위되었고, 그 단단한 몸체 때문에 기차 안에 탄 정부군들은 뜨거운 화덕 안에 갇힌 꼴이 되어 버렸다. 결국 기차 스물두 량에 가득 타고 있던 병사들은 화기와 막대한 양의 군수품을 가지고 우리에게 투항했다.〉
이듬해 1월 4일 자 《뉴욕타임스》는 “산타클라라에서 게바라가 지휘하는 혁명군이 바티스타 정부군 3000명을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물리쳤다”고 보도했다. 이와는 다른 증언도 있다. 체 게바라는 전투를 통해 열차를 탈취한 것이 아니라 ‘매수(買收)’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당시 열차를 산타클라라로 보낸 정부군 대령은 체 게바라로부터 35만 달러(혹은 50만 달러)를 받고 열차와 탄약을 팔아넘긴 후 마이애미로 도주했다는 것이 훔베르토 폰타바의 주장이다. 〈
열차가 나타나자 게릴라들은 사격을 가했고 정부군도 응사했다. 게릴라 병사들이 백기를 들고 열차에 접근했고, 체 게바라는 열차의 지휘관에게 “이게 무슨 짓이야? 약속한 것과 다르단 말이야”라고 야단을 쳤다〉고 폰타바는 말한다.
이 전투에서의 사망자는 민간인 2명, 게릴라 2~3명에 불과했다. 전투(?)가 끝난 후 체 게바라는 열차에 불을 지르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물정 모르고 카스트로의 혁명군에 호의적인 서방언론들에 널리 배포됐다.
위의 《뉴욕타임스》 보도도 그래서 나왔다. 그들은 레닌이 말한 ‘쓸모 있는 바보(useful idiot)’였다. 언론에 의해 실체보다 부풀려졌고 ‘전설적인 영웅’을 하나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산타클라라 전투는 쿠바판 ‘보천보 전투’였다.
무능한 게릴라 지휘관
쿠바 아바나의 내무부 건물 외벽에 있는 체 게바라의 형상.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내무부는 쿠바 비밀경찰 본부이기도 하다
산타클라라 전투 이외에 체 게바라가 승리한 전투는 없다는 것이 훔베르토 폰타바의 주장이다. 훗날 콩고나 볼리비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체 게바라는 실패를 거듭했다. 체 게바라의 전기들은 대부분 그 원인을 현지 흑인 혹은 인디오들의 혁명의지와 전투역량의 부족에서 찾는다.
하지만 체 게바라 자신이 게릴라 지휘관으로서는 부족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볼리비아로 들어가면서 체 게바라는 “현지 언어를 알아야 게릴라전을 할 수 있다”면서 안데스 인디오들이 주로 사용하는 케추아어를 익히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그가 활동을 벌인 지역의 인디오들은 쿠아라니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자기가 작전을 벌일 지역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다는 것은 ‘게릴라는 물고기고 주민들은 물’이라는 게릴라전의 기본 상식을 망각한 행위였다. 그 이전에 체 게바라는 독도법(讀圖法)조차 모르는 인물이었다.
체 게바라의 이름으로 된 게릴라전 저작들은 스페인내전에 참가했던 알바르토 바요의 작품이었다. 쿠바혁명 이후 쿠바에 만들어진 게릴라학교의 실질적인 교장이었던 그는 《모든 게릴라가 알아야만 하는 150가지 원칙》이라는 책도 썼다. ‘체 게바라 신화 만들기’ 과정에서 바요의 교리들은 체 게바라의 것으로 둔갑했다.
포로 학살
무엇보다도 체 게바라는 휴머니스트가 아니었다. 장 코르미에는 산타클라라 전투 후, 부하들이 게릴라 지휘관 바케리토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포로가 된 정부군 중위 한 사람을 처형하겠다고 하자 체 게바라는 “자네는 우리가 그들과 똑같다고 생각하나?”라고 말했다고 했다.
하지만 훔베르토 폰타바는 체 게바라가 장갑열차를 탈취한 후 포로로 잡은 정부군 장병 27명을 ‘전범(戰犯)’으로 낙인찍어 처형했다고 한다.
1953년 1월 2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가 이끄는 피델 카스트로 휘하의 반군이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들어갔다. 이튿날 체 게바라는 아바나에 입성했다. 쿠바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이어 ‘적폐청산’을 위한 혁명재판이 시작됐다. 장 코르미에는 혁명재판을 바라보는 체 게바라의 인도적인 모습을 이렇게 기술했다.
〈체는 혁명이 성공한 이후 초기에는 카바냐 요새와 콜롬비아 병영을 왕복하며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다. 매일 그는 ‘로스 치비토스’, 즉 밀고자들이라 불리는 바티스타의 하수인들이 혁명재판소로 재판을 받으러 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체는 프란시스코회 신부를 대동한 종부성사를 마치고 사형당하는 사람들 중에 죄가 없는 사람들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래서 선한 신을 대표하는 신부의 별명이기도 한 ‘트레스 메디야스’는 기소된 자들이 그들의 고백보다 훨씬 많은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정기적으로 체에게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라 카바냐의 도살자
쿠바혁명에 성공한 후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카스트로는 반소련 발언을 일삼는 체 게바라를 부담스러워했다
장 코르미에는 여기서 체 게바라가 처형당해 마땅한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부역자(附逆者)들에 대해서조차 따뜻한 휴머니즘을 보여준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카바냐 요새’와 거기에서 체 게바라가 맡았던 역할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넘어가고 있다.
‘라 카바냐’라고 불렸던 ‘카바냐 요새’는 한마디로 카스트로 혁명정권의 비밀경찰 본부이자 정치범 수용소였다. ‘라 카바냐’라는 말은 러시아혁명 직후 설립되었던 체카(볼셰비키 혁명정권의 비밀경찰. KGB의 전신)와 같은 의미로 통했다.
이곳에서 체 게바라의 총살대는 바티스타 정권의 군인과 경찰은 물론이고 가톨릭 사제, 지식인, 일반 공무원, 양민들을 학살했다. 1970년까지 이곳에서 처형된 쿠바인은 1만4000명에 달했다. 당시 쿠바 인구는 640만명이었다. 체 게바라는 그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의 초대 소장이었던 것이다.
체 게바라는 ‘처형’을 즐겼다. 한 어머니가 체 게바라를 찾아와 반혁명죄로 체포된 10대 아들의 구명을 호소하자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 그 소년을 즉각 처형하라고 명령했다는 증언도 있다. 저항할 힘도 없는 사람들을 권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어린 소녀와 임신부를 직접 사살했다는 얘기도 있다.
훔베르토 폰타바는 피델 카스트로가 게릴라 지휘관으로서는 별다른 재능을 보여주지 못했던 체 게바라를 중용한 것도 그의 이런 잔인성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1957년 1월 정부군 스파이 혐의를 받은 게릴라 대원을 체 게바라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권총으로 쏘아 죽이는 걸 본 카스트로가 집권 후 소련에서와 같은 숙청을 할 때 체 게바라를 활용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는 것이다.
훗날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할 때 산속에서 조우한 농민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다. 그들이 정부군에 게릴라의 위치를 알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처형 이유였다.
체 게바라의 전기들은 그가 대학 시절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면서 밑바닥 민중이 겪고 있는 고통에 눈을 떠서 혁명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합창하고 있다. 이 시절의 경험을 적은 책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인데, 2004년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 책은 실은 쿠바공산당 선전선동부의 작품이다.
‘아바나 백작’
롤렉스 시계를 차고 아바나 시가를 피우는 체 게바라. 알려진 것과 달리 그는 서민적이지 않았다
민중의 고통에 공감한다던 체 게바라는 혁명이 성공한 후 요트 선착장과 폭포가 있는 커다란 수영장, 사우나와 마사지룸, 7개의 욕실이 있는 대저택에서 살았으며, 아바나 시가를 즐겨 피웠다. 때문에 비판자들은 그를 ‘아바나 백작’이라고 불렀다.
체 게바라는 롤렉스 시계만을 고집했다. 체 게바라의 숭배자들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변명한다. “체 게바라가 롤렉스를 애용한 것은 롤렉스가 정확하기 때문”이라고….
1965년 4월 체 게바라는 돌연 모든 공직을 던지고 사라진다. 장 코르미에는 《체 게바라 평전》에서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가 사라지자 기자들에게 “그가 혁명을 위해 자신이 가장 알차게 쓰일 곳에 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면서 “카스트로는 체를 찾았다”고 했다.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의 이별은 그렇게 아름다운 건 아니었다. 훔베르토 폰타바는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난 것이나 그가 죽은 데에는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소련의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소련에 의지해서 소련식 공업화를 달성하려 했던 카스트로로서는 소련에 비판적이고 중국에 호의적인 발언을 일삼는 체 게바라가 불편했다는 것이다. 체 게바라와 함께 콩고와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투쟁을 했던 다니엘 알라콘도 “카스트로는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죽어서 소련과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랐다”고 술회했다.
훔베르토 폰타바는 더 나아가 소련의 지시를 받은 볼리비아의 공산반군이 정부군에 체 게바라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체 게바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미국과 볼리비아 군부뿐 아니라 소련과 카스트로도 함께 나누어 져야 할 것이다.
권총에는 총알이 가득 남아 있어
게바라의 시신을 확인하는 미국과 볼리비아군 관계자들. 금년은 체 게바라가 사살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체 게바라의 최후도 알려진 것과는 달리 ‘혁명의 순교자’답지 못했다. 장 코르미에는 체포되는 순간의 체 게바라의 모습을 이렇게 기술했다.
〈군인들이 일제사격을 시작하고 체는 오른쪽 장딴지 아래에 총을 맞는다. 응사를 하지만 그의 M-1 소총에 총알이 관통하면서 고장이 난다. 체는 얼른 연발 권총을 빼들지만 더 이상 총알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단검뿐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두 사람은 고원까지 간다. … 그때 정찰 중인 군인들 셋은 아래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본다.
그림자 하나가 흔들리고 절뚝거리며 다른 그림자에 의지하고 있다. 총을 지팡이 삼아 땅을 짚으며 기어오르고 있다. 그림자는 여전히 흐릿하다. 체 게바라 대장이 다가온다. 하지만 군인들은 아직 그가 게바라라는 것을 모른다. 이렇게 해서 쿠바인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게릴라 영웅, 세계에서 가장 두려운 혁명가인 그가 곧 적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볼리비아 군부의 기록과 쿠바 출신 미국 CIA요원 펠릭스 로드리게스의 증언은 다르다. 체 게바라가 버린 권총에는 실탄이 가득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체 게바라는 포위망이 좁혀지자 권총을 버리고 두 손을 들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쏘지 마라. 나는 체 게바라다. 내가 죽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것이 당신들한테 더 가치가 있을 것이다.” 미국과 볼리비아 군부는 체 게바라와는 생각이 달랐다. 체 게바라는 체포된 날 오후 볼리비아군에 의해 사살됐다. 나이 39세 때였다.
‘인간’에 대한 배려 부족
체 게바라의 실체를 고발한 훔베르토 폰타바의 《체 게바라의 진실을 폭로한다》.
훔베르토 폰타바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체 게바라에 대한 성인(聖人) 숭배는 여전하다. 폰타바의 주장은 그의 집안이 혁명 전 바티스타 정권의 ‘부역자’였으며 그의 가족이 혁명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되고 있다.
어쩌면 폰타바의 주장은 정말로 ‘망명자’의 감정이 섞인 과장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유에서 체 게바라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체 게바라가 쿠바 중앙은행 총재로 일할 때였다. 32층짜리 쿠바 중앙은행 건물을 신축하기로 했을 때 체 게바라는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32층 건물에 무슨 엘리베이터가 필요한가? 천식을 앓는 나도 시에라마드레산맥을 넘나들며 게릴라전을 했다. 그런 내가 계단을 이용하겠다는데 건강한 사람들이 못 할 이유가 뭔가?”
그는 화장실도 당초 설계보다 반으로 줄이라고 요구했다. 체 게바라는 자신의 치열한 혁명가적 열정과 헌신을 보통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요구했던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혁명가로 살 수는 없다는 것, 아니 그 이전에 사람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끔찍한 독선이고 아집이었다. 그걸 남에게 강요하는 것, 그것이 바로 ‘독재’였다. 체 게바라는 프랑스혁명 때 자코뱅이나 그 이후 볼셰비키, 중국공산당,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처럼 ‘추상적 인간’을 사랑하면서 ‘이상(理想)’은 추구했을지 몰라도, 현실 속에서 ‘일상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일상을 영위해 나가는 ‘구체적 인간’에 대한 배려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체 게바라는 ‘반혁명분자’들이나 볼리비아의 산속에서 만난 무고한 양민들을 주저 없이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출처] :배진명 월간도선 기자 <좌파의 본 모습 시간이 보여준다> 사망 50년 맞은 체게바라의 진실'그는 사이비 혁명가였다' / 월간조선
[출처] 사망 50년 맞은 체 게바라의 진실 - ‘그는 사이비 혁명가였다’ |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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