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세상☆/♡세상이야기♡

101세 현역 김병기 화백의 회고 『한 세기를 그리다』Ⅴ

문수봉(李楨汕) 2017. 12. 11. 19:39
커리커쳐 박재동·제목 김병기 친필
101세 현역 김병기 화백의 회고 『한 세기를 그리다』Ⅴ



『101세 현역 김병기 화백의 회고-한 세기를 그리다 』를 더 보시려면 아래 포스트를 클릭하세요


『101세 현역 김병기 화백의 회고-한 세기를 그리다 』Ⅰ http://blog.naver.com/ohyh45/220963434853

『101세 현역 김병기 화백의 회고-한 세기를 그리다 』Ⅱ http://blog.naver.com/ohyh45/220963801374

『101세 현역 김병기 화백의 회고-한 세기를 그리다 』Ⅲ http://blog.naver.com/ohyh45/221038551077

『101세 현역 김병기 화백의 회고-한 세기를 그리다 』Ⅳ http://blog.naver.com/ohyh45/221095507199

『101세 현역 김병기 화백의 회고-한 세기를 그리다 』Ⅴ http://blog.naver.com/ohyh45/221151030631

 




41.20여년 만의 귀국전 -  “20여년 만의 귀국 감격도 잠시 서울은 최루탄 눈물바다”


1985년 12월 윤범모 ‘우연한 방문’  -  “겨울여행 도중 새러토가 지나다 들러”
일주일간 머물며 밤샘 구술녹취  - “은거 20년 만에 ‘증발 화가’ 발견”
곧바로 서울로 전화해 전시 주선 - 1986년 5월 가나화랑 ‘첫 귀국전’
“대성공 자평…일부는 실망 눈치도”  - 예전 ‘추상성’ 더 강화 기대한듯

전시 호응 덕분에 ‘전국여행’ 감회 - 1987년 설악산·경주·제주도…
“인사동 옥상에서 ‘인왕제색’ 그려”  - 민주화 시위대 붉은 머리띠 ‘차용’

조국 분단풍경 ‘산하재’ 연작으로  - “내 고향 강서 고분벽화 떠올리며” 

1985년 연말 필자 윤범모에게 ‘우연히 발견’된 김병기는 햇수로 22년 만인 1986년 마침내 한국 화단에 복귀했다. 귀국 첫 개인전의 호평 덕분에 자주 한국을 방문하게 된 김병기는 1987년 서울 인사동 가나화랑 옥상에서 ‘인왕산’을 그리던 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지러운 빌딩 숲과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는 군부정권의 최루탄 가스에 눈물을 흘리며 그려야 했기 때문이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오마주한 <인왕제색>(사진)에 남대문의 단청색이자 시위대의 머리띠에서 영감을 받은 붉은색이 주조로 쓰인 연유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떠 있는 뉴욕시를 빠져나와 방향도 없이 캐나다 쪽의 고속도로를 달린 적이 있다. 맨해튼은 록펠러 센터의 장식등처럼 다소 음산하게 또 한편으로는 광란에 가깝게 저무는 한 해를 새삼스럽게 반추하고 있었다. 4시간가량 어둠을 헤치고 질주할 무렵, 핸들을 잡은 재미화가 김차섭씨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새러토가를 지나고 있군….’ ‘아, 새러토가. 김병기 화백이 칩거하고 계신 곳….’ 뚜렷한 목적도 없이 출발했던 겨울여행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망설임조차 없이 우리는 행선지를 바꾸었다. 자정 가까운 시각에 우리는 함박눈으로 덮인 한 적막 속의 아담한 집으로 인도되었다.

노화가와 필자의 만남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그날 밤 우리는 창밖이 환해질 때까지 철야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밤새 대화를 나누었다. (…) 새로운 세계를 찾아 안락한 보금자리를 떠났다. 이러한 결심은 드디어 ‘미국으로의 증발’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물론 그 뒤로 국내에서 그의 존재는 서서히 망각의 늪 속으로 잠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여년, 고국을 떠난 뒤 단 한 번의 방문조차 용인치 않고 ‘자기 세계’와 겨루던 그는 어느덧 70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번 서울 전시를 주선하면서 필자는 노화가에게 구김살 없고 신념에 가득 찬, 때로는 예술에 대한 그리고 조국에 대한 편애에 가까우리만큼의 열정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기도 했다.” (윤범모, ‘20여년 만의 귀향’, 김병기 개인전 도록, 가나화랑, 1986년) 

삼성의 호암갤러리 큐레이터를 거쳐 1985년 미국 뉴욕대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전공 중이던 윤범모(왼쪽)는 뉴욕주 북부 새러토가의 김병기(오른쪽)를 찾아가 1주일간 머물며 ‘70년 인생사와 20여년 은둔사’를 처음으로 녹취했다. 김병기가 60년대 후반 살았던 ‘유령의 집’도 함께 답사했다.



정말 그랬다. 1985년 겨울의 새러토가는 하얀 눈 속에서 뜨거운 열정을 반추하게 했다. 김병기 화백과의 만남. 첫 만남 이후 나는 혼자 새러토가를 다시 찾아가 일주일가량을 머물며 화백의 일대기를 녹취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였다. 또렷한 기억력과 풍부한 표현력,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그것은 미술문화계의 중심에서 활동한 증언의 사료적 가치였다. 미시사의 극치였다. 그때 화가가 살던 링컨 애비뉴의 저택 한편에는 칩거의 산물, 즉 ‘미공개 작품’이 쌓여 있었다.

나는 그림을 하나하나 보면서 제작에 얽힌 뒷이야기를 들었다. 그 작품들을 서울에서 발표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화백은 이런 말을 들려주기도 했다. ‘서울의 제자나 후배가 새러토가까지 찾아온 적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왜 미국 외딴곳에서 은둔하고 있느냐’면서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큰소리일수록 실망으로 남게 했다.’ 몇 차례의 실망을 겪은 이후 이제 서울에서 화가가 온다면 걱정부터 든다고 했다. 이런 감회 뒤에 남는 씁쓸한 표정,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화백의 집 전화로 서울 가나화랑으로 연결했다. 그렇게 하여 20년의 칩거 생활을 접고, 김병기는 서울 화단과 다시 연결되었다. 1986년 5월의 귀국 개인전. 실로 감격스러운 자리였다. 


윤범모 기획으로 1986년 5월23일부터 31일까지 서울 관훈동 가나화랑에서 열린 22년만의 귀국 개인전 <김병기 작품전> 도록의 표지

 



1986년 귀국 첫 개인전 <김병기 작품전> 도록에 실린 김병기의 사진과 프로필. 오른쪽 작품은 <깊은 골짜기를떠나오다>(1971년)의 부분도이다.
 



1986년 5월 70살 김병기의 귀국과 첫 개인전은 ‘은둔 화가의 복귀’라는 화제 속에 주요 언론의 관심을 모았다. ‘김병기옹’ ‘원로서양화가’로 소개한 <동아일보> 5월21일치 기사


―20년 만의 귀국 개인전 소감은?


“만 20년이 넘어 귀국하니 얼마나 감동적이었겠는가. 살아생전 서울 구경이라도 다시 할 수 있을까, 거의 포기 상태에서 ‘윤범모의 발견’ 덕분에 고국 땅을 밟으니 가슴이 벅차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나화랑에서의 개인전은 대성공이었다고 자평하고 싶다. 금의환향이라는 단어는 쓰고 싶지 않지만. 다만 현대미술 운동을 하던 화가들은 내 개인전을 보고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극단적 추상화를 기대하고 전시장에 왔으나, 내 작품은 비형상을 거친 형상성의 그림이었다. 게다가 캔버스 그림이면서 물감을 진하게 칠하지도 않고, 거기다 여백같이 비어 있는 부분도 있어 ‘그리다 만 그림’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도미 이전의 그림은 전시 출품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완성도를 중요시 여겼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작품은 출품을 의식하지 않고 그렸기 때문에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이는 미완성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유화라 하면, 캔버스 전면을 물감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제작 방식도 하나의 고정관념에 불과했다. 아무튼 1986년의 서울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눈물을 많이 흘리게 했다.”




1986년 김병기의 귀국 첫 개인전에서 소개한 20여점 가운데 <헛간>(1973)은 50년대 후반 이화여대 미술반에서 그에게 그림 지도를 받은 인연이 있는 이명희 신세계백화점 회장이 소장하고 있다. 뒤늦게 미국 보스턴미술관 쪽에서 이 작품과 똑같이 그려달라고 주문했지만 김병기는 ‘자기복제를 하지 않는다’는 소신에 따라 거절한 일화도 있다


​“동포들과 함께 목욕하는 즐거움을 그대는 아는가//

이십여 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노화가의 상기된 표정//

서울 도착 직후부터/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줄기찬 눈물/

가는 데마다 흘려야 했던/

그 눈물//


살아생전 다시 밟을 수 없을 거라고 체념했던/

고국 땅/

이십여 년 만에 다시 찾았으니/

그까짓 눈물쯤 흘리지 않을 수 있겠나/

하지만 부끄러웠지/

눈물의 원천은/

고국 방문의 감동 때문이 아니라/

서울 시내를 감싸고 있는/

최루탄 가스 때문이라는 것을//

서울을 거쳐/

고향인 평양까지 여행하는 것이/

마지막 꿈인 노화가의 눈/

아직도 붉게 충혈되어/ 맨하튼의 어둠을 물들인다”

(윤범모 시집 <불법체류자> ‘눈물’, 열화당, 1988년)




1985~87년 뉴욕 유학시절 3년간의 미국 체류 경험을 담은 시집 <불법체류자>(1988년·열화당)에서 윤범모는 김병기의 귀국 소회를 ‘눈물’이란 작품으로 표현했다



―첫 귀국 개인전 이후 한국 방문 기회도 늘고 체류 기간도 점점 길어졌다.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가나화랑 전시에서 그림이 제법 팔린 덕분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내는 내 손을 잡으면서, ‘이 손이 돈을 다 만들 수 있다니!’ 하면서 놀라워하기도 했다. 나는 설악산, 경주, 제주 등 여행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조국의 풍경을 화면에 담으니 새로운 감회가 샘솟았다.


인사동(관훈동) 가나화랑 12층 테라스에서 보이는 인왕산 풍경을 그렸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仁王霽色)을 염두에 두면서 나만의 <인왕제색>(1988,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을 그렸다. 비 온 뒤의 청신한 바위산의 모습, 인왕산은 감동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인왕산과 인사동 사이는 고층빌딩으로 가득 차 있어, 이를 붉은 띠로 지워버렸다. 옛 조선총독부(중앙청) 건물도 아직 남아 있을 때였다. 붉은 띠는 1987년 6월 민주화 시위대가 거리를 가득 메운 풍경과도 연결될 수 있다.

겸재는 인왕산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그렸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시위가 드세던 시국에서, 마냥 자연 예찬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인왕산을 부정적으로 그렸다. 정말 20년 만에 귀국한 서울은 시위대를 향한 최루탄 가스 때문에 눈물 천지였다. 정말 괴로운 풍경, 괴로운 인왕산이었다.

인왕산은 경복궁 서쪽의 백호(白虎)에 해당한다. 백호는 상상의 서수(瑞獸)여서 그런지 호랑이보다 용의 모습에 가깝다. 인왕산은 혈(血)을 지키는 산이다. 혈은 여자의 중심부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인간은 모두 혈에서 나오고 죽으면 다시 그 자리로 간다. 한강은 강남 신도시 때문에 남쪽 끝이 아니라 서울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파리의 센강은 한강에 비하면 개천에 불과하다. 한강과 북한산은 서울의 상징이면서 최고의 명당자리임을 증명한다. 한강과 같은 맑은 물이 도시 중앙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축복이다. 채색 또한 풍수지리와 관계가 있다. 서울이 그런 곳이다.

인왕산을 그리면서 내 고향의 강서 고분벽화를 생각했다. 강서대묘는 사신(四神)을 오방색으로 그렸다. 나는 강서 고분의 그림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남벽에 퇴색되지 않은 주색(Vermilion·버밀리언)의 주작(朱雀)이 있다. 벽화의 버밀리언 색깔 위로 흐른 흙탕물 자국은 강한 인상으로 계속 남아 있다.

새러토가에서 그린 <애넌데일>(1969) 작품의 흘러내린 물감 자국은 추상표현주의의 물감 뿌리기 기법이라기보다 강서 고분벽화의 흘러내린 빗물 자국과 연결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은 미국 시절에도 이어졌다고 본다.




1985년 귀국 전시회 이후 몇년 동안 김병기는 설악산, 제주도, 해운대 등 전국을 돌며 오랫동안 그리워만 했던 고국 산천 스케치 유람을 다녔다. 1987년 경주에서 야외 사생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1987년 경북 경주에서 그린 김병기의 <경주의 나무>는 ‘죽은 듯 살아있는 고목처럼 우리네 할머니의 강인하면서도 푸근한 인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나는 경주 계림에서 고목을 그렸다. <경주의 나무>(1987)는 두 팔을 벌린 채 서 있는 고목을 그린 것이다. 나무는 죽은 것처럼 서 있지만 사실 죽지 않았다. 마치 우리네의 할머니 같은 모습이었다. 커다란 구멍의 상처를 보이면서 거친 풍상의 껍질을 보이고 있다. 죽은 듯하나 죽지 않은, 아니 죽을 수 없는, 마치 한국의 역사를 보는 듯했다.


나는 계림의 고목을 열심히 그렸다. 황혼의 단풍 든 나무, 팔 벌리고 서 있는 계림의 ‘할머니 나무’를 그렸다. 전쟁을 치르고 분단된 조국을 생각하면서, 나는 <산하재>(山河在) 작품을 여럿 그렸다. 당나라 두보의 시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나라는 망했는데 산과 강은 여전하구나. 성터에 봄은 왔는데 초목은 짙구나’(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그림은 사분오열의 현실을 표현했다.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산하재> 연작은 분단 풍경을 염두에 두고 그린 작품이다. 그래서 엑스(X)자 형태의 직선을 사용하기도 했다. 빨간색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이는 벽화의 남주작과 연결되기도 한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의 진통 중에 귀국한 김병기는 전쟁과 분단과 군사정권의 조국 현실을 실감하며 <산하재> 연작을 여럿 그렸다. 중국 당나라 두보의 ‘국파산하재’ 시구절에서 따온 <산하재>(1987)는 분단을 상징하는 엑스(X)자와 고향 평양의 강서고분 벽화에서 따온 적색을 주조로 삼았다


“일찍이 몬드리안은 ‘여기서는 정서로서의 예술 따위는 존재치 않을 것이다. 예술은 하나의 효용적 가치로서 전개되어 나갈 것이다’라 말했다. 몬드리안의 이 예견은 형식의 의미에서는 옳았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옳지 않았다. 새로운 조형예술, 특히 순수미술의 변모는 그들이 지향했던 ‘합리’에서가 아니라, 보다 절실한 현실적 정신욕구에 의하여 전개되어왔기 때문이다.

 ‘다다’와 ‘초현실’의 출현과 ‘미니멀’의 궁지를 거친 ‘오브제’와 근래의 ‘반예술’ 같은 것의 등장을 보더라도, 조형예술이 본원적인 형식이 아닌 보다 현실성에 입각한 내용으로서의 새로운 이야기에 그 동인을 얻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순수한 ‘정신의 상태’로서의 예술들이 ‘장식’이란 효용적 가치로 전락하고 있는 현상을 본다. 그것이 어떠한 내용이든지 효용적인 ‘디자인’으로 결부되어 다시 하나의 ‘합리’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서울, 그 놀라운 변화를 50년 전의 폐허―마치 ‘아들의 주검을 안은 어머니의 연민’과도 같았던 북한산의 기억을 도외시하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멀리 남면의 한강을 바라보는 왕궁의 자취를 도외하고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산 동리와 획일적인 빌딩 숲이 대조를 이루고, ‘부기우기’의 간판과 네온이 희미한 매연 속에서 명멸하는 곳. 이 괴이하게 부풀어 오른 파노라마 안에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시각현장이 있다.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시기의 예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본다. 미술은 이미 수세대 전에 ‘벤처’를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생활환경과 그 기구들이 새로운 환경의 패턴으로 바뀌어왔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바뀌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생활환경의 변화 그 자체보다는 새로운 시각환경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다.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지배는 무서운 속도로 우리들의 삶을 바꾸어나가며 우리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가져오겠지만, 한편으로 인간성의 위기와 자연의 파괴라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 후자의 상황을 의식하며, 이에 저항한다. (…) 회고전을 맞이하며 나는 황홀한 약함 속에 있다. 예술이 새로운 신화의 창출이라 할진대, 신화는 역시 ‘현실’과 ‘시간’이라는 강한 타자적 능력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나는 다만 새로운 신화라는 그 표적을 향해 조준을 맞출 뿐이다.” (김병기, ‘비형상을 넘은 새로운 형상 추구’, 개인전 도록, 가나아트센터, 2000)



42. 유럽 여행과 작품 세계 - “생트빅투아르 산에서 세잔에게 ‘좋은 그림’ 물어봤다”


1986년 이후 파리 레지던스 기회 - 90년대 중반까지 여러번 유럽 순례

일본유학 때 부친 권유했던 ‘파리’  -  “내 미술의 기초이자 영감 주는 곳”
공사현장 된 미라보 다리에 실망도  -  꿈과 현실 괴리 ‘센강은 흐르고’에

세잔-졸라 뛰놀던 엑상프로방스  -  소년 때부터 존경한 세잔과 ‘교감’
‘생트빅투아르 산에서의 독백’ 그려 - 남프랑스 해변서 폴 발레리 생각
‘푸른 파도에 붉은 포도주 붓는다’ - 르누아르 말년 지낸 올리브 정원
“아내, 일생 최고로 행복한 순간”  - 처음이자 마지막 부부동반 여행



김병기는 1986년 첫 귀국전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일찍이 유학을 꿈꿨던 파리를 비롯해 유럽 곳곳을 여러차례 순례했다. 그 가운데 소년시절부터 좋아했던 폴 세잔의 고향인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에서 가장 많은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세잔이 가장 즐겨 그렸던 생트빅투아르 산과 지금은 박물관이 된 아틀리에를 둘러보며 <생트빅투아르 산에서의 독백>(1995년)을 그렸다.




세잔은 “나 자신은 생트빅투아르의 의식”이라고 할 만큼 1880년대 중반부터 죽는 날까지 20여년간 생트빅투아르 산을 그렸다. <커다란 소나무와 생트빅투아르 산>(1887년)은 세잔이 비평가이자 훗날 전기를 쓴 요하임 가스케와 그 아래에서 대화를 나눴다는 소나무를 그린 것이다



―젊은 시절의 파리 유학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70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여행하게 되었다. 그때 파리의 감회는 어떠했는가?


“일본 유학 시절 스무살 때 첫사랑에 실패하고 귀국한 아픈 기억이 있다. 프랑스 유학 계획도 자연스럽게 무너졌다. 집안 어른들이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게 했다. 파리 유학은 사라진 하나의 꿈이 되었다. 화가였던 부친(김찬영)이 도쿄가 부족하면 파리 유학까지 하라고 당부했던 그런 파리였다. 내가 파리를 처음 간 것은 1986년 서울 귀국전 이후였다. 20대의 꿈을 70대에 이르러 변죽만 울린 셈이다. 파리 시테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포함하여 3년 정도 유럽에서 체류했다.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회장의 도움이 컸다. 인연이란 참 묘했다. 아무튼 내 미술의 정신적 기초는 프랑스와 연결되어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만큼 프랑스 미술은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김병기는 1992년 가나아트센터 후원으로 파리 시테섬의 예술인 레지던스에서 머물며 20대부터 꿈꿔온 프랑스와 유럽의 미술를 탐구했다



1992년 파리의 센강변에 나가 미라보 다리를 그리고 있는 김병기를 제자에서 큰며느리가 된 화가 백혜란이 찍었다.


파리는 유럽의 복판에 있다. 나의 유럽 여행 첫 기착지는 파리였다. 에밀 졸라 거리에서 여장을 풀었는데 미라보 다리와 가까운 곳이었다. 학생 시절부터 나는 아폴리네르의 시를 읊조리면서 파리를 상상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흐른다.’ 하지만 막상 미라보 다리에 가보니 추억 속의 아름다운 다리는 아니었다. 센강도 생각보다 왜소한데다 미라보는 시멘트 범벅의 공사장이었다. 꿈과 현실의 괴리를 느껴야 했다.

그런 마음을 나는 <센강은 흐르고>(199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에 담았다. 직선과 사각형 같은 도형을 여러 군데 배치하고, 멀리 강을 표현했다. 여신 조각상을 거칠게 강조했고, 고철 더미 공사장과 크레인 같은 현대사회의 단면을 상징하듯 표현했다.

이 작품은 그해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원로작가 회화전’에 출품했는데, 전시 개막식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당시 미술계는 이대원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이대원의 영향력이 컸다. 그는 1950년대 내가 미술단체 일을 하던 명동의 같은 건물에서 무역회사 사원으로 일했다. 법대 출신으로 뒤에 화가가 되어 과수원 풍경을 많이 그렸고, 홍익대 총장과 예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과천 미술관의 전시 개막식에서 곁에 있던 화가 김영주가 한마디 했다. ‘자네 없는 사이에 세상은 이렇게 변했네.’ 그는 미술계의 중심 이동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사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때 내 작품은 구석에 걸리는 등 ‘중심 이동’을 실감하게 했다.”




김병기는 아폴리네르의 시에서 노래했던 낭만 대신 공사장으로 변한 미라보 다리와 파리의 현실을 <센강은 흐르고>에서 조형적으로 표현했다. 1992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원로작가 회화전’에 소개됐다


―파리에 이어 본격적으로 유럽 여행을 했다. 그 여행은 어떠했는가?


“유럽 여행을 하면서 북구와 남구의 환경적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남구는 태양과 가깝고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시야가 넓었다. 사실적이고 고전적인 화풍으로 연결되었다. 반면 북구는 해가 일찍 지고 겨울도 길었다. 일찍 어두워지니 술집 같은 실내에 들어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토론을 즐기게 되었다. 그래서 지성적이고 관념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노르웨이에 가보니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1910)와 같은 분위기를 그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붉게 노을 진 하늘 아래 강과 산이 있고, 다리 위의 인물이 불안한 듯 서 있었다. <절규>라는 그림이 화가가 꾸민 것이 아니라 환경 자체가 바로 그랬다.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마치 지구의 끝에서 고함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북구에서 <절규>를 실감할 수 있었다. 예술작품은 환경의 산물이 아닌가.

남프랑스 여행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소년 시절부터 세잔을 존경했다. 자연스럽게 세잔이 살았던 마을을 찾았다. 아내와 함께 엑상프로방스에 갔다. 세잔이 그린 생트빅투아르 산을 보았다. 또 세잔이 걸었던 길을 나도 걸었다. 마차가 다니던 시절의 길 그대로였다. 아주 고적한 곳이고, 대여섯 채의 집이 있었다. 거기서 세잔은 걸작을 제작했다.

그는 추상회화를 시도하지 않았지만 형상과 추상의 틈새에서 현대미술의 길을 열어주었다. 요하임 가스케가 쓴 전기 <세잔-그가 내게 말한 것>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가스케가 세잔에게 뭐 하고 있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세잔은 두 손을 깍지 끼면서 ‘이렇게 하고 있네’라고 대답했다. 앵그르·들라크루아·쿠르베·코로 등 고전을 섞어 새것을 만들고 있다는 의미였다.

세잔은 17세기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을 좋아했다. 그는 말했다. ‘푸생의 하늘에 눈물을 가하고 싶다.’ 이는 푸생의 고전적 작품에 감정을 넣고 싶다는 의미다. 세잔의 죽마지우로 에밀 졸라가 있다. 이들은 어려서 엑상프로방스에서 뛰어놀았다.

토목기사의 아들인 졸라는 뒤에 파리에서 신문기자를 지내면서 소설을 써 유명해졌다. 하루는 세잔이 졸라의 집에 놀러 가니, 졸라가 양탄자 깔린 저택의 회전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세잔은 졸라가 타락했다며 돌아 나왔다. 작가는 결핍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물질적 풍요로움은 창작을 방해한다. 성공했다고 느꼈을 때가 위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세잔은 1885년 무렵 엑상프로방스 외곽 마을에 정착해 말년 20여년간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려 수십장의 작품을 남겼다. 1895년 무렵의 자화상




세잔이 그린 20대 중반 에밀 졸라의 초상(1864년). 엑상프로방스에서 나고 자란 죽마고우 졸라와 수십년간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나눴던 세잔은 정작 졸라가 소설가로 성공한 이후 절교를 했다. 엑상프로방스 그라넷미술관 소장



세잔이 그린 요하임 가스케의 초상(1896~97년작). 생트빅투아르산 시절 말년의 세잔과 절친했던 비평가 가스케는 훗날 <세잔-그가 내게 말한 것>을 썼다. 프라하국립미술관 소장

 

나는 세잔의 마을에서 <생트빅투아르 산에서의 독백>(1995)을 그렸다. 세잔을 생각하면서, 아니,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림을 그렸다. ‘독백’만은 아니었다. ‘세잔 선생, 당신이 염원했던 좋은 그림은 추상화, 그것도 벽지 같은 추상화입니까?’ 나는 질문을 했다.

세잔은 대답했다. ‘아니요.’ 세잔의 예술정신은 두고두고 나로 하여금 반추하게 했다. 생트빅투아르에서 그린 내 작품은 풍경화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풍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았다. 멀리 생트빅투아르 산 능선이 있고, 숲도 있고, 길도 있다. 거기에 직선이나 삼각형 같은 도형도 섞여 있다.

풍경을 내 나름대로 해석한 구성이다. ‘절제’라는 단어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지 화면은 전체적으로 조용하다. 마치 동양의 수묵화처럼 투명한 세계와 연결되기도 한다. 원색의 강렬함보다 엷은 물감으로 절제하듯 풍경보다 ‘정신’을 표현했다.

사실 나는 세잔의 현지 풍경보다 세잔의 정신세계에서 그의 내면을 표현하려 했다. 그래서 나로서는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작품 <엑상프로방스의 플라타너스>(1992)는 현지에서 그린 작품이다. 상하좌우의 수직구도를 기본으로 하여 복판에 수백년 묵은 커다란 플라타너스를 그렸다.

Y자 형태로 벌린 나뭇가지가 마치 두 다리를 벌리고 거꾸로 서 있는 여자처럼 보였다. 생명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표현기법의 특징은 나무와 벽면을 밝게 처리하여 앞으로 튀어나오게 역전시켰다는 점이다. 세잔에 대한 오마주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엑상프로방스의 고향 마을에 있는 생트 빅투아르 산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세잔은 1906년 10월 쓰러지던 날까지도 이 산을 그렸다. 1906년 마지막까지 그린 <생트 빅트아르 산>. 타이슨 콜렉션 소장.


세잔은 대상을 그리는 것을 단념했다. 이를 발전적으로 실험한 것이 피카소와 브라크다. 이게 미술계 주류를 이루었고, 추상화의 기본을 이루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16년 스위스에서 다다가 생겼다. 다다의 잿더미에서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가 나왔다.

추상주의는 외부적인 것이고, 초현실주의는 내면적인 것이다. 이들 상호간 영향을 주면서 발전해온 것이 현대미술이다. 추상주의를 몰고 나가면 미니멀리즘이 된다. 리얼리즘과 미니멀리즘의 삼각형 꼭짓점에 말레비치가 있다.

요제프 알버스는 꼭대기로 올라갔지만 말레비치는 형상을 다시 찾아 내려왔다. 재스퍼 존스는 형상과 추상의 틈새를 시도했다. 세잔과 같은 맥락이다. 세잔은 자연을 그린 것 같지만 자연을 그리지 않았다



김병기는 1994년 예술 밸트로 유명한 남프랑스의 프로방스 해안지대를 돌며 카뉴-쉬르-메르에 있는 르누아르의 대정원에서 올리브 나무 작품을 여럿 그렸다. 미발표작으로 미국 뉴욕의 웨체스터에 있는 화실에 걸려 있다




르누아르는 1905년 남프랑스의 해변 휴양지 카뉴-쉬르-메르에 있는 올리브 나무 정원에 정착해 말년까지 인상파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색채의 향연을 구가했다. 말년까지 살았던 집을 그린 <클레트의 농가>.


<르누아르 장원의 올리브>(1994)는 카뉴쉬르메르 올리브 언덕에 있는 르누아르의 장원을 그린 작품이다. 장원은 정원보다 큰 의미다. 르누아르 의자에 앉아 그의 정원을 보았다. 유럽 전역을 여행하고 난 뒤에 아내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르누아르 의자에 앉아 있을 때가 일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르누아르 장원에서 그린 내 작품은 고목 같은 올리브 나무를 전면에 크게 표현했다. 뚱뚱하고 풍만한 모습, 즉 르누아르의 표현 형식을 염두에 두었다. 올리브 뒤로 역삼각형 등 나의 ‘해석’이 들어 있다.

이 그림 속에 르누아르의 화풍상 특징을 담으려 했다. 나는 남프랑스에서 폴 발레리의 <지중해의 감흥>이라는 에세이를 생각했다. 발레리는 그 바닷가에서 범선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온 노란 오렌지를 실은 배와 그 뒤의 울트라마린 배경의 색채를 주목했다.

발레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푸른 파도에 붉은 포도주를 붓는다.’ 빨강과 파랑의 대비, 이는 상징성이 크다. 게다가 바다에 한 잔의 포도주를 붓는 행위, 이것이 예술행위이기도 하다. 바다에 한 잔의 포도주를 붓는 행위는 상징적이지 않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에드가르 드가, 폴 발레리, 이들 3인은 유럽 정신사의 세모꼴 축으로 알려졌다. 나는 남불의 바닷가에서 폴 발레리를 생각했다.”




지금도 르누아르 기념관 앞에 있는 천년생 올리브 나무 고목은 여러 화가들의 ‘모델’로도 유명하다



김병기는 <르누아르 장원의 올리브>(1994년)에서 르누아르에 대한 오마주로 풍만한 올리브 나무를 표현했다




김병기의 부인 김순환은 칠순 말년에 생트빅투아르 산과 르누아르의 장원 등을 돌아보며 가장 행복해했다. 부인은 1995년 6월 작고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부부동반 유럽 여행이 됐다.


―유럽 여행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현대미술 등 다른 분야에 대한 인상은?

“유럽 여행을 하면서 물론 현대미술 작품도 많이 보았다. 마르셀 뒤샹과 요제프 보이스의 작품도 인상 깊게 보았다. 평면 작품에서 오브제로 넘어가는 현대미술의 다양한 면모도 느낄 수 있었다. 뒤샹의 작품에서 인간의 성(性) 같은 본질 문제를, 그리고 보이스의 작품에서 정치 문제를 생각하게 했다. 보이스는 항상 노트를 했다.

 그만큼 이지적인 작가였다. 파리 퐁피두센터의 마지막 전시실에 있는 보이스의 작품들은 흰색 보자기로 덮여 있었다. 폐업이다, 이제 다 끝났다는 이야기 같았다. 독일의 쾰른은 아주 인상적인 도시다. 기차역 앞에 거대한 성당이 있고, 현대미술관도 있다. 쾰른에서 보이스의 의자 작품을 보았다. 의자 위에 삼각형으로 쌓은 치즈, 즉 치즈 의자는 상징성이 강했다. 일종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풍자적 의자 같았다. 요제프 보이스와 백남준의 인연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파리는 나의 가족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한마디로 우리 가족은 디아스포라(유민)다. 고향을 잃고 세계적 떠돌이가 된 유대인과 다를 바 없다. 고향 평양을 떠나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터전을 닦았기 때문이다. 내 가족은 미국에 정착했다. 하지만 형님네 가족은 모두 프랑스로 가 자리를 잡았다.




김병기는 자신의 내면에 공존하는 ‘아버지의 감각주의와 어머니의 청교도적 성향’ ‘사랑과 증오’의 갈등이 창작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전통을 사랑하면서도 때려부수고 싶은 충동을 토기와 망치 등으로 표현한 <공방정물>(1981년).


미국 생활과 유럽 여행은 나로 하여금 화가로서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도 했다. 원래 나의 성품은 아버지의 감각주의와 어머니의 청교도적 성향의 싸움 아래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과 증오의 공존이다. 증오는 반항심을 키웠다. 뭔가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욕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나는 신라 토기를 즐겨 그리기도 했다. 부서지기 쉬운 토기 옆에 망치를 그려 넣었다. 토기와 망치, 이는 내 성향을 상징한다. 토기는 전통이고, 나는 전통을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때려부수려는 충동이 있다. 그래서 망치가 필요했다. 평양은 남한 사람처럼 전통성이 강하지 않다. 오히려 진보성이 강해 새것에 대한 관심이 크다. 내 그림은 항상 수직과 수평이 기본을 이루고 있다.

사선도 좋아한다. 점, 선이 합쳐 면이 되고, 또 사선이 입체를 만든다. 중세는 평면으로 만족했지만 르네상스는 입체를 중시했고, 원근법도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법칙에 연연하지 않았다. 크게 말해 나의 예술 바탕에 흐르는 내면은 바로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유럽 여행을 통해 이런 점을 더 실감할 수 있었다.”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43. 국릾현대미술관 초청 회고전

- “내 나라에서 차려준 ‘98살의 회고전’…제가 돌아왔습니다”


한인교회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 제작  - “하지만 구원 설명은 화가의 일 아냐”

2006년 엘에이 ‘마운틴 이스트 시대’  -  “동부서 서부로 오니 동양 가까운 듯”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 개인전  - 80년대말 이후 100점 ‘감각의 분할’전
‘북한산 세한도’ 연작·‘분단풍경’ 등  - “그림은 우리 인생처럼 늘 미완 상태”?

 



김병기는 2014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최한 ‘김병기 회고전-감각의 분할’ 전시회를 통해 화단 안팎의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한국현대미술 원로작가 30인을 선정한 초대전의 첫번째 작가로, 미국 이주 49년 만인 ‘98살의 금의환향’이었다. 회화 70점과 드로잉 30점 등 모두 100여점을 선보인 대규모 전시회의 포스터에는 <성스러운 삼각>(1999년작)이 실렸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미국 생활의 첫 터전이었던 새러토가를 떠나 1989년 뉴욕 맨해튼 가까운 곳으로 이주했다. 거기서 어떻게 생활했는가? 


“1986년 서울 귀국전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미국의 거주지를 옮긴 것도 그중 하나이다. 오랫동안 살아 정들었던 뉴욕주 새러토가를 떠나 맨해튼 북쪽의 부촌인 웨스트체스터로 이사했다. 그곳은 허드슨강이 흐르고, 미국에서 긴 교량의 하나로 꼽히는 태펀지 다리가 있다. 나는 이 다리를 보면서 종종 아폴리네르의 시를 흉내 내 한마디를 읊었다. 사실은 나보다 먼저 이승을 떠난 아내(김순환)를 생각하면서 읊은 것이다.

즉 ‘태펀지 다리 아래 허드슨강은 흐르고, 우리들의 세월과 사랑도 흘러,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합니다.’ 1995년 6월 아내의 장례식을 치를 무렵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화가로서 뒤늦게 빛을 보기 시작하던 때, 아내는 서둘러 이 땅을 떠났다. 아내는 평생 고생만 하다가 현재 이역 땅에 외롭게 묻혔다. 풍광 좋은 웨스트체스터힐스의 뉴욕 시립공동묘지에 나를 위한 빈자리도 나란히 마련되어 있다. 뉴욕의 유명 인사들과 김환기·김향안 부부도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 공간을 사용할지 어떨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뉴욕의 한인동포 사회에서 이런 말이 있다. ‘허드슨강을 넘지 말라.’ 이 말은 허드슨강 서쪽의 백인 사회는 아시아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푸대접한다는 뜻이다. 하기야 시골로 갈수록 보수적 분위기는 강한 편이다. 미 대륙의 동부인 뉴잉글랜드 지역은 ‘백인 아메리카의 원조’라는 자긍심이 강한 곳이면서도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도가 비교적 높은 편이다. 아이비리그의 명문대학이 밀집되어 있듯 문화적 수준 또한 높은 곳이기도 하다.



 


1990년대 뉴욕주의 한인장로교회인 웨체스터 제일교회에서 장로로 신앙 생활을 한 김병기는 교회 제단의 첨아치형 스테인드글라스 검은 십자가상을 디자인해 제작하기도 했다. 사진 웨체스터 제일교회 누리집 갈무리



태펀지 다리 부근 슬리피홀로에 네덜란드 계열의 오래된 교회가 있었다. 1977년 이 교회 건물을 한인장로회에서 인수해 웨체스터 제일교회(담임목사 김영)를 열었다. 나는 그 교회 장로로서, 문병기·손인실 부부를 인도하기도 했다. 교회 신자들끼리 화목하게 지내면서 여행도 많이 다녔다. 뒤늦게 운전을 배워 직접 차를 몰고 대륙의 많은 곳을 여행했다. 영광스럽게도 내가 웨체스터 제일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했다. 원래 교회 제단 정면에 첨아치형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는데 유명한 루이스 티퍼니의 명품이었다. 교회 인계 때 매도자가 티퍼니 작품을 뜯어가는 바람에 빈자리로 남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은 화가인 나에게 소임이 맡겨졌다. 나는 롱아일랜드에서 온 전문가 도움을 얻어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디자인했다. 구도는 단순했다. 검은색 십자가 뒤에 구름 모양의 선을 반복시키고, 꼭대기의 원형 안에는 십자가를 맨 양을 그려 넣었다. 이 작품은 특히 아침 햇살이 비칠 때면 장관을 이룬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이 인도해서 만들었다’고 말해준 덕분에 유명해졌다. 물론 미술은 신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설명하는 것은 목사의 일이지 화가의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성경을 단순 도해하듯 그리는 행위는 내 체질과 맞지 않았다.” 




1989년 미국 뉴욕주 새러토가에서 맨해튼 북쪽의 웨스트체스터로 이사한 김병기는 95년 부인과 사별한 뒤에도 10여년 이곳에서 홀로 살았다. 스카스 데일의 자택 화실 벽에 <바람 속의 삼각>이 걸려 있다. 



1989년 맨해튼 북쪽 웨체스터로 이사  - 95년 먼저 떠난 아내 시립공동묘지에
김환기·김향안 부부도 나란히 묻힌 곳  - “태펀지 다리 아래 허드슨은 흐르고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합니다”



2006년 김병기는 큰아들네가 사는 서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으나 베벌리힐스 부근 로스펠리즈 화실에서 여전히 혼자 살며 왕성한 그림 작업을 했다. 그 시기 대표작인 <액션 인 마운틴이스트>, 2016년 10월 서울대 개교 70돌 기념전에 출품했다.



―2006년 동부 뉴욕에서 서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가?

“구십 노령으로 접어들고게다가 혼자 살다 보니 자녀들의 걱정이 많았다. 건강 문제도 있어서 큰아들 내외가 사는 엘에이(LA)로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 ‘시아버지 화가’는 용납할 수 없었다. 베벌리힐스 부근에 거처를 마련해 혼자 생활했다. 베벌리힐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배우들을 비롯한 특수계층의 동네다.

나는 유명한 할리우드 사인이 건너다 보이는 그리피스 천문대 입구의 고층건물 2개 가운데 하나인 로스펠리즈 8층에서 살았다. 창밖으로 산이 보여 ‘마운틴 이스트’라 스스로 이름지었다. 엘에이에 자리를 잡으니 동양으로 가는 길의 절반쯤 온 것 같았다. 서부는 동부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나는 새로운 형식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얀 바탕에 검은 묵선을 이용한 그림이 그 시절 작품이다.

내 그림은 몇 개월 혹은 몇 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덧칠하고 또 덧칠하면서 수정한다. 하기야 누군가는 말했다. 자신의 작품을 보고 만족한다면 그때부터 더 이상 작가 자질이 없다고. 하기야 작가가 불만이 없다면 그게 어디 올바른 작가일까. 나는 내 작품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다. 작품은 미완 상태에서 완성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다. 그림은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이다.

작품은 우리 인생처럼 항상 미완 상태이다. 특정 대상을 그렸는데, 몇 달 뒤에 보면 애초의 대상과 전혀 관계없는 그림이 되어 있기도 했다. 하나의 변모이다. 정물화가 풍경화가 되는 등.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특히 한국의 산야는 계속 변모했다. 헐벗은 산이 숲으로 바뀌든가, 아니면 아파트촌으로 바뀌기도 했다. 변모, 그 자체였다.

한국 현대 풍경은 마치 초현실주의의 한 방법론과 같았다. 예기치 못한 변모의 연속이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과 같았다. 이는 서울을 출입하면서 느꼈던 인상이기도 하다. 나의 <산하재> 연작과 <분단 풍경>은 분단 한국의 현대 풍경을 염두에 두고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붉은색은 면이 되고 때로 뜻하지 않은 추상형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김병기는 2014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개막일인 12월2일 기자간담회에서 직접 <가로수>(1956년작)를 비롯한 전시작을 돌아보며 설명해 노익장을 과시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2014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 초청으로 회고전이 열렸다. 만시지탄의 느낌도 없지 않으나 조국은 뒤늦게나마 작가적 위상을 인정해 대규모 개인전을 열어준 셈이다. 그 소감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감각의 분할’이라는 제목으로 회고전을 열었다. 그 제목은 전시 담당자가 1980년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내 작품에서 그런 특징을 읽어내어 지었다. 회화 70여점과 드로잉 30여점을 소개했다. 그

때 개막식에서 했던 말을 기억한다. ‘내가 이처럼 거창하고 이처럼 멋있는 나라를 두고 어디 있었나 하는 느낌을 지금 갖습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은 내 객관이요, 주관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같이 있었습니다. 함께하는 한마음으로 여생을 살고자 합니다. 여생이랄 것도 얼마 안 남았지만(웃음).

한국을 떠난 지 49년이 됐습니다. 49살에 한국을 떠나 49년 만이니 98살입니다. 밸런스(균형)가 맞는다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서양만 생각했습니다. 서양에 가서는 동양만 생각했어요. 동양을 생각함은 나 자신을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김병기 회고전’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원로작가 초대전 행사의 하나였다. 미술관은 한국 미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장르를 안배해 원로작가를 30명을 선정했다. 공교롭게도 필자가 그때 작가 선정위원회의 위원장 소임을 맡았다. 한꺼번에 많은 작가를 선정하여 공개한 것은 설혹 관장이 교체되더라도 이 사업만큼은 지속성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대미술사의 체계적 정리 사업은 역시(?) 일과성 행사로 끝나고 말았다. 아무튼 ‘김병기 회고전’은 국가가 원로작가를 예우하는 정중한 잔치였다. 그만큼 대중적 관심도도 높았다. 김병기 예술세계에 대한 본격적 재조명 작업의 단초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때 전시 기획자의 글에 이런 대목이 보인다. 화가 자신도 공감했다고 알려진 부분이다.

“김병기의 선은 단순한 사물의 윤곽선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의 입체적인 묘사에 봉사하는 해칭선도 아니며, 캔버스의 표면을 덮은 피상적인 장식선은 더더욱 아니다. 심지어 그의 선은 단지 선이라고만 부를 수도 없는 그런 선이다. 그것은 내려치는 획이자 쓰다듬는 붓질이며 나아가 무의식의 자동기술이자 확고한 자아의 표현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러한 선의 운용에 주목하여 김병기의 그림을 ‘촉지적 선묘’(觸地的 線描)라 칭하고 그 고유한 특징을 살펴보려 한다. 촉지적 선묘는, 후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그의 선이 두 가지의 상이한 특징, 즉 선적인 양식의 촉각성과 회화적인 양식의 시각성을 포괄하는 ‘촉지적(haptic) 특징과 동양 수묵화의 출발이자 문인화의 요체인 골법(骨法)과 용필(用筆)이 두드러지는 ‘서체적인’(calligraphic) 특징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음을 감안한 것이다. (...)

김병기가 자신의 회화를 단순한 ‘현실’(reality)이 아니라 하나의 ‘실현’(realization)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의 작업은 그 자신이 언급한 대로 자연과 형상의 ‘절충이 아니라 사이’(in-between)에 놓여 있으며 그 사이 자체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형상과 비형상의 사이, 혹은 구상과 추상의 사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연과 정신이 서로 얽히고 더듬으며 교차하고 관통하는 그 감각의 과정을 회화적으로 구현한다는 의미에서, 결코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사이의 실현’이며 결코 완전히 메꾸어질 수 없는 ‘간극의 표현’이다. 그의 ‘촉지적 선묘’는 바로 이 자연과 정신의 얽힘과 만짐, 교차와 접속이 전개되는 방식이자 그 기록이라 할 수 있다.”(정은영, ‘감각의 분할’ 전시 도록, 2014, 국립현대미술관)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추상의 실험-형상과 비형상의 공존-감각의 분할-미완의 미학’ 4부로 정리한 2104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에서 김병기는 <북한산 세한도>(2000년작) <북한산 세한도 1>(2001년작) 연작 등 한국 현실을 담은 작품에 역점을 두었다.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출품작 가운데 스스로 인상적인 작품은?


“북한산을 소재로 하여 그린 작품은 다 ‘세한도’ 계열이라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세한도>는 제주 유배 시절 추사 김정희가 그린 걸작이지 않은가. 고통의 시간을 추사는 <세한도>에 자신의 심경을 담았던 것이다. 나는 90년대 후반 서울 장기체류를 통해 조국의 산천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를 얻었고 특히 인왕산과 북한산을 주목했다. 그 무렵 광화문의 숙소 18층에서 인왕산을 보면서 몇 장의 작품을 만들었다. 



김병기는 2000년 개인전 이후 한동안 서울 평창동의 화실에서 지내며 <북한산 세한도> 연작을 그렸다. 아래쪽에 그려넣은 나무기러기 조각은 자유롭게 날지 못하는 분단 현실을 상징했다 



<북한산 세한도>(2001·2002) 연작은 평창동 화실에서 지내며 북한산을 화면 가득 표현하고 하단부에는 마침 화실에 있던 나무기러기 조각을 그려 넣었다. 북한산 풍경 아래 웬 기러기인가. 기러기는 앞장서서 계절을 인식하고 또 앞장서서 멀리 날아간다.

그런 기러기가 날지 못하는 현실, 나무기러기 신세. 나는 북한산 풍경에 그런 상징성을 담고자 했다. 풍경 속의 목안(木雁)은 나의 상징 코드이다. 날지 못하는 새. 분단 조국을 염두에 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왕산>(2005)은 화면 상단에 인왕산의 능선을 원경으로 표현했고, 산 아래는 경계선을 표시하여 남북 분단을 암시했다.

그래서 인왕산 아래 풍경은 사각형 도형과 직선 그리고 빨간색 장애물 등을 넣었다. 옥상 위의 설비를 장애물로 바꿔 분단 상황을 상징했다. 빨간색과 브라운 톤이 잘 어울리게 했다. 위의 인왕산 작품보다 또 다른 <인왕산>(2005)은 비교적 산을 가까이 끌어왔고, 경계선 아래의 도형은 단순화시켰다.

그림 아래쪽 사각형의 파랑과 빨강은 남대문 단청에서 끌어온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의 사각형은 광화문에서 본 경찰청 건물 모습이다. 자연을 배경으로 인간사회의 단면을 상징화했다고 볼 수 있다. 아내를 먼 곳으로 보내고 서울에 와서 그린 작품들이다.”

녹취 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 기획·진행/김경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