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남의 수학이 뭐길래 [ 1~ ]
1. 왜 배워야 하나 - 이자 계산에서 상대성이론까지, 수학은 살아있다
상대성이론 책 읽던 70대도 - 흥미 느끼면 미적분과 씨름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는 학생들 - 성취도평가 상위권이지만- 호감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져
고대 그리스선 우주와 사물의 원리 - 중세엔 하나님 이해의 도구로 여겨
- 근대 들어 과학분야 본격 활용
화가 조반니(1406~1486)가 그린 ‘일곱 개의 자유 학예(The Seven Liberal Arts)’(1460). 여신들은 중세 대학의 필수 교과였던 3학 4과를 의미하는데 그 중 4과가 수학 분야로 산술·기하·음악·천문학이다. 여신들은 순서대로 논리학·산술·기하·천문학·수사학·문법 그리고 음악을 의미한다. [위키미디어]
70대인 내 아버지는 지난해부터 고등학교 수학 문제를 풀고 있다. 아버지는 우연히 상대성이론에 관해 쉽게 풀어쓴 책을 읽다 미적분학에서 막혔다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고등학교 시절 문과를 선택해 미적분학을 공부하지 않았던 아쉬움이 함께 떠올랐다고 한다. 오기가 발동한 아버지는 미적분학을 공부하기 위해 지난해 언젠가부터 고등학교 1학년 수학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언제 미적분학을 공부하실까 싶었는데, 지금은 1학년 과정을 마치고 ‘미적분과 통계’ 문제집을 풀고 있다.
나이 드신 아버지가 수학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걸 보면서, 그 나이에 그걸 왜 푸시냐고 뵐 때마다 그만두시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막무가내였다. 고등학교 때 미적분을 배우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반드시 미적분을 정복하겠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수학이 어디에 사용되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이 결국 나이 드신 아버지에게 수학 문제집을 들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중·고등학생들은 어떨까? 우리나라 상당수의 중학생은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받으면서 수학 문제집과 씨름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학생이 수학을 좋아하지도, 수학 점수를 잘 받지도 않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어느덧 여기저기서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나타난다.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의 수학 능력은 다른 나라 학생들보다 떨어지는 걸까? 전 세계 72개국 만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평가한,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2015년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수학 순위는 6~9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 평가 대상을 좁히면, 우리나라의 수학 성취도는 일본의 1위 다음으로 1~4위다. 세계수학연맹(IMU)이 세계 최고의 수학 실력을 보유했다고 인정하는 독일·프랑스·영국·미국 등도 우리보다 한참 뒤처져 있다. 놀라운 성적인 것이다.
하지만 국제학업성취도평가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나라 학생들의 수학에 대한 호감도는 외국 학생들과 비교하면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학생 대부분이 수학 공부를 많이 하지만, 입시 문제를 제외하면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왜 하는지도 모르면서하기 때문에 그만큼 호감도가 떨어지고 오히려 반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수학을 좋아하고 성적이 좋은 학생들조차도 수학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그리고 어떤 학문인지를 제대로 모르고 공부하기때문에 수학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수학자나 언론 등은 수학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수학을 공부한 어른 세대들 상당수가 수학이 실생활에 전혀 유용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수학은 그저 수학자들에게만 필요한 분야는 아닐까? 수학 교과서나 문제집을 공부하는 것은 이런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문제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수학이 발전해온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수학이 계속해서 발전해왔던 것은 여러 측면에서 실용적인 분야였기 때문이다. 가령, 수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던 고대 그리스에서 수학은 우주와 사물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원리라고 여겨졌다. 모든 존재 아래에 있는 수와 수의 비를 통해 우주와 사물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피타고라스 학파는 제자 양성 과정에서 수학을 주요 준비 교육 과목으로 두었다.
이러한 생각은 플라톤으로 이어졌다. 그는 우주의 근원과 그 운동을 원과 구를 포함해 다양한 도형이나 정다면체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국가를 통치하는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수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 서유럽으로 전해졌다. 기독교 사회였던 서유럽에서 기하학과 천문학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였다. 음악 역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조화로운 음을 만들고 이해하기 위한 필수 분야로 여겨졌다. 결국 12세기부터 대학이 설립되면서 산술이나 기하, 음악 그리고 천문학을 포함하는 수학 분야들은 대학의 필수 교육 과정을 구성했다.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수학의 유용성은 보다 더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되기 시작했다. 우선 대학에서 교육되던 천문학은 천체의 운행 외에도 하나님이 창조한 인체의 질병을 이해하고 치료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됐다. 또한 천문학은 하늘의 운행을 통해 개인의 운명과 국가의 미래를 점치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됐다.
한편 이 시기에는 상업 및 도시의 발전과 함께 수학이 대학을 벗어나 사립 교육기관을 통해서도 교육되기 시작했다. 수학은 이자 계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자 재료가 담긴 용기의 용량과 가격을 비교하기 위한 도구였다. 항해에서는 위도를 계산하기 위한 원리였고 그림의 구도가 실제 눈으로 보는 것과 일치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다. 이외에도 수학은 기하학적으로 조화로운 건축물을 주조하기 위한 원리였으며 군대를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난공불락의 성곽을 세우기 위한 기준 등으로 활용됐다. 수학이 활용되는 분야는 점점 더 늘어났고 수학자들을 후원했던 이들은 유용성을 염두에 두고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근대 들어 수학은 본격적으로 과학 분야에 활용되기 시작했다.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일명 프린키피아』(1687)는 대표적인 성과였다. 뉴턴 이전까지 학자들은 지상 위에서의 운동과 하늘의 천체 운동을 별개의 운동으로 생각하고 연구했다. 그러나 뉴턴은 자신이 발견한 운동의 법칙과 만유인력의 수학 공식을 통해 지상 위에서의 운동과 천체 운동을 단일한 수학적 원리와 법칙으로 설명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고, 그만큼 수학이 지닌 위력을 보여준 것이었다.
뉴턴의 성취에 고무된 이들은 과학 연구에 수학을 응용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학자들은 전통적인 기하학을 대수적인 방식으로 변화시켰던 해석 기하학과 곡선의 연구를 대수적인 방식으로 정리했던 미적분학의 연구들을 적극 활용하였다. 18세기 말에 천체의 운동을 대수적인 방식으로 설명했던 해석역학의 연구는 그 대표적인 성취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일부 과학 분야에 수학이 쓰이기는 했지만 18세기 동안에도 대부분의 과학기술 분야에 수학은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했다. 과학기술 분야가 수학적인 방식으로 기술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먼저 정밀 측정이 가능해야 했다. 하지만 정밀한 시계나, 매우 높거나 낮은 온도를 측정할 수 있는 온도계, 아주 정확한 눈금이 그려진 비커나 미세한 무게를 측정할 수 있는 저울 등은 한참까지도 표준 제작되지 않았다. 길이를 재는 자나 무게를 재는 저울 등은 지방이나 국가별로 통일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과학기술 분야들을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만 있다면 해당 과학기술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결국 그러한 측정 도구나 정밀 장치들을 개발하는 노력은 꾸준히 계속되었고 그 과정을 통해 화학이나 열역학, 전자기학 그리고 파동학 같은 분야들이 수리 과학 분야가 되어 갔다. 수학이 과학기술 분야의 언어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19세기 동안에는 기존의 수학이 과학기술 분야에 응용되는 것을 넘어 수학 그 자체의 논리적인 발전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수학 분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생겨났고, 미적분학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해석학이 발전했으며, 2차원에서 논의되던 대수학은 n차원 공간에서 논의되는 선형대수학 등으로 발전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통계학, 위상수학 그리고 집합론 등 새로운 수학 분야들의 발전도 이어졌다. 새롭게 등장했던 수학 분야들은 처음에는 기존 수학의 연구 과정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수학은 과학기술을 넘어 사회학이나 인류학·예술·건축·알고리즘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 가능함이 발견됐다. 현재에도 수학은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응용 가능성은 계속해서 새롭게 발견되고 있다.
※ PISA 2006부터 95% 신뢰 수준에서 각 국가의 순위에 대한 범위를 제공하고 있음※ PISA 점수는 평균 500이고 표준편차 100인 척도점수임 ※ OECD 평균은 OECD 35개국 각각의 평균에 대한 평균임
역사적으로 수학은 매우 유용했고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어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던다. 수학이 가진 문제 해결력과 그 응용 가능성은 오랜 기간의 발전을 통해 계속해서 확인됐다. 그 결과 서양에서 고등 교육이 발전하면서 수학은 늘 필수 교과목의 하나로 교육되었다. 문제는 중등 교육의 경우 기본적인 내용을 가르치다 보니,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특정 수학 분야들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어떻게 응용되는지를 배우기 힘들어졌다는 데 있다. 더욱이 과거의 수학적 응용 및 그 성과들은 대거 잊혀 졌고 최근의 성과들은 학생들이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운 문제가 됐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서히 발전해 온 수학의 기본 내용들을 상당 부분 담으려다 보니 가르치는 내용이 방대해졌다. 수학 교사들 입장에서는 광범위한 수학 분야의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모두 이해하기 힘들고, 과학기술 분야를 전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과학기술 응용 사례 등을 구체적으로 가르치기가 힘들어졌다. 학생들이 자신이 배우는 수학이 어디에 활용되며 어떤 측면에서 유용한지를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 된 것이다.
본 칼럼에서는 바로 그러한 문제들에 착안해 중·고등학교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수학 분야들과 문제들이 과거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발전했으며, 그러한 성취는 이후 수학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칼럼을 통해 수학이 발전해온 발자취를 살펴보면서 수학 교육의 현재와 문제 등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조수남 수학사학자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박사.현 서울대 강사, 과학문화센터 연구원, 전북대 과학학과 박사후연구원으로 있으며, 과학사와 수학사를 연구하고 있다. 고등과학원 초학제연구단에서 연구했으며, 『욕망과 상상의 과학사』 등을 썼다.
[출처] : 조수남 수학사학자 ,서울대 강사 < 수학이 워길래> / 중앙 Sunday
2.피타고라스의 수리 철학 <상>- 數와 수의 比, 모든 존재의 근원적 원리이자 실체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세계 탐구 - 1~10 자연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
만물은 수의 비 통해 조화 유지 -조화롭게 어울리는 음정 만들려고
수의 비율 달리해 8음계 고안 - ‘도’ 음 나는 현의 9:8 현에선 ‘레’ 음
세계·우주 수적 질서에 대한 확신 - 고대 그리스·서유럽 문명에 영향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부분). 철학을 상징하는 이 그림의 왼쪽 아래에는 책을 읽고 있는 피타고라스의 그림이 있다. 피타고라스 앞에 하모니의 원리가 그려진 석판이 놓여 있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머리가 큰 남자가 머리가 작은 여자 앞에서 웃음의 대상이 되는 상황은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머리가 큰 게 그리 나쁠 건 없어 보인다. 과거 위대한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아인슈타인이 죽자 그가 가진 지능의 비밀을 풀기 위해 머리를 해부하고 뇌의 크기를 측정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뇌의 크기는 차이가 없었지만.
사실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머리 크기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현재 남아 있는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듯, 조선 시대 사람들은 평균 신장이 작아 전체적으로 머리가 커 보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머리가 크다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비아냥에 가까운 말처럼 사용되고 있다. 왜 그런 걸까?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비율을 중시했다. 사람의 인체에는 8등신 비율을 들이댔고, 조각이나 건축물 속에서는 황금비 등을 찾기 바빴다. 그리고 그런 비율에 딱 들어맞는 대상이 나타나면 그것은 미적으로 조화롭기에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했다. 그저 특정 비율을 지니고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피타고라스의 수리 철학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피타고라스는 독특하게도, 그런 참된 세계의 본질과 구성 등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수’라고 보았다. 그에게 수는 사물을 세거나 측정할 수 있는 도구였지만, 무엇보다도 수 자체가 각각의 독특한 원리를 지닌 실체였다. 가령, 피타고라스는 1부터 10까지의 자연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피타고라스의 세계의 조화와 수의 비 그리고 음악의 하모니에 대한 믿음은 음정(interval, 두 음의 높이의 간격)에 대한 연구를 통해 더욱 강화됐다. 피타고라스는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서로 소통하기 위해 자신의 음악에 대한 생각을 보다 구체화하고 체계화하기를 바랐다. 현존하는 기록에 따르면, 그러던 중 우연히 대장간 옆에서 음의 높이가 서로 다르지만 매우 조화로운 소리를 듣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해 살펴보던 중 두 망치의 무게의 비율에 따라 서로 다른 음정의 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 망치의 무게가 2:1일 때 두 망치를 동시에 두드리면 두 음의 간격이 8인 조화로운 소리(완전 8도)가 났다(예를 들어 한 망치를 두드려 도에 해당하는 음이 나면, 다른 망치로는 한 옥타브 높은 도 음이 나는 식이다).
이후 피타고라스는 무게와 현의 길이의 비를 달리하면서 실험했고 마찬가지로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다. 듣기 좋은 조화로운 음정이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수 1, 2, 3, 4의 비를 통해 생겨난다는 사실은 피타고라스에게 놀랍게 다가왔다. 피타고라스는 이 수들이 단순한 수를 넘어 조화로운 음악을 구성하는 실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이후 피타고라스는 새로운 수열을 고안하여 여덟 개의 음계를 체계화하였다. 이 과정에 대해 피타고라스는 아무런 저작도 남기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를 피타고라스의 수리 철학을 계승한 플라톤의 설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피타고라스는 음계 내의 음을 현의 길이의 비로 설명하기 위해 위의 수열에서 1, 9/8, 81/64, 4/3, 3/2, 27/16, 243/128, 2 로 이어지는 수열을 선택하였다.
[출처] : 조수남 수학사학자 ,서울대 강사 < 수학이 워길래> / 중앙 Sunday
우주는 원 모양으로 회전 운동 - 천구들 거리 비= 8음계 현의 비 - 라시도레미파솔라 음 내는 악기
보이티우스 『음악론』서 집대성 - 유럽의 표준 음악 교재로 사용 - 근대 과학자 캐플러 등도 매료
수의 비나 유리수 교육과정서 - 철학·음악적 논의는 거의 빠져

로버트 플러드의 『두 세계의 역사』에 실린 삽화. 이 책에서 플러드는 세계와 우주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림 위의 신의 손이 우주의 일현금을 조율하면 각각의 천구까지의 거리의 비에 따라 조화로운 음정들이 만들어짐을 보여 준다.
음의 아름다운 조화 속에서 수의 비를 발견했던 피타고라스는 음악 이론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이후 온 우주를 수학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발전시켜 나갔다. 피타고라스의 철학에서 수의 비는 음악을 넘어, 인간과 사회, 그리고 우주 속 행성 운동의 원리에도 숨겨져 있었다.
그는 우주의 별들과 행성들이 투명한 천구에 박혀 지구를 중심으로 가장 완벽한 기하 도형인 원 모양의 회전 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각 행성이 원 궤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여 각 궤도의 반지름을 추정했다. 이를 통해 피타고라스는 각 행성과 별들의 천구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달·금성·수성·태양·화성·목성·토성 그리고 고정된 별들의 천구 순으로 회전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각각의 천구가 지구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등속 운동을 한다고 보았다. 각각의 천구들이 지구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에 따라 서로 다른 높이의 음을 낸다고 여긴 점이 독특했다. 이는 천구의 회전 속도가 변하지 않고 늘 일정하다고 보았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피타고라스는 가령 지구로부터 가장 가까이에서 회전하고 있는 달이 가장 높은음을 낸다고 보았다. 반면 지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서 돌고 있는 고정된 별들의 천구는 가장 낮은음을 낸다고 생각했다.
특히 피타고라스는 지구에서 달·금성·수성·태양·화성·목성·토성 그리고 고정된 별들이 박혀 있는 천구들까지의 거리의 비가 각각 8 음계의 음을 내는 현의 비와 일치한다고 봤다. 그리고 각각의 행성의 천구는 고정된 별들의 천구부터 달의 천구까지 라시도레미파솔라의 순으로 높은음을 내고 있었다. 그에게 우주는 성스러운 지성에 의해 완벽하게 조율된 하나의 악기에 다름 아니었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이 수의 비를 통해 우주의 질서 및 조화의 원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와 그 제자들이 “우주 전체가 하모니이자 수”라고 보았던 것은 바로 그래서였다. 그들에게 수학과 음악, 천문학 그리고 우주론 등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수는 모든 존재 아래에 있는 근원적인 원리를 발견하기 위한 열쇠였다. 이는 피타고라스 학파에 속했던 필로로스가 “수와 수의 본질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나 다른 것과의 관계에 대하여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따라서 피타고라스 학파는 제자들을 양성하는 과정에서 수에 대한 교육을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으로 두었고 이후 음악·기하학·천문학·신학 등의 분야들을 교육해 나갔다.
그렇다면 행성 운동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했을까? 우선 그는 행성들이 회전할 때 큰 음이 나지만, 우주는 그러한 음들이 서로 조화로울 수 있도록 완벽하게 조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행성이 계속해서 회전하고 있으므로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미 그 소리에 익숙해져 소리를 인지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피타고라스는 그러한 음들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수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피타고라스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완벽한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이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것은 정신이 육체에 속해 있어 그 조화로움이 깨질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이 조화로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육신의 정욕과 불안정한 감정 상태를 끊임없이 통제해야 했다. 수련이 필요한 이유였다.
수의 비와 음의 조화, 그리고 우주의 하모니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생각은 이후 제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전해졌다. 천구 음악의 하모니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을 비롯하여, 로마의 정치가인 키케로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및 지리학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연구되면서 해당 사회에서 익숙한 관념이 되어 갔다.
이후 서유럽에서는 피타고라스의 수의 비와 우주의 하모니에 대한 생각이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보이티우스의 『음악론(De Institutione Musica)』에 의해 체계적으로 집대성됐다. 이 책에서 보이티우스는 음악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우주의 수학적 조화를 보여 주는 ‘우주의 음악(musica mundana)’과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조화를 보여 주는 ‘인간의 음악(musica humana)’ 그리고 우리가 즐겨 듣는 ‘도구의 음악(musica instrumentalis)’이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서 ‘우주의 음악’은 천체의 규칙적인 질서와 조화로운 운동이 만들어 내는 참된 음악을 가리켰다. ‘인간의 음악’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운 공명이 만드는 참된 음악을 의미했다. 이에 반해 ‘도구의 음악’은 피타고라스적 관점에서 볼 때 참된 음악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참된 음악을 모방한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영혼에 대한 통찰 및 참된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을 즐기는 이유였다.
보이티우스의 책은 이내 유럽에서 표준적인 음악 교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피타고라스의 음악론 및 우주의 하모니에 대한 생각 역시 중세 유럽 사회에 널리 퍼져 나갔다. 그 결과 중세 유럽에서 음악은 세계의 질서와 우주의 하모니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분야 가운데 하나로 간주됐다.
로버트 플러드의 『두 세계의 역사』의 권두화
특히 우주의 음악에 대한 연구는 지구와 행성 간의 거리 및 행성의 속도 등에 관한 천문학적 연구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인간의 음악에 대한 관심 역시 인체의 수학적 질서 및 인체와 천체 간의 조화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져 인체의 수학적 비 및 점성술에 대한 연구를 자극했다. 그리고 도구의 음악에 대한 관심은 화성학 및 음향학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성가의 형식으로 교회의 예배 속에 자리 잡아 갔다.
음악 및 우주의 하모니에 대한 연구는 이후 르네상스기를 통해 신피타고라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수비학(數秘學)적 연구들이 주목을 끌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가령 수학자이자 우주론자, 의사이자 점성술사였던 로버트 플러드는 『두 세계의 역사(Utriusque Cosmi Historia)』에서 지상계와 천상계라는 두 세계의 수학적 조화를 이야기하면서 구체적인 삽화를 통해 우주를 거대한 일현금(Monochord)으로 묘사했다.
일현금은 피타고라스가 음과 길이의 비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사용했던 악기였다. 하나의 줄에 특정한 길이의 비를 이루는 지점을 표시하여 각 지점을 누르고 현을 튕길 때, 길이의 비에 따라 일현금은 서로 다른 음을 냈다. 플러드는 지구로부터의 거리가 일정한 비율을 갖도록 천구들을 배열할 때 우주를 거대한 일현금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우주와 인체의 수학적 하모니
케플러의 『우주의 조화』 속 행성의 음악.
또한 이 시기에는 인간을 소우주로 보고 인간과 우주의 연결 및 조화를 발견하려는 경향도 증가했다. 이는 플러드의 『두 세계의 역사』의 권두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플러드는 우주라는 대우주 안에 인간이라는 소우주가 놓여 있다고 보았다. 플러드에게 인간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였고, 그 비밀은 수의 비를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독일의 지도제작자인 안드레아스 켈라리우스가 성도로 제작한 ‘대우주의 조화’ 속 지구 중심의 천구 우주 구조를 표현한 그림
우주의 하모니에 대한 생각은 근대 유럽의 과학자들까지도 매료시켰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행성이 지구가 아닌 태양을 중심으로 부등속 타원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후에도, 태양으로부터 각 행성까지의 거리와 회전속도의 변화에 따라 각 행성이 회전하면서 각기 다양한 음역의 소리를 낸다고 생각했다.
또한 티코 브라헤나 아이작 뉴턴 그리고 윌리엄 허셜 같은 과학자들 역시 행성 운동과 음악 사이의 관계 및 음악 이론 등에 관해 연구했다. 학자들은 우주에서 발견되는 수의 비와 우주의 하모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했다. 많은 과학자에게 음악을 연구하는 것은 우주를 연구하는 것의 일환이었다.
역사적으로 수의 비에 관한 연구는 단지 수학 연구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세계의 조화, 더 나아가서 우주의 조화 및 질서를 탐구하는 문제였다. 따라서 서양 문명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대상물에 감추어진 특정 수의 비를 찾는 작업은 꾸준히 계속되어 왔다. 수의 비는 철학적인 연구이자 음악 연구였으며 또한 우주론에 관한 연구였다.
우리나라에서 수의 비는 초등학교 때부터 배운다. 처음에는 약분 등을 통해 수의 비를 계산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중학교 때 이르면 수의 비가 나타내는 유리수를 공부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그런데 수의 비나 유리수에 관한 교육 과정에서 철학적이거나 음악적인 논의는 거의 모두 빠져 버렸다.
사실 수의 비에 관한 연구는 단순한 산술 계산을 넘어 오랫동안 철학적이고 우주론적인 연구와 연결되어 발전해 왔다. 수의 비를 통해 음악의 하모니의 원리는 물론이고 인간과 우주의 조화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기에 수의 비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분야로 간주되어 온 것이다.
역사적으로 수학은 많은 경우, 수학 그 자체의 논리를 통해 발전하기보다는 다양한 사회적, 학문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과정에서 발전해 왔다. 수의 비가 얼마나 다양한 분야와 관련되어 연구되었고, 어떤 과정을 통해 발전했는지를 살펴볼 때 수학이 어떤 학문이었는지를 보다 새롭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출처] : 조수남 수학사학자 ,서울대 강사 < 수학이 워길래> / 중앙 Sunday
4. 케플러와 정다면체 - 정다면체 5개만 존재 … 우주의 조화 보여주는 원리라 생각
‘물질의 4원소 물·불·흙·공기 - 정다면체 형태 띠며 우주 구성’ - 플라톤의 자연철학 발전 시켜
정다면체 원 궤도 구조 밝히며 - 행성운동 설명해 유럽 학계 놀라게
바깥의 황도 원 위에 목성과 토성이 만나는 점을 표시하고 순서대로 연결한 그림. 그림의 빨간 선은 1, 2, 3, 4의 시간 순서대로 연결한 선으로 삼각형과 유사한 연결선에 작은 원이 내접하는 것이 보인다. 케플러의 『우주의 신비』에 삽입된 그림
수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어렸을 때 한번쯤은 전개도를 가지고 정육면체를 조립해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평면도형만 배우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입체도형인 정다면체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정다면체의 성질들을 조금 더 자세하게 배운다. 그런데 흥미롭긴 하지만 이런 건 왜 배우는 걸까? 여기에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정다면체에 대한 연구는 일찍부터 시작됐다. 고대 그리스에는 한동안 세 개의 정다면체만이 알려져 있었다. 한 면이 정삼각형인 정사면체와 한 면이 정사각형인 정육면체, 그리고 한 면이 정오각형인 정십이면체가 그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이들 정다면체에 더해 한 면이 정삼각형인 정팔면체와 정이십면체를 발견했다. 그리고 더는 정다면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순수한 수학적 차원의 연구였다.
그런데 플라톤에 이르러 정다면체 연구는 새로운 관점에서 연구되기 시작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티마이오스』에서 우주의 창조를 설명하면서 물질의 변화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물질의 4 원소인 물·불·흙·공기는 태초에 불명확한 형태로 무질서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창조주가 여기에 정다면체의 형태를 부여하면서 조화로운 우주를 구성하기 시작한다. 물·불·흙·공기가 각각 정이십면체·정사면체·정육면체·정팔면체의 형태를 지니고 있고 그 모든 것이 구성된 우주가 정십이면체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후 플라톤은 물질의 변화와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해 정다면체를 좀 더 분석했다. 정다면체 중 정사면체와 정팔면체, 그리고 정이십면체의 한 면은 정삼각형이다. 이 경우 정사면체는 정삼각형 네 개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를 △×4라고 표현하면, 정이십면체는 △×20으로 표현할 수 있고, 다시 (△×4)×5라고 나타낼 수 있다.
이를 통해 정이십면체인 물(이 경우엔 불을 붙이는 램프의 기름이라고 보면)로부터 불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외에도 정이십면체인 물은 △×20=(△×4)×3+(△×8)이 되어 정사면체인 불 3개와 정팔면체인 공기 하나로 분해될 수 있다.
이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물이 끓어서 불과 공기가 섞인 뜨거운 수증기로 변화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물·불·공기는 모든 면이 정삼각형이므로 이들 간에는 서로 변화가 가능해진다. 자연히 한 면이 정사각형인 흙은 물·불·공기와 변환되지 않는다.
또한 각각의 물질 역시 변종들을 가진다. 플라톤은 정삼각형과 정사각형이 각각 직각삼각형 두 개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30°, 60°, 90°의 직각삼각형과 45°, 45°, 90°의 직각이등변삼각형이다. 이중 전자는 정사면체·정팔면체·정이십면체의 한 면인 정삼각형을 구성하고, 후자는 정육면체의 한 면인 정사각형을 만든다.
여기서 직각삼각형의 개수와 구성을 변화시키면, 크기가 변형된 다양한 정삼각형과 정사각형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에 따라 다양한 크기의 정다면체가 만들어진다. 이 경우, 같은 속성의 물질이라도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물질의 변종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가령, 물이라고 하더라도 탁한 물과 맑은 물, 휘발성 액체와 액체 연료 등 다양한 액체 물질들을 설명할 수 있다. 공기의 경우에도 맑은 공기와 흐릿한 공기·안개·구름 등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플라톤의 수학적 자연철학은 매우 흥미로우나,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비판되면서 연속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중세 서유럽에 플라톤의 철학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고 대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주축을 이루면서, 중세 서유럽의 다면체 연구는 유클리드의 『원론』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런데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플라톤의 저술들이 활발하게 번역되고 연구되면서 플라톤의 정다면체 연구도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르네상스기의 가장 뛰어난 기하학자 중 한 사람은 화가였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인데, 그의 저술 중에는 『다섯 개의 정다면체에 관한 소고』가 포함돼 있었다.
프란체스카의 연구는 이후 성직자이자 수학자였던 루카 파치올리에게 전해졌다. 파치올리의 『신성한 비례』는 그의 기하학적 연구를 잘 보여 준다. 이 책에서 그는 조화롭고 신성한 수학적 원리의 하나로 플라톤의 정다면체를 포함해 다양한 기하학적 다면체를 제시했다.
이 책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삽화로도 유명한데, 다빈치는 파치올리에게 기하학을 배우면서 60여 개의 삽화를 그려 이 책에 실었다.

야므니처의 책을 보았던 요하네스 케플러는 플라톤의 정다면체 연구를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인물이었다. 케플러는 천문학 연구를 하면서 지구를 제외한 행성이 왜 다섯 개(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당시에는 아직 천왕성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다)이며 각 행성의 궤도는 왜 그런 크기인지에 관해 의문을 품었다.
케플러는 그 과정에서 세상에 오로지 다섯 개의 정다면체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이 만든 우주의 조화를 보여 주는 수학적 원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1596년에 쓴 『우주의 신비』에서 행성의 회전 궤도를 각각의 정다면체에 외접시키는 구조로 설명했다.
정다면체는 오랜 역사를 통해 철학적으로나 미학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또 아름다운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 덕분에 수학 교육 과정에는 늘 우선적으로 포함됐다. 흔히 수학의 유용성을 실생활의 쓸모 등의 관점에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오랫동안 수학은 철학적이고, 신학적이며, 또한 미학적인 관점에서 매우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그것이 바로 서양 수학을 발전시켰던 원동력이자 뿌리였다.
[출처] : 조수남 수학사학자 ,서울대 강사 < 수학이 워길래> / 중앙 Sunday
5. 원 - 완벽한 기하학 도형, 행성의 등속 운동 원리로 여겨져
고대 천문학, 동심원 천구 상정 - 운동 속도 늘 일정하다고 생각 - 코페르니쿠스도 등속 운동 주장
원뿔 곡선 이론 접한 케플러 - 부등속의 타원 운동 궤도 밝혀
1 리치올리의 『새로운 알마게스트』의 권두화. 오른쪽 정의의 여신이 두 우주 구조를 들고 저울질하고 있다. 왼쪽(코페르니쿠스의 구조)보다 오른쪽(티코의 구조를 닮은 리치올리의 구조)의 무게가 더 나가면서 우수함을 강조하고 있다
수학 교과서에는 원이 많이 등장한다. 중학교에서는 두 원의 위치 관계나 원에서의 비례 관계, 그리고 원과 직선의 문제 등에 대해 배운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원의 방정식을 배운다. 그런데 원에 관해서는 왜 배우는 걸까? 그리고 원을 배우면 원만 배우지, 두 원의 위치 관계나 원과 직선의 문제 등은 왜 배울까? 그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기하학은 단순한 수학 지식이 아니었다. 기하학의 내용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로 보였고, 기하학적 증명은 논리적으로 너무도 완벽해 보였다. 그 때문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신이 창조한 세상을 기하학적 원리를 통해 이해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러한 기하학적 원리가 보다 잘 적용된 곳은 변화가 많은 지상보다는 늘 비슷한 운동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하늘이라고 보았다.
고대인에게 하늘은 완벽한 곳으로 보였다. 하늘은 늘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았고, 행성들과 별들은 주기적으로 규칙적인 회전 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기하학적 원리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면, 그곳에서의 운동의 궤도는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기하학 도형을 따라야 했다.
그것은 바로 원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동심원 천구 우주 구조는 바로 이런 생각에서 탄생했다. 천체의 행성들은 각각 지구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이루는 투명한 천구에 박혀서 원운동을 하며, 그 운동의 속도는 늘 일정하다고 본 것이다. 고대인에게 동심원 천구 우주 구조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하늘에 잘 어울려 보였다.

이후 플라톤은 기하학적 우주 구조에 대한 생각을 보다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창조주가 이 세상을 기하하적 형상에 따라 창조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주에서는 오로지 가장 완전한 도형인 원운동만이 늘 같은 속도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문제는 지상에서 관측하면 별이나 행성이 늘 등속원운동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가령, 목성의 궤도를 관찰하다 보면, 때로는 목성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뒤로 돌아 다시 동쪽으로 움직이고, 그러다 다시 서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관찰된다. 역행운동이라고 불리는 현상인데, 이는 행성의 운동이 반드시 원운동만 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행성의 운동 속도 역시 일정하지 않다. 동일한 행성도 빠르게 움직이다가 다시 느리게 움직인다. 또한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행성이나 별들이 등속원운동을 한다면, 행성은 늘 같은 크기로 보여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겉으로 관측되는 행성의 크기는 커졌다 작아지면서 늘 달라진다. 행성의 회전 속도 역시 일정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플라톤은 제자들에게 ‘원으로 (천체)현상을 구하라’는 과제를 남겼다. 천체는 완벽하여 오로지 등속원운동만이 가능하니, 그러한 원을 통해 복잡한 천체 현상을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행성의 운동을 등속원운동하는 하나의 원만으로는 행성의 운동 궤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내 새로운 원들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지구 중심의 천구 우주 구조 모형
우선, 행성이 지구를 중심으로 한 큰 회전 궤도 위를 스프링처럼 작은 원(주전원)을 돌면서 회전한다고 가정했다. 행성이 주전원 위를 돌면서 크게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 주위를 돈다는 것이었다. 이 경우, 행성은 스프링 모양으로 회전하게 되는데, 주전원의 반지름이 크면 굵은 스프링 궤도가 나오고, 반지름이 작으면 촘촘하게 뽀글뽀글한 스프링 궤도가 생겼다. 이럴 경우, 지구에서 관찰하면 행성의 역행운동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주전원을 가정해도 행성의 궤도가 잘 설명되지 않는 경우에는 궤도의 중심을 바꿨다. 행성 궤도의 중심을 지구가 아니라, 지구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진 점(편심)으로 잡는 것이다. 이때 행성이 지구가 아니라, 지구로부터 떨어진 점을 중심으로 큰 원(대원)을 그리며 회전한다고 보았다.
이럴 경우, 지구에서 보면 행성이 회전할 때 지구로부터의 거리가 계속해서 변한다. 지구에 가까울 경우도 있고 먼 경우도 있어, 지구에서 행성을 관찰할 때 행성의 크기가 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새로운 원을 고안하거나 변형하는 작업은 이후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들의 주된 업무가 됐다. 천문학자들은 원 궤도의 중심을 계속해서 변화시켰고, 원 궤도 위에 다시 스프링처럼 도는 주전원을 만들어 냈다.
이 과정에서 각각의 행성의 궤도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주전원의 크기나 편심의 위치 등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여러 원들 간의 위치 관계를 고려해야 했다. 또한 지구로부터 각각의 행성까지의 거리를 구하거나 편심의 중심으로부터 행성까지의 거리 등을 구하기 위해서는 중심에서부터 행성까지 선을 그어 원에서의 비례 관계나 원과 직선의 문제 등을 파악해야 했다.
그 결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에 이르면 새로운 원들은 80여 개에 이르렀다. 천문학자들의 주된 작업은 여러 원들 간의 위치 관계와 원에서의 비례 관계, 그리고 원과 직선 간의 관계 등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흔히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 하면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간단한 동심원 구조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천문학자들의 연구는 훨씬 더 복잡했다.

원운동만으로 천체 운동을 설명하는 작업은 근대 초까지도 계속되었다. 태양중심설을 발표한 코페르니쿠스 역시 원운동 하는 천구 구조를 그대로 고수하였다. 그는 태양과 지구의 위치만 바꾸었을 뿐, 고대 그리스 천문학에서 사용했던 주전원과 편심 그리고 대원 등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코페르니쿠스의 천체 구조에는 여전히 40여 개의 원들이 존재했다. 그에게 원은 가장 완벽한 도형이었고, 천체는 그런 원 궤도만을 같은 속도로 회전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천체 관측은 더욱더 정교해졌다. 하지만 천문학자들의 원에 대한 집착은 변하지 않았다. 천문학자들은 어떻게든 원운동으로 천체 현상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근대 초 망원경 발명 이전 가장 우수한 천문 관측을 했던 티코 브라헤 역시 원운동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방대한 천문 관측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 구조의 우수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기도교적인 세계관과 배치되는 점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졌다. 티코는 천문 관측 자료와 일치하면서도 기존의 세계관과 배치되지 않는 천체 구조를 새롭게 고안하였다. 티코의 우주 구조에서 태양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지만, 지구 외의 다른 모든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티코의 우주 구조는 지구 중심의 세계관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태양중심설 구조의 이점을 모두 취할 수 있었다. 결국 근대 초 유럽에서 가장 우수한 천체 구조로 평가되었던 것은 티코의 구조였다
이후 티코의 방대한 천문 관측 자료는 케플러에게 전해졌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후원을 받던 티코가 케플러를 조수로 고용한 뒤 1년 후 갑자기 사망하자, 케플러가 티코의 천문 관측 자료를 고스란히 물려받게 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지지했던 케플러는 태양 중심의 등속원운동 궤도를 통해 티코의 천문 관측 자료를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등속원운동 궤도로는 티코의 관측 자료를 만족시키는 우주 구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천체 운동의 기하학적 원리에 대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던 케플러는 티코의 관측 자료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기하학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아르키메데스의 원뿔 곡선(타원, 포물선, 쌍곡선)을 접하면서 케플러는 등속원운동을 버리고, 부등속 타원 운동 궤도를 고안하였다.
그리고 행성의 부등속 회전 운동의 수학 법칙 역시 제시했다. 이후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케플러의 부등속 타원 운동을 기하학적으로 증명하였을 때, 원은 하늘에서 폐기되기 시작했다.
수학 교과서는 일종의 역사책이다. 그 속에는 지금은 폐기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수학 법칙들과 이론들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두 원의 위치 관계나 원에서의 비례 관계, 그리고 원과 직선의 문제 등은 과거 천문학에서 사용되었던 수리 계산을 위해 교육되었던 내용이었다.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닌 타원 궤도로 변경된 지금, 두 원의 위치 관계나 원에서의 비례 관계 등에 관한 연구들은 천문학 분야에서 직접적인 실용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이 내용은 천체 운동을 원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던 과거의 창조적인 수학적 사고의 일면을 잘 보여 준다. 바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수학적 사고를 기르는 첫걸음이라 할 것이다.
[출처] : 조수남 수학사학자 ,서울대 강사 < 수학이 워길래> / 중앙 Sunday
6. 삼각함수 - 행성 간 거리 측정한 천문학의 삼각법 곡선운동 연구로 진화
태양·달·지구 각도 계산하고 - 사인 값 구해서 거리 측정 - 16세기 삼각 측량으로 지도 제작
진자·포 등 곡선운동 연구하며 - 물리·공학·그래픽·건축서 활용
스위스의 금세공인이자 기계 제작자였던 레온하르트 주블러의 ?새로운 기하학적 도구?(1607)의 삽화. 이 책에서 주블러는 자신의 새로운 기계를 선보이며 그 기계를 이용한 삼각 측량을 소개하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 서 있는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선분의 거리를 측정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왼쪽 산 위의 성 꼭대기를 연결해 삼각형을 만들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면, 산의 높이가 얼마나 높든 삼각법을 이용해 성 꼭대기까지의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
고등학교 수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복잡한 수학 공식을 외우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신프신은 두신코, 신마신은 두코신, 코프코는 두코코, 코마코는 마두신신… (아래 공식)” 바로 삼각함수 공식이다.
앞글자만 따서 만든 노래인데, 같은 공식이라도 학교 선생님마다 가사는 다 다르다. 그런데 이런 공식은 왜 만들어졌을까? 그 비밀은 천문학 연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기사에서 소개했듯이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에서는 원이 중요했다. 모든 행성과 별들은 늘 동일한 원운동을 한다고 여겼고, 그게 가능해 보이지 않는 경우에는 다양한 원운동을 결합해서 설명했다.
그런데 천체 구조가 복잡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체 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직접적인 단서는 오랫동안 각도가 거의 유일했다. 그런데 이런 각도 계산은 언뜻 흥미롭지만 사실 의미 없어 보인다. 각도만 가지고서는 행성과 그 운동에 관해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각도 계산을 통해 행성의 크기나 두 행성 간의 거리, 행성의 운동 궤도, 최종적으로는 우주의 크기 등을 짐작했다.
가령, 각도 관찰을 통해 어떻게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를 구했는지를 살펴보자.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를 최초로 계산한 인물은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이다. 그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를 계산하기 위해 그림과 같이 태양과 지구, 그리고 달이 직각을 이루는 때를 기다렸다.
이때 지구에서 달을 관찰하면 달은 정확하게 반달이 되는데, 그는 바로 이때 지구를 중심으로 달과 태양 사이의 각도(a)를 측정했다. 아리스타르코스가 관찰한 각도는 87°였다. 이 경우, ‘sin(90°-87°)=sin3°=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m)/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s)’가 되고, sin3°(=0.05233…)의 값은 1/19(=0.05263…)과 유사해진다.
따라서 아리스타르코스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의 19배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이전에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를 계산한 바 있었다. 결국 sin3°의 값만 알면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를 구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sin3°의 값을 어떻게 구하느냐다.
sin3°의 값을 계산하기 전에 먼저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인 값을 어떻게 정의했는지를 살펴보자. 사인, 코사인, 탄젠트의 값을 다루는 삼각법은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처음 사용됐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지금과 같이 sin, cos, tan 같은 기호를 사용하지 않았고, 계산 과정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도 않았다. 삼각법이 새롭게 정의되고 체계적으로 발전했던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였다.
그중에서도 삼각법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던 인물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히파르쿠스였다. 히파르쿠스는 주어진 원의 반지름을 알 때, 각각의 중심각에 대한 현의 길이를 구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히파르쿠스에 따르면, 반지름이 R일 때, 한 원호의 중심각을 a라고 하면 현 Crd(a)=2Rsin(a/2)가 된다. 비록 sin이라는 기호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현의 길이를 구하면 Crd(a)/2R를 계산할 수 있으므로 sin(a/2)에 해당하는 값을 구하게 된다.
이때 간단한 반지름과 현의 길이를 가정해 각각의 각에 대한 사인 값을 미리 구해 놓으면, 한 행성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마만큼의 각도로 움직였는지를 파악하여 지나간 거리를 알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행성의 궤도나 크기를 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가령, 삼각함수의 공식을 활용해 다양한 각도의 삼각함수 값을 구해보자. 만약 sin(60°)를 알고 있다면 삼각함수의 제곱 공식(sin2θ+cos2θ=1)을 통해 우선 cos(60°)의 값을 구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 반각 공식(sin2θ/2=1-cosθ/2)을 이용하면 sin(30°)를 구할 수 있다.
이러한 삼각법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구조가 나타난 이후에도 활발하게 활용됐다. 가령, 지구에서 금성까지의 거리를 구한다고 하자. 이 경우 태양과 금성 그리고 지구가 직각을 이뤄 금성이 반달처럼 보일 때,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a)를 알고, 태양과 금성 사이의 각(e)을 구하면, 지구와 금성 사이의 거리는 acose가 된다. 이런 방식을 먼 별이나 항성에 적용하면 우주의 크기를 짐작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렇듯 천문학에서 널리 사용되던 삼각법은 16세기에 이르러 지형 측량에도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각국의 민족의식이 성장하면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가 성장하자, 각국은 자국의 지형을 측량하고 국경이 표시된 지도 제작에 힘을 기울였다.
그때 유용했던 기법이 바로 삼각측량이었다. 네덜란드에서 고안된 이 방법은 비교적 가까운 두 지역을 직선으로 이어 거리를 측정한 뒤, 두 지역 각각에서 측량하고자 하는 지역이 앞의 직선을 기준으로 몇 도로 기울어져 있는지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이럴 경우 삼각형의 아랫변과 양 끝 각을 아는 형태가 되는데, 중학교 수학 과정에 따르면 이런 조건일 경우에는 삼각형의 나머지 한 각과 세 변의 길이 모두를 구할 수 있다.
이렇게 삼각형의 각과 변을 모두 구하는 것을 삼각형을 푼다고 이야기하는데, 삼각형을 풀기 위해서는 앞의 조건 외에도 두 변과 사잇각을 아는 경우와 세 각을 모두 아는 경우가 있다. 이렇듯 세 지점을 이어 가상의 삼각형을 만들고 그중 일부 각과 변의 길이를 구할 수 있다면 위의 조건에 따라 측정하기 어려운 지점 간의 거리를 쉽게 구할 수 있다.
따라서 거리를 재기 힘든 강이나 바다, 그리고 산꼭대기의 경우에도 가상의 삼각형만 잘 그리면, 직접 걸어서 재지 않더라도 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렇듯 삼각 측량 기법의 유용성이 알려지면서, 각국은 이 기법을 활용하여 다양한 영토를 측량하고 지도를 개선하기 시작했다.
초기 삼각 측량 기술은 네덜란드 수학자들에 의해 개발된 뒤 덴마크와 독일 지역에 적용됐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 아래 국토 전역을 탐사하고 지도로 제작했던 곳은 프랑스였다. 여기서는 카시니 가문의 지도 아래 방대한 국토 정밀 측량 사업이 진행됐는데, 이는 1756년부터 1815년까지 출판된 프랑스 지도의 완성으로 이어졌다.
삼각법이 천문 계산 및 지형 측량에 사용되던 즈음, 삼각함수는 포의 운동이나 진자 운동 같은 새로운 곡선 운동의 연구에도 활용되기 시작했다. 또한 목관악기나 건반 악기, 오르간 등의 악기가 내는 음의 진동에 대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더욱 심화된 삼각함수 연구가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sin x와 cos y는 x나 y 같은 변수처럼 대수적인 방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삼각함수는 처음 천문학의 필요에 의해 개발됐다. 그러나 시대적 요구와 수학적 기법의 발전 속에서 삼각함수는 새로운 분야에 활용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형식과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흔히 수학을 너무나 확실해 보이는 나머지 변하지 않고 고정된 분야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수학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화 발전해 왔다. 15세기 학자가 삼각함수를 보았다면 천문학에 응용되는 기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삼각함수는 물리학과 공학, 건축, 그래픽 등 그 활용 범위가 어마어마하다.
수학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진전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중·고등학교 교육 과정을 통해 이전 연구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얻을 때, 새로운 발전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조수남 수학사학자 ,서울대 강사 < 수학이 워길래> / 중앙 Sunday
7. 미지수 x·y 값 구하기 - 환율·이자 계산 실용적 필요 따라 방정식 이론 발전
르네상스 이르러 상업·무역 활발 - 다른 지역 간 화폐 교환 위해서 - 화폐의 귀금속 무게·순도 따져야
복리 이자로 갚아야할 만기 금액 - 고차방정식 통한 계산 불가피
음수·무리수·복소수 문제 나오고 - 이후 함수·미적분 연구로 이어져
그레고르 라이쉬의 『지혜의 진주』(1504) 속 ‘산술의 은유적 표현’ 삽화. 그림 왼쪽에는 인도 아라비아 숫자를 써서 『수론』을 집필한 로마의 저술가 보에티우스가 숫자와 기호를 이용해 계산하고 있고, 오른쪽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피타고라스가 주판을 사용해 계산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새로운 산술 방식이 전통적인 주산 방식과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중학교에서 다양한 1·2차방정식을 풀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3차 이상의 방정식도 접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이 된 성인들은 2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기억하고 있을까? 2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은 쉽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워낙 열심히 외워야 했으니까. 그렇다면 3차방정식의 근은 어떤가? 이쯤 되면 방정식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중·고교 시절 우리를 괴롭혔던 방정식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학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대 천문·기하학 풀이에도 응용
우리는 1차방정식 문제들을 매일같이 접하고 있다. “아침 8시 반까지가 출근 시간인데, 지금이 7시 10분이면 출근까지 몇 시간 남은 걸까”라는 생각을 한다고 하자. 남은 시간을 x라고 둔다면, ‘7시 10분+x=8시 30분’이라는 간단한 1차방정식 문제를 풀어야 한다. 따라서 1차방정식을 의미하는 문제들은 이미 고대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문명에서도 존재했다. 다만 그것이 현대 방정식 이론과 다른 점이라면, 지금처럼 문자나 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2차방정식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2차방정식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2차방정식 이상의 고차방정식 개념이 고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풀이 방법이 지금과는 약간 달랐고, 천문학이나 기하학 연구와 연관된 경우가 많았을 뿐이다.
가령, 원에 내접한 정오각형의 대각선의 길이를 구한다고 해 보자.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는 행성이 지나간 거리 등을 계산하기 위해 행성 궤도인 원에 내접하는 선분의 길이를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프톨레마이오스의 정리’에 따르면 오른쪽 그림의 경우 AC×BD=AB×CD+BC×AD가 성립한다. 이때 정오각형을 원에 내접시키면, 정오각형의 한 변의 길이를 알 때 ‘프톨레마이오스의 정리’를 이용해 대각선의 길이를 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오른쪽 그림의 선분 AB를 a라고 하고, 대각선 AD를 x 라고 하면 x2=a2+ax가 되어 대각선의 길이 x에 대한 2차방정식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기하학적 방정식 풀이는 유클리드의 『원론』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기하학적으로 논의되던 방정식 연구는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디오판토스에 이르러 현대의 방정식 연구와 보다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디오판토스는 자신의 책 『산학』에서 단어를 축약해서 기호로 표현하고 대수적인 방식으로 방정식을 풀이했다.
가령, x+y=10이고, x2+y2=68인 x, y를 구한다고 하자. 이때 디오판토스는 x, y를 각각 5+z, 5-z로 놓는다. 이럴 경우 각각을 제곱해서 더하면 50+2z2=68이 되고, 양의 정수인 z를 구하면 3이 나온다. 디오판토스의 방식을 x+y=a, x2+y2=b인 경우로 확장하면, 현대식 기호로 쓸 때 , x=+, y=-과 같은 방식으로 일반해를 구할 수 있다.
디오판토스의 연구와 함께 헬레니즘 세계에는 대수적인 방정식 풀이가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디오판토스의『산학』은 유클리드의 『원론』 등과 함께 아랍어로 번역되어 아랍 학자들의 대수학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편, 아랍에서는 인도 수학자들의 연구 역시 소개됐다. 인도에서는 행성 궤도의 주기를 연구하면서 방정식을 푸는 경우가 많았다. 7세기 인도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브라마굽타는 이 과정에서 2차방정식 ax2+bx=c의 한 근을 구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는 한 근이 현대의 방식으로 표기될 때 x=라고 보았는데, 음수와 무리수가 나오는 경우에도 해로 인정하였다. 또한 ax2±c=y2형태의 이차방정식에 대해서도 해를 제시했다.
이러한 그리스 수학과 인도 수학의 영향 속에서 이후 아랍 수학자들은 대수학 연구를 발전시켜 나갔다. 수학과 천문학 등을 연구했던 알콰리즈미의 『대수학』(830)은 대표적인 성과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인도에서 도입된 수와 0을 이용해 십진법으로 사칙연산을 정의했고, 더 나아가 다양한 유형의 방정식 풀이 방법을 정리했다.
그는 2차방정식을 총 다섯 가지 유형(ax2=bx ; ax2=c ;ax2+bx=c ; ax2+c=bx ; ax2=bx+c)으로 나눠 계산법을 증명했다. 편리한 수 체계와 계산 방법을 담은 알콰리즈미의 책은 아랍 세계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후 아랍에서는 오마르 카얌 같은 수학자에 의해 대수학 연구가 더욱 발전하였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카얌은 연구 과정에서 3차방정식 해법을 발견했고, 이를 열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기하학적으로 증명했다.
가령, x3+200x=20x2+2000과 같은 3차방정식을 카얌은 (x-15)2+y2=25라는 원과 y=인 쌍곡선의 교점을 통해 구했다. 카얌은 대수학이 길이나 넓이, 부피 그리고 무게 같은 물리적인 양을 다루는 데 유용한 실용적인 분야라고 보았다.
아랍에서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수준 높은 대수학 연구가 발전하는 동안, 서유럽에서는 여전히 로마 숫자 시스템과 유클리드 기하학 정도가 다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서유럽에서는 상업과 무역이 발전하면서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게 됐다.
피보나치가 인도 아라비아 숫자 체계와 대수적 연산 방법을 서유럽에 소개했던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피보나치는 『계산책』(1202)에서 이자율을 알 때 이자 계산을 어떻게 하는지, 환율에 따라 통화 환전은 어떻게 하는지 등 실용적인 문제에 관한 계산 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계산책』은 중세 서유럽에서 출판된 수학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이 책의 계산 방식은 이후 상업과 무역이 발전하던 서유럽 사회에 널리 영향을 미쳤다.

마리누스 판 레이머스발, ‘환전상과 그의 아내’(1539).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 무역 및 상업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 결과 이 시기 네덜란드에는 영국·이탈리아·프랑스 등 각국의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각국의 화폐를 교환해 주기 위한 환전상이 늘어났다.
유럽 경제가 성장하고 무역이 확대되면서 효율적인 실용 계산의 필요는 더욱 증가했다. 중세에는 물품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상대적으로 계산이 간단했다. 그러나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화폐 경제가 성장하면서 복잡한 계산이 늘어났다.
이 시기에는 도시가 발전하면서 세금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는데, 이 문제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포도주의 경우 양과 품질 그리고 통의 크기와 모양 등이 서로 달랐다. 만약 한 가게가 거래한 포도주에 대해 세금을 물리려고 하면 거래된 포도주의 양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은 물론, 품질과 가격 등을 고려해 세금을 공정하게 부과해야 했다.
포도주를 거래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상황에서, 각기 다른 포도주 통을 사용하고 다양한 품질과 가격을 지닌 포도주 가게에 대해 공평한 세금을 물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역이 발달하면서 상인들 간의 교환 문제 역시 복잡했다. 르네상스기를 통해 상업과 무역이 활발해지고 있었으나 도시마다 나라마다 통화시스템이 서로 달랐다. 이런 상황에서 각기 다른 통화 시스템에 적응하는 것은 무역상들에게 골치 덩어리였다.
우선 다른 지역의 화폐와 교환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화폐에 쓰인 귀금속의 무게와 순도 등을 고려하여 환율을 계산해야 했다. 어렵게 환율 계산을 해도 이것이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했다. 상품을 지급한 날과 돈을 받는 날의 환율이 다를 경우, 복잡한 계산이 이루어져야 했다.
또한 거래량이 많은 대상인의 경우에는 매번 환율을 계산하여 현금을 지급하는 것이 번거로운 일이었으므로, 어음으로 거래하는 신용 거래를 선호했다. 그러면서 어음을 현금으로 바꿔 주는 시장도 생겼다. 그런데 신용 거래를 위해서는 그날의 환율과 어음 만기일 등을 고려해 복잡한 계산을 해야 했다.
이외에도 금융 시장이 형성되면서 이자 계산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이자를 계산하는 방법도 단리와 복리의 경우가 달랐고, 매달 일정액을 갚는 경우와 한꺼번에 갚는 경우의 이자가 달랐다. 꼼꼼한 회계 관리나 장부 정리 없이는 원활한 사업이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학 계산에 능숙한 부기 계원이나 회계원들은 각 나라와 도시의 정부나 무역상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그러나 이들의 계산 능력은 동일하지 않았다. 문제가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복리 이자로 갚아야할 만기 금액을 계산할 경우 곧바로 고차방정식 문제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공개 수학 대결이 잦았던 것은 바로 그래서였다. 실용 수학자들은 자신의 수학 계산 실력을 뽐내기 위해 공개석상에서 상대방에게 수학 문제를 내고 더 많은 문제를 푸는 대결을 진행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상인 자녀들을 위해 실용 수학을 가르치는 학교가 늘어났는데, 수학 교사들은 자신의 수학 실력을 뽐내기 위해 수학 대결에 자주 나섰다. 뛰어난 계산 능력이 입증될 경우, 보수가 오르거나 더 좋은 보수를 받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방정식 풀이는 실용 계산의 목적에서 발전됐다. 그들은 행성 운동을 연구하면서, 혹은 환율과 이자를 계산하고 신용장과 환어음을 만들면서 방정식 이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음수나 무리수 그리고 복소수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방정식 연구가 결국엔 이후 함수와 미적분 연구로 이어졌음을 감안하면, 실용적인 필요가 수학 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수학이 어떻게 생겨났고, 왜 배우는지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양한 사회적, 학문적 필요 속에서 개발되고 발전되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조금은 인내하기가 더 편해질지도 모르겠다.
[출처] : 조수남 수학사학자 ,서울대 강사 < 수학이 워길래> / 중앙 Sunday
8. 타원·쌍곡선·포물선 등 이차곡선
- 갈릴레오, 등속·낙하운동 결합해 포탄의 포물선 설명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폴로니우스 - 『원뿔 곡선론』에 첫 체계적 정리
중세 서유럽에선 연구 등한시 - 르네상스 지나면서 관심 증가
천체운동·렌즈곡률 설명에 활용 - 방정식·함수·미적분에도 등장
디에고 우파노의 대포학 서적 속 포의 궤도 곡선 그림(1612년 출판, 1628년 판 삽화).
중학교에 들어가면 먼저 원과 직선에 대해 배운다. 그런데 고등학교 고학년에 들어가면 이차곡선이라고 불리는 타원과 쌍곡선 등을 만나게 된다. 타원과 쌍곡선에 관한 문제는 함수는 물론이고 이후 미분, 적분 단원까지도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복잡한 이 곡선은 왜 배우는 걸까? 이 곡선의 탄생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타원·포물선·쌍곡선 같은 이차곡선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아폴로니우스의 『원뿔 곡선론』에서 처음 체계적으로 정리됐다. 아폴로니우스는 이 책에서 유클리드를 포함한 이전 수학자들의 이차곡선 연구를 정리하고, 여기에 자신의 독창적인 연구 성과를 덧붙였다.
총 여덟 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에는 이차곡선에 대한 명제들이 400여 개나 실려 있다. 5권부터는 완전히 독창적이며 매우 수준 높은 연구가 담겨 있는데, 이는 이차곡선에 대한 방대한 성과라 할 것이다.
아폴로니우스는 이 책에서 이차곡선을 이전과는 달리 이중 원뿔 구조를 이용해 통일적으로 정의했다. 그는 먼저 직원뿔 두 개를 서로 마주 보도록 놓은 다음, 바닥 면과 일정한 각도를 이루는 평면으로 원뿔을 절단했다. 그런 다음 절단되면서 원뿔 겉면에 생긴 곡선을 각각 원·타원·포물선·쌍곡선으로 정의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차곡선에 대한 연구는 이후 서유럽 중세에서는 제대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아폴로니우스의 『원뿔 곡선론』은 13세기 후반 일부분이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번역 작업은 16세기에 진행됐다.
사실 이 시기에는 원이 곡선운동을 지배하고 있었다. 서유럽 중세를 대표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 따르면, 세계는 달 아래의 지상계와 달을 포함하여 그 위쪽 우주를 포괄하는 천상계로 뚜렷이 구분되어 있었다. 이때 지상계는 불완전하므로 기하학적 운동으로 설명하기 힘든 곳이라 여겨졌다.
반면 천상계는 완벽한 곳으로, 오로지 완전한 기하학적 운동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천상계의 운동은 그 완벽함에 어울리는 등속원운동으로만 국한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들은 등속원운동만으로 복잡한 천상계 행성의 운동을 설명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예수를 둘러싼 아몬드 모양이 베시카 피시스. 1200년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장식된 그림
이러한 원은 지상에 세워진 건축물의 설계나 장식 등에도 적용됐다. 이는 중세 서유럽의 독특한 건축 양식인 고딕 양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고딕 건축물의 아치를 이루는 곡선이나 스테인드글라스 위의 곡선, 그리고 ‘베시카 피시스’라는 독특한 장식 문양의 곡선은 언뜻 원과는 다른 곡선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곡선들은 모두 두 원을 겹쳐 만들어진 곡선이었다.
이에 반해 중세 동안 타원이나 쌍곡선 같은 곡선을 활용하는 분야는 없었다. 서유럽 대학에서의 기하학 연구는 유클리드의 『원론』 앞부분에 머물러 있었고, 고등 수학에 해당하는 아폴로니우스의 이차곡선에 대한 연구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이차곡선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상계의 운동 역시 수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갈릴레오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갈릴레오는 운동을 연구하면서 시간·속도·거리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그것들 사이의 수학적 관계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인물이 운동이 왜 일어나는가에 주목했던 것과는 달리 운동이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형태로 일어나는지에 주목했다. 이 과정에서 ‘물체의 낙하 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운동의 수학적 법칙을 유도하기도 했다.
물체의 낙하운동 법칙을 유도한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구조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지구가 돈다면, 높은 탑에서 공이 떨어지는 동안 지구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왜 공은 탑 바로 아래에 떨어지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에 대해 갈릴레오는 지상의 물체는 지구가 지닌 원운동을 같이 지니고 있기 때문에 수직 방향으로 낙하하는 동안 동시에 수평 방향의 등속운동을 계속하므로 탑 바로 아래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갈릴레오는 책상 위에 경사면을 만들어 공이 등가속도로 움직이게 한 다음, 경사면을 거쳐 책상 아래로 떨어지는 공의 궤적을 조사했다. 이 실험을 통해 투사체의 궤도가 포물선임을 확인했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운동의 결합을 발사되는 탄환의 운동에도 적용하였다. 그는 대포에서 발사된 탄환의 운동을 수평방향의 등속운동과 수직 방향의 낙하운동으로 분해했다. 그리고 두 운동의 결합을 통해 탄환이 포물선을 그리며 운동함을 유도했다.
16, 17세기 동안에는 포수들을 위한 매뉴얼이나 대포학 서적 등의 출판이 크게 증가됐다. 타르탈리아 역시 갈릴레오에 앞서 대포 탄환의 곡선 궤도에 대해 연구했던 수학자였다.
그는 대포를 어떤 각도로 기울일 때 탄환이 가장 멀리 나아가는지를 계산했다. 그에 따르면, 탄환이 움직이는 곡선 궤도는 대포를 기울인 각도로 날아가는 직선운동과 지구 위의 물체가 지닌 원운동, 그리고 아래 방향의 직선낙하운동의 결합으로 만들어졌다.
비록 이 곡선 궤도는 잘못된 것이었지만, 대포 기술과 관련해 운동의 기하학적 궤적을 연구했던 것은 이전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경향이었다. 새로운 곡선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증가하였다.
이차곡선 활용하는 분야 확대
갈릴레오의 망원경 소식은 천문학자들을 열광시켰고, 갈릴레오 망원경의 단점을 보완하는 더 나은 망원경 개발을 부추겼다. 그 과정에서 넬이나 케플러, 데카르트, 비커만 등은 렌즈의 곡면을 쌍곡면과 타원면 등을 이용해 개량해 가며 기하학적으로 설명해 나갔다. 이차곡선의 유용성은 렌즈 제작에서도 돋보였다.
17세기에 이르면, 원 이외의 다양한 곡선 궤도를 연구하는 것이 수학자들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대포와 총의 탄환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포물선운동을 이해해야 했다. 행성과 혜성, 그리고 유성의 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타원 궤도에 더해 포물선과 쌍곡선 궤도를 연구하는 것이 필요했다.
또한, 망원경과 현미경 등의 렌즈곡률을 설명하는 데는 타원·쌍곡선·포물선 등이 활용됐다. 자연을 수학적으로 더욱 정확하게 기술하고자 했을 때 이차곡선은 무엇보다도 유용한 도구가 되어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차곡선을 활용하는 분야는 더욱더 확대됐고, 이차곡선 이외의 새로운 곡선에 대한 연구 역시 활발해졌다.
이차곡선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더욱 복잡한 곡선 연구를 위해 전제되어야 할 과제다. 방정식을 배우면서도, 함수나 미적분을 배우면서도 계속해서 이차곡선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그래서다. 아폴로니우스는 자신이 연구한 이차곡선이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언뜻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이는 수학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래서다.
[출처] : 조수남 수학사학자 ,서울대 강사 < 수학이 워길래> / 중앙 Sunday
9.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
- 기하·대수학 활용 해석기하학 만든 ‘곡선의 아버지’
가톨릭·개신교 극심한 갈등 시기 - 절대 확실한 진리 탐구 여정 나서
비례자라는 기구 이용 곡선 작도 - 움직이는 점의 자취 x, y로 놓고
삼각형 닮음 활용, 방정식 구해 - 새 분석법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
네덜란드의 화가 세바스티안 브랑스의 ‘보머험(벨기에 지역)에서의 약탈’(1625~1630). 30년 전쟁은 용병들로 치러진 전쟁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용병들에게 적절한 임금이 전달되지 못했을 때, 용병들의 약탈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중·고등학교 때 함수의 그래프를 그려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요즘 학생들도 중1 때부터 일차함수의 그래프를 배우고 그린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도형의 방정식이나 이차함수의 그래프를 공부한다. 그때 기하학 그래프와 그 그래프에 대응하는 방정식이나 함수를 같이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깨닫고 공부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수학의 발전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 서유럽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인 데카르트의 고민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가 살았던 시기의 서유럽은 극도로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곳이었다. 16세기 초에 시작되었던 가톨릭과 개신교 종파 간의 갈등은 17세기에 더욱 심화되었다. 가령, 1610년 프랑스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을 완화하고 종교에 대한 관용을 주장하던 앙리 4세가 광신 가톨릭교도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대 프랑스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이후 프랑스 각지에서는 앙리 4세의 장례식과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10대의 데카르트가 다니던 라 플레슈라는 예수회 학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서로 자신의 교리가 가장 확실함을 주장하고 있었으나, 누구도 무엇이 확실한 진리인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데카르트가 20대에 들어선 즈음에는 세계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까지 불리는 ‘30년 전쟁’(1618~48)이 일어났다. 데카르트는 네덜란드로 건너가 여러 군주에게 봉사하면서 30년 전쟁의 참혹상을 지켜봤다. 세상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진리에 이르기에 부족해 보였다.
1630년대 초, 데카르트는 전쟁으로부터 벗어나 네덜란드에 정착한 뒤 깊은 사색에 들어갔다. 『세계』(1664)와 『인간론』(1662)이 집필된 건 바로 이 시기였다.
그런데 출판을 앞두고 갈릴레오의 종교재판 소식이 전해졌다. 서유럽에서 가장 저명한 학자 중 하나인 갈릴레오가 자신이 펴낸 책 때문에 재판을 받는다면, 자신 역시 안전할 리 없었다. 결국 『세계』와 『인간론』은 데카르트 사후에 출판되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 보였던 시기에 피론주의라는 고대의 극단적인 회의론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진리도 참된 지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피론주의의 주장은 불확실성의 시대와 잘 어울렸다.
이렇듯 불확실하고 회의적인 상황에서 데카르트는 회의주의의 거센 파도에 정면으로 맞서 절대 확실한 진리 탐구의 여정에 나섰다. 그는 먼저 체계적 의심의 방법을 통해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있거나 논쟁적인 지식은 철저히 부정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부정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렀다. 바로 이 명제를 철학의 제1원리로 삼은 데카르트는 그로부터 신의 존재 증명과 이성에 대한 확신을 통해 참된 진리를 위한 새로운 방법론에 관한 논의로 나아갔다.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인간이 확실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사회에 불확실한 지식이 팽배해 있는 것은 인간이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해 참된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연구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새로운 학문 방법을 위한 가장 훌륭한 선례는 수학으로 보였다. 그는 기하학과 대수학의 연구 방법에 주목했다. 그가 보기에 기하학은 공리와 같은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명제들로부터 시작해 복잡한 기하학적 정리들을 유도해낼 수 있는 미덕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대수학은 간단한 기호를 사용해 계산을 효율화할 수 있었고, 추상적인 미지의 양을 다루는 데도 유용했다.
다만 기하학과 대수학의 방법에는 단점이 존재했다. 우선 기하학과 대수학에서는 추상적이고 아무 소용도 없어 보이는 문제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대수학의 경우, 이자나 환율 계산 등의 실용적인 목적과 함께 발전하였지만, 고차방정식 풀이로 발전하면서는 실용적인 목적과는 동떨어진 채 너무 복잡해지고 있었다.
전통적인 기하학적 방법 역시 근대 초에 등장한 다양한 곡선을 다루는 데는 효율적이지 못했다. 대포알의 궤적을 계산하기 위해서도, 경사면 운동을 논하기 위해서도 다양한 곡선에 대한 연구는 불가피했으므로, 기하학은 바뀌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데카르트는 기하학과 대수학의 장점을 모두 가지면서도 단점은 지니지 않는 새로운 수학적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데카르트는 모든 문제에 접근할 때, 가장 단순한 것으로부터 시작해 새롭고 복잡한 지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곡선 연구의 경우, 가장 단순한 직선으로부터 시작해 복잡한 곡선의 연구로 나아가고자 했다. 복잡한 문제를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직선 등을 간단한 기호로 나타내고,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문제로 나눈 뒤, 구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열거하는 순으로 나아가야 했다. 바로 데카르트가 개발한 해석기하학의 방법이었다.
『방법서설』 뒤에 실린 ‘기하학’에서 소개
데카르트는 해석기하학의 방법을 『방법서설』(1637) 뒤에 실린 ‘기하학’에서 소개하고 있다. 이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가령, 데카르트는 ‘기하학’ 2편에서 곡선의 성질을 다루면서 비례자라고 불리는 기구를 사용해 복잡한 곡선을 작도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아래 그림) 비례자는 Y점을 중심으로 자 YZ와 YX가 서로 벌어질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때 점 B에서 자 YX에 수직이 되도록 자 BC를 연결한다. 그런 다음 점 C에서 자 BC와 만나도록 직각자 DCZ를 놓는다. 이때 YX를 움직이면 점 C가 움직이면서 점 D가 연쇄적으로 움직인다. 움직이는 점 D를 모두 이으면 점 A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곡선을 얻게 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 YX를 움직일 때 점 F와 H가 그리는 점들을 이으면 각각 새로운 곡선이 만들어진다.
이제 아래의 곡선을 연구하여 참된 지식을 얻으려 한다고 하자. 전통적인 기하학의 방법으로는 곡선에 대한 만족스러운 정보를 얻기가 힘들다. 그런데 곡선 위를 움직이는 점의 자취를 (x, y)로 놓으면 구체적인 곡선의 방정식이 얻어진다.
가령, 점 D가 그리는 곡선의 방정식을 구하기 위해 점 D의 좌표를 (x, y)로 놓고, 변하지 않는 일정한 값을 가지는 선분 YE의 길이를 a라고 두자. D의 좌표를 (x, y)로 둘 때, 선분 YC는 x가 되고, 선분 CD는 y가 된다.
이때 삼각형 YBC와 삼각형 YCD의 닮음 관계를 활용하면, x4-a2x2-a2y2=0이라는 4차식이 만들어진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점 F의 좌표를 (x, y)라고 놓고 삼각형 YCD와 삼각형 YDE, 그리고 삼각형 YEF 간의 닮음을 활용하면 변수 x, y에 관한 8차 방정식이 유도된다.
가장 단순한 직선에서부터 시작해 직선 위의 점과 선분에 간단한 기호를 부여하고, YX를 들어 올릴 때 삼각형의 닮음 조건들을 정확하게 열거하여 계산하면 새로운 곡선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아래 그림에서 고정된 G점을 중심으로 자 GL이 아래위로 움직이고 KL과 NL의 길이가 변하지 않으면서 아래위로 함께 움직이면, KN을 연장한 KC가 GL과 교점 C에서 만난다. 이때 자 GL이 아래위로 움직이면 점 C는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새로운 곡선을 만들어 낸다.
이 곡선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곡선의 방정식을 구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변하지 않는 선분 GA의 길이를 a, 선분 KL의 길이를 b, 선분 NL의 길이를 c, 그리고 움직이는 점 C의 좌표를 (x, y)라고 두자. AK를 x축으로 놓고 AG를 y축으로 놓은 상태에서 삼각형 KNL과 삼각형 KCB의 닮음, 그리고 삼각형 LCB와 삼각형 LGA의 닮음을 활용하면, 점 C가 그리는 곡선의 방정식 y2=cy-y+ay-ac가 얻어진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수학적 방법(해석기하학)을 통해 다양한 곡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철학 및 과학의 다른 분야들에서도 새로운 방법을 통해 참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방법서설』 뒤에 이어지는 ‘굴절 광학’ ‘기상학’ ‘기하학’ 부분은 그러한 방법이 적용된 새로운 지식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흔히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을 이야기할 때 데카르트가 천장에 기어 다니는 거미를 보며 좌표평면을 떠올렸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은 보다 진지한 철학적 고민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가 예견한 것처럼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던 효과적인 연구 방법이었다.
지금 배우는 수학이 고통스럽더라도 데카르트가 아니었으면 더 고통스러운 수학 시간이 되었을 걸 생각해 보자. 아무쪼록 변수 x, y와 친해지길 바라며, 학생들에게 건투를 빈다.
[출처] : 조수남 수학사학자 ,서울대 강사 < 수학이 워길래> / 중앙 Sunday
[출처] 조수남의 수학이 뭐길래 [ 1~ ]|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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