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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스캔달[21회~24회]

문수봉(李楨汕) 2017. 12. 12. 22:38

조선왕조 스캔달[21회~24회]


갑신정변의 패착, 폐비 윤씨, 폐세자 양녕대군, 요동정벌이 왕자의 난 유발, 






21. 천하를 쥐려 한 갑신정변 주역들의 ‘패착’ 

-성패 열쇠인 정규병력 규합하는 데 소홀했다 


김봉균·이규완·이희정 등 박영효의 겸종으로 특채돼 고종 감시 등 ‘특공대’ 역할 맡아

… 거사 실패 후 일본정부 책임 회피 급급한 가운데 조선은 급속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화재로 소실되기 이전의 우정국 건물 전경(서울 안국동 부근). 1884년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장소로 유명하다.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에서 핵심 주도자였던 박영효와 김옥균. 그들은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해 목숨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들을 믿고 정변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은 체포된 후 혹심한 고문을 받고 능지처참됐다. 특히 친청(親淸)파 대신들을 살해하고 고종을 감시하는 등 온갖 악역을 담당한 사람들은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으로 간주돼 일족이 몰살되는 참화를 입었다. 그중에서도 고종에게 단단히 미움을 산 주인공은 김봉균·이인종 그리고 이희정 3명이었다.

이 중에서 김봉균과 이희정은 갑신정변 직후 곧바로 체포돼 조사를 받고 참형을 당했다. 그 소식을 들은 고종은 “김봉균은 경우궁에서부터 늘 내 뒤를 따라다니며 감시하던 자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원통하다. 지금 그자를 참형했다고 하니 분이 조금 풀린다”는 말까지 했다. 



1885년 초 일본 망명 시절의 갑신정변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서재필·김옥균 


웬만하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고종이 이 정도의 분노를 표출했다는 것은 미움이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었다. 고종은 이인종과 이희정에 대해서도 “지난번 문을 파수(把守) 하면서 사람들을 금지하던 자들이다. 괴수는 아직 체포하지 못했지만 이 역적들을 법에 따라 처벌했으니 또한 통쾌하다”고 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런데 김봉균·이인종 그리고 이희정은 모두 박영효의 최측근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갑신정변에서 고종을 밀착 감시했을 뿐만 아니라 민씨 일족을 암살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의 역할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박영효의 측근이라는 사실 외에도 정변에 가담한 조선 측 정규군이 거의 없었던 탓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본래 김봉균은 박영효의 겸종(傔從)이었는데 겸종이란 청직(廳直)과 같은 말이었다. 겸종은 노비 중에서 선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신체 건장하고 무술 잘하는 평민 중에서 특채하기도 했다. 그런 겸종은 말 그대로 양반의 최측근이자 경호원이었다. 예컨대 흥선대원군의 섭정 시절에 통칭 천하장안(天河張安)으로 불리며 세도를 부리던 천희연·하정일·장순규·안필주 같은 이들 역시 겸종이었다.

김봉균은 23세 되던 1880년에 박영효의 겸종으로 특채된 후 경호원이자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박영효는 바로 이 김봉균을 시켜 갑신정변 중에 고종을 밀착 감시케 했던 것이다. 그 정도로 김봉균에 대한 신뢰가 컸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하겠다.

김봉균과 더불어 박영효의 신임을 받은 겸종 중에는 또 이규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김봉균보다 세 살 아래였고 역시 특채 겸종이었다. 그는 갑신정변 와중에 김봉균 못지않은 활약을 벌이다가 정변 실패 후 박영효를 따라 일본으로 망명해 목숨을 부지했다. 그는 이후로도 평생 동안 박영효에게 충성을 바쳤다.


전국의 보부상 조직 쥐락펴락했던 이인종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 있는 김옥균의 묘지. 일본인들은 망명한 김옥균을 냉대하다 그가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자 머리카락과 의복 일부를 가져다 묘소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인종은 김봉균·이규완과 달리 박영효의 겸종이 아니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인종은 종5품인 훈련원 판관까지 지냈으며 임오군란 직후 금위영 초관(哨官)으로 퇴직했다. 이런 사실로 보면 그는 무관 출신의 양반이라 할 수 있다.

군에서 퇴직한 이후에 이인종은 박영효의 가인(家人)으로 불렸는데 가인이란 박영효의 집에 드나드는 측근이란 뜻이다. 이런 인연으로 박영효는 이인종을 혜상공국(惠商工局)의 소임(所任)으로 만들었다. 당시 혜상공국의 소임은 조선의 돈과 무력을 주무르는 실세 중 실세였다. 왜냐하면 혜상공국은 보부상(褓負商)을 관할하는 최고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보부상은 봇짐장사인 보상(褓商)과 등짐장사인 부상(負商)을 합친 말로 이들이 조선시대 유통업을 장악했다. 유통업이라는 특징에다 봇짐장사와 등짐장사라는 특징이 더해진 보부상은 수도 많았고 용맹한 사람도 많았다. 조선후기 들어 약 3000개에 달하는 장시를 돌아다니며 유통업에 종사한 보부상은 줄잡아 10만 명이 넘었고, 한양에만도 수천 명의 보부상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보부상의 돈과 무력을 장악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전국적인 보부상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혜상공국이었다. 혜상공국의 최고 책임자는 명목상 당상관이었지만 행정실무는 바로 소임이 맡았다. 전국의 보부상에게 유통면허를 내주고 이들로부터 세금을 받는 등의 실무를 바로 소임이 집행했던 것이다.

박영효의 가인이자 혜상공국의 소임인 이인종은 보부상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에게는 박영효의 신임에다 보부상의 유통면허 발급이라는 절대권력이 있었다. 이인종은 동대문 안쪽에 살았기에 그 주변의 많은 보부상이 그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다. 이희정 역시 이인종과 같은 동네 사람으로 그와 결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다. 이런 인연으로 박영효는 이희정 역시 깊이 신임했고, 이런 신임을 배경으로 갑신정변 때 이들로 하여금 고종을 측근에서 감시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박영효는 이인종을 매개로 동대문 주변의 보부상 중에서 힘이 세고 무술이 뛰어난 장사들을 측근으로 끌어들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윤경순·계완 형제였다. 박영효의 겸종으로 특채된 이규완 역시 보부상의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는 나무 장사꾼이었고 어머니는 보따리 장사꾼이었다. 이규완은 태껸의 명수로 이름이 자자했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어느 날인가 박영효가 그의 집에 쌀을 한 섬 보냈고, 이에 감동한 그의 아버지가 인사를 드리라고 해 박영효를 찾아가 “쌀을 보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인연이 맺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이규완의 사람들을 알아보고 쌀을 보내게 한 사람은 이인종이었을 듯하다. 이런 식으로 박영효에게 포섭된 장사는 이규완을 비롯해 윤경순·계완 형제 그리고 최은동·황용택 등 30명 정도 됐다.

박영효가 이렇게 많은 장사를 포섭한 이유는 암살단으로 써먹기 위함이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성공적인 역모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역모를 성공시킨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한양이나 한양 주변의 정규군 2000명가량을 포섭해 주력군으로 이용했다. 이들 외에 측근 경호원이나 암살요원으로 쓰기 위해 포섭하는 장사는 10명 안팎이었다.

이에 비해 박영효와 김옥균은 갑신정변을 모의하면서 정규 병력을 거의 포섭하지 못했다. 그 대신 암살단 30여 명을 위시해 일본 육사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관생도 14명 그리고 신복모와 윤계완을 통해 포섭한 전영(前營)의 정규 병력 50명가량이 전부였다. 이렇게 보면 갑신정변에 동원된 조선 측 병력은 다 합해도 100명이 되지 않았다. 이들 중에서 주력은 역시 30명 정도의 암살단이었다. 


조선을 ‘취업시장’으로 삼으려 했던 일본의 꼼수 



갑신정변에 즈음해 일본에서는 실직한 사무라이들이 넘쳐났다.


박영효와 김옥균이 암살단을 중심으로 정변을 추진한 이유는 바로 일본의 고토 소지로(後藤象次郞)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김옥균은 1882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有吉)의 주선으로 고토를 만났는데 그때 고토는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100만 엔의 군자금과 동지를 모은 후 조선으로 건너가 일거에 잡배들을 물리치고 조선을 태산과 같이 안전한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고 약속했다.

고토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본 내에서 군자금과 동지들을 모았다. 그런데 이때의 동지는 다름아니라 정변에 동원될 자객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메이지유신의 여파로 실직한 사무라이(侍)들이 넘쳐났다. 그들은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기에 낭인(浪人)이라고 불렸다.

그들 중 일부는 대륙으로 진출하는 것이 일본도 살고 자신도 사는 길이라고 해 조선이나 중국으로 진출하고자 했는데 그들을 대륙낭인이라고 했다. 고토는 후쿠자와와 의논해 대륙 낭인 수십 명을 모았고 나아가 군자금 100만 엔도 마련하고자 했다. 고토 그리고 후쿠자와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김옥균을 돕고자 한 이유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일본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후쿠자와는 그런 사실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예컨대 후쿠자와 자신이 운영하는 <시사신보(時事新報)>라는 신문에 쓴 사설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다.

“(조선을 원조함으로써) 조선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지위를 얻게 하면 그 이익이 특히 크다고 할 것이다. 일본에 양학(洋學)이 들어온 지 벌써 오래됐고 특히 개국한 지 30년 만에 급속히 면목을 갖추게 돼 공·사립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사람도 적지 않고 지금 공부를 마치려 하는 사람도 많다. 이는 분명 문명교육의 성과라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인물을 막상 쓰려고 하면 전국 어디에서도 쓸 곳이 없다. 인간의 학술은 이미 숙성해 있지만, 그들에게 적합한 일자리가 없어 어려워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이는 그 본인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지식인이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또한 그 사람의 마음도 안정되지 못해 어떤 때는 시끄럽게 물의를 일으켜 나라의 정치를 불편하게 하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지금 이런 사람들을 조선으로 보내 좋은 일자리를 얻게 하게 하는 것은 흡사 우리에게 남아돌아 곤란한 것으로 상대편이 부족해 곤란한 것에 보충해주는 것과 같아서 서로에게 유익하다.”(후쿠자와 유키치 <시사신보> 1883년 6월 5일)

이 주장처럼 고토와 후쿠자와가 김옥균을 돕고자 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일본에 남아도는 인력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함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실직한 사무라이들뿐만 아니라 학업을 마쳤지만 취업하지 못한 예비 취업자가 넘쳐났다. 이들이 사회 불안뿐만 아니라 정치 불안도 야기했다. 이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정치안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딘가에서 거대한 취업시장을 확보해야 했다. 고토와 후쿠자와는 조선을 원조함으로써 조선을 취업시장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고토와 후쿠자와의 조선 원조론은 방법만 달랐지 1870년대의 정한론(征韓論)과 같은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정한론은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 실직한 사무라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자 한 것이었다면, 고토와 후쿠자와의 조선 원조론은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실직한 사무라이들 그리고 새로 학업을 마친 취업 준비생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민간 사회에서 고토와 후쿠자와의 영향력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100만 엔을 쉽게 확보할 수는 없었다.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고토는 1년 가까이 노력했지만 일본 민간에서 100만 엔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884년 여름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베트남 영유권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었다.

청나라는 건국 이래로 베트남 국왕을 임명함으로써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1874년 3월 베트남은 프랑스의 압력을 받고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의 첫 번째는 ‘프랑스와 베트남은 영구 연맹하며 프랑스는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형식적으로 베트남의 자주독립을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는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프랑스가 베트남을 영유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하는 등 강력하게 항의했고, 1883년에는 국지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양국간의 무력충돌은 점차 확대됐다.

그 결과 리훙장(李鴻章)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투입할 병력을 요동 지역에서도 차출했는데 이것이 조선의 정치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리훙장은 요동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한양에 주둔하던 3000명의 병력 중에서 절반을 요동으로 이동, 배치했다. 그때가 1884년 5월.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의 전면전은 시간문제였다. 


고토 소지로, 프랑스에 100만 엔 요구 



청일전쟁 개전 소식을 듣고 술렁거리는 서울 거리의 외국인들. 당시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1894년 8월 13일자)에 실린 삽화다


고토는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하고자 했다. 고토는 도쿄의 주일 프랑스 공사관을 찾아가 담판을 벌였다. 만약 프랑스에서 자신에게 100만 엔의 자금과 동양함대의 함선을 빌려주기만 하면 자신은 이것을 가지고 조선으로 건너가 개화파를 원조해 친일정권을 수립할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프랑스는 두 가지 점에서 큰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첫째 이익은 현재 프랑스는 청나라와 전면전을 앞두고 있는데 만약 조선에 반청적인 친일정권이 수립된다면 리훙장은 최대 해군력인 북양해군을 동원할 수 없으므로 프랑스가 승리하리라는 것이었다. 둘째 이익은 만약 조선에 반청적인 친일정권이 수립되면, 고토 자신이 나서서 조선과 프랑스의 통상을 주선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1866년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프랑스에 대한 인식이 나빠져 그때까지 프랑스와 통상하지 않고 있었는데 고토는 이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주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요컨대 고토는 자신에게 100만 엔의 군자금과 동양함대의 함선을 잠시 투자하면 베트남에서의 승리와 더불어 조선에서의 통상이라는 큰 이익을 안겨주겠다고 유혹한 것이었다.

이것은 프랑스 입장에서도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100만 엔과 동양함대가 비록 큰돈이고 큰 무력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을 아주 주는 것도 아니고, 잠시 빌려주기만 하면 베트남에서의 승리와 조선에서의 통상이라고 하는 거대한 이익이 확보된다는데 그것을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주일프랑스 공사는 긍정적으로 답변하면서 본국에 회신해 가부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냉정하게 따져보면 이 같은 고토의 처신은 조선의 주권을 완전히 무시하는 망동이었다. 그는 일개 일본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조선 내부의 정권교체와 외교통상 문제를 놓고 프랑스 공사와 담판을 벌였다.

고토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김옥균과의 약속, 즉 친청파를 몰아내는 대가로 자신이 조선의 고문이 되겠다고 한 약속 때문이었다. 김옥균은 조선의 자주독립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고토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고토는 그 요청을 빌미로 자신이 이미 조선의 고문이고 또 그렇기에 조선의 주권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옥균은 자신을 돕기로 한 고토가 조선의 주권을 가지고 이런 망동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토는 주일프랑스 공사와 몇 차례 담판을 벌인 결과 100만 엔과 동양함대 사용은 시간문제라는 답변을 들었다. 고토는 곧 조선으로 넘어갈 준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참의겸궁내경(參議兼宮內卿)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고토의 집을 방문했다. 고토는 취중 담소 중에 주일프랑스 공사와의 담판 내용을 떠벌렸다.


장고(長考)에 들어간 이토 히로부미의 선택은?

 


청말의 정치가로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했던 리훙장 


고토는 자랑삼아 한 얘기지만 이것은 일본정부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중대한 사안이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청나라와 프랑스의 전쟁에 중립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이길지 알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혹 청나라가 진다고 해도 청나라와 적대국이 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그런데 만약 고토가 프랑스의 군자금과 동양함대를 빌려 조선으로 가서 친일정권을 수립한다면 일본으로서는 청나라와 적대국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그럴 경우 일본의 정치와 외교는 고토를 비롯한 자유당 관계자들이 주도하게 되고, 일본정부는 사후 수습이나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토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외무경인 이노우에 카오룬(井上馨)과 대책을 논의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조선에서 일본 이익을 최대화하는 대신 위험요소는 최소화할 것인지 고민했다. 즉 조선에서의 국익을 최대화하면서 동시에 청나라와의 적대관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결론은 고토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대신 일본정부가 전면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다만 조선에서의 정변이 성공할 가능성과 실패할 가능성이 다 있기에 양쪽 모두를 상정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했다. 만약 성공한다면 일본정부의 개입을 공식화하고, 실패하면 일본정부의 개입을 부인한다는 것이 대책이었다. 결국 조선에서의 정변에 적극 개입하면서 결과에 따라 인정하거나 부인하겠다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1884년 10월 30일 한양에 도착했다. 다케조에는 현재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청나라는 결국 패배할 것이며, 일본정부는 프랑스를 도와 참전할 예정이라고 큰소리쳤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하루속히 친청정책을 폐지하고 친일정책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위협했다.

다케조에는 일본 공사관의 병력을 동원해 야간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당시 청나라 군대가 프랑스 군대에 연전연패하는 상황에서 다케조에의 협박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영효·김옥균 등은 고토의 도움을 받기로 한 기왕의 계획을 변경하고 다케조에의 도움을 받아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훗날 박영효는 당시의 정변계획을 요약해 이렇게 회상했다.

“1. 비상수단으로써 민영익 이하 사대당의 거두를 제거해 청국의 간섭을 끊고 독립국의 체면을 바로 잡을 것.
2. 궁중의 요망한 무리를 소탕하고 민비의 정치 간여를 금지할 것.
3. 주상에게 요청해 튼튼한 책임 내각을 조직하게 할 것.”(박영효, <갑신정변>, 1926)


위에서 ‘민영익 이하 사대당의 거두를 제거한다’는 것은 당시 친청파의 핵심인물인 민영익·윤태준·이조연·한규직 등을 암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양의 핵심군사력인 4영의 영사(營師)로서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제거하면 민씨 척족 세력을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정치권력 그리고 군사권까지 장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변의 성패는 바로 이들 4명을 성공적으로 암살하느냐 아니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따라 박영효와 김옥균은 이들을 암살하기 위해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30여 명의 조선 암살단 중에서도 무예와 담력이 뛰어난 자들을 암살자로 선발했다. 그 결과 민영익의 암살자로 윤경순과 이은종이 선정됐고, 윤태준의 암살자로는 박삼룡과 황용택, 이조연의 암살자로는 최은동과 신중모, 그리고 한규직의 암살자로는 이규완과 임은명이 선정됐다. 이인종은 암살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고 현장에서 지휘하기로 했다.

하지만 박영효와 김옥균은 이것으로도 불안했다. 왜냐하면 조선 암살자들은 주먹질은 해봤지만 살인까지는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암살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 일본인 자객 4명을 불러 이들이 조선 암살자들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손을 쓰게 했다.


청(淸) 간섭 심해지고 개화운동은 역적질로 간주돼



1909년 11월 5일 일본 도쿄에서 치러진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 그는 조선에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갑신년 12월 4일 박영효와 김옥균 등은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계획대로 윤태준·이조연·한규직 등은 암살했지만 민영익은 암살하지 못했다. 조선의 암살자들이 서툴렀기 때문이다. 정변을 일으킨 박영효와 김옥균은 3일간 권력을 잡았고 그동안 이인종·김봉균·이희정 등이 고종을 밀착 감시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의 군사개입으로 실패했다. 정변에 참여했던 조선 암살자들 중 일본으로 망명하지 못한 자들은 체포돼 참수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정부는 모든 책임을 부인했다.

그 결과 갑신정변의 모든 책임은 박영효와 김옥균 등의 개화파 그리고 일본공사 다케조에의 오판으로 귀결됐다. 아울러 조선에서 청나라의 간섭은 더욱 심해졌고 개화운동은 곧 역적질로 인식됐다. 결국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내세웠던 갑신정변은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로 조선의 퇴보를 초래했던 것이다.

<대학연의>에는 ‘간웅절국지술(姦雄竊國之術)’이라는 항목이 있다. 자고로 나라를 훔치는 간웅은 제왕의 탐욕이나 공포심, 조바심 같은 허점을 파고들기에 이런 탐욕이나 공포심·조바심 등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 또는 대사를 도모하는 자는 탐욕이나 공포심·조바심 같은 허점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마음상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상태 나아가 천하형세까지도 냉정히 분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간웅절국지술’의 교훈이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22. 폐비 윤씨, 성종에게 이혼당하다 - 비극으로 막 내린 조선왕조 ‘신데렐라’ 

자녀 생산하지 못한 정비(正妃) 때문에 간택후궁으로 입궁해 국모 자리까지 꿰차

… 왕자 낳고도 마음의 불안 다스리지 못해 후궁들 제거할 음모 꾸미다 폐위되는 비운 맞아


JTBC 사극 <인수대비>에서 폐비 윤씨 (전혜빈 분)가 사약(賜藥)을 마신 뒤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다. 폐비 윤씨는 간택후궁으로 입궁해 왕비에 오른 신데렐라였지만 행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에는 용문사(龍門寺)라는 절이 있다. 절의 산문(山門)에 도착하면 오른쪽에 주차장이 있는데, 그 주차장의 오른쪽 봉우리에 폐비 윤씨의 태실이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의 지형은 폐허처럼 훼손된 상태로 가봉 태실비석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나마 비석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어서 앞면의 ‘왕비태실(王妃胎室)’이라는 글씨와 뒷면의 ‘성화 14년 11월 12일’이라는 글씨를 알아볼 수 있다. 성화 14년은 성종 9년(1478)이고 폐비 윤씨가 왕비에 책봉된 때로부터 2년 후다.

폐비 윤씨의 태실에 봉안됐던 태항아리·태지(胎誌) 등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서삼릉으로 옮겨졌다가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한 서삼릉 태실조사 때 발굴돼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이관돼 있다. 1999년 문화재연구소에서 폐비 윤씨의 태지를 조사한 결과 왕비의 생년월일은 ‘경태(景泰) 6년 윤6월 초1일’이었다. 경태 6년은 세조 1년에 해당하고, 서력(西曆)으로는 1455년이다.

폐비 윤씨의 부친은 윤기견이고 모친은 신씨다. 친오빠로는 윤구가 있고, 이복오빠로 윤우·윤해·윤희가 있다. 윤기견의 막내딸로 태어난 폐비 윤씨가 조선의 왕실역사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성종 4년(1473)의 후궁 간택이었다.

당시 성종은 왕이 된 지 4년이 지났지만 자녀가 없었다. 그때 성종의 나이는 17세, 왕비의 나이는 18세였다. 비록 왕과 왕비가 젊다고는 하나 왕실 어른들의 근심이 컸다. 특히 최고 어른인 정희대비(세조의 정비)의 근심이 컸다.

정희대비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둘 다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큰아들 의경세자는 20세에 죽었고, 둘째 아들 예종 역시 20세에 죽었다. 그뿐만 아니라 의경세자와 예종은 자녀를 많이 두지도 못했다. 의경세자는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 예종은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정희대비는 왕실을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성종이 자손을 많이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혼인한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성종과 왕비 한씨 사이에는 아들은커녕 딸도 없었다. 그래서 정희대비가 생각한 것이 바로 간택후궁을 들이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간택후궁은 후궁 중에서 특별한 존재였다. 보통의 후궁은 왕의 승은(承恩)을 받음으로써 후궁이 됐다. 반면 간택 후궁은 왕비와 마찬가지로 간택을 거쳐 후궁이 됐다. 왕비가 젊지만 아이를 낳지 못할 때 또는 왕비 후보자로 몇 명의 후궁을 들일 때 간택후궁을 선발했다. 즉 조선시대 간택후궁은 왕의 후계자를 낳기 위해 또는 왕비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간택후궁은 신분도 좋고 인물이나 학식도 두루두루 좋아야 했고, 입궁하는 순간부터 숙의(淑儀)라고 하는 고위직 후궁이 됐다.

성종 4년(1473)의 간택후궁은 왕비 한씨가 젊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기에 필요했다. 즉 왕의 후계자를 낳기 위해 간택후궁을 들였던 것이다. 첫째는 폐비 윤씨였고 둘째는 정현왕후 윤씨였다. 폐비 윤씨는 성종 4년 3월에 입궁했고, 석 달 후인 6월에는 정현왕후 윤씨가 입궁했는데 둘 다 숙의로 입궁했다.


편모슬하의 딸… 간택후궁 ‘최적의 조건’

 


<인수대비>에서 연산군으로 분한 진태현과 그의 할머니인 채시라(인수대비).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죽음에 인수대비의 책임이 크다고 믿고 할머니와 대립했다.


 폐비 윤씨가 숙의로 입궁했을 때 남편 성종은 17세였다. 자신보다 두 살 연하였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입궁한 동기 후궁 즉 정현왕후는 일곱 살 아래인 12세였다. 그런데 폐비 윤씨가 입궁할 당시 부친 윤기견은 이미 죽은 상황이었다. 조선시대 왕실혼인에서 편모슬하의 자녀는 원래 기피의 대상이었다.

그런 관행으로 본다면 폐비 윤씨는 아예 간택후궁이 될 자격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택후궁이 된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 성종의 왕비 한씨는 한명회의 딸이었다. 비록 성종의 자녀를 낳지는 못했지만 왕비 한 씨는 18세로 젊디젊었다. 당연히 왕비 한씨는 오래 살 것으로 예상됐다.

따라서 왕비 한씨와 간택후궁 사이에 혹시라도 있을 갈등을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간택 후궁이 감히 왕비자리를 넘보지 않아야 했다. 편모슬하의 딸인 폐비 윤씨는 그런 조건에 딱 맞았기에 간택후궁이 될 수 있었다.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폐비 윤씨는 입궁 초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아마도 폐비 윤씨의 어머니 신씨는 입궁하는 딸에게 아비 없이 자라서 그렇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타일렀을 듯하다.

당연히 입궁 초기에 폐비 윤씨는 감히 왕비와 경쟁할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겸손하게 처신했다. 게다가 입궁 초기에 폐비 윤씨의 동기 후궁인 정현왕후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나이 때문이었다. 아직 12세에 불과한 정현왕후는 성종과 합방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여자의 나이 15세가 돼야 합방이 가능했다. 전후 사정으로 볼 때 성종 4년에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 두 사람을 간택후궁으로 들였지만 사실상 간택후궁은 폐비 윤씨 단독이었고, 정현왕후는 예비 후보였다.

이런 면에서 입궁 초기의 궁중 상황은 페비 윤씨에게 아주 우호적이었다. 입궁 목적 자체가 왕의 후계자 출산이었기에 성종과 왕실 어른들이 각별한 기대를 했다. 더구나 경쟁자도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왕비 한씨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투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병이 심해서 친정에 나가 있곤 했다.

경쟁자 없이 왕과 왕실 어른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을 때 폐비 윤씨의 궁중 생활은 너무나 순조로웠다. 이럴 때는 폐비 윤씨의 성장환경과 가정환경도 오히려 도움이 됐다. 막내딸로 자라난 폐비 윤씨는 독점욕이 강했다. 입궁 초기 폐비 윤씨는 남편 성종과 왕실 어른들 모두의 사랑과 관심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자라난 것도 도움이 됐다. 정희대비·인수대비 같은 왕실 어른들은 가난한 가정환경으로 말미암아 검소한 생활이 습관화된 폐비 윤씨를 보며 흡족해 했다.


숙의에서 일약 왕비로, 하늘도 도왔건만



<인수대비>에서 폐비 윤씨 역을 맡은 전혜빈이 눈물이 그득한 눈으로 남편 성종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도 폐비 윤씨 편이었다. 입궁한 지 1년 만에 왕비 한씨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까지 했다. 성종 7년(1476) 봄의 일이었다. 입궁한 지 3년 만이고, 그때 나이 22세였다. 왕비가 없는 상황에서 폐비 윤씨가 임신까지 하자 성종이나 왕실 어른들은 왕비를 굳이 새로 들이려 하지 않았고, 결국 성종 7년 7월에 폐비 윤씨는 숙의에서 일약 왕비가 됐다. 그때 정희대비는 이런 뜻을 밝혔다.

“숙의 윤씨는 주상께서 중히 여기는 바요, 내 생각 또한 그가 왕비에 적당하다고 여긴다. 윤씨가 평소에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일마다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으니, 큰일을 부탁할 만하다. 윤씨가 내 생각을 알고 사양하기를 ‘저는 본디 덕이 없으며 과부의 집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이 없으므로, 사전(四殿: 정희대비, 인수대비, 안순대비, 성종)께서 선택하신 뜻을 저버리고 주상의 거룩하고 영명(英明)한 덕에 누를 끼칠까 몹시 두렵습니다’ 하니, 내가 이러한 말을 듣고 더욱더 그를 현명하고 정숙하다고 여겼다.”[<성종실록> 권69, 7년(1476) 7월 11일]

이때가 폐비 윤씨의 인생에서 절정기였다. 하지만 바로 그 절정기에서 폐비 윤씨는 일생일대의 도전에 직면했다. 후궁 때문이었다. 폐비 윤씨가 왕비에 책봉됐을 때 성종에게는 형식상 왕비와 후궁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폐비 윤씨는 왕비로 확정됐고, 폐비 윤씨와 같은 간택후궁이던 정현왕후는 후궁으로 확정됐기 때문이다.

아마도 폐비 윤씨는 이런 상황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기대했던 듯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폐비 윤씨는 남편 성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임신까지 함으로써 왕실 어른들의 기대에도 충분히 부응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종과 왕실 어른들이 이런 자신을 인정한다면 새로 후궁을 들이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선대왕인 세조 역시 왕이 된 후 더 이상 후궁을 들이지 않았다. 그런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대비 역시 자신의 경험을 들어 더 이상 후궁을 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나 자신이 임신 중인데 그 사이에 굳이 후궁을 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폐비 윤씨 혼자만의 생각이자 기대였다. 왕실 어른들, 특히 시어머니인 인수대비는 바로 지금이 후궁을 들일 때라고 생각했다. 나라가 튼튼하려면 왕실이 번성해야 하고, 왕실이 번성하려면 후궁이 많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수대비에게 성종의 후궁 1명은 너무나 적었다. 게다가 성종 7년에 그 후궁은 겨우 15세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의 임신 중에 후궁을 들이게 했다. 그것도 두 명이나 들이게 했다. 엄 숙의와 정 소용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들이 정확히 언제 입궁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후 상황으로 미뤄보건대 성종 7년 8월이나 9월쯤에 입궁했을 것으로 보인다. 폐비 윤씨가 왕비에 책봉된 지 한두 달만이었다.

조선시대 성(性) 의학에서는 부인이 임신한 후에는 부부가 관계를 맺는 것을 금기시했다. 혹시라도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 우려해서다. 당연히 성종은 폐비 윤씨의 임신이 확실해진 후로는 부부관계를 멀리했다. 대신 새로 들어온 후궁 정씨와 엄씨를 가까이했다.

엄 숙의와 정 소용이라는 명칭으로 볼 때 엄씨가 먼저 입궁하고 뒤이어 정씨가 입궁했을 듯하다. 나이는 10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왕의 후계자를 낳기 위한 간택후궁이 아니라 단지 왕실을 번성시키기 위한 일반 후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 숙의와 정 소용은 입궁과 동시에 성종과 합방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둘 중에서 정 소용이 더 총애를 받은 듯하다. 그 결과 10월을 전후해 정 소용이 임신하게 됐다.


불안 또 불안, 산후우울증까지 생겨



연산군의 아버지인 조선 제9대 왕 성종(成宗)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인 선릉(宣陵).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그런데 정 소용은 임신 후에 엄 숙의와 마치 한 몸처럼 친밀하게 지냈다. 이는 분명 폐비 윤씨를 견제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정 소용과 엄 숙의는 일반 후궁이었다. 그래서 같은 처지였다. 이들은 좋으나 싫으나 성종을 놓고 폐비 윤씨와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둘이 협력하는 길밖에 없었다. 폐비 윤씨 역시 간택후궁이었다가 왕비가 됐기에 정 소용과 엄 숙의는 자신들도 왕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왕비자리를 쟁취하려면 우선 폐비 윤씨를 밀어내야 했다.

정 소용은 자신이 임신한 후 가능하면 성종을 엄 숙의에게 보내려고 했던 듯하다. 성종이 폐비 윤씨에게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엄 숙의에게 가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둘은 성종과 왕실 어른들에게 폐비 윤씨를 은근히 헐뜯었을 듯하며, 한 발 더 나아가 왕실 어른들에게 밀착함으로써 폐비 윤씨를 따돌리려 했을 듯하다.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 경내에 있는 폐비 윤씨의 무덤. 연산군이 회릉으로 추숭(追崇)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시 회묘로 강등됐다


만약 폐비 윤씨에게 넉넉한 마음이 있었거나 정치력이 있었다면 이런 상황을 수월하게 극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폐비 윤씨는 그렇지 못했다. 막내딸로 자란 폐비 윤씨는 친정에서 귀여움만 받아봤지 이런 일은 겪지 못했다. 입궁해서도 경쟁상대 없이 성종과 왕실 어른들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했다.

그런데 임신하고 왕비가 된 마당에 이런 일들을 당하게 되니 폐비 윤씨는 어쩔 줄을 몰랐다. 성종의 발걸음은 점점 멀어지고, 왕실 어른들의 관심도 점점 멀어짐을 느끼면서 폐비 윤씨는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 폐비 윤씨는 만에 하나라도 자신은 아들을 낳지 못하고 대신 정 소용이나 엄 숙의가 아들을 낳는다면 왕비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고 지레짐작했을 것이다. 이런 불안감은 정 소용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더욱 커졌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종 7년 11월에 폐비 윤씨는 결국 아들을 낳았다. 훗날의 연산군이다. 아들을 낳은 후, 폐비 윤씨는 모든 일이 제 뜻대로 될 것으로 기대했을 듯하다. 즉 남편 성종은 자신만을 사랑할 것이고, 왕실 어른들도 자신만을 귀히 여길 것이며, 엄 숙의와 정 소용은 감히 자신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흘러갔다. 폐비 윤씨가 아들을 낳은 후, 남편 성종은 더 열심히 정 소용과 엄 숙의를 찾았다. 왕실 어른들은 자신보다는 손자를 더 귀히 여겼다. 엄 숙의와 정 소용은 여전히 왕실 어른들의 환심을 사며 왕비 자리를 넘봤다.

그래서 출산 후 폐비 윤씨는 더더욱 억울하고 분했을 것이다. 나아가 성종이나 왕실 어른들에게는 오직 왕의 후계자만 필요한데, 이미 왕의 후계자가 생겼으니, 자신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라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혔을 듯하다. 그런 억울함과 피해의식은 산후우울증으로 더욱 커지고, 그것이 극단적인 분노로 이어졌다.


친정 통해서 비상까지 손에 넣었는데

 


<인수대비>에서 연산군 역을 맡은 진태현이 폐비 윤씨가 숨질 때 피를 닦았던 금삼(錦杉)을 만지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폐비 윤씨에게는 삼월이라고 하는 시비(侍婢)가 있었다. 시비란 또래의 여자 몸종을 의미한다. 왕실 여성들은 입궁할 때 몸종과 유모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런 사실로 보면 삼월이는 폐비 윤씨가 친정에서 데리고 온 몸종이 분명하다. 이처럼 입궁할 때 데려온 몸종을 궁녀 중에서 본방내인이라고 했다. 당연히 왕실 여성들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이일 것이다.

폐비 윤씨는 자신의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삼월이에게 털어놓았다. 보통의 경우, 속에 품은 이야기를 하면 분노가 풀리기 마련이지만 폐비 윤씨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되려면 삼월이가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줘야 하는데, 삼월이는 그럴 수 없었다. 자기 주인의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들으면서 삼월이 역시 똑같이 억울하고 분했던 것이다.

폐비 윤씨와 삼월이는 복수를 생각했다. 그 대상은 엄 숙의와 정 소용이었다. 현재의 비극적인 상황은 모두 이 두 명 때문에 생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한 복수는 중상모략과 저주 그리고 독살이었다.

마침 성종 8년(1477) 3월 14일에 왕비의 친잠례(親蠶禮)가 예정돼 있었다. 친잠례 때는 내명부와 외명부의 부인들이 모두 참여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당연히 왕비의 친정 엄마인 신씨도 참여할 예정이었다. 폐비 윤씨와 삼월이는 이 기회를 이용하고자 했다. 이런 사실로 보면 폐비 윤씨와 삼월이는 성종 8년 1월이나 2월쯤에 이미 복수를 생각하고 음모를 꾸몄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주나 독살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저주를 하기 위해서는 저주하는 방법을 알아야 했고, 독살하기 위해서는 독약이 필요했다. 이런 것들을 궁중 안에서 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폐비 윤씨는 삼월이를 친정으로 내보내 이런 것들을 구해 오게 했다. 삼월이를 보낼 때는 친잠례와 관련해서 친정에 볼일이 있다고 하면서 의심을 피했다. 이런 사실로 보면 폐비 윤씨의 친정어머니인 신씨 역시 딸의 사정을 듣고 같이 분노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폐비 윤씨는 3월 14일 전후로 저주서와 독약을 손에 넣었다. 저주서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거나 혹 낳는다면 불구자를 낳게 하는 방법 등이 적혀 있었다. 독약은 조선시대에 흔하게 쓰이던 비상(砒霜)이었다. 폐비 윤씨는 비상을 바른 곶감과 저주서를 작은 상자에 담아 은밀하게 보관했으며 중상모략도 개시했다.

3월 20일, 정희대비는 감찰상궁의 은밀한 방문을 받았다. 감찰상궁은 누군가 자기 친정에 보낸 것이라면서 편지 두통과 상자를 바쳤다. 편지에는 엄 숙의와 정 소용이 폐비 윤씨와 원자를 없애려 음모를 꾸민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상자에는 저주서와 비상이 들어 있었다. 엄 숙의와 정 소용이 이 저주서와 비상을 이용해 왕비와 원자를 없애려 한다는 의미였다

​사랑은 미움으로, 미움은 이별로

저주서와 비상을 보면서 정희대비와 인수대비는 공포에 전율했다. 누가 이런 일을 꾸민단 말인가? 편지 내용대로 엄 숙의와 정 소용이 꾸몄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정희대비와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를 의심했다. 후궁 둘이 들어온 뒤부터 폐비 윤씨가 많이 달라졌기에 나온 의심이었다. 정희대비와 인수대비는 은밀히 폐비 윤씨를 조사했다.

먼저 성종의 유모인 백씨를 불러 그간의 상황을 물었다. 왕의 유모는 왕의 침실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백씨는 폐비 윤씨가 수상하다고 했다. 언젠가 자신이 왕의 침실에 갔을 때 누군가가 나무 몽둥이로 책을 제본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또한 왕의 침실에 난 쥐구멍에서 찾은 것이라며 종이쪽지를 바쳤는데 그 종이는 감찰상궁이 바친 저주서와 같은 재질이었다.

설상가상 폐비 윤씨는 비상을 바른 곶감과 저주서를 담았던 작은 상자를 남편 성종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다.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된 폐비 윤씨는 모든 일을 삼월이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다. 이것이 정희대비와 인수대비를 더욱 분노케 했다.

과거에 세종은 자신의 큰며느리 즉 세자빈을 두 명이나 쫓아낸 일이 있었다. 죄명은 세자의 사랑을 얻기 위한 압승술(壓勝術)을 쓰거나 동성애를 했다는 것이었다. 폐비 윤씨의 저주와 독살 음모 그리고 중상모략은 압승술이나 동성애에 비하면 훨씬 무서운 범죄였다. 게다가 만에 하나 폐비 윤씨가 미움에 복받쳐 성종을 독살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성종 8년(1477) 3월 29일, 정희대비는 조정중신들을 불러 왕비의 폐위 문제를 논의하게 했다. 하지만 신하들은 원자를 이유로 반대했다. 게다가 성종도 아직까지 왕비를 사랑해 폐위를 주저했다. 그래서 윤씨를 후궁으로 강등시키기로 했다가 그것도 취소하고 그냥 없던 일로 하고 말았다. 모든 죄는 삼월이가 뒤집어쓰고 죽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폐비 윤씨는 성종과 왕실 어른들에게 더욱 실망하고 분노했다. 특히 남편 성종에게 실망하고 분노했다. 자기 줏대도 없이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바보 같은 남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종 역시 그런 폐비 윤씨에게 정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종 10년(1479) 6월 1일, 이날은 폐비 윤씨의 생일이었다. 정상적인 부부 사이였다면 성종은 폐비 윤씨의 생일을 챙겨줬을 것이다. 하지만 성종은 그러지 않았다. 바로 그날 밤 성종은 폐비 윤씨 대신 다른 후궁의 처소를 찾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폐비 윤씨는 한밤중에 후궁(後宮)으로 찾아와 남편 성종의 얼굴을 할퀴었다. 그리고 다음날 윤씨는 폐위됐다.

돌아보면 성종과 폐비 윤씨는 처음에는 사랑했고 자식을 낳았다. 하지만 그 사랑이 미움이 됐고, 그 미움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에는 이혼에 이르렀다. 그들의 미움은 둘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연산군에게 이어져 나라 전체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와 관련해 <대학연의>에는 ‘극명준덕(克明峻德)’이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자기 마음의 덕부터 먼저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이고 자기 마음의 덕을 먼저 밝히지 못하면 그것이 자신의 비극은 물론 가정의 비극 나아가 나라의 비극이 된다는 교훈이 ‘극명준덕’이라고 하겠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23. 사랑에 빠진 양녕대군, 폐세자 되다 

- ‘어스름 달빛 아래 어리는 꽃보다도 아름답더라’ 


태종, 이씨 조선이 ‘민씨의 나라’ 될 것 우려한 나머지 처남 4명 역적으로 몰아 모두 처형

… 외삼촌들 몰살당한 뒤 주색에 빠진 양녕, 유부녀까지 탐하다 책봉 15년 만에 결국 폐위돼



양녕대군은 부왕인 태종이 외삼촌 4명을 역적으로 몰아 모두 처형한 이후 방황하다 폐위되는 비운을 맞았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 태종(유동근 분)이 양녕대군(이민우 분)을 질책하고 있다



1415년(태종 15) 12월 14일 태종은 자신의 집무실로 황희·박은·유사눌을 불렀다. 당시 의정부 참찬 황희와 이조판서 박은 그리고 도승지 유사눌은 춘추관 직무를 겸임하고 있었다. 태종이 다른 사람들은 제외하고 그들만 부른 것은 춘추관에 뭔가 알리고 싶은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태종은 그들에게 10여 년 전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처갓집 사람들은 잔인무도한 역적이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태종이 그 증거로 든 것은 다음과 같았다.



양녕대군과 사랑에 빠졌던 어리(오연서 분).


13년 전인 1412년(태종 2) 봄에 효빈 김씨가 임신했다. 효빈은 태종의 잠저(潛邸) 시절 왕비 민씨의 몸종이었다. 그런 효빈을 태종은 왕비 몰래 만나 임신시켰다. 혹시라도 왕비에게 해를 당할까 염려한 태종은 8월쯤 효빈을 출궁시켜 따로 마련한 집에서 살게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왕비는 효빈을 붙들어다 친정 행랑에 감금했다. 12월 13일 새벽, 효빈에게 진통이 왔다. 이 보고를 받자 왕비는 효빈을 온돌방 밖의 차가운 마룻바닥으로 내보내라 명령했다. 엄동설한에 얼어 죽으라는 뜻이었다. 이를 가엽게 여긴 효빈의 오빠가 담장 옆에 거적을 덮고 그곳으로 옮겼다. 효빈은 거적 아래에서 오전 8시쯤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왕비는 그날로 효빈과 핏덩이 아들을 차가운 흙집으로 옮기게 했다. 이불과 돗자리도 빼앗았다. 이 또한 한겨울 추위에 얼어 죽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를 가엽게 여긴 어떤 종이 말 옷을 줘 7일 동안 죽지 않고 살아났다. 분노한 왕비는 효빈과 핏덩이 아들을 교하(交河)로 보내버렸다. 가는 길에 얼어 죽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효빈과 핏덩이 아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고, 어제가 그 아들의 14번째 생일이었다.

태종은 자신이 한 이야기를 글로 써서 춘추관에 내리라고 명령했다. 자신의 방종(放縱)과 왕비 민씨의 잔인함을 역사기록에 남겨 후손들을 경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진짜 속셈은 따로 있었다. 자신의 처갓집 식구들을 몰살시키려는 심산이었다.

13년 전, 왕비가 자신의 친정 행랑에 효빈을 수 개월간 감금했다면 태종의 장인·장모를 비롯해 처남들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태종의 처갓집 식구들은 왕의 후궁과 아들을 죽이고자 공모한 역적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태종은 왕비를 비롯해 그때까지 살아 있던 처남 민무휼·민무회 그리고 장모 송씨 등을 모조리 대역부도로 죽이려 작심했던 것이다.

황희·박은·유사눌도 이런 태종의 속셈을 간파했다. 만약 태종의 명령대로 하면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왕의 말을 믿기 힘들다고 주장하며 만약 사실이라고 해도 이를 역사에 남기면 안 된다고 했다. 실랑이가 길어지자 태종은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 명령했다.

다음날 태종은 세자의 사부 변계량을 불러 똑같은 명령을 내렸고, 그는 별다른 반대 없이 복종했다. 뒤이어 피바람이 몰아쳤다. 태종의 속셈을 짐작한 춘추관의 책임자 이숙번과 하륜은 이 이야기를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에게 알렸다. 민무휼·민무회 등 태종의 처가 식구들을 탄핵하라는 의미였다.



<용의 눈물>에서 세자에 책봉된 직후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에게 인사하는 양녕대군 부부, 오른쪽은 세자빈 김씨(안연홍 분).


결국 민무휼과 민무회는 12월 18일 귀양에 처해졌고 다음해 1월 13일에 목매 자살했다. 그들의 처자식들 역시 귀양에 처해졌고 친인척들 또한 큰 화를 입었다. 이로써 태종의 처남 4명 즉 민무구·민무질·민무휼·민무회는 모두 역적의 오명을 쓰고 죽었다. 다만 태종은 장모 송씨는 연로하다는 이유로, 왕비는 왕비라는 이유로 살려줬다. 하지만 이제 왕비는 손발이 모두 잘린 산송장 같은 처지가 됐다. 왕비는 매일 울고불며 음식도 끊고 저항했지만 태종은 요지부동이었다.

태종이 굳이 옛날이야기를 꺼내 처남들을 냉혹하게 죽인 이유는 “지금 내가 늙어 생각하니 참으로 불쌍하다. (…) 마땅히 역사에 남겨 후세에 밝게 보임으로써 외척으로 하여금 경계할 바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는 언급에 함축돼 있다. 당시 태종은 49세로 보름 후면 50세였다. 그 당시로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나이였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태종은 그 누구보다도 외척들 즉 왕비와 처남 민무휼·민무회가 걱정이었다.

1407년(태종 7) 7월, 태종은 민무구와 민무질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외척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민무휼과 민무회도 같이 죽이려 하다가 장인과 장모를 생각해 살려줬다. 태종은 이런 자신의 처사에 왕비와 처남들이 감복하기를 기대했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특히 왕비가 자신을 원수처럼 미워했다. 민무구와 민무질의 죽음 후 얼마 안 돼 친정아버지 민제마저 죽자 왕비의 원한은 하늘처럼 높아졌다. 왕비는 자신의 친정동생들과 친정아버지를 태종이 억울하게 죽였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죽고 왕비가 대비 자리에 오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분명 왕비는 친정 식구들을 불러들여 권력을 휘두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조선은 이씨의 나라가 아니라 민씨의 나라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 가능성은 세자 양녕대군 때문에 더더욱 컸다. 세자는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를 빼닮았다. 외모는 물론이고 공부보다는 무술에 관심을 보이고, 인정에 휘둘리는 성품 역시 이성계와 비슷했다. 이런 세자가 태종에게는 큰 근심이었다. 게다가 세자는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냈기에 외가 식구들에게 남다른 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 세자가 왕위에 오른다면, 대비 민씨와 외삼촌들에게 마구 휘둘리지는 않을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살아 있는 처남들을 모두 죽이고, 왕비 민씨가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없애야 했다. 그래서 태종이 생각해낸 것이 바로 13년 전의 이야기였다.

이런 면에서 태종의 민무휼·민무회 숙청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죽음 이후를 대비한 것이기도 하고 세자 양녕대군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포석은 세자를 헤어날 수 없는 갈등의 늪에 빠뜨렸다. 태종의 외척 숙청은 정치적으로 훌륭한 포석일지 모르지만 인간적으로 잔인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외삼촌들에게 깊은 정이 있는 세자 입장에서 본다면 태종의 외척 숙청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즉 인간적 감정과 정치적 결단 사이에서 세자가 어느 쪽을 택하는지 시험당하는 것이었다. 만약 세자가 인간적 감정을 우선한다면 적극적으로 외삼촌들을 보호할 것이다. 반면 정치적 결단을 우선한다면 외삼촌들 숙청에 앞장설 것이다. 조만간 왕이 돼야 할 입장의 세자는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가?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방황하는 세자


 

태종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戊寅靖社)을 통해 반대파였던 정도전·남은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는 한편 자신의 이복동생인 세자(의안대군 이방석)마저 척살했다. 무인정사 직후 대궐로 들어온 태종(유동근 분)과 이숙번(선동혁 분, 앞줄 왼쪽), 조영무(장항선 분), 태종의 바로 뒤 방립(方笠)을 쓴 이는 그의 장자방인 하륜(임혁 분).  


당시 세자는 인간적 감정과 정치적 결단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했다. 혹 외삼촌들을 살려달라 애원한다면 태종은 세자를 정치적 결단도 없고 효심도 없는 아들이라 질타할 것이 분명했다. 반대로 죽이라고 한다면 태종에게 좋은 말을 들을지는 모르지만 애간장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을 견뎌야 했다. 세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눈치만 보았다.

결국 한 달 가까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세자는 태종이 주최한 술자리에서 잔뜩 술에 취한 상태로 “종묘사직은 전하의 종묘사직만이 아니니 죄인들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무휼·민무회를 법대로 처치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태종은 옆에 있던 환관에게 “이 말을 자세히 들어둬라”고 명령했다. 세자가 술김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 나중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발뺌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

이틀 후 태종은 민무휼·민무회의 자진을 명령했고, 다음날 두 사람은 목매 자살했다. 실록에 의하면 세자는 1416년(태종 16) 1월부터 주색잡기에 빠져들었다. 정확히는 민무휼·민무회가 자살한 직후였다. 이런 사실로 보면 세자가 주색잡기에 빠진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외삼촌들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에서였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세자 주변에는 간신배들이 들끓었다. 조만간 세자가 왕위에 오를 것이 확실했기에 간신배들의 아부는 치열했다. 간신배들 중에서도 구종수와 이오방이라는 자가 세자의 총애를 받았다. 구종수는 문신관료였고, 이오방은 장악원 악공(樂工)이었다. 구종수는 몇 년 전에 죄를 짓고 귀양을 갔다 왔기에 더 이상 태종에게 희망을 두지 않고 세자에게 아부했다.

1416년 1월 중순경, 세자의 총애를 받게 된 구종수는 거의 매일 밤 대나무 사다리를 넘어 동궁에 들어갔다. 혼자가 아니라 연주자 또는 기생과 함께 들어갔는데 그때 함께 들어간 연주자가 이오방이었다. 세자는 구종수와 함께 바둑을 두거나 이오방의 거문고 연주를 들으며 온밤을 지새우곤 했다. 헤어날 수 없는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자의 주색잡기는 점점 더 대담해졌다. 동궁에서만 노는 것이 아니라 몰래 월담해 궁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 세자는 구종수 집에 가서 놀기도 하고 한강 주변에 가서 놀기도 했다. 세자는 구종수와 무술 대련도 하고 기생과 어울려 춤을 추며 놀다가 새벽녘에 돌아오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세자는 온갖 핑계를 대며 공부에서 빠져나갔지만 오래 갈 수는 없었다. 9월에 야간 월담하던 구종수가 적발돼 태종은 그동안 세자가 저지른 비행을 모두 알게 됐다.

깜짝 놀란 태종은 구종수·이오방·환관들을 엄하게 처벌한 후 쫓아냈다. 이는 세자에 대한 강력한 경고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다음은 세자 자신을 처벌하고 쫓아내겠다는 뜻이었다. 겁을 먹은 세자는 크게 반성하면서 다시는 이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태종은 이렇게 맹세까지 하자 마음을 풀었다.

그런데 민무휼·민무회가 자살한 후 세자가 이렇듯 9개월이나 주색잡기에 빠진 이유는 분명 자책과 죄책감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런 자책과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하면 비록 잠시 반성한다고 해도 주색잡기를 완전히 끊기는 어려웠다. 결국 문제는 세자가 강력한 정치적 결단력을 기르느냐 마느냐에 있었다.

그러나 반성 후 세자는 더 깊이 주색잡기에 빠져들었다.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달리 말하면 정치적 결단력을 키우지 못해서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단순한 주색잡기가 아니라 아예 첫사랑에 빠져버렸다. 그 대상은 어리(於里)라고 하는 여성이었다.


“한 번 봐도 미인인 것을… 빨리 내놓아라”

 


사극 <대왕세종>에서 어리 역을 맡은 오연서. 어리는 양녕대군과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음을 절감한 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세자가 처음으로 어리라는 여성의 이름을 알게 된 시점은 1416년 1월이었다. 그때 구종수와 함께 몰래 동궁에 드나들던 이오방이 “곽선의 첩 어리는 자색과 재예가 모두 뛰어납니다”라고 칭찬했다. 이런 칭찬으로 판단하건대 어리는 얼굴은 물론 노래와 춤에도 뛰어난 기생이었을 듯하다. 세자는 당장 어리를 데려오라 명령했다.

그때 어리는 파주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오방은 어리의 조카사위인 권보에게 중매를 부탁했다. 세자가 원한다는 말에 권보는 어쩔 수 없이 중매를 섰다. 권보는 자신의 첩을 어리에게 보내서 다시 시집갈 의향이 있는지 떠봤다. 하지만 어리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라며 거절했다.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던 중 9월에 구종수와 이오방이 처벌되면서 어리 문제는 흐지부지됐다.

그러나 그해 12월, 어리는 한양의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도성으로 들어왔다. 연말연시가 됐기에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어리는 남편 곽선의 양자인 이승의 집에 머물렀다. 당시 세자는 또다시 주색잡기에 빠져든 상태였고, 주변에는 간신배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 이법화라는 악공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세자가 어리를 만나려 했다가 실패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리가 한양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이법화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법화는 세자에게 어리 소식을 고한 후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지난번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즉 세자가 선물을 보내 확실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했다. 이에 세자는 비단주머니를 징표로 내줬다. 그때가 1417년 1월쯤이었다. 세자가 보고 싶어한다는 말을 듣자 어리는 “저는 본래 병이 있고 얼굴도 예쁘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남편이 있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라며 거절했다. 이쯤에서 세자가 포기했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비단주머니를 보낸 날 저녁, 세자는 휘하의 환관들을 거느리고 어리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달려갔다. “세자께서 납셨다”는 환관의 전갈에 주인 이승이 나타나 엎드렸다. 세자가 “빨리 어리를 내놓아라”고 윽박지르자 이승은 마지못해 어리를 내보냈다. 세자의 회고에 의하면 그때 어리는 “머리에 녹두분이 묻고 세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부러 그런 꼴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자는 “한 번 봐도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세자가 어리를 데려가기 위해 이승에게 말을 대령하라 하자 이승은 머뭇거리기만 했다. 양아버지의 첩인 어리를 보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세자의 명을 어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세자가 “그렇다면 내가 탄 말에 어리를 태우고 나는 걸어가겠다”고 협박하자 마지못해 말을 대령했다. 세자는 손수 어리의 옷소매를 잡고 말에 태우려고 했는데 어리는 “알아서 타겠다”고 하면서 말에 올랐다. 그 길로 세자는 어리를 데리고 광통교로 가서 동침하고 다음날 저녁에 함께 동궁으로 돌아갔다.

동궁으로 오던 그 어스름한 밤길에서 세자는 어리에게 매혹됐다. 세자는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 아래 그 얼굴을 바라보니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세자가 어리를 데리고 갈 때 온 마을 사람들이 삼대같이 모여 구경했다. 세자는 어리를 들인 일을 태종에게 숨겼다. 하지만 한 달도 채 안 된 2월 15일에 들키고 말았다.

태종은 크게 분노했다.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겠다고 맹세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세자는 더 나빠져 있었다. 태종은 세자 주변의 간신배들을 엄벌에 처하고, 어리는 출궁시켰다. 아울러 “세자의 행실이 이와 같으니 태갑(太甲)을 내쫓았던 고사를 본받고자 한다”고 공포했다. ‘태갑을 내쫓았던 고사’란 중국의 은나라 때 있었던 일로서 왕이 방탕하자 신하들이 왕을 내쫓아 개과천선하게 한 뒤 다시 받아들였다는 고사다. 세자를 쫓아냈다가 개과천선 여하에 따라 다시 세자로 삼던지 하겠다는 뜻이었다. 


“다시는 안 하겠다”며 ‘눈물의 반성문’까지 썼건만



양녕대군에 이어 세자에 오른 이는 훗날 세종대왕으로 불리는 충녕대군이었다. <대왕세종>에서 즉위식을 통해 세자위(位)에 오르는 충녕대군(김상경 분).


당연히 여러 신하가 반대했다. 그러자 태종은 세자를 김한로 집으로 추방하고 말았다. 장인 김한로에게 잘 배우며 반성하라는 의미였다. 세자는 자칫하다가는 정말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빠져들었다. 세자는 선생님들 앞에 꿇어 엎드려 흐느껴 울며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거듭거듭 맹세했다. 세자는 비록 어리에게 빠져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자 자리에도 미련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태종에게 반성문을 써서 올리는 것은 물론 종묘의 조상님들 앞에서 반성문을 낭독하기까지 했다. 조상님들 앞에서 맹세했다는 것은 다음엔 더 이상 용서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였다. 만약 한 번만 더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세자는 정말로 쫓겨날 상황이었다. 이런 극단적인 맹세를 하고 나서야 태종은 세자를 용서하고 다시 불러들였다.

그런데 김한로의 증언에 의하면 어리가 출궁당할 때 세자는 “어리의 인생이 가엾다”며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에 김한로는 ‘세자의 심정을 가련하게 여겨’ 어리를 자신의 집에 살게 했다. 이로 보면 세자는 자신이 쫓겨나게 된 상황에서도 어리를 먼저 걱정했다. 어리에 대한 첫사랑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고 정치적 결단력이 그만큼 부족했기 때문이다.

세자는 1417년(태종 17) 2월 22일에 용서받고 입궁했는데 그로부터 두 달쯤 지나서 어리를 몰래 입궁시켰다. 이 사실이 들통나면 세자는 정말 끝장이었다. 그럼에도 어리를 입궁시킨 세자는 그때 이미 세자 자리보다는 첫사랑 어리를 선택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동궁에서 반년 정도 머물던 어리는 겨울에 해산하기 위해 다시 출궁했다. 세자는 어리가 해산하자 누나에게 유모를 물색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누나가 문안인사차 궁궐에 들어왔다가 그 사실을 태종에게 알리고 말았다.


인간적이었지만 정치적 결단력은 부족했기에…

 


관악산의 주봉(主峯)인 국사봉 북쪽 산자락에 자리 잡은 지덕사(至德祠), 양녕대군을 모신 사당이다 



태종이 어리의 출산소식을 들은 때는 1418년(태종 18) 3월 초였다. 세자가 새사람이 되겠다고 조상님들 앞에서 맹세한지 1년쯤 지난 시점이었다. 그동안 세자는 새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태종을 속이고 어리를 들였을 뿐만 아니라 애까지 낳았다. 태종은 이 사실을 조말생에게 전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때 태종은 “세자가 불의해 죄를 받은 자들이 한둘이 아니니 내가 진실로 부끄럽다. 우선 잘 가르쳐서 스스로 새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고 이 일을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태종은 세자가 스스로 고백하거나 대오각성하기를 기다렸다.

약 두 달 정도 기다리던 1418년 5월 10일 마침내 태종은 어리를 쫓아냈다. 세자 역시 호된 질책을 받고 동궁에서 쫓겨났다. 당시 태종은 세자가 대오각성하고 사사로운 인정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했을 듯하다. 즉 후계 왕으로서의 정치적 결단력을 기대했을 듯하다.

만약 세자에게 진정 정치적 결단력이 있다면 어리와의 정을 끊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잔인한 사람이란 비난을 감당해야 하고, 스스로도 애간장이 끊어지는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그런 고통은 나라의 평화와 안정으로 보상될 뿐 달리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그런 것을 알고, 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세자에게는 과연 이런 정치적 결단력이 있었을까?

세자는 어리와의 정을 끊지 못했다. 세자는 매우 인간적이었지만 정치적 결단력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감정에 복받친 세자는 출궁된 어리가 머무는 연지동으로 가서 공개적으로 만났다. 시종들이 말렸지만 전혀 듣지 않았다. 이제 세자는 태종에게 공개적으로 저항한 셈이었고, 더 이상 세자 자리에 미련이 없음을 공포한 셈이었다. 세자는 태종에게 다음과 같은 항의 서한을 올리고 이틀 뒤에 폐세자 됐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하여 다 소중하게 생각해서 모두 받아들이십니까? (…) 한나라 고조는 산동에 거처할 때 재물을 탐내고 여색을 좋아했으나 마침내 천하를 평정했습니다. 하지만 진나라 임금 광이라는 사람은 비록 어질다고 소문났지만 왕위에 올라서는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했습니다. 어찌하여 전하는 신이 끝내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저의 첩 어리 하나를 금지하다가는 잃는 것은 많지만 얻는 것은 적을 것입니다.”(<태종실록> 권35, 태종 18년 5월 30일)

돌아보면 세자 양녕은 10세 때 세자가 됐다가 25세 때 폐세자 됐다. 15년을 세자로 있으면서 최고 교육을 받았지만, 간신배들과 주색잡기에 휘둘리다 폐세자 됐다.

<대학연의>에서는 주색잡기에 대한 경계로 ‘침면지계(沈湎之戒)’를 들고 있다. 술과 여자 그리고 간신배들에게 빠졌다가 나라를 망친 은나라 주왕 이야기가 ‘침면지계’이다. ‘침면지계’를 수없이 들어 알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실천하지 못해 자기 자신은 물론 가정과 나라를 파탄시키는 사람들이 고금에 즐비하니 슬픈 일이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24.  ‘요동정벌’ 이성계, 왕자의 난을 당하다 

-총신(寵臣) 지키려다 애자(愛子) 잃은 임금  


태조, 외교문서 문구 트집잡아 정도전 압송 요구하는 명(明)의 요구 거부

… 장고(長考) 끝에 꺼내든 요동정벌, 정안대군에게 정변 일으킬 빌미 제공



홍무제의 압송 요구를 피하기 위해 요동정벌 카드를 꺼내 들었던 정도전은 정적 이방원에게 무인정사(戊寅定社)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 정안대군 이방원(유동근 분)이 자신의 심복인 하륜(임혁 분, 오른쪽)·이숙번(선동혁 분)과 함께 정도전을 치러 가고 있다.


1396년(태조 5) 2월 9일,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 예부(禮部)의 외교문서를 접수하고 큰 충격에 빠졌다. 한 해 전 태조가 보낸 외교문서에 명나라 황제 홍무제가 크게 분노해 조선 사신을 억류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신을 억류했다는 것은 다음 단계로 조선과의 전쟁까지도 각오했음을 의미했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 초상. 그는 조선왕조 창업공신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과 정치적 갈등을 겪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395년 10월 10일, 태조는 명나라 황제에게 다가오는 신년을 축하할 목적으로 하정사(賀正使)를 파견했다. 그 하정사 편에 황제의 신년을 축하하는 표문(表文)과 황태자의 신년을 축하하는 전문(箋文)을 함께 보냈다. 표문과 전문은 전례에 따라 작성했으며 당시의 실력자 정도전이 총괄했다.

하정사를 파견할 때만 해도 양국 사이에 특별한 외교 갈등이 없었다. 태조와 정도전은 조선 건국 이전부터 공민왕의 친명 노선을 지지하던 입장이었다. 당연히 조선 건국 이후에도 양국 간의 친선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크게 노력했다. 태조는 즉위 바로 다음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려의 멸망을 알리면서 자신의 즉위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새로 건국한 나라의 이름까지 명나라 황제가 결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홍무제는 태조의 즉위를 공인했고, 나아가 나라 이름도 ‘조선’으로 확정해주기까지 했다.

이런 배경에서 태조는 한 해 전 10월에 하정사를 보냈고, 11월에는 자신의 고명(誥命: 국왕 임명장)과 인신(印信: 국왕 도장)을 요청하는 사신도 보냈다. 그때만 해도 태조는 홍무제가 기꺼이 고명과 인신을 보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1396년 2월 9일에 접수한 명나라 예부의 외교문서는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그 문서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신년 축하차 보낸 표문과 전문이 문제였다. 홍무제는 그 문서 안에 자신을 모욕하고 희롱하는 글귀가 있다고 오해하고 대로했다. 분노한 홍무제는 조선 사신을 조사해 정도전이 표문과 전문을 총괄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홍무제는 조선 사신을 억류하고 일부만 귀국하게 했는데 그 편에 외교문서를 보내면서 정도전 압송(押送)을 요구했던 것이다. 홍무제는 만약 정도전을 압송하지 않으면 군대를 일으키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황제의 오만방자한 횡포와 협박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최영 등을 제거하고 조정을 장악했다. 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둥 등의 사이에 있는 위화도 전경 


당연히 태조는 크게 고민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조는 도대체 어떤 글귀가 홍무제를 분노하게 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정도전도 마찬가지였고, 조정 중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공민왕 이래의 관행대로 쓴 표문이고 전문인데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홍무제는 왜 그렇게 분노했단 말인가? 이유 없이 분노했다면 괜한 생트집을 잡으려는 것이 아닐까? 분명한 이유 없이 생트집을 잡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쩌면 전쟁 명분을 쌓기 위한 술수인가? 만약 그렇다면 조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의문과 고민으로 태조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당시 상황에서 태조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만약 홍무제가 진정으로 전쟁 명분을 쌓고자 생트집을 잡는다면 그에 대비해 정도전을 보호하며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반대로 정말로 어떤 글귀에 분노했다면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야 했다.

명나라와 전쟁 준비냐 아니면 정도전을 보호하느냐 양자택일을 두고 고민하던 태조는 우선 홍무제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했다. 태조는 지난번의 표문과 전문은 정도전이 총괄한 것이 아니라 정탁과 김약항이 썼다고 하는 해명서와 함께 김약항을 명나라로 압송해서 보냈다. 정탁은 병이 들어 압송하지 못한다고 했다. 김약항은 2월 15일 명나라로 갔다. 명나라 예부의 외교문서를 접수한 지 6일 만이었다.

정도전을 대신해 죽음의 길에 나서게 된 김약항을 딱하게 여긴 태조는 “그대를 아까지 않음은 아니나, 여러 번 명나라의 명령을 어겼기에 해명하고자 보내는 것이니 그대는 좋은 말로 대답하고 실수가 없도록 하라”는 위로 겸 당부를 했다.

당시 한양에서 명나라 수도 남경까지 갖다 오려면 빠른 길로 대략 넉 달이 걸렸다. 따라서 김약항을 압송한 결과를 알기 위해서는 넉 달 정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알기도 전에 더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전년 11월에 고명과 인신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했던 사신 중 일부가 3월 29일에 귀국했다. 이번에도 홍무제는 표문의 내용을 문제삼아 조선 사신을 억류하고 일부만 귀국시켰다. 그들 편에 보낸 친서에서도 홍무제는 태조를 가리켜 “간악하고 간사하며 교활하고 사특하다”고 맹비난했다. 아무리 대국의 황제라고 해도 이웃나라의 국왕에게 이런 비난을 쏟아내는 것은 이만저만 외교결례가 아닐 수 없었다. 설상가상 명나라 예부의 외교문서에는 이런 내용까지 있었다.

“지금 조선은 명절을 당할 때마다 사람을 보내 표문과 전문을 올려 축하하니 마치 예의가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문장 사이에는 경박하고 모욕하는 표현이 있다. 근자에 국왕의 고명과 인신을 요청하는 표문을 보냈는데 그중에 주(紂: 은나라의 폭군) 임금의 일을 인용했으니 더더욱 무례하다. 그것은 혹 조선 국왕의 본의인가? 아니면 신하의 희롱과 모욕인가? 또는 조선 국왕의 인신이 표문에 찍히지 않아서 조선 사신이 중도에 조작한 것인가? 모두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파견한 사신을 돌려보낼 수 없다. 만약 표문을 짓고 교정한 인원을 모두 보낸다면 사신을 돌려보내겠다.”[<태조실록> 권9, 5년(1396) 3월 29일] 



명태조 주원장(홍무제)의 초상


위의 내용은 매우 엄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홍무제는 1395년 10월의 표문에 이어 11월에 보낸 표문에도 자신을 모욕하고 희롱하는 글귀가 있다고 오해하고, 그 글귀가 누구의 작품인지 집요하게 캐물었던 것이다. 즉 그 글귀가 조선국왕 즉 태조의 본의인지, 아니면 신하 즉 정도전의 장난인지, 아니면 조선 사신의 조작인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태조에게 분명히 해명하라는 주문이었다.

더구나 홍무제는 자신을 모욕하고 희롱하는 글귀 작성에 연루된 모든 사람을 명나라에 압송하라 요구했는데 이는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오만방자한 횡포이자 협박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만약 태조가 연루됐다면 태조마저도 압송하라는 요구와 마찬가지인데 이런 요구는 인접국의 국왕에게 강요하기 어려운 외교 결례였다.

앞뒤 정황으로 볼 때, 당시 홍무제는 지난해 10월의 표문과 11월의 표문 모두를 정도전이 작성한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홍무제는 혹 태조가 이런 사정을 잘 모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고, 그래서 정도전의 잘못을 지적하며 반드시 그를 압송하라 요구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정도전을 보호하기 위해 그 대신 김약항을 압송한 것이 홍무제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타오르게 할 것임을 예고했다. 분명 홍무제는 자신을 모욕하고 희롱하는 글귀를 표문에 넣은 장본인이 정도전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신이 직접 밝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홍무제의 뿌리깊은 ‘승(僧)·적(賊)’ 콤플렉스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세제(世弟)의 위(位)에 오르고 있는 정안대군 내외. 정안대군(유동근 분)의 오른쪽은 훗날 원경왕후가 되는 민씨 부인(최명길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가 정도전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표문 작성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며 다른 사람을 보낸다면 홍무제는 분명 태조가 자신을 속이려 한다고 생각하며 더더욱 분노할 것이었다.

1396년(태조 5) 6월 11일, 명나라 사신 일행이 한양에 도착했다. 태조가 정도전 대신에 압송한 김약항이 남경에 도착해 제출한 해명서를 받아본 후에 홍무제가 보낸 사신이었다. 예상대로 홍무제의 분노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홍무제는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기왕의 요구를 되풀이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명나라에 억류한 조선 사신들의 가족도 함께 압송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이런 요구 이외에 홍무제는 태조에게 의외의 제안을 했다. 혼인을 맺자는 제안이었다. 자신에게는 손녀가 많이 있고 태조에게는 손자가 많으니 이들 중의 한 명을 서로 혼인시키자는 것이었다. 요컨대 혼인동맹을 맺자는 제안이었다.

홍무제가 정도전을 압송하라 요구하면서 혼인동맹을 제안한 이유는 분명했다. 태조의 본심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홍무제는 두 차례 표문을 정도전의 장난이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보낸 해명서에는 정도전이 전혀 관계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해명서는 태조의 본의인가, 아니면 정도전의 장난인가? 만약 태조의 본의가 그렇다면 결국 자신을 모욕하고 희롱한 글귀는 그 같은 태조의 본의를 받아 정도전이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태조가 자신을 모욕하고 희롱한 주범이며, 그것은 곧 태조가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므로 결국 자신의 혼인동맹을 거절하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물론 전쟁이었다.

반대로 태조의 본의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결국 자신을 모욕하고 희롱한 글귀는 정도전의 장난이 될 수밖에 없었고, 태조는 그런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그런 사실을 알게 된 태조가 자신의 혼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정도전을 압송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물론 양국 간의 평화우호였다. 결국 홍무제는 태조에게 전쟁이냐 아니면 정도전이냐 양자택일을 강요한 셈이었다.

이런 강요에 조정 신료들은 두 편으로 갈렸다. 한쪽은 정도전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쪽은 보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쪽은 물론 정도전과 그 측근들이었다. 반면 보내야 한다는 쪽은 정안군 즉 이방원과 그 측근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 사람들은 홍무제를 그토록 분노하게 만든 글귀가 도대체 무엇인지, 또 무엇 때문에 홍무제가 그런 글귀에 그토록 분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훗날 알려진 일이지만 홍무제의 어릴 적 경험이 문제였다. 홍무제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려서 고아가 됐다. 살길이 없자 어린 홍무제는 스님이 돼 걸식하며 살았다.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홍건적에 투신했다. 이렇게 살다 보니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황제가 된 후 홍무제는 자신의 과거와 미천한 공부에 큰 열등감을 느꼈다.

이 결과 홍무제는 자신에게 올라오는 상소문에 스님을 의미하는 승(僧) 또는 도적을 의미하는 적(賊) 같은 글자를 보면 과민 반응했다. 뿐만 아니라 승과 같은 중국 발음인 생(生) 또는 적과 같은 중국 발음인 칙(則)이라는 글자에도 지나치게 민감했다. 지식인들이 자신을 중이나 도적으로 멸시하며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 홍무제가 황제에 오른 후, 명나라에서는 승·적·생·칙 같은 글자가 들어간 상소문을 홍무제에게 올렸다가 이유도 모른 채 죽어나간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제 발로 명에 간 이방원 측근 하륜과 권근



<용의 눈물>에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정도전(김흥기 분)과 신덕왕후 강씨(김영란 분). 정도전·남은 등에 힘입어 세자로 책봉된 신덕왕후의 막내아들 방석(의안대군)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목숨을 잃었다.



홍무제가 정도전을 압송하라 요구한 것도 사실은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정도전이 명나라에 가서 앞뒤 정황을 잘 설명하면 해명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하는 정도전은 절대로 명나라에 가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실록에 의하면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무슨 사정인지 정도전에게 중병이 들었다고 한다. 배가 마치 북처럼 부풀어오르는 병이었다. 이것은 진짜일 수도 있었지만 꾀병일 수도 없었다. 어쨌든 태조는 일단 이것을 핑계로 정도전을 보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명나라 사신은 정도전이 완쾌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며 한 달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정도전의 핵심 측근인 남은은 절대 정도전을 보내면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태조는 강제로 정도전을 압송하든가 아니면 홍무제의 요구를 딱 잘라 거절하든가 결단을 내려야만 했지만 그렇게 못하고 시간만 끌었다.

그때 과감하게 먼저 결단을 내리고 움직인 사람들은 정안군 즉 이방원 쪽 사람들이었다. 정안군의 핵심 참모인 하륜이 명나라에 직접 가서 해명하기로 한 것이었다. 아울러 권근 역시 표문을 지은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고 해명하겠다며 자청하고 나섰다. 하륜과 권근 등은 1396년(태조 5) 7월 19일 한양을 떠나 남경으로 향했다. 명 사신이 정도전 압송을 요구한 지 한 달여 만이었다.

하륜과 권근의 명나라행(行)은 두 가지 면에서 정안군에게 큰 기회였다.

첫째는 대의명분에서 정도전 쪽을 압도할 수 있었다. 홍무제의 압송 요구에 정도전은 겁을 먹고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반면 하륜과 권근은 압송요구가 없는데도 자청해 갔다. 당연히 정도전은 겁쟁이가 됐고 하륜과 권근은 용기 있는 사람이 됐다.

둘째로 홍무제가 문제삼는 표문의 글귀가 괜한 생트집인지 아니면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이 명나라와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기에 앞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정보였다. 이런 핵심 정보를 정도전 쪽이 아닌 정안군 쪽 사람들이 먼저 확보하게 된다는 것 자체가 정안군에게 큰 기회였다.

하륜과 권근은 9월 11일, 남경에 도착했고 곧 홍무제를 만났다. 그때 홍무제는 하륜에게 왜 정도전은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하륜은 병 때문에 못 왔다고 하면서 그 대신 권근이 자청해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홍무제는 권근에게 조선에서 보낸 표문을 꺼내 보이면서 “조선의 몇몇 유생이 감히 나를 희롱하고 모욕하는 글귀를 지어 두 나라 사이의 틈을 만들고 백성의 재앙을 일으킨단 말인가?” 하고 따졌다.


“정도전을 보내지 않겠다면 전쟁 각오해라”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옥좌에서 물러난 태조 이성계가 국사(國師) 무학대사(박병호 분, 오른쪽에서 둘째)와 여진족 출신의 의제(義弟) 퉁두란(佟豆蘭, 강인덕 분)의 위로를 받고 있다


이로 본다면 홍무제는 괜한 생트집을 잡는 것이 아니라 표문의 특정 글귀를 문제삼는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때 홍무제는 표문의 특정 글귀를 가리키며 따졌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건대 하륜과 권근은 남경에 도착한 직후 홍무제가 왜 표문을 문제삼는지 은밀하게 탐문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열등감의 발로라는 사실도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 준비가 있었기에 하륜과 권근은 홍무제의 물음에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대응할 수 있었다.

권근의 신도비명에 의하면 홍무제의 질문에 권근은 “소국이 대국을 섬기려면 표문이 없으면 되지 않는데 신 등은 저 바다 귀퉁이에서 성장해 배운 것이 신통치 못한지라 우리 왕의 충성을 황제에게 각별히 아뢰지 못했는데 이는 진실로 신 등의 죄이지 우리 국왕의 죄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권근은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한 사실을 들어 태조 이성계는 절대로 홍무제를 희롱하거나 모욕할 사람이 아니라고 누누이 변명했다. 이런 해명 덕분에 홍무제는 태조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

그렇지만 정도전에 대한 의심을 풀지는 않았다. 그것은 하륜과 권근이 태조를 위해서는 적극 해명했지만 정도전에 대해서는 병들었다는 말 이외에는 해명하지 앉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태조에 대한 의심이 풀렸다고 판단한 하륜은 먼저 귀국길에 올라 11월 4일 한양에 도착했다. 홍무제는 하륜 편에 외교문서를 보냈는데 그 문서에서 남경에 억류한 조선 사신들을 석방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뒤이어 1397년(태조 6) 3월 8일에 권근도 무사히 귀국했다. 이렇게 해서 홍무제의 오해에서 비롯된 표문 문제는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일이 또 벌어졌다. 홍무제가 제안한 혼인 문제 때문이었다. 1396년(태조 5) 6월 11일에 도착한 명나라 사신을 통해 홍무제의 혼인 제안을 받은 태조는 그에 대한 회답 사신을 11월 23일에 보냈다. 그 당시는 하륜이 귀국해 홍무제의 오해가 풀렸음을 알렸기에 혼인 제의를 수락한다는 의미로 말 12필을 선물로 보냈다. 이 말들은 1367년(태조 6) 봄 남경에 도착했다.

홍무제는 자신이 직접 말들을 조사했는데 말안장 등에서 천(天) 자를 거꾸로 쓰고 또 현(玄)과 십(十)자를 쓴 종이가 발견됐다. 이를 본 홍무제는 “저 사람들이 어째서 나를 이렇게 무시한단 말인가?”라며 대로했다.

말안장에 글자를 쓴 종이가 첨부된 이유는 말을 구별하기 위해 천자문을 써 붙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홍무제는 곡해(曲解)했다. 거꾸로 씌어진 천(天) 자를 보고 분노했다는 사실에서 홍무제는 태조가 자신을 죽게 하거나 희롱하고자 이렇게 했다고 의심했던 듯하다.

홍무제는 곧바로 혼인 파기를 선언하면서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외교문서를 태조에게 보냈다. 만약 정도전을 압송하지 않으면 전쟁을 불사한다는 협박도 있었다. 심지어 홍무제는 분풀이 차원에서 명나라에 억류했던 조선 사신들을 집단 처형하기까지 했다.


‘요동정벌’은 무지와 오해의 소산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


정도전 압송을 요구하는 홍무제의 문서가 조선에 도착한 시점은 1397년(태조 6) 4월 17일이었다. 다음해 5월까지 홍무제는 정도전 압송을 요구하는 문서를 수 차례 보냈으며 협박 수위도 점점 높였다. 홍무제는 조선에서 오는 표문은 모두 정도전의 장난이라 확신했고 그 확신에서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은 점점 높아졌다.

따라서 태조가 전쟁을 피하려면 정도전을 보내 해명하는 것이 제일 좋은 수였다. 하지만 정도전은 명나라에 가면 죽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가려 하지 않았다. 무지와 공포의 소산(所産)이었다. 정도전은 명나라로 가는 대신 다른 수를 들고 나왔다.

첫째는 정안군 일파의 숙청이었다. 정도전은 자기 대신 명나라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온 권근을 모함하고자 했다. 다른 사신들은 처형됐는데 권근만 살아 돌아온 것은 뭔가 수상하다는 명분이었다. 만약 이 모함이 성공한다면 자신을 명나라로 압송하라는 정안군 일파의 주장은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태조는 권근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숙청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도전은 둘째로 요동정벌을 들고 나왔다. 명분은 국가 자존심과 영토회복 등 거창했다. 하지만 정도전에게 요동정벌은 크나큰 자기모순이었다. 고려 말에 정도전은 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을 망국의 전쟁이라 반대하며 위화도회군을 주도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요동정벌을 들고 나온 것은 명나라로 압송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술책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당연히 요동정벌에 대한 반대가 드높았다.

하지만 태조는 정도전의 요동정벌에 적극 동조했는데 이 또한 무지와 공포의 소산이었다. 1398년(태조 7) 6월부터 태조는 요동정벌 준비에 들어갔다. 자연히 반대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런 갈등 상황에서 1398년(태조 7) 8월 26일 정안군은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살해하고 태조를 왕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명분은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준비하며 왕자들을 몰살시키려 했다는 것이었다.

돌아보면 제1차 왕자의 난 직전에 제기된 정도전의 요동정벌은 무지와 오해의 소산이었다. 정도전은 홍무제가 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생트집을 잡으려 표문을 문제삼는다고 오해했다. 그래서 그런 홍무제에게 갔다가는 변명도 하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하리라는 공포심에 떨다가 요동정벌을 들고 나왔다.

<대학연의>는 무지와 오해에 대한 경계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제시한다. 세상에 대해 무지하거나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을 잘 살펴 정확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 격물치지이다. 하지만 역사상 수많은 인물이 자신의 이익과 공포에 사로잡혀 격물치지를 제대로 못하고 무지와 오해에 떨다가 패가망신했으니 슬픈 일이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